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90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사라지는 날들과 남겨지는 일들
사람의 삶은 짧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잠깐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시편 90편은 이 질문에 예상 밖의 대답을 내놓습니다.
시인은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피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날들이 얼마나 짧은지 올바르게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고는 마지막에 「저희 손이 하는 일을 굳게 세워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에 시편 90편의 깊은 역설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생명을 이어 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한정된 인간의 삶과 수고에 오래 남는 의미를 주실 수 있습니다.
먼저 영원하신 하나님과 사라지는 인간을 대조하고(1–6절), 인간의 삶이 죄와 하나님의 분노 아래 놓인 현실을 마주합니다(7–11절). 그다음 자신의 날들을 올바르게 헤아리는 지혜를 구하고(12절), 하나님의 돌아오심과 한결같은 사랑을 간청합니다(13–15절). 마지막에는 다음 세대와 자신들의 수고를 하나님께 맡깁니다(16–17절).
앞선 시편 89편이 무너진 다윗 왕조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물었다면, 시편 90편은 한 걸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왕조뿐 아니라 사람의 생명 자체가 한정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산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가 머무는 곳이신 하나님
시편 90편의 표제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입니다」입니다.
시편 가운데 모세의 이름을 표제로 지닌 유일한 시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이름은 이 기도를 읽는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이집트를 떠나온 일과 광야 생활, 한 세대가 사라지고 다음 세대가 등장하는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드렸던 모세의 간절한 기도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입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우리가 머무는 곳이셨습니다.시편 90:1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머무는 곳을 마련해 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머무는 곳이 되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정한 장소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앞세웁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왔지만 곧장 안정된 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지나며 천막을 치고 거두기를 반복했습니다. 머무는 장소는 바뀌었고, 세대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백성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 대대로 그들이 머무는 곳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산들이 태어나기 전, 당신이 땅과 세상을 낳으시기 전,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시편 90:2 · 두루새김
시인은 창조를 출산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산은 인간의 눈에 가장 오래되고 변함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라가 세워지고 무너져도 산은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그 산조차 한때 태어난 존재입니다.
산에는 시작이 있습니다.
땅과 세상에도 시작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존재가 시작을 가진 반면, 하나님은 그 시작 이전부터 하나님이셨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시간을 지나가며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태어나고 쇠하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인간이 머무는 모든 곳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지만, 하나님 자신이 머무는 곳이시라면 그분의 백성은 자기보다 오래 계시는 분께 삶을 맡길 수 있습니다.
천 년은 지나간 하루, 인간의 일생은 아침의 풀
당신은 사람을 티끌로 돌려보내시며 「사람들아, 돌아가라」 하십니다.시편 90:3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창세기 3:19를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흙먼지」(דַּכָּא)로 옮긴 말은 부서지거나 짓눌린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인간이 결국 부서져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전합니다.
「돌아가게 하시며」와 「돌아가라」에는 같은 동사 슈브(שׁוּב), 돌아가다·돌아오다가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돌아가게 하시고, 사람들에게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 앞에서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생명을 끝없이 붙들 능력이 없습니다.
시인은 인간의 죽음과 덧없음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일로 바라봅니다. 인간의 생명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이 모든 개인의 죽음을 그 사람의 특정한 죄에 대한 직접적인 벌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 시편은 공동체의 죄와 하나님의 분노를 다루지만, 그것을 개개인의 죽음에 하나하나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당신 눈에는 천 년도 지나간 어제 하루와 같고 밤중에 보초를 서는 한때와 같습니다.시편 90:4 · 두루새김
인간은 천 년을 살아 본 적도 없고, 천 년 뒤의 세상을 직접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밤중에 보초를 서는 시간은 밤 전체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긴 세월도 하나님 앞에서는 짧은 시간에 비유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하루가 인간의 천 년과 같다는 시간 계산법을 제시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천 년은 상상하기 어려운 긴 시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세월의 흐름에 의해 늙거나 힘이 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그들을 휩쓸어 가시니 그들은 잠과 같고 아침에 새로 돋는 풀과 같습니다.시편 90:5 · 두루새김
풀은 아침에 꽃피며 새로 돋다가 저녁이면 잘려 말라 버립니다.시편 90:6 · 두루새김
첫째, 풀은 실제로 살아 있고 자라납니다. 아침에 새로 돋아나고 꽃을 피웁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하며, 사랑하고 일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시인은 그 모든 일이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둘째, 그 생명은 너무도 빨리 사라집니다. 아침에는 생기가 넘치지만 저녁에는 잘려서 말라 버립니다.
아무리 생기 있게 피어났더라도 저녁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도 자신의 젊음과 능력을 영원히 지킬 수 없습니다.
왜 인간의 날들은 이처럼 무겁고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조금 더 깊이
시편 90편의 히브리어 표현은 창세기와 정확히 같지 않습니다. 6절의 풀은 실제 식물의 모든 생애가 하루 만에 끝난다는 설명이 아니라, 인간 생명의 짧음을 하루의 흐름 속에 압축한 시적 표현입니다.
숨은 죄들이 하나님의 얼굴빛 앞에 놓이다
참으로 당신의 분노에 우리는 다 스러졌고 당신의 격한 노여움에 두려워 떨었습니다.시편 90:7 · 두루새김
앞부분에서는 「사람」과 「그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저희」가 등장합니다. 시인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삶의 한계를 설명하다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상황을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죄를 당신 앞에 두시고 우리의 숨겨진 것들을 당신 얼굴빛 앞에 놓으셨습니다.시편 90:8 · 두루새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행동이나 마음의 생각, 공동체가 덮어 두었던 잘못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들이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죄가 더 이상 숨겨져 있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 앞에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은 다른 시편에서 은혜와 호의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민수기 6:25에서도 하나님의 얼굴빛이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빛이 인간의 숨은 죄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빛은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바라보는 빛인 동시에, 감추어진 잘못을 드러내는 빛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시인의 탄식은 자신의 고통만을 내세우는 호소와 다릅니다. 그는 공동체의 죄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분노하셨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통의 현실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의 모든 날이 당신의 노여움 속에서 지나갔고 우리는 한숨처럼 세월을 다 보냈습니다.시편 90:9 · 두루새김
한 사람의 삶을 세월로 계산하면 많은 해가 쌓입니다. 그러나 그 오랜 날들이 모두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한숨처럼 짧은 소리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햇수는 일흔 해, 힘이 있으면 여든 해이지만 그 세월의 자랑도 고생과 아픔일 뿐, 참으로 세월은 빠르게 지나가고 우리는 날아가 버립니다.시편 90:10 · 두루새김
일흔 해와 여든 해를 성경이 정한 인간 수명의 절대적인 상한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은 인간이 실제로 살아가는 한정된 생애를 대표적인 수치로 표현한 것입니다. 일흔 해를 살아도, 여든 해를 살아도 삶은 수고와 고통을 피하지 못합니다.
오래 산 삶이라면 무언가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세월을 돌아보며 수고와 고통을 말합니다. 물론 삶에는 기쁨과 사랑과 아름다운 순간도 있습니다. 다만 죽음과 고통 앞에서 인간이 자신이 이루어 낸 일을 영원한 소유처럼 붙들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당신의 분노가 지닌 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만큼 큰 당신의 노여움을 누가 알겠습니까?시편 90:11 · 두루새김
후반부의 히브리어는 두려움과 노여움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하여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그분께 마땅히 품어야 할 두려움만큼 크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누가 그분의 분노를 제대로 헤아려 그에 합당하게 두려워하며 높일 수 있겠느냐는 질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앞의 뜻을 드러냅니다. 어느 쪽이든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의 판단을 가볍게 여기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시인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합니다.
더 긴 수명이 아닙니다.
더 많은 힘도 아닙니다.
지혜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한숨」으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낮은 소리나 중얼거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10절의 수명에 관해서는, 창세기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 산 인물들이 등장하고, 모세 자신도 신명기 34:7에서 백이십 세에 죽었다고 기록됩니다.
삶의 날들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의 날을 바로 헤아리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하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해 주십시오.시편 90:12 · 두루새김
시편 90편의 중심에 놓인 기도입니다.
자신의 삶의 날들을 세라는 말은 단순히 남은 수명을 계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도 앞에서 인간이 흙먼지로 돌아가고, 아침의 풀처럼 시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은 자기 나이를 셀 수 있습니다. 지나온 해를 계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자기 삶의 의미와 한계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이 끝없이 남아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미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뒤로 미루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삶의 날들을 올바르게 세는 지혜는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는 데서 시작합니다.
자신의 시간과 능력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때,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지혜는 인간이 죽음에 관해 오래 생각한다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잠언 9:10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높이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선언합니다.
더구나 이 기도는 개인의 결심이 아닙니다.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고, 「저희가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공동체가 함께 지혜를 얻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을 떠올리면 그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민수기 14:26–35에는 광야에서 불순종했던 세대가 사라지고, 다음 세대가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한 세대는 자신의 삶이 끝나기 전에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며,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지혜를 구한 뒤에 곧바로 또 다른 요청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시편 90편의 이 구절이 민수기 14장의 특정 사건에 직접 연결되어 쓰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의 이름과 광야 세대의 이야기가 이 기도를 이해하는 의미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돌아가라 하신 하나님께 돌아와 달라고 기도하다
여호와야훼여,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당신의 종들을 두고 마음을 돌이켜 주십시오.시편 90:13 · 두루새김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먼지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13절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들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청합니다.
두 구절에 같은 히브리어 동사 슈브가 사용됩니다. 물론 3절은 인간의 죽음과 쇠함을 가리키고, 13절은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있는 백성에게 다시 호의를 베풀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같은 동사의 반복은 두 장면을 강하게 연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돌아가라고 하시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와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그 차이가 인간의 기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그 차이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는 하나님께서 종들을 향해 나타내시는 분노와 벌의 상황을 바꾸어 달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이 요청은 모세가 금송아지 사건 이후 이스라엘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출애굽기 32:12와도 매우 가깝습니다. 모세는 백성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청했던 사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분노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분노가 마지막 말씀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32:12에서도 모세는 하나님께 분노를 돌이키시고 백성에게 내리려는 재앙에 관해 뜻을 돌이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두 본문은 실제로 「돌아오다」와 「뜻을 돌이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을 공유합니다. 두루새김은 이곳의 뒤 표현을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로 옮겨, 종들을 향한 분노를 거두어 달라는 뜻을 드러냅니다.
아침에 한결같은 사랑으로 배부르게 해 주십시오
아침에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배불려 주셔서 우리가 사는 날 내내 기뻐 외치며 즐거워하게 해 주십시오.시편 90:14 · 두루새김
앞부분의 아침에는 풀이 돋아났습니다. 그 풀은 저녁에 말라 버렸습니다. 앞부분의 아침이 인간 생명의 덧없음을 보여 주었다면, 여기서 아침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시간이 됩니다.
이것은 죽음을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한정된 생명을 가진 인간이 그 날들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배부름은 부족한 것이 채워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재물이나 권력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인간은 수고와 고통으로 가득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삶의 깊은 부족함이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구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괴롭히신 날만큼, 우리가 불행을 겪은 햇수만큼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시오.시편 90:15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을 잊게 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괴로웠던 날들과 재앙을 겪었던 햇수를 기억합니다. 고통이 깊고 오래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쁨도 그에 부족하지 않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이 무한해져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제한된 세월 안에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기쁨이 들어오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생애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손이 하는 일
시의 마지막 두 절에는 서로 연결되는 두 가지 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인간의 손이 하는 일입니다.
당신이 하시는 일이 당신의 종들에게, 당신의 위엄이 그 자녀들 위에 드러나기를 빕니다.시편 90:16 · 두루새김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대대로」 자신들이 머무는 곳이 되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서는 그 머무는 곳이신 하나님의 일이 다음 세대에도 나타나기를 구합니다.
부모 세대는 지나가고 자녀 세대가 등장합니다. 자녀들도 언젠가는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세대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자신이 시작한 모든 일의 마지막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한 인간의 생애와 동일한 범위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의 호의가 우리 위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우리 손이 하는 일을 우리를 위해 굳게 세워 주십시오. 우리 손이 하는 일, 그것을 굳게 세워 주십시오.시편 90:17 · 두루새김
먼저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다음 인간의 수고가 하나님의 호의 아래 굳게 세워지기를 구합니다. 오히려 시인은 인간이 실제로 일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라지면 그가 하던 일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정성을 다한 수고가 결실을 맺지 못할 수도 있고, 이루어 놓은 것이 허물어질 수도 있습니다.
「굳게 세워 주십시오」는 단단하게 하거나 흔들리지 않게 세운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성공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불안정한 수고를 하나님께서 흔들리지 않고 오래 이어지게 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일을 하지만, 그 일을 굳게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수고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인간의 수고를 무의미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삶이 짧다는 사실은 인간의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수고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저희 손이 하는 일」이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합니다. 같은 요청을 반복하는 데는 절박함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세월이 얼마나 짧은지 아는 사람이, 그 짧은 세월 동안 해 온 일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지점에서 시편 90편은 전도서와도 의미 있게 만납니다. 전도서 3:11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지만,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전도서 3:12–13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기뻐하고 자신의 수고 가운데 좋은 것을 누리는 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야기합니다. 시편 90편은 그와 비슷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더욱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행동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아침의 풀과 아침의 한결같은 사랑
시편 90편을 다시 처음부터 바라보면 시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아침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 아침에는 풀이 돋아나지만, 저녁이 되면 그 풀은 말라 버립니다. 두 번째 아침에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저희를 배부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구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지혜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데서 시작하지만, 자신의 한계만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삶의 날들을 올바르게 세는 사람은 자신의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모든 수고를 포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시는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영원히 남으리라는 보장도 하지 않습니다.
시의 첫머리에서 산들은 태어나고 인간은 흙먼지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늘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하는 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손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께 「저희 손이 하는 일을 굳게 세워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시편 90편은 그 손을 거두어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손의 수고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