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84편
이 장의 자리 · 73–89편 · 셋째 권
새의 집과 사람의 길
시편 84편에는 서로 다른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 그 집을 향해 길을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이들 모두를 복되다고 선언합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은 복이 있습니다」(5절), 「당신에게서 힘을 얻고 마음에 큰길들을 품은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6절),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13절). 이 시편의 복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도착한 사람에게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주어집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뜰을 간절히 그리워합니다. 그러다가 작은 새가 둥지를 찾은 모습을 떠올리고, 먼 길을 걸어 시온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바라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집 문턱에 서 있는 한순간이 다른 곳의 긴 세월보다 낫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시편의 마지막 말은 성전도, 시온도, 제단도 아닙니다.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거처를 향하지만, 그의 노래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은 그 거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시편은 이러한 움직임을 따라 전개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거처를 그리워하는 개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2–5절). 이어서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펼쳐집니다(6–8절). 그다음 공동체와 기름부음 받은 이를 위한 기도가 나타나고(9–10절),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다른 모든 것보다 귀하다는 고백으로 마무리됩니다(11–13절).
장소를 그리워하지만, 그곳에 계신 분을 찾는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당신의 거처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시편 84:2 · 본디새김
제 영혼은 여호와야훼의 뜰들을 갈망하다 못해 쇠약해졌습니다. 제 마음과 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해 기뻐 외칩니다.시편 84:3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의 거처를 향한 감탄으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라는 말에는 단순히 건축물이 아름답다는 감상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랑스럽고 귀하게 여겨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은 그곳에 머무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 그곳이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라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시인의 시선은 거처에서 뜰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가 갈망하는 대상은 건물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3절 후반에서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해 외칩니다.
처음에는 장소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이제 그 장소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시인은 거기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히브리어에는 갈망한다는 동사와 쇠약해진다는 동사가 함께 등장합니다. 원하는 마음이 매우 강해서 온 존재가 소진될 것 같은 상태를 표현합니다.
앞에서는 그리움 때문에 쇠약해졌다고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기뻐 외친다고 합니다.
그리움과 기쁨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리워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기쁨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직 그분의 뜰에 서 있지 않더라도, 그분을 향해 마음을 움직이는 일 자체가 기쁨의 근거가 됩니다.
「마음과 몸」이라는 표현에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과 육체를 함께 언급하여 온 존재가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갈망은 추상적인 종교적 사색이 아닙니다. 몸으로 하나님의 뜰에 들어서고, 그곳에서 소리를 내어 찬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구체적인 사정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리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만 들려줍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뜻밖에도 사람 대신 새를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거처들」과 3절의 「뜰들」은 모두 복수형입니다. 이것이 반드시 여러 성전이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처를 구성하는 공간들을 가리키거나, 시적인 복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갈망은 시편 42:2–3의 갈망과도 닮았습니다. 그곳에서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하나님을 찾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언제 나아갈 수 있을지 묻습니다. 한편 이 시편의 표제는 고라 자손의 노래라고 밝힙니다. 역대상 9:19과 26:1–19에는 고라 계열 사람들이 성소의 문을 지키는 직무와 관련되어 등장합니다. 역대하 20:19에서는 고라 자손들이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기 위해 일어섭니다. 이 배경은 성소를 향한 노래가 고라 자손의 전승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시의 화자가 실제 성전 문지기였거나, 어떤 사건 때문에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장소가 중요한 까닭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은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겠느냐고 묻고,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열왕기상 8:27). 그러면서도 그는 그 성전을 향해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열왕기상 8:28–30). 하나님은 한 건물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신약의 관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새롭게 설명됩니다. 히브리서 10:19–22는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시편 84편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주제를 새롭게 발전시킨 연결입니다.
새는 이미 집을 찾았다
새도 집을 찾았고, 제비도 제 새끼들을 놓아둔 둥지를 찾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저의 왕, 저의 하나님, 바로 당신의 제단들입니다.시편 84:4 · 본디새김
시편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해석이 쉽지 않은 장면입니다.
시인은 아직 하나님의 뜰을 갈망하고 있는데, 새는 이미 자기 집을 찾았습니다. 그에게는 너무나 간절한 것이 작은 새에게는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제비의 둥지는 단순히 몸을 쉬는 장소가 아닙니다. 새끼들을 놓아두는 곳입니다. 생명을 낳고 기르며 머무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시인은 그 모습을 하나님의 제단들과 연결합니다. 이 연결은 새가 찾은 집과 둥지가 곧 하나님의 제단들이라는 대담한 시적 표현으로도, 새가 성소의 제단 가까이에서 보금자리를 찾았다는 장면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의 중심은 둥지의 정확한 위치보다 그 둥지가 의미하는 바에 있습니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하나님의 거처는 제비가 새끼를 놓아둘 수 있는 집의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거기에는 머무름과 안식, 생명을 돌보는 모습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는 하늘과 땅의 모든 군대 위에 계신 분으로 고백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의 거처를 말하는 자리에서 시인은 작은 새의 둥지를 떠올립니다.
가장 높으신 왕의 거처와 가장 작은 생명의 보금자리가 하나의 시 안에 놓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을 「저의 왕, 저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그의 갈망이 단순히 평안한 장소를 찾으려는 마음만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가 찾는 분은 자신의 왕이십니다.
하지만 그 왕의 거처는 두려워서 가까이할 수 없는 공간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새의 둥지를 떠올리게 하는, 머물고 싶은 곳으로 노래됩니다.
시인이 부러워하는 새의 복은 단순히 집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이 속하여 머무를 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첫 번째 복을 선언합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계속 찬양합니다. 셀라.시편 84:5 · 본디새김
시인은 그들이 무엇을 소유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편안하게 지내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이 계속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무는 사람은 그분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바라는 것은 그러한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집에 이미 머무는 사람들만 복되다면, 그곳으로 향하고 있지만 아직 도착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시인은 다음 절에서 바로 그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에서 「당신의 제단들」 앞에는 목적격 표지가 있습니다. 이를 앞의 집과 둥지를 이어받는 표현으로 읽으면, 새가 찾은 집과 제비의 둥지가 하나님의 제단들이라는 대담한 시적 표현이 됩니다. 반면 새가 성소의 제단 가까이에서 보금자리를 찾았다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본문에 ‘제단 곁’이라는 장소 표현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새가 실제로 제단 위에 둥지를 지었다고 단정하거나, 제단에서 일정한 거리에 떨어진 특정 위치를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에 큰길을 품은 사람들
당신에게서 힘을 얻고 마음에 큰길들을 품은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시편 84:6 · 본디새김
두 번째 복은 첫 번째 복과 다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집에 사는 이들이 복되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직 그곳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합니다.
「큰길」은 정비된 길이나 큰길을 뜻합니다. 이사야 40:3에서는 광야에 하나님을 위한 대로를 마련하라는 명령에 관련된 낱말이 사용됩니다. 시편 84편에서는 그 길이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실제 길은 산과 골짜기를 지나갑니다. 그 길은 몸으로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길이 먼저 마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목적지를 잊지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들이 길을 걸을 힘을 어디에서 얻는지 먼저 밝혔습니다. 순례자들은 단지 강한 의지와 체력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힘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자기 힘만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그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그 길은 어떠할까요?
그들은 바카 골짜기를 지나며 그곳을 샘으로 만듭니다. 이른 비도 그곳을 복으로 덮습니다.시편 84:7 · 본디새김
시편이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은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그곳에 생기는 샘입니다.
여기에서 순례자들은 단지 어려운 곳을 견디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골짜기를 샘으로 만듭니다.
동사의 주어가 순례자들입니다. 시인은 그들이 길을 지나가면서 그곳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은 그러한 변화가 인간의 노력에만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른 비는 건기가 지난 뒤 땅을 적시는 비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은 길을 지나며 그곳을 샘으로 만듭니다. 동시에 하늘에서는 비가 내려 그곳을 덮습니다.
이 둘을 기계적인 인과관계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는 사람들이 길을 걸어가고, 그 길이 물과 복의 이미지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바카 골짜기는 단순히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하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 길 자체가 복을 경험하는 자리가 됩니다.
그들은 갈수록 힘을 얻으며 나아갑니다. 저마다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납니다.시편 84:8 · 본디새김
「갈수록 힘을 얻으며」(חַיִל)는 히브리어로 ‘힘에서 힘으로’라는 표현입니다.
보통 먼 길을 가면 힘이 줄어듭니다. 출발할 때는 활력이 넘치다가도 오랜 길을 걷고 나면 지칩니다. 그런데 시인은 순례자들이 힘에서 힘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뜰을 갈망하다 못해 쇠약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순례자들은 실제로 그곳을 향해 걷고, 하나님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움이 길이 되고, 길이 마침내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복된 「사람」을 단수로 말하다가, 7–8절에서는 순례자들을 복수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8절의 마지막 동사는 다시 단수형입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시온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단순히 무리의 일부로만 남지 않습니다.
저마다 하나님 앞에 나타납니다.
그곳에 도착하는 것은 군중이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각자입니다.
조금 더 깊이
바카가 정확히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나무와 관련된 이름일 가능성도 있으며, 울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과 소리상으로 연결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골짜기가 역사적으로 어디에 있었는지, 또는 반드시 ‘눈물의 골짜기’라는 뜻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순례자들이 골짜기를 샘으로 만드는 것이 실제로 물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행동을 가리키는지, 메마른 길이 샘이 있는 곳처럼 변화되는 시적인 묘사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힘에서 힘으로」를 모든 순례자가 육체적으로 전혀 지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수와 복수의 변화는 복된 순례자의 모습을 일반적으로 제시한 뒤,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여 주고, 마침내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노래 가운데 왕을 위한 기도가 들어오다
순례자들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난 뒤, 시편은 갑자기 기도의 형식으로 바뀝니다.
여호와야훼, 만군의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야곱의 하나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셀라.시편 84:9 · 본디새김
무엇을 구하려는 것일까요?
하나님, 저희의 방패를 보십시오. 당신의 기름부음 받은 이의 얼굴을 바라보십시오.시편 84:10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 머무는 기쁨을 노래하다가, 이제 공동체의 방패와 기름부음 받은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기름부음 받은 이」는 ‘당신이 기름 부으신 이’를 뜻합니다. 구약에서 왕은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6:13에서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시편 2:2에서도 여호와야훼와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이가 함께 언급됩니다.
따라서 시편 84편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왕과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읽기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특정한 왕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저희의 방패」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 가지 읽기는 방패와 기름부음 받은 이를 같은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시인은 공동체를 보호해야 할 왕을 「저희의 방패」라고 부르면서, 두 명령의 병행 속에 같은 대상을 두 방식으로 부르며 하나님께 그를 돌보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는 방패를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을 방패라고 부르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시편 3:4; 18:3). 이 시편의 12절에서도 하나님은 방패라고 불리십니다.
다만 본디새김처럼 「저희의 방패를 보십시오」라고 읽을 경우, 방패는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읽기에서는 방패를 기름부음 받은 이와 연결하는 해석이 문장 구조에 잘 들어맞습니다.
두 가능성을 구분하되,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직접적인 예언으로 곧바로 옮겨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기름부음 받은 이가 함께 시야에 들어온다는 점이 먼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 기도가 성전을 향한 노래 가운데 등장했을까요?
시편은 개인이 하나님과 만나는 기쁨만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였습니다. 그곳에서의 예배는 이스라엘의 삶과 분리된 사적인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삶과 공동체의 안녕, 왕의 책임도 하나님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쁨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도 하나님 앞에 가져옵니다.
문턱에서 보내는 하루가 천 날보다 낫다
당신의 뜰들에서 지내는 하루가 천 날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저는 악의 천막들에서 사는 것보다 제 하나님의 집 문턱에 서 있기를 택했습니다.시편 84:11 · 본디새김
시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백입니다.
시인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비교를 나란히 놓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비교입니다. 하나님의 뜰에서 보내는 하루와 천 날을 비교합니다. 그런데 이 천 날을 어디에서 보내는지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시간의 가치를 단순히 길이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보내는 짧은 순간이 그분과 멀리 떨어져 보내는 오랜 세월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비교가 등장합니다. 「문턱에 서 있기를」(סָפַף)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문턱이나 입구에 머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문턱은 집 안의 가장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얻고 싶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문턱에 서 있어도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문턱에 서 있는 삶과 비교하는 것은 「악의 천막들에서 사는 것」입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비록 문턱일지라도 하나님과 연결된 자리입니다. 다른 한쪽은 악의 천막들입니다. 그곳에서는 머물며 살아갈 수 있지만, 그 삶은 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머무는 자리의 크기나 편안함보다, 그 자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시인은 자신이 어디에 속하여 살 것인지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새는 자기 집을 찾았습니다. 제비는 새끼들을 위한 둥지를 찾았습니다. 이제 시인도 자신이 머물고 싶은 자리를 밝힙니다.
그곳이 자신의 하나님께 속한 집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선택한 것은 가장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분께 가장 가까이 속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조금 더 깊이
「문턱에 서 있기를」을 성전 문지기라는 특정 직책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고라 자손의 전승에 성소의 문을 지키는 직무가 등장한다는 점은 그런 읽기에 배경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시인이 문지기로 봉사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천막들」이라는 표현은 앞의 하나님의 「거처들」과도 대비됩니다. 시편 83편에서는 원수들의 천막들이 언급되었습니다. 하지만 시편 84편의 「악의 천막들」을 그 민족들의 거처와 직접 동일시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시편 안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집과 악에 속한 삶의 자리를 대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은 해이며 방패이시다
여호와야훼 하나님은 해이며 방패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은혜와 영광을 주시며, 온전하게 걷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시편 84:12 · 본디새김
12절은 앞에서 말한 모든 고백의 이유를 밝혀 줍니다.
시인은 왜 하나님의 집을 그토록 사랑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집 자체가 특별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있습니다.
해는 빛과 생명, 따뜻함의 근원이 되는 존재입니다. 방패는 위험이 닥칠 때 그것을 막아 주는 보호의 도구입니다. 이 두 표현을 함께 놓으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생명을 누리게 하시면서 동시에 그들을 지켜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해」라고 불리신다는 사실을 고대의 태양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연의 한 요소를 신격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해가 가진 생명과 빛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노래합니다.
10절에서 시인은 공동체의 방패를 하나님이 바라보아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방패이십니다.
만일 10절의 방패를 왕으로 이해한다면, 백성을 지키는 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왕 자신도 하나님이 돌보셔야 하는 존재입니다. 궁극적인 보호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온전하게」는 온전함이나 흠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사람의 행실에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시편 15:2에서도 하나님의 장막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을 말하면서 온전하게 행하고 의를 실천하는 사람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도덕적으로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좁혀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향하여 성실하게 걸어가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6–8절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실제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사람들이 온전하게 걷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길을 노래하다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라는 약속을 하나님이 신실한 사람에게 원하는 모든 재물과 성공을 반드시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좋은 것의 목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뜰을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을 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분의 집 문턱에 머무는 것을 다른 곳의 삶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한 고백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향해 선하게 대하시는 분이라는 신뢰의 고백입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결과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시편 84:13 · 본디새김
처음에는 하나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이 복되었습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으며 그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복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선언합니다.
처음 두 선언은 하나님의 집과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직접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선언에는 특정 장소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집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마지막에 밝히는 것입니다.
그 집이 귀한 까닭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집으로 가는 길이 복된 까닭은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 집 문턱이 귀한 까닭도 하나님이 해와 방패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향한 갈망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완성됩니다.
문턱에 서 있는 사람의 기쁨
시편 84편의 두 번째 복은 이미 하나님의 집에 도착한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물론 그 길이 언제나 편안하다고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바카 골짜기가 여전히 그 길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골짜기를 지나가는 동안에도 샘이 생겨나고 비가 내립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랑하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며, 그분을 신뢰하는 하나의 삶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직 길 위에 있는 사람도, 골짜기를 지나가는 사람도, 문턱에 겨우 다다른 사람도 이 고백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뜰을 갈망하다 못해 쇠약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보다 먼저 집을 찾은 작은 새를 바라봅니다. 그다음 시인의 눈에는 길 위를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들어옵니다.
마침내 시인은 자신이 어디에 머무르고 싶은지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집 문턱입니다.
시인은 그 문턱보다 더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곳에 머무는 일 자체가 기쁨입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문턱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그 문턱 너머에서 자신을 맞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에게는 그곳에서 보내는 하루가 천 날보다 귀합니다.
그곳이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분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