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99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땅을 흔드시는 왕이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시편 99편은 백성들이 떨고 땅이 흔들리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왕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케루빔 위에 앉아 계시며, 모든 백성보다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시편의 후반부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집니다.

모세와 아론과 사무엘이 「여호와야훼에게 부르짖곤 했고, 그는 그들에게 응답하곤 했다」(6절). 온 세계가 그분 앞에서 떨지만, 그분은 사람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용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은 곧바로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에 보복하시는 분이셨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어떤 하나님을 보여 주는 것일까요?

시편 99편은 그 대답을 「그는 거룩하다」라는 하나의 선언으로 반복합니다. 이 선언은 3절과 5절에 등장하고, 마지막 9절에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는 거룩하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완성됩니다.

처음에는 온 땅 위에 높으신 왕의 거룩함이 나타납니다(1~3절). 다음에는 정의와 의를 행하시는 왕의 거룩함이 드러납니다(4~5절). 마지막에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면서도 악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납니다(6~9절).

시편은 거룩함이 무엇인지 추상적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다스리시고, 어떻게 사람을 만나시며, 어떻게 그들의 잘못을 다루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699편 본문 읽기 →

온 땅을 흔드시는 왕이 시온에 계시다

시편 99:1–3 본문 →

여호와야훼가 왕으로 다스린다. 백성들이 떤다. 그가 케루빔 위에 앉아 있다. 땅이 흔들린다.시편 99:1 · 본디새김

시편 99편은 왕권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백성들과 땅은 환호하기보다 떨고 흔들립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반응을 묘사하는 진술로 읽든, 백성들은 떨고 땅은 흔들리라는 초청으로 읽든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왕권은 무관심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통치는 인간과 세계 전체를 뒤흔들 만큼 중대한 현실입니다.

케루빔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에 관련된 존재들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서는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며, 출애굽기 25장 18~22절에서는 언약궤 덮개 양쪽에 날개를 펼친 케루빔을 만들도록 합니다. 하나님은 그 두 케루빔 사이에서 모세를 만나 말씀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케루빔 위에 앉아 있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성소와 언약궤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사무엘상 4장 4절에서는 언약궤가 언급될 때 케루빔 위에 앉으신 여호와야훼라는 표현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언약궤 위에 물리적으로 앉아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대 왕의 왕좌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을 통해,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왕권을 상징하지만, 하나님을 담아 두거나 통제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이 구분은 사무엘상 4장의 이야기에서도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언약궤를 가져오면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사무엘상 4:3~11).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거룩한 물건을 소유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시온에서 위대하다. 그는 모든 백성들 위에 높이 있다.시편 99:2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는 「시온에서」 위대하시지만, 동시에 「모든 백성들 위에」 높이 계십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의 중심지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는 하나님은 시온에만 속한 지역 신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시온에서 자기 백성에게 알려지시면서도 모든 민족보다 높으신 왕이십니다. 하나님이 특정한 장소에서 자신을 알리신다는 사실과 그분의 통치가 온 세계에 미친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온은 온 세계의 왕이 누구이신지를 이스라엘이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9절에 등장하는 「거룩한 산」과도 연결됩니다. 시편은 시온에서 시작해 거룩한 산에서 마무리되며, 그 사이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당신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양하기를. 그는 거룩하다.시편 99:3 · 본디새김

시인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그 이름은 크고 두렵습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하나님이 변덕스럽거나 악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생기는 공포가 아닙니다. 인간이 그분의 위엄을 대할 때 느끼는 경외와 떨림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거룩함이 선언됩니다.

거룩함을 나타내는 이 말은 문맥에 따라 구별됨과 신성함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어떤 인간 통치자나 피조물과도 같은 수준에 놓일 수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두드러집니다. 그분은 높으시며, 인간의 통제 아래 있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단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그 거룩하신 왕이 무엇을 사랑하시는지 말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의 「백성들이 떤다」와 「땅이 흔들린다」는 표현은 명령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백성들은 떨고 땅은 흔들리라는 초청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실제로 일어나는 반응을 묘사하는 진술로 옮겼습니다. 거룩함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카도시입니다.

왕의 힘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시편 99:4–5 본문 →

왕의 힘은 정의를 사랑한다. 당신은 공평을 굳게 세우셨습니다. 야곱 가운데서 정의와 의를 당신이 행하셨습니다.시편 99:4 · 본디새김

왕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적을 제압하며, 명령을 관철하는 데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강한 왕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의로운 왕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힘을 말하면서 그 힘이 정의를 사랑한다고 선언합니다.

이 구절은 문장 구조가 다소 압축되어 있습니다. 본디새김처럼 「왕의 힘은 정의를 사랑한다」고 읽을 수도 있고, 「정의를 사랑하는 왕의 힘」이라는 표현으로 이해하여 앞뒤 문장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사랑한다」(⁨אָהַב⁩)는 말이 왕을 수식하는 것으로 읽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처럼 문장 구조에 차이가 있지만, 어느 해석에서도 왕의 힘과 정의는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시인은 여호와야훼가 강하시다는 사실만을 칭송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힘이 정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밝힙니다. 그 관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못해 정의를 지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신의 힘을 행사할 때 정의를 불편한 제약으로 여기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정의는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의 거룩함은 단지 다른 모든 존재보다 강하시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힘이 정의를 사랑한다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여기서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앞에서는 모든 백성보다 높으신 여호와야훼를 말했지만, 이제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공동체 안에서 그분이 행하신 일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의를 원칙으로만 선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 가운데서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두 방향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올바른 질서와 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출애굽기 23장 1~9절에서는 재판의 공정성, 거짓 증언의 금지,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 등이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정의와 의를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르침과 그분이 행하신 통치는 모두 그분의 정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다만 4절 자체가 어느 특정한 사건이나 법규를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왕권이 백성의 삶과 무관한 하늘의 권력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야곱 가운데서 정의와 의를 행하셨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고 초청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높여라. 그의 발판을 향해 엎드려라. 그는 거룩하다.시편 99:5 · 본디새김

왕좌에 앉은 왕의 발을 받치는 발판은 왕의 권위와 관련된 물건입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장소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역대상 28장 2절에서 다윗은 언약궤를 하나님의 발판이라고 부릅니다. 시편 132편 7절에서도 하나님의 거처로 나아가 그분의 발판을 향해 엎드리자는 초청이 등장합니다. 이런 표현들을 함께 읽으면 시편 99편의 발판 역시 언약궤나 성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발판 자체를 하나님으로 여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높여라」라고 말한 뒤 그분의 발판을 향해 엎드리라고 합니다. 경배의 대상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발판은 그 왕께 나아가는 예배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떨고 땅이 흔들렸습니다. 이제는 예배자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압도적인 하나님의 위엄이 경배의 초청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께 인간이 실제로 어떻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요? 시인은 이제 왕좌와 성소의 이미지를 떠나 이스라엘의 역사 속 인물들을 불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4절 첫머리의 히브리어 원문은 베오즈 멜레크 미슈파트 아헤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응답하셨다

시편 99:6–7 본문 →

모세와 아론은 그의 제사장들 가운데 있었고, 사무엘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에게 부르짖곤 했고, 그는 그들에게 응답하곤 했다.시편 99:6 · 본디새김

앞의 다섯 절에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떨고 엎드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어떻게 반응하셨는지가 이야기됩니다. 시인은 그 예로 세 사람, 모세와 아론, 그리고 사무엘을 소개합니다.

왜 하필 이 세 사람인가

이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출애굽과 광야 생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율법의 수여에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사 시대 말기와 왕정의 시작에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사울과 다윗이 왕으로 세워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정치적 지도력이나 높은 지위만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불렀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특히 이들은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인물들입니다.

출애굽기 32장 11~14절에서 모세는 금송아지 사건 이후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민수기 14장 13~20절에서도 백성의 불신앙과 반역 이후 모세는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사무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상 7장 5~9절에서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고, 사무엘상 12장 18절에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응답을 받습니다. 사무엘상 12장 23절에서는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그치는 것을 죄로 여기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만의 평안을 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잘못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시편이 기억하는 위대한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분의 응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가 제사장들 가운데 있었다는 말

아론은 제사장이었지만, 모세도 제사장이었는가요?

모세는 아론과 같은 방식으로 세습 제사장직을 이어받은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이야기에서 모세는 제사와 성소의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레위기 8장에서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는 의식을 집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 제물을 다루고 피를 바르는 등의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합니다.

따라서 시편이 모세를 아론과 함께 제사장들 가운데 언급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이 모세에게 아론의 후손들과 동일한 세습 제사장직이 주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두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여 그분 앞에 나아가고 그분을 섬겼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사무엘에게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세 사람의 역할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고 응답을 받았다는 점에서 함께 언급됩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관계가 단 한 번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부르짖곤 했고」, 「응답하곤 했다」는 표현은 반복된 경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아무런 관계 없이 멀리 계시는 왕이 아니셨습니다. 그들의 역사 속에서 반복하여 말씀하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구름 기둥 속에서 들려온 말씀

그는 구름 기둥 속에서 그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들은 그의 증언들과 그가 그들에게 준 규례를 지켰다.시편 99:7 · 본디새김

여기서는 구름이 하나님의 위엄을 가리는 장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3장 9~11절에서는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구름 기둥이 내려와 입구에 서고,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민수기 12장 5절에서도 여호와야훼가 구름 기둥 가운데 내려오셔서 모세와 아론을 부르십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7절의 직접적인 배경입니다.

다만 구름 기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구체적인 묘사를 사무엘에게까지 똑같이 적용할 근거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세 사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과 계시를 함께 회상하면서, 특별히 광야 시대에 두드러졌던 구름 기둥의 모습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증언들과 규례를 지켰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으며, 사람들이 부르짖고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이것은 서로 대등한 두 존재 사이의 관계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백성보다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분의 능력을 이용하는 일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자신의 부르짖음을 아뢰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은 한 가지 더 어려운 사실을 덧붙입니다. 그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행위에 보복하시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무엘서에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면들이 있지만, 모세와 아론의 경우처럼 구름 기둥에서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용서하시면서도 보복하시는 하나님

시편 99:8 본문 →

여호와야훼, 저희 하나님, 당신은 그들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셨고, 그들의 행위에 보복하시는 분이셨습니다.시편 99:8 · 본디새김

용서하셨다면 왜 보복하시는가요?

보복하셨다면 정말 용서하신 것인가요?

하나님은 누구를 용서하시고, 누구의 행위에 보복하시는가

히브리어 본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에게」 용서하시는(⁨נָשָׂא⁩) 하나님이셨으며, 「그들의 행위」에 보복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대명사들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모세와 아론과 사무엘 자신을 가리킨다는 읽기, 그들이 대표하여 기도했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관련된다는 읽기, 하나님이 그 지도자들을 해치려는 사람들에게 보복하셨다는 읽기입니다. 첫째로 읽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지도자도 책임에서 면제되지 않았다는 말이 되고, 둘째로 읽으면 지도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백성을 용서하셨지만 백성의 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문법만으로 이 대명사들의 지시 대상을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도 특정한 죄의 이름이나 용서와 보복을 대조하는 명시적인 접속사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장면만을 시인이 반드시 의도한 사건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용서와 잘못에 대한 판결은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가

이 구절에서 「용서하시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기본적으로 들어 올리거나 짊어진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죄나 허물과 함께 쓰일 때에는 그것을 용서하거나 없애 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출애굽기 34장 6~7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선언하시는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인애와 신실함이 풍성하시고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동시에 죄에 대한 책임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는 분으로도 선언됩니다. 시편 99편 8절은 이 두 측면을 아주 짧은 문장 안에 함께 담고 있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과 잘못에 보복하시는 하나님은 서로 다른 두 신이 아니십니다.

동일한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이것을 단지 하나님은 사랑도 많으시지만 엄격하기도 하시다는 식으로 나누어 설명하면 본문의 긴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합니다. 시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용서하시면서도 그들의 행위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용서는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선언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잘못에 대한 판결이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원히 끊어 버린다는 뜻도 아닙니다. 민수기 14장의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고 백성을 용서하셨지만, 그들이 저지른 불신앙이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않도록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지만, 그들이 행한 악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가까이 계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가까운 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그분의 의로우심이 흐려지지는 않습니다. 그분을 섬기는 지도자에게도, 그분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도 이 원칙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는 무조건적인 면책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시편은 이 사실을 말한 뒤에도 독자들을 두려움 속에 남겨 두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경배의 자리로 부릅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읽기는 6절에서 세 사람이 등장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다고 말했으므로, 8절의 대명사도 그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데 근거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가데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민수기 20:7~12). 다만 이 사건을 사무엘에게까지 그대로 적용할 근거는 없습니다. 둘째 읽기에는 민수기 14장의 이야기가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반역했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에 응답하여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불신앙 가운데 하나님을 거역한 그 세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민수기 14:19~23). 용서의 선언과 잘못에 대한 판결이 같은 이야기 안에 나타납니다. 셋째 읽기는 「그들의 행위」를 이 지도자들에게 가해진 적대적인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인데, 「그들의 행위」가 그들 자신이 저지른 행위인지, 그들을 향해 저질러진 행위인지에 대한 추가적인 판단을 요구합니다. 「용서하시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노세입니다.

발판에서 거룩한 산으로

시편 99:9 본문 →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높여라. 그의 거룩한 산을 향해 엎드려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는 거룩하기 때문이다.시편 99:9 · 본디새김

이 절은 5절과 거의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경배의 방향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5절에서는 「그의 발판」이었고, 9절에서는 「그의 거룩한 산」입니다. 두 표현 모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소와 관련된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는 성소의 발판에서 거룩한 산으로 시야를 넓히며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 더욱 중요한 변화는 거룩함을 선언하는 방식입니다.

3절에서는 「그는 거룩하다」라고 했습니다. 5절에서도 「그는 거룩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9절에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는 거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시인은 거룩하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더욱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분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처음에 온 땅을 흔드시고 모든 백성보다 높으셨던 하나님이 이제 「우리 하나님」이라고 불리십니다. 그렇다고 그분의 위엄이 작아진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여전히 거룩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그분의 거룩함을 약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토록 거룩하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더욱 놀랍게 만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

시편 99:1–9 본문 →

시편 99편은 하나님의 위엄과 정의, 응답과 용서를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위엄만 강조하면 그분은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만 강조하면 그분이 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시는 분처럼 보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결만 강조하면 그분이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99편은 이 모든 것을 한 분 하나님 안에서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이 주신 규례를 가지고 있었으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셨지만, 그들의 뜻에 종속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자기 생각 안에 가두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뜻을 언제나 지지하실 것이라고 여기거나, 자신의 확신을 곧 하나님의 판단과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99편의 하나님은 어떤 인간 공동체보다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 가운데서도 정의와 의를 행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분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정의 앞에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함께 세우는 일입니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직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 힘을 사용하는가요?

동시에 시편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을 중요하게 보여 줍니다. 모세와 아론과 사무엘은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필요로 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부르짖음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과 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원하는 결과가 주어진다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분의 응답은 언제나 그분의 의와 거룩함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바꾸어 자신의 뜻에 맞추는 기술이 아닙니다.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그분의 뜻 앞에 가져가는 일입니다.

시편의 처음에는 케루빔 위에 앉으신 왕 앞에서 땅이 흔들렸습니다. 그 왕은 모든 백성보다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모세와 아론과 사무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구름 기둥 속에서 말씀하셨고, 잘못을 용서하시면서도 그들의 행위를 의롭게 다루셨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 모든 일을 기억하며 사람들을 거룩한 산으로 부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왕좌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뜻에 맞추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분을 높이며 엎드립니다.

그리고 시편은 마지막으로 그분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는 거룩하기 때문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