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21–22장 · 새 하늘과 새 땅
성전이 없는 도성,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요한은 놀라운 도성을 봅니다.
그 도성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성벽은 벽옥으로 쌓여 있고, 문은 거대한 진주로 되어 있으며, 거리에는 맑은 유리 같은 순금이 깔려 있습니다. 도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는 모두 같습니다. 열두 문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열두 주춧돌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가장 놀라운 발견은 도성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요한은 도성 안을 살펴보다가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성전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룩한 도성에 성전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루살렘의 특별한 의미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라는 사실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고, 성전은 그 임재를 나타내는 중심적인 장소였습니다.
그 이유는 22절에서 곧바로 밝혀집니다. 「전능한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파괴되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장소가 사라져서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친히 성전이시기 때문에 별도의 성전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붙잡으면 21장의 여러 장면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장막을 치시고, 눈물을 씻어 주시며, 죽음과 슬픔과 아픔이 사라집니다. 도성 전체가 지성소를 떠올리게 하는 모양을 갖추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그곳을 비춥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소망은 단지 고통이 없는 안전한 장소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현실입니다.
이 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전개됩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세계와 그 안에 거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선포됩니다. 9–27절에서는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의 실제 모습이 펼쳐지고, 마침내 그곳에 성전도 별도의 빛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뒤에서는 그 약속이 이루어진 도성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독자는 도성의 겉모습에서 시작하여 점차 그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그 중심에 계신 분은 건물이나 보석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이십니다.
「바다도 더는 없다」 — 새 창조에서 사라지는 것
그리고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하늘과 첫 땅이 떠나갔고 바다도 더는 없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21:1 · 본디새김
이 장의 첫 문장은 이사야 65:1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선언하시고, 그 약속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기쁨, 장수와 평안, 인간과 창조 세계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소망으로 이어집니다(이사야 65:18–25). 이 약속은 처음부터 단지 영혼이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그 안에 살아가는 백성의 삶이 새로워지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이사야의 약속을 가져와 한층 더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 줍니다. 첫 하늘과 첫 땅이 떠나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납니다.
「새롭다」는 것은 무엇이 달라진다는 뜻인가?
여기서 「새」(καινός)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단지 시간적으로 최근에 생겼다는 뜻뿐 아니라 성격과 상태가 새롭다는 의미도 가집니다. 그렇다고 이 단어만으로 이전 세계가 완전히 소멸하고 전혀 다른 물질로 창조되었다거나, 반대로 물질적으로 그대로 보존되면서 상태만 바뀌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에는 두 가지 주요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첫 하늘과 첫 땅이 떠나갔다는 표현에 무게를 두어, 이전 창조 질서가 사라지고 새로운 창조가 나타난다고 읽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사야의 새 창조 약속과 신약의 피조물 회복에 관한 말씀을 함께 고려하여, 하나님이 기존의 창조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로마서 8:19–23).
본문은 이 변화가 어떤 물리적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요한이 보는 세계는 지금의 세계에서 고통스러운 요소 몇 가지만 줄어든 곳이 아니라, 죽음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며 이전의 질서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새 창조의 첫 문장에서 요한은 유독 한 가지를 따로 언급합니다. 왜 바다일까요?
바다는 왜 사라지는가?
문자적으로 읽으면 새 창조에는 더 이상 바다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바다가 더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바다가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13:1에서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왔습니다. 17:1의 큰 창녀는 많은 물 위에 앉아 있었고, 17:15에서 그 물은 여러 백성과 민족으로 풀이됩니다. 20:13에서는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고대 성경의 환상과 시에서 바다는 혼돈과 위협을 나타내는 이미지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다니엘 7:2–3에서는 큰 바다가 흔들릴 때 네 짐승이 올라오고, 시편 74:13–14에서는 하나님이 바다의 괴물들을 제압하십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모든 바다가 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10에서 하나님은 바다를 이름 붙이시고,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좋게 보셨습니다.
따라서 21:1의 바다가 문자적으로 사라지는 것인지, 바다가 상징하던 혼돈과 위협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뜻인지 해석이 갈립니다. 둘을 하나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요한계시록 안에서 독자가 경험했던 바다의 위협적인 역할이 이제 끝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짐승이 올라오던 바다, 죽은 이들을 붙잡고 있던 바다가 더 이상 없습니다.
바다의 소멸을 해양 생물이 없는 미래 세계라는 상상으로 좁히면, 요한이 책 전체에서 쌓아 온 이미지의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새 창조에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위협하던 것들이 더 이상 같은 권세를 행사하지 못합니다.
이제 요한의 시선은 새 하늘과 새 땅 전체에서 한 도성으로 옮겨 갑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성
그리고 나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편을 위하여 단장된 신부처럼 준비되어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2 · 본디새김
도성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려옵니다. 그것도 「하나님에게서」 내려옵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의 마지막을 인간이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실제로 보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다는 성경의 오래된 이야기가 마지막에 이런 모습으로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이 성막과 성전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도성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내려옵니다.
왜 도성이 신부인가?
그 도성은 「신부처럼」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부는 화려하게 단장한 사람만이 아니라 혼인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54:5–8과 62:4–5는 하나님과 시온의 관계를 혼인에 비유하며, 특히 62장은 하나님이 시온을 기뻐하시는 모습을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요한은 이 오래된 언약의 이미지를 어린양의 신부에게 적용합니다. 19:7–8에서는 어린양의 아내가 스스로 채비를 갖추었고 깨끗한 아마포를 입는 일이 허락되었다고 했는데, 이제 그 신부가 새 예루살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도성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장소이고, 혼인 관계는 사랑과 신실함, 친밀한 연합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이 두 이미지를 결합하여 어린양과 그분의 백성이 함께하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구원은 외로운 개인이 안전한 장소를 얻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한 백성이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입니다.
이제 그 도성을 향해 보좌에서 큰 소리가 울립니다.
그리고 나는 보좌에서 나는 큰 소리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 그가 그들과 함께 장막을 치실 것이고, 그들은 그의 백성들이 될 것이며,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그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요한계시록 21:3 · 본디새김
「함께」라는 말이 거듭 등장합니다. 이 반복이 21장의 중심적인 약속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십니다.
「장막을 치다」 — 광야에서 시작된 약속
「장막을 치실 것」은 장막을 치거나 거주한다는 뜻으로, 출애굽기 25:8의 성막 명령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이 성소를 만들게 하여 그들 가운데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의 목적은 종교 의식을 수행할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37:26–27에서도 하나님은 회복된 백성과 평화의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 가운데 성소를 두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자신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분열과 포로 생활을 경험한 이스라엘의 회복 소망과 연결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약속을 새 창조의 모습으로 펼칩니다.
「그의 백성들」이라는 복수
그리스어 본문은 「그들은 그의 백성들이 될 것이며」라는 복수형입니다. 에스겔 37:27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 나타났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여러 민족과 언어 가운데서 속량받은 사람들이 어린양께 속하게 되었습니다(5:9). 복수형을 따라 읽으면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획일적인 하나의 집단으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함께 들어오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4절에서 다시 「민족들」이 등장하면서 21장의 처음과 끝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여러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고, 민족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밝혀진 도성의 빛으로 다닙니다. 새 예루살렘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도성이 아니라, 여러 민족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도성입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 계실 때 무엇이 사라지는지가 곧바로 밝혀집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자리에는 「백성」을 단수로 적은 사본과 복수로 적은 사본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 쓰인 복수형(라오이)은 새 창조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신다 — 위로를 넘어서는 새 창조
「그리고 그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더는 없을 것이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아픔도 더는 없을 것이다. 첫 것들이 떠나갔다.」요한계시록 21:4 · 본디새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겠다고 선언하신 뒤,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그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 주기 위해 왕궁이나 군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인간의 눈에 맺힌 눈물이 언급됩니다.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천사에게 시키시는 일도, 백성이 스스로 눈물을 닦으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이사야가 바라보았던 잔치
이 약속은 이사야 25:6–8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야훼께서 모든 민족을 위하여 풍성한 잔치를 베푸시고, 모든 민족을 덮고 있던 가리개를 없애시며, 죽음을 영원히 삼키시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 이 약속은 무자비한 도성의 몰락과 압제받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 민족들을 위한 구원의 잔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그 약속을 새 창조의 중심으로 가져오면서, 죽음만이 아니라 슬픔도 울부짖음도 아픔도 더는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을 참을 만한 정도로 줄여 주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고통의 현실을 만들어 냈던 이전 질서 자체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닦는 것과 죽음을 없애는 것
이 구절에는 두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와 눈물을 씻어 주시는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을 일으키던 현실 자체의 소멸입니다.
눈물만 닦아 주신다면 사람은 다시 울게 될 수도 있습니다. 죽음과 고통이 사라진다는 선언만 있다면 그동안 고통받아 온 사람들이 어떻게 위로받는지 충분히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두 모습을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끝내실 뿐 아니라 고통받았던 사람들을 돌보십니다.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것이 이전의 슬픈 기억까지 모두 사라진다는 뜻인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전의 고통이 더 이상 인간의 삶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친히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새 창조의 소망은 고통을 겪지 않았던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고, 고통을 끝내시고 그 눈물을 친히 씻어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데 있습니다.
이제 보좌에서 직접 말씀이 들립니다.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 새 창조의 주인이 말씀하시다
그리고 보좌에 앉은 이가 말했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그리고 그가 말했습니다. 「써라. 이 말씀들은 믿음직하고 참되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21:5 · 본디새김
요한계시록에서 보좌에 앉은 분은 계속해서 환상의 중심에 계셨지만, 그분이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은 드뭅니다. 이제 새 창조의 장면에서 그분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물건 몇 개나 새로운 종교 제도를 만드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이 표현은 처음의 하늘과 땅이 떠나갔다는 1절과 연결되며, 죽음과 고통, 인간의 공동체와 창조 세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새로움입니다.
그분은 낡은 질서를 조금 보수하는 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왜 기록하라고 명령하시는가?
「믿음직하고 참되다」는 표현은 19:11에서 흰 말을 타신 예수님께 붙었던 「신실하고 참되다」라는 호칭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사실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미래의 신뢰성이 서로 어울립니다.
요한의 독자들에게 새 창조의 환상은 아직 눈앞에서 확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과 짐승의 권력이 행사되는 세계를 알고 있었고, 죽음과 슬픔과 아픔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 약속의 근거는 눈앞의 상황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래서 기록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잠시 들렸다가 사라질 환상의 소리가 아니라, 교회가 읽고 붙들어야 할 약속입니다.
「다 되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다 되었다. 나는 알파이고 오메가이며, 시작이고 끝이다. 나는 목마른 이에게 생명의 물 샘에서 물을 거저 주겠다.」요한계시록 21:6 · 본디새김
16:17에서는 마지막 대접이 쏟아진 뒤 보좌에서 「다 되었다」는 소리가 나왔고,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완결되는 모습이 중심이었습니다. 21장에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신다는 말씀 뒤에 같은 선언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악을 심판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악이 제거된 자리에 생명과 임재의 새로운 현실이 나타납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입니다. 이 호칭은 하나님이 무한히 오래 존재하신다는 뜻에만 머물지 않고, 창조의 시작을 아시고 그 창조를 완성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분은 창조 세계 안에 있는 여러 힘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 세계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생명의 물을 거저 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시작과 끝이라고 선언하신 하나님은 곧바로 목마른 사람을 부르십니다. 우주적인 새 창조의 선언에서 한 사람의 갈증으로 시선이 좁혀집니다.
「거저」는 값없이, 대가 없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물을 판매하지 않으시고, 어떤 지위를 얻은 사람에게만 대가를 받고 제공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장면은 목마른 사람들과 돈이 없는 사람들을 돈과 값없이 받으라고 부르는 이사야 55:1의 초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18장의 바벨론과 대조가 드러납니다. 바벨론에서는 금과 보석과 향료뿐 아니라 사람의 몸과 목숨까지 상품으로 나열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가격의 차이가 아니라 두 도성이 생명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바벨론은 생명을 자신의 부를 위해 이용했습니다. 하나님은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을 거저 주십니다.
이기는 사람이 물려받을 것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1:7 · 본디새김
「이기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에 주신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생명나무, 둘째 죽음으로부터의 보호, 새 이름, 예수님과 함께하는 통치 같은 약속들이 이제 「이것들을 물려받을 것이다」라는 말로 모입니다.
「아들」은 상속과 관련된 언약적·가족적 지위를 나타냅니다. 고대의 상속 언어가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되지만, 이 약속을 남성 신자에게만 한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유업의 중심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으며, 새 창조를 물려받는 일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하나의 약속 안에 놓입니다.
그런데 왜 곧바로 둘째 죽음이 등장하는가?
「그러나 비겁한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과 역겨운 짓을 한 이들과 살인하는 이들과 음행하는 이들과 주술을 부리는 이들과 우상을 섬기는 이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이들, 그들의 몫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있다. 그것이 둘째 죽음이다.」요한계시록 21:8 · 본디새김
7절의 「물려받을 것」과 8절의 「그들의 몫」이 대조됩니다.
목록 첫머리의 「비겁한 이들」은 두려워하여 물러서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이것을 위험 앞에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두려움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하는 현실이 반복해서 묘사되었으므로, 이 문맥에서 비겁함은 박해와 압력 앞에서 어린양에 대한 신실함을 버리는 문제와 연결하여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살인과 음행, 주술과 우상 숭배, 거짓은 바벨론과 짐승의 세계를 묘사할 때 등장했던 악들과 겹칩니다. 21:8은 새 창조가 바벨론의 죄를 그대로 보존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는 약속에는 악과 거짓의 질서가 마지막 권위를 잃는 일이 포함됩니다.
이제 천사는 그 새 창조의 도성을 요한에게 자세히 보여 줍니다.
광야의 창녀에서 높은 산의 신부로
그리고 마지막 재앙 일곱이 가득한 대접 일곱을 든 천사 일곱 가운데 하나가 와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이리 오시오.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그대에게 보이겠소.」요한계시록 21:9 · 본디새김
17:1에서도 일곱 대접을 든 천사 가운데 하나가 요한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이리 오시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창녀가 받을 심판을 그대에게 보이겠소.」 이제 천사는 같은 방식으로 요한을 부르지만, 이번에는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 주겠다고 합니다.
두 환상의 도입은 의도적으로 서로 닮았습니다. 두 경우 모두 천사는 요한을 다른 장소로 데려가는데, 17장에서는 광야였고 21장에서는 크고 높은 산입니다.
그리고 그가 영 안에서 나를 크고 높은 산으로 데려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10 · 본디새김
천사는 신부를 보여 주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보여 준 것은 도성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어린양의 아내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도성은 큰 건물들을 상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백성이 함께하는 현실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높은 산은 무엇을 떠올리게 하는가?
이 장면은 에스겔 40:2를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매우 높은 산 위에 놓여 성전과 도성의 회복에 관한 환상을 봅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천사가 도성을 측량하는 것도 에스겔 40–48장의 측량 환상과 연결됩니다. 요한은 에스겔이 보았던 회복의 환상을 불러와 새 예루살렘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도 나타납니다.
에스겔은 새 성전을 자세히 보았지만, 요한은 새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도성의 묘사를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도성이 지닌 영광
그 도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도성의 빛은 아주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요한계시록 21:11 · 본디새김
요한은 도성의 첫 번째 특징으로 크기나 견고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도성은 아름답게 꾸며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빛납니다.
벽옥은 이미 4:3에서 보좌에 앉은 분의 모습을 묘사할 때 등장한 보석입니다. 그분을 직접 묘사할 수 없기에 보석의 빛으로 표현했던 그 영광이 이제 새 예루살렘에서도 나타납니다. 요한은 하나님과 도성이 동일한 존재라고 말하지 않고, 도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벨론은 자신의 부로 자신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그 차이가 이어지는 보석과 금의 묘사 전체를 이해하는 기준이 됩니다.
열두 문과 열두 주춧돌 —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도성
그 도성은 크고 높은 성벽을 가지고 있었고, 문 열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문들에는 천사 열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름들이 적혀 있었는데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입니다.요한계시록 21:12 · 본디새김
이것은 에스겔 48:30–35를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이 본 회복된 도성에도 열두 지파의 이름을 가진 문들이 동서남북에 배치되었고, 그 이름은 마지막에 여호와야훼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이름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셨던 백성을 기억하게 합니다. 새 창조는 하나님이 과거에 자신의 백성과 맺으셨던 관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 약속의 역사가 새 예루살렘의 모습 속에 남아 있습니다.
동쪽에 문 셋, 북쪽에 문 셋, 남쪽에 문 셋, 서쪽에 문 셋이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13 · 본디새김
도성은 세계의 한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이것은 뒤이어 여러 민족이 도성의 빛으로 다니고 영광을 가져오는 장면과 잘 어울립니다.
주춧돌에 적힌 사도들의 이름
그리고 그 도성의 성벽은 주춧돌 열둘을 가지고 있었고,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 열둘이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14 · 본디새김
문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주춧돌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불러 내신 이스라엘의 언약적 정체성이, 다른 한편에는 어린양의 증언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사도들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 둘을 경쟁하는 두 도성으로 그리지 않고 하나의 새 예루살렘 안에 놓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에 관한 모든 신학적 논쟁을 간단히 종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와 어린양의 사도적 증언이 서로 단절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제 천사는 그 도성의 크기를 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측량 결과가 예상 밖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연결은 에베소서 2:19–22와도 주제적으로 이어집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고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춧돌 이미지와 동일한 건축 도면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님과 사도적 증언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진다는 주제는 깊이 연결됩니다.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은 도성 — 온 도성이 지성소가 되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던 이가 그 도성과 그 문들과 성벽을 재려고 금으로 된 갈대 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15 · 본디새김
이것은 에스겔 40장에서 성전의 각 부분을 재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경의 환상에서 측량은 건축의 실무 절차가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장소의 질서와 완전함, 그 장소가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도성은 네모반듯하게 놓여 있었고, 그 길이가 너비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갈대로 그 도성을 재니 만 이천 스타디온이었습니다. 그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았습니다.요한계시록 21:16 · 본디새김
이 도성은 평면이 정사각형인 도시가 아닙니다. 세 차원이 모두 같은 정육면체입니다.
솔로몬 성전의 가장 거룩한 방
열왕기상 6:20에서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모두 스무 규빗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특별히 나타내던 가장 거룩한 공간으로,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성전이 하나 들어 있는 도시가 아닙니다. 도성 전체가 지성소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22절에서 성전이 없다고 선언되는 장면을 준비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성전의 가장 안쪽 공간과 특별히 연결되었지만, 새 예루살렘에서는 그 임재가 별도의 작은 공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미래의 도시가 반드시 정육면체 건축물로 세워져야 한다는 뜻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환상의 건축적 형상은 신학적 의미를 전달합니다.
만 이천 스타디온과 백사십사 규빗
도성의 크기는 만 이천 스타디온, 성벽은 백사십사 규빗으로, 두 숫자는 모두 열둘과 관련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열둘은 이스라엘의 지파와 어린양의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백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도성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마련된 완전하고 거대한 장소라는 인상을 강화합니다.
요한이 보여 주려는 것은 도성의 실제 건축 규격이 아니라, 도성이 얼마나 안전하고 완전하며 하나님께 속한 장소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도성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만 이천은 열둘에 천을 곱한 수이고, 백사십사는 열둘에 열둘을 곱한 수입니다. 다만 숫자 열둘이 등장한다고 해서 모든 수치가 숨겨진 암호라는 뜻은 아니며, 본문은 실제 측정 단위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도성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또한 백사십사 규빗이 성벽의 높이인지 두께인지 원문은 명시하지 않습니다. 도성의 전체 규모에 비해 성벽 수치가 작기 때문에 두께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지만, 이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순금과 보석과 진주 — 바벨론의 화려함과 무엇이 다른가?
그 성벽은 벽옥으로 쌓여 있었고, 그 도성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18 · 본디새김
벽옥으로 된 성벽, 순금으로 된 도성, 온갖 보석의 주춧돌, 진주로 된 문, 맑은 유리 같은 순금의 거리. 새 예루살렘은 놀라울 만큼 화려합니다.
그런데 바벨론도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며져 있지 않았습니까? 17:4에서 바벨론의 여자는 금과 보석과 진주로 장식되어 있었고, 18장의 상품 목록도 금과 은, 보석과 진주로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두 도성은 무엇이 다릅니까?
같은 재료가 다른 의미를 갖는 이유
보석이나 금 자체가 악하다고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바벨론의 죄는 금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고, 금으로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고 자신의 번영을 위하여 사람의 목숨까지 상품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반면 새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은 11절의 「그 도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에서 이미 그 출처가 밝혀졌고, 보석과 금은 그 영광을 나타내는 이미지가 됩니다.
바벨론은 자신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닙니다.
또 바벨론의 부는 욕망과 거래의 대상이었지만, 새 예루살렘의 금과 보석은 상품 목록이 아니라 도성 자체의 일부로 등장합니다. 특히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며 소유하려 했던 금이 이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의 재료로 쓰입니다. 금이 문자 그대로 가치가 없어진다는 뜻은 아니지만, 금은 더 이상 지배와 사치를 과시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도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재료입니다.
열두 보석은 무엇을 뜻하는가?
19–20절에서는 열두 주춧돌에 사용된 보석들이 차례로 나열됩니다. 이 목록은 출애굽기 28:17–21에서 대제사장의 가슴받이에 사용된 열두 보석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가슴받이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나타내는 보석들이 있었고, 대제사장은 그 이름들을 가슴에 지니고 여호와야훼 앞에 나아갔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주춧돌들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그분의 거룩한 임재를 떠올리게 하는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진주 하나로 이루어진 문
그리고 문 열둘은 진주 열둘이었습니다. 문 하나하나가 저마다 진주 하나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성의 넓은 거리는 맑은 유리 같은 순금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21 · 본디새김
현실의 건축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환상은 이 표현으로 도성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문들은 뒤에서 놀라운 역할을 하게 됩니다.
결코 닫히지 않습니다.
거대한 성벽과 보석으로 장식된 문이 있지만, 요한이 보여 주려는 도성은 문을 걸어 잠근 요새가 아닙니다. 이 도성의 안전은 성벽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그곳에 하나님과 어린양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한은 도성 안에서 결정적인 발견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열두 보석은 벽옥, 사파이어, 옥수, 에메랄드, 홍마노, 홍옥수, 크리솔라이트, 녹주석, 토파즈, 녹옥수, 히아신스석, 자수정입니다. 다만 출애굽기와 요한계시록의 보석 목록이 정확히 같은 순서와 이름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고대 보석 이름의 현대적 광물 대응도 항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각 보석의 색에 열두 지파나 사도의 성격을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열두 보석이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된 성스러운 장식이라는 연결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 도성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도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한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21:22 · 본디새김
이 문장은 21장의 중심적인 선언입니다.
요한은 성벽과 문, 주춧돌과 거리까지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지성소가 있던, 성전과 깊이 연결된 도성이었습니다. 에스겔 40–48장도 회복된 도성의 환상에서 성전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요한은 에스겔의 환상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고 더욱 놀라운 완성을 보여 줍니다.
성전은 왜 필요했는가?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장소였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룩함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성전에는 구분된 공간들이 있었고,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에서는 도성 전체가 지성소의 모양을 갖추고, 하나님과 어린양이 친히 성전이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특정한 건물 안에 제한되지 않고, 도성 전체가 그분의 거룩한 임재 안에 있습니다.
3절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하신 약속 때문에 이제 별도의 성전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성전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도성 전체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성전이시다
하나님만 성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전능한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십니다.
5장에서 어린양은 하늘 보좌의 예배를 받으셨고, 19장에서는 왕들의 왕이며 주들의 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21장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새 예루살렘의 성전이 되십니다.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양을 구별하면서도, 그분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거룩한 임재의 중심에 함께 세웁니다.
어린양의 구원은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출하여 안전한 장소로 옮기는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관계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성전이 필요 없다는 선언 뒤에는 또 다른 사실이 나옵니다. 해와 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해와 달이 필요 없는 도성 — 어린양이 등불이 되시다
그리고 그 도성은 자기를 비추어 줄 해도 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혔고 그 도성의 등불은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21:2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이사야 60:19–20을 거의 그대로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의 영원한 빛이 되실 것이므로 더 이상 해와 달을 의지할 필요가 없고, 그 빛과 함께 슬픔의 날들이 끝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요한은 해와 달 자체가 우주에서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고, 그 도성이 해와 달의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초점은 천체의 물리적 존속 여부가 아니라 빛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린양이 등불이시라는 뜻
하나님의 영광이 도성을 밝히고, 그 영광을 비추는 등불은 어린양입니다. 그분은 도성에 들어오신 여러 주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히는 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입니다.
1장에서 인자 같은 분은 일곱 금 등잔대 사이에 서 계셨고, 그분의 얼굴은 힘껏 비치는 해처럼 빛났습니다(1:16). 이제 새 예루살렘에서 어린양의 빛은 잠시 눈을 부시게 하는 광경이 아니라 도성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빛입니다.
바벨론의 등불과 새 예루살렘의 등불
18:23에서 바벨론에는 등불 빛이 다시는 비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되었습니다. 그 도성의 번영은 끝났고, 일상의 빛도 사라졌습니다.
바벨론의 등불은 꺼졌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어린양이 등불이십니다.
바벨론은 자신의 부와 권력으로 화려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납니다. 그런데 그 빛이 도성 안에만 머무르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어린양이 빛이시라는 이 표현은 요한복음 1:4–5와 8:12의 빛에 관한 말씀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문이 닫히지 않는 도성 — 민족들과 왕들이 가져오는 영광
그리고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으로 다닐 것이고, 땅의 왕들이 자기들의 영광을 그리로 가져옵니다.요한계시록 21:24 · 본디새김
요한계시록에서 민족들과 왕들은 여러 차례 짐승의 지배와 미혹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16장에서는 온 세상의 왕들이 마지막 전쟁을 위해 모였고, 17장에서는 열 왕이 자신의 힘과 권위를 짐승에게 넘겨주었으며, 19장에서는 땅의 왕들과 그 군대가 흰 말을 타신 이에게 대항하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민족들이 새 예루살렘의 빛으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들의 영광을 그 도성에 가져옵니다.
민족들의 영광은 무엇인가?
이사야 60:3에서는 민족들이 시온의 빛으로 나아오고 왕들이 그 빛남으로 나아오며, 60:11에서는 시온의 문들이 언제나 열려 있어 민족들의 재물과 왕들이 들어옵니다. 요한계시록 21:24–26은 이 장면과 직접적인 문학적 관계를 가집니다. 이사야의 본래 문맥에서는 이스라엘과 시온의 회복이 중심이며, 요한은 이 소망을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에 적용합니다.
민족들은 이제 짐승을 경배하러 모이지 않고 하나님의 빛 가운데 다니며, 자기들의 영광과 존귀를 도성으로 가져옵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비추시는 도성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인간 사회의 가치 있는 것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소망을 읽을 여지가 있지만, 이를 근거로 현재의 모든 문화적 성취가 아무 변화 없이 새 창조에 보존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 구체적인 내용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심판받은 왕들이 다시 들어오는가?
본문은 21:24의 왕들이 앞서 어린양을 대적하다 심판받은 동일한 개인들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심판받은 모든 왕이 결국 구원받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이 구절의 민족들과 왕들이 지닌 긍정적인 의미를 지워서도 안 됩니다.
왕들은 권위를 짐승에게 넘겨주던 자리에서, 이제 영광을 하나님의 도성으로 가져옵니다. 그들의 움직임이 향하는 중심이 달라졌습니다.
왜 성벽이 있는데 문을 닫지 않는가?
그리고 그 도성의 문들은 낮에 결코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밤이 없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21:25 · 본디새김
보통 성벽은 외부의 위협을 막기 위한 것이고, 문은 필요할 때 열고 닫으면서 도시를 보호합니다. 고대 도시에서 밤은 경계와 위험의 시간이었고, 문을 닫는 것은 도시를 지키는 중요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도성을 밝히고 어린양이 등불이 되시니, 문을 닫아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바벨론은 많은 권력과 재물에 의지했지만 무너졌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문을 닫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자신 안에 있는 것만으로 완결된 폐쇄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의 민족들과 아무 관련 없는 고립된 집단으로 만들지 않고, 새 창조의 중심에서 민족들을 향해 빛을 비춥니다.
그러나 열린 문이 아무런 구별도 없는 출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절에서 요한은 그 경계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문은 열려 있지만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한다
그리고 속된 것과 역겨운 짓을 하는 이와 거짓을 행하는 이는 결코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의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이들만 들어갑니다.요한계시록 21:27 · 본디새김
문들은 결코 닫히지 않는데, 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문은 두려움 때문에 닫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벨론의 더러움과 거짓이 새 예루살렘 안에 그대로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어린양이 친히 성전으로 계시는 도성은, 거짓과 우상 숭배와 더러움이 그대로 존속하는 세계일 수 없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의 두루마리
20장에서는 생명의 두루마리가 펼쳐졌고, 거기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은 불못에 던져졌습니다(20:15). 21장은 그 두루마리를 다시 언급하면서 「어린양의 생명의 두루마리」라고 부릅니다. 어린양은 자신의 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 속량하신 분이므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정체성도 어린양의 구원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구원은 거짓과 불의를 그대로 인정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거룩함은 어린양의 구원과 무관한 인간 자신의 공로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열린 문과 출입 제한은 모순인가?
한 읽기는 이 구절을 새 창조에 속한 사람들과 최종 심판을 받은 사람들 사이의 구별을 다시 확인하는 선언으로 봅니다. 20:15에서 생명의 두루마리와 불못이 등장했고, 21:8에서도 둘째 죽음이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읽기는 열린 문과 민족들의 이동이라는 이미지에 주목하여, 새 예루살렘이 지닌 포괄적인 구원의 지평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출입의 조건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따라서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지막 심판 이후에 누구든지 아무 조건 없이 들어올 수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도성이 폐쇄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곳이 아니라는 열린 문의 의미를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곳은 거룩하지만 불안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열려 있지만 거짓과 불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민족들을 비추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할 다른 권력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두 도성, 그리고 밤이 없는 도성의 열린 문
요한계시록 21장을 다 읽고 나면 17–18장의 바벨론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두 도성은 모두 화려하고, 여러 민족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함께 살게 하는 원리는 전혀 다릅니다. 바벨론은 사치와 재물로 왕들과 상인들을 모았고 사람의 몸과 목숨마저 거래했으며, 그녀가 무너지자 왕들과 상인들은 멀찍이 서서 울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고, 눈물을 씻어 주시며, 생명의 물을 거저 주십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세계는 단지 더 부유하고 안전한 바벨론이 아닙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가는가가 완전히 달라진 세계입니다.
도성의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어린양이 반복해서 등장하십니다. 도성은 어린양의 아내이고, 주춧돌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으며, 어린양은 하나님과 함께 도성의 성전이시고 등불이십니다. 도성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린양의 생명의 두루마리에 적힌 사람들입니다. 새 창조는 어린양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 시작되는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의 구원이 이루어 낸 현실입니다.
이 약속은 지금 고통받는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하찮게 여기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물을 새 창조의 가장 중요한 약속 가운데 하나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금의 고통을 부인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 눈물을 알고 계시며 마침내 씻어 주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생명을 믿으면서 다른 사람을 끝없이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삶이 새 창조를 인간의 힘으로 앞당기거나 완성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에게서 내려오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새 창조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건설해야 할 거대한 바벨탑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그 선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 선물의 성격에 어울리는 삶으로 부름받습니다.
그 도성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보석의 수와 금의 양에 있지 않습니다. 도성의 높이나 성벽의 두께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어린양이 그들을 비추고 계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한때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거룩한 장소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보는 도성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친히 성전이십니다.
한때 사람들은 밤이 오면 문을 닫고 위험을 경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도성에는 밤이 없습니다.
한때 눈물과 죽음과 고통이 사람의 삶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눈물을 씻어 주셨고, 첫 것들은 떠나갔습니다.
이제 민족들이 하나님의 빛 가운데 다닙니다. 도성의 문은 동쪽에도, 북쪽에도, 남쪽에도, 서쪽에도 열려 있고, 그 문들 안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 계시기에, 더 이상 성전도 필요하지 않고 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을 필요도 없는 도성.
요한계시록 21장은 그 빛나는 도성에 들어갈 사람들을 밝히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