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6–11장 · 봉인과 나팔의 심판

증인들이 일어설 때, 세상의 왕권이 바뀝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재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속한 거룩한 도성은 이방 사람들에게 짓밟힙니다.

하나님은 두 증인에게 놀라운 권위를 주십니다. 누구든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짐승이 나타나 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입니다.

증인들이 죽자 온 세상이 기뻐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죽음을 축하합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나자 하나님에게서 나온 생명의 영이 그들 안으로 들어가고, 죽었던 증인들이 일어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일곱째 나팔이 울리자 하늘에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 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찾으려면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을 마지막 나팔의 선언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증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도성에서 죽임을 당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걸어가신 길과 닮은 길을 걷습니다.

땅에서는 증인들이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선언이 들립니다. 요한은 이 두 현실을 나란히 보여 주면서, 무엇을 참된 승리라고 불러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1011장 본문 읽기 →

성전은 재면서, 왜 바깥뜰은 재지 않는가?

요한계시록 11:1–2 본문 →

그리고 나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말이 있었습니다.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절하는 이들을 재어라.」요한계시록 11:1 · 본디새김

고대에는 건축물을 재기 위해 일정한 길이의 갈대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재라고 하는지 자세히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성전과 제단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재라고 합니다.

건물은 길이와 너비를 측정할 수 있지만, 예배하는 사람들을 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측정은 하나님의 소유를 확인하는 행동인가?

성전을 재는 장면의 중요한 구약 배경은 에스겔 40–42장입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환상을 봅니다. 한 사람이 측량 도구를 가지고 성전의 문과 뜰과 여러 공간을 세밀하게 측정합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설계도를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떠나 버린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의 임재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의 일부입니다.

스가랴 2:1–5에도 예루살렘을 측량하려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환상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예루살렘 주위의 불 성벽이 되고 그 가운데 영광으로 머물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두 예언서에서 측량은 하나님의 관심과 회복, 그분의 백성에 대한 보호와 연결됩니다.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측정 대상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이 측량이 사람들의 하나님께 속함과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측량된 사람들은 어떤 보호를 받는 것일까요?

「그러나 성전 바깥뜰은 빼 두고 재지 마라. 그것은 이방 사람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요한계시록 11:2 · 본디새김

측량이 어떤 의미에서 보호를 나타낸다고 하더라도, 성전과 도성이 외적인 공격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보호받는 성전과 짓밟히는 도성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한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과 도성을 역사적인 예루살렘과 연결하는 읽기입니다. 성전 안과 바깥뜰의 구별, 이방 사람들에 의한 짓밟힘은 실제 예루살렘 성전과 그 도성이 겪는 위협을 떠올리게 하며, 이 관점에서는 1세기 예루살렘의 역사나 마지막 때의 성전과 관련하여 본문을 이해합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을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읽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2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기둥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이 표현과 함께 읽으면 측량은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를 구별하는 행동입니다. 다만 이 해석 안에서도 바깥뜰을 박해에 노출된 공동체의 외적인 삶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과 구별되는 영역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11장만으로 어느 해석을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본문이 분명히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께 속해 있다는 사실과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어서 등장하는 두 증인도 하나님께 권한을 받았지만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처음의 측량을 모든 외적 재난에서 벗어나는 보증으로 이해하면, 이 장의 뒤쪽과 충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세상의 폭력에서 물리적으로 제외된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폭력이 그들의 궁극적인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흔두 달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거룩한 도성이 짓밟히는 기간은 마흔두 달입니다. 곧이어 두 증인은 천이백육십 일 동안 예언합니다. 이방 사람들이 거룩한 도성을 짓밟는 기간과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이 같은 길이로 제시됩니다. 본문은 두 기간이 정확히 같은 날 시작하고 끝난다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두 장면을 연결하여 읽도록 하는 수치상의 대응은 분명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증언은 계속됩니다.

박해의 시간이 곧 증언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한 달을 30일로 계산하면 42개월은 1,260일이며, 360일을 한 해로 하는 계산에서는 3년 반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다니엘서의 시간 표현과 연결됩니다. 다니엘 7:25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세가 성도들을 괴롭히는 기간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 묘사되고, 다니엘 12:7에도 같은 형태의 기간이 등장합니다. 일곱의 절반인 셋 반이라는 숫자는 완결되지 않은 기간, 한정된 고난의 시간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언제나 정확히 같은 상징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문이 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이를 실제 3년 반의 기간으로, 다른 해석에서는 하나님이 제한하신 박해의 시대를 나타내는 상징적 기간으로 이해합니다.

왜 증인은 두 사람인가?

요한계시록 11:3–4 본문 →

「그리고 나는 내 두 증인에게 예언할 권한을 주겠다. 그러면 그들이 자루옷을 두르고 천이백육십 일 동안 예언할 것이다.」요한계시록 11:3 · 본디새김

성경에서 자루옷은 슬픔과 애도, 회개를 표현할 때 입던 거친 옷입니다. 요나 3:5–8에서 니느웨 사람들은 심판의 말씀을 듣고 자루옷을 입으며 자신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킵니다.

두 증인은 화려한 승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미래의 사건을 알려 주는 일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의 죄와 심판을 앞에 두고 애통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증언하는 예언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일까요? 신명기 19:15에서는 어떤 사건을 확증하기 위해 두세 증인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법적 배경을 생각하면 두 사람이라는 숫자는 증언의 신뢰성과 충분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두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그들을 설명합니다.

이들은 두 올리브나무이고 두 등잔대이며,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이들입니다.요한계시록 11:4 · 본디새김

이것은 스가랴 4장을 이해해야 비로소 그 의미가 보이는 표현입니다.

올리브나무와 등잔대의 비밀

스가랴 4장에서 예언자는 금 등잔대와 그 양옆에 있는 두 올리브나무를 봅니다. 그 환상은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던 시기와 관계됩니다. 스가랴 4:6에서 여호와야훼는 스룹바벨에게 성전의 회복이 인간의 군사력이나 정치적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스가랴 4:14에서는 두 올리브나무가 온 땅의 주 곁에 서 있는 두 기름부음 받은 존재와 관련된다고 설명됩니다. 역사적 배경에서 이들은 일반적으로 왕적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제사장인 여호수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스가랴의 환상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습니다. 스가랴의 환상에는 하나의 등잔대와 두 올리브나무가 있지만, 요한계시록에는 두 올리브나무와 두 등잔대가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1:20에서 등잔대는 교회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따라서 두 증인이 두 등잔대라고 불린다는 사실은 그들을 교회의 증언과 연결하여 이해할 강한 근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누구일까요? 첫째는 실제 두 예언자라는 해석입니다. 본문에서 두 증인은 말하고, 권한을 행사하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는 개별 인물들처럼 묘사되며, 모세와 엘리야의 능력을 닮았다는 점에서 마지막 시대에 등장할 두 예언자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둘째는 증언하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상징한다는 해석입니다. 등잔대가 교회를 나타낸다는 1:20의 설명, 두 증인이라는 법적 이미지, 그들의 증언이 여러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이 해석의 근거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두 증인이 예언적 사명을 받은 교회를 대표합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택하든 그들은 땅의 주 앞에 서서 그분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며, 스가랴의 올리브나무 환상처럼 그 사명의 근원은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권한입니다.

엘리야와 모세의 능력을 가진 증인들

요한계시록 11:5–6 본문 →

누가 그들을 해치려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들의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 한다면 그는 그렇게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요한계시록 11:5 · 본디새김

같은 조건을 두 번 반복하여 증인들을 공격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불은 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입에서 나옵니다.

입은 증인들이 말씀을 전하는 기관입니다. 예레미야 5:14에서 여호와야훼는 예언자의 입에 있는 자신의 말씀을 불로 만들고, 백성을 나무처럼 만들어 그 불이 그들을 삼키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반면 열왕기하 1:10–12에서는 엘리야의 말에 따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를 붙잡으러 온 군인들을 삼킵니다.

두 증인의 입에서 나오는 불이 문자 그대로의 초자연적 불인지, 그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심판 말씀을 상징하는 것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증인들의 권위가 그들의 증언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늘을 닫아 그들이 예언하는 날들 동안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할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을 다스려 피로 바꾸고, 그들이 바라는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땅을 칠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요한계시록 11:6 · 본디새김

여기서는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엘리야와 모세입니다.

열왕기상 17:1에서 엘리야는 자신의 말이 있기 전에는 이슬이나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야고보서 5:17은 이 가뭄의 기간을 3년 6개월이라고 설명합니다. 모세는 출애굽기 7:17–21에서 나일강의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을 선포했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이집트에 여러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왜 모세와 엘리야일까요?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이끌어 낸 출애굽의 지도자였고, 엘리야는 바알 숭배가 왕실의 후원을 받던 시대에 여호와야훼께 대한 충성을 선포한 예언자였습니다. 모세 앞에는 파라오가, 엘리야 앞에는 아합과 이세벨의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누가 참된 하나님이며, 백성이 누구를 섬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도 세상의 권세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증언의 사명이 끝날 때,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집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을 읽는 독자에게 모세와 엘리야의 조합은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산을 떠올리게 합니다(마태복음 17:1–8; 마가복음 9:2–8; 누가복음 9:28–36). 누가복음 9:31에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이야기하는데, 그 일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엑소도스는 「떠남」 또는 「출발」을 뜻하며 출애굽을 뜻하는 낱말과 같습니다. 다만 요한계시록 11장이 변화산 사건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며, 여기서는 두 증인의 예언적 권위를 설명하기 위해 모세와 엘리야의 능력이 사용됩니다.

짐승은 증인들을 이겼는데, 정말 이긴 것일까?

요한계시록 11:7–10 본문 →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증언을 다 마치면, 끝없이 깊은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움을 벌여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1:7 · 본디새김

지금까지 누구도 두 증인을 해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공격하려는 사람은 오히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토록 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증인들이 왜 갑자기 패배하는 것일까요?

답은 문장의 처음, 「그들이 자기들의 증언을 다 마치면」에 있습니다. 짐승이 그들을 이기기 전에, 먼저 그들의 증언이 완성됩니다. 두 증인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사명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짐승은 증인들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었지만, 그들이 이미 마친 증언을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짐승이 얻은 승리

짐승은 「끝없이 깊은 구덩이」에서 올라옵니다. 이곳은 9장에서 메뚜기 떼가 나왔던 심연과 연결되며, 짐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파괴적인 세력에 속한 존재로 나타납니다. 이 짐승이 어떤 권세를 나타내는지는 13장과 17:8에서 더 설명되며, 11장만으로 짐승을 특정한 황제나 현대의 정치적 인물과 동일시할 근거는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구약 배경은 다니엘 7장입니다. 다니엘 7:21에서 한 뿔이 성도들과 싸워 그들을 이기지만, 그 승리는 마지막 승리가 아닙니다. 옛적부터 계신 이가 개입하시고, 마침내 성도들이 나라를 받습니다(다니엘 7:22, 27).

5장에서 어린양은 승리하셨기 때문에 두루마리를 여실 수 있는 분으로 등장하셨습니다(5:5). 그런데 정작 요한이 본 어린양은 죽임당하신 모습이셨습니다(5:6). 세상의 기준에서는 죽임당한 사람이 패배자이지만, 하늘에서는 그분을 승리자로 선포합니다.

이제 두 증인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땅에서는 짐승이 그들을 이깁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끝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일으키십니다. 요한은 먼저 짐승의 승리를 축하하는 세상의 모습을 길게 보여 줍니다.

소돔이며 이집트이며, 주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도성

그리고 그들의 주검이 큰 도성의 넓은 거리에 있을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인 뜻으로 소돔이라고도 이집트라고도 불리는 곳이고, 그들의 주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기도 합니다.요한계시록 11:8 · 본디새김

하나의 도성에 세 이름이 겹쳐집니다.

소돔은 구약에서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을 떠올리게 하는 도시이며, 이사야 1:10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소돔의 지도자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불의를 책망합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았던 제국이며, 파라오는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냥 예루살렘이라고 말하지 않고, 「영적인 뜻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부른다고 말합니다.

이 도성을 역사적인 예루살렘으로 읽는 해석도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권세의 상징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요한은 지리적인 위치보다 도성의 영적 성격을 드러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증인들을 죽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여기서 「그들의 주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라고 덧붙였을까요? 두 증인의 죽음을 예수님께서 겪으신 죽음과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먼저 겪으신 거절과 폭력의 길을 걷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들도 죽임을 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이십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의 죽음이 이 이야기의 마지막일 수는 없습니다.

죽은 증인들을 보며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들

그리고 백성과 지파와 언어와 민족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주검을 사흘 반 동안 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검이 무덤에 놓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요한계시록 11:9 · 본디새김

고대 세계에서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방치하는 것은 심각한 모욕이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뿐 아니라 그가 속한 집단 전체에 수치를 안기려는 행동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두 증인의 죽음을 숨기지 않고, 누구나 볼 수 있는 넓은 거리에 두어 그들의 패배를 온 세상에 알리려 합니다.

그리고 땅에 사는 이들이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이 두 예언자가 땅에 사는 이들을 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11:10 · 본디새김

서로 선물을 보내는 모습은 에스더 9:19, 22에서 구원을 기념하며 잔치를 벌이고 음식을 주고받던 풍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느헤미야 8:10–12에서도 기쁨의 날에 음식을 나누는 행동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기쁨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마치 악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사라진 것을 축하합니다.

9장에서 사람들은 끔찍한 재앙을 겪고도 우상숭배와 악행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제 두 예언자는 하나님을 향한 증언으로 세상을 괴롭게 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견디기 싫은 불편함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책망하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들은 증언을 반박하지 못합니다. 대신 증언하는 사람의 죽음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사흘 반이 지난 뒤, 그 기쁨은 갑자기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도성을 역사적인 예루살렘으로 읽는 해석은 「그들의 주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라는 표현에서 가장 직접적인 근거를 얻습니다. 반면 상징으로 읽는 해석은 요한계시록의 다른 부분에서 「큰 도성」이라는 표현이 바벨론과 연결되고(16:19; 17:18), 바벨론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들을 박해하는 권세를 나타낸다는 점에 근거합니다. 이 관점에서는 소돔과 이집트와 예루살렘의 부정적인 모습이 하나의 상징적 도성에 겹쳐진다고 이해합니다.

사흘 반 뒤에 일어선 사람들

요한계시록 11:11–13 본문 →

그리고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나님에게서 나온 생명의 영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자기 발로 일어섰고, 그들을 지켜보던 이들을 큰 두려움이 덮쳤습니다.요한계시록 11:11 · 본디새김

방금 전까지 도성의 넓은 거리에 놓여 있던 시신들이 일어섭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생명의 영」은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 37:10에서 숨이 뼈들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이 살아나 자기 발로 일어서며 큰 군대가 됩니다. 그 환상에서 마른 뼈는 바벨론 포로 생활 속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온 집을 가리키며(에스겔 37:11),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자기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은 민족의 회복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이 장면을 두 증인의 이야기 안으로 가져옵니다. 이제 하나님의 생명 주시는 능력은 죽임당한 증인들이 일어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실제 두 사람의 육체적 부활로 읽든, 하나님이 자신의 증언 공동체를 최종적으로 회복하시는 모습으로 읽든, 그들의 생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짐승이 아닙니다.

짐승은 그들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일으키십니다.

삼 년 반과 사흘 반

두 증인은 천이백육십 일, 곧 3년 반 동안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신이 거리에 놓여 있었던 기간은 사흘 반입니다. 세상은 마치 영원히 이긴 것처럼 기뻐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증인들이 다시 일어선 순간, 사람들의 반응도 뒤집힙니다. 앞에서는 그들의 죽음을 기뻐했지만, 이제는 큰 두려움이 그들을 덮칩니다.

죽은 이들의 승천을 원수들이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에서 나는 큰 소리가 자기들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너라.」 그러자 그들이 구름 속에서 하늘로 올라갔고,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요한계시록 11:12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사람들은 증인들의 시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원수들이지만, 눈앞의 장면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공개적인 수치를 보았고, 이제는 공개적인 높임을 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승천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도행전 1:9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올려지셨고, 구름이 그분을 가렸습니다. 열왕기하 2:11에서는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들은 그들의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서 죽임을 당했고, 죽음 이후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져 하늘로 올라갑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살아 계신 주의 길과 그분의 증인들의 길이 겹쳐지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회개했을까?

그리고 그 시각에 큰 지진이 일어나 도성의 십분의 일이 무너졌고, 그 지진으로 사람 칠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하늘의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요한계시록 11:13 · 본디새김

9장에서는 재앙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두 장면 모두 재앙과 생존을 이야기하지만, 여기서는 그 사이에 죽은 증인들이 살아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 반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쪽에서는 이것을 실제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인정으로 읽습니다. 요한계시록 14:7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이 참된 예배와 연결된다는 점이 근거가 됩니다.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두려워하며 인정했을 뿐, 진정으로 회개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본문은 그들이 영광을 돌렸다고 말하지만 「회개했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논쟁을 너무 빨리 결론짓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최소한 한 가지 변화는 분명합니다. 앞에서는 증인들을 죽인 세계가 기뻐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한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다만 그 영광 돌림이 모든 사람의 최종적인 회개와 구원을 뜻한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은 그 장면을 그대로 남겨 둡니다.

조금 더 깊이

증언의 기간과 시신이 놓여 있던 기간은 모두 셋 반이라는 수를 사용하지만 규모가 다릅니다. 두 기간의 비율을 계산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문학적으로 볼 때 오랜 증언의 기간에 비해 공개적인 패배와 모욕의 기간이 훨씬 짧다는 불균형은 의미심장합니다. 또한 증인들의 승천을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단순한 복제로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에 계신 분이시고, 두 증인은 그분께 속한 사람들로서 그분이 이루신 승리에 의존합니다.

일곱째 나팔이 울렸는데, 왜 재앙이 아니라 찬양이 들리는가?

요한계시록 11:14–15 본문 →

둘째 화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셋째 화가 곧 옵니다.요한계시록 11:14 · 본디새김

다섯째 나팔에서는 첫째 화가 있었고, 여섯째 나팔과 그에 이어진 환상 뒤에 둘째 화가 지나갔습니다. 이제 마지막 화가 남았고, 독자는 앞선 두 화보다 더욱 두려운 재앙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큰 소리들이 나서 말했습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이다.」요한계시록 11:15 · 본디새김

나팔의 소리 뒤에 등장한 것은 새로운 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에 관한 선언입니다.

앞에서는 짐승이 증인들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승리는 세상 나라의 최종적인 주인이 누구인지를 바꾸지 못합니다.

「세상 나라」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세상 나라」(βασιλεία)에서 「나라」는 원문에서 단수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와 왕들이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그 나라들을 움직이는 세상의 지배 질서를 하나의 전체로 묶어 말합니다. 그리고 그 통치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다니엘 7:13–14와 깊이 연결됩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옛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나아가고,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며, 모든 백성과 민족과 언어가 그를 섬기게 됩니다. 시편 2편에서도 세상의 왕들이 여호와야훼와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대적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왕을 세우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구약의 왕권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과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런데 왜 이후에도 싸움이 계속될까?

세상 나라가 이미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면, 왜 12장과 13장에서도 용과 짐승의 활동이 등장하고 심판과 전쟁의 환상이 계속될까요?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환상을 단순한 연대기 순서로 배열하지 않았다는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가 이미 이루어진 사건처럼 선포되면서, 이어지는 환상들은 그 승리와 관련된 대립과 심판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마침내 누구의 통치가 영원할지가 선언되고, 그 선언을 듣자 하늘의 장로들이 엎드립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러므로 일곱째 나팔의 선언 다음의 모든 장면이 반드시 시간적으로 그 이후에 일어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요한이 아무런 역사적 순서 없이 환상을 무작위로 배열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 책에는 분명한 진행이 있지만, 그 진행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직선적인 시간표로 정리하는 방식보다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이 여러 환상 속에서 반복되고 심화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전에도 왕이셨는데, 왜 이제 다스리기 시작하셨을까?

요한계시록 11:16–17 본문 →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보좌에 앉아 있던 장로 스물넷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고, 하나님에게 절했습니다.요한계시록 11:16 · 본디새김

장로들은 보좌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보다 높은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경배하며, 감사의 노래를 시작합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 지금 계시고 전에 계셨던 분, 우리가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당신의 큰 능력을 취하셨고 다스리기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11:17 · 본디새김

먼저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요한계시록 1:4에서는 하나님을 「지금 계시고 전에 계셨고 오시는 이」로 소개하고, 4:8에서도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오시는 분으로 찬양합니다. 그런데 11:17에는 「오시는 분」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큰 능력을 취하시고 다스리기 시작하셨다는 찬양이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 차이는 우연한 생략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이 생략을 하나님이 오실 것을 기다리던 단계에서 그분의 통치가 나타나는 단계로 환상의 초점이 옮겨간 표시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환상에는 여전히 장래의 심판과 완성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강조되는 것은 기다리던 하나님의 통치가 결정적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제야 왕이 되신 것일까요? 시편 93:1은 여호와야훼께서 다스리신다고 선포하고, 시편 103:19는 그분의 왕권이 만물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기 시작하셨다는 말은 그 이전에는 통치하지 않으셨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왕이셨지만, 세상은 그분의 통치를 거부해 왔습니다. 짐승이 하나님의 증인들을 죽이고, 여러 민족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우상숭배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왕권이 그 모든 반역을 끝내고 분명히 드러나는 순간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왕이 되기 위해 새롭게 힘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신 왕권을 온 세상 앞에 드러내십니다. 그 순간 세상의 왕권은 상대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아무리 강력한 제국과 짐승의 권세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다스리기 시작하셨기」라고 옮긴 표현에는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원문의 에바실류사스(βασιλεύω)는 「다스렸다」라는 뜻의 부정과거형입니다. 문맥상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결정적으로 행사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동사 형태 자체가 언제나 시작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앞의 「취하셨고」는 완료형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큰 능력을 취하신 상태를 강조하며 뒤의 통치 선언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엇을 바로잡는가?

요한계시록 11:18 본문 →

장로들의 찬양은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멈추지 않고, 그 통치가 무엇을 가져오는지 설명합니다.

「민족들이 분노했고 당신의 진노가 왔습니다. 죽은 이들이 심판받을 때, 그리고 당신의 노예인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당신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이들, 작은 이들과 큰 이들에게 삯을 주실 때, 또 땅을 망가뜨리는 자들을 망가뜨리실 때가 왔습니다.」요한계시록 11:18 · 본디새김

민족들의 분노와 하나님의 진노가 맞서고, 죽은 이들이 심판받으며, 하나님을 섬긴 이들이 보상을 받고, 땅을 망가뜨린 자들이 심판받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누가 더 강한지를 보여 주는 권력의 과시가 아니라, 세상에서 왜곡된 정의를 바로잡는 일과 연결됩니다.

민족들의 분노와 하나님의 진노

「민족들이 분노했고 당신의 진노가 왔습니다」에서 그리스어도 분노를 뜻하는 같은 어근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두 분노의 성격은 같지 않습니다. 시편 2:1–5에서도 민족들과 왕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대적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반역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증인들을 죽이고 그 죽음을 기뻐했습니다. 이 문맥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인간과 똑같이 화를 내시는 모습이 아니라, 악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는 통치와 연결됩니다. 그분의 진노는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냅니다.

작은 이들과 큰 이들이 함께 언급됩니다

예언자들, 성도들,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이들 뒤에 「작은 이들과 큰 이들」이라는 표현이 붙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모두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동체의 지도자였고, 어떤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신자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증언하다 죽임당했고, 어떤 사람은 조용히 믿음을 지키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상하실 때에는 세상에서의 명성과 지위가 결정적인 기준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두 증인만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을 기억하십니다.

땅을 망가뜨리는 자들을 망가뜨리십니다

「땅을 망가뜨리는 자들을 망가뜨리실 때」(διαφθείρω)에서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반복됩니다. 이 낱말은 파괴하다, 망가뜨리다, 부패시키다라는 의미 범위를 지닙니다. 땅을 망가뜨리는 자들이 자신들이 행한 파괴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현대 독자에게는 환경 파괴가 먼저 떠오를 수 있고, 실제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는 행위와 연결하여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세상을 망가뜨리는 일은 폭력과 우상숭배, 성도들에 대한 박해, 사람들을 타락하게 하는 세력의 활동과도 연결됩니다. 19:2에서는 바벨론이 땅을 음행으로 타락시켰다고 묘사됩니다.

따라서 이곳의 파괴는 환경 훼손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와 창조 세계를 부패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악한 권세의 활동까지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의미 범위에 대해서는 해석에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파괴하는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짐승은 증인들을 죽였고,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축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보상하시며, 동시에 다른 사람과 세상을 파괴한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악을 바로잡지 않는 구원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는 심판도 아닙니다. 이것이 장로들이 찬양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입니다

요한계시록 11:19 본문 →

그리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렸고, 그의 성전 안에서 그의 언약궤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번개와 소리와 천둥과 지진과 큰 우박이 일어났습니다.요한계시록 11:19 · 본디새김

11장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성전으로 돌아옵니다.

1절에서 요한은 성전을 재라는 명령을 받았고, 성전의 바깥뜰은 이방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그 안의 언약궤가 보입니다.

왜 언약궤가 등장할까?

출애굽기 25:10–22에서 하나님은 언약궤를 만들도록 명령하시고, 그 위의 속죄소에서 모세를 만나 말씀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언약궤는 지성소에 놓였으며,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언약을 상징하는 중심적인 성물이었습니다.

요한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 언약궤가 어디에 숨겨져 있었는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늘 성전의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언약궤가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재어 구별하셨고, 두 증인에게 권한을 주셨으며, 그들이 죽임당한 뒤에는 생명의 영으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나팔에서 그분의 통치가 선언되었습니다. 그 모든 일의 배후에 자신의 언약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왜 마지막에 다시 천둥과 지진이 일어날까?

이 현상들은 앞선 장들에서도 하나님의 보좌와 심판에 연결되어 등장했습니다. 4:5에서는 보좌에서 번개와 소리와 천둥이 나왔고, 8:5에서는 제단의 불이 땅에 던져졌을 때 천둥과 소리와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11:19에서는 거기에 큰 우박까지 더해집니다. 시나이산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나타나실 때 천둥과 번개가 일어났습니다(출애굽기 19:16–19).

그러나 그 현상들 앞에 먼저 하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장엄한 소리와 함께, 그분의 언약을 나타내는 성물이 드러납니다.

심판의 하나님은 동시에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악을 심판하시지만, 자신이 약속하신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에 열린 성전

요한계시록 11:1–19 본문 →

이 장의 흐름을 하나로 묶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증인들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요한은 두 증인이 죽는 장소를 그들의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운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당시의 눈으로 보면 완전한 패배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일으키셨고, 요한계시록은 그분을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으로 보여 줍니다.

두 증인은 어린양의 승리를 반복하여 이루는 구원자가 아니라, 어린양이 이루신 승리에 참여하는 증인들입니다. 그들의 고난이 세상을 구원하는 새로운 속죄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것을 고난을 받기만 하면 언제나 옳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반대받을 수도 있습니다. 두 증인의 이야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끝까지 수행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더 강한 군대가 이기는 나라가 아닙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왕이신 나라입니다.

세상이 어떤 사람의 증언을 거부했다고 해서 그 증언이 헛된 것은 아니며, 세상이 기뻐하는 순간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승리의 순간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영으로 증인들을 일으키시고, 세상 나라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장이 전하는 소망은 인간의 용기가 아니라,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과 그분의 백성을 끝까지 기억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땅에서는 거룩한 도성이 짓밟혔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렸습니다. 땅에서는 증인들의 시신이 거리에 버려졌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드러났습니다. 열려 있는 하늘 성전에서 번개와 소리와 천둥과 지진과 큰 우박이 일어나는 가운데, 요한이 마지막으로 보여 준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