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91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고난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시편 91편은 성경에서 가장 강한 보호의 약속을 담은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역병이 돌아다니고, 화살이 날아오고, 수많은 사람이 곁에서 쓰러져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재앙이 가까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천사들이 그를 받쳐 주고, 사자와 독사까지 그의 발아래 놓일 것입니다.

그런데 시의 마지막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직접 「고난 속에서 내가 그와 함께 있다」(15절)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는 재앙이 가까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고난 속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말씀은 어떻게 함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시는 위험을 결코 경험하지 않는 삶을 약속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위험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일까요? 본문은 어느 한쪽만을 택하여 다른 쪽을 지우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위험으로부터 실제로 건져 주신다는 약속도 분명하고, 고난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약속도 분명합니다.

시편 91편은 위험이 얼마나 강한지를 모르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위험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듣는 약속입니다.

이 시의 특별한 점은 그 약속을 전달하는 방식에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 관한 선언이 나옵니다(1절). 이어 한 사람이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2절), 다른 사람을 향한 보호의 약속이 길게 이어집니다(3–13절). 마지막에는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십니다(14–16절).

독자는 처음에는 하나님에 관하여 듣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직접 듣게 됩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991편 본문 읽기 →

지극히 높으신 분의 그늘 아래 머무는 사람

시편 91:1–2 본문 →

시편은 특정한 사건이나 고난의 설명 없이 시작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은밀한 곳에 사는 이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머무를 것이다.시편 91:1 · 본디새김

「은밀한 곳」은 외부에서 쉽게 접근하거나 들여다볼 수 없는 보호된 공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늘」은 뜨거운 햇빛을 피해 쉬는 곳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공간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산이나 성벽, 특정한 건물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곳이 누구의 은밀한 곳이며 누구의 그늘인지를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은밀한 곳이고, 전능자의 그늘입니다.

따라서 안전의 근거는 장소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머무를 것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לוּן⁩)는 밤을 보내거나 숙박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와 관련됩니다. 잠깐 그늘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밤을 보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뒤에서 등장하는 「밤의 공포」와 연결하여 읽을 만합니다.

밤은 앞을 볼 수 없고, 어떤 위험이 다가오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사람은 밤에 더욱 무력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바로 그 밤을 하나님의 그늘 아래에서 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위험이 모두 확인되고 제거된 다음에야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다가올지 모르는 시간에도 하나님께 머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이 사람이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나는 여호와야훼를 두고 말한다. 「그는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이다. 나는 그를 신뢰한다.」시편 91:2 · 본디새김

1절이 하나님께 머무는 사람에 관한 일반적인 선언이었다면, 2절에서는 「나」의 고백이 등장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 이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단순히 위대한 보호자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의지하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피난처」와 「요새」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합니다. 피난처는 위험을 피해 들어가는 곳입니다. 요새는 공격을 견디도록 방비된 곳입니다. 이 두 표현은 모두 위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첫 두 절부터 시인은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위험이 없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위험 속에서 자신의 피난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은밀한 곳」을 성전이나 지성소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성전을 특정하는 표현이 없습니다. 따라서 시인이 실제로 성전 안의 어떤 공간을 가리켰다고 단정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보호를 거처의 이미지로 묘사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덫에 걸릴 새를 날개 아래 보호하시는 하나님

시편 91:3–4 본문 →

그가 너를 새잡이의 덫에서, 파멸을 가져오는 역병에서 건져 낼 것이기 때문이다.시편 91:3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은 두 종류의 위험을 나란히 놓습니다.

하나는 새잡이의 덫입니다. 새잡이는 새를 잡기 위해 덫을 놓습니다. 덫은 보이지 않는 곳에 놓일 수 있고, 새는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역병입니다. 역병은 사람의 의도나 계획으로 완전히 통제하기 어려운 위협입니다. 누구에게 언제 닥칠지 알기 어렵고, 공동체 전체를 두려움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두 위험은 성격이 다릅니다. 덫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설치한 위험이고, 역병은 많은 사람에게 번지는 재앙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 두 위험 모두에서 건져 내신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미리 알아차리기 어려운 위험도 하나님의 보호 밖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가 자기 날개깃으로 너를 덮고, 너는 그의 날개 아래로 피할 것이다. 그의 신실함은 큰 방패와 손방패다.시편 91: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새잡이의 덫이 등장했습니다. 새는 덫에 걸리면 스스로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하나님의 날개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새를 자신의 날개 아래 품어 보호하는 어미 새처럼 묘사되십니다.

덫에 걸릴 위험에 처한 작은 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새를 보호하기 위해 더 큰 날개가 펼쳐집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덫을 찾아 제거하시는 모습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위험에 노출된 존재를 자신의 날개 아래로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시편 91편은 여기서 갑자기 이미지를 바꿉니다.

어미 새의 날개가 등장한 직후, 전사의 방패가 등장합니다. 부드러운 날개와 단단한 방패가 한 절에 놓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생명을 품으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적의 공격을 막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방패의 크기가 아닙니다. 시인은 무엇이 방패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했던 사람에게, 이제 하나님의 신실함이 그를 지키는 방어물로 제시됩니다.

신뢰와 신실함이 마주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실함으로 그를 보호하십니다. 이 관계를 통해 시인은 하나님의 보호가 막연한 힘의 발휘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날개 이미지는 신명기 32:11–12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독수리가 새끼를 보호하고 날개로 받쳐 주는 모습에 빗대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고 노래합니다. 출애굽기 19:4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에 업어 자신에게로 인도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룻기 2:12에서 보아스는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날개 아래로 피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들은 날개 아래 피한다는 표현이 단순히 위험을 피하는 행동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관계를 나타낸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출애굽의 역사에는 위험을 전혀 경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그들이 광야를 통과하지 않아도 되게 하는 방식으로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광야를 통과하도록 인도하시는 방식으로도 나타났습니다. 한편 「큰 방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몸을 넓게 보호하는 방패를 가리킵니다. 「손방패」로 번역한 낱말은 구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는 드문 낱말입니다. 작은 방패나 몸을 둘러 보호하는 방어물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한 형태와 크기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보이는 공격과 보이지 않는 재앙 가운데서

시편 91:5–8 본문 →

너는 밤의 공포도, 낮에 날아오는 화살도, 어둠 속을 걸어 다니는 역병도, 한낮에 짓부수는 파멸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시편 91:5–6 · 본디새김

밤과 낮이 등장하고, 다시 어둠과 한낮이 등장합니다. 시인은 하루 전체를 위험의 시간으로 묘사합니다. 어두울 때만 위험한 것도 아닙니다. 밝은 대낮이라고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역병은 사람처럼 걸어 다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마치 어둠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덮치는 존재처럼 묘사합니다. 본문의 초점은 각 위험의 정체를 분류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두려워할 수 있는 위협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위험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위험의 존재와 두려움의 지배는 같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 위협에 직면하면서도 그 위협이 자신의 모든 판단과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에게 그러한 담대함이 주어질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네 곁에서 천 명이, 네 오른쪽에서 만 명이 쓰러져도, 네게는 가까이 오지 않을 것이다.시편 91:7 · 본디새김

천 명과 만 명이라는 숫자는 재앙의 규모를 극대화합니다. 시인은 많은 사람이 쓰러지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보호가 미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약속은 매우 강합니다. 이를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분명히 실제 위험에서 건짐받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이 모든 전염병과 전쟁에서 반드시 육체적으로 살아남는다는 예외 없는 법칙으로 읽을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시의 마지막 말씀까지 읽은 뒤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너는 다만 네 눈으로 바라보며, 악인들이 받는 보응을 보게 될 것이다.시편 91:8 · 본디새김

하나님의 보호는 단순히 위험한 상황에서 한 개인이 살아남는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과도 연결됩니다.

7절에서 쓰러지는 천 명과 만 명이 모두 악인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8절에서 악인들의 보응이 언급되었다고 해서, 앞에서 쓰러진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재난 피해자의 도덕적 상태를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구약의 다른 본문도 이러한 단순화를 경계합니다. 욥기는 의로운 사람도 심각한 재난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중심 문제로 다룹니다. 따라서 시편 91편의 보호 약속을 근거로 재난을 겪은 사람을 불신앙이나 악의 결과로 정죄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이 시가 강조하는 것은 재난을 피한 사람의 우월함이 아니라, 재난과 악을 넘어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시에서 질병과 파멸을 이러한 방식으로 의인화하는 표현은 낯설지 않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역병과 파괴적인 재앙을 두려운 세력으로 묘사하는 언어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반드시 특정한 악령이나 초자연적인 존재 네 종류를 설명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나의 피난처에서 너의 거처로

시편 91:9–10 본문 →

여호와야훼, 참으로 당신은 저의 피난처이십니다. 너는 지극히 높으신 이를 네 거처로 삼았다.시편 91:9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인칭이 바뀌는 특징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여호와야훼를 향하여 「저의 피난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어서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네 거처」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도 이와 같은 변화가 있습니다. 이를 한 사람의 고백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확언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호와야훼, 저의 피난처」라는 부분을 앞의 고백을 다시 언급하는 말로 보고, 전체를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을 향한 하나의 선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어느 부분을 말하는지 본문이 명시하지 않으므로 화자를 정확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칭 변화가 전달하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시인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그 고백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장됩니다.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께 너도 머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거처」라는 표현은 바로 앞 시편과 연결됩니다. 시편 90:1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당신은 대대로 저희의 거처이셨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91:9에도 같은 히브리어 명사가 사용됩니다. 시편 90편에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거처이셨습니다. 시편 91편에서는 한 사람이 그 하나님을 자신의 거처로 삼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거처는 위험을 완전히 차단하는 독립된 공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불행이 네게 닥치지 않고, 재앙이 네 천막에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시편 91:10 · 본디새김

여기서 「천막」이라는 말은 삶의 구체적인 장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이 잠을 자고, 가족과 함께 지내며, 일상의 생활을 이어 가는 공간입니다.

앞에서는 피난처와 요새라는 이미지가 나왔습니다. 이제는 천막이 등장합니다. 요새는 전쟁을 위한 장소이지만, 천막은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특별한 위기의 순간뿐 아니라 일상의 거처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피하는 일을 세상에서 도망쳐 특별한 장소에 숨어 있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처로 삼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기대합니다.

발을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

시편 91:11–13 본문 →

그가 너를 위해 자기 천사들에게 명령하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발을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그들이 손바닥에 너를 받쳐 들 것이다.시편 91:11–12 · 본디새김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천사들은 독립적으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보호하는 일을 수행합니다.

출애굽기 23:20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길을 지키도록 사자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 나옵니다. 시편 91편에서도 보호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12절의 이미지는 뜻밖에 작고 일상적입니다.

바로 앞에서는 천 명과 만 명이 쓰러지는 거대한 재앙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발이 돌에 부딪치는 작은 사고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거대한 위험에서만 보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길을 걷다가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도 돌보시는 분입니다.

「네 모든 길」에서 길은 사람이 실제로 걸어가는 삶의 경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시는 이유는 사람이 자기 길을 걸어가는 동안 그를 지키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사람이 어떤 위험한 행동을 의도적으로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호하신다는 뜻일까요? 본문 자체는 그런 행동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의 보호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로 묘사될 뿐, 사람이 그 보호를 증명하기 위해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명령은 없습니다.

너는 사자와 독사를 밟고, 젊은 사자와 뱀을 짓밟을 것이다.시편 91:13 · 본디새김

앞에서는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보호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발로 사자와 뱀을 짓밟습니다.

돌에 걸려 넘어질 만큼 연약한 사람이, 자신을 해칠 수 있는 맹수와 독사 앞에서도 안전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자와 독사는 서로 다른 위험을 나타냅니다. 사자는 눈에 띄는 강한 힘으로 공격할 수 있습니다. 독사는 몸집이 작아도 치명적인 독을 지니고 있습니다. 힘으로 압도하는 위험과 숨어서 해칠 수 있는 위험이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위협적인 힘들조차 하나님의 보호를 넘어서는 궁극적인 권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시인은 끊임없이 「그가」, 「너는」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 갑자기 모든 인칭이 바뀝니다.

이제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4:5–7과 누가복음 4:9–12에서 악마는 예수에게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요구하면서 시편 91:11–12를 인용합니다. 천사들이 보호할 것이라는 약속을 근거로 위험한 행동을 하라고 유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16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십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는 것과 그 보호를 증명하도록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신뢰는 위험을 무시하는 무모함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믿음은 위험을 일부러 만들어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한편 마지막의 「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탄닌은 문맥에 따라 뱀뿐 아니라 용이나 거대한 물속의 괴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7:9–12에서는 뱀 또는 큰 뱀 같은 존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이사야 27:1에서는 혼돈을 상징하는 바다 괴물과 관련됩니다. 시편 91편에서는 사자와 독사가 짝을 이루고, 그것들을 발로 밟는 장면이므로 위험한 뱀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낱말이 지닌 폭넓은 상징성 때문에, 단순히 동물 네 종류를 나열한 장면을 넘어 위협적인 세력을 제압하는 이미지가 겹쳐 있다고 볼 여지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근거로 사자와 뱀을 각각 특정한 영적 존재나 죄악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본문이 제공하지 않는 설명입니다.

내가 그를 건져 내겠다

시편 91:14 본문 →

「그가 내게 마음을 붙였으므로 내가 그를 건져 내겠다. 그가 내 이름을 알기에 내가 그를 높은 곳에 안전하게 두겠다.」시편 91:14 · 본디새김

이전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어떤 보호를 받는지 다른 목소리가 설명했습니다. 이제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뜻을 밝히십니다. 시인은 이 전환을 별도의 설명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게」, 「내가」, 「내 이름」이라는 표현을 통해 말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보호받는 사람을 두 가지 표현으로 묘사하십니다. 하나는 「내게 마음을 붙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이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붙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חָשַׁק⁩)는 어떤 대상에게 애착을 갖거나 깊이 마음이 끌려 결합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필요할 때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행동보다 깊은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해 있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7:7에서도 같은 동사가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마음을 두시고 그들을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91편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마음을 붙이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순한 힘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신뢰의 관계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내 이름을 안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이름의 정확한 발음을 알고 있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는지와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34:6–7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며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십니다. 따라서 시편 91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과 신실함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 이름을 위험을 막는 주문처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높은 곳에 안전하게 두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사람을 두시어 보호하시는 이미지입니다. 시의 첫머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이」로 불리셨습니다. 이제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을 안전한 높은 곳에 두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는 이 높은 곳의 안전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고난입니다.

고난 속에서 내가 그와 함께 있다

시편 91:15 본문 →

「그가 나를 부르면 내가 그에게 응답하겠다. 고난 속에서 내가 그와 함께 있다. 내가 그를 구해 내고 그를 영화롭게 하겠다.」시편 91:15 · 본디새김

그런데 이 약속 가운데 가장 뜻밖의 표현은 「고난 속에서」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재앙이 가까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불행이 닥치지 않을 것이며, 천사들이 발을 받쳐 줄 것이고, 사자와 독사를 짓밟을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고난 속에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하십니다.

이것은 앞의 말씀을 취소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 한 문장은 앞부분의 보호 약속을 아무런 고난도 없는 삶에 대한 기계적인 보장으로 읽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보호에는 위험에서 건져 내시는 행동도 포함되지만, 고난의 한가운데서 함께하시는 행동도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에서 건져 내신 뒤에야 그와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고난 속에서 이미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어려움이 발생하지 않는 데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고난의 부재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서 멀어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그를 구해 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단지 고난을 견디는 내적인 능력으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모든 고난이 반드시 어떤 일정에 따라 끝나는지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절은 하나님의 보호에 관한 두 진실을 함께 붙들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험에서 건지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아직 고난이 끝나지 않은 동안에도 그들과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를 지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예외 없는 법칙으로 읽는 것은 성경 전체의 증언과 맞지 않습니다. 시편 91편 자체도 마지막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고난 속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시적 확신을 개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부 계약서처럼 바꾸어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고난이 없을 것이라는 말보다 깊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시의 첫머리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마지막에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신뢰는 단순히 마음속에 간직한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실제로 부르짖는 관계로 나타납니다. 위험이 닥쳤을 때 사람은 자신의 불안을 감추지 않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름에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시편의 보호 약속을 살아 있는 관계로 만드는 핵심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도 「그와 함께 내가 고난 속에 있다」는 말씀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구약의 다른 본문에서도 이러한 약속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2에서는 물 가운데로 지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 물을 지나는 사람과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시편 44편에서는 하나님께 충실한 백성이 고난과 수치를 겪는 상황을 탄식합니다. 시편 88편에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이 계속 깊은 고통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심각한 재앙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사실은 시편의 보호 약속을 거짓이라고 선언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호와 구원에 관한 시편의 언어가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랜 삶으로 배부르게 하겠다

시편 91:16 본문 →

「오랜 삶으로 그를 배부르게 하고, 내 구원을 그에게 보여 주겠다.」시편 91:16 · 본디새김

여기서 「오랜 삶」은 구약의 축복 언어와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20:12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에게 땅에서 오래 살게 되리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신명기에서도 오래 사는 삶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의 중요한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시편 91편 역시 인간의 실제적인 삶을 귀하게 여깁니다. 이 구절을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바꾸어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은 삶의 날들이 길어지는 복을 말합니다.

시인은 단순히 오래 살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랜 삶으로 배부르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배부름은 부족함이 채워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표현에는 삶이 단지 오래 이어지는 것뿐 아니라, 그 삶이 만족을 누리는 상태에 이르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만 시편 91편의 오랜 삶에 대한 약속을 모든 신실한 사람에게 보장되는 수명의 규칙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시편 90편은 경건한 사람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약속은 인간이 원하는 만큼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선언이 아니라, 생명의 날들과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고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시인은 여기서 구원이 어떤 구체적 사건을 통해 나타날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전쟁의 승리인지, 질병에서의 회복인지, 어떤 다른 위기에서의 구원인지 특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베푸시는 분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시의 처음부터 계속되던 보호의 모든 이미지는 마침내 이 약속으로 모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90:14에서 시인은 「아침에 당신의 인애로 저희를 배부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두 구절에는 모두 배부르게 한다는 같은 히브리어 어근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두 시의 강조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시편 90편에서는 인간의 삶이 짧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인애로 만족하기를 구합니다. 시편 91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보호하시고 오래 지속되게 하시는 복을 선포합니다. 하나는 인간 생명의 유한함을 바라보는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생명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날개 아래에서 들려오는 약속

시편 91:1–16 본문 →

시편 91편을 다시 처음부터 바라보면, 서로 다른 보호의 이미지들이 차례로 펼쳐집니다. 처음에는 은밀한 곳과 그늘이 등장합니다. 이어서 피난처와 요새가 나타납니다. 새잡이의 덫이 놓여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날개가 펼쳐지고, 날아오는 화살 앞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방패가 됩니다.

수많은 사람이 쓰러지는 재앙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지키시겠다는 약속이 울리고, 길 위에서는 천사들이 사람의 발을 받쳐 줍니다. 그 모든 장면을 지나 마지막에 이르면 더 이상 장소나 사물에 대한 비유가 중심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고난 속에서 내가 그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시인은 보호의 가장 깊은 근거를 보여 줍니다.

피난처가 안전한 까닭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늘이 안전한 까닭은 그 그늘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날개가 보호하는 까닭은 그 날개를 펼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서도 사람이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91편은 하나님을 신뢰하면 어떤 위험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계산법보다, 어떤 위험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 밖에 있지 않다는 믿음을 들려줍니다.

시편은 그 약속이 어떤 구체적인 날에, 어떤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누가 말하고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그는 나의 피난처」라고 고백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그와 함께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인간의 신뢰에 하나님의 말씀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시편 91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위험이 존재하는 세상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밤에는 알 수 없는 공포가 있고, 낮에는 화살이 날아올 수 있습니다. 길에는 발을 걸리게 하는 돌이 있으며, 어디에 위험이 숨어 있는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름에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시편 91편이 마지막까지 독자에게 들려주는 것은 위험이 없다는 선언만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 음성 아래에서 시의 첫 장면이 다시 떠오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은밀한 곳에 머무는 사람.

밤이 깊어져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