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21–22장 · 새 하늘과 새 땅

생명의 강과 신부의 대답

요한계시록은 생명나무로 끝날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이 잃어버린 생명나무가 다시 나타나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저주도 밤도 사라지고, 하나님의 종들은 그분의 얼굴을 봅니다. 성경의 첫머리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듯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완성된 도성을 보여 준 다음, 책은 갑자기 그 도성을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예언을 지키라고 하고, 하나님에게만 예배하라고 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과 의를 행하는 사람을 나란히 세웁니다. 그리고 마침내 「목마른 이는 오십시오」라고 부릅니다.

요한은 완성된 세계를 보여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마치지 않습니다. 그 세계를 바라본 독자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누구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묻습니다.

미래의 완성을 보여 주던 계시가 현재의 독자를 부르는 초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 초대의 중심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린양이 계십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1022장 본문 읽기 →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강 —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요한계시록 22:1–2 본문 →

그리고 그가 나에게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의 물의 강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와요한계시록 22:1 · 본디새김

요한이 마지막으로 보는 도성의 풍경은 생명의 강입니다. 이 장면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구약 본문은 에스겔 47장입니다.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환상을 봅니다. 처음에는 발목에 닿던 물이 점점 깊어지고, 마침내 건널 수 없는 강이 됩니다. 그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고, 강 양쪽에는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자랍니다. 그 열매는 먹을거리가 되고 잎은 치유에 쓰입니다(에스겔 47:1–12). 포로와 황폐함의 경험을 지나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다시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약속입니다.

요한은 이 환상의 핵심 이미지를 거의 그대로 가져오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변화를 줍니다.

에스겔의 강은 성전에서 흘러나오지만, 요한의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옵니다.

앞 장에서 요한은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21:22). 에스겔의 환상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장소였지만, 요한의 환상에서는 그 생명의 근원이 직접 드러납니다. 그리고 본문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를 각각 따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보좌에서 강이 흘러나옵니다.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어린양은 죽임을 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5:6).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권력들이 역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지막 환상에서 드러나는 생명의 근원은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함께하시는 보좌입니다.

힘으로 생명을 빼앗던 권세들은 사라지고, 자신을 내어주신 어린양의 보좌에서는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이 차이가 요한계시록의 권력 이해를 뒤집습니다.

강 양쪽에 있는 생명나무

그 도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그리고 강 이쪽과 저쪽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열매를 맺었고, 달마다 자기 열매를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잎은 민족들을 낫게 하는 데 쓰입니다.요한계시록 22:2 · 본디새김

창세기 2:9에서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뒤에는 그 나무에 이르는 길이 막혔습니다(창세기 3:22–24). 나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나무에 접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요한의 환상에서는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할 뿐 아니라, 도성의 강 양쪽에 자리합니다.

열매는 달마다 나옵니다. 에스겔 47:12에서도 나무는 달마다 새 열매를 맺는데, 요한의 환상은 그 이미지에 생명나무를 결합합니다. 이 장면은 생명의 공급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는 이미 죽음과 슬픔과 고통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21:4). 왜 완성된 새 창조에서 민족들에게 치유가 필요할까요? 이것을 완성된 도성에도 질병이 남아 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은 에스겔의 치유하는 나무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어떤 세계를 이루는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이 치유의 구체적인 방식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새 창조에서 민족들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앞 장에서 민족들은 도성의 빛 가운데 걸었고 왕들은 자기 영광을 그 도성으로 가져왔습니다(21:24–26). 이제 그 민족들은 생명나무의 치유를 받는 이들로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민족들은 짐승의 권세에 속아 넘어가기도 했고(13:7–8; 18:23), 바벨론의 사치와 착취에 연루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은 모든 지파와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속량하셨습니다(5:9). 하나님의 구원은 민족들을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에게 생명을 베푸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본문에서 「생명나무」(크쉴론 조에스)는 단수형인데, 그 나무가 강 양쪽에 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의 나무가 강 양편에 걸쳐 있는 모습일 수도 있고, 에스겔 47:7처럼 같은 종류의 나무들이 강 양편에 늘어서 있는 모습을 집합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는 어렵고, 환상이 강조하는 것은 나무의 정확한 배치보다 생명이 풍성하게 공급된다는 사실입니다. 열둘이라는 수는 이 도성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을 떠올리게 하지만, 본문이 직접 설명하는 특징은 달마다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말하는지, 열두 달에 걸친 결실을 말하는지는 구분해야 하며, 계절이나 달이 실제로 어떻게 흐르는지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 — 저주가 사라진 자리

요한계시록 22:3–5 본문 →

생명의 강과 나무를 보여 준 뒤, 요한의 시선은 다시 보좌로 향합니다.

그리고 저주받은 것은 더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도성 안에 있을 것이고, 그의 노예들이 그를 예배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2:3 · 본디새김

저주받은 것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지 어떤 부정적인 상태가 제거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사람들이 그분을 섬긴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불순종은 땅에 대한 저주와 고통스러운 노동, 죽음, 그리고 에덴에서의 추방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됩니다.

요한의 환상에서는 그 순서가 뒤집힙니다.

생명나무가 있고, 저주가 없으며,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습니다. 스가랴 14:11도 회복될 예루살렘에 더 이상 파멸이나 저주가 없고 사람들이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가랴의 본래 문맥에서 이는 전쟁과 재앙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정되게 살아갈 것이라는 소망인데, 요한은 이 언어를 새 예루살렘의 완성된 모습에 적용합니다.

그런데 저주가 사라진 결과로 요한이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편안한 생활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여기서 「예배한다」는 단지 종교의식을 행한다는 의미로 한정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을 나타냅니다.

짐승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짐승의 형상에 절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13:14–15). 살아남고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서도 짐승의 표가 필요했습니다(13:16–17).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그분을 섬깁니다. 짐승의 권세는 예배를 강요하고 생명을 위협하지만, 하나님과 어린양의 통치는 생명의 강이 흘러나오는 통치입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백성을 계속 「노예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문맥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 폭력적인 지배자에게 예속된 사람들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의 얼굴을 볼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그의 얼굴을 볼 것이고, 그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2:4 · 본디새김

출애굽기 33:20에서 여호와야훼는 모세에게 사람이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특별히 가까운 관계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아무 제한 없이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그분의 얼굴을 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하는 일이 더 이상 가로막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열렸듯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는 일도 가능해진 것입니다.

3절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말하지만, 이어지는 종들의 섬김과 얼굴과 이름은 단수 대명사로 표현됩니다. 이것만으로 하나님과 어린양의 관계에 관한 모든 신학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요한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서로 분리된 두 통치의 중심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마에 있는 이름은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인장을 받았고(7:3), 어린양과 함께 선 사람들의 이마에는 어린양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14:1). 짐승의 표를 가진 사람들은 짐승의 권세 아래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예배하는 노예들이 다스립니다

그리고 밤이 더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등불 빛도 햇빛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 하나님이 그들을 비추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2:5 · 본디새김

방금 전까지 하나님의 「노예들」이었던 사람들이 이제 다스리는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요한은 그들이 하나님과 경쟁하는 왕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바로 그분의 통치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창세기 1:26–28에서 인간에게 맡겨진 다스림의 소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소명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통치 아래서 완성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요한은 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다스림의 방식보다 그 주체의 변화입니다.

짐승에게 굴복하지 않고 어린양에게 속한 사람들이 마침내 다스림에 참여합니다.

그들을 비추는 빛 역시 하나님 자신에게서 옵니다. 등불과 햇빛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그 어떤 외부 조명도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하거나 보충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중심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부터 환상의 시선이 달라집니다.

환상에서 두루마리로 — 이제 이 말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요한계시록 22:6–9 본문 →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이 말들은 믿음직하고 참되오. 예언자들의 영들의 하나님이신 주가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자기 노예들에게 보이려고 자기 천사를 보내셨소.」요한계시록 22:6 · 본디새김

이제 천사는 요한이 본 장면을 더 설명하는 대신, 그가 들은 말씀 자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 1:1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자기 종들에게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시고, 천사를 보내 요한에게 알리셨다고 소개했습니다. 22:6은 거의 같은 내용을 다시 말합니다. 마지막 장은 이 환상이 누구에게서 왔고, 누구에게 전달되며,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를 다시 확인합니다.

「예언자들의 영들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예언자들에게 예언하도록 영을 주시는 하나님을 뜻할 수도 있고, 예언자들의 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요한이 본 환상은 그의 개인적인 상상력이나 독립적인 영적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보아라, 나는 곧 온다.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한계시록 22:7 · 본디새김

앞 절에서 천사는 주님을 3인칭으로 말했지만, 여기서는 아무런 설명 없이 「나는 곧 온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뒤의 12절과 20절에서 같은 약속이 반복되고, 1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직접 밝히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명시적인 전환 표지가 없으므로, 천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으로 읽을 여지도 남습니다.

천사, 예수님, 요한, 영과 신부의 목소리가 이어지며 하나의 증언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독자에게 직접 주어진 요청은 「예언의 말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첫 번째 복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에게 선언되었습니다(1:3).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미래에 관한 정보를 정확히 기억하거나 사건의 순서를 해독한다는 뜻으로 좁힐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에는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어린양을 따르며, 고난 가운데 인내하고, 거짓된 권세에 굴복하지 말라는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그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예언이 드러내는 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사에게 절하려는 요한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요한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합니다.

나 요한은 이것들을 듣고 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가 듣고 보았을 때, 나는 내게 이것들을 보여 주는 천사에게 절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요한계시록 22:8 · 본디새김
그러자 그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지 마시오. 나는 그대와, 예언자인 그대의 형제들과,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이들의 동료 노예요. 하나님에게 절하시오.」요한계시록 22:9 · 본디새김

이 장면은 19:10에서도 이미 나타났습니다. 마지막에 다시 나오는 이 장면은 예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경계를 설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존재와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다릅니다.

천사는 자신을 요한과 예언자들과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의 「동료 노예」라고 부릅니다. 하늘의 천사와 땅의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같은 종의 자리에 섭니다. 이 책이 수많은 천사와 놀라운 환상으로 가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환상이 아무리 경이로워도 그 환상을 보여 주는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이 원칙은 환상을 해석하는 독자에게도 적용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목적은 상징과 비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가리키는 하나님과 어린양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봉하지 말라는 명령 — 가까운 때가 요구하는 결단

요한계시록 22:10–13 본문 →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을 인장으로 봉하지 마시오.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오.」요한계시록 22:10 · 본디새김

다니엘 12:4에서 다니엘은 마지막 때까지 말씀을 간직하고 두루마리를 봉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12:9에서도 그 말씀들이 마지막 때까지 봉해져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의 본래 문맥에서 봉인은 장차 일어날 일에 관한 계시를 보존하고, 그 의미가 드러날 때를 기다리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런데 요한에게는 반대의 명령이 내려집니다.

요한이 전하는 예언은 먼 훗날 누군가가 발견할 비밀로 감추어 둘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교회들이 듣고 응답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처음 요한계시록을 받아 읽었던 교회들에도 주어졌으므로, 오직 훗날의 특정 세대에게만 해당하는 암호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곧」이라는 말이 어떤 연대기적 간격을 설정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가까움을 초기 교회 시대에 시작되는 하나님의 역사와 연결하는 읽기도 있고, 예수님의 결정적인 개입이 언제든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긴박성과 연결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시간을 계산할 수 있는 날짜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요한이 이 표현으로 예언을 미루어 둘 수 없는 말씀으로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계속 악을 행하십시오?

그런데 11절은 몹시 낯설게 들립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이는 계속 불의를 저지를지어다. 그리고 더러운 이는 계속 더러워질지어다. 그리고 의로운 이는 계속 의를 행할지어다. 그리고 거룩한 이는 계속 거룩해질지어다.」요한계시록 22:11 · 본디새김

그리스어의 네 동사는 모두 3인칭 명령형입니다. 그러나 명령형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떤 행동을 도덕적으로 권장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허용, 선언적인 요청, 반어적인 말투 등은 문맥을 통해 구별해야 합니다.

첫째 읽기는 심판이 가까워진 상황에서 사람들의 상태가 굳어진다는 엄중한 선언입니다. 다니엘 12:10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만 악한 사람들은 계속 악을 행한다는 대조가 등장합니다. 둘째 읽기는 「그렇게 계속하려면 해 보아라. 그러나 그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반어적인 허용 또는 경고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단의 긴박성을 드러낸다는 해석입니다.

두 읽기는 서로 배타적일 필요는 없지만, 본문이 어느 하나만을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어지는 17절에 목마른 사람을 향한 초대가 있으므로, 11절 하나만으로 회개의 가능성이 이미 모든 사람에게 닫혔다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불의와 더러움이 한편에 있고, 의와 거룩함이 다른 편에 있습니다. 요한은 중간에 서 있는 제3의 상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사람은 자신이 어느 쪽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지 외면할 수 없습니다.

「보아라, 나는 곧 온다. 그리고 내가 줄 삯이 나와 함께 있으니, 저마다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는 것이다.」요한계시록 22:1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40:10과 62:11에서 여호와야훼의 오심과 그분에게 속한 보상이 함께 언급되는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오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알파이고 오메가, 처음이며 마지막, 시작이고 끝이다.」요한계시록 22:13 · 본디새김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처음 글자와 마지막 글자입니다. 같은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반복하는 이 말은 단순히 오래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아니라, 역사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선언입니다.

요한계시록 1:8과 21:6에서 하나님께 사용된 칭호가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다만 12–13절의 발화 구분에 명시적인 표지가 없기 때문에, 이 칭호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읽는 견해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시거나 하나님의 발화가 이어진 것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오심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통치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처음과 끝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위가 어린양의 오심과 연결됩니다.

씻은 겉옷과 열린 문 — 누가 도성에 들어가는가

요한계시록 22:14–15 본문 →

14절은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복의 선언입니다.

자기 겉옷을 빠는 이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생명나무에 대한 권한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문으로 그 도성에 들어갈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2:14 · 본디새김

창세기에서 인간은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룹들과 불타는 칼이 그 길을 지켰습니다(창세기 3:24). 그런데 여기서는 생명나무에 대한 권한이 주어지고, 사람들이 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갑니다.

차단되었던 접근이 허락된 것입니다.

그 권한을 받는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빠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 7:14에서 큰 환난에서 나온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어린양의 피에 빨아 희게 한 사람들입니다. 일반적으로 피는 옷을 더럽히지만, 어린양의 피는 옷을 깨끗하게 합니다. 어린양의 죽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정결하게 하는 근거라는 뜻입니다.

22:14에서는 그 피가 다시 명시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겉옷을 빠는 이미지가 앞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기억한다면, 생명나무에 대한 권한은 어린양의 구원과 깊이 연결됩니다. 다만 사본에 따라 이 자리가 「그의 계명을 행하는 이들」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12절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겠다고 말하는데, 14절은 어린양의 피로 정결하게 된 사람들을 연상시키고, 17절은 생명의 물을 거저 받으라고 초대합니다. 이것을 행위와 은혜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람들의 행위는 그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어린양의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이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이고, 예수님에 대한 충성은 삶에서 나타납니다.

다만 본문이 이 둘의 관계를 체계적인 구원론의 공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정결함, 충성, 생명에 대한 접근을 하나의 환상 안에 나란히 배치합니다.

열린 도성 밖에 있는 사람들

이어지는 15절은 분위기를 다시 바꿉니다.

밖에는 개들과 주술을 부리는 이들과 음행하는 이들과 살인하는 이들과 우상을 섬기는 이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모든 이가 있습니다.요한계시록 22:15 · 본디새김

앞 장에서 도성의 문들은 닫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21:25). 문이 열려 있는데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새 예루살렘 바깥에 악인들이 정착하여 살아가는 별도의 사회가 있다는 지리적 설명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바로 앞에서 저주와 밤이 사라진 세계를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밖」은 도성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표현으로 기능합니다.

이 목록은 21:8, 21:27의 죄악 목록과 이어집니다. 끝에 놓인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모든 이」는 사소한 언어적 잘못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짓 예언과 속임수는 사람들이 짐승과 우상을 따르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13:14; 19:20). 거짓을 사랑하는 일은 진실보다 거짓된 권세의 세계를 선택하는 삶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도성의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악과 우상숭배가 아무 구별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거저 주어지지만, 짐승의 거짓에 속한 삶과 어린양께 속한 삶이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에는 실제로 중요한 사본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 널리 사용되는 비평본문은 「호이 플뤼논테스 타스 스톨라스 아우톤」(자기 겉옷을 빠는 이들)을 채택하고, 다른 사본 전통에는 「그의 계명을 행하는 이들」이라는 읽기가 있습니다. 두 표현은 그리스어의 소리와 글자 배열이 상당히 비슷하여 필사 과정에서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느 표현이 원래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외적 사본 증거뿐 아니라 요한계시록 내부의 문학적 연결을 두고도 논의가 있고, 계명을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읽기가 원문일 가능성을 옹호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겉옷을 빠는 사람들은 7:14의 어린양의 피와 연결되고, 계명을 행하는 사람들은 12:17과 14:12에서 강조된 성도들의 충성과 연결됩니다. 두 주제 모두 요한계시록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이것이 원문 여부를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본디새김이 채택한 「자기 겉옷을 빠는 이들」을 따르면, 이 마지막 복 선언은 어린양의 피로 정결하게 된 사람들에게 생명나무의 길이 열리는 장면으로 읽힙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새벽 별 — 이 환상을 누가 증언하는가

요한계시록 22:16 본문 →

이제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이름을 밝히십니다.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을 위하여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했다. 나는 다윗의 뿌리이자 자손이고, 빛나는 새벽 별이다.」요한계시록 22:16 · 본디새김

책의 처음에 등장했던 계시의 전달 경로가 다시 확인됩니다. 환상 속에서 죽임당하신 어린양으로, 왕들의 왕으로, 보좌의 영광 가운데 나타나셨던 분이 이제 주님이나 어린양이라는 칭호가 아니라 「나 예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이미지는 다윗의 뿌리이자 자손입니다. 이사야는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한 싹이 나고, 그의 뿌리에서 가지가 나올 것이라고 말합니다(이사야 11:1). 이어 이새의 뿌리가 민족들을 위한 깃발로 설 것이라고 합니다(11:10). 이사야의 본래 문맥에서 이 예언은 불의한 통치와 심판의 현실 속에서 다윗 왕조에 새로운 의로운 통치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5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뿌리」로 소개되십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승리한 사자를 기대하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죽임당하신 어린양입니다.

뿌리는 어떤 존재의 근원이고 자손은 그 계보에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여기서 뿌리라는 말을 다윗의 근원이라는 강한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이사야의 이미지와 연결하여 다윗 왕조의 뿌리에서 나오는 메시아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요한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오래된 왕적 약속과 연결하고, 그 약속은 어린양이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되는 것으로 선포됩니다.

둘째는 「빛나는 새벽 별」입니다. 민수기 24:17에서 발람의 신탁은 야곱에게서 나오는 별과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는 통치자의 홀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왕적 별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데, 이것은 직접 인용이라기보다 왕의 별이라는 성경적 이미지의 발전으로 보는 편이 적절합니다.

새벽 별은 밤이 끝나고 아침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리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방금 전 요한은 밤이 더는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22:5). 그런데 그 완성된 빛의 세계를 설명한 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새벽 별이라고 부르십니다.

새벽 별은 아직 밤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이미 떠오른 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이 가까이 왔다는 표지를 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처음 읽는 교회들은 아직 모든 슬픔이 사라진 세계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압박과 유혹 속에서 살아갑니다.

완성된 빛을 아직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빛의 도래를 알리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오소서」와 「오십시오」 — 기다림이 초대가 되는 순간

요한계시록 22:17 본문 →

그리고 영과 신부가 말합니다. 「오소서.」 그리고 듣는 사람도 말하십시오. 「오소서.」 그리고 목마른 이는 오십시오. 바라는 이는 생명의 물을 거저 받으십시오.요한계시록 22:17 · 본디새김

짧은 구절 안에 「오다」라는 말이 거듭 나타나지만, 누가 누구에게 오라고 말하는지가 달라집니다.

먼저 영과 신부가 「오소서」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곧 온다」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것은 예수님을 향한 응답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20절에서 「오소서, 주 예수여」라고 다시 말하는 것도 이러한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요한계시록 21:9에서 천사는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를 보여 주겠다고 말한 뒤 새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완성된 도성의 환상에서 신부로 나타났던 하나님의 백성이, 이 책을 듣는 현재의 자리에서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공동체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신부에게서 멈추지 않습니다. 1:3에서는 예언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에게 복이 선언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공동체에서 읽히고 들리는 말씀으로 제시됩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듣는 사람은 더 이상 단순한 청중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도 말해야 합니다.

초대의 방향이 바뀝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께 오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목마른 사람에게 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하던 부름이 사람을 향한 초대로 바뀝니다.

첫 번째 「오소서」를 예수님의 오심을 바라는 기도로 읽고, 뒤의 「오십시오」를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진 초대로 읽는 해석은 문맥상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17절 앞부분의 「오소서」까지 모두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초대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누가 직접 말하는지도 예수님의 발화가 계속되는지, 요한의 서술로 돌아오는지에 따라 달리 이해됩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에서도 마지막 초대의 개방성은 분명합니다.

「거저」는 값을 지불하지 않고 무상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55:1의 초대와 깊이 연결됩니다. 이사야는 목마른 사람들을 물로 초대하고, 돈 없는 사람들도 와서 먹고 마시라고 부릅니다. 포로 생활과 상실을 경험한 백성이 자신들의 자원으로 구원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언약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습니다.

1절에서 생명의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왔습니다. 17절에서는 그 생명의 물을 거저 받으라고 합니다.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은 거래의 대상이 아닙니다. 선물입니다.

바벨론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거래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8:11–13에서는 상인들이 거래하는 사치품들 가운데 사람의 몸과 목숨까지 등장합니다. 이 대조는 같은 문장에 놓여 있지는 않지만, 요한계시록 전체를 함께 읽을 때 선명해집니다. 짐승과 바벨론의 질서는 사람의 생명까지 경제적 이익과 권력의 수단으로 삼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는 생명이 값없이 흘러나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그 생명을 자동으로 소유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목마른 이」와 「바라는 이」를 부릅니다. 초대의 넓이와 함께 그 초대에 응답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가장 먼저 강조되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거저 주시는가입니다.

더하거나 빼지 말라 — 예언을 소유하지 말라는 경고

요한계시록 22:18–19 본문 →

생명의 물을 거저 받으라는 초대 다음에는 매우 엄중한 경고가 이어집니다.

나는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이 말에 무엇을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적힌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2:18 · 본디새김
그리고 누구든지 이 예언의 두루마리에 담긴 말에서 무엇을 빼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적힌 생명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그의 몫을 빼실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2:19 · 본디새김

이 경고는 신명기 4:2와 12:32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야훼의 명령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경고의 대상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을 듣는 모든 이」입니다. 이것은 단지 필사자들이 글자를 잘못 옮기지 않도록 주어진 기술적인 지침만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그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는 자신에게 불편한 말씀은 빼고,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해석은 더하는 일일 것입니다. 심판은 빼고 승리만 남길 수도 있습니다. 어린양의 고난은 빼고 영광만 남길 수도 있습니다. 또는 어린양의 승리를 자신이 원하는 폭력과 지배의 언어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18–19절에 열거된 것은 아니지만, 예언의 증언을 왜곡하지 말라는 경고의 취지와 연결되는 적용입니다.

더하는 사람에게는 재앙이 더해지고, 빼는 사람에게는 생명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의 몫이 빼앗깁니다. 앞서 하나님의 선물로 묘사된 생명의 물과 생명나무, 그 약속을 담은 예언을 함부로 다루는 일이 경고의 대상이 됩니다.

이 구절을 오늘날 성경 전체의 정경 목록을 변경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역사적 문맥을 넘어섭니다. 요한이 직접 가리키는 것은 「이 두루마리」, 곧 자신의 예언서입니다. 후대에 요한계시록이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 경고가 성경 전체와 연결되어 읽히게 된 것은 별도의 정경적 적용입니다.

18절의 「나는」을 요한 자신의 증언으로 볼지, 앞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발화가 계속되는 것으로 볼지 역시 해석이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이 경고가 예언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일을 엄중하게 다룬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 책은 독자에게 환상을 마음대로 재구성할 권한을 주지 않습니다. 독자는 자기 시대의 사건이나 인물을 상징에 억지로 대응시켜 예언을 자신의 설명 체계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심판과 경고를 불편하다는 이유로 지워 버려서도 안 됩니다.

예언을 지킨다는 것은 그 말씀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마지막 응답 — 「오소서, 주 예수여」

요한계시록 22:20–21 본문 →

이것들을 증언하시는 분이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나는 곧 온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요한계시록 22:20 · 본디새김

이 장에서 「나는 곧 온다」는 약속은 세 번 들립니다(7절, 12절, 20절). 처음에는 예언을 지키는 사람에게 복을 선언하면서, 두 번째에는 각 사람의 행위에 따른 보상과 심판을 알리면서 나왔습니다. 세 번째에는 다른 설명이 거의 붙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약속입니다.

「아멘」은 앞선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확증하는 응답입니다. 요한은 수많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하늘의 예배를 보았고, 인장과 나팔과 대접의 심판을 보았습니다. 짐승과 바벨론의 권세를 보았고, 어린양의 승리와 새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가 하는 말은 이 모든 환상의 상세한 해설이 아닙니다.

하나의 기도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독자가 모든 미래 사건의 순서를 파악했는지를 마지막에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책을 듣고 난 사람이 누구의 오심을 기다리는지를 드러내는 자리로 이끕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악의 심판을 뜻하기도 하고, 고난받는 백성의 구원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불의한 권세가 끝나는 사건이면서, 어린양에게 속한 사람들이 마침내 그 얼굴을 보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와 생명을 함께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말은 은혜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요한계시록 22:21 · 본디새김

하늘에서 큰 소리가 들리지도 않고, 천사들이 새로운 장면을 보여 주지도 않습니다. 한 공동체를 향한 은혜의 인사가 있을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늘의 보좌를 보여 준 뒤, 그 말씀을 듣고 있는 땅의 성도들에게 돌아옵니다. 그들은 아직 새 예루살렘의 강가에 서 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이 살아가는 도시에서 일하고, 관계를 맺고, 예배하며, 여러 압력과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더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이 책의 시작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신 분으로 소개되셨습니다(1:5). 요한계시록은 사람의 힘으로 완성된 세계를 만들어 내라는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이루실 새 창조를 보여 주고,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갈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은혜를 빕니다.

강을 보여 준 책이 목마른 사람을 부릅니다

요한계시록 22:1–21 본문 →

강을 보여 준 책은 마지막에 목마른 사람을 부릅니다. 영과 신부는 예수님께 「오소서」라고 말하고, 동시에 목마른 사람에게는 「오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기다림과 초대가 같은 자리에서 만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을 닫아 버리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기다리는 공동체는 목마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물을 거저 받으라고 초대합니다. 첫 장면에서 요한은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강을 보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 강의 물을 마시도록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 사이에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생명의 근원이시며, 교회가 기다리는 분이시며, 그 기다림 속에서 교회를 은혜로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환상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은 닫힌 문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도성의 강은 여전히 흐르고, 생명나무는 열매를 내며, 그 물은 값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영과 신부가 「오소서」라고 말하고, 목마른 사람에게도 같은 부름이 들립니다.

이 두 부름 사이에서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기도를 남깁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