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6–11장 · 봉인과 나팔의 심판
증인들이 일어설 때, 세상의 왕권이 바뀝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재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속한 거룩한 도시는 다른 민족들에게 짓밟힙니다.
하나님은 두 증인에게 놀라운 권위를 주십니다. 누구든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짐승이 나타나 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입니다.
증인들이 죽자 온 세상이 기뻐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죽음을 축하합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나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의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가고, 죽었던 증인들이 일어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일곱째 나팔이 울리자 하늘에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 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찾으려면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을 마지막 나팔의 선언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 장에는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의 이야기가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증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도시에서 죽임을 당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걸어가신 길과 닮은 길을 걷습니다.
땅에서는 증인들이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선언이 들립니다. 요한은 이 두 현실을 나란히 보여 주면서, 무엇을 참된 승리라고 불러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성전은 재면서, 왜 바깥뜰은 재지 않는가?
나에게 지팡이처럼 생긴 갈대 하나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재어라.」요한계시록 11:1 · 두루새김
고대에는 건축물을 재기 위해 일정한 길이의 갈대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재라고 하는지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성전과 제단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재라고 합니다.
건물은 길이와 너비를 잴 수 있지만, 예배하는 사람들을 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요한이 하는 일은 단순한 건축 조사가 아닙니다.
측정은 하나님의 소유를 확인하는 행동인가?
성전을 재는 장면의 중요한 구약 배경은 에스겔 40–42장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된 뒤, 에스겔은 한 사람이 측량 도구로 성전의 문과 뜰과 여러 공간을 꼼꼼하게 재는 환상을 봅니다. 이것은 떠나 버린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의 임재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의 일부입니다.
스가랴 2:1–5에도 예루살렘을 재려는 사람이 등장하고, 하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 주위의 불 성벽이 되고 그 가운데 영광으로 머물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두 예언서에서 측량은 하나님의 회복과 그분의 백성에 대한 보호와 연결됩니다.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재라는 것은 이 측량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과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측량된 사람들은 어떤 보호를 받는 것일까요?
「그러나 성전 바깥뜰은 빼고 재지 마라. 그곳은 다른 민족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요한계시록 11:2 · 두루새김
측량이 어떤 의미에서 보호를 나타낸다고 하더라도, 성전과 도시가 외부의 공격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보호받는 성전과 짓밟히는 도성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한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과 도시를 역사적인 예루살렘과 연결하여, 1세기 예루살렘의 역사나 마지막 때의 성전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을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읽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기둥이 될 것이라는 3:12의 약속과 함께 읽으면, 측량은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를 구별하는 행동이 됩니다.
11장만으로 어느 해석을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본문이 분명히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께 속해 있다는 사실과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어서 등장하는 두 증인도 하나님께 권한을 받았지만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처음의 측량을 모든 외부의 재난에서 벗어나는 보증으로 이해하면, 이 장의 뒤쪽과 충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반드시 세상의 폭력에서 몸을 보호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폭력이 그들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흔두 달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거룩한 도시가 짓밟히는 기간은 마흔두 달이고, 곧이어 두 증인은 천이백육십 일 동안 예언합니다. 둘 다 3년 반에 해당하는 같은 길이입니다. 본문은 두 기간이 정확히 같은 날 시작하고 끝난다고 밝히지는 않지만, 두 장면을 연결하여 읽도록 하는 숫자의 대응은 분명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증언은 계속됩니다.
박해의 시간이 곧 증언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한 달을 30일로 계산하면 42개월은 1,260일이며, 360일을 한 해로 하는 계산에서는 3년 반입니다. 이것은 다니엘서의 시간 표현과 연결됩니다. 다니엘 7:25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세가 성도들을 괴롭히는 기간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 묘사되고, 다니엘 12:7에도 같은 형태의 기간이 나옵니다. 일곱의 절반인 셋 반은 완결되지 않은 기간, 한정된 고난의 시간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언제나 정확히 같은 상징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문이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이를 실제 3년 반의 기간으로, 다른 해석에서는 하나님이 제한하신 박해의 시대를 나타내는 상징적 기간으로 이해합니다. 성전을 상징으로 읽는 해석 안에서도 바깥뜰을 박해받는 공동체의 겉으로 드러나는 삶으로 보기도 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과 구별되는 영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왜 증인은 두 사람인가?
그 목소리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나는 내 두 증인에게 예언할 권한을 주겠다. 그들은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 동안 예언할 것이다.」요한계시록 11:3 · 두루새김
성경에서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은 슬픔과 애도, 회개를 표현할 때 입던 자루옷입니다. 요나 3:5–8에서 니느웨 사람들은 심판의 말씀을 듣고 자루옷을 입으며 악한 길에서 돌이킵니다.
두 증인은 화려한 승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단순히 미래의 사건을 알려 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의 죄와 심판을 앞에 두고 슬퍼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증언하는 예언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일까요? 신명기 19:15는 어떤 사건을 확실히 밝히기 위해 두세 증인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법적 배경에서 두 사람이라는 숫자는 증언이 믿을 만하고 충분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두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들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이 두 증인은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요한계시록 11:4 · 두루새김
올리브나무와 등잔대의 비밀
스가랴 4장에서 예언자는 금 등잔대와 그 양옆에 있는 두 올리브나무를 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 성전이 다시 세워지던 시기, 하나님은 스룹바벨에게 성전의 회복이 인간의 군사력이나 정치적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스가랴 4:6).
스가랴 4:14에서 두 올리브나무는 온 땅의 주 곁에 서 있는 두 기름부음 받은 존재와 관련되며, 일반적으로 왕의 역할을 하는 지도자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스가랴의 환상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습니다. 스가랴에는 하나의 등잔대와 두 올리브나무가 있지만, 요한계시록에는 두 올리브나무와 두 등잔대가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1:20에서 등잔대는 교회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미 설명되었으므로, 이 변화는 두 증인을 교회의 증언과 연결하여 이해할 강한 근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누구일까요? 크게 두 방향의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실제 두 예언자라는 해석입니다. 본문에서 두 증인은 말하고, 권한을 행사하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는 개별 인물들처럼 묘사되며, 모세와 엘리야의 능력을 닮았다는 점에서 마지막 시대에 등장할 두 예언자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둘째는 증언하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상징한다는 해석입니다. 등잔대가 교회를 나타낸다는 1:20의 설명, 두 증인이라는 법적 이미지, 그들의 증언이 여러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근거입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택하든, 그들은 땅의 주 앞에 서서 그분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스가랴의 올리브나무 환상을 기억하면, 그 사명의 근원은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권한입니다.
엘리야와 모세의 능력을 가진 증인들
누군가 그들을 해치려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그들을 해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합니다.요한계시록 11: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증인들을 해치려는 경우를 두 번 말하며, 증인들을 공격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불은 손에서 나오지 않고 입에서 나옵니다. 입은 증인들이 말씀을 전하는 기관입니다. 예레미야 5:14에서 하나님은 예언자의 입에 있는 자신의 말씀을 불로 만들어 백성을 삼키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열왕기하 1:10–12에서는 엘리야의 말에 따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를 붙잡으러 온 군인들을 삼킵니다.
이 불이 문자 그대로의 초자연적 불인지, 그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심판 말씀을 상징하는 것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증인들의 권위가 그들의 증언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늘을 닫아 자신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물을 피로 바꾸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땅을 칠 권한도 가지고 있습니다.요한계시록 11:6 · 두루새김
여기서는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엘리야와 모세입니다.
열왕기상 17:1에서 엘리야는 자신의 말이 있기 전에는 이슬이나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고, 야고보서 5:17은 이 가뭄의 기간을 3년 6개월이라고 설명합니다. 모세는 출애굽기 7:17–21에서 나일강의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을 선포했습니다. 두 증인의 능력은 이 두 예언자의 사역을 한데 모은 모습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이끌어 낸 출애굽의 지도자였고, 엘리야는 바알 숭배가 왕실의 후원을 받던 시대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선포한 예언자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보다 훨씬 강력해 보이는 세상의 권세와 맞섰습니다.
모세 앞에는 파라오가 있었습니다.
엘리야 앞에는 아합과 이세벨의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누가 참된 하나님이며 백성이 누구를 섬겨야 하는가를 둘러싼 대립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도 세상의 권세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증언의 사명이 끝날 때,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집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을 읽는 독자에게 모세와 엘리야의 조합은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산을 떠올리게 합니다(마태복음 17:1–8; 마가복음 9:2–8; 누가복음 9:28–36). 누가복음 9:31에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이야기하는데, 그 일을 가리키는 그리스어는 「떠남」을 뜻하며 출애굽을 뜻하는 낱말과 같습니다. 다만 요한계시록 11장이 변화산 사건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며, 여기서 모세와 엘리야의 능력은 두 증인의 예언자로서의 권위를 설명하기 위해 쓰입니다.
짐승은 증인들을 이겼는데, 정말 이긴 것일까?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 끝없이 깊은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움을 벌여 그들을 이기고 죽일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1:7 · 두루새김
지금까지 누구도 두 증인을 해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공격하려는 사람은 오히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토록 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증인들이 왜 갑자기 패배하는 것일까요?
답은 문장의 처음에 있습니다.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 짐승이 그들을 이기기 전에, 먼저 그들의 증언이 완성됩니다. 두 증인의 죽음은 사명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짐승은 증인들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었지만, 그들이 이미 마친 증언을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짐승이 얻은 승리
짐승은 9장에서 메뚜기 떼가 나왔던 「끝없이 깊은 구덩이」에서 올라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파괴적인 세력에 속한 존재입니다. 짐승이 정확히 어떤 권세를 나타내는지는 13장과 17:8에서 더 설명되며, 11장만으로 특정한 황제나 현대의 정치적 인물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다니엘 7:21에서는 한 뿔이 성도들과 싸워 그들을 이깁니다. 그러나 옛적부터 계신 이가 개입하시고, 마침내 성도들이 나라를 받습니다(다니엘 7:22, 27). 요한계시록 11장도 이 구조를 보여 줍니다. 적대적인 세력이 하나님의 증인들과 싸워 이기지만, 그 승리는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5장에서 어린양은 승리하셨기 때문에 두루마리를 여실 수 있는 분으로 등장하셨지만(5:5), 요한이 본 어린양은 죽임당하신 모습이셨습니다(5:6). 세상의 기준에서는 죽임당한 사람이 패배자이지만, 하늘에서는 그분을 승리자로 선포합니다.
이제 두 증인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땅에서는 짐승이 그들을 이깁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끝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일으키십니다.
요한은 먼저 짐승의 승리를 축하하는 세상의 모습을 길게 보여 줍니다.
소돔이며 이집트이며,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도시
그들의 시신은 큰 도시의 넓은 거리에 놓일 것입니다. 그 도시는 영적인 뜻으로 소돔이라고도 이집트라고도 불립니다.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기도 합니다.요한계시록 11:8 · 두루새김
하나의 도시에 세 이름이 겹쳐집니다.
소돔.
이집트.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소돔은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을 떠올리게 하는 도시이고, 이사야 1:10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소돔의 지도자들이라고 부르며 책망합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고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제국입니다.
요한은 지리적인 위치만을 알려 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 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증인들을 죽이는 곳입니다. 이 도시를 역사적인 예루살렘으로 읽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권세의 상징으로 읽든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언급했을까요? 두 증인의 죽음을 예수님께서 겪으신 죽음과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먼저 겪으신 거절과 폭력의 길을 걷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죽임을 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이십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의 죽음이 이 이야기의 마지막일 수는 없습니다.
죽은 증인들을 보며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들
여러 백성과 지파와 민족에 속하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시신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 시신을 무덤에 묻지 못하게 합니다.요한계시록 11:9 · 두루새김
고대 세계에서 죽은 사람을 묻지 않고 시신을 공개적으로 내버려 두는 것은 심각한 모욕이었고, 그가 속한 집단 전체에 수치를 안기려는 행동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시신은 누구나 볼 수 있는 넓은 거리에 놓여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숨기지 않고, 두 증인의 패배가 명백하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려 합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두 증인이 죽은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이 두 예언자가 땅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11:10 · 두루새김
서로 선물을 보내는 모습은 에스더 9:19, 22에서 구원을 기념하며 잔치를 벌이고 음식을 주고받던 풍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기쁨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마치 악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사라진 것을 축하합니다.
9장에서 사람들은 끔찍한 재앙을 겪고도 우상숭배와 악행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제 두 예언자는 하나님을 향한 증언으로 세상을 괴롭게 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증인들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책망하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들은 증언을 반박하지 못합니다. 대신 증언하는 사람의 죽음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사흘 반이 지난 뒤, 그 기쁨은 갑자기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11:8의 도시를 역사적인 예루살렘으로 읽는 해석은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는 표현에서 가장 직접적인 근거를 얻습니다. 반면 이 도시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권세의 상징으로 읽는 해석은, 요한계시록에서 큰 도시라는 표현이 성도들을 박해하는 바벨론과 연결된다는 점(16:19; 17:18)을 근거로 소돔과 이집트와 예루살렘의 부정적인 모습이 하나의 상징적 도시에 겹쳐진다고 봅니다. 11:10의 선물에 관해서는 느헤미야 8:10–12에서도 기쁨의 날에 음식을 나누는 행동이 나옵니다.
사흘 반 뒤에 일어선 사람들
사흘 반이 지난 뒤,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의 숨이 두 증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자기 발로 일어서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했습니다.요한계시록 11:11 · 두루새김
방금 전까지 도시의 넓은 거리에 놓여 있던 시신들이 일어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의 숨」은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 37:10에서 숨이 마른 뼈들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이 살아나 자기 발로 일어서며 큰 군대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생명의 회복 장면을 두 증인의 이야기 안으로 가져옵니다.
짐승은 그들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일으키십니다.
그들의 생명은 짐승이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증인은 삼 년 반 동안 예언했지만, 그들의 시신이 거리에 놓여 있었던 기간은 사흘 반입니다. 세상은 마치 영원히 이긴 것처럼 기뻐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앞에서는 그들의 죽음을 기뻐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크게 두려워합니다.
죽은 이들의 승천을 원수들이 지켜봅니다
두 증인은 하늘에서 자기들에게 말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너라.」 그들은 구름 속에서 하늘로 올라갔고, 그들의 원수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요한계시록 11:12 · 두루새김
조금 전까지 사람들은 증인들의 시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봅니다. 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원수들이지만, 처음에는 공개적인 수치를 보았고 이제는 공개적인 높임을 봅니다.
이 장면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승천(사도행전 1:9)과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열왕기하 2:11)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들은 그들의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서 죽임을 당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으키시자 하늘로 올라갑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살아 계신 주의 길과 그분의 증인들의 길이 겹쳐지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회개했을까?
바로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졌습니다. 그 지진으로 칠천 명이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요한계시록 11:13 · 두루새김
9장에서는 재앙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두 장면 사이에는 죽은 증인들이 살아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증인들의 죽음을 축하했지만, 이제 하나님이 그들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반응은 해석이 갈립니다. 한쪽에서는 이것을 실제 회개로 읽습니다. 14:7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이 참된 예배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두려워하며 인정했을 뿐이라고 봅니다. 본문은 그들이 영광을 돌렸다고 말하지만 「회개했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논쟁을 너무 빨리 결론짓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던 세상이 언제까지나 똑같은 반응만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요한은 그 장면을 그대로 남겨 둡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나팔이 울립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는 바벨론 포로 생활 속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온 백성을 가리키며(에스겔 37:11), 그 환상은 먼저 민족의 회복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약속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의 부활은 실제 두 사람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증언 공동체를 최종적으로 회복하시는 모습의 상징으로 읽기도 합니다. 삼 년 반과 사흘 반은 둘 다 셋 반이라는 수를 쓰지만 규모가 다르며, 비율을 계산하라는 뜻이라기보다 증언의 기간에 비해 패배와 모욕의 기간이 훨씬 짧다는 글의 짜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증인들의 승천이 예수님의 승천을 떠올리게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에 계신 분이시고 두 증인은 그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생명과 승리는 그분이 이루신 승리에 달려 있습니다.
일곱째 나팔이 울렸는데, 왜 재앙이 아니라 찬양이 들리는가?
「둘째 재앙이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셋째 재앙이 곧 닥칩니다.」 다섯째 나팔에서 첫째 재앙이 있었고, 여섯째 나팔과 그에 이어진 환상 뒤에 둘째 재앙이 지나갔습니다. 독자는 앞선 두 재앙보다 더욱 두려운 재앙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큰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습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다. 그분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요한계시록 11:15 · 두루새김
나팔의 소리 뒤에 등장한 것은 새로운 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에 관한 선언입니다.
앞에서는 짐승이 증인들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승리는 세상 나라의 마지막 주인이 누구인지를 바꾸지 못합니다.
「세상 나라」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원문에서 「세상 나라」(βασιλεία)의 「나라」는 단수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와 왕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 나라들을 움직이는 세상의 지배 질서가 하나의 전체로 제시되고, 그 통치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다니엘 7:13–14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모든 백성과 민족과 언어가 그를 섬기며, 그의 통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편 2편에서는 세상의 왕들이 여호와야훼와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대적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왕을 세우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구약의 왕권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런데 왜 이후에도 싸움이 계속될까?
세상 나라가 이미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다면, 왜 요한계시록에는 아직 여러 장이 남아 있을까요? 12장과 13장에서도 용과 짐승의 활동이 등장하고, 뒤이어 심판과 전쟁의 환상이 계속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환상을 단순히 시간 순서대로 배열하지 않았다는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승리가 이미 이루어진 사건처럼 선포되고, 이어지는 환상들은 그 승리와 관련된 대립과 심판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요한이 환상을 무작위로 배열한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의 진행은 하나의 곧은 시간표보다,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이 여러 환상 속에서 반복되고 깊어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선언을 듣자 하늘의 장로들이 엎드립니다.
하나님은 이전에도 왕이셨는데, 왜 이제 다스리기 시작하셨을까?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왕좌에 앉아 있던 스물네 장로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요한계시록 11:16 · 두루새김
장로들은 왕좌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보다 높은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지 않고 엎드리는 모습은 그들의 권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장로들이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 하나님,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큰 능력을 발휘하여 왕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11:17 · 두루새김
첫째는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입니다. 1:4와 4:8에서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오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11:17에는 「오시는 분」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곧바로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셨다는 찬양이 이어지기 때문에, 이 생략을 하나님이 오실 것을 기다리던 단계에서 그분의 통치가 나타나는 단계로 환상의 초점이 옮겨간 표시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환상에는 여전히 앞으로 있을 심판과 완성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모든 일이 이미 완전히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둘째는 「왕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시편 93:1과 103:19는 하나님이 이미 영원한 왕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 말은 그 이전에는 통치하지 않으셨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왕이셨지만, 세상은 그분의 통치를 거부해 왔습니다. 짐승이 하나님의 증인들을 죽이고, 우상숭배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왕권이 그 모든 반역을 끝내고 분명히 드러나는 순간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왕이 되기 위해 새롭게 힘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신 왕권을 온 세상 앞에 드러내십니다.
아무리 강력한 제국과 짐승의 권세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왕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셨기」라는 번역에는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원문의 에바실류사스는 「다스렸다」라는 뜻의 부정과거형으로, 문맥상 하나님이 왕의 권한을 결정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동사 형태 자체가 언제나 시작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 능력을 발휘하여」라고 풀어 옮긴 자리의 원문은 능력을 취하셨다는 뜻의 완료형으로, 하나님이 큰 능력을 취하신 상태를 강조하며 뒤의 통치 선언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엇을 바로잡는가?
장로들의 찬양은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멈추지 않고, 그 통치가 무엇을 가져오는지 설명합니다.
「민족들이 분노했고, 주님의 진노가 닥쳤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심판받을 때가 왔습니다. 주님의 종인 예언자들과 성도들, 주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낮은 사람이든 높은 사람이든 상을 주실 때가 왔습니다. 또 땅을 망가뜨리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가 왔습니다.」요한계시록 11:18 · 두루새김
민족들의 분노와 하나님의 진노가 맞서고, 죽은 사람들이 심판받으며,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이 상을 받고, 땅을 망가뜨린 자들이 심판받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누가 더 강한지를 보여 주는 권력의 과시가 아니라, 세상에서 왜곡된 정의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민족들의 분노와 하나님의 진노
그리스어에서도 분노를 뜻하는 같은 어근이 두 번 쓰입니다. 세상 민족들은 분노하고, 하나님도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두 분노의 성격은 같지 않습니다.
시편 2:1–5에서처럼 민족들과 왕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반역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증인들을 죽이고 그 죽음을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과 똑같이 화를 내시는 모습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냅니다.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이 함께 언급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모두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동체의 지도자였고, 어떤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신자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증언하다 죽임당했지만, 어떤 사람은 조용히 믿음을 지키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상을 주실 때에는 세상에서의 명성과 지위가 기준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두 증인의 이야기를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합니다. 하나님은 두 증인만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을 기억하십니다.
땅을 망가뜨리는 자들을 멸망시키십니다
두루새김은 「망가뜨리는」과 「멸망시키실」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파괴하다, 망가뜨리다, 부패시키다라는 뜻의 같은 동사 디아프데이로(διαφθείρω)가 반복됩니다. 땅을 망가뜨리는 자들이 결국 자신들이 행한 파괴에 걸맞은 심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독자에게는 환경 파괴가 먼저 떠오를 수 있고, 실제로 창조 세계를 파괴하는 행위와 연결하여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세상을 망가뜨리는 일은 폭력과 우상숭배, 성도들에 대한 박해와도 연결됩니다. 19:2에서는 바벨론이 땅을 음행으로 타락시켰다고 묘사됩니다. 그래서 이 파괴를 인간 사회와 창조 세계를 부패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악한 권세의 활동까지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범위에는 해석 차이가 있습니다.
짐승은 증인들을 죽였고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축하했지만, 하나님은 증인들을 일으키셨고 이제 땅을 망가뜨리는 자들을 심판하실 때가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상을 주시며, 동시에 다른 사람과 세상을 파괴한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악을 바로잡지 않는 구원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는 심판도 아닙니다.
하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습니다. 번개가 치고 여러 소리와 천둥이 울렸으며,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쏟아졌습니다.요한계시록 11:19 · 두루새김
11장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성전으로 돌아옵니다.
1절에서 요한은 성전을 재라는 명령을 받았고, 성전의 바깥뜰은 다른 민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제 마지막에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입니다.
왜 언약궤가 등장할까?
출애굽기 25:10–22에서 하나님은 언약궤를 만들도록 명령하시고, 그 위의 속죄소에서 모세를 만나 말씀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지성소에 놓인 언약궤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과 그분의 언약을 상징하는 중심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요한은 땅에 있던 언약궤가 어디에 숨겨져 있었는지에 관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그는 하늘 성전의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언약궤가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재어 구별하셨고, 두 증인에게 권한을 주셨고, 죽임당한 그들을 생명의 숨으로 일으키셨습니다. 그 모든 일의 뒤에는 자신의 언약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왜 마지막에 다시 천둥과 지진이 일어날까?
이 현상들은 앞선 장들에서도 하나님의 왕좌와 심판에 연결되어 등장했고, 하나님이 자신이 계신다는 사실과 능력을 드러내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현상들 앞에 먼저 하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였습니다. 심판을 나타내는 장엄한 소리와 함께, 언약을 나타내는 거룩한 물건이 드러납니다.
심판의 하나님은 동시에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4:5에서는 왕좌에서 번개와 소리와 천둥이 나왔고, 8:5에서는 제단의 불이 땅에 던져졌을 때 천둥과 소리와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11:19에서는 거기에 큰 우박까지 더해집니다. 시나이산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나타나실 때 천둥과 번개가 일어났습니다(출애굽기 19:16–19).
죽임당하신 어린양의 승리가 증인들의 이야기에 새겨져 있습니다
두 증인의 죽음이 어린양의 길과 겹친다는 것이 이 장을 하나로 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적들에게 죽임당하셨고, 그 죽음은 당시의 눈으로 보면 완전한 패배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일으키셨고, 요한계시록은 그분을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으로 보여 줍니다. 두 증인도 죽임을 당하고, 원수들은 그 죽음을 축하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일으키십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승리를 반복하여 이루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어린양이 이루신 승리에 참여하는 증인들입니다. 그들의 고난이 세상을 구원하는 새로운 속죄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삶과 죽음은 자신들이 누구를 따르는 사람인지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더 강한 군대가 이기는 나라가 아닙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왕이신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패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패배는 마지막 판결이 아닙니다. 본문은 두 증인이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고, 증언을 마쳤다고 말합니다. 물론 고난을 받기만 하면 언제나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반대받을 수도 있습니다. 두 증인의 이야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끝까지 수행했다는 사실이며, 이 장이 전하는 소망은 인간의 용기가 아니라 그분의 백성을 끝까지 기억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땅에서는 거룩한 도시가 짓밟혔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렸습니다. 땅에서는 증인들의 시신이 거리에 버려졌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드러났습니다. 열려 있는 하늘 성전에서 번개가 치고 여러 소리와 천둥이 울리며,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쏟아집니다. 그 모든 장엄한 소리 가운데, 요한이 마지막으로 보여 준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