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40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구덩이에서 건짐받고 다시 도움을 구하다
시편 40편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처음에는 이미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말합니다. 「저는 여호와야훼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2절). 하나님은 그를 깊은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셨고, 진흙에서 벗어나 단단한 바위 위에 서게 하셨습니다. 시인은 그 구원을 사람들에게 알렸으며,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다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많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시편의 마지막에 이르면 같은 사람이 다시 외칩니다.
처음에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 끝에 응답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저의 하나님, 지체하지 마십시오」 하고 더 이상 지체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18절). 처음에는 발걸음이 굳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제는 셀 수 없는 재앙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에 새 노래를 넣어 주셨다고 했지만, 마지막에는 원수들이 그를 조롱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시편은 구덩이에서 구출된 사건과 뒤에 찾아온 고난이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두 경험 사이에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시편 40편은 구원이 한 번 이루어지면 다시는 고난을 겪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경험한 구원이 새로운 고난 속에서 어떻게 다시 기도의 근거가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시편의 흐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2–6절에서는 지나간 구원을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7–11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하여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12–18절에서는 다시 닥친 재앙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구덩이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입에 새 노래를 넣으셨습니다. 그 노래를 받은 시인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난을 만났을 때, 그 입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찬양을 낳고, 찬양은 순종과 증언으로 이어지며, 그 모든 경험은 다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바탕이 됩니다.
이것이 시편 40편이 보여 주는 신앙의 움직임입니다.
진창에서 바위 위로 — 구원이 바꾸어 놓은 것
나는 여호와야훼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분이 내게 몸을 기울이시고 살려 달라는 내 외침을 들으셨습니다.시편 40:2 · 두루새김
시편은 기다림으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같은 동사의 부정사와 완료형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기다림을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시인은 잠시 기다렸다가 곧바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다림 자체가 그의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에서 주어가 바뀝니다.
시인이 기다렸고, 여호와야훼께서 몸을 기울이셨습니다. 「몸을 기울여」라는 표현은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몸을 굽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곧이어 시인은 실제로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요란한 구덩이에서, 질척이는 진흙에서 나를 끌어 올리셨습니다. 바위 위에 내 두 발을 세우시고 내 발걸음을 굳건하게 하셨습니다.시편 40:3 · 두루새김
이 장면에는 두 장소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구덩이이고, 다른 하나는 바위입니다.
구덩이는 요란한 소리가 나고 진흙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제대로 서 있거나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발을 디디려 해도 진흙에 빠질 수 있고, 스스로 기어 나오려 해도 벽을 붙잡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기 힘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끌어 올리셨습니다.
이 구원은 단순히 위험에서 잠시 벗어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두 발을 바위 위에 세우시고 발걸음을 굳게 하십니다. 진흙은 사람이 발을 디딜 때 그 무게를 제대로 받쳐 주지 못합니다. 반면 바위는 단단한 바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시인을 위험에서 꺼내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자리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4절에서는 구원의 결과가 몸의 다른 부분으로 옮겨 갑니다.
내 입에 새 노래를, 우리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넣어 주셨습니다. 많은 이가 보고 두려워하며 여호와야훼를 의지할 것입니다.시편 40:4 · 두루새김
3절에서는 발이 굳게 되었습니다. 4절에서는 입에 노래가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다시 걸어갈 수 있게 하실 뿐 아니라, 그가 무엇을 말하고 노래할지도 새롭게 하십니다.
여기서 「새 노래」는 반드시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가락이나 가사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행위에 응답하여 부르는 찬양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구원하셨으므로, 시인의 입에도 새로운 찬양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효과는 시인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단순히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보고」 두려워하며 여호와야훼를 의지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달라진 처지와,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행동일 것입니다. 한 사람이 구덩이에서 건짐받아 바위 위에 서게 된 사건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의지할 이유가 됩니다.
찬양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증언이 됩니다.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인가
복되구나, 여호와야훼를 의지할 분으로 삼고 거만한 이들에게도 거짓을 좇는 이들에게도 눈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여.시편 40:5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경험을 이야기하다가, 이제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복은 가진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가 누구를 의지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서 「거만한 자들」(רָהָ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교만하거나 거만한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뒤이어 거짓을 따르는 자들이 등장하므로, 하나님 대신 자신들의 힘과 거짓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낱말이 특정한 나라나 역사적 세력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의 방향입니다. 사람은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을 구해 줄 만한 힘을 찾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이나 영향력 있는 집단에 의지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실제로 구원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호와야훼, 나의 하나님, 당신이 이루신 놀라운 일도 우리를 향한 당신의 생각도 많습니다. 당신과 견줄 이는 없습니다. 알리고 이야기하려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시편 40:6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의 시야가 크게 넓어집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구덩이에서 건짐받은 한 가지 사건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한 사건이 하나님의 수많은 행동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저희를 향한 주님의 생각」(מַחֲשָׁבָה)에서 「생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생각이나 계획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을 향한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드러냅니다.
구덩이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처지가 아무에게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입에 새 노래를 넣으셨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그 입으로도 하나님의 모든 일을 다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인간의 찬양보다 큽니다.
그러나 다음 단락에서 그는 찬양의 말보다 더 중요한 응답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두 귀
짐승 제물과 곡식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내 두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태워 바치는 제물도 죄를 씻는 제물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시편 40:7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레위기 1–7장에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 속죄제물 등 다양한 제사에 관한 규정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요구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제사 자체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율법의 제사 규정과 충돌합니다. 그러나 7절 가운데 「제 두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라는 문장을 보면 시인이 무엇을 강조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두 귀를 파 주셨다」(כָּרָה)는 뜻으로, 귀를 만들거나 열어 듣게 하신다는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듣는 귀입니까? 9절이 대답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를 기뻐합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내 속 깊이 있습니다.시편 40:9 · 두루새김
하나님의 뜻을 듣고 행하는 귀입니다.
두루새김의 「제 마음 깊은 곳에」(מֵעֶה)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몸의 내부, 곧 내장 깊은 곳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고대 히브리어의 신체 언어에서는 내장이 인간의 깊은 감정과 마음속을 표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문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이 내장 속에 있다는 말은 그 가르침이 단지 밖에서 주어진 규칙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시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7절의 귀와 9절의 마음 깊은 곳이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들을 귀를 주셨고, 그 말씀은 시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삶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합니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듣고 그 뜻을 기뻐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7절의 제사에 관한 말도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제사 제도를 무효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가장 깊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강조합니다. 제물을 바치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시편 40편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순종이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자 시인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지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것은 더 많은 제물을 바치는 일보다, 하나님께서 들을 귀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가장 깊은 응답은 그분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8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어떻게 응답했는지 밝힙니다.
그때 나는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왔습니다. 두루마리 책에 내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시편 40:8 · 두루새김
여기서 「제가 왔습니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루마리 책에 저에 관해 적혀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두루마리를 가리키는지, 그 안에 시인에 관한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과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나아온 일을 연결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9절의 고백을 시인이 앞으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을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선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편의 후반부에서 그는 자신의 죄들이 자신을 따라잡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9절은 도덕적으로 아무 흠이 없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향한 시인의 근본적인 마음과 삶의 방향을 표현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사람도 다시 죄를 짓고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가 그가 하나님을 향해 품고 있는 믿음과 소망을 반드시 끝내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표현을 출애굽기 21:6에서 종의 귀를 뚫는 의식과 연결하기도 하지만, 두 본문은 서로 다른 동사를 사용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송곳으로 귀를 뚫는 행위를 말하고, 시편 40편의 원문에서는 귀를 파거나 열어 주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 시편을 종의 귀를 뚫는 의식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제사보다 순종을 강조하는 말은 사무엘상 15:22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호세아 6:6에서도 여호와야훼는 희생제물보다 한결같은 사랑을, 번제물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들은 제사 자체를 모두 없애라는 선언이라기보다, 제사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실한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8절의 두루마리는 왕에게 주어진 율법의 규정, 특별히 신명기 17:18–20에서 왕이 율법을 곁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말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그 규정을 직접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40:7–9는 신약에서도 중요한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히브리서 10:5–10은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자신을 드리신 일을 설명합니다. 7절의 「제 두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은 「제게 두 귀를 파 주셨습니다」라는 뜻이지만, 칠십인역 시편 39:7의 주요 사본은 「몸」으로 읽습니다. 히브리서도 「몸」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시편의 본래 문맥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행위보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행하는 삶이 강조됩니다. 히브리서는 이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몸을 드리신 사건에 연결하여 읽습니다. 이는 시편의 처음 문맥과 구별되는, 후대에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읽은 해석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노래를 사람들에게 전하다
큰 모임에서 의로움을 기쁜 소식으로 전했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입술을 닫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은 아십니다.시편 40:10 · 두루새김
시인은 이제 자신의 입에 관해 다시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노래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시인이 스스로 그 노래를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응답이 연결됩니다.
「기쁜 소식으로 전했습니다」(בָּשַׂ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좋은 소식을 알린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52:7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등장할 때에도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단순히 설명하거나 논리로 증명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쁜 소식으로 알렸습니다.
왜 하나님의 의로움이 기쁜 소식일까요? 그가 경험한 구원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그에게 추상적인 원칙이 아니라, 깊은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리시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11절은 그 증언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보여 줍니다.
당신의 의로움을 내 마음속에 감추지 않고 당신의 신실하심과 구원을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을 큰 모임에서 숨기지 않았습니다.시편 40:11 · 두루새김
여기에는 반복되는 부정 표현이 있습니다.
입을 다물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감추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혼자만의 기억으로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다고 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의로움을 알리는 일은 그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하나님의 구원은 그의 입을 통해 공동체에 알려집니다.
여기서 시편의 처음부터 이어져 온 흐름이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 구덩이에서 시인을 건져 올리셨습니다.
그의 발걸음을 굳게 하셨습니다.
그의 입에 새 노래를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전하는 하나님의 의로움에 관한 증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시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전한 사람이 다시 그 사랑을 구하다
여호와야훼, 당신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이 언제나 나를 지킬 것입니다.시편 40:12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앞의 증언과 다음의 간구를 연결합니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을 사람들에게 숨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아끼지 않으시리라고 기대합니다.
12절의 히브리어는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거두지 말아 달라는 간청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저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하여 확신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시인은 자신의 현재 처지가 어떠하든, 이전에 경험한 하나님의 성품이 변하지 않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은 독자의 예상을 뒤집습니다.
셀 수 없는 불행이 나를 에워싸고 내 죄들이 나를 따라잡아 나는 앞을 볼 수 없고 죄가 내 머리카락보다 많아 내 마음마저 나를 버렸기 때문입니다.시편 40:13 · 두루새김
구원을 노래하던 사람이 다시 재앙에 둘러싸였습니다. 더구나 그 재앙에는 자신의 죄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6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과 자신들을 향한 생각이 너무 많아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자신을 에워싼 재앙이 셀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도 많고, 자신을 에워싼 재앙들도 많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사실 때문에 현재의 고통이 작아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재앙과 죄를 경험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과거의 구원은 실제였고, 지금의 고통도 실제입니다.
「제 죄들이 저를 따라잡아」라는 표현은 죄를 마치 뒤쫓아 오는 존재처럼 묘사합니다. 시인은 죄를 단순히 과거에 끝난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다시 자신을 찾아와 그 결과를 마주하게 되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모든 재앙이 그의 특정한 죄 때문에 발생했다는 뜻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재앙과 죄를 함께 언급하지만, 그 모든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15절에서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죄가 있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들의 부당한 공격을 받는 사실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한 가지 원인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여호와야훼를 의지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4절). 그런데 이제 시인 자신은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실제적인 시력 상실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죄와 재앙에 짓눌려 앞을 분별하거나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상태를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제 마음마저 힘을 잃었습니다」라는 말은 삶을 지탱하던 마음속 힘이나 용기가 사라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발걸음을 굳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마음마저 그를 지탱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시편의 두 부분은 의도적으로 대비되는 것처럼 읽힙니다. 처음에는 구출과 안정, 새 노래와 증언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에워싸임과 혼란, 죄책감과 무력함이 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까요?
다시 하나님께 외칩니다.
기다렸던 사람이 이제는 서둘러 달라고 기도하다
여호와야훼여, 기꺼이 나를 건져 주십시오. 여호와야훼여, 서둘러 나를 도와주십시오.시편 40:14 · 두루새김
이 기도는 시편의 첫 구절과 강렬하게 대조됩니다.
처음에 시인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서둘러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내심을 잃었기 때문에 신앙이 약해졌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의 기다림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돌아보며 한 고백입니다. 반면 지금의 간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위험 속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과거에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서둘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도 하나님께 지금 행동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기를 구합니다.
내 목숨을 끊으려고 노리는 이들이 함께 부끄러움과 수치를 겪기를 빕니다. 내 불행을 반기는 이들이 뒤로 물러나 망신당하기를 빕니다.시편 40:15 · 두루새김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고, 그에게 닥친 불행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도 적들의 행동을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릴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그들이 계획한 일이 실패하고, 그들의 부당한 행동이 부끄러운 일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16절에서는 원수들의 말이 직접 등장합니다.
내게 「고소하다, 고소하다!」 하는 이들이 자기 수치에 놀라 얼어붙기를 빕니다.시편 40:16 · 두루새김
「아하, 아하!」는 상대방의 불행을 보며 조롱하거나 승리감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 소리는 시편 35:21, 25에서도 등장했습니다. 원수들은 다윗이 어려움에 처한 모습을 보며 자신들이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다고 떠들었습니다.
여기서도 원수들의 입은 시인을 조롱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시인의 입에는 새 노래가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시편 40편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소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원수들의 조롱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알리는 찬양이 사람들 가운데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원수들의 조롱 대신 울려 퍼지기를 바라는 소리
당신을 찾는 모든 이가 당신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를, 당신의 구원을 사랑하는 이들이 늘 「여호와야훼께서 높임을 받으시기를!」 하고 외치기를 빕니다.시편 40:17 · 두루새김
앞에서는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이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이 변화는 시편의 처음과 연결됩니다. 4절에서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여호와야훼를 의지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기를 바랐던 사람이, 이제 자신의 위기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의 기도는 자기 혼자 구원받는 일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랍니다.
그들이 늘 말하기를 바라는 「여호와야훼께서 높임을 받으시기를!」은 원수들의 「아하, 아하!」라는 조롱과 정면으로 대조됩니다. 한쪽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며 자신의 승리를 외칩니다.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그분을 높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어느 목소리에 참여하기를 바라는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제 시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현재 모습을 밝힙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40:14–18과 시편 70:2–6은 표현이 거의 같습니다. 하나님의 빠른 도움을 구하고, 원수들의 계획이 실패하기를 바라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기뻐하기를 구하는 동일한 기도의 흐름을 지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과 일부 표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가 시편 40편 안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독립된 시편의 형태로도 전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느 형태가 먼저 만들어졌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간구가 서로 다른 자리에서 노래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위기를 해결해 달라는 한 사람의 기도가, 다른 고난받는 사람들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기도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생각해 주실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가진 것 없지만 주님은 나를 생각해 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도우시고 나를 건져 내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하나님, 지체하지 마십시오.시편 40:18 · 두루새김
시편의 마지막은 놀랍도록 간결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두 가지 말로 요약합니다. 가난하고 쪼들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하고 쪼들리지만」이라는 표현은 경제적인 가난을 포함할 수 있지만, 반드시 재산이 전혀 없는 상태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사람,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처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자신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생각해 주실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6절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6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생각이 많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사용된 「생각」과 18절의 「생각해 주실 것입니다」는 히브리어 하샤브(חָשַׁב)라는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처음에는 「저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을 노래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생각이 지금 쪼들리는 자신에게도 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생각은 막연한 관심이 아닙니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외침을 들으시고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셨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각해 주신다는 말은 그분께서 자신을 잊지 않으시고 돌보실 것이라는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구덩이에서 건져 올려진 뒤의 안정된 자리에 서 있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쪼들리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각해 주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각해 주신다는 확신은 시인이 강하고 넉넉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쪼들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붙드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저를 도우시고 건져 내시는 분입니다. 저의 하나님, 지체하지 마십시오.」라는 마지막 두 문장에는 현재의 고백과 미래를 향한 요청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도우시고 건져 내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아직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지만, 현재의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지체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새 노래가 다시 간구가 되는 자리
시편 40편에서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귀는 말씀을 듣는 귀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노래는 그분의 구원을 전하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귀와 입을 받은 사람이 다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삶은 더 이상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아는 삶입니다.
구원은 단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경험이 아닙니다. 과거에 구원받았던 사람은 그 경험을 기억하며 현재에도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다시 구원을 경험한다면, 그 새로운 경험 역시 앞으로의 믿음과 찬양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시편 40편의 마지막으로 돌아가 보면, 처음의 장면이 다시 보입니다.
처음에 시인은 깊은 구덩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외침을 들으셨고, 몸을 기울여 그를 끌어 올리셨습니다. 그의 발은 바위 위에 굳게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는 새 노래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마지막에서 그 사람은 다시 가난하고 쪼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재앙이 그를 에워싸고 있고, 원수들이 그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하나님께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구덩이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몸을 기울여 자신의 외침을 들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편의 처음과 마지막이 만납니다.
처음에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지체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셨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시고 건져 내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두 장면을 연결하는 말이 있습니다. 6절의 「저희를 향한 주님의 생각은 참으로 많습니다」와 18절의 「주님께서는 저를 생각해 주실 것입니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모두 알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왜 다시 고난이 닥쳤는지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시편 40편에서 믿음은 한 번 구원받은 뒤 다시는 도움을 구하지 않는 강인함이 아닙니다. 이전에 자신을 구해 주셨던 하나님께 다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시편의 처음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에 새 노래를 넣으셨습니다. 그 입으로 시인은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시편의 마지막에서 같은 입으로 다시 간구합니다.
그 기도 뒤에 어떤 구원이 이루어졌는지는 아직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한때 자신을 진창에서 끌어 올려 바위 위에 세우셨던 분입니다.
지금도 자신을 생각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분께 외칩니다.
아직 새로운 구원의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구원을 기다리는 기도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