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89편

이 장의 자리 · 73–89편 · 셋째 권

하늘의 약속과 땅에 떨어진 왕관

시편 89편은 놀라운 약속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해와 달처럼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시의 후반부에 이르면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집니다. 왕관은 땅에 떨어졌고, 왕좌는 무너졌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은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이 두 장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시의 가장 날카로운 질문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능력이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누구보다 장엄하게 찬양했습니다. 그가 묻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약속을 지키실 능력이 충분하신 하나님께서, 어째서 자신의 약속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일을 허락하셨습니까?

시인은 먼저 여호와야훼의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하심을 노래하고(2–5절), 그분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찬양합니다(6–19절). 이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길게 되새깁니다(20–38절). 여기까지 읽으면 굳건한 확신으로 마무리되는 찬양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39절의 「그러나」가 모든 것을 뒤집습니다. 이제 시인은 무너진 왕국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탄식하고(39–46절), 인간의 짧은 생명을 호소하면서 옛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47–52절). 마지막 53절에는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는 송영이 놓입니다.

시인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길고 자세하게 되새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탄식은 앞에서 확인한 약속을 근거로 제기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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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히 세워질 것입니다

시편 89:1–5 본문 →

시인은 첫머리에서 자신의 결심을 밝힙니다.

여호와야훼의 한결같은 사랑을 나는 영원히 노래하겠습니다. 내 입으로 당신의 진실하심을 대대로 알리겠습니다.시편 89:2 · 두루새김

여기서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하심」은 시 전체를 이끄는 두 표현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세드(⁨חֶסֶד⁩)입니다. 이 말은 친절이나 애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관계 안에서 상대에게 충실하며, 특히 자신이 맺은 언약에 따라 변함없이 사랑을 베푸는 성품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신실하심은 믿을 만함과 확고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다면 그 말씀을 신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지만 변덕스럽지 않으시고, 약속을 지키시지만 냉정하게 의무만 이행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분의 사랑은 신실하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참으로 나는 말했습니다.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히 세워지고 당신은 하늘에 진실하심을 굳게 세우십니다.시편 89:3 · 두루새김

「세워질 것입니다」(⁨בָּנָה⁩)는 집이나 건물을 짓는 데 쓰이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5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네 왕좌를 대대로 세우겠다」라고 하실 때에도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세우신다는 말과 왕좌를 세우신다는 말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실제로 세워지는 질서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왕조는 그 사랑이 역사 가운데 드러나는 중요한 통로로 제시됩니다.

당신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뽑은 이와 언약을 맺고 내 종 다윗에게 맹세했다.」시편 89:4 · 두루새김
「네 자손을 영원히 굳게 세우고 네 왕좌를 대대로 쌓아 올리리라.」 셀라.시편 89:5 · 두루새김

이 약속의 출발점은 다윗의 업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셨고, 하나님께서 먼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사무엘하 7:8–16에서 하나님께서는 양 떼를 돌보던 다윗을 불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세우려 했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왕조라는 의미의 집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89편은 바로 이 약속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직 답하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약속을 하신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의 능력과 다스리심은 어디까지 미칩니까?

시인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시선을 땅에서 하늘로 옮깁니다.

바다를 다스리는 왕, 공정함 위에 선 왕좌

시편 89:6–15 본문 →

6–9절에는 하늘의 거룩한 존재들이 모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참으로 구름 속에서 누가 여호와야훼와 견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아들들 가운데 누가 여호와야훼와 같겠습니까?시편 89:7 · 두루새김

고대 근동에는 신적인 존재들이 모여 회의를 이루는 이미지가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시편 89편도 이러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그 가운데 어느 누구도 여호와야훼와 견줄 수 없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모임의 수많은 구성원 가운데 하나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모든 존재가 두려워하며 높이는 분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그 왕권이 자연세계에까지 미친다고 노래합니다.

당신은 솟구치는 바다를 다스리시고 파도가 높이 일 때 그 파도를 잠재우십니다.시편 89:10 · 두루새김

고대 세계에서 바다는 통제하기 어려운 힘과 혼돈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이미지였습니다. 파도가 솟구치는 모습은 인간의 질서를 위협하는 거대한 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그 파도를 다스리십니다.

당신은 라합을 죽임당한 자처럼 짓부수셨고 당신의 힘센 팔로 당신의 원수들을 흩으셨습니다.시편 89:11 · 두루새김

라합은 다른 구약 본문에서 이집트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이사야 30:7; 시편 87:4). 또한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존재로 등장하기도 합니다(이사야 51:9–10). 시편 89편에서는 바다를 다스리는 장면 바로 뒤에 등장하기 때문에 혼돈과 대적의 세력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위협뿐 아니라 자신의 다스리심을 거스르는 세력도 꺾으실 수 있습니다.

12–13절에서는 이 능력이 세상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하늘도 땅도 여호와야훼의 것이며, 북쪽과 남쪽도 그분이 만드셨습니다. 다볼산과 헤르몬산이라는 실제 산들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뻐 외칩니다.

다윗에게 왕권을 약속하신 분은 여러 왕들 가운데 더 강한 왕이 아니라, 세상의 기초를 놓으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다가 15절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의로움과 바른 판결이 당신의 왕좌를 받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함이 당신 앞에 나아갑니다.시편 89:15 · 두루새김

여기서 왕좌를 지탱하는 것은 힘 자체가 아닙니다.

강한 통치자가 반드시 좋은 통치자인 것은 아닙니다. 힘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힘이 불의하게 사용된다면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왕좌는 의로움과 공정한 판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의 통치는 단순한 지배가 아니라 올바른 질서를 세우는 통치입니다.

마치 왕의 행차를 앞서 인도하는 신하들처럼,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함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보면 시편 89편의 후반부에서 제기될 질문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신실한 통치자이시기도 합니다.

시인은 아직 그 질문을 꺼내지 않습니다. 먼저 이 왕을 섬기는 백성이 누구인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라합을 오직 이집트라고 단정하거나, 특정한 신화적 존재 하나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빛 아래 걷는 백성

시편 89:16–19 본문 →

복되구나, 환호할 줄 아는 백성이여. 여호와야훼여, 그들은 당신의 얼굴에서 비치는 빛 속을 걷습니다.시편 89:16 · 두루새김

「기뻐 외칠」(⁨תְּרוּעָה⁩)에 해당하는 원문의 말은 기쁨의 외침을 가리키지만, 성경에서는 왕을 맞이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울리는 소리와도 관련됩니다. 여기서 「주님께 기뻐 외칠 줄 아는 백성」은 여호와야훼가 누구이신지를 알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기뻐하는 백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백성은 하나님의 얼굴빛 속에서 걸어갑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이 빛난다는 표현은 그분의 호의와 은혜가 향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민수기 6:24–26).

참으로 당신은 그들의 빛나는 힘이시며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의 뿔이 높이 솟습니다.시편 89:18 · 두루새김

뿔은 힘과 위엄을 상징합니다. 짐승의 뿔이 높이 들린 모습은 위협에 짓눌리지 않는 힘과 존귀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백성의 뿔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호의로 높아집니다.

참으로 우리의 방패는 여호와야훼께,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 속합니다.시편 89:19 · 두루새김

왕은 백성을 보호하는 방패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왕 자신도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다윗의 왕은 스스로 권력의 근원이 되는 절대 군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다스리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이제 시인은 그 일을 어떻게 맡기셨는지를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들려줍니다.

내가 그를 찾았고, 내 손이 그와 함께할 것이다

시편 89:20–30 본문 →

20절부터 38절까지는 시 전체에서 가장 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환상으로 말씀하셨던 내용을 회상합니다. 말씀의 내용은 사무엘하 7장에 전해지는 다윗 언약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나는 내 종 다윗을 찾아 내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다.」시편 89:21 · 두루새김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왕이 될 자격을 증명하여 그 자리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 선택하셨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하나님이 행동의 주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다윗과 함께하며, 하나님의 팔이 그를 강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적들을 치시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윗의 뿔이 높아집니다.

앞부분에서 바다를 다스리고 원수들을 흩으셨던 하나님의 능력이 이제 다윗의 왕권을 세우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26절에서는 다윗의 통치 범위가 바다와 강들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절정은 군사적 승리나 영토의 확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나를 이렇게 부르리라. 『당신은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를 구하시는 바위이십니다.』」시편 89:27 · 두루새김
「나도 그를 맏아들로, 땅의 왕들 가운데 가장 높은 이로 삼으리라.」시편 89:28 · 두루새김

왕과 하나님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선언됩니다.

이는 왕이 신적인 본성을 지니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대 왕권의 언어에서 아들이라는 지위는 특별한 선택과 보호, 그리고 상속의 관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7:14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계자에게 아버지가 되시고 그를 아들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89편은 이 관계를 더욱 확대하여 맏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맏아들이라는 지위는 반드시 출생 순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다른 왕들보다 높은 지위와 특별한 관계를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아들의 잘못을 바로잡을 책임도 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 문제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에서 환상을 받은 「주님께 충실한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여기서 특정되지 않습니다. 26절의 바다와 강들은 왕권이 넓은 지역에 미칠 것이라는 장엄한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다윗이나 후대 왕들이 실제로 통치했던 국경선을 정확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죄는 벌하되 한결같은 사랑은 거두지 않겠다

시편 89:31–38 본문 →

이 단락은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들이 언제나 올바르게 행동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버리고 명령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의 아들들이 내 가르침을 버리고 내 법을 따라 걷지 않는다면,」시편 89:31 · 두루새김
「그들의 거역을 막대기로, 그들의 죄를 매질로 내가 벌하리라.」시편 89:33 · 두루새김

왕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판단에서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이는 앞에서 선언한 하나님의 왕좌가 의로움과 공정한 판결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과도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해서 불의를 눈감아 주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34절에서 예상과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내 한결같은 사랑을 거두지는 않으리라. 내 진실함을 저버리지도 않으리라.」시편 89:34 · 두루새김

하나님의 징계는 언약에 대한 신실함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약속 안에서는 징계와 언약의 지속이 함께 선언됩니다.

31–33절에서는 잘못을 저지르는 다윗의 아들들이 복수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34절에서 한결같은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실 때에는 「그를 향한」이라는 단수 표현이 사용됩니다. 문맥상 다윗 또는 다윗 왕조를 대표하는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다윗의 후손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개별적으로 아무런 결과를 겪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징계가 있어도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 자체를 하나님께서 거짓으로 만들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내 거룩함을 걸고 단 한 번 맹세했다. 다윗에게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으리라.」시편 89:36 · 두루새김

약속의 근거는 왕조의 정치적 능력이나 후손들의 변함없는 충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확고한 약속인지 보여 주기 위해 시인은 해와 달을 불러옵니다.

「그의 자손은 영원히 있으리라. 그의 왕좌는 내 앞에서 해처럼,」시편 89:37 · 두루새김
「달처럼 영원히 굳게 서리라. 구름 속의 증인은 진실하다.」 셀라.시편 89:38 · 두루새김

여기서 「하늘의 증인」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앞에 등장한 달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하늘에 있는 별도의 증인을 떠올리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원문만으로 대상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그 역할은 분명합니다. 하늘의 질서가 오래 이어지는 것처럼,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도 확고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늘처럼 굳건하고, 해와 달처럼 오래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땅을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33:20–21에도 낮과 밤의 질서에 관한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릴 수 있는 경우에 빗대어 다윗과의 언약을 설명하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두 본문 모두 창조세계의 안정성을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이후 예레미야 33:14–26에서는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이 다시 확인됩니다. 이사야 55:3에서도 다윗과 관련된 변함없는 사랑이 언급됩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왕조의 위기를 겪은 뒤에도 이스라엘이 다윗 언약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후대 신약에서는 누가복음 1:32–33이 다윗의 왕좌와 영원한 통치에 대한 기대를 예수님께 연결합니다. 이는 시편 89편의 역사적 탄식을 직접 설명한 것이 아니라, 다윗 언약의 미래를 예수님 안에서 이해하는 신약의 신학적 연결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치고 물리치셨습니다

시편 89:39–46 본문 →

39절은 이 시에서 가장 충격적인 전환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치고 물리치셨습니다. 기름 부으신 이에게 몹시 노하셨습니다.시편 89:39 · 두루새김

이전까지 하나님께서는 「나는」이라고 말씀하시며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들려주셨습니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 「주님께서는」이라고 말하며 현실을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시인의 탄식이 마주 서는 것입니다.

당신의 종과 맺은 언약을 내버리시고 그의 왕관을 땅에 떨어뜨려 더럽히셨습니다.시편 89:40 · 두루새김

앞에서는 왕좌가 하늘의 해와 달처럼 견고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왕관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시인은 이를 단순한 불운이나 정치적 실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담을 허무셨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왕의 것을 빼앗습니다. 이웃들은 그를 모욕합니다. 전쟁에서는 왕의 칼날이 물러나고, 왕좌가 땅에 내던져집니다.

당신은 그의 적들이 오른손을 높이 들게 하시고 그의 모든 원수를 기쁘게 하셨습니다.시편 89:43 · 두루새김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오른손이 높이 들려 있다고 찬양했습니다(14절). 또한 하나님의 팔이 다윗을 강하게 하리라고 들었습니다(22절).

그런데 지금 높이 들린 것은 다윗의 손이 아니라 적들의 오른손입니다.

본문은 왕조의 몰락을 하나님의 언약 파기로 단정하는 신학적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자신이 겪고 있는 역사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눈앞의 현실을 보며 하나님께서 언약을 버리신 것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을 단순한 오해나 과장으로 치부해서도 안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징계를 예고하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31–33절에서 그것을 자세히 되새겼기 때문입니다.

그의 문제는 징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징계가 어떻게 언약의 파괴처럼 보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느냐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버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 말씀 때문에 현재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탄식의 역사적 배경으로는 유다 왕국의 군사적 패배와 다윗 왕조의 몰락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열왕기하 24–25장에 기록된 왕들의 포로 생활과 예루살렘의 함락은 시편에 묘사된 상황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시편 89편 자체에는 특정 왕의 이름이나 전투, 연도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사건을 직접 배경으로 삼았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표제에는 「에즈라 사람 에탄」이 등장합니다. 열왕기상 4:31에도 에즈라 사람 에탄이라는 인물이 언급됩니다. 하지만 두 언급을 연결하여 이 시 전체의 집필 시기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시편 89:47–49 본문 →

왕조의 몰락을 묘사하던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직접 질문합니다.

여호와야훼여, 언제까지입니까? 영원히 숨으시렵니까? 당신의 분노는 언제까지 불처럼 타오르겠습니까?시편 89:47 · 두루새김

시의 처음부터 반복되던 「영원히」라는 말이 여기서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하심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숨으시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내 삶이 얼마나 짧은지 기억해 주십시오. 어찌하여 모든 사람을 헛되이 지으셨습니까?시편 89:48 · 두루새김
어느 사람이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겠습니까? 누가 자기 목숨을 스올의 손에서 건져 내겠습니까? 셀라.시편 89:49 · 두루새김

다윗 왕조의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왜 모든 사람의 짧은 생명을 탄식하는 것일까요?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은 대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지금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사람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따라서 이 탄식은 단순히 죽음이 두렵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1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셨다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창조의 목적을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세우셨다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째서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야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물론 시편은 인간의 존재가 실제로 무의미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믿음 때문에 이러한 질문이 가능합니다. 창조하신 분께서 인간의 삶에 뜻을 두셨다면, 그분께서는 인간이 겪는 무너짐과 덧없음에도 답하셔야 한다는 호소입니다.

이 대목은 욥기와 전도서에서 만나는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편 89편의 질문에는 개인의 삶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매인 백성 전체의 시간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생명은 너무도 짧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한번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주님의 그 옛날의 한결같은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시편 89:50–52 본문 →

주님, 그 옛날의 한결같은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의 진실하심을 걸고 다윗에게 맹세하신 사랑입니다.시편 89:50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시 전체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갑니다. 2절에서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한결같은 사랑을 영원히 노래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는 바로 그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과거에 분명히 나타났고, 하나님께서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 사랑이 지금 어디에서 드러나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새로운 약속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신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주님, 당신의 종들이 받는 모욕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 수많은 민족의 모욕을 나는 품에 안고 있습니다.시편 89:51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더 이상 왕 한 사람의 불행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윗 왕조의 몰락은 왕실만의 비극이 아닙니다. 그 왕권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보호를 기대했던 백성 전체의 수치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야훼여, 그것은 당신의 원수들이 퍼부은 모욕, 당신이 기름 부으신 이의 발자취마다 퍼부은 모욕입니다.시편 89:52 · 두루새김

왕에게 쏟아지는 모욕이 이제 하나님과 관련된 문제가 됩니다. 그가 패배했을 때 원수들은 단지 한 나라의 군사적 약점을 비웃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왕을 세우셨다고 알려진 하나님까지 조롱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상처를 호소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언약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를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이러한 기도는 출애굽기 32:11–13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기억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과 닮았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과 이름을 근거로 백성을 위해 간청했습니다.

시편 89편의 시인도 그렇게 합니다. 다윗 왕조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어겼을 가능성을 지우지 않습니다. 징계의 정당성을 무조건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다시 묻습니다.

그 약속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조금 더 깊이

51절의 「품에 안고 있습니다」는 히브리어의 표현에 해석상 어려움이 있지만, 시인이 다른 민족들의 모욕을 자신에게까지 미치는 무거운 짐으로 느끼고 있다는 점은 문맥상 분명합니다. 52절에서 두루새김은 이 모욕을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가 내딛는 걸음마다」 받는 것으로 옮겼습니다. 원문에서는 기름 부어 세우신 이의 발자취를 가리키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에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왕이 걸어가는 길이나 그가 남긴 행적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특정한 사건을 본문에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탄식 뒤의 찬양

시편 89:53 본문 →

시편의 마지막 절은 갑작스럽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영원히 찬양받으시기를. 아멘, 또 아멘.시편 89:53 · 두루새김

바로 앞까지 시인은 하나님께 그 옛날의 한결같은 사랑이 어디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왕관이 다시 들어 올려졌다는 선언도 없고, 무너진 왕좌가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런데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시편 89편은 시편 제3권(73–89편)의 마지막 시입니다. 따라서 53절은 시편 89편 자체의 결론인 동시에 시편 제3권을 닫는 송영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찬양을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선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풀리지 않은 질문이 같은 자리에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로 앞의 시편 88편도 구원의 응답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끝났습니다. 시편 제3권은 이처럼 신앙의 어려운 질문들을 간단한 대답으로 덮어 버리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은 전통적으로 다섯 권으로 나뉘며, 앞의 네 권은 각각 찬양의 송영으로 끝납니다. 시편 41:14, 72:18–19, 89:53, 106:48이 그러한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이 절이 시의 최초 구성부터 있었는지, 시편집의 편집 과정에서 덧붙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하나님께 질문하다

시편 89:1–53 본문 →

시인이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다를 다스리시며, 의로움과 공정한 판결로 통치하시고, 언약을 지키시겠다고 맹세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좌가 무너졌을 때 그냥 운명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시편 89편은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지 않습니다. 왕들의 죄 때문에 언약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지도 않고, 언약이 있으므로 왕국의 몰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역사적 재난이라는 두 현실을 함께 하나님 앞에 가져옵니다.

기도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요청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며, 그 말씀 앞에 지금의 현실을 정직하게 내어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믿어 온 하나님의 선하심과 실제로 경험하는 고난 사이에 거리가 느껴질 때, 그 거리를 없는 것처럼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빨리 정리된 교훈으로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이해나 확신의 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시의 앞부분에서 해와 달은 하늘에 굳게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좌도 그처럼 견고하게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왕관은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시인은 떨어진 왕관을 보면서도 하늘의 약속을 잊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늘의 약속을 말하기 위해 땅에 떨어진 왕관을 못 본 척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 두 장면을 모두 하나님께 보여 드립니다.

그리고 아직 왕관이 땅에 놓여 있는 그 자리에서, 답을 듣지 못한 채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