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43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하나님께 돌아갈 길을 구하다

시편 43편에는 길을 잃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적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 그리고 하나님의 제단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를 억누르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는 돌아가고 싶지만, 자신이 원하는 곳에 이를 힘도 길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뜻밖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의 빛과 진실하심을 보내 주십시오. 그것들이 저를 이끌어 주님의 거룩한 산으로, 주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데려가게 해 주십시오.」(3절)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기도가 시편 43편의 중심입니다.

시편 42편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갈증과 그분이 계시지 않는 듯한 고통이 두드러졌습니다. 이제 시편 43편에서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다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구합니다.

그런데 그 길은 시인의 힘으로 열어 가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에게 오셔서 길을 이끌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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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위해 판결해 주십시오」

시편 43:1 본문 →

시인은 왜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부르는가

시편은 다급한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를 위해 판결하시고 신실하지 않은 민족에 맞서 내 편에서 다투어 주십시오. 거짓되고 불의한 사람에게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시편 43:1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께 위로부터 구하지 않습니다. 먼저 판결을 요청합니다. 여기에는 법정에서 쓰는 말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판결해 주십시오」는 말 그대로는 「저를 재판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표현은 같은 어근을 반복하여 「제 송사를 다투어 주십시오」, 곧 자신의 사건을 맡아 변론해 달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제 편에서 다투어 주십시오」라고 옮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무조건 벌해 달라고만 요청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건을 공정하게 판단하시고, 자신을 대신하여 그들과 맞서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복수의 요구와 구별됩니다. 시인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마지막 판단과 구원을 하나님께 구합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지금 시인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속이며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겪는 어려움은 단순한 불행이나 개인적인 우울함만은 아닙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필요한 구원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를 억누르는 옳지 않은 상황 자체가 바로잡혀야 합니다.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부르는 것은 그분이 개인의 마음속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옳지 않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이 없는 민족」은 누구인가

시인은 상대를 「한결같은 사랑이 없는 민족」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쓰인 하시드는 한결같은 사랑을 뜻하는 헤세드와 관련된 표현으로, 신실하고 경건하며 관계 안에서 충실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신앙적으로 경건하지 않은 민족이라는 뜻으로도, 한결같은 사랑과 신의를 나타내지 않는 민족이라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그 가운데 「한결같은 사랑이 없는」이라는 표현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시인의 비난이 단순히 서로 다른 종교에 속해 있다는 뜻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어떤 이름을 가진 집단인가보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을 속이며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놓습니다. 한결같은 사랑이 없는 태도는 구체적으로 사람을 속이고 부당하게 대하는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이 표현만으로 그들이 외국 민족인지, 이스라엘 안의 적대적인 집단인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에 대한 시인의 판단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마땅히 지켜야 할 신실함과 정의를 저버렸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편이시기 때문에 정의로우셔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건을 맡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공정한 판단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도 옳지 않은 일을 그대로 두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민족」이라는 단어와 뒤이어 등장하는 「사람」이라는 단수 표현 역시 구체적인 대상을 알아내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인의 기도는 구약의 중요한 신앙 전통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10:17~18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뇌물을 받지 않으시며,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시편 89:14에서는 의와 공정이 하나님의 왕좌의 기초이며,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그분 앞에 선다고 고백합니다. 정의와 신실함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함께 나타납니다.

「주님은 저의 피난처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시편 43:2 본문 →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정의로운 재판관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관한 더 깊은 문제를 꺼냅니다.

당신은 내 요새, 나의 하나님이신데 왜 나를 내치셨습니까? 왜 나는 원수에게 짓눌려 슬픔에 잠겨 다닙니까?시편 43:2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피난처이시라고 고백하면서, 바로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느냐고 묻습니다.

피난처가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피난처」(⁨מָעוֹז⁩)로 옮긴 말은 튼튼한 방어 장소, 요새, 사람을 든든하게 보호하는 곳을 가리킵니다. 위험이 다가올 때 사람은 요새로 피합니다. 요새는 바깥의 위협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을 보호하셔야 할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는 것 같다는 감정 이상입니다. 시인이 의지해 온 보호의 근거 자체가 흔들리는 경험입니다. 원수들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도 고통스럽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을 보호해 주실 하나님께서 왜 나서지 않으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 같으므로 이제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묻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현재 겪는 현실은 그 지식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간격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버리셨습니까?」는 시인의 경험을 담은 탄식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시인과 맺으신 관계를 끊으셨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하지 못하는 현실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슬퍼하며 다녀야 합니까?」라고 묻는 시인은 완전히 멈추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계속 다닙니다. 그러나 그 걸음은 슬픔 속에서 계속되는 걸음입니다. 바깥에서는 삶이 움직이고 있지만, 안에서는 해결되지 않은 고통이 이어집니다.

원수들에게 억눌리는 일도 끝나지 않았고, 자신을 보호하실 하나님에 대한 질문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시인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기도를 이어 갑니다.

그는 자신을 억누르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힘을 달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이끌어 줄 무언가를 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주님의 빛과 진실하심을 보내 주십시오」

시편 43:3 본문 →

당신의 빛과 진실하심을 보내 주십시오. 그 빛과 진실하심이 나를 이끌어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당신이 머무시는 곳으로 데려가게 해 주십시오.시편 43:3 · 두루새김

시인은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빛과 진실하심입니다. 그런데 이 둘을 단순히 자신이 갖추어야 할 마음의 상태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그것들을 보내 달라고 구하고, 그것들이 자신을 이끌어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기를 바랍니다.

빛과 신실함이 길잡이가 되다

여기서 빛은 어둠을 밝히는 것으로, 길을 찾고 방향을 알아보게 하는 이미지를 가집니다. 시인은 자신의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분명하지만, 그곳에 어떻게 이를 수 있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빛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빛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진실하심도 보내 달라고 구합니다. 「진실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אֶמֶת⁩)는 진실과 참됨을 나타내며, 관계 안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성실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문맥에서는 단순히 올바른 정보를 아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참되고 한결같게 행동하신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시인에게는 길을 비추는 빛뿐 아니라, 그 길을 끝까지 인도하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필요합니다. 빛은 보이지 않는 길을 밝힙니다. 진실하심은 그 길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빛과 진실하심의 역할을 이렇게 명확히 나누어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가 함께 시인을 이끌어 간다고 말합니다.

빛과 진실하심은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판단과 결심만으로 길을 찾아내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오는 인도를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길을 이끌다

시인은 하나님의 빛과 진실하심을 마치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람처럼 표현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두 천사가 보내진다는 뜻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빛과 진실하심으로 시인을 적극적으로 인도하시기를 바라는 시적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에는 출애굽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13:21~2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백성에게 목적지만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길을 갈 수 있도록 앞서 가십니다. 시편 43편이 출애굽 사건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목적지에 이르게 하신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같은 주제로 연결됩니다.

시인의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적지를 아는 것만으로 그곳에 도착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3절은 단순히 어려운 상황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해 달라는 일반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길마저 하나님께서 열어 주셔야 한다는 고백입니다.

거룩한 산과 거처들

시인이 빛과 진실하심의 인도를 받아 도착하기 원하는 곳은 「주님의 거룩한 산」과 「주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거룩한 산」은 시온산, 곧 예루살렘의 성소가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주님께서 계시는 곳」도 성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가운데 계시는 장소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가 원하는 도착지는 단순히 지도 위의 한 장소가 아닙니다. 다음 절에서 시인은 그곳에 도착한 뒤 무엇을 하려는지 밝힙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2:6에서 시온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으로 불리고, 시편 48:1~2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산과 시온이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계시는 곳」은 원문에서 「당신의 거처들」이라는 복수형이며, 두루새김은 이를 풀어 옮겼습니다. 이 복수형을 근거로 시인이 여러 개의 독립된 성전을 방문하려 했다고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적인 복수 표현으로 보거나 성소와 관련된 여러 공간을 함께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복수형이 쓰인 정확한 이유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제단을 지나 하나님께

시편 43:4 본문 →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의 더없는 기쁨이신 하나님께 나아가겠습니다. 리라를 타며 당신께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시편 43:4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시인의 기도는 소망하는 미래의 모습으로 바뀝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 인도를 요청했습니다. 이제는 그 인도가 이루어진 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말합니다. 시인은 아직 제단 앞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서게 될 날을 바라보며 자신의 응답을 미리 고백합니다.

목적지는 제단인가, 하나님인가

이 구절에서 시인이 향하는 대상은 점점 깊어집니다. 먼저 「하나님의 제단」이 등장하고, 이어서 「저를 더없이 기쁘게 하시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제단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입니다.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정말로 만나고 싶은 대상은 제단 자체가 아닙니다.

그는 제단을 말하다가 곧바로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두 개의 목적지를 나란히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장소에서 예배의 대상에게로 시선이 이동하는 흐름을 보여 줍니다.

성소는 중요합니다. 제단도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예배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끝내 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저를 더없이 기쁘게 하시는 하나님」

이 구절에는 하나님을 뜻하는 말과 기쁨을 나타내는 말들이 이어집니다. 기쁨을 뜻하는 말과 기뻐하거나 환호하는 의미의 말이 결합하면서 단순한 기쁨보다 강한 환희를 나타냅니다. 두루새김은 「더없이 기쁘게」라는 말로 이처럼 겹쳐진 기쁨의 표현을 살리고, 하나님께서 시인을 기쁘게 하시는 분임을 풀어 나타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시인의 기쁨을 만들어 주시는 분인 동시에 그 기쁨의 대상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좋은 것을 주시면 기뻐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 자체를 더없는 기쁨으로 묘사합니다.

시인이 겪는 고통의 원인은 단순히 삶에서 좋은 일이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시인이 바라는 구원의 완성은 단순히 원수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기쁨으로 누리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리라가 다시 울리는 날

마지막에는 악기가 등장합니다. 리라는 줄을 튕겨 소리를 내는 악기로, 이스라엘의 찬양과 예배에서 쓰였습니다. 시편 33:2, 57:8 등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로 등장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날을 구체적으로 그립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제단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감사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억누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나님께 판결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원수들의 패배를 축하하는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의에 대한 요청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판결과 구원이 이루어져야 그가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승리를 과시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입니다.

시인은 2절에서 하나님께 왜 자신을 버리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여전히 그분을 「저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사이에 구체적인 응답이나 상황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이 하나님을 부르는 관계의 언어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아직 돌아가지 못한 자리에서 이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시 자기 영혼에게 말하다

시편 43:5 본문 →

내 영혼아, 왜 가라앉느냐? 왜 내 안에서 들끓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나를 구원하시는 나의 하나님께 나는 다시 감사하리라.시편 43:5 · 두루새김

이 후렴은 시편 42편에서 두 차례 등장한 후렴과 이어집니다. 시편 42편과 43편을 연속해서 읽으면, 이 후렴은 세 번째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앞의 두 번과 조금 다른 의미로 들립니다.

앞에서는 시인이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고, 과거의 예배를 기억하며,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은 뒤 자기 영혼에게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원하는 구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말한 뒤 다시 같은 말을 합니다.

시인은 단순히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위해 판결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빛과 진실하심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감사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기도의 마지막이 왜 여전히 기다림인가

시인이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마지막에는 그가 실제로 성소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시편 43편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은 아직 하나님께 감사하는 미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의 상황이 실제로 어떻게 바뀌었는지, 원수에게 억눌리는 일이 끝났는지,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후렴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4절에서는 「리라를 타며 주님께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5절에서는 「나의 하나님께 내가 다시 감사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구체적으로 그렸던 예배의 장면이 마지막 후렴에서 다시 미래의 소망으로 나타납니다.

이 반복에는 시인이 아직 그 자리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그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그는 미래에 감사할 것을 말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실지 모든 과정을 알지 못합니다. 원수에게 억눌리는 일이 언제 끝날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에게 구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하게 되기를 바라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막연한 운명의 변화가 아닙니다. 자신을 다시 하나님 앞으로 이끄실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시편 43편은 이런 상황을 단순히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알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낀다는 사실을 함께 말합니다. 그는 어느 한쪽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빛과 진실하심을 구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려라」는 말은 가만히 앉아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은 이미 하나님께 판결을 요청했고,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물었으며,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한 뒤에도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응답하실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인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다립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아직 울리지 않은 리라

시편 43:1–5 본문 →

시편은 정의를 구하는 기도로 시작하지만, 기쁨의 예배를 향해 나아갑니다. 시인이 부당하게 억눌리고 있는 현실에서는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판결을 구하는 것은 그가 다시 예배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소원과 연결됩니다. 그 구원은 단지 원수에게서 멀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시편 43편에서 구원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인 동시에 누구에게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리라를 타며 감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실제로 리라가 연주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 소리는 아직 미래에 속해 있습니다.

지금 들리는 것은 리라 소리가 아니라 자기 영혼에게 건네는 시인의 목소리입니다.

그는 아직 자신이 원하는 곳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억누르는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설명받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이 있고,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 있으며, 하나님의 제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분이 계십니다.

시인은 그분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가진 힘으로 그곳에 도달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과 진실하심이 자신을 데려가기를 구합니다. 그의 소망은 길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끝까지 인도하실 수 있다는 신뢰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감사의 노래를 기다리며 끝납니다.

리라는 아직 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언젠가 그 악기를 들고 하나님께 감사할 날을 바라보며, 지금은 풀이 죽은 자기 영혼에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왜 풀이 죽느냐? 왜 내 안에서 술렁이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