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21–22장 · 새 하늘과 새 땅

성전이 없는 도시,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요한은 놀라운 도시를 봅니다.

그 도시는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성벽은 벽옥으로 쌓여 있고, 문은 거대한 진주로 되어 있으며, 거리에는 맑은 유리 같은 순금이 깔려 있습니다. 도시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는 모두 같습니다. 열두 문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열두 기초 돌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가장 놀라운 발견은 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요한은 도시 안을 살펴보다가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성전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룩한 도시에 성전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루살렘의 특별한 의미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백성 가운데 사시는 장소라는 사실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고,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나타내는 중심적인 장소였습니다.

그 이유는 22절에서 곧바로 밝혀집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파괴되어 없는 것도, 하나님께 나아갈 장소가 사라져서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몸소 성전이시기 때문에 별도의 성전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붙잡으면 21장의 여러 장면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천막을 치고 사십니다.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죽음과 슬픔과 고통이 사라집니다. 도시 전체가 지성소를 떠올리게 하는 모양을 갖추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그곳을 비춥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소망은 단지 고통이 없는 안전한 장소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자기 백성과 함께 사시는 현실입니다.

이 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전개됩니다. 1–8절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시며, 눈물과 죽음이 사라진다는 약속이 선포됩니다. 9–27절에서는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의 성벽과 문, 기초 돌과 크기가 펼쳐지고, 마침내 그곳에 성전도 별도의 빛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뒤에서는 그 약속이 이루어진 도시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독자는 도시의 겉모습에서 시작하여 점차 그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그 중심에 계신 분은 건물이나 보석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이십니다.

읽는 시간 33분소단락 1321장 본문 읽기 →

「바다도 더는 없었습니다」 — 새 창조에서 사라지는 것

요한계시록 21:1 본문 →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바다도 더는 없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1 · 두루새김

이 장의 첫 문장은 이사야 65:1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하신 선언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기쁨, 장수와 평안, 인간과 창조 세계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소망으로 이어집니다(이사야 65:18–25). 이 약속은 처음부터 영혼이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그 안에 살아가는 백성의 삶이 새로워지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이사야의 약속을 가져와 한층 더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 줍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납니다.

「새롭다」는 것은 무엇이 달라진다는 뜻인가?

「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카이노스(καινός)는 시간적으로 최근에 생겼다는 뜻뿐 아니라 성격과 상태가 새롭다는 의미도 가집니다. 그러나 이 단어만으로 이전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물질로 창조되었는지, 이전 세계가 보존되면서 상태만 바뀌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 읽기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다는 표현에 무게를 두어, 이전 창조 질서가 사라지고 새로운 창조가 나타난다고 봅니다. 다른 읽기는 이사야의 새 창조 약속과 신약의 피조물 회복에 관한 말씀을 함께 고려하여, 하나님이 기존의 창조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로마서 8:19–23). 본문은 이 변화가 어떤 물리적 과정을 거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요한이 보는 세계는 지금의 세계에서 고통스러운 요소 몇 가지만 줄어든 곳이 아니라, 죽음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시며 이전의 질서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새 창조의 첫 문장에서 요한은 유독 한 가지를 따로 언급합니다.

왜 바다일까요?

바다는 왜 사라지는가?

문자적으로 읽으면 새 창조에는 더 이상 바다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바다가 해 온 역할도 살펴야 합니다. 13:1에서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왔고, 17:1의 큰 창녀는 많은 물 위에 앉아 있었으며(17:15에서 그 물은 여러 백성과 민족으로 풀이됩니다), 20:13에서는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21:1의 바다가 문자적으로 사라지는 것인지, 바다가 상징하던 혼돈과 위협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뜻인지 해석이 갈립니다. 둘을 하나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짐승이 올라오던 바다, 죽은 사람들을 붙잡고 있던 바다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바다가 사라지는 것을 해양 생물이 없는 미래 세계라는 상상으로 좁히면, 요한이 책 전체에서 쌓아 온 이미지의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새 창조에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위협하던 것들이 더 이상 같은 권세를 행사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성경의 환상과 시에서 바다는 혼돈과 위협을 나타내는 이미지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다니엘 7:2–3에서는 큰 바다가 흔들릴 때 네 짐승이 올라오고, 시편 74:13–14에서는 하나님이 바다의 괴물들을 제압하십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모든 바다가 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10에서 하나님은 바다를 이름 붙이시고,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좋게 보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시

요한계시록 21:2–3 본문 →

나는 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도시는 남편을 위해 곱게 꾸민 신부처럼 준비되어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2 · 두루새김

도시가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려옵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의 마지막을 인간이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실제로 보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거룩한 도시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다는 성경의 오래된 이야기가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시어 그들 가운데 사시기 위해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증언합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사신다는 사실이 성막과 성전을 통해 나타났지만, 이제는 도시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왜 도시가 신부인가?

그 도시는 「신부처럼」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부는 혼인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54:5–8과 62:4–5는 하나님과 시온의 관계를 혼인에 비유하고, 특히 62장은 하나님이 시온을 기뻐하시는 모습을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요한은 이 오래된 언약의 이미지를 어린양의 신부에게 적용합니다. 19:7–8에서 어린양의 아내가 스스로 준비를 마치고 깨끗한 아마포를 입었는데, 이제 그 신부가 새 예루살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도시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장소이고, 혼인은 사랑과 신실함, 친밀하게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이 두 이미지를 결합하여 어린양과 그분의 백성이 함께하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구원은 단지 외로운 개인이 안전한 장소를 얻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백성이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입니다.

이제 그 도시를 향해 왕좌에서 큰 목소리가 울립니다.

나는 왕좌에서 큰 목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천막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천막을 치고 사실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백성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몸소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그분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요한계시록 21:3 · 두루새김

하나님의 천막이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천막을 치고 사십니다.

하나님이 몸소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이 반복은 21장의 중심 약속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사십니다.

「천막을 치고 사실 것이다」 — 광야에서 시작된 약속

「천막을 치고 사실 것이다」(σκηνόω)는 천막을 치거나 거주한다는 뜻의 동사로, 출애굽기 25:8의 성막 명령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성소를 만들게 하여 그들 가운데 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의 목적은 종교 의식을 치를 건물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37:26–27에서도 하나님은 회복된 백성과 평화의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 가운데 성소를 두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자신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분열과 포로 생활을 겪은 이스라엘의 회복 소망과 연결된 이 약속을, 요한계시록은 새 창조의 모습으로 펼칩니다.

「그분의 백성들」이라는 복수

에스겔 37:27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21:3은 「백성들」이라는 복수로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여러 민족과 언어 가운데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린양께 속하게 되었고(5:9), 이제 그 다양한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서로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잃고 똑같은 하나의 집단으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함께 들어오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4절에서 다시 「민족들」이 등장하면서 21장의 처음과 끝이 이어집니다.

새 예루살렘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도시가 아니라, 여러 민족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도시로 나타납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 계실 때 무엇이 사라지는지가 곧바로 밝혀집니다.

조금 더 깊이

「백성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라오이(λαός)로 복수형입니다. 이곳에는 단수와 복수의 사본 차이가 있지만, 두루새김이 따른 복수형은 여러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신다 — 위로를 넘어서는 새 창조

요한계시록 21:4 본문 →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죽음이 더는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졌다.」요한계시록 21:4 · 두루새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사시겠다고 선언하신 뒤,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여 주기 위해 왕궁이나 군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인간의 눈에 맺힌 눈물이 언급됩니다. 그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은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죽음만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더는 없습니다. 고통을 참을 만한 정도로 줄여 주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고통의 현실을 만들어 냈던 이전 질서 자체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닦는 것과 죽음을 없애는 것

이 구절에는 두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 주시며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과 슬픔과 고통을 일으키던 현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눈물만 닦아 주신다면 사람은 다시 울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사라진다는 선언만 있다면 그동안 고통받아 온 사람들이 어떻게 위로받는지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두 모습을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끝내실 뿐 아니라 고통받았던 사람들을 돌보십니다.

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것은 이전의 슬픈 기억까지 모두 사라진다는 뜻입니까? 본문은 기억이 어떻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전의 고통이 더 이상 인간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몸소 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새 창조의 소망은 고통을 겪지 않았던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고통을 끝내시고 그 눈물을 몸소 닦아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약속은 이사야 25:6–8과 직접 연결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위하여 풍성한 잔치를 베푸시고, 모든 민족을 덮고 있던 가리개를 없애시며, 죽음을 영원히 삼키시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본래 문맥에서 이 약속은 무자비한 도시의 몰락과 억눌린 사람들을 향한 보호, 민족들을 위한 구원의 잔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사야가 함께 언급한 죽음과 눈물을 새 창조의 중심으로 가져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 새 창조의 주인이 말씀하시다

요한계시록 21:5–8 본문 →

왕좌에 앉으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들은 믿을 만하고 참되니, 기록하여라.」요한계시록 21:5 · 두루새김

요한계시록에서 왕좌에 앉으신 분은 계속 환상의 중심에 계셨지만,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은 드뭅니다. 이제 새 창조의 장면에서 그분이 몸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물건 몇 개나 새로운 종교 제도를 만드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다는 1절과 이어지는 이 새로움은 죽음과 고통, 인간의 공동체와 창조 세계를 모두 아우릅니다.

그분은 낡은 질서를 조금 고치는 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왜 기록하라고 명령하시는가?

「믿을 만하고 참되니」라는 표현은 19:11에서 흰 말을 타신 예수님께 붙었던 호칭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문에서 두 곳에 같은 말이 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사실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미래를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서로 어울립니다.

요한의 독자들에게 새 창조는 아직 눈앞에서 확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과 짐승의 권력이 행사되는 세계에서 죽음과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약속의 근거는 눈앞의 상황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래서 기록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잠시 들렸다가 사라질 환상의 소리가 아니라, 교회가 읽고 붙들어야 할 약속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며, 시작과 끝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물이 솟는 샘에서 물을 거저 주겠다.」요한계시록 21:6 · 두루새김

16:17에서는 마지막 대접이 쏟아진 뒤 왕좌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소리가 나왔고, 그곳에서는 심판의 마무리가 중심이었습니다. 21장에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신다는 말씀 뒤에 같은 선언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악을 심판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악이 제거된 자리에 생명과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새로운 현실이 나타납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입니다. 이 호칭은 하나님이 끝없이 오래 존재하신다는 뜻에만 머물지 않고, 창조의 시작을 아시고 그 창조를 완성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분은 창조 세계 안에 있는 여러 힘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 세계의 시작과 끝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생명의 물을 거저 주시는 하나님

그런데 자신을 시작과 끝이라고 선언하신 하나님은 곧바로 목마른 사람을 부르십니다. 우주적인 새 창조의 선언에서 한 사람의 갈증으로 시선이 좁혀집니다.

「거저」는 값없이, 대가 없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물을 판매하지 않으시고, 어떤 지위를 얻은 사람에게만 비싼 대가를 받고 제공하지도 않으십니다. 이사야 55:1에서 목마른 사람들과 돈이 없는 사람들을 돈과 값없이 받으라고 은혜의 언약으로 부르시던 초대를, 요한계시록은 생명의 물이라는 이미지로 다시 들려줍니다.

18장의 바벨론에서는 금과 보석과 향료뿐 아니라 사람의 몸과 목숨까지 상품으로 나열되었습니다. 이것은 가격의 차이가 아니라 두 도시가 생명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바벨론은 생명을 자신의 부를 위해 이용했습니다. 하나님은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을 거저 주십니다.

이기는 사람이 물려받을 것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물려받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1:7 · 두루새김

「이기는 사람」은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에 주신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생명나무, 둘째 죽음으로부터의 보호, 새 이름, 예수님과 함께하는 다스림 같은 약속들이 이제 「이것들을 물려받을 것이다」라는 말로 모입니다.

「아들」은 상속과 관련하여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지위를 나타냅니다. 고대의 상속 언어가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되지만, 이 약속을 남성 신자에게만 한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물려받을 것의 중심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곧바로 둘째 죽음이 등장하는가?

「그러나 비겁한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 역겨운 짓을 한 사람들, 살인하는 사람들, 음행하는 사람들, 주술을 부리는 사람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그리고 거짓말하는 모든 사람이 받을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이다. 이것이 둘째 죽음이다.」요한계시록 21:8 · 두루새김

새 창조의 약속 한가운데서 엄중한 경고가 등장합니다. 7절의 「물려받을 것이다」와 8절의 「받을 몫」이 대조됩니다.

목록 첫머리의 「비겁한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물러서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일상적인 불안이나 위험 앞에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두려움과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하는 현실을 반복해서 묘사했으므로, 이 문맥의 비겁함은 박해와 압력 앞에서 어린양에 대한 신실함을 버리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어지는 살인, 음행, 주술, 우상 숭배, 거짓말은 앞서 바벨론과 짐승의 세계를 묘사할 때 등장했던 악들과 겹칩니다. 21:8은 새 창조가 바벨론의 죄를 그대로 보존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는 약속에는 악과 거짓의 질서가 마지막 권위를 잃는 일이 포함됩니다.

광야의 창녀에서 높은 산의 신부로

요한계시록 21:9–11 본문 →

마지막 일곱 재앙이 가득 담긴 일곱 대접을 든 천사들 가운데 하나가 와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이리 와요.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를 보여 줄게요.」요한계시록 21:9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요한계시록 17:1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일곱 대접을 든 천사 가운데 하나가 요한을 불러,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창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같은 방식으로 불러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 주겠다고 합니다.

두 환상의 도입은 의도적으로 닮았습니다. 17장에서 천사는 요한을 광야로 데려갔고, 21장에서는 크고 높은 산으로 데려갑니다.

내가 성령에 사로잡힌 가운데, 그 천사는 나를 크고 높은 산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10 · 두루새김

천사는 신부를 보여 주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보여 준 것은 도시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어린양의 아내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시는 큰 건물들을 상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백성이 함께하는 현실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높은 산은 무엇을 떠올리게 하는가?

에스겔 40:2에서 에스겔은 매우 높은 산 위에 놓여 성전과 도시의 회복 환상을 봅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천사가 도시를 재는 것도 에스겔 40–48장에서 성전과 그 주변을 재던 환상과 연결됩니다. 요한은 에스겔이 보았던 회복의 환상을 불러와 새 예루살렘의 의미를 더 깊게 드러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도 나타납니다. 에스겔은 새 성전을 자세히 보았지만, 요한은 새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도시가 지닌 영광

그 도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습니다. 그 빛은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게 빛나는 벽옥 같았습니다.요한계시록 21:11 · 두루새김

요한은 도시의 첫 번째 특징으로 크기나 튼튼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말이 도시에 관한 모든 묘사의 출발점입니다.

벽옥은 4:3에서 왕좌에 앉으신 분의 모습을 묘사할 때 등장한 보석입니다. 그분을 직접 묘사할 수 없기에 보석의 빛으로 표현했던 그 영광이 이제 새 예루살렘에서도 나타납니다. 요한은 하나님과 도시가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난다고 말합니다.

바벨론은 자신의 부로 자신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 차이가 이어지는 보석과 금의 묘사 전체를 이해하는 기준이 됩니다.

열두 문과 열두 기초 돌 —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도시

요한계시록 21:12–14 본문 →

도시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들에는 열두 천사가 있었고, 이스라엘 자손의 열두 지파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12 · 두루새김

이것은 에스겔 48:30–35를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이 본 회복된 도시에도 동서남북에 열두 지파의 이름을 가진 문들이 있었고, 그 묘사는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이름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셨던 백성을 기억하게 합니다. 새 창조는 그 관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 약속의 역사가 새 예루살렘의 모습 속에 남아 있습니다.

동쪽에 문 셋, 북쪽에 문 셋, 남쪽에 문 셋, 서쪽에 문 셋이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13 · 두루새김

도시는 세계의 한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뒤이어 여러 민족이 도시의 빛으로 다니고 영광을 가져오는 장면과 잘 어울립니다.

기초 돌에 적힌 사도들의 이름

도시의 성벽을 받치는 기초 돌은 열두 개였고,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14 · 두루새김

문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초 돌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하나님이 불러 내시고 언약을 맺으신 백성 이스라엘이, 다른 한편에는 어린양의 증언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사도들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 둘을 경쟁하는 두 도시로 그리지 않고 하나의 새 예루살렘 안에 놓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에 관한 모든 신학적 논쟁을 간단히 끝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와 어린양의 사도들이 전한 증언이 서로 끊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과 어린양을 통한 구원의 증언이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연결은 에베소서 2:19–22와도 주제적으로 이어집니다. 바울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외부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고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기초 돌 이미지와 같은 건축 도면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증언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진다는 주제는 깊이 연결됩니다.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은 도시 — 온 도시가 지성소가 되다

요한계시록 21:15–17 본문 →

나에게 말하던 천사는 도시와 그 문들과 성벽을 재려고 금으로 만든 갈대 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15 · 두루새김

에스겔 40장에서 성전의 각 부분을 재던 모습처럼, 성경의 환상에서 크기를 재는 일은 건축 실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장소의 질서와 완전함, 그 장소가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도시는 네모반듯했고, 길이와 너비가 같았습니다. 천사가 갈대 자로 도시를 재니 만 이천 스타디온이었습니다. 도시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는 모두 같았습니다.요한계시록 21:16 · 두루새김

네모반듯한 도시까지는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높이까지 같다면, 이 도시는 평면이 정사각형인 도시가 아니라 정육면체입니다.

왜 도시를 이렇게 묘사할까요?

솔로몬 성전의 가장 거룩한 방

열왕기상 6:20에서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모두 스무 규빗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특별히 나타내던 가장 거룩한 공간이었고,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성전이 하나 들어 있는 도시가 아닙니다. 도시 전체가 지성소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곳이 별도의 작은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이 22절에서 성전이 없다고 선언되는 장면을 준비합니다.

물론 미래의 도시가 반드시 정육면체 건축물로 세워져야 한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환상이 사용하는 건축물의 모습은 하나님에 관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만 이천 스타디온과 백사십사 규빗

도시의 크기 만 이천 스타디온과 성벽의 백사십사 규빗은 모두 열둘과 관련된 수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열둘은 이스라엘의 지파와 어린양의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백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도시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마련된 완전하고 거대한 장소라는 인상을 강화합니다.

요한이 보여 주려는 것은 도시의 실제 건축 규격이 아니라, 도시가 얼마나 안전하고 완전하며 하나님께 속한 장소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만 이천은 열둘에 천을 곱한 수이고, 백사십사는 열둘에 열둘을 곱한 수입니다. 다만 숫자 열둘이 등장한다고 해서 모든 수치가 숨겨진 암호라는 뜻은 아니며, 본문은 실제 측정 단위를 쓰면서 상징적인 도시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또한 백사십사 규빗이 성벽의 높이인지 두께인지 원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도시 전체 크기에 비해 성벽 수치가 작아 두께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지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순금과 보석과 진주 — 바벨론의 화려함과 무엇이 다른가?

요한계시록 21:18–21 본문 →

성벽은 벽옥으로 쌓여 있었고, 도시는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18 · 두루새김

새 예루살렘은 놀라울 만큼 화려합니다. 기초 돌에는 온갖 보석이 사용되고, 문은 진주로,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도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며져 있지 않았습니까? 17:4에서 바벨론의 여자는 그렇게 꾸며져 있었고, 18장에서 상인들의 상품 목록도 금과 은, 보석과 진주로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두 도시는 실제로 무엇이 다릅니까?

같은 재료가 다른 의미를 갖는 이유

보석이나 금 자체가 악하다고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바벨론의 죄는 금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았고, 금으로 자신의 영광을 뽐내며 자신의 번영을 위하여 사람의 목숨까지 상품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반면 새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은 11절의 「그 도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습니다」에서 이미 그 출처가 밝혀졌습니다.

바벨론은 자신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납니다.

또 바벨론의 부는 욕망과 거래의 대상이었지만, 새 예루살렘의 금과 보석은 상품 목록이 아니라 도시 자체의 일부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며 소유하려 했던 금이 이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의 재료로 쓰입니다. 금이 더 이상 지배와 사치를 뽐내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도시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재료가 된 것입니다.

열두 보석은 무엇을 뜻하는가?

19–20절의 열두 보석 목록은 출애굽기 28:17–21에서 대제사장의 가슴받이에 사용된 열두 보석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보석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나타냈고, 대제사장은 그 이름들을 가슴에 지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기초 돌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함께 계심을 떠올리게 하는 보석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진주 하나로 이루어진 문

열두 문은 열두 진주였습니다. 문 하나하나가 진주 하나로 되어 있었습니다. 도시의 넓은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21 · 두루새김

현실의 건축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환상은 이런 표현으로 도시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문들은 뒤에서 놀라운 역할을 하게 됩니다.

결코 닫히지 않습니다.

거대한 성벽과 보석으로 꾸며진 문을 보고 있지만, 이 도시는 문을 걸어 잠근 요새가 아닙니다. 이 도시의 안전은 성벽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과 어린양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 본문의 보석 목록이 정확히 같은 순서와 이름으로 일치하지는 않고, 고대 보석 이름이 오늘날 어떤 광물을 가리키는지도 항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각 보석의 색에 열두 지파나 사도의 성격을 하나씩 연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열두 보석이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된 거룩한 장식이라는 연결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 도시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

요한계시록 21:22 본문 →

나는 그 도시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21:22 · 두루새김

이 문장은 21장의 중심 선언입니다.

요한은 성벽과 문, 기초 돌과 거리까지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지성소가 있던 도시였고, 에스겔 40–48장의 회복 환상에서도 성전이 자세히 묘사되었습니다. 요한은 에스겔의 환상을 반복하지 않고 더 놀라운 완성을 보여 줍니다.

성전은 왜 필요했는가?

성전은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사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룩함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소였습니다. 성전에는 구분된 공간들이 있었고,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도시 전체가 지성소의 모양을 갖추고, 하나님과 어린양이 몸소 성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곳이 특정한 건물 안에 제한되지 않고, 도시 전체가 그분의 거룩한 임재 안에 있습니다.

3절에서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천막을 치고 사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약속 때문에 별도의 성전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성전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이 도시 전체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성전이시다

하나님만 성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십니다. 5장에서 하늘 왕좌의 예배를 받으시고 19장에서 왕들의 왕이며 주들의 주로 나타나신 어린양이, 이제 하나님과 함께 새 예루살렘의 성전이 되십니다.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양을 구별하면서도, 그분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거룩한 임재의 중심에 함께 세웁니다. 어린양의 구원은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해 내어 안전한 장소로 옮기는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관계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어린양의 구원이 향하는 곳입니다.

해와 달이 필요 없는 도시 — 어린양이 등불이 되시다

요한계시록 21:23 본문 →

그 도시는 비추어 줄 해나 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도시를 밝히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등불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21:23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이사야 60:19–20을 거의 그대로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시온의 영원한 빛이 되시므로 해와 달을 의지할 필요가 없고, 슬픔의 날들이 끝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요한은 해와 달이 우주에서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가 해와 달의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초점은 빛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린양이 등불이시라는 뜻

하나님의 영광이 도시를 밝히고, 그 영광을 비추는 등불은 어린양입니다. 그분은 도시의 여러 주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도시를 밝히는 일에서 중심 역할을 하시는 분입니다.

1장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은 일곱 금 등잔대 사이에 서 계셨고, 그분의 얼굴은 힘껏 비치는 해처럼 빛났습니다(1:16). 이제 그분의 빛은 잠시 눈을 부시게 하는 광경이 아니라, 도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빛입니다.

바벨론의 등불과 새 예루살렘의 등불

18:23에서 바벨론에는 등불 빛이 다시는 비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되었습니다. 그 도시의 번영과 함께 일상의 빛도 사라졌습니다.

바벨론의 등불은 꺼졌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어린양이 등불이십니다.

그런데 그 빛이 도시 안에만 머무르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복음 1:4–5와 8:12의 빛에 관한 말씀도 이 장면과 함께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문이 닫히지 않는 도시 — 민족들과 왕들이 가져오는 영광

요한계시록 21:24–26 본문 →

민족들은 그 도시의 빛으로 다닐 것이고, 땅의 왕들은 자기들의 영광을 그 도시로 가져옵니다.요한계시록 21:24 · 두루새김

요한계시록에서 민족들과 왕들은 여러 차례 짐승 편에 섰습니다. 16장에서 온 세상의 왕들이 마지막 전쟁을 위해 모였고, 17장에서 열 왕이 힘과 권위를 짐승에게 넘겨주었으며, 19장에서 땅의 왕들과 그 군대가 흰 말을 타신 분에게 대항하려고 모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민족들의 영광은 무엇인가?

이사야 60:3에서는 민족들과 왕들이 시온의 빛으로 나아오고, 60:11에서는 시온의 문들이 언제나 열려 민족들의 재물과 왕들이 들어옵니다. 요한은 이스라엘과 시온의 회복을 향한 이 소망을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에 적용합니다.

민족들은 이제 짐승을 경배하러 모이지 않고 하나님의 빛 가운데 다닙니다. 그들의 영광이 하나님과 무관한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영광이 하나님이 비추시는 도시를 향한다는 뜻입니다. 다만 본문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현재의 모든 문화적 성취가 아무 변화 없이 새 창조에 보존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심판받은 왕들이 다시 들어오는가?

본문은 21:24의 왕들이 앞서 어린양을 대적하다 심판받은 동일한 개인들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심판받은 모든 왕이 결국 구원받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이 구절의 긍정적인 의미를 지워서도 안 됩니다.

왕들은 한때 권위를 짐승에게 넘겨주었지만, 이제는 영광을 하나님의 도시로 가져옵니다. 그들의 움직임이 향하는 중심이 달라졌습니다.

왜 성벽이 있는데 문을 닫지 않는가?

도시의 문들은 낮에 결코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밤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21:25 · 두루새김

보통 성벽은 외부의 위협을 막고, 문은 필요할 때 열고 닫으며 도시를 보호합니다. 고대 도시에서 밤은 경계와 위험의 시간이었고, 문을 닫는 것은 도시를 지키는 중요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의 등불이 있어 밤이 없습니다. 문을 닫아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바벨론은 많은 권력과 재물에 의지했지만 무너졌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문을 닫지 않으면서도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은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의 민족들과 아무 관련 없는 고립된 집단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 창조의 중심에서 민족들을 향해 빛을 비춥니다.

그러나 열린 문이 아무런 구별도 없는 출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은 열려 있지만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한다

요한계시록 21:27 본문 →

그 도시에는 어떤 더러운 것도, 역겨운 짓이나 거짓된 행동을 하는 사람도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의 두루마리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만 들어갈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1:27 · 두루새김

문들은 결코 닫히지 않는데,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은 두려움 때문에 닫혀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바벨론의 더러움과 거짓이 그대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몸소 성전으로 계시는 거룩한 도시는 거짓과 우상 숭배, 더러움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일 수 없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의 두루마리

20:15에서는 생명의 두루마리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이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이제 21장은 그 두루마리를 「어린양의 생명의 두루마리」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피로 사람들을 값을 치르고 사서 하나님께 속하게 하신 어린양과 연결된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속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도덕적 우월함이 아니라 어린양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그 도시에는 거짓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어린양의 구원은 거짓과 불의를 그대로 인정하는 구원이 아니고, 새 예루살렘의 거룩함은 어린양의 구원과 무관한 인간의 공로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열린 문과 출입 제한은 모순인가?

한 읽기는 이 구절을 새 창조에 속한 사람들과 최종 심판을 받은 사람들 사이의 구별을 다시 확인하는 선언으로 봅니다. 20:15의 생명의 두루마리와 불못, 21:8의 둘째 죽음이 그 근거입니다. 다른 읽기는 열린 문과 민족들의 이동이라는 이미지에 주목하여 새 예루살렘의 폭넓은 구원의 전망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21:27은 어린양의 생명의 두루마리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만 들어간다고 출입의 조건을 분명히 제시하므로, 마지막 심판 이후에 누구든지 아무 조건 없이 들어올 수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도시가 닫혀 있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곳이 아니라는 열린 문의 의미를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곳은 거룩하지만 불안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열려 있지만 거짓과 불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민족들을 비추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할 다른 권력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밤이 없는 도시의 열린 문

요한계시록 21:1–27 본문 →

21장을 다 읽고 나면 17–18장의 바벨론이 떠오릅니다. 두 도시는 모두 화려하고 여러 민족과 관계를 맺지만, 사람들을 함께 살게 하는 원리는 전혀 다릅니다. 바벨론은 사치와 재물로 왕들과 상인들을 모았고 사람의 몸과 목숨마저 거래했지만, 무너지자 그들은 멀찍이 서서 울 뿐이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시며 눈물을 닦아 주시고, 생명의 물을 거저 주시며, 거짓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도시의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어린양이 반복해서 등장하십니다. 도시는 어린양의 아내이고, 기초 돌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으며, 어린양은 하나님과 함께 도시의 성전이시고 도시의 등불이십니다.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린양의 생명의 두루마리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새 창조는 어린양의 이야기가 끝난 뒤 시작되는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의 구원이 이루어 낸 현실입니다.

그 도시의 참된 아름다움은 보석의 수와 금의 양, 도시의 높이나 성벽의 두께에 있지 않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어린양이 그들을 비추고 계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한때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거룩한 장소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보는 도시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몸소 성전이십니다.

한때 사람들은 밤이 오면 문을 닫고 위험을 경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에는 밤이 없습니다.

한때 눈물과 죽음과 고통이 사람의 삶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눈물을 닦아 주셨고, 이전 것들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민족들이 하나님의 빛 가운데 다닙니다. 열두 문은 동쪽에도, 북쪽에도, 남쪽에도, 서쪽에도 열려 있고, 그 안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몸소 함께 계시기에, 더 이상 성전도 필요하지 않고 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을 필요도 없는 도시.

요한계시록 21장은 그 빛나는 도시에 들어갈 사람들을 밝히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