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40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구덩이에서 건짐받고 다시 도움을 구하다

시편 40편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처음에는 이미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야훼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나님은 그를 깊은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셨고, 진흙에서 벗어나 단단한 바위 위에 서게 하셨습니다. 시인은 그 구원을 사람들에게 알렸으며,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다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많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시편의 마지막에 이르면 같은 사람이 다시 외칩니다. 「제 하나님, 지체하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 끝에 응답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더 이상 지체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발걸음이 굳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제는 셀 수 없는 재앙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에 새 노래를 넣어 주셨다고 했지만, 마지막에는 원수들이 그를 조롱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시편은 구덩이에서 구출된 사건과 뒤에 찾아온 고난이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두 경험 사이에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시편 40편은 구원이 한 번 이루어지면 다시는 고난을 겪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경험한 구원이 새로운 고난 속에서 어떻게 다시 기도의 근거가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2–6절에서는 지나간 구원을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7–11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하여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12–18절에서는 다시 닥친 재앙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찬양을 낳고, 찬양은 순종과 증언으로 이어지며, 그 모든 경험은 다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바탕이 됩니다.

이것이 시편 40편이 보여 주는 신앙의 움직임입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940편 본문 읽기 →

진창에서 바위 위로 — 구원이 바꾸어 놓은 것

시편 40:1–4 본문 →

나는 여호와야훼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는 내게 몸을 기울여 도움을 구하는 내 외침을 들었다.시편 40:2 · 본디새김

시편은 기다림으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같은 동사의 부정사와 완료형이 나란히 놓여 있어 기다림을 강조합니다. 본디새김의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는 번역은 이러한 반복의 힘을 살립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다림 자체가 그의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에서 주어가 바뀝니다.

시인이 기다렸고, 여호와야훼께서 몸을 기울이셨습니다. ‘몸을 기울인다’는 표현은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몸을 굽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곧이어 시인은 실제로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굉음이 이는 구덩이에서, 진창의 진흙에서 나를 끌어 올렸다. 내 두 발을 바위 위에 세우고 내 발걸음을 굳게 했다.시편 40:3 · 본디새김

구덩이는 굉음이 일고 진흙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제대로 서 있거나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발을 디디려 해도 진흙에 빠질 수 있고, 스스로 기어 나오려 해도 벽을 붙잡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기 힘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끌어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두 발을 바위 위에 세우시고 발걸음을 굳게 하십니다. 진흙은 사람이 발을 디딜 때 그 무게를 제대로 받쳐 주지 못합니다. 반면 바위는 단단한 기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시인을 위험에서 꺼내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자리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내 입에 새 노래를, 우리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넣었다.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며 여호와야훼를 신뢰할 것이다.시편 40:4 · 본디새김

3절에서는 발이 굳게 되었습니다. 4절에서는 입에 노래가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구원하셨으므로, 시인의 입에도 새로운 찬양이 생겨난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단순히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본다’고 합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달라진 처지와,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행동일 것입니다. 한 사람이 구덩이에서 건짐받아 바위 위에 서게 된 사건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신뢰할 이유가 됩니다.

찬양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증언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굉음이 이는 구덩이’라는 표현의 구체적인 의미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히브리어 낱말은 요란한 소리나 소란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소리가 울리는 위험한 구덩이나 혼란스럽고 위협적인 상황을 떠올릴 수 있지만, 시인이 실제로 어떤 구덩이에 빠졌다는 역사적 사건을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또 ‘새 노래’는 반드시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가락이나 가사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행위에 응답하여 부르는 찬양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시편 33:3과 96:1에도 새 노래를 부르라는 권면이 나타납니다. 특히 시편 98:1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새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인가

시편 40:5–6 본문 →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의지처로 삼고, 거만한 자들과 거짓으로 빗나가는 자들 쪽으로 향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하다.시편 40:5 · 본디새김

그런데 그 행복은 가진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가 누구를 의지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거만한 자들’은 교만하거나 거만한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뒤이어 거짓을 따라 빗나가는 자들이 등장하므로, 하나님 대신 자신들의 힘과 거짓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낱말이 특정한 나라나 역사적 세력을 지칭한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사람은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을 구해 줄 만한 힘을 찾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이나 영향력 있는 집단에 의지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실제로 구원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야훼, 제 하나님, 당신이 하신 놀라운 일들과 우리를 향한 당신의 생각들이 많습니다. 당신과 견줄 이는 없습니다. 제가 알리고 말하겠습니다. 다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많습니다.시편 40:6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의 시야가 크게 넓어집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구덩이에서 건짐받은 한 가지 사건을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한 사건이 하나님의 수많은 행위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생각들(⁨מַחֲשָׁבָה⁩)’로 옮긴 히브리어는 생각이나 계획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을 향한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구덩이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처지가 아무에게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입에 새 노래를 넣으셨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그 입으로도 하나님의 모든 일을 다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인간의 찬양보다 큽니다.

그러나 다음 단락에서 그는 찬양의 말보다 더 중요한 응답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파 주신 두 귀

시편 40:7–9 본문 →

당신은 희생제물과 곡식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제게 두 귀를 파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시편 40:7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레위기 1–7장에는 번제물과 곡식제물, 속죄제물 등 다양한 제사에 관한 규정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요구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제사 자체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율법의 제사 규정과 충돌합니다.

‘두 귀를 파 주셨다’는 표현은 귀를 만들거나 열어 듣게 하신다는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듣는 귀입니까? 9절의 「저는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며」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행하는 귀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7절의 제사에 관한 말도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제사 제도를 무효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을 바치는 외적인 행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조는 사무엘상 15:22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호세아 6:6에서도 여호와야훼는 희생제물보다 인애를, 번제물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들은 제사 자체를 모두 폐지하라는 선언이라기보다, 제사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실한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가장 깊은 응답은 그분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때 저는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왔습니다. 두루마리 책에 저에 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시편 40:8 · 본디새김

여기서 ‘제가 왔습니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루마리 책에 저에 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과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나아온 일을 연결한다는 사실입니다.

「제 하나님, 저는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며, 당신의 가르침은 제 내장 속에 있습니다.」시편 40:9 · 본디새김

‘내장 속에’라는 표현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고대 히브리어의 신체 언어에서는 내장이 인간의 깊은 감정과 내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르침이 내장 속에 있다는 말은 그 가르침이 단지 외부의 규칙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을 귀를 주셨고, 그 말씀은 시인의 깊은 내면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삶입니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듣고 그 뜻을 기뻐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시인이 앞으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을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선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편의 후반부에서 그는 자신의 죄악들이 자신을 따라잡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9절은 도덕적인 완전무결함의 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향한 시인의 근본적인 마음과 삶의 방향을 표현하는 고백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 귀를 파 주셨다’의 동사는 파거나 구멍을 내는 뜻입니다. 이 표현을 출애굽기 21:6에서 종의 귀를 뚫는 의식과 연결하기도 하지만, 두 본문은 서로 다른 동사를 사용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송곳으로 귀를 뚫는 행위를 말하고, 시편 40편에서는 귀를 파거나 열어 주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 시편을 종의 귀를 뚫는 의식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8절의 두루마리는 어떤 두루마리를 가리키는지, 그 안에 시인에 관한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왕에게 주어진 율법의 규정, 특별히 신명기 17:18–20에서 왕이 율법을 곁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말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그 규정을 직접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시편 40:7–9는 신약에서도 중요한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히브리서 10:5–10은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자신을 드리신 일을 설명합니다. 히브리어 시편 40:7은 ‘제게 두 귀를 파 주셨습니다’라고 하지만, 칠십인역 시편 39:7의 주요 사본은 ‘몸’으로 읽습니다. 히브리서도 ‘몸’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시편의 본래 문맥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행위보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행하는 삶이 강조됩니다. 히브리서는 이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몸을 드리신 사건에 연결하여 읽습니다. 이는 시편의 최초 문맥과 구별되는 후대의 그리스도론적 해석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노래를 사람들에게 전하다

시편 40:10–11 본문 →

저는 큰 회중 가운데서 의로움을 기쁜 소식으로 전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제 입술을 막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은 아십니다.시편 40:10 · 본디새김

시인은 이제 자신의 입에 관해 다시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노래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시인이 스스로 그 노래를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응답이 연결됩니다.

‘기쁜 소식으로 전하다(⁨בָּשַׂר⁩)’로 옮긴 히브리어는 좋은 소식을 알린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52:7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등장할 때에도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단순히 설명하거나 논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쁜 소식으로 선포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의로움이 기쁜 소식일까요? 그가 경험한 구원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그에게 추상적인 원칙이 아니라, 깊은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리시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당신의 의로움을 제 마음속에 감추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신실하심과 구원을 말했습니다. 큰 회중에게 당신의 인애와 진실하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시편 40:11 · 본디새김

입술을 막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에 감추지 않았습니다.

인애와 진실하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혼자만의 기억으로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의로움을 알리는 일은 그 내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하나님의 구원은 그의 입술을 통해 공동체에 알려집니다.

하나님께서 구덩이에서 시인을 건져 올리셨습니다. 그의 발걸음을 굳게 하셨습니다. 그의 입에 새 노래를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큰 회중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의로움에 관한 증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시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인애를 전한 사람이 다시 그 인애를 구하다

시편 40:12–13 본문 →

여호와야훼, 당신은 저에게 당신의 연민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의 인애와 진실하심이 언제나 저를 지킬 것입니다.시편 40:1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의 증언과 다음의 간구를 연결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인애와 진실하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연민을 아끼지 않으시리라고 기대합니다. 12절의 히브리어는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도, 연민을 거두지 말아 달라는 간청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확신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은 독자의 예상을 뒤집습니다.

셀 수 없는 재앙들이 저를 에워쌌기 때문입니다. 제 죄악들이 저를 따라잡아 저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제 머리카락보다 많았고, 제 마음은 저를 버렸습니다.시편 40:13 · 본디새김

구원을 노래하던 사람이 다시 재앙에 둘러싸였습니다. 더구나 그 재앙에는 자신의 죄악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6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과 자신들을 향한 생각들이 너무 많아 다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자신을 에워싼 재앙들이 셀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사실 때문에 현재의 고통이 작아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구원은 실제였고, 지금의 고통도 실제입니다.

‘제 죄악들이 저를 따라잡아’라는 표현은 죄악을 마치 뒤쫓아 오는 존재처럼 묘사합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다시 자신을 찾아와 그 결과를 직면하게 되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모든 재앙이 그의 특정한 죄 때문에 발생했다는 인과관계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재앙과 죄악을 함께 언급하지만, 그 모든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15절에서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죄가 있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들의 부당한 공격을 받는 사실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여호와야훼를 신뢰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4절). 그런데 이제 시인 자신은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실제적인 시력 상실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죄악과 재앙에 압도되어 앞을 분별하거나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상태를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이 자신을 버렸다는 말은 삶을 지탱하던 내적인 힘이나 용기가 사라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발걸음을 굳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마음마저 그를 지탱하지 못합니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까요?

다시 하나님께 외칩니다.

기다렸던 사람이 이제는 서둘러 달라고 기도하다

시편 40:14–16 본문 →

여호와야훼, 기꺼이 저를 건져 주십시오. 여호와야훼, 서둘러 저를 도와주십시오.시편 40:14 · 본디새김

처음에 시인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서둘러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내심을 잃었기 때문에 신앙이 약해졌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의 기다림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돌아보며 한 고백입니다. 반면 지금의 간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위험 속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과거에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어도 아무런 호소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사람도 하나님께 지금 행동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습니다.

제 목숨을 없애려고 노리는 자들이 함께 부끄러워하고 수치를 느끼기를 빕니다. 제 재앙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나 치욕을 당하기를 빕니다.시편 40:15 · 본디새김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의 목숨을 없애려고 노리고, 그에게 닥친 재앙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면서도 적들의 행동을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릴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그들이 계획한 일이 실패하고, 그들의 부당한 행동이 수치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제게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수치 때문에 아연해지기를 빕니다.시편 40:16 · 본디새김

‘아하, 아하’는 상대방의 불행을 보며 조롱하거나 승리감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 소리는 시편 35:21, 25에서도 등장했습니다. 원수들은 다윗이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보며 자신들이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다고 떠들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시인의 입에는 새 노래가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시편 40편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소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원수들의 조롱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원수들의 조롱 대신 울려 퍼지기를 바라는 소리

시편 40:17 본문 →

당신을 찾는 모든 이가 당신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를 빕니다. 당신의 구원을 사랑하는 이들이 늘 「여호와야훼께서 높임을 받으시기를.」 하고 말하기를 빕니다.시편 40:17 · 본디새김

앞에서는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이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4절에서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여호와야훼를 신뢰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기를 바랐던 사람이, 이제 자신의 위기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수들의 ‘아하, 아하’라는 조롱과 정면으로 대조됩니다. 한쪽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며 자신의 승리를 외칩니다.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그분을 높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어느 목소리에 참여하기를 바라는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시편 40:14–18과 시편 70:2–6은 표현이 거의 같습니다. 자신의 위기를 해결해 달라는 한 사람의 기도가, 다른 고난받는 사람들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기도가 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 본문은 하나님의 신속한 도움을 구하고, 원수들의 계획이 실패하기를 바라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기뻐하기를 구하는 동일한 기도의 흐름을 지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호칭과 일부 표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가 시편 40편 안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독립된 시편의 형태로도 전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느 형태가 먼저 만들어졌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는 저를 생각하실 것입니다

시편 40:18 본문 →

저는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주께서는 저를 생각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제 도움이시며 저를 건져 내시는 분입니다. 제 하나님, 지체하지 마십시오.시편 40:18 · 본디새김

시편의 마지막은 놀랍도록 간결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표현은 경제적인 빈곤을 포함할 수 있지만, 반드시 재산이 전혀 없는 상태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사람,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처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6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생각들이 많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사용된 ‘생각들’과 18절의 ‘생각하실 것입니다’는 히브리어 하샤브(⁨חָשַׁב⁩)라는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처음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을 노래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생각이 지금 궁핍한 ‘나’에게도 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지금 구덩이에서 건져 올려진 뒤의 안정된 자리에 서 있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각하신다는 확신은 시인이 강하고 넉넉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바로 그 자리에서 붙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도움이시고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아직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서둘러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편은 여기서 끝납니다.

구원의 응답이 다시 들려오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찬양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도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요청이 남아 있습니다.

새 노래가 다시 간구가 되는 자리

시편 40:1–18 본문 →

시편 40편의 마지막으로 돌아가 보면, 처음의 장면이 다시 보입니다.

처음에 시인은 깊은 구덩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외침을 들으셨고, 몸을 기울여 그를 끌어 올리셨습니다. 그의 발은 바위 위에 굳게 세워졌고, 그의 입에는 새 노래가 주어졌습니다.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쁨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했던 신앙의 고백들이 거짓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7–9절의 순종에 관한 고백은 후반부의 죄 고백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시편은 이러한 삶을 완전한 사람의 삶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의 삶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삶은 더 이상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아는 삶입니다.

처음에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지체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셨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움이시며 구원자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두 장면을 6절의 「우리를 향한 당신의 생각들」과 18절의 「주께서는 저를 생각하실 것입니다」가 연결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모두 알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왜 다시 고난이 닥쳤는지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시편 40편에서 믿음은 한 번 구원받은 뒤 다시는 도움을 구하지 않는 강인함이 아닙니다. 이전에 자신을 구해 주셨던 하나님께 다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신뢰입니다.

시편의 처음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에 새 노래를 넣으셨습니다. 그 입으로 시인은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시편의 마지막에서 같은 입으로 다시 간구합니다. 「제 하나님, 지체하지 마십시오.」

그 기도 뒤에 어떤 구원이 이루어졌는지는 아직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한때 자신을 진창에서 끌어 올려 바위 위에 세우셨던 분입니다. 지금도 자신을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분께 외칩니다.

아직 새로운 구원의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구원을 기다리는 기도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