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42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물은 넘치는데 영혼은 목마르다

시편 42편은 목마른 사슴으로 시작합니다. 사슴은 물을 찾아 헤매고, 시인은 하나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그런데 시의 중간에 이르면 물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깊은 물이 깊은 물을 부르고, 거센 물줄기와 파도가 시인을 덮칩니다.

처음에는 물이 없어 목말랐는데, 나중에는 물이 너무 많아 그 속에 잠기는 듯합니다.

이 뜻밖의 변화가 시편 42편의 고통을 드러냅니다.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고난이 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애타게 찾지만,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낍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했던 기억은 생생하지만, 이제는 눈물이 그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는 또 하나의 특이한 장면이 있습니다. 시인이 자기 영혼에게 말을 건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왜 풀이 죽어 내 안에서 술렁이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도 말합니다.

시편 42편은 슬픔을 이겨 낸 사람의 회고가 아니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사람의 노래입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842편 본문 읽기 →

하나님을 향한 갈증

시편 42:1–3 본문 →

사슴에게 물이 필요한 것처럼

사슴이 헐떡이며 물 흐르는 골짜기를 찾듯, 하나님, 내 영혼이 헐떡이며 당신을 찾습니다.시편 42:2 · 두루새김

이 비유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그리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슴과 물의 관계입니다. 목마른 사슴에게 물은 여러 좋은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갈망이 바로 그렇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시(⁨נֶפֶשׁ⁩)는 문맥에 따라 생명, 자신, 살아 있는 존재 전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몸과 분리된 마음속의 종교적 감정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필요로 하듯, 자신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는 이러한 갈증의 대상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목말라합니다. 언제 내가 가서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겠습니까?시편 42:3 · 두루새김

시인이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어떤 선물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을 목말라합니다.

특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중요합니다. 시인은 생명이 없는 신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계시며 자기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질문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고통이 한 문장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왜 하나님을 만나러 가야 하는가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예배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소 안에만 계시거나, 성소 밖에서는 만날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성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가운데 머무신다는 사실을 특별하게 나타내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정해진 절기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 모였고, 공동체의 찬양과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표현했습니다. 시편 42편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도 이러한 예배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장소를 방문하고 싶다는 말과 다릅니다. 시인은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누리던 예배의 관계를 그리워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 가운데 서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가 왜 그곳에 갈 수 없게 되었는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전쟁이나 추방, 강제적인 피신, 개인적인 사정 등 여러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하나를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시인이 지금 원하는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갈증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갈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 서던 기쁨을 기억하는 사람이 그 기쁨을 다시 누리지 못해서 겪는 갈증입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3:17과 신명기 16:16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해마다 세 차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두루새김이 「설 수 있겠습니까?」로 옮긴 자리의 히브리어는 에라에로, 전통적인 모음 표기에 따르면 수동형 계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본다는 뜻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 앞에 서는 의미가 자연스럽습니다. 시편 42편은 시편 전체에서 새로운 부분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시편 41편은 첫 번째 권을 마무리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시편 42편에서는 고라 자손의 이름이 등장하고, 시편 두 번째 권이 시작됩니다. 고라 자손은 구약에서 성소의 일 및 찬양과 관련된 집안으로 나타납니다. 역대상 9:19에는 성막의 문을 지키는 일을 맡은 고라 자손이 등장하고, 역대하 20:19에서는 고라 자손이 일어나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합니다. 이러한 배경은 시편 42편에서 공동체 예배의 기억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표제만으로 이 시를 누가, 어느 시대에 지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이 빵이 되고, 찬양이 기억이 되다

시편 42:4–5 본문 →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4절에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말 때문에 더욱 깊어집니다.

눈물이 낮에도 밤에도 내 빵이 되었습니다. 온종일 사람들이 내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시편 42:4 · 두루새김

시인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말은 단순히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시인의 현재 처지를 조롱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돌보신다면 왜 너는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느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질문은 시인에게 특별히 고통스럽습니다. 그 자신도 하나님을 애타게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미 「언제 제가 가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사람들이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두 질문 모두 하나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 듯한 상황을 둘러싸고 있지만,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묻습니다. 원수들은 하나님을 믿는 그의 신앙을 조롱하기 위해 묻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빵은 일상의 기본적인 양식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인이 매일 먹는 것은 빵이 아니라 눈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많이 울었다는 표현을 넘어섭니다. 빵은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지만, 눈물은 그의 고통을 드러냅니다. 생명을 지탱하는 음식의 자리에 슬픔이 들어와 있습니다.

앞에서는 사슴이 물을 찾았습니다. 이제 시인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물은 갈증을 풀어 주지 못합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왜 가장 아픈가

5절에서 시인은 과거를 돌아봅니다.

이 일들을 떠올리며 내 영혼을 쏟아 놓습니다. 무리와 함께 걸어 하나님의 집까지 그들을 이끌던 날, 환호와 감사의 소리, 축제를 지키는 큰 무리.시편 42:5 · 두루새김

시인이 기억하는 것은 혼자 조용히 기도하던 시간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과 함께 걸었던 시간입니다. 시인의 기억 속에 공동체의 즐거운 예배 행렬이 자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앞의 갈증이 단순히 개인적인 종교 경험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모인 백성 가운데 있던 자기 자리를 그리워합니다.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 같은 방향을 향하는 발걸음, 기쁨과 감사의 목소리, 그리고 그들이 향하는 하나님의 집이 모두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것이 과거형입니다.

기억은 시인에게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합니다. 한편으로 그는 기억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셨던 시간을 다시 떠올립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 기억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잃었는지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기억하기 때문에 소망할 수 있지만, 기억하기 때문에 더 아픈 것입니다.

시인은 그 기억 앞에서 「제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 모두 쏟아 놓는 모습을 그립니다. 자신의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을 만큼 커진 그리움과 슬픔이 기도로 흘러나옵니다.

시편 42편은 이러한 감정을 믿음이 없는 모습이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이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가 그의 그리움 속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눈물을 빵에 빗댄 표현은 시편 80:5에서도 등장합니다.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눈물의 빵을 먹이시고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다고 탄식합니다. 두 시편 모두 일상의 양식이 슬픔으로 바뀌는 이미지를 통해 고통이 삶 전체를 차지한 상태를 드러냅니다. 5절의 「그들을 하나님의 집까지 이끌곤 했습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인도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그들과 함께 천천히 행진했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이 공식적인 행렬 지도자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영혼에게 말을 걸다

시편 42:6 본문 →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말하다가 갑자기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내 영혼아, 왜 고개를 떨구고 내 안에서 술렁이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나는 다시 그분께 감사하리라, 그 얼굴에서 오는 구원으로.시편 42:6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단순히 표현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감정을 느끼고 있는 자기 자신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여기서 「풀이 죽어」와 「술렁이느냐」는 서로 다른 상태를 표현합니다. 원문에서는 하나가 아래로 가라앉는 움직임을, 다른 하나가 안에서 소란스럽게 일어나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겉으로는 풀이 죽어 기운이 빠져 있지만, 속에서는 생각과 감정이 끊임없이 요동칩니다.

시인은 그 상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왜 풀이 죽어 내 안에서 술렁이느냐?」라는 질문은 자신에게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꾸짖는 말이 아닙니다. 시인은 이미 그 이유를 충분히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증, 공동체에서 떨어져 있는 처지, 사람들의 조롱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는 슬픔에 사로잡힌 자신에게 다른 방향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기다려라」는 막연하게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대를 두고 그분의 행동을 기다리는 의미를 지닙니다.

왜 기다릴 수 있을까요?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 앞에 언제 다시 설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원문에서는 이 자리에 하나님의 얼굴이 언급됩니다. 이제는 「그분의 얼굴에서 오는 구원」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단순한 신체적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돌보시고 호의를 베푸시는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구원이 아직 현재의 경험으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지금 다시 감사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다시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슬픔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슬픔을 지나 하나님께 다시 감사할 날을 바라보는 고백입니다. 믿음은 지금 느끼는 감정이 곧 자신의 마지막 상태라고 단정하지 않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고백을 한 직후에도 여전히 슬픕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다시 「저의 하나님, 제 안에서 제 영혼이 가라앉습니다」라고 말합니다. 6절에서 자신에게 건넨 말이 그의 감정을 즉시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기로 했다고 해서 기다림의 고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민수기 6:24~26에서 하나님께서 얼굴을 비추시고 얼굴을 드시는 것은 백성에게 은혜와 평화를 베푸시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시편 42편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얼굴이 자신에게 구원으로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물을 찾던 사람이 물결에 잠기다

시편 42:7–8 본문 →

예루살렘에서 멀어진 자리

시인은 이제 자신의 현재 위치를 이야기합니다.

나의 하나님, 내 영혼이 내 안에서 고개를 떨굽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요단 땅에서, 헤르몬의 산들에서, 미츠아르산에서.시편 42:7 · 두루새김

헤르몬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산악 지대로, 요단강 상류의 물이 시작되는 지역과 지리적으로 연결됩니다. 시인이 정확히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지도로 표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은 하나님의 집으로 향하던 과거의 기억과 요단·헤르몬 지역을 언급하는 현재의 기도를 대비합니다. 시인은 예배하던 공동체의 자리에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인은 영혼이 가라앉기 때문에 하나님을 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이 가라앉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슬픔은 그의 기억을 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이끕니다.

5절에서는 과거의 예배를 기억했습니다. 7절에서는 그 기억의 대상이 하나님 자신에게로 향합니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떠올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시간에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깊은 물이 깊은 물을 부른다

8절에 이르면 시편의 물 이미지가 갑자기 거대해집니다.

당신의 물줄기 소리에 깊은 물이 깊은 물을 부릅니다. 당신의 부서지는 물결, 당신의 파도가 모두 내 위를 넘어갔습니다.시편 42:8 · 두루새김

첫머리의 사슴은 물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이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그것도 생명을 살리는 잔잔한 시냇물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물결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깊은 물 하나가 다른 깊은 물을 부릅니다. 깊은 물들이 서로 응답하듯 소리를 주고받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물줄기 소리가 더해집니다.

물을 찾아 헤매던 영혼이 이제는 물에 잠길 것처럼 느낍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마지막 문장에서 드러납니다. 시인은 그 물결을 「주님의 거센 물결과 파도」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현재의 고통 사이의 중요한 긴장이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덮친 고통이 하나님의 다스림 밖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시인을 벌하고 계시다는 뜻도 아닙니다. 시인은 고통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을 압도하는 현실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그 물결까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놓여 있음을 고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 속한 물결이 자신을 덮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런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할 수 있을까요? 바로 다음 절이 그 질문에 응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의 「헤르몬 산들」에 해당하는 표현은 복수형입니다. 헤르몬 일대의 여러 봉우리나 산악 지역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범위를 뜻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미츠아르산의 정확한 위치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름에 사용된 히브리어 표현은 「작다」는 의미와 관계가 있을 수 있으나, 이것만으로 특정 산을 지목할 수는 없습니다. 「깊은 물」은 창세기 1:2에서 깊은 물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 단어로, 물의 넓음과 깊이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줄기」로 옮긴 표현은 강한 물의 흐름이나 쏟아지는 물을 나타내며,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헤르몬과 요단 일대의 물길을 배경으로 이런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 시인이 특정 폭포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뒤이어 파도가 등장하기 때문에 시인은 거센 물줄기와 큰 물결의 이미지를 함께 사용하여 자신을 압도하는 고통을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편 88:7에서도 하나님의 파도가 고통받는 사람을 짓누른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탄식은 고난을 하나님의 능력과 무관한 사건으로 분리하지 않으면서, 그 고난이 왜 자신에게 닥쳤는지를 하나님께 묻는 기도의 한 방식입니다.

눈물이 흐르는 밤에 남아 있는 노래

시편 42:9 본문 →

낮에는 여호와야훼가 한결같은 사랑을 내리시고 밤에는 그분의 노래가, 내 생명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나와 함께 있습니다.시편 42:9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의 분위기를 바꿉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갈증과 자신을 덮친 물결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물결을 말한 데 이어 그분이 한결같은 사랑을 보내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한결같은 사랑」은 관계 안에서 베푸는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로운 돌봄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원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명하신다고 표현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보내 주시고」로 옮겨, 하나님의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실제로 행해지는 돌봄임을 드러냅니다.

자신을 삼킬 듯한 물결과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같은 시 안에 놓여 있습니다.

시인은 둘 중 하나를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고난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부정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없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낮과 밤이 바뀌는 자리

9절은 4절과도 연결됩니다. 4절에서 시인은 눈물이 낮에도 밤에도 자신의 빵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낮에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있고, 밤에는 그분의 노래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같은 낮과 밤이지만, 시인이 그것을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렇다고 눈물이 이미 멈추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슬픔이 사라진 상태에 관한 묘사라기보다,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돌봄을 붙드는 신앙의 고백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밤에 시인과 함께하는 노래가 「제 생명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5절에서 시인이 기억하던 노래는 무리의 기쁨과 감사의 외침이었습니다. 이제 그 무리는 시인의 곁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향하는 행렬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가 홀로 있는 밤에도 노래는 기도가 되어 그와 함께합니다.

시편의 첫머리에서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목말라했습니다. 이제는 그 하나님을 「제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단순히 어딘가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의 생명이 바로 그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찾는 목소리이지만, 그가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그분의 노래」라는 표현에는 본문상의 작은 문제가 있습니다. 전해 내려온 히브리어 자음 표기와 낭독 전통 사이에 차이가 있어, 누구의 노래로 이해해야 하는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낭독 전통을 따라 「그분의 노래」라고 옮겼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따르든 이 구절이 노래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전해졌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바위이신 하나님」께 묻는 「왜 저를 잊으셨습니까?」

시편 42:10–11 본문 →

9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노래를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마음이 평온해지고 모든 의문이 사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내 바위이신 하나님께 나는 말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는 원수에게 짓눌려 어두운 얼굴로 다녀야 합니까?시편 42:10 · 두루새김

바위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의지할 수 있게 하시는 바위로 불리십니다(신명기 32:4; 시편 18:2). 시인은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으셨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저의 바위이신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왜 저를 잊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모순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질문이 절실한 이유는 그 하나님을 자신의 바위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무관한 분이셨다면 잊으셨느냐고 물을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기에 현재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바위라면 왜 자신이 이렇게 흔들려야 합니까? 그 질문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내놓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고백했던 말을 취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믿으면서도 그 사랑을 지금 경험하지 못하는 현실에 관해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질문과 시인의 질문

11절에서 원수들의 말이 다시 등장합니다.

내 뼈를 부수듯 원수들이 나를 비웃습니다. 온종일 내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시편 42:11 · 두루새김

4절에 등장했던 질문이 반복됩니다. 이 반복 때문에 시편의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그 고통스러운 경험을 조롱거리로 삼습니다.

모욕은 단순히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제 뼈를 부수듯」이라는 표현은 그 말이 시인의 존재 깊숙한 곳까지 상처를 입히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뼈는 사람의 몸을 지탱하는 단단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원수들의 말은 그 뼈마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줍니다.

원수들은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시인은 「왜 저를 잊으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원수들의 질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쪽으로 향합니다. 시인의 질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든 채 그 안에서 답을 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왜」라고 묻는 것이 반드시 믿음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믿음과 탄식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의 탄식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관계와 지금 경험하는 현실 사이의 간격을 하나님 자신께 호소하는 경우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하박국 1:2에서 예언자는 하나님께 언제까지 부르짖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시편 13:1~2에서도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자신을 잊으실 것인지 질문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분이기에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슬픔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다시 기다리다

시편 42:12 본문 →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다시 자기 영혼에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왜 고개를 떨구느냐? 왜 내 안에서 술렁이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나는 다시 감사하리라, 내 얼굴의 구원이신 나의 하나님께.시편 42:12 · 두루새김

6절의 후렴이 되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 어디에도 그의 현실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슬픕니다.

그러므로 후렴이 반복되는 이유를 시인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는 슬픔이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같은 말을 다시 해야 합니다.

그가 붙들고 있는 약속은 여전히 미래에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라는 말은 6절에서도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후렴에서는 한 가지 표현이 달라집니다. 6절에서는 「그분의 얼굴에서 오는 구원」이라고 말했습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을 「내 얼굴을 밝게 해 주시는 구원자,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원문에서는 6절에 하나님의 얼굴이, 12절에 시인 자신의 얼굴이 각각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를 지나치게 확대해서 구원에 대한 서로 다른 설명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표현 모두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향합니다.

그러나 시 전체의 흐름에서 이 변화는 의미 있게 읽힙니다.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 앞에 서고 싶어 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얼굴에서 오는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자기 얼굴을 밝게 해 주시는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얼굴은 어떤 상태입니까? 그는 풀이 죽어 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릅니다. 그는 슬퍼하며 다닙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자기 얼굴을 밝게 해 주시는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이 표현을 단순히 언젠가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는 말로 축소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감정이 나아지는 것보다 큰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럼에도 이 고백 속에는 인상적인 대비가 있습니다. 풀이 죽은 사람의 얼굴과 그 얼굴을 밝게 해 주시는 구원자이신 하나님입니다. 시인은 자기 얼굴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얼굴의 마지막 모습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의 슬픔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그는 슬픔이 자신의 최종적인 모습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42편과 43편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편 42:6과 42:12의 후렴은 43:5에서도 다시 나타납니다. 시편 43편에는 별도의 표제가 없으며, 두 시편 사이에는 표현과 주제의 연결이 이어집니다. 이 때문에 두 시편을 본래 하나의 시였거나, 적어도 하나의 연속된 작품처럼 읽을 수 있다고 보는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처음부터 하나의 작품이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시편 42편만 보더라도 두 번의 후렴이 하나의 구조를 이룹니다. 처음 후렴은 과거의 예배를 기억한 뒤에 등장합니다. 마지막 후렴은 현재의 고난과 원수들의 조롱을 털어놓은 뒤에 등장합니다. 이러한 구성은 시편 42편을 단순한 절망에서 확신으로 이동하는 노래로 읽기 어렵게 만듭니다. 탄식과 확신이 서로 얽힌 채 시편 전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시편 42편은 예레미야애가 3:19~26과도 연결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 말하는 이는 고통과 방황을 기억하며 자신의 영혼이 낙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어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음에 떠올리고 그분을 기다립니다. 두 본문 모두 고통의 기억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그 기억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편 42:1–12 본문 →

시편 42편의 중심에는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왜 그분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까?

시인은 이 질문에 곧바로 이론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계속해서 부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의 생명의 하나님, 자신의 바위이신 하나님, 자기 얼굴을 밝게 해 주시는 구원자이신 하나님.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감정에 있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 말을 거는 관계를 놓지 않는 데 있습니다.

시편 42편의 마지막에는 기도 응답의 구체적인 장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도, 그를 조롱하던 사람들이 침묵하는 모습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에 이르러 물을 마시는 모습도 없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는 것은 여전히 풀이 죽어 있는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영혼이 왜 이토록 술렁이는지 묻습니다.

처음에 시인은 사슴이 물 흐르는 시내를 애타게 찾듯 하나님을 찾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뒤로 눈물과 기억, 기쁨의 외침과 조롱, 깊은 물과 밤의 노래를 지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경험을 지나온 뒤에도 그가 찾는 분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가 기다리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날입니다.

시편은 그날이 언제인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아직 목마른 사람의 입에 한 문장을 남깁니다. 「하나님을 기다려라. 내 얼굴을 밝게 해 주시는 구원자, 나의 하나님께 내가 다시 감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물을 마시지 못한 사슴처럼, 시인의 영혼은 여전히 하나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하지만 그의 갈증은 아무 데로나 향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를 찾고 있는지 압니다.

그래서 아직 목이 마른 채로, 다시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