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88편

이 장의 자리 · 73–89편 · 셋째 권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남는 어둠

시편 88편은 성경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기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저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시작합니다. 그는 낮에도 밤에도 기도하고, 날마다 하나님을 부르며, 아침마다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이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시편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시인의 형편이 나아졌다는 말도 없습니다. 원수들이 물러갔다는 소식도, 병이 나았다는 고백도,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는 선언도 없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문장은 더욱 어두워집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를 제게서 멀리 떼어 놓으셨습니다. 어둠만이 제 벗입니다.」 이것이 시편의 마지막 말입니다.

성경의 많은 탄식시는 고통으로 시작했다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뢰나 찬양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시편 88편은 그러한 전환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시인은 끝까지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그가 경험하는 현실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도가 성경에 남아 있을까요?

시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도 자신의 삶에서 그분의 응답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시간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일까요?

시인의 고통은 단지 어떤 불행한 사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죽음에 가까워졌다고 느끼고,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으며, 심지어 자신을 구원하셔야 할 하나님이 자신을 깊은 구덩이에 두셨다고 호소합니다.

시편 88편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단지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여전히 그 하나님 외에는 부를 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편은 그 긴장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가 끝까지 그 자리에 머물도록 합니다.

본문은 세 차례의 기도와 그 사이에 놓인 탄식으로 전개됩니다. 2–3절에서 하나님께 응답을 구한 뒤, 4–10절에서는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와 고립을 호소합니다. 11–13절에서는 죽음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찬양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다시 하나님을 부르지만, 15–19절은 아무런 해결 없이 더 깊은 고립의 장면으로 끝납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기도는 계속되지만, 그가 경험하는 어둠 역시 계속됩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888편 본문 읽기 →

구원의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받지 못한 기도

시편 88:1–3 본문 →

여호와야훼,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 나는 낮에 부르짖었고 밤에도 당신 앞에서 부르짖었습니다.시편 88:2 · 두루새김
내 기도가 당신 앞에 이르게 해 주십시오. 내 외침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시편 88:3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을 낯선 존재처럼 부르지 않습니다. 자신을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말은 그가 아직 구원의 응답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구원의 하나님으로 불리고 계시지만, 시인은 아직 그 구원이 자신의 현실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낮」과 「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 반대되는 두 시간을 함께 언급하여, 그의 부르짖음이 끊이지 않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시인의 고통에는 쉴 틈이 없습니다. 낮이라고 가벼워지지 않고, 밤이라고 잊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 기도합니다. 그런데 3절에서 그는 아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요청한다는 것은, 그가 아직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이미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만, 그 기도가 받아들여졌다는 징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시편 88편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언어와 응답받지 못한 고통의 현실이 처음부터 함께 등장합니다. 시인은 둘 중 하나를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아직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처럼

시편 88:4–6 본문 →

내 영혼은 고통으로 가득하고 내 목숨은 스올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시편 88:4 · 두루새김
나는 구덩이로 내려가는 이들과 한 무리로 여겨지고 기운 하나 없는 사내처럼 되었습니다.시편 88:5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면서 곧바로 죽음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스올」은 구약에서 죽음이나 죽은 사람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스올에 다다랐다고 말합니다. 그는 실제로 무덤에 누운 사람이 아닙니다. 무덤에 누운 사람과 다름없을 정도로 생명의 힘을 잃었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5절의 「여겨졌습니다」라는 표현은 그가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누가 그렇게 여겼는지는 분명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죽을 사람으로 보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시인이 자신의 처지를 그렇게 평가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죽은 이들 사이에 풀려난 몸이 되어 죽임당해 무덤에 누운 이들과 같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더는 기억하지 않으시고 그들은 당신의 손에서 끊어졌습니다.시편 88:6 · 두루새김

두루새김은 시인의 상태를 「내버려진 몸」이라고 옮겼습니다. 히브리어 호프시(⁨חׇפְשִׁי⁩)는 자유로운 상태나 풀려난 상태를 나타냅니다. 실제로 이 단어는 노예가 해방되는 문맥에서도 사용됩니다(출애굽기 21:2).

그러나 시편 88편에서는 그 자유가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와 관계에서 끊어진 듯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두루새김의 「내버려진 몸」은 그가 자유로워진 사람이 아니라 버려진 사람처럼 느낀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한층 더 무겁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기억하신다는 표현은 단순히 머릿속에 그 사람의 정보를 보존하신다는 뜻으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8:1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방주에 있는 생물들을 기억하셨을 때, 이어서 바람이 불고 물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2:24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관계와 약속에 따라 행동하시는 일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88편에서 「더는 기억하지 않으시며」라는 말은 더욱 두렵게 들립니다. 시인은 죽음의 세계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을 더는 기대할 수 없는 장소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에서 끊어졌습니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성경에서 능력과 구원의 이미지로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손과의 연결이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지금 죽음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로 느껴지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단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과 돌보심, 그리고 살아 있는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끊어지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의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처럼 세상의 의무에서 풀려난 상태를 가리키는지, 공동체의 관계와 보호에서 벗어나 버린 상태를 가리키는지 여러 가능성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 자유가 축복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덩이에 두셨습니다

시편 88:7–10 본문 →

당신이 나를 가장 깊은 구덩이에, 어둠 속에, 깊은 물속에 두셨습니다.시편 88:7 · 두루새김
당신의 분노가 나를 짓누르고 부서지는 당신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히셨습니다. 셀라.시편 88:8 · 두루새김

이 부분에서는 시인의 고통에 대한 표현이 더욱 과감해집니다. 앞에서 그는 자신이 죽음에 가까워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을 그곳에 두셨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고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직접 돌립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하나님이 실제로 시인에게 고통을 내리신 이유를 밝혀 주는 설명으로 읽어야 할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하셨다고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손에서 비롯된 것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바로 그 경험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것과, 그 사람이 고통의 원인에 대해 내린 모든 판단을 객관적인 사실로 확정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가 놓인 장소는 빛이 닿지 않는 깊은 곳입니다. 구덩이와 어둠의 이미지에 이제 거센 파도가 더해집니다. 그는 깊은 곳에 갇혀 있으면서 동시에 물결에 휩쓸리는 사람처럼 자신을 묘사합니다.

시편 88편에서는 그 물결마저 「주님의 모든 거센 파도」라고 불립니다.

그는 피할 곳이 없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자신을 짓누르는 파도도 하나님의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 긴장이 시인의 절망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피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외에 다른 구원자를 찾지도 않습니다. 자신을 고통 가운데 두셨다고 느끼는 바로 그 하나님께 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깊은 고통에는 또 하나의 차원이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아는 이들을 내게서 멀리 떼어 놓으시고 나를 그들에게 역겨운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나는 갇혀 나갈 수 없습니다.시편 88:9 · 두루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죽음과 깊은 구덩이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시인이 괴로워하는 것은 단지 혼자 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갇혔다는 말도 실제 감옥에 갇혔다는 뜻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느낍니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시며, 사람들마저 떠났습니다.

그의 삶을 지탱하던 관계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0절에서 한 가지 관계만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통에 내 눈이 흐려졌습니다. 여호와야훼여, 날마다 당신을 부르며 당신께 두 손을 펼쳤습니다.시편 88:10 · 두루새김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이 이제 눈앞에 나타납니다. 눈은 고통으로 흐려졌지만, 손은 하나님을 향해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특별한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아직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손을 거두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그의 기도는 뜻밖의 질문들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구덩이에 갇힌 채 물결에 휩쓸리는 모습은 시편 69:2–3에서 깊은 수렁에 빠지고 큰물이 자신을 삼킬 듯이 밀려오는 모습을 호소하는 장면과 닮았습니다. 성경의 탄식시에서 깊은 물은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또 9절에서 사람들이 그를 멀리한 까닭으로 어떤 질병이나 사회적으로 나쁜 시선을 받는 처지를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특정 질병이나 격리 제도의 증거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사람들과 심각하게 단절된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시편 88:11–13 본문 →

죽은 이들에게 놀라운 일을 베푸시겠습니까? 죽은 이들의 넋이 일어나 당신께 감사하겠습니까? 셀라.시편 88:11 · 두루새김
무덤에서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이, 아바돈에서 당신의 진실하심이 전해지겠습니까?시편 88:12 · 두루새김
어둠 속에서 당신의 놀라운 일이, 잊힘의 땅에서 당신의 의로움이 알려지겠습니까?시편 88:13 · 두루새김

시인은 죽음의 세계를 가리키는 표현들을 연이어 사용합니다. 죽은 사람들, 무덤, 아바돈, 어둠, 잊힘의 땅.

그는 지금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드러나고 그분의 이름이 찬양받는 곳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죽음의 세계로 내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전하고, 누가 그분의 놀라운 일을 찬양하겠습니까? 시인은 이 질문들을 통해 자신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 남겨 달라고 호소합니다.

특히 「잊힘의 땅」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앞서 6절에서 시인은 죽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더는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의 세계 자체를 잊힘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생명이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관계에서도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시인이 질문 속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성품들은 놀라운 일, 한결같은 사랑, 신실하심, 의로움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과의 관계를 지키시는 일을 설명하는 중요한 표현들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하심이 자신의 삶에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의 질문은 사실상 이렇게 들립니다. 하나님이 제게 놀라운 일을 하시려면, 제가 아직 살아 있을 때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하심을 전하려면, 지금 저를 건져 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죽음에 관한 질문들은 삶을 향한 간절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들을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의식도 없고, 하나님도 죽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일을 하실 수 없다는 최종적인 교리적 선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88편은 죽음의 현실을 극도로 절망스럽게 경험하는 사람이 지금 구원받기를 바라며 드리는 탄식입니다.

이 질문들의 중심에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아직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고 싶은 한 사람의 간절함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죽은 사람들의 영들」은 이 문맥에서 죽은 사람들의 그림자 같은 존재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이사야 14:9과 26:19에도 같은 낱말이 죽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등장합니다. 「아바돈」은 파멸이나 멸망을 뜻하며 죽음의 영역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욥기 26:6에서는 스올과 아바돈이 함께 언급됩니다. 구약의 여러 본문은 죽음과 스올을 다양한 관점에서 묘사합니다. 시편 49:16에서는 하나님이 시인을 스올의 힘에서 건져 내실 것이라는 신뢰가 등장하고, 이사야 26:19에는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리라는 전망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본문들과 시편 88편의 질문들을 모두 동일한 주장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아침이 왔지만 기도는 아직 응답받지 못했다

시편 88:14–15 본문 →

그러나 여호와야훼여, 나는 당신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아침이면 내 기도가 먼저 당신 앞에 나아갑니다.시편 88:14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여, 어찌하여 내 영혼을 내치십니까? 어찌하여 내게서 얼굴을 숨기십니까?시편 88:15 · 두루새김

14절은 시편의 또 하나의 전환점입니다. 「그러나」라는 말은 앞에서 이어졌던 죽음에 대한 질문들과 시인의 현재 행동을 대비시킵니다. 죽음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전하고 찬양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시편의 첫머리에서는 낮과 밤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는 아침에 자신의 기도가 「주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편 88편의 아침은 특별합니다.

아침이 왔다고 해서 고통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밤을 견디고 아침을 맞았지만, 아침이 곧 응답은 아닙니다.

낮에도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하며, 아침에도 기도하지만 그의 고통에는 뚜렷한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인은 기도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반드시 상황이 나아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오래 지속되었는데도 여전히 응답을 경험하지 못하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여기서 시인이 묻는 것은 단순히 언제 구원해 주실 것인가가 아닙니다. 왜 자신을 내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얼굴이 자신에게서 숨겨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함께하심과 호의에 연결되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민수기 6:24–26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비추시고 은혜와 평화를 베푸시는 일이 축복의 언어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시편 88편에서 시인은 정반대의 상황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숨겨져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견딜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데도 그분이 자신을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입니다.

시편 88편에서 아침은 곧바로 희망의 실현이 되지 않습니다. 아침이 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아침에도 시인이 여전히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주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קָדַם⁩)에 해당하는 원문의 동사는 앞서 가거나 먼저 나아가 맞이하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의 표현은 시인의 기도가 아침부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아침은 많은 시편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과 기쁨을 기대하는 시간으로 등장합니다. 시편 30:6에서는 밤에 울음이 깃들더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올 수 있다고 노래하고, 시편 5:4에서는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다리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젊어서부터 이어진 고통

시편 88:16–18 본문 →

나는 젊어서부터 고통받으며 죽어 가는 몸입니다. 당신의 두려움을 짊어지고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시편 88:16 · 두루새김

그의 고통은 최근에 갑자기 시작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젊을 때부터 고난을 겪으며」라는 말은 현재의 고통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흔히 탄식시의 고통을 하나의 위기 사건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어려운 일이 발생하고, 시인이 기도하고, 하나님이 도우시며, 마침내 상황이 해결되는 흐름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시편 88편의 고통은 그렇게 단순한 사건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래 지속된 고통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고통이 없던 때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 앞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을 짓누르는 공포를 「주님께서 주시는 공포」라고 표현합니다.

이어지는 두 절에서 그 고통은 더욱 격렬해집니다. 17절에서 그는 「주님의 타오르는 분노가 저를 휩쓸고 지나갔고, 주님께서 주시는 공포가 저를 끝장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들이 온종일 물처럼 나를 에워싸고 한꺼번에 나를 둘러쌌습니다.시편 88:18 · 두루새김

8절에서는 하나님의 거센 파도가 시인을 괴롭혔습니다. 이제 18절에서는 고통이 물처럼 그를 에워쌉니다. 그는 깊은 구덩이에서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물이 사방에서 밀려와 그를 둘러쌉니다.

특히 「온종일」이라는 말은 시편 첫머리의 낮과 밤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의 기도는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고통도 끊이지 않습니다.

한쪽에는 날마다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의 기도가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날마다 그를 에워싸는 고통이 있습니다. 시편은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즉시 끝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해서 고통이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시편 88편의 마지막 장면을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פּוּן⁩)에 해당하는 원문은 뜻이 확실하지 않은 드문 형태입니다. 문맥을 따라 당혹함이나 정신적인 혼란,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의미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의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는 그러한 혼란과 무력감을 자연스럽게 표현합니다. 이것은 앞서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던 시편 86편의 모습과 다른 종류의 무력함입니다. 그곳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우기를 구했고, 여기에서는 고통 자체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가 드러납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어둠

시편 88:19 본문 →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이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떼어 놓으셨습니다. 내가 아는 이들은 어둠.시편 88:19 · 두루새김

9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이 아는 사람들을 멀리 떼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말을 반복하면서 「저를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를 언급합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인간관계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호소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가장 가까운 관계들까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있어 주기를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고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서도 멀어졌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을 함께 나눌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히브리어에서도 매우 압축되어 있습니다. 메유다아이 마흐샤크. 원문을 직역하면 「제가 아는 이들, 어둠」이라고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제가 아는 이들은 어둠입니다」로, 어둠이 이제 시인의 유일한 동반자가 되었다는 뜻으로, 또는 아는 사람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에는 이러한 관계를 명확하게 정해 주는 전치사나 동사가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해석 하나만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전하려는 마지막 인상은 분명합니다. 그를 둘러싼 세계에서 사람들의 얼굴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남습니다.

7절에서 시인은 「어둡고 깊은 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는 어둠이 그의 인간관계를 표현하는 말이 됩니다. 처음에는 어두운 곳에 있었는데, 이제는 사람들을 대신해 어둠만이 그의 벗으로 남습니다. 고통의 어둠이 장소의 이미지에서 관계의 이미지로 확대됩니다.

조금 더 깊이

「제가 아는 이들은 어둠입니다」로 읽으면, 시인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이제 어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까운 관계가 끊어지고 그들이 더는 시인의 삶에서 위로하며 함께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어둠이 유일한 동반자가 되었다고 읽으면,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그 자리를 어둠이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가운데 어둠이 유일한 동반자가 되었다는 읽기를 따라 「어둠만이 제 벗입니다」라고 옮겼습니다.

어둠으로 끝나는 시편

시편 88:1–19 본문 →

시편은 어둠만이 벗으로 남았다는 말을 마지막에 남겨 둡니다. 하나님의 응답도 없습니다. 구원의 선언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앙이 실패했다는 뜻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부르짖는 마지막 목소리 역시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기도를 삭제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88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노래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단순한 개인의 기록이나 일기가 아닙니다. 고라 자손과 관련된 시편이며, 지휘자와 음악 지시가 붙어 있는 노래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명하게 경험한 사람도 있고, 그분이 자신을 외면하고 계신 것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편 88편은 그 두 번째 사람에게도 하나님 앞에서 말할 자리를 남겨 둡니다.

그의 탄식도 성경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기도와 하나님에 관한 객관적인 가르침을 구별해야 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느낀다고 해서, 오늘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고통 역시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시거나 벌하셔서 생긴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러한 일반적인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을 고통 자체가 선하다거나, 하나님의 응답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탄식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체념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침묵을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분이셔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의지를 우리가 마음대로 승리의 선언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그가 끝내 구원을 경험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언제나 설명이 가장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고통이 실제로 얼마나 깊은지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함께 견디는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자신의 고통을 아름다운 말로 정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88편은 아직 설명할 수 없고 해결되지 않은 고통도 기도의 말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고통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고통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을 끝내지는 못했습니다.

시편의 마지막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의 얼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에게 익숙했던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어둠만이 벗으로 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은 목소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말하는 한 사람의 목소리였습니다.

시편 88편은 어둠이 걷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어둠을 말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마지막 말을 다른 밝은 문장으로 고쳐 쓰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