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84편
이 장의 자리 · 73–89편 · 셋째 권
새의 집과 사람의 길
시편 84편에는 서로 다른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 그 집을 향해 길을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이들 모두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 「시온으로 향하는 큰길을 마음에 품은 사람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 이 시편의 복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도착한 사람에게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주어집니다.
이것이 시편 84편을 단순한 성전 찬양 이상의 노래로 만듭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뜰을 간절히 그리워합니다. 그러다가 작은 새가 둥지를 찾은 모습을 떠올리고, 먼 길을 걸어 시온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바라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집 문턱에 머무는 한순간이 다른 곳의 긴 세월보다 낫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시편의 마지막 말은 성전도, 시온도, 제단도 아닙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향하지만, 그의 노래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은 그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장소를 그리워하지만, 그곳에 계신 분을 찾는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여, 당신이 머무시는 곳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시편 84:2 · 두루새김
내 영혼은 여호와야훼의 뜰을 애타게 그리다 그리다 못해 지쳐 버렸습니다. 내 마음과 몸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뻐 외칩니다.시편 84:3 · 두루새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라는 말에는 단순히 건축물이 아름답다는 느낌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랑스럽고 귀하게 여겨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은 그곳에 머무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 그곳이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라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시인의 시선은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뜰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가 간절히 바라는 대상은 건물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3절 후반에서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해 외칩니다.
처음에는 장소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이제 그 장소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시인은 거기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원문에는 갈망한다는 동사와 쇠약해진다는 동사가 함께 등장합니다. 원하는 마음이 매우 강해서 온 존재가 지쳐 버릴 것 같은 상태를 표현합니다. 앞에서는 그리움 때문에 지쳐 버렸다고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기쁘게 외친다고 합니다.
그리움과 기쁨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리워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기쁨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직 그분의 뜰에 서 있지 않더라도, 그분을 향해 마음을 움직이는 일 자체가 기쁨의 바탕이 됩니다.
본문에서 영혼과 몸을 각각 따로 존재하는 두 부분으로 구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의 속마음과 몸을 함께 언급하여 온 존재가 하나님을 간절히 바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그리움은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몸으로 하나님의 뜰에 들어서고, 그곳에서 소리를 내어 찬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구체적인 사정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리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만 들려줍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뜻밖에도 사람 대신 새를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머무시는 곳들」은 복수형이며, 원문에서는 3절의 「뜰」에 해당하는 말도 복수형입니다. 이것이 반드시 여러 성전이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이루는 여러 공간을 가리키거나, 시적인 복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리움은 시편 42:2–3의 그리움과도 닮았습니다. 그곳에서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하나님을 찾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언제 나아갈 수 있을지 묻습니다. 한편 이 시편의 첫머리는 고라 자손의 시라고 밝힙니다. 역대상 9:19과 26:1–19에는 고라 계열 사람들이 성소의 문을 지키는 일과 관련되어 등장합니다. 역대하 20:19에서는 고라 자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일어섭니다. 이 배경은 성소를 향한 노래가 고라 자손에게 전해 내려온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시의 화자가 실제 성전 문지기였거나, 어떤 사건 때문에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를 드릴 때, 솔로몬은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머무시겠느냐고 묻고,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열왕기상 8:27). 그러면서도 그는 그 성전을 향해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열왕기상 8:28–30). 신약의 관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새롭게 설명됩니다. 히브리서 10:19–22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시편 84편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주제를 새롭게 발전시킨 연결입니다. 그러나 시편 84편 자체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야 합니다.
새는 이미 집을 찾았다
새도 집을 찾고 제비도 새끼들을 둔 둥지를 찾았습니다. 당신의 제단들, 만군의 여호와야훼, 나의 왕, 나의 하나님.시편 84:4 · 두루새김
시편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해석이 쉽지 않은 장면입니다.
시인은 왜 이런 모습을 노래할까요? 먼저 여기에는 뚜렷한 대조가 있습니다. 시인은 아직 하나님의 뜰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는데, 새는 이미 자기 집을 찾았습니다. 그에게는 너무나 간절한 것이 작은 새에게는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제비의 둥지는 단순히 몸을 쉬는 장소가 아닙니다. 새끼들을 두는 곳입니다. 생명을 낳고 기르며 머무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시인은 그 모습을 하나님의 제단과 연결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주님의 제단」(מִזְבֵּחַ)에 해당하는 말은 복수형이며, 그 앞에는 목적격 표지가 있습니다. 이를 앞의 집과 둥지를 이어받는 표현으로 읽으면, 새가 찾은 집과 제비의 둥지가 하나님의 제단들이라는 대담한 시적 표현이 됩니다.
반면 새가 성소의 제단 가까이에서 보금자리를 찾았다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읽기를 따라 「주님의 제단 곁에서」라고 옮겼습니다. 다만 원문에 「제단 곁」이라는 장소 표현이 직접 쓰여 있지는 않습니다.
이 장면의 중심은 둥지의 정확한 위치보다 그 둥지가 의미하는 바에 있습니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하나님의 집은 제비가 새끼를 둘 수 있는 집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거기에는 머무름과 쉼, 생명을 돌보는 모습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는 하늘과 땅의 모든 군대 위에 계신 분으로 고백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께서 머무시는 곳을 말하는 자리에서 시인은 작은 새의 둥지를 떠올립니다.
가장 높으신 왕의 집과 가장 작은 생명의 보금자리가 하나의 시 안에 놓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을 「저의 왕, 저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그의 그리움이 단순히 평안한 장소를 찾으려는 마음만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가 찾는 분은 자신의 왕이십니다.
하지만 그 왕의 집은 두려워서 가까이할 수 없는 공간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새의 둥지를 떠올리게 하는, 머물고 싶은 곳으로 노래됩니다. 시인이 부러워하는 새의 복은 단순히 집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이 속하여 머무를 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첫 번째 복을 선언합니다.
복되구나,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이여. 그들은 늘 당신을 찬양합니다. 셀라.시편 84:5 · 두루새김
시인은 그들이 무엇을 소유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편안하게 지내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시인에게 하나님의 집에 머무는 삶의 가장 중요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사람은 그분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바라는 것은 그러한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집에 이미 머무는 사람들만 복이 있다면, 그곳으로 향하고 있지만 아직 도착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시인은 다음 절에서 바로 그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립니다.
마음에 큰길을 품은 사람들
복되구나, 당신 안에서 힘을 얻고 마음에 큰길들을 품은 이들이여.시편 84:6 · 두루새김
두 번째 복은 첫 번째 복과 다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직 그곳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원문의 낱말은 정비된 길이나 큰길을 뜻합니다.
시편 84편에서는 그 길이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이는 시온을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그 방향을 「시온으로 향하는」이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순례자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실제 길은 산과 골짜기를 지나갑니다. 그 길은 몸으로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길이 먼저 마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목적지를 잊지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들은 단지 강한 의지와 체력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자기 힘만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그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그 길은 어떠할까요?
그들은 바카 골짜기를 지나며 그곳을 샘으로 바꾸고 이른 비도 그곳을 복으로 덮습니다.시편 84:7 · 두루새김
시편이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은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그곳에 생기는 샘입니다.
여기에서 순례자들은 단지 어려운 곳을 견디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골짜기를 「샘이 솟는 곳」으로 만듭니다. 동사의 주어가 순례자들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시인은 그들이 길을 지나가면서 그곳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물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행동을 가리키는지, 메마른 길이 샘이 있는 곳처럼 변화되는 시적인 묘사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7절의 다음 문장 「가을에 처음 내리는 비도 그곳을 복으로 덮습니다」는 그러한 변화가 인간의 노력에만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가을에 처음 내리는 비」는 건기가 지난 뒤 땅을 적시는 비를 떠올리게 합니다. 메마른 땅에서 물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이어 가는 데 매우 중요한 조건입니다. 시인은 순례자들이 골짜기를 샘이 솟는 곳으로 만드는 모습과, 비가 그곳을 복으로 덮는 모습을 나란히 놓습니다.
이 둘을 기계적인 원인과 결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노력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비를 내리신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는 사람들이 길을 걸어가고, 그 길이 물과 복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바카 골짜기는 단순히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하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 길 자체가 복을 경험하는 자리가 됩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또 얻으며 나아가 시온에서 저마다 하나님 앞에 나타납니다.시편 84:8 · 두루새김
「갈수록 힘을 얻으며」(חַיִל)는 히브리어로 「힘에서 힘으로」라는 표현입니다. 보통 먼 길을 가면 힘이 줄어듭니다. 출발할 때는 활력이 넘치다가도 오랜 길을 걷고 나면 지칩니다.
그런데 시인은 순례자들이 힘에서 힘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이 시적 표현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얻는 힘으로 여정을 계속하며 마침내 하나님 앞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목적지에 대한 그리움이 그들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계속 나아갑니다.
여기서 3절의 그리움이 떠오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뜰을 애타게 그리워하다 지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순례자들은 실제로 그곳을 향해 걷고, 하나님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움이 길이 되고, 길이 마침내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시온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단순히 무리의 일부로만 남지 않습니다.
저마다 하나님 앞에 나타납니다.
그곳에 도착하는 것은 군중이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각자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40:3에서는 광야에 하나님을 위한 큰길을 마련하라는 명령에 관련된 낱말이 사용됩니다. 히브리어 바카가 정확히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나무와 관련된 이름일 가능성도 있으며, 울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과 소리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연결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골짜기가 역사적으로 어디에 있었는지, 또는 반드시 「눈물의 골짜기」라는 뜻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원문에서는 6절의 복이 있는 사람을 단수로 말하다가, 7–8절에서는 순례자들을 복수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8절의 마지막 동사는 다시 단수형입니다. 이 변화는 복이 있는 순례자의 모습을 일반적으로 제시한 뒤,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여 주고, 마침내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마지막 모습을 「저마다」라고 옮겼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노래 가운데 왕을 위한 기도가 들어오다
순례자들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난 뒤, 시편은 갑자기 기도의 형식으로 바뀝니다.
여호와야훼, 만군의 하나님, 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야곱의 하나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셀라.시편 84:9 · 두루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고 그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복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구체적인 부탁이 등장합니다.
무엇을 구하려는 것일까요?
하나님, 우리의 방패를 보시고 당신이 기름 부으신 이의 얼굴을 바라보아 주십시오.시편 84:10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 머무는 기쁨을 노래하다가, 이제 공동체의 방패와 기름 부어 세우신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מָשִׁיחַ)에 해당하는 원문은 「당신이 기름 부으신 이」를 뜻합니다.
구약에서 왕은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시편 84편의 기름 부어 세우신 이를 왕과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읽기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특정한 왕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저희의 방패」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 가지 읽기는 방패와 기름 부어 세우신 이를 같은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시인은 공동체를 보호해야 할 왕을 「저희의 방패」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 그를 살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같은 대상을 두 방식으로 부르며 하나님께 그를 돌보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는 방패를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을 방패라고 부르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시편 3:4; 18:3). 이 시편의 12절에서도 하나님은 방패라고 불리십니다.
다만 두루새김처럼 「저희의 방패를 살펴 주십시오」라고 읽을 경우, 방패는 하나님께서 살펴 주실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읽기에서는 방패를 기름 부어 세우신 이와 연결하는 해석이 문장 구조에 잘 들어맞습니다.
두 가능성을 구분하되,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직접적인 예언으로 곧바로 옮겨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기름 부어 세우신 이가 함께 시야에 들어온다는 점이 먼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 기도가 성전을 향한 노래 가운데 등장했을까요? 시편은 개인이 하나님과 만나는 기쁨만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였습니다. 그곳에서의 예배는 이스라엘의 삶과 떨어진 개인만의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삶과 공동체의 평안, 왕의 책임도 하나님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자리를 향한 사랑이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자신의 기쁨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도 하나님 앞에 가져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무엘상 16:13에서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시편 2:2에서도 하나님과 그분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가 함께 언급됩니다.
문턱에서 보내는 하루가 천 날보다 낫다
당신의 뜰에서 보내는 하루가 천 날보다 좋기 때문입니다. 악의 천막들에서 사느니 내 하나님의 집 문턱에 서기를 택했습니다.시편 84:11 · 두루새김
시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하나님의 집이 다른 곳보다 좋다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비교를 나란히 놓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비교입니다. 원문에서는 이 천 날을 어디에서 보내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비교의 뜻을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이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로 계산한 비율이 아닙니다. 시인은 시간의 가치를 단순히 길이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짧은 순간이 그분과 멀리 떨어져 보내는 오랜 세월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비교가 등장합니다. 「문턱에 머물기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히스토페프(סָפַף)입니다. 문턱이나 입구에 머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성전 문지기라는 특정 직책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고라 자손에게 전해 내려온 이야기에는 성소의 문을 지키는 일이 등장한다는 점이 그런 읽기에 배경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시인이 문지기로 봉사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더욱 분명한 것은 문턱이라는 위치가 나타내는 대비입니다.
문턱은 집 안의 가장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얻고 싶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문턱에 머물러도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문턱에 머무는 삶과 비교하는 것은 「악한 자들의 천막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난한 집과 부유한 집의 비교가 아닙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비록 문턱일지라도 하나님과 연결된 자리입니다.
다른 한쪽은 악한 자들의 천막입니다. 그곳에서는 머물며 살아갈 수 있지만, 그 삶은 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머무는 자리의 크기나 편안함보다, 그 자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11절은 단순한 취향의 고백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이 어디에 속하여 살 것인지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 선택은 시편 앞부분에 등장한 새의 둥지와도 연결됩니다. 새는 자기 집을 찾았습니다. 제비는 새끼들을 위한 둥지를 찾았습니다. 이제 시인도 자신이 머물고 싶은 자리를 밝힙니다.
시인이 선택한 것은 가장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분께 가장 가까이 속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조금 더 깊이
「천막」이라는 표현은 앞의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들」과도 대비됩니다. 시편 83편에서는 원수들의 천막들이 언급되었습니다. 하지만 시편 84편의 「악한 자들의 천막」을 그 민족들의 집과 직접 같은 것으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이 시편 안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집과 악에 속한 삶의 자리를 대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은 해이며 방패이시다
참으로 여호와야훼 하나님은 해와 방패이시니 여호와야훼께서 은혜와 영광을 베푸시고 흠 없이 걷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시편 84:12 · 두루새김
12절은 앞에서 말한 모든 고백의 이유를 밝혀 줍니다.
시인은 왜 하나님의 집을 그토록 사랑합니까?
왜 그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합니까?
왜 그 집 문턱에 머무는 짧은 시간이 다른 곳에서 보내는 긴 시간보다 낫다고 말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집 자체가 특별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있습니다.
해와 방패는 서로 다른 역할을 떠올리게 합니다. 해는 빛과 생명, 따뜻함의 근원이 되는 존재입니다. 방패는 위험이 닥칠 때 그것을 막아 주는 보호의 도구입니다.
하나는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해치는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모습입니다. 이 두 표현을 함께 놓으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생명을 누리게 하시면서 동시에 그들을 지켜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또한 「방패」라는 말은 10절의 기도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에서 시인은 공동체의 방패를 하나님이 살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방패이십니다.
만일 10절의 방패를 왕으로 이해한다면, 이 두 구절의 관계는 더욱 의미 있어집니다. 백성을 지키는 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왕 자신도 하나님이 돌보셔야 하는 존재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보호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을 위한 기도와 하나님을 방패로 고백하는 찬양이 서로 어울립니다.
원문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תָּמִים)은 온전하게 걷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온전함을 나타내는 낱말은 온전함이나 흠이 없음을 뜻합니다. 사람의 행동에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향하여 성실하게 걸어가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6–8절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실제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원문에서는 12절의 바르게 살아가는 삶도 걷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앞의 걷기는 시온을 향한 순례의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뒤의 걷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길을 노래하다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라는 약속을 하나님이 신실한 사람에게 원하는 모든 재물과 성공을 반드시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좋은 것의 목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편 전체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뜰을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을 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분의 집 문턱에 머무는 것을 다른 곳의 삶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한 고백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향해 선하게 대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결과와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여, 복되구나,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이여.시편 84:13 · 두루새김
시편의 세 번째 복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으며 그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처음 두 선언은 하나님의 집과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직접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선언에는 특정 장소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집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마지막에 밝히는 것입니다.
그 집이 귀한 까닭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집으로 가는 길이 복된 까닭은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 집 문턱이 귀한 까닭도 하나님이 해와 방패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향한 그리움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완성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5:2에서도 하나님의 장막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을 말하면서 온전하게 행하고 의를 실천하는 사람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도덕적으로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좁혀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을 향한 삶
시편 84편은 성경에서 예배의 장소가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졌는지를 보여 주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성전이라는 건물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곳에 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줄여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에서 그 장소가 중요한 까닭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머무시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차례의 복 선언은 시편 전체를 하나로 묶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그분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분이 해와 방패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리를 사랑하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며, 그분을 의지하는 하나의 삶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시편 84편을 다시 처음부터 바라보면, 그리움으로 시작된 노래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침내 시인은 자신이 어디에 머무르고 싶은지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집 문턱입니다.
시인은 그 문턱보다 더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더 큰 권위를 얻거나,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대접을 받게 해 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곳에 머무는 일 자체가 기쁨입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문턱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그 문턱 너머에서 자신을 맞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시편은 마지막에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아직 길 위에 있는 사람도, 골짜기를 지나가는 사람도, 문턱에 겨우 다다른 사람도 이 고백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복은 하나님의 집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며, 그분을 의지하는 데 있습니다.
시편의 마지막에 다시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의 집 문턱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는 그 자리가 넓거나 화려하기 때문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그곳에서 보내는 하루가 천 날보다 귀합니다.
그곳이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분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