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90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사라지는 날들과 남겨지는 일들
사람의 삶은 짧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잠깐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시편 90편은 이 질문에 예상 밖의 대답을 내놓습니다.
시인은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피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날들이 얼마나 짧은지 올바르게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고는 마지막에 「저희 손이 하는 일, 그것을 굳게 세워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짧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일을 굳게 세워 달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에 시편 90편의 깊은 역설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생명을 지속시킬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유한한 인간의 삶과 수고에 지속되는 의미를 주실 수 있습니다.
시의 흐름도 이러한 움직임을 따릅니다. 먼저 영원하신 하나님과 사라지는 인간을 대조하고(1–6절), 인간의 삶이 죄와 하나님의 분노 아래 놓인 현실을 직면합니다(7–11절). 그다음 자신의 날들을 올바르게 헤아리는 지혜를 구하고(12절), 하나님의 돌아오심과 인애를 간청합니다(13–15절). 마지막에는 다음 세대와 자신들의 수고를 하나님께 맡깁니다(16–17절).
앞선 시편 89편이 무너진 다윗 왕조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물었다면, 시편 90편은 한 걸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왕조뿐 아니라 사람의 생명 자체가 유한한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산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의 거처이신 하나님
시편 90편의 표제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입니다.
시편 가운데 모세의 이름을 표제로 지닌 유일한 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칭호도 신명기 33:1에서 모세에게 사용됩니다. 다만 이 표제만으로 모세가 현재 형태의 시 전체를 직접 작성했다고 역사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이름은 이 기도를 읽는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출애굽과 광야 생활, 한 세대가 사라지고 다음 세대가 등장하는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드렸던 모세의 간구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주, 당신은 대대로 저희의 거처이셨습니다.시편 90:1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거처이셨다고 말합니다.
거처는 사람이 머무는 곳, 거주하는 처소를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정한 장소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앞세웁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왔지만 곧장 안정된 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지나며 장막을 치고 거두기를 반복했습니다. 머무는 장소는 바뀌었고, 세대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백성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 대대로 그들의 거처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33:27에 나오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떠올리게 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힘이나 안정된 환경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그들을 붙들어 오신 하나님 안에서 안전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시편 90편도 같은 신앙의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이 거처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산들이 태어나기 전, 당신이 땅과 세상을 낳으시기 전부터,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시편 90:2 · 본디새김
시인은 창조를 출산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산은 인간의 눈에 가장 오래되고 변함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라가 세워지고 무너져도 산은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그 산조차 한때 태어난 존재입니다.
산에는 시작이 있습니다.
땅과 세상에도 시작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세상보다 조금 더 오래 존재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존재가 시작을 가진 반면, 하나님은 그 시작 이전부터 하나님이셨다고 고백합니다. 「영원에서 영원까지」라는 표현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포괄합니다. 인간은 시간을 지나가며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태어나고 쇠하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모든 인간의 거처는 언젠가 사라질 수 있지만, 하나님 자신이 거처이시라면 그분의 백성은 자기보다 오래 지속되는 분께 삶을 의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시인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시선을 인간에게 돌립니다.
천 년은 지나간 하루, 인간의 일생은 아침의 풀
당신은 사람을 티끌로 돌려보내시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자녀들아, 돌아가라.」시편 90: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창세기 3:19를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돌려보내시고」와 「돌아가라」(שׁוּב)에는 같은 동사, 돌아가다·돌아오다가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돌아가게 하시고, 사람의 자녀들에게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 앞에서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생명을 끝없이 붙들 능력이 없습니다.
시인은 인간의 죽음과 덧없음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바라봅니다. 인간의 생명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이 모든 개인의 죽음을 그 사람의 특정한 죄에 대한 직접적인 징벌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 시편은 공동체의 죄와 하나님의 분노를 다루지만, 그것을 개개인의 죽음에 일대일로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4절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시간은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천 년도 당신의 눈에는 지나가 버린 어제 하루와 같고, 밤에 보초를 서는 한때와 같기 때문입니다.시편 90:4 · 본디새김
인간은 천 년을 살아 본 적도 없고, 천 년 뒤의 세상을 직접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밤중에 보초를 서는 시간은 밤 전체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긴 세월도 하나님 앞에서는 짧은 시간에 비유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천 년과 하루를 정확한 비율로 환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하루가 인간의 천 년과 같다는 시간 계산법을 제시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시인이 말하려는 것은 시간의 길이를 경험하는 인간과 영원하신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인간에게 천 년은 상상하기 어려운 긴 시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세월의 흐름에 의해 늙거나 소진되지 않으십니다.
5–6절에서는 인간의 생애가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압축됩니다.
당신은 그들을 휩쓸어 가셨고, 그들은 잠과 같습니다. 그들은 아침에 새로 돋는 풀과 같습니다.시편 90:5 · 본디새김
아침에는 꽃을 피우며 새로 돋지만, 저녁에는 잘려 말라 버립니다.시편 90:6 · 본디새김
이 이미지에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풀은 실제로 살아 있고 자라납니다. 아침에 새로 돋아나고 꽃을 피웁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하며, 사랑하고 일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시인은 그 모든 일을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둘째, 그 생명은 너무도 빨리 사라집니다. 아침에는 생기가 넘치지만 저녁에는 말라 버립니다.
이 장면에서 더 중요한 것은 풀이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났느냐가 아닙니다. 아무리 생기 있게 피어났더라도 저녁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도 자신의 젊음과 능력을 영원히 보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인간의 유한함만을 이야기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왜 인간의 날들은 이처럼 무겁고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조금 더 깊이
시편 90편의 히브리어 표현은 창세기와 정확히 같지 않습니다. 여기서 「티끌」(דַּכָּא)로 옮긴 말은 부서지거나 짓눌린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인간이 결국 부서져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전합니다. 또한 6절은 실제 식물의 모든 생애가 하루 만에 끝난다는 설명이 아니라, 인간 생명의 짧음을 하루의 흐름 속에 압축한 시적 표현입니다.
숨겨진 죄악이 하나님의 얼굴빛 앞에 놓이다
저희는 당신의 분노로 쇠진했고, 당신의 격노로 두려움에 떨었기 때문입니다.시편 90:7 · 본디새김
앞부분에서는 「사람」과 「그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저희」가 등장합니다.
시인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유한함을 설명하다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상황을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 늙어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노 아래에서 삶이 쇠잔해지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8절은 그 이유를 밝힙니다.
당신은 저희의 죄악을 당신 앞에 놓으셨고, 저희의 숨겨진 것들을 당신 얼굴의 빛 앞에 놓으셨습니다.시편 90:8 · 본디새김
인간에게는 감출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행동이나 마음의 생각, 공동체가 덮어 두었던 잘못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들이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죄가 더 이상 숨겨져 있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 앞에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은 다른 시편에서 은혜와 호의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민수기 6:25에서도 하나님의 얼굴빛이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빛이 인간의 숨겨진 죄를 드러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빛이 서로 모순된 성격을 지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사람이 자신을 감추어 둘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바라보는 빛인 동시에, 감추어진 잘못을 드러내는 빛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시인의 탄식은 자신의 고통만을 내세우는 호소와 다릅니다. 그는 공동체의 죄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분노하셨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통의 현실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의 모든 날이 당신의 격분 속에서 지나갔고, 저희는 신음처럼 저희의 세월을 다 보냈기 때문입니다.시편 90:9 · 본디새김
한 사람의 삶을 세월로 계산하면 많은 해가 쌓입니다. 그러나 그 오랜 날들이 모두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신음처럼 짧은 소리뿐입니다.
저희 삶의 날들은 일흔 해, 힘이 있으면 여든 해입니다. 그 세월의 자랑거리도 수고와 고통입니다. 그 세월은 빠르게 지나가고 저희는 날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시편 90:1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인간이 실제로 살아가는 한정된 생애를 대표적인 수치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숫자의 정확성보다 그 세월의 성격입니다. 일흔 해를 살아도, 여든 해를 살아도 삶은 수고와 고통을 피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자랑거리」라는 표현은 더욱 긴 수명이나 인간의 성취에 대한 기대를 뒤집습니다. 오래 산 삶이라면 무언가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세월을 돌아보며 수고와 고통을 말합니다.
물론 삶에는 기쁨과 사랑과 아름다운 순간도 있습니다. 시편 90편은 그러한 경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죽음과 고통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성취를 영원한 소유처럼 붙들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누가 당신 분노의 힘을 알겠습니까? 당신을 향한 두려움만큼 큰 당신의 격분을 누가 알겠습니까?시편 90:11 · 본디새김
후반부의 히브리어는 두려움과 격분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하여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그분께 마땅히 돌려야 할 경외만큼 크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누가 그분의 분노를 제대로 헤아려 그에 합당하게 경외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의 판단을 가볍게 여기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시인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합니다.
더 긴 수명이 아닙니다.
더 많은 힘도 아닙니다.
지혜입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에서 「신음」(הֶגֶה)으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낮은 소리나 중얼거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신음이나 짧은 소리처럼 사라지는 세월을 떠올리게 합니다. 10절의 일흔 해와 여든 해를 성경이 정한 인간 수명의 절대적인 상한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 산 인물들이 등장하고, 모세 자신도 신명기 34:7에서 백이십 세에 죽었다고 기록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의 수명이 이 범위에 이른다는 통계적 진술도 아닙니다.
날들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희의 날들을 올바르게 세는 법을 알려 주십시오. 그리하여 저희가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해 주십시오.시편 90:12 · 본디새김
시편 90편의 중심에 놓인 기도입니다.
자신의 날들을 세라는 말은 단순히 남은 수명을 계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가 유한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시인도 앞에서 인간이 티끌로 돌아가고, 아침의 풀처럼 시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나이를 셀 수 있습니다. 지나온 해를 계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자기 삶의 의미와 한계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이 끝없이 남아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미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뒤로 미루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날들을 올바르게 세는 지혜는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는 데서 시작합니다.
인간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있고, 그 시간에는 끝이 있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능력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때,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인간이 죽음에 관해 오래 생각한다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이는 구약의 지혜 전통과도 연결됩니다. 잠언 9:10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선언합니다. 시편 90편에서도 지혜는 자기 삶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더구나 이 기도는 개인의 결심이 아닙니다. 「저희의 날들」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공동체가 함께 지혜를 얻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을 떠올리면 그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민수기 14:26–35에는 광야에서 불순종했던 세대가 사라지고, 다음 세대가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한 세대는 자신의 삶이 끝나기 전에 약속의 완성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세대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며,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지혜를 구한 뒤에 곧바로 또 다른 요청을 합니다. 이 요청은 시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90편의 이 구절이 민수기 14장의 특정 사건에 직접 연결되어 작성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의 이름과 광야 세대의 이야기가 이 기도를 이해하는 의미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돌아가라 하신 하나님께 돌아와 달라고 기도하다
돌아오십시오, 여호와야훼. 언제까지입니까? 당신의 종들을 두고 뜻을 돌이켜 주십시오.시편 90:13 · 본디새김
앞서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람의 자녀들아,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13절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두 구절에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13절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들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청합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을 바꿀 수 없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가 바뀌기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두 구절에서 「돌아가다」의 대상과 의미는 다릅니다. 3절은 인간의 죽음과 쇠함을 가리키고, 13절은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있는 백성에게 다시 호의를 베풀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같은 동사의 반복은 두 장면을 강하게 연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돌아가라고 하시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와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유한하지만, 그 차이가 인간의 기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그 차이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13절의 후반부인 「뜻을 돌이켜 주십시오」는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 자체가 변해야 한다는 요구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종들을 향해 나타내시는 분노와 징계의 상황을 바꾸어 달라는 간구입니다.
모세가 금송아지 사건 이후 이스라엘을 위해 간구했던 출애굽기 32:12와도 매우 가깝습니다. 그곳에서도 모세는 하나님께 분노를 돌이키시고 백성에게 내리려는 재앙에 관해 뜻을 돌이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두 본문은 실제로 「돌아오다」와 「뜻을 돌이키다」(נָחַ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을 공유합니다.
모세는 백성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청했던 사람입니다. 시편 90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분노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분노가 마지막 말씀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그 간구는 곧 기쁨을 구하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아침에 인애로 배부르게 해 주십시오
아침에 당신의 인애로 저희를 배부르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저희의 모든 날에 기뻐 외치며 즐거워하게 해 주십시오.시편 90:14 · 본디새김
여기서 다시 「아침」이 등장합니다.
앞부분의 아침이 인간 생명의 덧없음을 보여 주었다면, 여기서 아침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시간이 됩니다. 시인은 자신들의 삶이 아침에 돋아나 저녁에 시드는 풀과 같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날들이 하나님의 인애로 채워지기를 구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그 한정된 날들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배부름은 결핍이 채워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배부름을 구합니다. 시인은 재물이나 권력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애로 자신들을 배부르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앞에서 인간은 수고와 고통으로 가득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삶의 깊은 결핍이 하나님의 인애로 채워지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단순히 인생에 잠깐 덧붙는 위로가 아닙니다. 그 인애가 사람의 삶에 만족을 주는 근원이 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저희를 괴롭히신 날들만큼, 저희가 재앙을 겪은 햇수만큼 저희를 기쁘게 해 주십시오.시편 90:15 · 본디새김
시인은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을 잊게 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고통받았던 날들과 재앙을 겪었던 햇수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상응하는 기쁨을 구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고통의 날 수와 동일한 날 수만큼 기쁨을 주셔야 한다는 계산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적 표현의 핵심은 기쁨의 크기와 충분함에 있습니다. 고통이 깊고 오래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쁨도 그에 부족하지 않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부분의 시간에 대한 묘사와도 연결됩니다. 시인은 일흔 해나 여든 해의 삶이 수고와 고통으로 가득하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시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구합니다.
인간의 수명이 무한해져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제한된 세월 안에 하나님의 인애와 기쁨이 들어오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삶의 길이보다 그 삶을 무엇이 채우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생애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기도는 다음 세대를 향해 뻗어 나갑니다.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손이 하는 일
시의 마지막 두 절에는 서로 연결되는 두 가지 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인간의 손이 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일이 당신의 종들에게 드러나고, 당신의 위엄이 그들의 자녀들 위에 드러나기를 바랍니다.시편 90:16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단지 자신들만 보게 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하나님의 위엄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대대로」 자신들의 거처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서는 그 거처이신 하나님의 일이 다음 세대에도 나타나기를 구합니다.
시편 90편에서 인간은 한 세대에 속한 존재입니다. 어느 세대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부모 세대는 지나가고 자녀 세대가 등장합니다. 자녀들도 언젠가는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세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생애 안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보고, 자신들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위엄을 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깊은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시작한 모든 일의 마지막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한 인간의 생애와 동일한 범위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저희 하나님이신 주의 호의가 저희 위에 있기를 바랍니다. 저희 손이 하는 일을 저희를 위해 굳게 세워 주십시오. 저희 손이 하는 일, 그것을 굳게 세워 주십시오.시편 90:17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기를 구했습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하는 일을 굳게 세워 달라고 구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다음 인간의 수고가 하나님의 호의 아래 굳게 세워지기를 구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인은 인간이 실제로 일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는 자신들의 손을 사용하여 일하고, 무언가를 만들고, 이루어 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앞부분에서 시인은 인간의 삶이 풀처럼 시든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라지면 그가 하던 일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정성을 다한 수고가 결실을 맺지 못할 수도 있고, 이루어 놓은 것이 허물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굳게 세워 주십시오」(כּוּן)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견고하게 하거나 안정되게 세운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성공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불안정한 수고에 하나님께서 안정성과 지속성을 부여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일을 하지만, 그 일을 굳게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수고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인간의 수고를 무의미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두 일이 서로 연결됩니다.
시의 앞부분만 읽으면 인간은 곧 사라질 존재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천 년은커녕 자신의 한정된 생애조차 통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바로 그 인간의 손이 하는 일이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인간의 삶이 짧다는 사실은 인간의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수고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막연히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낙관주의와도 다릅니다. 시인은 이미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분노, 고통과 죽음을 충분히 말했습니다. 그 모든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손이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세워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희 손이 하는 일」이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합니다. 같은 요청을 반복하는 데는 절박함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세월이 얼마나 짧은지 아는 사람이, 그 짧은 세월 동안 해 온 일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는 그 요청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어떤 일을 세워 주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영원히 남으리라는 보장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인은 자신의 손이 하는 일을 하나님의 호의 아래에 올려놓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가장 합당한 기도였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지점에서 시편 90편은 전도서와도 의미 있게 만납니다. 전도서 3:11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지만,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전도서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시간과 수고를 온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도서 3:12–13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기뻐하고 자신의 수고 가운데 좋은 것을 누리는 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야기합니다. 시편 90편은 그와 비슷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더욱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을 구합니다.
아침의 풀과 아침의 인애
시편 90편을 다시 처음부터 바라보면 시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아침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 아침에는 풀이 돋아납니다.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그 풀은 말라 버립니다.
두 번째 아침에는 하나님의 인애를 구합니다. 풀이 돋아나는 아침을 저녁이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아침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인애로 배부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날들은 여전히 짧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삶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처이심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날들이 한정되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날들을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가르쳐 달라고 구합니다. 하나님의 인애로 만족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이 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 시에서 지혜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데서 시작하지만, 자신의 한계만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시의 첫머리에서 산들은 태어나고 인간은 티끌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늘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하는 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손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께 「저희 손이 하는 일, 그것을 굳게 세워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시편 90편은 그 손을 거두어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손의 수고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