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36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자기 눈과 하나님의 빛

시편 36편은 사람의 눈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빛으로 나아갑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악한 사람은 자신을 너무 좋게 봅니다. 그런데 그 시선은 이상하게도 자신의 죄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반면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빛 안에서 저희는 빛을 봅니다」라고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시편 36편은 단순히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는가에 따라 인간의 판단과 삶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네 절은 악한 사람의 내면을 끈질기게 들여다봅니다. 죄의 속삭임, 자신을 속이는 태도, 거짓된 말, 잠자리에서 꾸미는 악한 계획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독자는 점점 악한 사람의 좁고 어두운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6절에서 갑자기 시야가 열립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의 내면을 더 분석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늘과 구름, 산과 아주 깊은 바다를 바라봅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날개 그늘과 풍성한 집, 즐거움의 시냇물과 생명의 샘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악이 무엇인지 충분히 보았지만, 악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앞선 시편 35편에서 다윗은 자신을 해치는 사람들의 거짓말과 교만을 고발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을 구했습니다. 시편 36편은 그 문제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바라봅니다. 사람은 어째서 자신이 행하는 악을 정당화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시편의 흐름은 분명합니다. 2–5절은 악한 사람의 세계를, 6–10절은 여호와야훼의 세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11–13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어느 세계에 속하여 살아가기를 원하는지 기도합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836편 본문 읽기 →

죄가 말을 걸 때 — 악의 시작

시편 36:1–3 본문 →

죄가 악한 이에게 하는 말이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시편 36:2 · 두루새김

첫 문장부터 낯설게 느껴집니다.

보통 죄는 사람이 저지르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죄가 말을 합니다. 마치 독립된 인격처럼 악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입니다.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פֶּשַׁע⁩)는 단순한 실수나 잘못을 넘어, 마땅히 지켜야 할 관계와 권위를 거스르는 행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하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움(⁨נְאֻם⁩)은 권위 있는 선언이나 신탁을 소개할 때 사용되며, 예언서에서는 하나님의 선언을 전달하는 표현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시편 110:1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선언을 소개하는 데 쓰입니다.

그런데 시편 36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죄의 말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악이 단순히 순간적인 욕망이나 우발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악은 사람에게 어떤 판단을 제시하고, 그 판단을 옳은 것처럼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말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악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삶과 행동을 판단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그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것은 자신을 넘어서는 판단의 기준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다음 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설명합니다.

참으로 그는 제 눈에 스스로를 너무 치켜세워 자기 죄를 찾아내어 미워하지 못합니다.시편 36:3 · 두루새김

시인은 악한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알고도 언제나 의도적으로 무시한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뒤틀려, 자기 잘못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설명을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남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상대방이 먼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부당한 이익을 얻었다면 그 정도는 당연한 보상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일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죄를 지었다는 사실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 행동을 바로잡을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은 자신을 너무 좋게 보아 죄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뜻으로도, 죄가 드러나지 않으리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공통된 모습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일에서 진실을 피합니다.

자신을 언제나 옳은 사람으로만 바라보는 눈은, 결국 자신에게서 고쳐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뒤틀린 판단은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분명히 「내 마음속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를 시인이 자기 마음속에서 악한 사람의 상태를 깨달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다른 읽기에서는 악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이해합니다. 두루새김은 「죄가 악한 사람에게 하는 말이 제 마음에 떠오릅니다」로 옮겨, 시인의 마음에 그 말이 떠오르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또한 3절의 히브리어는 문장 관계가 간결하고 모호합니다. 악한 사람이 스스로에게 아첨한 결과 자기 죄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해석이 있는 반면, 자기 죄가 드러나거나 미움받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두루새김은 자신을 속이는 태도가 죄를 알아보는 일을 가로막는다는 방향으로 풀었습니다.

악이 사람의 하루를 차지하다

시편 36:4–5 본문 →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악과 속임수. 그는 슬기롭게 행동하기도 좋은 일을 하기도 그만두었습니다.시편 36:4 · 두루새김

2–3절이 악한 사람의 내면과 판단을 다루었다면, 4절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진실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슬기롭게 행동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שָׂכַל⁩)는 단순히 머리가 좋거나 지식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황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지혜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이 절은 악한 사람이 지적인 능력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을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시인은 이어서 악한 사람의 잠자리를 보여 줍니다.

잠자리에서 악한 일을 꾸미고 좋지 않은 길에 버티고 서서 악을 물리치지 않습니다.시편 36:5 · 두루새김

잠자리는 하루의 활동을 멈추고 쉬는 자리입니다. 시편 4:5에서 잠자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공간입니다. 반면 시편 36편의 악한 사람은 잠자리에서 남에게 해를 끼칠 일을 계획합니다.

그에게는 행동하지 않는 시간조차 악을 준비하는 시간이 됩니다.

여기서 「자리를 잡으며」라는 말은 어떤 길 위에 스스로를 세우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연히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가 곧 돌아오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길에 머물기로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또한 「악을 물리치지 않습니다」라는 표현은 소극적으로 들리지만 의미는 무겁습니다. 악이 자신 앞에 놓였을 때 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도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의 말이 사람의 판단을 지배하고, 뒤틀린 판단이 거짓된 말로 나타나며, 그 말과 생각이 악한 계획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악한 길에 자신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시의 방향이 갑자기 바뀝니다.

악인의 좁은 세계에서 하나님의 광대한 세계로

시편 36:6–7 본문 →

여호와야훼,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있고 당신의 신실하심은 구름까지 닿습니다.시편 36:6 · 두루새김

이 구절에는 특별한 전환을 알리는 접속사나 설명이 없습니다.

앞부분에서 악한 사람은 계속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자신의 입, 자신의 잠자리, 자신이 선택한 길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시야가 하늘과 구름까지 넓어집니다. 7절에서는 높은 산들과 아주 깊은 바다가 등장합니다.

「한결같은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חֶסֶד⁩)는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한결같은 사랑과 성실한 돌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서는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입니다. 「신실하심」은 믿을 만함, 흔들리지 않는 성실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되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사랑을 하늘과 구름에 연결합니다. 사람이 쉽게 재거나 제한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다는 표현입니다.

당신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당신의 판결은 크고 깊은 바다입니다. 여호와야훼여, 사람도 짐승도 구하십니다.시편 36:7 · 두루새김

높은 산과 깊은 바다는 서로 반대 방향의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높이 솟은 산처럼 견고하고, 하나님의 판결은 깊은 바다처럼 광대하고 깊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그분의 판단이 인간의 좁은 기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크다는 데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에게 보이는 것만을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의로움과 판결은 하늘에서 깊은 바다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스스로 설정하는 기준보다 훨씬 넓은 차원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대한 묘사는 예상하지 못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도 구하십니다.

앞부분의 악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돌보심은 인간의 세계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돌보시는 일까지 포함하는 구원의 넓은 의미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의 산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 속한 산들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산의 웅대함을 강조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깊은 바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창세기 1:2의 깊은 물과도 연결되는 낱말입니다. 창세기 9:9–10에서 하나님은 홍수 이후 노아와 그의 자손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는 살아 있는 모든 생물과도 언약을 세우시고, 시편 104:27–30에서는 여러 생물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다만 7절의 「구하십니다」를 모든 동물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로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하늘에 이르는 한결같은 사랑이 날개 그늘이 되다

시편 36:8 본문 →

하나님,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요! 사람들은 당신의 날개 그늘에 몸을 피합니다.시편 36:8 · 두루새김

처음에는 하늘에 닿는 사랑이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 아래에 몸을 피하는 날개 그늘로 나타납니다.

높고 거대한 것이 동시에 가깝고 안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미 새가 새끼를 날개 아래 보호하는 장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성소의 지성소에는 속죄소를 덮는 그룹들의 날개가 있었으므로(출애굽기 25:20), 성소와 하나님의 임재를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의 핵심은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이 그분의 보호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룻기 2:12에서도 보아스는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날개 아래로 피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때 룻은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모압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룻에게 여호와야훼의 날개는 추상적인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낯선 땅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모든 위험을 미리 없애 주셔서 피할 필요 자체가 없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피할 곳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피하는 곳이 하나님의 날개 그늘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무엇이 있는가

시편 36:9–10 본문 →

그들은 당신 집의 기름진 것으로 배부르고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당신 기쁨의 시냇물을 마시게 하십니다.시편 36:9 · 두루새김

앞부분에서 악한 사람은 자기 잠자리에서 악한 일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풍성한 것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집은 그분의 임재와 예배의 장소인 성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동시에 9절의 음식과 물 이미지는 손님을 풍성하게 대접하는 집주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고대 사회에서 누군가의 집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주인이 제공하는 음식과 보호를 누리는 관계에 들어가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기름진 음식」은 풍성함과 좋은 몫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부족한 것을 겨우 채우는 수준을 넘어 넉넉히 공급받는 모습입니다. 「즐거움의 시냇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공급에는 기쁨과 풍요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자기 안으로 시선을 집중합니다. 반면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풍요를 받아 누립니다.

10절은 그 풍요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밝힙니다.

생명의 샘이 당신께 있으니 당신의 빛 속에서 우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 · 두루새김

시냇물은 흘러가지만, 샘은 물이 솟아나는 근원입니다.

「생명의 샘」이라는 표현은 물이 생존의 필수 조건인 세계에서 특별한 울림을 지닙니다. 비가 적은 시기에도 계속 솟아나는 샘은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힘과 가능성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고백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물에서 빛으로 이미지를 바꿉니다.

2절에서는 악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3절에서는 그가 자신을 너무 좋게 보아서 자기 죄를 찾아내어 미워하지 못했습니다. 원문에서는 이 두 절에 모두 눈을 가리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하나님의 빛 안에서 빛을 봅니다.

성경의 시적 언어에서 빛은 생명, 기쁨, 구원,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와 연결됩니다. 시편 27:1에서는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빛과 구원이라고 고백하고, 시편 56:14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빛 가운데 걷는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시편 36편의 문맥에서는 그 말이 인간의 인식과도 연결됩니다.

자신의 눈만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자기 죄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의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살아갈 생명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별할 빛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둘의 근원이 모두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즐거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다네카는 기쁨과 풍요를 뜻하는 계열의 말입니다. 에덴이라는 이름과도 언어적으로 연결되는 표현이어서 창세기 2장의 풍요로운 동산과 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에덴동산을 직접 가리킨다고 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2:13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시며, 자기 백성이 그분을 버리고 물을 담아 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팠다고 책망하십니다. 이사야 60:19–20의 여호와야훼께서 영원한 빛이 되신다는 약속도 그 주제를 구약 안에서 발전시킵니다. 신약의 요한복음 1:4–9 역시 생명과 빛을 그리스도와 연결하지만, 이것은 시편 36편이 먼저 노래한 하나님의 생명과 빛을 후대에 그리스도를 통해 이해한 연결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 계속 필요한 것

시편 36:11 본문 →

당신을 아는 이들에게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마음 곧은 이들에게 당신의 의로움을 계속 베풀어 주십시오.시편 36:11 · 두루새김

이제 찬양이 기도로 바뀝니다.

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요청할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안다는 것이 앞으로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에 앞으로도 그분의 돌보심을 필요로 한다고 고백합니다.

「계속 베풀어 주십시오」는 본래 끌어당기거나 길게 뻗게 하는 의미와 연결되는 명령형입니다.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그분을 아는 사람들에게 계속 이어지기를 구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인정하고, 그분과 맺은 관계에 따라 살아가는 일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2:15–16에서 여호와야훼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송사를 공정하게 판결한 요시야를 두고, 그것이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앞부분의 악한 사람은 자신을 너무 좋게 보았고, 그 결과 자기 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른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올바른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받을 자격을 완성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그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의로움이 계속 베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하늘에 닿는다고 했습니다. 8절에서는 그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찬양했습니다. 이제 11절에서는 그 사랑이 자신의 삶 속에 계속 이어지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 일상을 위협하는 세력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만한 발과 악인의 손

시편 36:12–13 본문 →

교만한 발이 나를 덮치지 못하게 하시고 악한 이들의 손이 나를 몰아내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시편 36:12 · 두루새김

시인은 다시 처음에 등장했던 악한 사람들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앞부분에서 악한 사람은 「좋지 않은 길에 자리를 잡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악한 사람의 발이 다른 사람을 위협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잘못된 길이 다른 사람의 삶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8–9절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 피하고, 그분의 집에서 풍성하게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의 손은 시인을 그 자리에서 밀어내려 합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하늘에 이를 만큼 크다고 믿는 사람도 자신의 삶이 무너질까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생명의 샘이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악한 자들의 손에서 자신을 지켜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는 문장의 시제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거기서 악을 일삼는 이들이 쓰러졌습니다. 떠밀려 다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시편 36:13 · 두루새김

히브리어에서도 여기에는 완료된 일을 나타내는 동사 형태들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경험한 악한 사람들의 몰락을 회상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앞 절의 기도와 연결하여, 시인이 바라는 하나님의 판결을 마치 눈앞에서 이루어진 일처럼 확신에 차서 묘사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거기서」라는 표현은 장소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마치 독자에게 어떤 장면을 가리켜 보여 주듯이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5절에서 악한 사람은 「좋지 않은 길에 자리를 잡으며」 악을 물리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악한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길은 그를 영원히 지탱해 주지 못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악한 사람의 추락을 길게 묘사하거나 그 고통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시편의 마지막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시편의 중심을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빛 안에서 다시 보이는 세계

시편 36:1–13 본문 →

시편 36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일」에 관한 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36편을 오늘 읽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주변에서 찾아내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악한 사람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 주지만, 그 모습이 자신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가정할 근거를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목적은 독자를 자기혐오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급과 보호를 믿는다는 사실이 현실의 위험을 부정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믿음은 위험 속에서 기도할 이유를 제공합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악한 사람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안전한 세계가 아닙니다.

악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도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계속 베풀어 주시기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너무 좋게 보는 사람은 점점 자기 세계에 갇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 안에서 빛을 보는 사람에게는 자신보다 더 큰 세계가 열립니다.

그곳에는 하늘에 닿는 한결같은 사랑이 있고, 산처럼 견고한 의로움이 있으며, 사람과 짐승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곳에는 지친 사람이 몸을 피할 수 있는 날개 그늘이 있습니다.

시편 36편의 마지막에서 악을 일삼던 사람들은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굳게 서 있다고 믿었던 길은 그들을 끝까지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바라본 하나님의 집에는 여전히 시냇물이 흐릅니다.

그 물의 근원은 사람의 힘이나 판단이 아니라, 생명의 샘을 지니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