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41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병상 곁에 누가 남아 있는가

병든 사람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이 그를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속으로는 그의 죽음을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은 병상을 찾아와 들은 이야기를 밖으로 가져가 퍼뜨립니다. 심지어 한때 같은 빵을 먹으며 평화롭게 지냈던 사람도 등을 돌립니다.

시편 41편은 이런 사람들 사이에 누워 있는 한 사람의 기도입니다. 그는 병들었고, 원수들에게 둘러싸였으며,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당했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뜻밖에도 그의 고통에서 시작하지 않고, 「약한 사람의 형편을 헤아려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왜 배반당한 사람의 기도가 약한 사람을 돌보는 사람의 복으로 시작할까요?

시인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기 전에,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먼저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 사이에서 한 가지 대조가 선명해집니다. 사람들은 병든 이의 약함을 이용하지만,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가 약해진 자리에서 그를 붙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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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이를 헤아리는 사람의 행복

시편 41:1–4 본문 →

행복은 무엇을 알아보는 데서 시작하는가

복되구나, 힘없는 이를 헤아리는 사람이여. 불행이 닥치는 날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건져 주실 것입니다.시편 41:2 · 두루새김

시편 첫머리의 「약한 사람(⁨דַּל⁩)의 형편을 헤아려 돌보는」(⁨שָׂכַל⁩)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행동보다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원문에서 「헤아려 돌보는」은 지혜롭게 판단하거나 사려 깊게 살핀다는 뜻을 가진 동사의 형태이고, 「약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거나 힘과 자원이 부족해 약해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의 핵심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약한 사람의 처지를 알아보고, 그 처지를 생각하며 행동하는 분별력입니다.

도움을 줄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약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베풀 수도 있고, 그의 사정을 듣지 않은 채 자기 판단을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는 사람은 약한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형편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잠언 29:7은 비슷한 관점을 보여 줍니다. 의인은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알아보지만, 악인은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시편 41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약한 사람을 헤아리는 태도가 단순히 사회에서 지켜야 할 좋은 태도에 머물지 않고, 여호와야훼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과 연결됩니다.

약한 사람을 돌보는 이도 약해질 수 있다

2절은 약한 사람의 형편을 헤아려 돌보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곧이어 그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여호와야훼께서 건져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편은 선한 사람에게 재앙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도 재앙의 날을 맞을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4절에 이르면 그 사람은 아예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따라서 이 행복 선언을 선행에 따라 자동으로 주어지는 보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약한 사람을 돌보면 자신은 결코 병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은 약함을 남의 문제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도 내일은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이러한 인간의 약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지켜 살려 주시고 그는 이 땅에서 복을 누릴 것입니다. 주님, 원수들이 바라는 대로 그를 넘겨주지 마십시오.시편 41:3 · 두루새김

3절에는 세 가지 행동이 이어집니다. 여호와야훼는 지키시고, 살려 주시고, 원수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넘겨주지 않으십니다. 본문은 이 가운데 마지막 내용을 하나님께 드리는 직접적인 간구로 전환합니다.

앞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어떤 분이신지를 이야기하던 시인이 이제 「주님」이라고 부르며 직접 말을 겁니다. 하나님에 관한 선언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작은 변화는 뒤이어 펼쳐질 개인적인 탄식을 준비합니다.

하나님은 병상에 누운 사람을 어떻게 돌보시는가

여호와야훼께서 병들어 누운 그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가 앓을 때 당신은 그의 잠자리를 온통 바꾸셨습니다.시편 41:4 · 두루새김

여기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병이 나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말이 아닙니다. 힘이 빠져 스스로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 사람을 받쳐 주는 모습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뒤이어 나오는 「그의 잠자리를 온통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는 해석이 조금 어렵습니다. 히브리어의 핵심 동사는 하파크(⁨הָפַךְ⁩)로, 뒤집거나 돌이키거나 어떤 상태를 변화시키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병든 사람의 잠자리를 정돈하고 돌보신다는 이미지입니다. 다른 하나는 병으로 가득한 그의 상태를 돌이켜 회복시키신다는 이미지입니다.

후자의 경우 잠자리를 바꾸는 것은 병든 처지를 바꾸는 비유가 됩니다. 어느 쪽이 정확한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두 해석 모두 앞의 「병으로 자리에 누운 그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라는 선언과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병든 사람의 잠자리까지 관여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에는 특별한 예배 장소도, 제사장의 의식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장 무력해지는 일상의 공간, 곧 병상이 하나님의 돌봄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그 병상에 누운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일이며,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분을 공경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58:6~10도 억눌린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 연결된다고 선언합니다. 이 본문들은 사람의 약함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시편 41편과 만납니다.

죄를 고백하는 사람과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시편 41:5–9 본문 →

「제가 주님께 죄를 지었으니」

5절에서 시인의 말투가 달라집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를 고쳐 주십시오.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시편 41:5 · 두루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약한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으로 「저」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약한 사람을 돌보는 사람도 병들 수 있다는 말이 시인의 처지와 겹칩니다.

이 고백을 근거로 시인의 병이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어떤 죄를 지었는지 밝히지 않으며, 그 죄와 질병 사이의 원인과 결과도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는 원수들에게 잘못을 당했다고 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악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여기서 「저를 고쳐 주십시오」라는 요청도 육체의 회복만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원문에서는 자신의 생명이나 자신 전체를 고쳐 달라고 합니다. 병상에 누운 몸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는 죄를 지은 자신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기를 구합니다.

병문안을 가장한 적대감

6절부터 분위기가 갑자기 바뀝니다.

원수들은 나를 두고 악한 말을 합니다. 「언제 저자가 죽고 그 이름이 사라질까?」시편 41:6 · 두루새김

이 사람들은 시인의 병이 낫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단순히 죽기만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이름까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름은 한 사람의 존재와 기억, 명예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이름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넘어,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남긴 자리와 기억마저 없어지기를 바라는 말입니다.

누가 나를 보러 오면 빈말을 늘어놓고 속으로는 악을 쌓아 두었다가 밖에 나가 떠벌립니다.시편 41:7 · 두루새김

짧은 구절이지만 하나의 장면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안에서는 병문안을 하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밖에서는 그를 해칠 말을 퍼뜨립니다.

분명한 것은 방문자의 말과 마음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시인 곁에 머무는 동안에도 시인을 위한 사람이 아닙니다.

약한 사람의 형편을 헤아려 돌보는 사람은 그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지만, 이 방문자는 그의 약함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찾아냅니다.

같은 병상을 찾아가더라도 사람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병을 진단하는가, 저주를 선언하는가

8~9절에서 개인의 적대감은 여러 사람의 공동 행동으로 확대됩니다. 「저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 수군거리고, 9절에는 그들의 말이 직접 제시됩니다.

「몹쓸 병이 저자에게 쏟아졌어. 자리에 누웠으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거야.」시편 41:9 · 두루새김

「몹쓸 병」은 치명적인 질병으로도, 시인에게 닥친 악한 재앙이나 파멸적인 상태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뒤의 문장은 분명합니다.

원수들은 시인의 현재 상태를 그의 최종 운명으로 단정합니다.

그가 병상에 누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그들의 주장입니다. 시편은 이 말을 하나님의 판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질병을 바라보는 위험한 태도가 드러납니다.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의 미래까지 단정하고, 그 단정을 마치 확실한 진실인 것처럼 퍼뜨리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원수들의 악의적인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이용하여 내리는 판결에 동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7절의 방문자의 속마음을 「마음속으로는 저를 해칠 말을 모았다가」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원문에서는 마음속에 악을 모은다고 말하며, 정확히 무엇을 모으는지는 열려 있습니다. 9절의 「몹쓸 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데바르 벨리야알로, 악하거나 파괴적인 일, 또는 몹쓸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가운데 질병으로 읽는 뜻을 문면에 드러냈습니다. 「덮쳤어」로 옮긴 원문의 표현 역시 무언가가 부어지거나 단단히 붙은 상태를 나타낼 수 있어, 이 구절을 악한 것이 그에게 달라붙었다는 뜻으로 읽는 길도 있습니다.

함께 빵을 먹던 사람의 발뒤꿈치

시편 41:10 본문 →

시인은 여러 원수의 적대감을 이야기하다가 10절에서 한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합니다.

내가 믿고 가까이 지내던 이, 내 빵을 먹던 그마저 나를 향해 발꿈치를 치켜들었습니다.시편 41:10 · 두루새김

시편에서 가장 아픈 장면입니다.

앞의 두 표현이 관계의 성격을 설명한다면, 세 번째는 그 관계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여 줍니다. 누군가의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그의 집과 식탁, 혹은 그의 돌봄과 생계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표현만으로 두 사람이 어떤 사회적 관계였는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시인에게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발뒤꿈치를 치켜들었습니다.

발뒤꿈치를 드는 동작은 상대에게 발을 들어 올리는 적대적인 몸짓을 떠올리게 합니다. 평화로운 관계가 적대적인 관계로 뒤집어졌다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의 빵을 먹던 사람이 이제 그를 향해 발을 듭니다.

시편은 배반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이 없다는 점은 오히려 시의 감정적 중심을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독자는 그가 누구였는지를 알아야만 배반의 무게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6절에서 원수들이 자신의 죽음을 기다린다고 말했습니다. 7절에서는 방문자가 빈말을 한다고 했고, 8절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자신을 해칠 일을 꾸민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 모든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를 꺼냅니다.

자기를 해친 사람 가운데는 처음부터 원수였던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저를 향해 발뒤꿈치를 치켜들었습니다」라고 옮겨 이 몸짓을 그대로 남겼습니다. 단순히 배반했다는 말로 풀면 사건의 의미는 이해하기 쉽지만 이미지 하나를 잃게 됩니다. 실제로 발로 찼다는 뜻인지, 공격하거나 업신여기는 행동을 비유한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표제는 이 시를 다윗의 시라고 소개하지만, 10절의 배반자를 다윗의 특정한 신하로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사무엘하 15~17장에서 다윗이 아히도벨의 배반을 경험한 사건을 떠올릴 수는 있으나, 그것이 이 시의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이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시편 55:13~15에서도 원수가 아닌 가까운 벗의 배반이 고통의 중심에 놓이며, 상처가 특별히 깊은 이유는 이전에 나누었던 친밀한 관계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요한복음 13:18은 시편 41:10의 빵과 발뒤꿈치에 관한 부분을 직접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겪으실 배반에 연결합니다. 이는 시편이 본래 다루던 신뢰와 배반의 경험을 예수님의 이야기 안에서 다시 읽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시편 자체의 모든 내용을 예수님의 생애에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41편은 먼저 병든 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진실한 기도로 읽혀야 합니다.

「일으켜 주십시오」

시편 41:11–13 본문 →

사람들의 마지막 말에 맞서는 기도

10절의 배반 이후 시인은 곧바로 여호와야훼께 말을 겁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 당신이 나를 불쌍히 여겨 일으켜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되갚겠습니다.시편 41:11 · 두루새김

사람들은 그를 버렸습니다. 가까웠던 사람까지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9절의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거야」와 11절의 「일으켜 주십시오」는 서로 맞서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어에서도 두 구절은 모두 일어남을 뜻하는 같은 계열의 동사를 사용합니다.

원수들은 시인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그의 끝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말을 마지막 말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의 미래는 원수들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기도에는 오늘날 독자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내용도 있습니다. 시인은 회복을 구하면서 원수들에게 갚아 줄 뜻도 밝힙니다. 이 말을 단순히 원수를 용서하겠다는 의미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한 문장으로 시인이 어떤 방식의 보복을 실행하려 했는지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시편은 인간의 고통을 지나치게 정돈된 감정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고통받는 인간의 기도에는 이처럼 회복을 향한 소망과 갚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함께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긴장은 시 안에서 완전히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11절 이후 시인의 관심은 원수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하셨는지로 옮겨 갑니다.

원수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

당신이 나를 기뻐하시는 줄 이것으로 알았습니다. 참으로 내 원수가 나를 이겼다며 함성을 지르지 못합니다.시편 41:12 · 두루새김

기도의 분위기가 바뀐 것입니다.

이 변화를 실제 구원의 경험 이후에 드리는 감사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며 구원을 미리 고백하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시편은 이 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한쪽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저를 이겼다고 함성을 지르지 못하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기뻐하는 정도를 넘어, 적을 이긴 사람이 소리 높여 승리를 선언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수들은 시인의 죽음과 이름이 사라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선언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편의 마지막 고백은 그보다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갑니다.

나는 올곧게 살아왔고 당신은 그런 나를 붙들어 주셨으며 당신 앞에 영원히 세워 주셨습니다.시편 41:13 · 두루새김

4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병상에 누운 사람을 붙드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분이 자신을 붙드셨다고 고백합니다. 11절에서는 자신을 일으켜 달라고 구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분 앞에 세워 주셨다고 말합니다.

병상에서 시작한 시인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으로 바뀐 것입니다.

죄를 고백했는데 어떻게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13절의 「떳떳하게 살아온 저」는 5절의 죄 고백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쓰인 히브리어 낱말은 온전함, 성실함, 흠 없이 행하려는 정직한 태도 등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반드시 죄가 전혀 없는 절대적 완전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해치려는 원수들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성실함과 진실함을 주장합니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결백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3절을 죄가 없는 사람만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선언으로 읽는 것은 앞선 기도와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의지한 것은 여호와야훼의 은혜입니다.

5절에서도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했고, 11절에서도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라고 다시 간구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성실함을 자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며 은혜를 구한 자신을 하나님께서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은 시인의 이름이 사라지기를 바랐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주님 앞에 세워졌다고 고백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랐던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는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마지막에 기뻐하는 것은 단순히 병이 나았거나 원수들이 패배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여전히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13절의 낱말을 떳떳하게 살아온 사람의 모습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시편의 여러 탄식에서 의로움이나 온전함을 호소하는 표현은 흔히 이러한 구체적인 다툼 속에서 등장합니다. 「영원히」라는 표현을 곧바로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옮길 필요는 없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확신이 중심입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이스라엘의 찬양으로

시편 41:14 본문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양받으시기를. 아멘, 아멘.시편 41:14 · 두루새김

마지막 절에 이르면 시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끝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시편 1편은 행복한 사람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시편 41편도 「약한 사람의 형편을 헤아려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시편 첫 번째 권의 시작과 끝에 인간의 행복에 관한 선언이 자리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시편 1편부터 41편까지 읽은 독자는 그 사이에서 의인의 고난, 악인의 번영, 배반, 죄의 고백, 회개, 탄식, 구원의 기도를 거듭 만났습니다. 따라서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는 행복은 고통을 모르는 사람의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병들고 배반당하며 죄를 고백해야 하는 인간도 여호와야훼의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놓인 행복입니다.

시인의 삶에는 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의 병과 원수들과의 싸움도 특정한 시간 안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가 찬양하는 여호와야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한정된 삶에 일어난 구원의 경험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증언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은 전통적으로 다섯 권으로 나뉘는데, 시편 41편은 그 첫 번째 권인 1~41편을 마무리합니다. 41:14와 비슷한 찬양은 72:18~19, 89:53, 106:48에도 등장하며 각 권의 끝을 표시합니다. 따라서 14절은 시편 41편의 마지막 찬양인 동시에 시편 첫 번째 권 전체를 마무리하는 송영으로 기능합니다. 이것이 시편의 최초 작곡 단계부터 포함되었는지, 시편집의 편집 과정에서 덧붙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병상에 누운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시편 41:1–14 본문 →

시편을 읽으며 우리는 흔히 병상에 누운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놓습니다. 그러나 시편 41편의 첫 문장은 독자에게 다른 자리를 내어 줍니다. 우리는 병상에 누운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를 찾아오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 방문자는 병든 사람의 얼굴을 보았고, 그의 말을 들었고, 그의 처지를 알아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돌봄이 아니라 비방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누구를 위해 마음을 썼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시인은 인간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하면서,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보여 줍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을 헤아리는 삶은 하나님께서 약한 인간을 대하시는 방식과 어울리는 삶입니다. 시편 41편은 하나님께 돌봄을 받는 인간이 다른 사람의 약함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시편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인간에게 완전한 돌봄을 요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저 인간의 돌봄이 얼마나 쉽게 실패하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방문자는 빈말을 했고, 원수들은 죽음을 기다렸으며, 친밀했던 사람은 발뒤꿈치를 치켜들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관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시인은 자신을 붙드신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처음에 그는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기다렸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를 붙드셨습니다.

시인이 다시 설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약해졌을 때에도 그를 붙드시는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