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44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하나님을 잊지 않았는데 왜 버림받았는가
시편 44편은 승리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조상들은 적을 물리치고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중간에 이르면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하나님께서 적들 앞에서 백성을 물러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양 떼처럼 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러 민족 사이에 흩으셨습니다.
과거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고, 현재의 패배도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다음에 시인은 「이 모든 일이 저희에게 닥쳤지만, 저희는 주님을 잊지 않았고 주님의 언약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18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언약을 저버렸기 때문에 심판받았다는 이야기는 구약에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그러나 시편 44편의 공동체는 바로 그 설명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셨습니까?
이것이 시편 44편을 관통하는 질문입니다.
이 시편은 고난이 반드시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단순한 설명을 거부합니다. 동시에 고난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호소합니다.
우리가 들은 하나님과 우리가 겪는 현실
조상들이 들려준 이야기
하나님, 우리 귀로 들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살던 날, 먼 옛날에 당신이 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주었습니다.시편 44:2 · 두루새김
시편의 첫 문장은 독특합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사건이 아니라 조상들에게서 전해 들은 사건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조상들은 무엇을 이야기했습니까? 「주님께서 그들이 살던 먼 옛날에 하신 일」입니다.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시인은 처음부터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조상들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으로 행동하셨는지를 기억하려 합니다.
이러한 기억의 전달은 이스라엘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13:8, 14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출애굽의 의미를 설명하도록 명령하고, 신명기 6:20~25에서도 다음 세대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배우도록 가르칩니다.
조상들은 이야기했고, 후손들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후손들은 이제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직접 기도합니다.
몰아내는 손과 심는 손
당신은 손수 민족들을 몰아내시고 우리 조상들을 심으셨습니다. 겨레들을 치시고 우리 조상들이 뻗어 나가게 하셨습니다.시편 44:3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몰아내셨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자리 잡은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조상들이 그 땅에 들어갔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심으셨습니다」(נָטַע)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는 나무나 포도나무 등을 심는 행동을 뜻합니다. 사람을 심는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한 땅에 자리 잡게 하시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도록 하셨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뻗어 나가게 하셨습니다」 역시 심겨 자라나는 식물의 이미지를 이어 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원문의 해당 동사는 무엇인가를 보내거나 뻗어 나가게 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어, 여기서는 조상들이 널리 퍼지고 번성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3절에는 두 종류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민족들이 밀려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스라엘이 심겨 뻗어 나갑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자리 잡은 일은 기존 민족들이 쫓겨난 일과 분리될 수 없는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시인은 이 역사에 따랐던 폭력이나 쫓겨난 사람들의 경험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땅을 주셨다는 신앙 고백에 있습니다. 이 고백을 오늘날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의 땅을 빼앗아도 된다는 일반적인 허가로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자기 역사를 이끄신 분을 누구라고 고백하는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나라와 얻은 땅을 자기 능력만의 결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심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식물의 이미지는 뒤에 나올 비극을 준비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땅에 심으셨던 사람들이 12절에 이르면 여러 민족 사이로 흩어집니다.
심으셨던 분이 이제 흩으셨다고 시인은 탄식하게 됩니다.
승리의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차지한 것도, 자기 팔이 그들을 구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당신의 오른손과 팔, 당신의 얼굴에서 비치는 빛이었습니다. 당신이 그들을 기뻐하셨으니.시편 44:4 · 두루새김
여기서 사람의 팔과 하나님의 팔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조상들에게도 팔이 있었습니다. 칼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의 팔의 힘이 그들을 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전쟁에서 인간의 행동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승리를 결정한 힘이 결국 인간의 무기와 능력에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얼굴빛」을 함께 말합니다. 하나님의 오른손과 팔은 힘을 떠올리게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빛은 그분의 호의와 은혜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기꺼이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이를 설명합니다. 여기 쓰인 히브리어 동사는 기뻐하거나 호의를 보이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의미를 가집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구하신 이유를 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7:7~8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거기에서도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맹세에 근거하여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4절의 중심은 단순히 하나님의 힘이 인간보다 강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이루어 낸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풀어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이후에 등장할 질문을 어렵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기꺼이 받아 주셨다면, 지금 자신들은 왜 버림받았습니까?
활과 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시인은 조상들이 경험한 구원을 이야기하다가 현재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바로 나의 왕이십니다. 야곱에게 구원을 명해 주십시오.시편 44:5 · 두루새김
앞에서는 「저희」라는 복수형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저의 왕」이라는 단수형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기도 안에서 한 사람이 대표하여 하나님께 고백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실제 왕인지,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인지,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과거 조상들을 구하셨던 하나님을 단순히 옛이야기 속의 신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자신들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승리는 현재의 기도에 근거가 됩니다.
원문에서는 구원을 뜻하는 명사가 복수형으로 쓰였습니다. 전쟁의 문맥에서 거듭되는 구원과 승리를 요청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 구원을 허락해 달라고만 하지 않고 「명령을 내려」 구원해 달라고 구합니다. 승리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일에 달려 있다는 고백입니다.
무기를 사용하지만 무기를 의지하지 않는다
당신을 힘입어 우리는 적들을 들이받고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거슬러 일어나는 자들을 짓밟겠습니다.시편 44:6 · 두루새김
「들이받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짐승이 뿔로 상대를 밀어붙이는 강한 동작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곧이어 말합니다.
나는 내 활을 믿지 않습니다. 내 칼도 나를 구하지 못합니다.시편 44:7 · 두루새김
앞에서 조상들은 자기 칼로 땅을 차지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자신도 활과 칼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들은 후손이 그 이야기에 담긴 믿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활과 칼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적들을 들이받고 짓밟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성공할 수 있는 근거를 자신의 무기에서 찾지 않습니다.
8~9절에서 그 믿음은 감사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온종일 하나님을 자랑해 왔습니다. 당신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겠습니다. 셀라.시편 44:9 · 두루새김
이 문장은 과거의 구원 경험과 현재의 신앙 고백을 하나로 묶습니다. 그들이 자랑한 것은 자기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온종일」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계속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조금 뒤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16절에서 시인은 「온종일 제 부끄러운 처지가 눈앞에 있고」라고 말합니다. 온종일 하나님을 자랑하던 백성이 온종일 부끄러움을 당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자랑의 대상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던 백성의 현실이 달라진 것입니다.
9절의 「셀라」는 이 시편에서 결정적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이 말의 정확한 음악적 기능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금 글의 흐름에서는 이 지점이 뚜렷한 경계를 이룹니다. 여기까지는 구원과 승리와 찬양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그 모든 고백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현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저희를 버리셨습니다
승리를 주시던 하나님이 이제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당신은 우리를 버려 부끄러움에 빠뜨리셨습니다. 우리 군대와 함께 나가지 않으십니다.시편 44:10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이 결정적이라는 믿음은 이스라엘의 오랜 전통에 속합니다. 민수기 10:35에서 모세는 궤가 출발할 때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원수들을 흩으시기를 구합니다. 신명기 20:4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나아가 적들과 싸우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지금 시인은 정반대의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군사력이 부족했다는 분석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의지하던 승리의 근거가 사라졌다고 느낍니다. 4절에서 조상들은 자기 칼이나 팔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팔이 그들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움이 사라졌다면, 남아 있는 무기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주님」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는 이유
적 앞에서 우리를 뒤로 물러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이 빼앗아 자기들 몫으로 챙겼습니다.시편 44:11 · 두루새김
여기서 적들이 실제로 저희 것을 빼앗았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물러나게 하셨다는 시인의 고백이 나란히 놓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적들의 잔혹함을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계속 하나님께 말을 겁니다.
「주님은 저희를」
「주님은 저희를」
이러한 직접적인 호소가 이어지면서 시편은 마치 하나님께 책임을 묻는 말처럼 들립니다.
시인은 자신들의 패배를 하나님께서 막지 못하신 우연한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라면, 지금 벌어진 일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패배의 책임을 적들에게만 돌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져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왜 그들을 패배하게 하셨는지에 관한 객관적인 설명과 구별해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그렇게 다스리시는 방식에 항의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답을 받았는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습니다.
심으셨던 백성을 흩으셨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잡아먹힐 양 떼처럼 내주시고 민족들 사이에 흩으셨습니다.시편 44:12 · 두루새김
이들은 목자의 보호를 받으며 풀을 뜯는 양들이 아닙니다. 잡아먹히도록 내주어진 양들입니다. 양에게는 적을 막아 낼 능력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목자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잡아먹히도록 내주셨다고 탄식합니다. 이것은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지금의 경험 사이에 놓인 간격을 극단적으로 표현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조상들을 한 땅에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여러 민족 사이에 흩으셨습니다. 한곳에 뿌리내리고 자라도록 하셨던 백성이 뿌리 뽑혀 흩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잃은 것은 단순히 전쟁에서 빼앗긴 물건이나 적보다 강한 군사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마련해 주신 삶의 터전과 안정된 공동체의 자리입니다.
여기서 「흩으셨습니다」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의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의 패배, 포로로 끌려감, 여러 지역으로 흩어짐과 관련될 수 있지만, 본문은 장소와 왕, 전쟁의 상대를 밝히지 않습니다. 시인은 역사적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보다 그 사건이 가져온 신앙의 위기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팔고도 아무것도 얻지 않으셨는가
당신의 백성을 아무 이득 없이 파시고 그들을 판 값으로 재산을 늘리지도 않으셨습니다.시편 44:13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파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구약에서 누군가를 다른 사람의 손에 판다는 표현은 그를 원수의 지배 아래 넘겨준다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사사기 2:14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 넘기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편 44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보호하지 않으시고 적들의 지배 아래 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실제로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가 있었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기 백성을 내주신 하나님의 행동이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지를 거래의 말로 표현합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은 보통 대가를 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넘겨주시면서 아무런 이득도 얻지 않으셨습니다.
시인의 눈에는 이 일이 어떤 목적을 이루었는지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싸게 넘기셨다는 항의보다 더 깊습니다.
우리를 버리셔서 하나님께 무엇이 돌아왔습니까?
시인은 이러한 질문을 직접 문장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아무 이득도 없이」라는 표현은 그에 가까운 항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심으셨으며, 자신의 얼굴빛으로 구원하셨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백성이 적들에게 넘겨졌습니다.
시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설명할 수 없음 자체가 탄식의 일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2:3에서 하나님은 값없이 팔린 백성이 돈 없이 되찾아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시편 44편의 「아무 이득도 없이 파십니다」라는 탄식과 「구해 내십시오」라는 간구를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두 본문이 동일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팔린 것처럼 되었다가 다시 되찾아지는 모습을 함께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그 약속을 시편 44편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사건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 44편의 공동체는 여전히 구원을 구하고 있습니다.
온종일 자랑하던 얼굴이 온종일 부끄러움으로 뒤덮이다
당신은 우리를 이웃들의 모욕거리로, 둘레 사람들의 조롱거리와 비웃음거리로 만드십니다.시편 44:14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단순히 전쟁에서 진 나라가 아닙니다. 주변 민족들이 비웃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15절의 「조롱하는 이야깃거리」라는 표현은 그들의 비참한 처지가 사람들 사이에서 반복해서 언급되는 사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조롱의 소재가 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여러 백성이 저희를 보며 머리를 흔들게 하십니다」는 그 조롱을 몸짓으로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보고 머리를 흔듭니다. 이는 깔보거나 비웃는 마음을 드러내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동체가 겪는 부끄러움은 한 사람의 얼굴에 집중됩니다.
온종일 내 치욕이 내 앞에 있고 내 얼굴의 부끄러움이 나를 뒤덮었습니다.시편 44:16 · 두루새김
앞에서는 공동체가 「저희」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제 부끄러운 처지」, 「제 얼굴」이라는 단수형이 등장합니다. 여러 사람이 겪는 고통을 한 사람의 목소리와 얼굴에 모아 놓는 표현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에서 등장한 하나님의 얼굴과 대비됩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빛이 조상들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인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뒤덮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빛 아래 승리하던 공동체가 이제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여기까지 시인이 묘사한 것은 역사 속에서 겪은 재앙과 그에 따른 부끄러움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우리는 이 고통이 왜 그토록 설명하기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언약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고백이 나오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닥쳤어도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았고 당신의 언약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시편 44:18 · 두루새김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어쩌면 다음에 죄의 고백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여러 민족 사이에 흩어졌으며 조롱거리가 되었다면, 구약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불순종과 심판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명기 28:25는 이스라엘이 적들 앞에서 패배하는 일을 경고하고, 28:37은 여러 민족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일을 말합니다. 28:64에서는 민족들 사이로 흩어지는 일이 등장합니다. 시편 44편의 패배와 흩어짐, 조롱은 이러한 언약의 경고와 매우 가깝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시인은 예상과 다른 말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지금의 재앙이 닥쳤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설명이 자신들의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이 시편을 단순히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는 이야기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욥기의 중심적인 갈등도 이와 관련됩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가 겪는 재앙을 죄에 대한 벌로 설명하려 하지만, 욥기는 그러한 설명이 모든 경우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온전한 공동체였다는 뜻인가
우리 마음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우리 발걸음은 당신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시편 44:19 · 두루새김
마음은 속으로 품은 뜻과 충성을, 발걸음은 실제 삶의 방향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단순히 겉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고, 실제로 걸어온 길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만 히브리어 문장에는 해석이 갈릴 여지가 있습니다. 첫 행에는 「아니다」라는 부정어가 분명히 나오지만, 둘째 행에는 그 부정어가 반복되지 않습니다. 앞의 부정을 두 행 모두에 적용하면 두루새김처럼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고 발걸음은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둘째 행을 별도로 읽으면 발걸음이 벗어났다는 의미도 문법적으로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를 택하든 18절과 21~22절에 나타나는 공동체의 항변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거나 다른 신에게 돌아선 일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죄가 전혀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의 증명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이 시편은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그들은 지금 겪는 재앙을 설명할 만한 언약의 배반이 자신들에게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고난의 원인을 둘러싼 항변이지, 인간이 절대적으로 완전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심각한 고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반드시 그 고난에 걸맞은 죄가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44편은 바로 그런 성급한 판단에 저항합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은 19절 둘째 행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빗나가게 하셨다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하나님은 마음속에 감추어진 것을 아십니다
당신이 자칼 사는 곳에서 우리를 짓누르시고 죽음의 그늘로 우리를 덮으셨어도.시편 44:20 · 두루새김
자칼은 황폐하고 사람이 드문 곳을 떠올리게 하는 동물입니다. 이 표현은 버려진 땅과 깊은 황폐함을 그리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그늘」 역시 죽음에 가까운 위협과 짙은 어둠을 나타냅니다.
시인이 실제로 어떤 사막이나 황무지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처지가 생명이 넘치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자리에서 멀어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시인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21~22절에서는 그 주장이 더욱 강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고 낯선 신에게 두 손을 펼쳤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살펴 알아내지 않으시겠습니까? 마음속 감추어진 것들을 아시는 분이십니다.시편 44:21–22 · 두루새김
「두 손을 펼쳤다면」이라는 말은 기도하거나 간절히 구하는 동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다른 신을 향해 손을 펼치는 행동, 곧 다른 신을 예배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독특합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품은 것을 감출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마음속으로 다른 신을 의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런 속임이 통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감추어진 것까지 아신다는 사실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매우 대담한 기도입니다. 자신이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고 말한다는 것은, 그 주장을 하나님 자신의 판단 앞에 내놓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들의 속마음을 살펴 달라고 사실상 요청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신을 섬겼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 없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들의 항변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그 사실에 의지하여 항변합니다.
「저희는 주님 때문에 온종일 죽임을 당하며」
참으로 우리는 당신 때문에 온종일 죽임을 당하며 잡아 죽일 양 떼처럼 여겨집니다.시편 44:23 · 두루새김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잡아먹힐 양 떼처럼 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다시 양 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직접적입니다. 양들은 단순히 위험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죽임을 당하도록 정해진 존재처럼 취급됩니다.
이 구절에서 특히 중요한 말은 「주님 때문에」입니다. 이 표현은 두 방향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고난을 겪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상황 때문에 죽음에 내몰린다는 앞선 탄식과 연결하여 읽는 것입니다.
본문의 흐름에서는 첫 번째 의미, 곧 하나님께 충실한 백성이 그분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는 항변이 특히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구체적인 박해의 역사적 원인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자신들의 고난을 단순히 죄의 결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고 호소합니다.
시편 44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한결같이 지키신다는 사실과, 그 백성이 지금 죽임을 당한다는 현실을 한 자리에 놓습니다. 두 사실 사이의 긴장을 없애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알레카는 「당신 때문에」, 「당신을 위하여」, 「당신으로 말미암아」와 같은 뜻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 그들은 다른 신에게 돌아서지 않았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관계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로마서 8:36에 시편 44:23을 직접 인용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잡아 죽일 양 떼처럼 여겨지는 현실을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에 적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고난조차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끊어 놓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로마서 8:35~39), 이것이 시편 44편의 본래 역사적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자체에서는 그 확신이 아직 완성된 구원의 경험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깨어나 주십시오」
잠들지 않는 하나님께 왜 깨어나라고 하는가
깨어나 주십시오! 주님, 왜 주무십니까? 잠에서 깨어나 주십시오.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십시오.시편 44:24 · 두루새김
이 말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생각할 때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시편 121:4에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44편의 시인은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잠을 주무신다는 교리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잠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그들이 겪는 고난은 너무나 심각합니다. 적들은 백성의 것을 빼앗고, 하나님은 그들을 민족들 사이에 흩으셨으며, 사람들은 그들을 조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인은 이 침묵을 잠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비난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호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무런 구원의 행동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기도는 민수기 10:35의 모세의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원수들을 공격해 달라는 말보다 먼저 자신들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호소가 나옵니다. 시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단순히 지금의 고난이 계속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지는 일입니다.
빛나던 얼굴은 왜 숨겨졌는가
왜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괴로움과 짓눌림을 잊으십니까?시편 44:25 · 두루새김
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얼굴빛이 조상들을 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신다고 호소합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얼굴빛이 있었습니다. 현재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구약에서 그분이 함께 계시며 기꺼이 받아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얼굴을 비추시는 것은 은혜와 구원을, 얼굴을 숨기시는 것은 보호와 따뜻한 돌봄이 거두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신명기 31:17~18에서는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는 일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시편 44편의 공동체는 자신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얼굴이 숨겨진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시인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직접 묻습니다.
시편의 처음에 등장했던 기억의 주제가 여기서 반대 방향으로 돌아옵니다. 2절에서 백성은 조상들이 전해 준 하나님의 일을 기억했습니다. 18절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잊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고통받고 억눌리는 것」을 잊으신 것 같다고 호소합니다.
백성은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잊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호소를 넘어 언약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자신과 언약을 맺으신 백성을 기억하시지 않겠습니까?
출애굽기 2:23~25에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이르렀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시편 44편의 시인도 그러한 하나님의 기억을 기다립니다. 지금 자신들의 고난을 살펴보시고 다시 행동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흙먼지에 가라앉은 생명
우리 목숨은 티끌에 가라앉고 우리 배는 땅바닥에 달라붙었습니다.시편 44:26 · 두루새김
시인은 이제 백성의 처지를 더 이상 막연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몸을 보여 줍니다.
원문에서 첫 행에 쓰인 말은 여기서 사람의 생명과 존재 전체를 나타내며, 두루새김은 이를 「저희는」(נֶפֶשׁ)으로 옮겼습니다. 생명이 흙먼지까지 내려갔다는 것은 극단적인 굴욕과 무력함을 표현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은 더 이상 제대로 서 있지 못합니다. 땅에 엎드린 것처럼 낮아졌습니다.
이 모습이 실제로 땅에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를 묘사하는지, 패배하여 짓눌린 상태를 비유하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표현 모두 백성이 스스로를 일으킬 힘조차 없는 것처럼 느끼는 상황을 그립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깨어나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흙먼지 속에 가라앉아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잠들어 계신 것처럼 보이고, 백성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필요한 것은 누군가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들이 일어나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께 일어나 달라고 구합니다.
일어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일어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위하여 우리를 구해 내십시오.시편 44:27 · 두루새김
「구해 내십시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פָּדָה)는 파다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이는 대가를 치르고 되찾거나 속박과 위험에서 구해 내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앞의 13절과 연결되면서 시편의 중요한 모습 하나가 완성됩니다.
1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무 이득도 없이 파셨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는 바로 그 하나님께 다시 자신들을 구해 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적들에게 넘겨주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을 되찾아 주실 분도 하나님뿐입니다.
여기서 출애굽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출애굽기 6:6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강제로 일하는 처지에서 풀어 주고 구해 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 7:8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신 사건을 그분의 사랑과 연결합니다.
시편 44편의 공동체는 그런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구원이 필요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자기들을 구해 내셨다는 사실만을 자랑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께 다시 구해 내 달라고 구합니다.
이 구절에서 더 중요한 것은 구해 내 달라고 요청하는 근거입니다. 시인은 이제 자신들이 언약을 충실하게 지켰다고 다시 주장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잊지 않았고 언약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속의 감추어진 것까지 아신다는 사실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간구에서는 자신의 충실함을 구원의 근거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이 말은 관계 안에서 베푸는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로운 돌봄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의 언약 전통에서 이 한결같은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변함없이 지키시는 성품과 깊이 연결됩니다.
시인은 자신들의 고난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신 것처럼 보이는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호소합니다.
흙먼지에 엎드린 백성과 일어나시기를 기다리는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근거로 하나님께 다시 행동해 달라고 구합니다. 시편 44편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언제나 평안하고, 고난을 겪는다면 반드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시인은 이 질문을 해결하는 이론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질문을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이 시편의 항변과 간구는 서로 반대되는 행동이 아닙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시편 44편의 공동체는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께 충실한 가운데 겪는 고난으로 이해하며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을 모든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 백성은 조상들이 전해 준 승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흩어졌습니다. 양 떼처럼 적들에게 넘겨졌고, 여러 민족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온종일 하나님을 자랑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뒤덮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흙먼지 속에 가라앉았습니다.
시편은 여기서 그들이 스스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조상들처럼 활과 칼을 들고 다시 승리하는 장면도 없습니다. 대신 땅에 엎드린 백성이 하나님께 「일어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시인은 조상들을 구했던 하나님의 손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이 왜 자신들에게서 사라졌는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만은 놓지 않습니다.
시편 44편은 응답을 들려주지 않은 채 끝납니다.
아직 원수들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흩어진 백성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다시 비추셨다는 선언도 없습니다.
그저 흙먼지 속에 가라앉은 백성의 기도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는 시편의 첫머리부터 이어져 온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들의 팔로 구원받지 않았던 백성은, 자기들의 팔로 일어설 수 없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손을 기다립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무력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린 채,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기를 구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