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2–20장 · 용과 짐승과 바벨론

하늘에서 쫓겨난 용은 왜 땅에서 싸우는가?

요한계시록 12장은 놀라운 역설을 보여 줍니다.

하늘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용이 패배합니다. 그는 더 이상 하늘에 머물 자리를 얻지 못하고 땅으로 내던져집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의 권위가 임했다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승리의 순간부터 땅에는 더욱 큰 위협이 닥칩니다.

하늘의 소리는 「하늘아, 그리고 그 안에 장막을 치고 사는 이들아, 즐거워하여라」라고 외치면서 곧이어 「땅과 바다에는 화가 있다」고 말합니다(12:12). 두 선언은 서로 다른 사건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 용이 패배하여 하늘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나옵니다.

어떻게 하나의 승리가 하늘에는 기쁨이 되고 땅에는 고난이 될 수 있을까요?

용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것은 그가 이기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미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이 가벼워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요한은 패배한 용이 얼마나 집요하게 사람들을 공격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제 그 공격을 이전과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땅에서 벌어지는 박해가 용의 무제한적인 권세를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용은 패배했고, 자신에게 남은 때가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앞 장에서는 일곱째 나팔이 울렸고, 세상 나라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선언이 들렸습니다(11:15). 이제 12장은 그 선언의 배후에 있는 대립을 보여 줍니다. 환상은 한 아이의 탄생에서 시작해 하늘의 전쟁을 거쳐,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려는 용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장을 11장 다음에 시간적으로 발생한 사건들의 목록으로 읽기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와 세상의 박해가 어떻게 함께 존재하는지를 드러내는 새로운 환상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첫 장면에는 용도, 천사도, 군대도 없습니다.

아이를 낳으려고 진통하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1112장 본문 읽기 →

해를 두른 여자는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12:1–2 본문 →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보였습니다. 해를 두른 여자였고, 달이 그 여자의 발 아래에 있었으며, 그 여자의 머리 위에는 별 열둘의 관이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12:1 · 본디새김

요한은 이 여자를 「큰 표징」이라고 부릅니다. 여자는 그 모습 자체를 넘어 어떤 현실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등장합니다.

해와 달과 별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하늘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해를 두르고, 달을 밟고, 별들로 관을 쓰고 있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진 존재로 나타납니다.

요셉의 꿈에서 시작되는 해와 달과 별

창세기 37:9에서 요셉은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고, 야곱은 자신과 요셉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요셉에게 절하게 될 것인지 묻습니다(창세기 37:10). 그곳에서 해와 달과 별은 야곱의 가족을 나타내는 영상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여자는 자연스럽게 이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꿈에는 열한 별이, 요한계시록에는 열두 별이 있습니다. 따라서 두 장면을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해와 달과 별이라는 조합, 열둘이라는 숫자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은 이 여자를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연결하여 읽을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면, 왜 아이를 낳는 모습으로 등장할까요?

아이를 낳는 시온

구약의 예언서에서는 예루살렘 또는 시온을 여자로 의인화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미가 4:10에서 시온의 딸은 해산하는 여자처럼 진통하며 소리 지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 해산의 고통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고난을 나타내지만, 그 고난 가운데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주어집니다.

이사야 66:7–9에서는 시온이 아이들을 낳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놀라운 방식으로 회복되는 사건을 묘사합니다. 이 예언서들에서 여자의 출산은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고난과 새로운 구원의 시작을 함께 나타냅니다.

이 배경에서 요한계시록의 여자는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약속하신 구원을 기다리며, 그 약속의 성취를 고통 속에서 맞이하는 백성의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아이를 배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 속에서 소리를 지릅니다.요한계시록 12:2 · 본디새김

하늘의 영광을 입었다는 사실이 해산의 고통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나타나는 방식과도 어울립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지만 세상에서 고난을 겪습니다. 그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약속이 있지만, 그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과정에는 진통이 있습니다.

여자를 역사적인 마리아로 이해하는 전통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실제로 메시아를 낳았고, 기독교의 마리아 해석 전통은 이 장면을 마리아와 연결해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12:17에서 용은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언을 지닌 사람들과 전쟁을 벌입니다. 따라서 이 여자는 메시아를 낳은 역사적 어머니의 모습과 연결될 수 있지만, 환상 전체에서는 그보다 더 넓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녀는 메시아가 오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준비하신 언약 백성을 나타내며, 메시아가 오신 이후에는 그분께 속한 자손들을 가진 공동체의 어머니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단순히 이스라엘을 교회로 바꾸어 놓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메시아에게 이르고, 그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여자는 그 긴 이야기를 하나의 인물로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아이를 낳기도 전에 또 다른 표징이 나타납니다.

아이를 삼키려고 기다리는 용

요한계시록 12:3–4 본문 →

그리고 하늘에 다른 표징이 보였습니다. 보십시오, 크고 붉은 용이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 일곱과 뿔 열을 가지고 있었고 그 머리들 위에는 왕관 일곱이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12:3 · 본디새김

여자의 모습이 해와 달과 별의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용의 모습은 머리와 뿔과 왕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경의 환상에서 뿔은 흔히 힘과 권세를 나타냅니다. 다니엘 7장에서는 여러 짐승이 제국의 권세를 상징하고, 열 뿔이 열 왕과 연결됩니다(다니엘 7:7, 24).

머리 일곱과 뿔 열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나타내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습니다. 13장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17장에서 짐승의 머리와 뿔에 관한 해석이 제시됩니다. 지금은 용이 왕권과 지배력을 주장하는 존재처럼 나타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용이 일곱 왕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정당한 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은 그 왕권의 주장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 줄 것입니다.

그는 하늘을 차지하려 하지만 쫓겨납니다.

아이를 삼키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여자를 없애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용은 왜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릴까?

그리고 그의 꼬리가 하늘의 별들 가운데 삼분의 일을 끌었고, 그것들을 땅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여자가 낳으면 그 아이를 삼키려는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2:4 · 본디새김

용의 힘은 우주적 규모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는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없애 버리려고 여자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아이가 장차 모든 민족을 다스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용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를 태어나자마자 제거하려 합니다.

이 장면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방해하려 했던 폭력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 파라오는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죽이려고 했고, 마태복음 2장에서 헤롯은 태어나신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사건들을 12:4의 직접적인 성취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생명을 위협하는 지배 권력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더 오래된 갈등도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3:15에서 여호와야훼 하나님은 뱀과 여자 사이, 뱀의 자손과 여자의 자손 사이에 적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연결은 9절에서 용이 「옛 뱀」이라고 밝혀질 때 더욱 강해집니다. 창세기에서는 뱀이 여자를 속였고,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옛 뱀이 여자의 자손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자의 별 열둘의 관은 스테파노스(στέφανος)로, 승리자에게 수여되는 관이나 영예의 관을 가리킬 때 쓰이는 낱말입니다. 반면 용의 일곱 왕관은 디아데마로, 특별히 왕권을 나타내는 관을 가리킵니다. 두 낱말의 의미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장면에서는 여자의 영예로운 관과 용이 내세우는 왕적 권세가 다른 말로 표현됩니다. 4절의 별들을 사탄을 따르는 타락한 천사들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뒤이어 용과 함께 쫓겨나는 천사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12:9). 그러나 본문은 4절의 별들이 9절의 천사들과 동일하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으며, 용이 가진 파괴적인 힘을 우주적 규모로 표현한 것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따라서 천사 전체의 정확히 삼분의 일이 사탄과 함께 타락했다는 교리를 이 구절 하나로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갑니다

요한계시록 12:5–6 본문 →

그리고 그 여자가 아들을,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는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하나님에게로, 하나님의 보좌로 낚아채여 올라갔습니다.요한계시록 12:5 · 본디새김

드디어 아이가 태어납니다.

요한은 출생 직후의 아이에 관해 단 하나의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 아이는 모든 민족을 다스릴 존재입니다.

쇠 지팡이를 가진 아들

시편 2편은 세상의 왕들이 여호와야훼와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대적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시온에 자신의 왕을 세우시고 그를 아들이라고 부르시며, 민족들을 그의 소유로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시편 2:6–9).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몰 것」(ποιμαίνω)이라는 표현은 이 시편을 직접적으로 반영합니다.

「몰 것」으로 옮긴 동사는 본래 양 떼를 돌보거나 치다, 곧 목자처럼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쇠 지팡이와 목자적 통치라는 두 이미지를 함께 가져옵니다. 이 아이의 통치를 무조건 온화한 양치기의 이미지로만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 2편에서 쇠 지팡이는 반역하는 왕들에게 맞서는 강력하고 꺾이지 않는 왕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책이 5장에서 그분을 중심에 세운 모습은 죽임당하신 듯한 어린양이었습니다(5:6). 따라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세상의 폭군들이 행사하는 폭력과 단순히 같은 종류의 힘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아이는 시편 2편에서 약속된 메시아 왕을 가리키며, 19:15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데 왕이 될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용이 삼키려던 아이를 하나님이 데려가십니다

아이는 용의 공격을 피해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가 직접 용과 싸우는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에게로, 하나님의 보좌로 낚아채여 올라갑니다. 「낚아채여」는 강하게 붙잡아 데려가는 행동을 나타내는 수동형입니다.

용이 손을 대기도 전에 아이는 하나님의 보좌로 옮겨집니다.

이 장면에서 아이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태어나신 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왜 탄생 직후 곧바로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시는 장면을 보여 줄까요? 요한이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기 때문은 아닙니다. 바로 뒤의 11절에서 「어린양의 피」가 승리의 근거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5절은 예수님의 생애를 시간 순서대로 요약한 전기가 아닙니다. 메시아가 오셨고, 사탄이 그분을 제거하려 했지만, 그분이 하나님의 보좌에 높여지셨다는 결정적인 결과를 압축하여 보여 주는 환상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그 자리에 이르셨는지에 관한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용은 아이를 삼키려고 기다렸지만, 그 아이는 용의 입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에 이릅니다.

그런데 아이가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간 뒤에도 여자는 땅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그 여자에게는 거기에 하나님에게서 마련된 자리가 있었습니다. 천이백육십 일 동안 거기서 그 여자를 먹이려는 것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12:6 · 본디새김

아이는 보좌로 올라갑니다.

여자는 광야로 갑니다.

그러나 광야는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마련된 자리」입니다. 이 장면은 조금 뒤에 다시 자세히 등장합니다.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땅으로 내려온 용이 다시 이 여자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2:9의 히브리어 본문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깨뜨린다는 뜻이 강하지만, 그리스어 성경은 목자처럼 다스린다는 동사(포이마이네인)를 사용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그리스어 성경의 표현을 따릅니다.

하늘의 전쟁에서 용은 무엇을 잃었는가?

요한계시록 12:7–9 본문 →

그리고 하늘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맞서 싸웠고, 용과 그의 천사들도 싸웠습니다.요한계시록 12:7 · 본디새김

이제 환상의 무대가 바뀝니다.

미가엘은 다니엘서에서 이미 등장했던 천상적 존재입니다. 다니엘 10:13에서는 천사들의 우두머리 가운데 하나로, 다니엘 12:1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서 있는 큰 군주로 나타납니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된 하늘의 전쟁에 등장하는 것은 구약의 배경과 잘 맞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뒤이어 선포되는 어린양의 피와 연결됩니다. 미가엘은 하늘의 전쟁을 수행하는 존재로 나타나지만, 이 책 전체의 구원과 승리의 중심은 어린양입니다.

패배한 용에게는 더 이상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용과 그의 천사들은 이기지 못했고, 하늘에서 그들의 자리가 다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요한계시록 12:8 · 본디새김

용은 전쟁에 졌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밀려났다가 다시 돌아올 기회를 얻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는 하늘에서 그들의 지위와 접근이 결정적으로 박탈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그 큰 용, 곧 옛 뱀, 마귀라고도 사탄이라고도 불리는 이, 온 세상을 헤매게 하는 자가 던져졌습니다 — 그가 땅으로 던져졌고, 그의 천사들도 그와 함께 던져졌습니다.요한계시록 12:9 · 본디새김

이제 독자는 앞서 여자를 위협하고 아이를 삼키려 했던 존재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옛 뱀」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왜곡하여 인간을 속인 창세기 3장의 뱀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귀」는 비방하거나 고발하는 자라는 의미와 연결되고, 「사탄」은 히브리어에서 대적자 또는 고발자를 뜻하는 말과 관계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그를 「온 세상을 헤매게 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이 동사는 길을 잃게 하다, 미혹하다, 속여 그릇된 길로 이끌다는 뜻입니다. 용은 힘으로 공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속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존재이며, 이것은 13장에서 짐승을 통한 세상의 미혹이 등장할 때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이 전쟁은 언제 벌어졌는가?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인간 역사 이전 사탄의 최초 타락으로 읽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높여지심으로 사탄이 결정적으로 패배한 사건으로 읽기도 하며, 마지막 때에 드러날 사탄의 결정적 추방으로 읽기도 합니다. 12장 자체는 이 사건의 정확한 연대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분명히 알려 주는 신학적 중심은 있습니다.

용이 하늘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어린양의 승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연결은 바로 다음에 들려오는 하늘의 선언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최초 타락으로 읽는 관점은 하늘에서의 전쟁과 추방을 인간 역사 이전의 영적 반역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로 읽는 관점에서는 아이가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는 장면과 이어지는 승리 선언, 특히 11절의 어린양의 피가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마지막 때의 추방으로 읽는 관점은 하늘의 전쟁을 종말의 사건과 연결합니다. 또한 7절의 전쟁이 5절 이후에 시간적으로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반드시 보아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환상은 같은 영적 현실을 서로 다른 장면으로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왜 고발할 자리를 잃었는가?

요한계시록 12:10–11 본문 →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큰 소리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그의 그리스도의 권위가 임했다.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자, 낮에도 밤에도 우리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고발하던 자가 던져졌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12:10 · 본디새김

하늘의 소리는 용을 패배한 전사라고 부르지 않고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그것도 「낮에도 밤에도」 고발했습니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고발

구약에는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고발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욥기 1–2장에서 사탄은 욥이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복 때문에 경건하게 산다고 주장합니다. 스가랴 3:1–5에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야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그의 오른편에서 그를 고발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사탄을 책망하시고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긴 뒤 깨끗한 옷을 입히도록 하십니다. 여호수아가 자신을 완벽하게 변호하여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죄와 부정함을 다루시고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늘의 소리는 그 고발자가 하늘에서 쫓겨났다고 선언합니다.

왜일까요?

「그리고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또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이겼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요한계시록 12:11 · 본디새김

앞에서는 미가엘과 천사들이 용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늘의 소리는 「그들」, 곧 앞 절에서 고발당하던 형제들이 용을 이겼다고 말합니다. 전쟁은 하늘에서 벌어졌지만, 승리에 참여한 사람들은 땅에서 신실하게 증언하던 성도들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승리의 첫 번째 근거입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의로움이나 강한 믿음으로 사탄의 고발을 물리쳤다고 하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이겼다고 합니다.

5:9에서 어린양은 자신의 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 속하도록 사셨고, 7:14에서는 큰 환난에서 나온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옷을 씻어 희게 했습니다. 12:11에서는 그 피가 사탄에 대한 승리의 근거로 제시됩니다. 어린양의 피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속하게 하고, 그들을 깨끗하게 하며, 그들을 고발하는 자의 권세가 더 이상 결정적인 힘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전쟁에서는 상대방의 피를 흘리게 하는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의 피를 흘리신 어린양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는 스스로 결백하다는 주장에 있지 않고, 어린양이 그들을 위해 이루신 일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고발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죄를 지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들에게 회개하라고 거듭 명령합니다(2:5, 16; 3:3, 19). 그러나 회개해야 할 죄가 있다는 사실과 사탄의 고발이 하나님의 구원을 무효로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하는 권한은 고발자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 권한은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습니다.

증언의 말로 이겼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린양의 피 다음에는 「자기들의 증언의 말」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증언은 어떤 교리를 말로 설명하는 행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그들의 증언은 자신의 안전과 생명보다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죽음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명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문자 그대로 자기 목숨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표현하지만, 문맥에서 이것은 생명을 미워했다거나 죽음 자체를 원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죽음의 위협 때문에 증언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11장의 두 증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증언을 다 마친 뒤에 짐승에게 죽임당했습니다(11:7). 생명은 빼앗겼지만 증언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이 사탄을 이기는 것은 반드시 죽지 않고 살아남는 데 있지 않고, 어린양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끝까지 증언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증언이 승리의 근본적인 토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토대는 먼저 어린양의 피이고, 그 위에서 성도들의 증언이 이어집니다.

하늘에서는 용이 쫓겨납니다.

땅에서는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신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깁니다.

승리했는데 왜 죽을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서 요한계시록의 승리 개념이 세상의 승리 개념과 갈라집니다. 세상에서 이긴 사람은 흔히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승리자이시고, 죽기까지 증언을 지킨 성도들이 승리한 사람들로 불립니다.

요한이 고난이나 죽음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성도들의 죽음과 박해를 악한 세력의 폭력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 폭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용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이 이루신 구원을 취소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는 기쁨, 땅에는 화가 있다

요한계시록 12:12 본문 →

이제 처음의 역설로 돌아옵니다.

용은 하늘에서 쫓겨났고, 하늘에서는 기뻐합니다. 그런데 땅과 바다에는 화가 선언됩니다. 용의 패배가 그의 활동을 완전히 끝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늘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었지만, 땅에서 여전히 공격을 계속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아, 그리고 그 안에 장막을 치고 사는 이들아, 즐거워하여라. 땅과 바다에는 화가 있다. 마귀가 자기에게 남은 때가 얼마 없음을 알기에 큰 분노를 품고 너희에게 내려왔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12:12 · 본디새김

「남은 때가 얼마 없다」는 말은 독자가 정확한 날짜를 계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은 그 시간이 며칠인지, 몇 년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아무리 강한 분노를 품고 있어도 그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용의 분노가 크다는 것이 그의 승리가 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용은 자신의 패배와 제한된 시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분노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을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극심한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탄의 패배가 가까워졌다는 특별한 증거라고 판단할 수는 없고, 특정한 질병이나 재난, 실패가 직접 사탄의 공격 때문인지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은 고난의 강도로 종말의 날짜를 알아내거나 개별적인 불행의 원인을 판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용의 권세가 최종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용은 이제 땅으로 내려와 여자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여자를 없애지 못합니다.

광야는 버림받은 곳이 아니라 먹이시는 곳이다

요한계시록 12:13–14 본문 →

용은 땅으로 던져진 것을 보고도 패배를 인정하고 공격을 멈추는 대신, 사내아이를 낳은 그 여자를 뒤쫓습니다(12:13). 아이를 없애지 못하자 이제 아이를 낳은 여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은 용의 공격에 앞서 여자를 위한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자 그 여자에게 큰 독수리의 두 날개가 주어졌습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자기 자리로 날아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그 여자는 뱀을 피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먹을 것을 공급받습니다.요한계시록 12:14 · 본디새김

독수리 날개에 실려 광야로

출애굽기 19:4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에 태운 것처럼 이끌어 자신에게 데려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집트의 군대를 이겨 탈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여 이끌어 내셨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여자는 독수리 날개를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 날개가 여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출애굽기의 광야는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장소였지만, 동시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하고, 위험과 불평과 시험이 이어지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곳에서 만나를 주시고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광야는 고난의 장소인 동시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하는 장소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여자도 바로 그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녀는 용의 공격에서 벗어나지만, 아직 모든 싸움이 끝난 세상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6절은 광야가 하나님에게서 마련된 자리라고 말하고, 14절은 그 자리에서 여자가 먹을 것을 공급받는다고 말합니다.

광야는 단순히 도망친 사람이 숨어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광야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시기보다, 광야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먹이십니다.

그러나 그 보존이 언제나 육체적인 생존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11절의 성도들은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보호를 어떤 성도도 죽임당하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고난이 없다는 사실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자신의 것으로 끝까지 붙드신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여자가 광야에서 먹을 것을 공급받는 기간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입니다. 다니엘 7:25와 12:7에서 이 표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세가 성도들을 괴롭히는 제한된 기간과 연결됩니다. 6절은 같은 광야 생활의 기간을 천이백육십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기간은 끝없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용에게 남은 시간은 분노를 쏟아 내는 시간입니다.

여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시간입니다.

같은 역사 속에서 파괴하려는 힘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나타납니다. 다음 장면에서는 이 대립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뱀이 물을 쏟아 내고, 땅이 그 물을 삼킵니다.

조금 더 깊이

한 때를 한 해, 두 때를 두 해, 반 때를 반 해로 이해하고 한 달을 30일로 계산하면, 3년 반은 42개월, 곧 1,260일이 되어 두 기간이 대응합니다. 그러나 계산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 환상의 기간을 반드시 문자적인 1,260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 기간으로 읽는 해석과 제한된 박해의 시대를 나타내는 상징적 기간으로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용의 입에서 나온 강을 땅이 삼키다

요한계시록 12:15–16 본문 →

그리고 뱀이 그 여자 뒤로 자기 입에서 강 같은 물을 뿜어, 그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2:15 · 본디새김

요한은 다시 「용」 대신 「뱀」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9절에서 이 용이 옛 뱀이라고 밝혀졌으므로, 독자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물을 강처럼 뿜는 것은 자연적인 뱀의 행동이 아니라 환상의 언어입니다.

이 물을 거짓 가르침이나 미혹하는 말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용이 온 세상을 미혹하는 자로 소개되었고, 물이 그의 입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반면 박해와 파괴적인 공격 전체를 나타내는 영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에서 거대한 물과 홍수는 때때로 생명을 위협하는 혼돈과 압도적인 재난을 나타내며, 시편 124:4–5는 원수들의 위협을 거센 물결이 휩쓸어 가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물이 어떤 구체적 역사적 사건이나 특정한 거짓 교리를 가리키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공격은 놀라운 방식으로 실패합니다.

그러나 땅이 그 여자를 도왔습니다. 땅이 자기 입을 벌려, 용이 자기 입에서 뿜은 그 강을 삼켜 버렸습니다.요한계시록 12:16 · 본디새김

여자를 구하는 것은 새로운 군대도, 또 다른 천사도 아닙니다. 땅 자체가 여자를 돕습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기 15:12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원수들을 땅이 삼키게 하셨다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에 용은 아이를 「삼키려」 했습니다(12:4). 그런데 마지막에는 땅이 용이 뿜은 강을 「삼켜 버렸습니다」.

삼키려던 자는 실패하고, 그가 내놓은 파괴의 수단이 도리어 삼켜집니다.

용은 자신이 공격하는 세계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가 이용하려 했던 세계의 일부인 땅이 여자를 돕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는 불이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땅이 입을 벌려 강을 삼키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이것은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나타내는 장면이지, 현실의 모든 자연현상이나 생존 경험의 원인을 확정할 근거는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여자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용은 왜 여자의 남은 자손을 공격하는가?

요한계시록 12:17 본문 →

그러자 용이 그 여자에게 분노하여,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언을 지닌 이들과 싸움을 벌이러 갔습니다.요한계시록 12:17 · 본디새김

용은 다시 실패했습니다.

아이를 삼키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이기지 못했습니다.

여자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여자에게는 아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의 정체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그녀는 메시아를 낳은 언약 백성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공동체적 표징입니다. 그녀의 자손은 육체적 혈통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의 증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의 증언」은 문법적으로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증언, 곧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증언하는 말씀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주신 증언, 곧 예수님에게서 비롯되어 그분의 사람들에게 맡겨진 증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어 소유격은 문맥에 따라 두 의미를 모두 나타낼 수 있으며, 이 구절만으로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두 해석은 반드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말씀을 받은 사람은 그 예수님을 세상에 증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종교 집단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을 용보다 더 강한 군대나 특별한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예수님의 증언입니다. 11절에서 증언의 말로 용을 이겼다고 선언된 바로 그런 사람들이 이제 용의 공격 대상이 됩니다.

용은 이미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승리한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들이 공격받는 이유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언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에 용의 적대 대상이 됩니다. 창세기 3:15에서 처음 선포된 뱀의 자손과 여자의 자손 사이의 적대가, 메시아의 승리 이후에도 그분께 속한 사람들을 향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사탄에게 그리스도와 동등한 권세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용의 공격이 계속되는 것은 그가 승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보증이 아니라, 이미 패배한 용이 자신에게 남은 제한된 시간 동안 하나님의 백성과 싸우려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싸움은 새로운 무대로 옮겨갑니다.

용은 바다 모래 위에 섰다

요한계시록 12:18 본문 →

그리고 그가 바다 모래 위에 섰습니다.요한계시록 12:18 · 본디새김

주요 사본을 따른 읽기에서 바다 모래 위에 선 존재는 용입니다. 그는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려고 떠났고, 이제 바닷가에 섭니다.

왜 하필 바닷가일까요?

13:1에서 요한은 바다에서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봅니다. 그 짐승은 머리 일곱과 뿔 열을 지닌 용과 닮은 모습이며, 그에게는 용의 권세가 주어집니다(13:1–2). 용이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 모습은 이어질 사건을 준비하는 장면처럼 읽힙니다.

용은 직접 여자를 삼키거나 없애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공격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 장은 용이 활동을 멈추는 장면이 아니라, 그가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그리스어 사본에는 「그가 섰다」가 아니라 「내가 섰다」라는 읽기가 있습니다. 후자라면 요한이 해변에 서서 다음 환상을 보는 것이고, 다음 장은 요한의 새로운 관찰로 시작됩니다. 오래된 주요 사본들에는 「그가 섰다」라는 읽기가 있으며, 이 읽기에서는 다음 장이 용이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는 모습과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또한 이 문장은 판본에 따라 12장의 마지막 절로 놓이기도 하고, 13장의 첫 절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고난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12:1–18 본문 →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승리하셨다면 그분께 속한 사람들의 삶에서 어려움이 즉시 사라지고, 사탄이 패배했다면 그의 공격도 모두 멈추어야 한다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그리스도의 권위가 임했다는 선언 이후에도, 용은 여자를 뒤쫓고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싸우려고 갑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이기실 수 있을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싸움의 한복판에서 주어진 불확실한 약속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승리가 세상 전체에 완전히 드러나기 전까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여전히 악의 공격과 고난을 경험합니다. 악의 활동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승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용은 머리에 일곱 왕관을 썼지만, 그의 권세는 끊임없이 다른 존재들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행사됩니다. 반면 어린양은 자신이 죽임당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고발 앞에서는 어린양의 피가, 공격 앞에서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광야의 자리와 독수리의 날개와 먹이심이 나타납니다. 어린양은 하늘의 전쟁터에 직접 등장하여 용에게 무기를 휘두르지 않으시지만, 하늘의 승리 선언은 그 모든 승리의 근거를 어린양의 피에서 찾습니다.

이제 용은 바닷가에 서 있습니다.

그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요한은 용이 어떤 짐승을 불러낼 것인지, 그 짐승이 어떤 권세를 행사할 것인지 아직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 뒤에는 자신이 공격하려 했지만 없애지 못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분노하더라도 하나님의 보좌에 오른 아이를 끌어내릴 수는 없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광야의 자리도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 위에는, 용이 끝내 이기지 못했던 하늘의 승리 선언,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또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이겼다」가 여전히 울리고 있습니다.

용은 다시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가 앞으로 싸우려는 사람들은 이미 어린양의 승리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