시편 풀어 읽기 · 36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자기 눈과 하나님의 빛

시편 36편은 사람의 눈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빛으로 나아갑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악인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눈은 이상하게도 자신의 죄악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나머지, 자기 행동의 잘못을 발견하고 미워하는 일조차 하지 못합니다. 반면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당신의 빛 안에서 저희는 빛을 봅니다」라고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시편 36편은 단순히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는가에 따라 인간의 판단과 삶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네 절은 악인의 내면을 집요하게 들여다봅니다. 반역의 속삭임, 자기기만, 거짓된 말, 잠자리에서 꾸미는 악한 계획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독자는 점점 악인의 좁고 어두운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6절에서 갑자기 시야가 열립니다.

시인은 악인의 내면을 더 분석하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의 인애는 하늘에 있고」라고 노래하며 하늘과 구름, 산과 깊은 심연을 바라봅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날개 그늘과 풍성한 집, 즐거움의 시냇물과 생명의 샘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악이 무엇인지 충분히 보았지만, 악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앞선 시편 35편에서 다윗은 자신을 해치는 사람들의 거짓말과 교만을 고발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을 구했습니다. 시편 36편은 그 문제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바라봅니다. 사람은 어째서 자신이 행하는 악을 정당화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시편의 흐름은 분명합니다. 2–5절은 악인의 세계를, 6–10절은 여호와야훼의 세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11–13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어느 세계에 속하여 살아가기를 원하는지 기도합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836편 본문 읽기 →

반역이 말을 걸 때 — 악의 시작

시편 36:1–3 본문 →

반역이 악인에게 하는 말이 내 마음속에 있다. 그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시편 36:2 · 본디새김

첫 문장부터 낯설게 느껴집니다.

보통 반역은 사람이 저지르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역이 말을 합니다. 마치 독립된 인격처럼 악인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입니다. ‘반역’은 단순한 실수나 잘못을 넘어, 마땅히 지켜야 할 관계와 권위를 거스르는 행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낱말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를 나타낼 때에도 사용됩니다.

더욱 특이한 것은 ‘하는 말(⁨נְאֻם⁩)’에 해당하는 표현입니다. 이 히브리어 표현은 권위 있는 선언이나 신탁을 소개할 때 사용되며, 예언서에서는 하나님의 선언을 전달하는 표현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시편 110:1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선언을 소개하는 데 쓰입니다. 그런데 시편 36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반역의 말이 등장합니다.

반역이 마치 권위 있는 선언을 하는 것처럼 묘사된 것입니다.

이것은 악이 단순히 순간적인 욕망이나 우발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악은 사람에게 어떤 판단을 제시하고, 그 판단을 옳은 것처럼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말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삶과 행동을 판단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그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감정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을 넘어서는 판단의 기준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다음 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설명합니다.

그가 자기 눈에 스스로를 너무 치켜세워, 자기 죄악을 찾아내 미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시편 36:3 · 본디새김

시인은 악인이 자신의 잘못을 알고도 언제나 의도적으로 무시한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왜곡되어, 자기 잘못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설명을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남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상대방이 먼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부당한 이익을 얻었다면 그 정도는 당연한 보상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일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죄를 지었다는 사실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 행동을 바로잡을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3절의 히브리어는 문장 관계가 간결하고 모호하여 다른 읽기도 가능합니다. 악인이 스스로에게 아첨한 결과 자기 죄악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해석이 있는 반면, 자기 죄가 드러나거나 미움받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는 뜻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앞 절의 ‘반역’이 그를 부드러운 말로 유혹하는 주체라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디새김은 자기기만이 죄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는다는 방향으로 옮겼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공통된 모습이 있습니다. 악인은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일에서 진실을 피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악의 뿌리를 외적인 행동보다 먼저 인간의 시선에서 찾습니다.

자신을 언제나 옳은 사람으로만 바라보는 눈은, 결국 자신에게서 고쳐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왜곡된 판단은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에는 번역상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분명히 ‘내 마음속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를 시인이 자기 마음속에서 악인의 상태를 깨달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악인의 마음속으로 이해하거나 그와 비슷한 의미가 되도록 문장을 해석합니다. 또한 반역의 말이 정확히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은 ‘내 마음속에’를 유지하면서 반역이 악인에게 말을 건다는 구조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시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른 악에 대한 통찰을 독자에게 들려주는 셈입니다. 그는 악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실제로 들었다고 주장하기보다, 그 행동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태도를 한마디의 선언으로 표현합니다.

악이 사람의 하루를 차지하다

시편 36:4–5 본문 →

그 입의 말은 악행과 속임수다. 그는 슬기롭게 행동하고 선을 행하기를 그만두었다.시편 36:4 · 본디새김

2–3절이 악인의 내면과 판단을 다루었다면, 4절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진실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악행과 속임수가 그의 말에 자리 잡습니다.

히브리어의 ‘슬기롭게 행동하다(⁨שָׂכַל⁩)’는 단순히 머리가 좋거나 지식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황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그에 맞게 처신하는 지혜로운 행동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이 절은 악인이 지적인 능력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을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악한 계획을 꾸미는 데에도 상당한 지적 능력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계획을 얼마나 능숙하게 세우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 계획이 어떤 목적을 향하는지도 중요합니다.

그는 잠자리에서 악행을 궁리하고, 좋지 않은 길에 자리를 잡으며, 악을 거부하지 않는다.시편 36:5 · 본디새김

잠자리는 하루의 활동을 멈추고 쉬는 자리입니다. 시편 4:5에서는 잠자리에 누워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잠잠히 있으라는 권면이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잠자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공간입니다. 반면 시편 36편의 악인은 잠자리에서 남에게 해를 끼칠 일을 계획합니다.

그에게는 행동하지 않는 시간조차 악을 준비하는 시간이 됩니다.

그러나 5절의 마지막 두 표현은 그가 계속 생각만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자리를 잡는다’는 말은 어떤 길 위에 스스로를 세우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연히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가 곧 돌아오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길에 머물기로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또한 ‘악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소극적으로 들리지만 의미는 무겁습니다. 악이 자신 앞에 놓였을 때 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도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2–5절에는 하나의 흐름이 나타납니다. 반역의 말이 사람의 판단을 지배하고, 왜곡된 판단이 거짓된 말로 나타나며, 그 말과 생각이 악한 계획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악한 길에 자신을 세우게 됩니다. 시인은 악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모습보다, 인간의 내면과 말과 행동을 차례로 차지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시의 방향이 갑자기 바뀝니다.

악인의 세계를 더 깊이 파고들 것 같았던 시인은 시선을 하늘로 들어 올립니다.

악인의 좁은 세계에서 하나님의 광대한 세계로

시편 36:6–7 본문 →

여호와야훼여, 당신의 인애는 하늘에 있고, 당신의 신실함은 구름까지 이릅니다.시편 36:6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특별한 전환을 알리는 접속사나 설명이 없습니다.

악인이 잠자리에서 악을 궁리한다는 말을 마치자마자, 시인은 곧바로 여호와야훼의 인애를 노래합니다.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환할까요?

앞부분에서 악인은 계속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눈, 자신의 입, 자신의 잠자리, 자신이 선택한 길이 등장했습니다. 그 세계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시야가 하늘과 구름까지 넓어집니다. 7절에서는 높은 산들과 거대한 심연이 등장합니다.

악인의 작은 세계와 하나님의 광대한 세계가 강렬하게 대조됩니다.

당신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당신의 판결은 거대한 심연입니다. 여호와야훼여, 당신은 사람과 짐승을 구하십니다.시편 36:7 · 본디새김

인애, 신실함, 의로움, 판결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무관한 덕목을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세상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먼저 ‘인애’는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한결같은 사랑과 성실한 돌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입니다. 그다음의 ‘신실함’은 믿을 만함, 흔들리지 않는 성실함을 나타냅니다. 두 낱말이 나란히 놓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단순한 호의나 일시적인 감정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되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사랑을 하늘과 구름에 연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애가 멀리 있어서 인간에게 닿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쉽게 재거나 제한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다는 표현입니다.

이어지는 두 이미지는 방향을 바꿉니다. 높은 산은 견고하고 거대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거대한 심연’은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물의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낱말은 창세기 1:2의 깊은 물과도 연결되는 낱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높이 솟은 산처럼 견고하고, 하나님의 판결은 깊은 심연처럼 광대하고 깊습니다. 여기서 심연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그분의 판단이 인간의 좁은 기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크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앞부분의 악인과도 대조됩니다. 악인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합니다. 자기 잘못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시야가 좁아졌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의로움과 판결은 하늘에서 깊은 심연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스스로 설정하는 기준보다 훨씬 넓은 차원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대한 묘사는 예상하지 못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도 구하십니다.

악인의 교만과 거짓을 고발하던 시인이 어째서 갑자기 짐승을 언급할까요? 앞부분의 악인은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돌보심은 인간의 세계만으로도 제한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9:9–10에서 하나님은 홍수 이후 노아와 그의 자손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는 살아 있는 모든 생물과도 언약을 세우십니다. 시편 104:27–30에서는 여러 생물이 하나님께 먹을 것을 바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시편 36:7의 ‘구하십니다’를 모든 동물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로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돌보시는 일까지 포함하는 구원의 넓은 의미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인간이 만든 작은 이해관계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의로운 돌보심은 사람과 짐승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까지 미칩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처럼 광대한 하나님을 노래한 뒤, 다시 인간이 몸을 의지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장소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의 산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 속한 산들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산의 웅대함을 강조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높은 산은 견고하고 거대한 것을 나타냅니다.

하늘에 이르는 인애가 날개 그늘이 되다

시편 36:8 본문 →

하나님, 당신의 인애가 얼마나 귀한지요. 사람들은 당신의 날개 그늘에 몸을 피합니다.시편 36:8 · 본디새김

여기서 6절의 ‘인애’가 다시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하늘에 있는 인애였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 아래에 몸을 피하는 날개 그늘로 나타납니다. 하늘과 구름에 이를 만큼 광대한 하나님의 인애가, 사람 한 명이 그 아래로 들어가 몸을 숨길 수 있는 그늘이 됩니다.

높고 거대한 것이 동시에 가깝고 안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날개 그늘’은 여러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어미 새가 새끼를 날개 아래 보호하는 장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성소의 지성소에는 속죄소를 덮는 그룹들의 날개가 있었으므로(출애굽기 25:20), 성소와 하나님의 임재를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의 핵심은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이 그분의 보호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룻기 2:12에서도 보아스는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날개 아래로 피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때 룻은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모압 여성이었습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삭을 주워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룻에게 여호와야훼의 날개는 추상적인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낯선 땅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시편 36편에서도 하나님의 날개 그늘은 실제적인 위협과 연결됩니다. 마지막에 시인이 교만한 발과 악인들의 손에서 자신을 지켜 달라고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모든 위험을 미리 없애 주셔서 피할 필요 자체가 없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피할 곳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피하는 곳이 하나님의 날개 그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애는 세상의 위험과 동떨어진 아름다운 성품이 아닙니다. 위협받는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보호의 근거입니다.

시인은 이 보호의 이미지를 더욱 풍성하게 발전시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무엇이 있는가

시편 36:9–10 본문 →

그들은 당신 집의 기름진 것으로 배부르며, 당신은 당신의 즐거움의 시냇물을 그들에게 마시게 하십니다.시편 36:9 · 본디새김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몸을 피한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집에서 배부르게 먹고 마십니다.

여기에는 공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악인은 자기 잠자리에서 악행을 궁리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풍성한 것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집은 그분의 임재와 예배의 장소인 성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동시에 9절의 음식과 물 이미지는 손님을 풍성하게 대접하는 집주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고대 사회에서 누군가의 집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단순히 지붕 아래 들어간다는 뜻만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제공하는 음식과 보호를 누리는 관계에 들어가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기름진 것’은 풍성함과 좋은 몫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부족한 것을 겨우 채우는 수준을 넘어 넉넉히 공급받는 모습입니다. ‘즐거움의 시냇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만 간신히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그분의 공급에는 기쁨과 풍요가 있습니다.

악인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자기 안으로 시선을 집중합니다. 반면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풍요를 받아 누립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확보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그분이 주시는 것을 마시는 사람입니다.

10절은 그 풍요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밝힙니다.

생명의 샘이 당신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빛 안에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 · 본디새김

‘생명의 샘’이라는 표현은 물이 생존의 필수 조건인 세계에서 특별한 울림을 지닙니다. 비가 적은 시기에도 계속 솟아나는 샘은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했습니다.

시냇물은 흘러가지만, 샘은 물이 솟아나는 근원입니다.

9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냇물을 마십니다. 10절에서는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힘과 가능성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고백입니다.

예레미야 2:13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시며, 자기 백성이 그분을 버리고 물을 담아 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팠다고 책망하십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생명을 확보하려는 일이 문제입니다. 시편 36편에서는 반대로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들이 생명의 샘을 누립니다.

이어서 시인은 물에서 빛으로 이미지를 바꿉니다. 「당신의 빛 안에서 저희는 빛을 봅니다」라는 표현은 시편 전체를 다시 읽게 만듭니다.

2절에서는 악인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었습니다. 3절에서는 악인이 자기 눈에 스스로를 높여 자신의 죄악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하나님의 빛 안에서 빛을 봅니다.

여기서 빛은 단순히 지적인 지식이나 정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시적 언어에서 빛은 생명, 기쁨, 구원,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와 연결됩니다. 시편 27:1에서는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빛과 구원이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56:14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빛 가운데 걷는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빛 안에서 빛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밝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36편의 문맥에서는 그 말이 인간의 인식과도 연결됩니다. 자신의 눈만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자기 죄악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의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살아갈 생명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별할 빛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둘의 근원이 모두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조금 더 깊이

‘즐거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기쁨과 풍요를 뜻하는 계열의 말입니다. 에덴이라는 이름과도 언어적으로 연결되는 표현이어서 창세기 2장의 풍요로운 동산과 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에덴동산을 직접 가리킨다고 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의 여러 이미지 가운데 물과 빛은 성경 전체에서도 생명을 나타내는 중요한 언어가 됩니다. 예레미야 2:13의 생수의 근원과 이사야 60:19–20의 여호와야훼께서 영원한 빛이 되신다는 약속은 그 주제를 구약 안에서 발전시킵니다. 신약의 요한복음 1:4–9 역시 생명과 빛을 연결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읽지만, 이것은 시편 36편이 먼저 노래한 하나님의 생명과 빛을 후대에 그리스도론적으로 이해한 연결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 계속 필요한 것

시편 36:11 본문 →

당신을 아는 이들에게 당신의 인애를, 마음이 곧은 이들에게 당신의 의로움을 계속 베풀어 주십시오.시편 36:11 · 본디새김

이제 찬양이 기도로 바뀝니다.

시인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애와 의로움을 확신에 차서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인애와 의로움을 계속 베풀어 달라고 구합니다. 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요청할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안다는 것이 앞으로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에 앞으로도 그분의 돌보심을 필요로 한다고 고백합니다. ‘계속 베풀어 주십시오’는 본래 끌어당기거나 길게 뻗게 하는 의미와 연결되는 명령형입니다.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인애가 그분을 아는 사람들에게 계속 이어지기를 구하는 말입니다.

‘당신을 아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인정하고, 그분과 맺은 관계에 따라 살아가는 일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2:15–16에서 여호와야훼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송사를 공정하게 판결한 요시야를 두고, 그것이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이 실제 삶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시편 36편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마음이 곧은 이들’과 나란히 등장합니다. 앞부분의 악인은 자기 눈에 스스로를 높였고, 그 결과 자신의 죄악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마음이 곧은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단순히 많은 것을 아는 능력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올바른 방향을 향하도록 살아가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곧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받을 자격을 완성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그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인애와 의로움이 계속 베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의 인애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8절에서는 그 인애가 얼마나 귀한지 찬양했습니다. 이제 11절에서는 그 인애가 자신의 삶 속에 계속 이어지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고백이 일상의 지속적인 돌보심을 구하는 기도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상을 위협하는 세력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만한 발과 악인의 손

시편 36:12–13 본문 →

교만한 발이 저를 덮치지 못하게 하시고, 악인들의 손이 저를 떠돌게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시편 36:12 · 본디새김

시인은 다시 처음에 등장했던 악인들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하늘과 구름, 산과 심연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집에서 배부르게 먹고 마시며, 생명의 샘과 빛을 노래했던 시인이 이제 자신의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교만한 사람들과 악인들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악인은 ‘좋지 않은 길에 자리를 잡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악인의 발이 다른 사람을 위협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잘못된 길이 다른 사람의 삶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또한 ‘떠돌게 하지 못하게’라는 표현은 한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밀려나거나 쫓겨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8–9절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 피하고, 그분의 집에서 풍성하게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손은 시인을 그 자리에서 밀어내려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머무르기를 바라는 사람과, 그를 삶의 자리에서 쫓아내려는 사람들의 대립이 마지막 기도에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애를 노래하는 일과 현실의 위험을 인정하는 일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인애가 하늘에 이를 만큼 크다고 믿는 사람도 자신의 삶이 무너질까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생명의 샘이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악인들의 손에서 자신을 지켜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는 문장의 시제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거기서 악행을 일삼는 자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들은 밀쳐져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시편 36:13 · 본디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악인들이 이미 쓰러진 것처럼 말합니다. 실제로 경험한 악인들의 몰락을 회상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시인이 바라는 하나님의 판결을 마치 눈앞에서 이루어진 일처럼 확신에 차서 묘사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 ‘거기서’라는 표현은 장소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앞에서 특정한 전쟁터나 재판 장소가 제시된 것도 아닙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마치 독자에게 어떤 장면을 가리켜 보여 주듯이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5절에서 악인은 ‘좋지 않은 길에 자리를 잡으며’ 악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 위에 단단히 서 있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가 쓰러져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악인이 스스로 선택한 길은 그를 영원히 지탱해 주지 못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악인의 추락을 길게 묘사하거나 그 고통을 즐기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악인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마지막에는 그들의 몰락을 몇 마디로 끝내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시편의 마지막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시편의 중심을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그 중심에는 이미 하나님의 인애와 의로움, 생명의 샘과 빛이 놓여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히브리어에는 완료된 일을 나타내는 동사 형태들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경험한 몰락의 회상으로 읽는 근거가 됩니다. 반면 앞 절의 기도와 연결하면, 확신에 찬 묘사로 읽게 됩니다.

하나님의 빛 안에서 다시 보이는 세계

시편 36:1–13 본문 →

시편 36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일’에 관한 시이기도 합니다.

악인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면서도 피조물의 생명을 돌보시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피할 곳을 주십니다. 높으심이 다른 존재를 짓누르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존하고 살리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시편 36편을 오늘 읽는 사람은 악인이 누구인지를 주변에서 찾아내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악인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 주지만, 그 모습이 자신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가정할 근거를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목적은 독자를 자기혐오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악을 발견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시인이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빛입니다.

처음에 악인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었고, 자신의 죄악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어둠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고, 구름과 높은 산과 깊은 심연을 바라봅니다.

마침내 그의 시선은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내려옵니다.

시인은 여전히 악인의 위협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악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이미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악인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안전한 세계가 아닙니다.

악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도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애를 계속 베풀어 주시기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눈에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은 점점 자기 세계에 갇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 안에서 빛을 보는 사람에게는 자신보다 더 큰 세계가 열립니다.

시편 36편의 마지막에서 악을 행하던 사람들은 쓰러져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굳게 서 있다고 믿었던 길은 그들을 끝까지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바라본 하나님의 집에는 여전히 시냇물이 흐릅니다.

그 물의 근원은 사람의 힘이나 판단이 아니라, 생명의 샘을 지니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