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85편
이 장의 자리 · 73–89편 · 셋째 권
하나님이 돌아오실 때 땅에도 봄이 옵니다
시편 85편은 이미 회복을 경험한 사람들이 다시 회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용서하시고 분노를 거두셨다고 고백합니다. 「당신의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셨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다시 자신들을 회복시켜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저희를 다시 회복시켜 주십시오. 저희를 향한 당신의 노여움을 그치게 해 주십시오.」
이미 용서하셨는데 왜 다시 회복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분노가 거두어졌다면 왜 시인은 아직도 그분의 노여움이 계속되는지 묻고 있을까요?
이 물음이 시편 85편을 움직입니다.
시인은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만, 그 기억만으로 현재의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과 지금 자신들이 경험하는 현실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간격을 메우기 위해 과거의 회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회복을 근거로 다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한때 우리를 회복시키신 하나님이시라면, 지금도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편은 이 간절한 물음에서 출발하여 전혀 다른 풍경으로 나아갑니다. 인애와 신실함이 서로 만나고, 의와 평화가 입을 맞춥니다. 땅에서는 신실함이 돋아나고, 하늘에서는 의가 내려다봅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고 땅은 소출을 내놓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분노를 걱정하던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실 길을 바라봅니다.
이미 용서받았는데, 왜 다시 회복을 구하는가
여호와야훼, 당신은 당신의 땅에 호의를 보이셨습니다. 야곱의 형편을 회복시키셨습니다.시편 85:2 · 본디새김
당신의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셨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습니다. 셀라.시편 85:3 · 본디새김
당신의 격노를 모두 거두셨고, 타오르는 분노에서 돌아서셨습니다.시편 85:4 · 본디새김
시편의 첫 세 절은 모두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돌아봅니다.
여기서 행동하시는 분은 한결같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땅에 호의를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형편을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죄악을 용서하시고 죄를 덮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격노를 거두시고 분노에서 돌아서셨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회개했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회복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행동이 있습니다.
2절의 「야곱의 형편을 회복시키셨습니다」는 포로 상태에서 돌아오게 하거나 무너진 형편을 회복시키는 일을 가리킬 수 있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시편은 어떤 사건을 회상하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회복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확정하는 일보다, 시인이 그 회복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입니다.
그는 땅의 회복을 죄의 용서와 연결합니다.
2절에서는 땅과 야곱의 형편을 말하고, 3절에서는 죄악의 용서를 말하며, 4절에서는 하나님의 분노가 거두어진 일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별개의 사건으로 나열된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겪은 회복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어려움은 단지 정치적·경제적 문제로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회복을 말하면서 죄의 용서를 함께 기억합니다.
여기서 「덮으셨습니다」는 죄를 숨겨서 없는 것처럼 꾸미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덮는다는 뜻의 이 동사는, 이 문맥에서는 죄를 용서하시어 더 이상 그 죄를 근거로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시편 32:1에서도 허물이 용서되고 죄가 덮인 사람의 복이 선언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태도가 아닙니다. 죄악이 실제로 있었음을 전제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는 행동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기억하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잘못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분노하시지만, 또한 용서하시고 그 분노에서 돌아서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시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토록 완전한 회복을 고백한 사람들이 다시 회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히브리어 표현은 샤브타 셰부트입니다. 이 때문에 이 시편을 바벨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의 상황과 연결하여 읽기도 합니다. 실제로 유배에서 돌아왔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귀환과 회복을 경험했더라도 정치적·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만으로 시편이 반드시 바벨론 유배 이후에 작성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 표현은 포로 귀환뿐 아니라 더 넓은 의미의 형편 회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다시」라는 말에 담긴 간절함
저희 구원의 하나님, 저희를 다시 회복시켜 주십시오. 저희를 향한 당신의 노여움을 그치게 해 주십시오.시편 85:5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미 야곱의 형편을 회복시키셨고 분노를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다시 회복과 분노의 중단을 요청합니다.
이것을 단순한 모순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과거의 회복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삶이 이미 완전하게 회복되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두 현실을 함께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과, 지금도 하나님의 새로운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26편에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납니다. 그 시편은 여호와야훼가 시온의 형편을 회복시키셨던 일을 기쁨으로 회상한 뒤, 다시 자신들의 형편을 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합니다(시편 126:1, 4).
과거에 일어난 회복과 현재 필요한 회복은 반드시 서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이후에도 새로운 위기를 만날 수 있었고, 용서를 받은 이후에도 다시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상태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시편 85편에서 현재의 어려움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전쟁이나 기근, 새로운 죄에 대한 징계 가운데 하나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시인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현재 공동체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경험한다고 느끼며, 다시 살아나는 일이 절실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읽으면 히브리어의 반복이 시편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돌아오다’, ‘돌이키다’, ‘회복시키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슈브(שׁוּב)입니다.
2절에서는 야곱의 형편을 회복시키신 일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이 타오르는 분노에서 돌아서신 일을 나타냅니다. 5절에서는 공동체를 다시 회복시켜 달라는 요청에 등장합니다. 7절에서도 하나님이 다시 살려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백성이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에 사용됩니다.
시편 전체가 누가 무엇으로부터 돌아서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회복은 단순히 이전의 생활 수준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가 다시 바로 서는 일과 연결됩니다.
저희에게 영원히 노하시겠습니까? 당신의 분노를 대대로 이어 가시겠습니까?시편 85:6 · 본디새김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냉정한 질문이라기보다,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공동체의 탄식입니다. 「영원히」와 「대대로」라는 표현에는 시간이 끝없이 늘어나는 듯한 두려움이 담겨 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어려움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공동체가 겪는 어려움이라면 자기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그 고통이 이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생깁니다. 시인은 바로 그 두려움을 하나님께 말합니다.
그러나 질문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희를 다시 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당신의 백성이 당신 안에서 기뻐할 것입니다.시편 85:7 · 본디새김
여기서 기도는 방향을 바꿉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분노가 계속될지 물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다시 생명을 주실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히브리어의 ‘살리다’라는 동사는 실제 생명을 보존하거나 되살리는 일을 나타낼 수 있고, 공동체를 새롭게 회복시키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무너진 공동체가 다시 생기를 얻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시인이 바라는 최종적인 결과는 단지 위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시편 84편에서 하나님의 집에 머무는 사람들이 계속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한 것과 실제로 이어지는 지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자신의 요청을 짧게 모읍니다.
여호와야훼, 저희에게 당신의 인애를 보여 주십시오. 당신의 구원을 저희에게 주십시오.시편 85:8 · 본디새김
「인애」는 단순한 친절이나 순간적인 동정심보다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관계 속에서 지속되는 사랑과 신실한 호의, 특별히 언약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충실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이전에 자신들을 사랑하셨던 그 사랑을 다시 보여 달라고 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미 그분이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사랑이 현실에서 다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믿음은 현재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은혜를 다시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근거가 됩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
나는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무엇을 말할지 듣겠다. 그가 자기 백성과 자기에게 신실한 이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시편 85: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 전체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하나님께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회복시켜 달라고, 노여움을 그쳐 달라고, 다시 살려 달라고, 인애를 보여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기도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말씀드리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 기다립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현실을 충분히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의 마지막 의미를 자기 판단으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직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가 ... 평화를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일부는 이 부분을 성전 예배에서 선포되는 구원의 말씀과 연결하기도 하지만, 본문은 실제로 어떤 예언자가 등장하여 신탁을 전달했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인이 하나님의 응답을 직접 들었다고 확정하기보다, 하나님이 평화를 말씀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귀를 기울이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신중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바로 「평화」입니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안전, 온전함, 관계의 안정, 삶의 번영과 안녕을 폭넓게 나타내는 말입니다.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단순히 당장의 갈등이 사라졌다는 통보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고 공동체의 삶이 다시 온전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평화의 말씀에는 한 가지 경고가 함께 놓입니다. 「그들은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성경의 지혜 전통에서 어리석음은 종종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삶의 태도와 연결됩니다. 시편 85편에서도 앞에서 반복되던 ‘돌아가다’라는 동사가 여기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분노에서 돌아서셨습니다.
백성은 회복되기를 구했습니다.
이제 그 백성은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이전의 잘못으로 돌아가도 괜찮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평화를 말씀하신다면, 그 말씀을 듣는 백성은 자신들을 무너뜨렸던 어리석음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먼저 완전한 순종을 이루어야 하나님이 비로소 사랑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시편의 첫 부분은 이미 하나님이 주도하시어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신들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일입니다.
참으로 그의 구원은 그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가까이 있다.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물도록.시편 85:10 · 본디새김
여기서 「그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처벌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가까이 있습니다.
시편의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땅에 호의를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땅에 머무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출애굽기 40:34–35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우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시편 85편에서는 그 영광이 머물 곳이 「우리 땅」으로 표현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시편의 처음에 회복이 필요한 곳은 땅이었습니다. 이제 그 땅에 하나님이 다시 함께 계시는 미래가 그려집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그 영광이 머무는 땅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는지가 펼쳐집니다.
인애와 신실함이 만나고, 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다
인애와 신실함이 서로 만났고, 의와 평화가 입 맞추었다.시편 85:11 · 본디새김
시편 85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네 가지 추상적인 개념이 마치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 네 가지 좋은 성품이 있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 성품들이 서로 만나 관계를 이루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인애는 관계를 지속시키는 사랑과 신실한 호의를 가리킵니다. 신실함은 진실함, 신뢰할 만함, 변함없는 충실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두 단어는 구약에서 자주 함께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34:6에서 여호와야훼는 모세 앞을 지나시며 자신이 인애와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심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순간적인 동정심 때문에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사랑은 신실함과 함께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믿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다음에는 의와 평화가 입을 맞춥니다. 의는 의로움과 올바른 질서, 정의를 폭넓게 가리키고, 평화는 평화와 온전한 안녕을 뜻합니다.
우리는 종종 정의와 평화를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잘못을 엄격하게 바로잡으려 하면 평화가 깨질 것 같고, 평화를 지키려면 어느 정도의 부정의를 덮어 두어야 할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회복 안에서는 의가 평화를 방해하는 것도 아니고, 평화가 의를 밀어내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의와 평화가 서로 대립하다가 극적으로 화해했다고까지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이전에 두 성품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하나님의 회복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온전한 조화를 보여 줍니다.
시인은 죄악이 용서되고 하나님의 분노가 거두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백성을 용서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의를 포기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면서도 죄인을 용서하시고, 잘못된 삶을 바로잡으시면서도 공동체에 평화를 주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시편이 그리는 평화는 정의가 침묵한 자리에 생기는 평화가 아닙니다. 의와 평화가 함께 입을 맞추는 평화입니다.
시인은 아직 회복을 구하는 중이지만, 그가 소망하는 세상은 이미 생생한 모습을 띠기 시작합니다. 회복이 무엇인지 추상적인 말로 정의하지 않아도, 독자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인애는 히브리어 헤세드, 신실함은 에메트, 의는 체데크, 평화는 샬롬입니다. 11절의 히브리어 동사 「만났고」와 「입 맞추었다」는 완료형이며, 본디새김은 이를 과거형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시편이 작성되기 이전의 특정 역사적 사건을 보고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평화를 기대했고, 뒤에서는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이에 놓인 이 장면은 기대하는 회복의 모습을 이미 눈앞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그려 보이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약과 연결한다면, 에베소서 2:14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시며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신다고 말하는 부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는 시편 85편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평화와 관계의 회복을 가져온다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땅에서 돋아나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다
신실함은 땅에서 돋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내려다본다.시편 85:12 · 본디새김
11절에서는 네 가지 성품이 사람처럼 만났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장면의 규모가 갑자기 커집니다. 이제 땅과 하늘이 등장합니다.
「돋아나고」는 식물이 싹트거나 자라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신실함을 땅에서 솟아나는 식물처럼 그립니다. 앞에서 땅은 회복이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땅에서 신실함이 돋아납니다.
회복이 단지 하늘에서 선포되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응답하는 진실함이 땅 위의 삶에서도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다만 여기서 신실함이 반드시 인간의 신실함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 절에서 인애와 신실함이 하나님의 성품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땅은 인간의 신실함이고 하늘은 하나님의 의’라는 식으로 완전히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시적 이미지의 중심은 하늘과 땅이 서로 응답하는 모습입니다.
의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아래를 바라봅니다. 땅의 회복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의와 땅에서 돋아나는 신실함이 하나의 장면을 이룹니다.
또 여호와야훼가 좋은 것을 줄 것이며, 우리 땅은 제 소출을 내줄 것이다.시편 85:13 · 본디새김
앞에서는 신실함이 땅에서 돋아났습니다. 이번에는 땅이 실제로 소출을 내놓습니다.
시편은 회복을 영적인 내면의 평안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는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과도 연결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농작물의 수확은 공동체의 생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거나 땅이 소출을 내지 못하면 사람들의 삶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역할과 땅의 역할이 나란히 표현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직접 하늘에서 곡식을 떨어뜨리시는 장면을 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실 때 땅도 자신의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사람들이 사는 땅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땅이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합니다.
여기에서 시편의 첫 구절 「여호와야훼, 당신은 당신의 땅에 호의를 보이셨습니다」가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처음에는 과거의 땅에 베푸신 호의를 회상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앞으로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고, 그 땅이 다시 소출을 내놓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떠나 있는 추상적인 약속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 구원이 땅에서 돋아나고 열매 맺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조금 더 깊이
「돋아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티츠마흐입니다. 레위기 26:3–4에서는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백성에게 때에 맞는 비가 내리고 땅이 소출을 내는 복이 약속됩니다. 시편 85편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땅의 풍요와 연결합니다. 호세아 2:21–23에서는 하나님이 하늘에 응답하시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며,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하늘과 땅, 그리고 땅의 소출이 서로 연결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의가 하나님보다 앞서 길을 걷다
의가 그의 앞에서 걸어가며, 그의 발걸음을 위한 길을 마련할 것이다.시편 85:14 · 본디새김
시편의 마지막 장면은 뜻밖에도 길입니다.
앞에서는 하늘과 땅이 서로 응답하고, 땅이 소출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의가 길을 걸어갑니다. 여기서 「그의」는 문맥상 여호와야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둘째 행의 주어를 어떻게 이해할지는 해석상 여지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앞의 「의」를 그대로 주어로 이어받아, 의가 하나님의 발걸음을 위한 길을 마련한다고 옮겼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발걸음을 길로 삼으시거나, 하나님이 의를 자신의 길에 두시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문장이 압축되어 있어 문법적으로 한 가지 분석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하나님의 행하심과 의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인애와 신실함이 만났습니다. 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었습니다. 신실함이 돋아나고, 땅이 소출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의가 앞으로 나아가 길을 마련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어떤 아름다운 순간에 멈춰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길이 열리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 이미지는 이사야 40:3과 비교해 볼 만합니다. 거기에서는 광야에서 여호와야훼의 길을 준비하고, 사막에서 하나님을 위한 큰길을 곧게 하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시편 85편에서도 하나님이 움직이실 길이 등장합니다. 다만 이곳에서는 그 길을 마련하는 주체가 「의」로 묘사됩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분노에서 돌아서셨습니다. 백성은 다시 회복되기를 구했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발걸음을 위한 길이 준비됩니다.
시 전체를 움직였던 돌아옴의 소망이 이제 길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편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회복은 단지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의가 그분의 발걸음을 위한 길을 마련하는 회복입니다.
의가 먼저 걸어가는 길
시편 85편은 과거를 돌아보는 노래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땅에 호의를 보이셨고, 야곱의 형편을 회복시키셨으며, 백성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시 회복이 필요했습니다.
시편 85편의 시작은 오늘의 독자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확신했는데, 다른 시기에는 왜 여전히 삶이 어려운지 묻게 됩니다. 이 시편은 그런 질문을 신앙의 결핍으로만 취급하지 않습니다.
한 번 회복을 경험했다고 해서 이후의 모든 삶이 어려움 없이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새로운 어려움이 찾아왔다고 해서 과거의 은혜가 거짓이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는 과거에 받은 은혜를 현재의 아픔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재의 아픔을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는 근거로 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상황을 바꿔 달라고 구하면서, 그 상황이 바뀐 뒤 어떤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까?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이 이루실 평화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 평화는 단순히 고통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신실함, 의와 평화가 함께 드러나는 삶입니다.
시편은 회복이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발걸음을 위한 길이 마련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시편의 마지막 장면에는 아직 길 위를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자세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분 앞에서 의가 걸어갑니다. 그분이 발을 내디디실 길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한때 자신들을 회복시키셨던 하나님께 다시 회복을 구하던 사람들 앞에, 이제 하나님이 오실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시편은 그 길을 바라보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