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12–20장 · 용과 짐승과 바벨론
죽음마저 심판받는 날
요한계시록 20장을 읽을 때 사람들의 관심은 흔히 「천 년」이라는 숫자에 집중됩니다.
사탄이 천 년 동안 묶이고,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립니다.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이 풀려나고 마지막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천 년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는지, 문자 그대로 천 년인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인지 후인지에 관한 논의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숫자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동안 이 장이 보여 주는 더 큰 변화를 지나치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죽임당한 사람들이 왕좌에 앉습니다. 마지막에는 죽음 자체가 심판받습니다.
이 장의 중심에는 세 가지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첫째, 사탄이 사람들을 속이는 권력은 어디까지 미칠 수 있습니까?
둘째, 죽임당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다스릴 수 있습니까?
셋째,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무력한 존재라면, 죽음 자체는 누구 앞에 서야 합니까?
요한은 이 질문들에 추상적인 설명으로 답하지 않습니다. 열쇠와 사슬, 왕좌와 두루마리, 불과 불못을 보여 줍니다. 이 장면들을 따라가면 천 년이라는 숫자를 둘러싼 논쟁보다 더 근본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탄도, 짐승도, 죽음도 마지막 권위를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열쇠를 가진 천사 — 사탄은 무엇을 할 수 없게 되는가?
나는 천사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끝없이 깊은 구덩이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고, 손에는 큰 사슬을 들고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20:1 · 두루새김
요한은 천사 한 명을 봅니다.
그 천사의 모습은 앞 장에서 등장하셨던 흰 말을 타신 예수님과 상당히 다릅니다. 그에게는 불꽃 같은 눈이나 많은 왕관이 묘사되지 않고, 하늘의 군대가 뒤따른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는 열쇠와 사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붙잡을 대상은 사탄입니다.
그 천사는 용을 붙잡아 천 년 동안 묶어 두었습니다. 그 용은 마귀이며 사탄인 그 옛 뱀입니다.요한계시록 20:2 · 두루새김
이 구절에는 사탄을 가리키는 이름들, 곧 용, 옛 뱀, 마귀, 사탄이 모여 있습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12:9에서 용의 정체를 밝혔던 표현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용은 단지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거대한 동물이 아닙니다.
「옛 뱀」은 창세기 3장의 뱀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의 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며 사람을 속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사탄의 활동 가운데 중요한 것은 속임수입니다. 12:9에서는 그가 온 세상을 속이는 자로 묘사되고, 13장에서는 용의 권력을 받은 짐승들이 사람들을 속여 거짓된 경배로 이끕니다.
이제 그 용이 붙잡힙니다.
그를 붙잡는 것은 한 천사입니다. 요한은 사탄과 천사 사이에 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천사는 내려오고, 용을 붙잡고, 묶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권위에 맞서는 독립적인 또 하나의 절대자가 아닙니다.
그의 활동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한은 사탄이 동의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쇠는 누가 가지고 있는가?
20장의 천사가 가진 열쇠는 9:1에 등장했던 열쇠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별에게 끝없이 깊은 구덩이의 열쇠가 주어졌고, 그 열쇠로 구덩이를 열자 재앙을 일으키는 존재들이 나왔습니다. 20장에서는 같은 종류의 구덩이가 다시 등장하지만, 천사의 행동은 반대입니다.
9장에서는 열었습니다.
20장에서는 닫습니다.
열쇠를 가진 존재에게는 문을 여닫을 권한이 있습니다. 끝없이 깊은 구덩이는 사탄조차 마음대로 이용하거나 벗어날 수 있는 장소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20장의 천사는 구덩이 입구를 닫은 뒤 봉인까지 합니다.
천사는 사탄을 끝없이 깊은 구덩이에 던지고 입구를 닫아 봉인했습니다. 천 년이 다 찰 때까지 사탄이 민족들을 더는 속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는 사탄이 잠시 풀려나야 합니다.요한계시록 20:3 · 두루새김
붙잡았습니다.
묶었습니다.
던졌습니다.
닫았습니다.
봉인했습니다.
짧은 구절 안에 행동들이 연속해서 쌓이며, 사탄이 확실히 갇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재료로 사슬이 만들어졌는가, 영적 존재를 어떻게 묶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요한이 직접 밝히는, 사탄을 가두는 목적입니다.
사탄은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가?
3절은 사탄이 묶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탄이 민족들을 더는 속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속이지 못하게」는 사람들이 거짓을 믿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도록 이끌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을 근거로 사탄이 천 년 동안 어떤 종류의 악도 전혀 일으킬 수 없다거나, 그 기간에 인간의 죄와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구덩이에 갇힌다는 묘사를 단순한 영향력 감소 정도로 약화시키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요한은 실제로 붙잡고 묶고 가두고 봉인하는 장면을 보여 주면서, 그 행동의 목적을 민족들을 속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한정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7–8절을 읽을 때 중요해집니다. 천 년이 끝나고 사탄이 풀려나자 그가 곧바로 하는 일은 민족들을 속여 전쟁으로 모으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사탄이 민족들을 속이지 못하도록 갇히고, 마지막에는 풀려나 민족들을 속입니다.
이 연결은 천 년이라는 기간을 해석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분명한 문맥상의 단서입니다.
왜 다시 풀려나야 하는가?
사탄을 가둘 수 있다면 왜 영원히 가두지 않습니까? 본문은 「사탄이 잠시 풀려나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해야 한다」는 어떤 일이 정해진 과정 안에서 일어나야 함을 나타낼 때 쓰는 말로, 사탄이 풀려나는 일조차 하나님의 다스림 밖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그 석방을 허락하시는지는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류를 마지막으로 시험하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고, 악의 본질을 최종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런 설명들은 가능성을 가진 신학적 추론이지만, 20:3이 직접 밝힌 이유는 아닙니다.
사탄은 풀려나지만 잠시뿐입니다. 그가 갇혀 있는 데에도 기간이 있고, 풀려나 있는 데에도 기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는 사탄이 넘어서지 못할 마지막 결정이 있습니다.
이제 요한의 시선이 사탄의 감옥에서 왕좌들로 옮겨 갑니다.
제단 아래에 있던 이들이 보좌 위에 앉다
나는 또 왕좌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이들이 그 위에 앉았고, 그들에게 심판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나는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또 짐승이나 그 형상에 절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으로 다스렸습니다.요한계시록 20:4 · 두루새김
여기서는 장면의 위치가 갑자기 바뀝니다.
왕좌에 앉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임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증언을 침묵시키기 위해 권력은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을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는 사람들로 보게 됩니다.
제단 아래의 영혼과 왕좌 위의 영혼
이 장면은 요한계시록 6:9–11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들이 가진 증언 때문에 죽임당한 이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제단 아래에서 자신들의 피에 대한 심판을 호소했고, 흰옷을 받았지만 아직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20장에서 그들과 닮은 사람들이 나타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6장에서는 죽임당한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렸습니다. 20장에서는 그들에게 심판과 관련된 권한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두 장면을 이어 읽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당한 죽음이 마지막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세상은 그들이 죽어야 마땅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상 속에서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는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그들의 억울함이 풀리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심판할 권한」인가, 「그들을 위한 판결」인가?
원문은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다」(κρίμα)는 구조이고, 두루새김은 이를 「그들에게 심판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로 옮겼습니다. 왕좌 위에 앉아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는 장면이므로, 그들에게 판단하고 다스리는 권한이 주어졌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읽기는 「그들을 위한 판결이 내려졌다」는 뜻입니다. 이 읽기의 배경은 다니엘 7:22로, 작은 뿔이 거룩한 이들을 이기는 듯하다가 옛적부터 계신 분이 오시자 거룩한 이들을 위한 판결이 내려지고 그들이 나라를 차지합니다. 이 때문에 20:4의 「심판이 주어졌다」를 성도들의 억울함이 풀렸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해석에 무게가 실립니다.
두 해석은 반드시 서로를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도 성도들이 정당한 판결을 받는 일과 그들에게 다스릴 권한이 주어지는 일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짐승의 권력 아래에서 죽임당했던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는 장면 자체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보여 줍니다.
세상은 그들을 패배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예수님의 통치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짐승에게 절하지 않았던 사람들
4절에서는 순교와 경배의 문제가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증언 때문에 죽임당했고, 짐승에게 절하지 않았으며 그 표도 받지 않았습니다. 문법적으로 이것이 죽임당한 한 무리를 여러 특징으로 설명하는지, 순교자들과 짐승을 경배하지 않은 더 넓은 신실한 이들을 함께 가리키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중심적인 강조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짐승이 요구한 충성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13장에서 짐승의 표가 없으면 사고팔 수 없었고, 그러한 압력 속에서도 이들은 짐승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일부는 죽임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왕좌의 환상 안에 등장합니다.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권력 앞에서 그들은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보는 그들의 실제 지위는 다릅니다.
짐승이 그들의 생명을 빼앗았지만, 예수님께 속한 그들의 미래까지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통치를 설명하는 표현 때문에 20장 전체에서 가장 오래 논의되어 온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살아나서」라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뜻합니까?
「이들이 살아난 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 천 년의 의미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
이들이 살아난 것이 첫째 부활입니다.요한계시록 20:5 · 두루새김
요한은 앞서 본 장면에 「첫째 부활」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 짧은 문장은 많은 질문을 낳습니다. 첫째 부활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입니까, 아니면 죽임당한 성도들이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을 가리킵니까? 천 년은 문자 그대로의 기간입니까, 상징적인 기간입니까? 이 장면은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뒤에 일어나는 일입니까, 아니면 그 승리가 가져온 현실을 다른 관점에서 보여 주는 것입니까?
이 질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한 가지씩 간단히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해석이 갈리는 지점을 살펴보기 전에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살아나서」와 「부활」
4절의 「살아나서」는 문맥에 따라 살아 있다는 상태나 다시 생명을 얻는 일을 표현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5절은 그 장면을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단순히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는 뜻으로만 처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실제로 생명과 죽음에 관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나는지에 관해서는 설명이 간결합니다. 4절에서 요한이 직접 본 것은 목이 잘린 사람들의 「영혼」이며, 이것은 6:9에서 제단 아래에 있었던 순교자들의 영혼과 닮았습니다.
그래서 해석이 갈립니다. 한 해석은 「살아나서」와 「부활」이라는 표현의 일반적인 의미를 근거로, 이들의 몸이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해석은 요한이 영혼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첫째 부활이 순교자들의 하늘에서의 생명과 통치, 또는 예수님 안에서 시작되는 영적 생명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두 해석은 모두 본문에서 출발하지만 서로 다른 요소에 무게를 둡니다.
요한은 첫째 부활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그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보장되는지 이야기합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둘째 죽음은 이들에게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으로 다스릴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0:6 · 두루새김
이 사람들은 이미 첫 번째 죽음을 경험했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목이 잘린 사람들까지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둘째 죽음이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죽음은 그들의 몸을 해칠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에 대한 마지막 권리를 갖지 못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11에서 서머나 교회에 주신 약속, 곧 이기는 사람이 둘째 죽음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제 죽음 앞에서도 신실했던 사람들이 둘째 죽음의 힘에서 벗어난 이들로 나타납니다.
왕이면서 제사장인 사람들
6절은 그들이 다스릴 권한을 받는 사람들일 뿐 아니라 제사장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출애굽기 19:6의 오래된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뒤 그들이 자신에게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제사장 나라의 언어를 예수님께 속한 백성에게 적용합니다(1:6; 5:9–10).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로 여러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하여 하나님께 속한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셨습니다. 20:6은 그 약속을 다시 들려줍니다.
그들의 권한은 예수님에게서 분리된 독립적인 지배권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립니다. 짐승은 여러 왕의 권한을 자기에게 집중시켜 사람들을 지배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자신의 통치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백성은 예수님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짐승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렇다면 천 년은 언제인가?
요한계시록에서 「천 년」이라는 표현은 이 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갇혀 있는 기간과 성도들이 다스리는 기간이 같게 묘사되고, 그 기간이 끝날 때 사탄이 풀려납니다. 그러나 본문은 천 년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직접 풀이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해석 전통에서는 크게 세 읽기가 발전했습니다. 19장의 승리 뒤에 천 년 통치가 이어진다고 보는 전천년설, 천 년을 예수님의 첫 오심과 최종적인 오심 사이에 이미 시작된 통치의 상징으로 보는 무천년설, 예수님의 복음과 통치가 역사 속에서 널리 드러나는 긴 기간 뒤에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보는 후천년설입니다. 이 차이는 천 년을 숫자 그대로 읽느냐에만 있지 않고, 19장과 20장의 환상이 시간적으로 이어지는지 같은 시대를 다른 관점에서 묘사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천 년이 시간의 흐름에서 정확히 어디에 놓이는지를 하나로 확정하는 것은 본문이 직접 밝힌 설명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논쟁과 관계없이 요한이 보여 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탄의 권력은 제한됩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스립니다.
죽음은 그들에게 최종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천 년이라는 기간에도 끝이 있습니다.
그 끝에서 사탄은 마지막으로 행동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다수 사본에는 5절의 「이들이 살아난 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앞에 나머지 죽은 사람들이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않았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 긴 읽기는 첫째 부활과 나머지 죽은 사람들의 생명을 직접 대조하게 만들므로 부활의 성격과 순서를 논의할 때 중요한 근거로 사용되어 왔지만, 두루새김이 채택한 짧은 읽기에는 그 문장이 없으므로 해설에서도 그 문장을 논증의 기초로 삼지 않습니다. 짧은 읽기의 원문은 「이것이 첫째 부활」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앞에서 사람들이 살아나 예수님과 함께 다스린 장면을 가리키므로 두루새김은 「이들이 살아난 것이」로 풀어 옮겼습니다. 천 년에 관해 전천년설은 첫째 부활을 신자들의 몸의 부활로 보며(그 기간을 문자 그대로 천 년으로 읽는 견해가 많지만 반드시 정확한 천 년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19장에서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불못에 던져지고 20장에서 사탄이 묶이며 마지막에 사탄도 불못에 던져지는 흐름이 차례로 진행되는 사건으로 읽기 자연스럽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무천년설은 사탄이 묶인 것을 예수님의 승리로 사탄의 활동이 제한되었다는 뜻으로, 성도들의 통치를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현재의 하늘 통치로 읽으며, 요한계시록이 다른 곳에서도 마지막 심판을 여러 환상으로 반복해 보여 주고 19장의 전쟁과 20장의 곡과 마곡 전쟁이 비슷한 최종 대결을 묘사한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두 읽기는 나름의 본문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곡과 마곡 — 사탄의 마지막 속임수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도성
천 년이 다 차면 사탄은 감옥에서 풀려날 것입니다. 사탄은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속여 전쟁에 모으려고 나갈 것입니다. 그들의 수는 바닷가 모래처럼 많습니다.요한계시록 20:7–8 · 두루새김
풀려난 사탄이 처음 하는 일은 3절에서 그가 묶인 이유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그는 직접 전쟁터에 나가 군대를 지휘하기보다, 여러 민족을 속여 전쟁으로 끌어들입니다. 사탄의 활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과 속임수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 민족들에게 뜻밖의 이름이 붙습니다. 「곡과 마곡」입니다.
에스겔의 곡과 마곡은 누구였는가?
곡과 마곡은 에스겔 38–39장에 등장합니다. 에스겔 38:2에서 곡은 마곡 땅과 관련된 통치자로, 여러 민족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엄청난 군대를 이끌고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지만, 하나님은 그 공격을 통해 자신의 거룩함을 민족들 앞에 드러내시고 곡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으로 패배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은 이 전쟁 이미지를 가져오면서 범위를 넓힙니다. 에스겔에서는 곡이라는 통치자와 마곡이라는 땅이 구별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이라고 말합니다. 곡과 마곡이 온 세계에서 모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민족들을 가리키는 상징이 된 것입니다.
에스겔의 곡과 마곡 이야기는 후대 기독교 해석에서 다양한 역사적 적과 연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예언과 요한계시록의 사용을 존중한다면, 이 이름을 현대의 특정 국가나 민족으로 곧바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이 보여 주려는 것은 특정한 국가의 군사적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다시 온 세계에서 모이는 모습입니다.
바닷가 모래처럼 많은 군대
「바닷가 모래처럼」은 성경에서 매우 익숙한 표현입니다. 창세기 22:17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약속에, 여호수아 11:4에서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모인 군대에 쓰였습니다. 정확한 인원수가 아니라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수가 얼마나 크든 전쟁의 결과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넓은 땅 위로 올라와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받는 도시를 에워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요한계시록 20:9 · 두루새김
이 장면은 극도로 짧습니다.
독자가 예상하는,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전투는 벌어지지 않습니다. 적군이 성벽을 무너뜨리는 장면도, 성도들이 어떻게 방어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싸움을 위해 모인 군대는 실제 전투의 과정을 보여 주기도 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것은 앞 장에서 짐승의 군대가 말 타신 예수님과 싸우려고 모였지만 실제 전투 장면은 생략되었던 모습과 닮았습니다. 두 환상이 같은 전쟁을 보여 주든 구별되는 두 전쟁을 묘사하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세력의 수와 힘은 마지막 승리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사랑받는 도시」는 예루살렘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입니다. 사탄의 군대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이들을 공격하려 하지만, 그들에게 마지막 해를 입히지 못합니다.
사탄은 온 세상의 민족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을 내려 보내십니다.
사탄은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이 약속한 승리를 실제로 이루어 주지는 못합니다. 그의 마지막 속임수는 하나님의 백성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마지막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사탄 자신이 심판받다
그들을 속이던 마귀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졌습니다. 짐승과 거짓 예언자도 그곳에 있습니다. 그 셋은 밤낮으로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0:10 · 두루새김
사탄의 마지막은 처음에 갇혔을 때와 다릅니다. 처음에 그는 끝없이 깊은 구덩이에 갇혔다가 천 년이 끝난 뒤 잠시 풀려났습니다. 이제는 19장에서 먼저 불못에 던져진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같은 곳에 던져집니다.
용은 짐승에게 권력을 주었고, 거짓 예언자는 사람들을 속여 짐승을 경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 세 존재가 모두 심판받습니다.
10절이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겪는다고 말하는 직접적인 대상은 마귀와 짐승과 거짓 예언자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근거로 20:15에서 불못에 던져지는 모든 인간의 상태까지 아무 구별 없이 똑같은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본문이 직접 밝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러나 사탄에게는 한 가지가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민족들을 속이기 위해 다시 풀려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의 환상은 예상 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사탄을 심판하는 장면이 끝나자 왕좌가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여러 왕좌가 아니라 하나의 크고 흰 왕좌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모든 죽은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9장의 전쟁과 20장의 곡과 마곡 전쟁이 같은 전쟁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 주는지, 시간적으로 구별되는 두 전쟁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사랑받는 도시」도 두 가지로 읽힙니다. 시편 87:2가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신다고 노래하고 구약에서 시온과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 머무시는 장소와 깊이 연결되므로, 이 도시를 실제 예루살렘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다른 해석은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아내인 신부로 나타나듯 요한계시록 안에서 도시가 단순히 지리적인 건축물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이 도시를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봅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백성이 실제로 어느 지점에 군사 진지를 설치했는지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크고 흰 왕좌 — 하늘과 땅이 물러나고 두루마리들이 펼쳐지다
나는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그분 앞에서 땅과 하늘이 달아났고, 그것들이 있을 자리는 더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요한계시록 20:11 · 두루새김
앞에서는 사탄과 그의 군대가 하나님의 백성을 에워쌌습니다. 이제는 심판자 앞에서 하늘과 땅이 달아납니다. 세상을 이루는 하늘과 땅조차 피난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의 모든 입자가 사라지는 과정에 관한 과학적 설명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이전 세계의 질서가 더 이상 그대로 유지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사야 34:4와 51:6의 예언적 표현, 그리고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고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움직였던 요한계시록 6:14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제 땅과 하늘이 달아나고, 왕좌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없습니다.
왕좌에 앉으신 분은 누구인가?
요한은 왕좌에 앉으신 분의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앞선 환상에서 왕좌에 앉으신 분은 하나님으로 반복해서 묘사되었으므로, 여기서도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자로 나타나신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신약의 다른 본문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심판하신다는 사실도 강조하지만(사도행전 17:31; 요한복음 5:22–27), 20장은 이 둘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왕좌 앞에 누가 서 있습니까?
나는 죽은 사람들이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모두 왕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루마리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두루마리도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두루마리였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두루마리들에 기록된 것을 바탕으로, 자기들이 한 일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요한계시록 20:12 · 두루새김
높은 사람들과 낮은 사람들의 구별은 앞서 짐승의 군대가 패배하던 장면에서도 나왔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그 차이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왕으로 살았고 어떤 사람은 노예로 살았으며, 어떤 사람은 큰 권력을 행사했고 어떤 사람은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죽었습니다.
그러나 왕좌 앞에서는 모두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입니다.
땅에서 높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면하게 해 주지 않습니다. 낮은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그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한 일이 판단됩니다.
두루마리들이 펼쳐진다
이 장면은 다니엘 7:9–10을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은 하늘의 왕좌들이 놓이고 옛적부터 계신 분이 앉으시며 책들이 펼쳐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 장면은 짐승으로 상징되는 제국들의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요한은 두 종류의 두루마리를 구분합니다. 하나는 여러 두루마리들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두루마리입니다.
여러 두루마리에는 사람들이 한 일이 기록되어 있고, 그 기록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삶과 무관하게 누군가를 마음대로 죄인으로 판단하는 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18장에서 바벨론은 자신이 얼마나 부유했는지 기억했고, 상인들은 바벨론을 통해 얻은 이익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도시에서 흘린 피를 기억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에서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두루마리는 무엇인가?
생명의 두루마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이미 등장했던 이미지입니다. 3:5에서는 이기는 사람의 이름을 생명의 두루마리에서 지우지 않겠다는 약속이 주어졌고, 13:8과 17:8에서는 생명의 두루마리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이 짐승을 보고 놀라며 절했습니다.
여러 두루마리는 그들이 한 일을 보여 줍니다. 생명의 두루마리는 누가 생명에 속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한 일이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도(12–13절), 마지막에는 생명의 두루마리에 이름이 있는지 여부를 결정적으로 언급합니다(15절).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사람은 오직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산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하시므로 사람이 실제로 한 일은 심판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본문과 맞지 않습니다.
이 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본문은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21:27에서 생명의 두루마리는 예수님의 생명의 두루마리라고 불립니다. 20장의 심판 역시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과 무관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살아온 삶을 잊지 않으시며, 예수님께 속한 생명도 잊지 않으십니다.
바다와 죽음과 하데스가 죽은 사람들을 내주다
바다는 그 안에 있던 죽은 사람들을 내주었고, 죽음과 하데스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사람들을 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한 일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요한계시록 20:13 · 두루새김
이것은 시체들이 어디에 묻혀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요한은 죽은 사람들을 붙잡아 두고 있던 영역들이 그들을 내주도록 요구받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왜 바다가 따로 등장하는가?
고대 세계에서 바다는 위험과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습니다. 바다에서 죽은 사람은 땅에 묻히지 못할 수도 있었고, 시신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다조차 그 안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줍니다.
어떤 죽음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사람을 숨겨 주지 못합니다. 죽은 장소가 어디인지, 시신이 발견되었는지, 무덤이 남아 있는지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데스는 죽은 사람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을 14절의 불못과 곧바로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데스가 죽은 사람들을 내준 뒤 자신도 불못에 던져진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사람들을 붙잡아 둘 수 없다
요한계시록 1:17–18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처음이시요 마지막이시며, 죽으셨지만 이제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고 죽음과 하데스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8에서는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가 창백한 말을 타고 등장했고, 하데스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 장면에서 죽음과 하데스는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무서운 권력처럼 나타났습니다.
앞에서는 죽음과 하데스가 사람들을 데려갔습니다.
이제는 데려갔던 사람들을 다시 내줍니다.
1장에서 죽음과 하데스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권한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죽음 가운데 있더라도 그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되돌릴 수 없는 마지막 현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환상에서 죽음은 사람들을 영원히 붙잡아 둘 권한을 갖지 못합니다. 오히려 죽음 자신이 심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이 다음 절에서 일어납니다.
죽음이 죽다 — 둘째 죽음의 역설
죽음과 하데스가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못이 둘째 죽음입니다.요한계시록 20:14 · 두루새김
우리는 죽음을 보통 어떤 사건이나 상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죽음을 하나의 권력처럼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권력 자체가 심판받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고, 죽음을 완전히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권력자도 죽고, 부자도 죽고, 이름 없는 사람도 죽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죽음이 마지막 현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 자신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선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멸망하는 원수
고린도전서 15:25–26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모든 원수를 자신의 발 아래 두실 때까지 다스리셔야 하며, 마지막으로 멸망할 원수가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 승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은 그 진실을 강렬한 환상의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이사야 25:8에서도 하나님이 죽음을 영원히 삼키시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으실 것이라는 약속이 나타납니다. 원래 이사야의 문맥에서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수치를 없애시는 소망과 연결되며, 요한계시록은 이 소망을 예수님의 승리 안에서 다시 보여 줍니다.
죽음이 인간의 마지막 원수라면, 죽음 자신에게도 마지막이 있습니다.
왜 「둘째 죽음」인가?
2:11에서는 이기는 사람이 둘째 죽음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고, 20:6에서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둘째 죽음이 힘을 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20:14에서 둘째 죽음이 불못이라고 분명히 밝혀집니다.
이렇게 20장의 처음과 끝이 서로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죽임당한 사람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둘째 죽음의 힘에서 벗어납니다. 마지막에는 둘째 죽음이 무엇인지 밝혀지며, 죽음 자체도 불못에 던져집니다.
불못을 영원히 의식이 있는 상태로 형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과 최종적인 멸망의 이미지로 이해하는 전통 사이에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직접 밝히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불못은 마지막 심판의 이미지이며,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그 둘째 죽음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생명의 두루마리에 이름이 있는가?
생명의 두루마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지 불못에 던져졌습니다.요한계시록 20:15 · 두루새김
요한계시록 20장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앞에서는 모든 죽은 사람이 한 일이 기록된 두루마리들이 펼쳐졌습니다. 이제 생명의 두루마리가 마지막으로 등장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의 실제 삶을 판단하는 일이라는 사실과 생명이 하나님과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함께 붙잡게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 큰 권력을 얻을 수도 있고, 거대한 도시를 세울 수도 있으며, 오래 기억될 업적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심판에서 세상이 기억하는 이름의 크기를 묻지 않습니다. 생명의 두루마리에 이름이 있는지를 묻습니다.
짐승은 사람들의 이마와 손에 자기 표를 받게 했고, 그 표를 받은 사람들은 세상의 거래와 권력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지닌 사람들로 묘사되었습니다(14:1). 짐승의 표가 제공했던 안전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20:15는 엄중한 심판의 선언이며,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로 바꿀 수 없습니다. 동시에 본문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이 복이 있고 거룩하며, 둘째 죽음의 힘에서 벗어나 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 속한 생명도 실제로 존재합니다.
조금 더 깊이
불못에 관한 해석의 차이는 20장 안에서도 확인됩니다. 20:10은 마귀와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겪는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20:14–15는 죽음과 하데스, 그리고 생명의 두루마리에 이름이 없는 사람들이 불못에 던져진다고 말할 뿐 그들의 상태를 10절과 같은 문장으로 다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만으로 그와 관련된 모든 신학적 논쟁을 끝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라고 설명하면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부활과 죽음의 최종적인 패배를 연결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뒤 마주하게 된 죽음의 현실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통해 이어진 구원의 역사 끝에 예수님 안에서 죽음을 이기는 생명으로 드러났고, 요한계시록 20장은 그 소망을 환상의 장면으로 펼쳐 놓습니다.
이 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통치 — 권력을 뒤집는 것이 아니라 끝내는 승리
요한계시록 20장의 하나님의 통치는 점점 더 근본적인 권력의 문제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속이는 권력이 제한되고, 그다음에는 그 권력에 굴복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스립니다. 그다음에는 속이는 자 자신이 심판받고, 마지막에는 인간을 붙잡고 있던 죽음의 힘 자체가 끝납니다.
그것은 기존의 왕보다 더 강한 왕이 등장하는 일도, 억압적인 권력을 새로운 억압적인 권력으로 교체하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속이고 죽이고 억누르던 권력들이 마지막 권한을 잃는 일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죽지 않는다는 단순한 약속이 아닙니다. 본문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죽임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나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고, 둘째 죽음은 그들에게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 소망의 중심에는 천 년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은 한 천사가 열쇠와 사슬을 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크고 흰 왕좌 앞에서 바다와 죽음과 하데스가 붙잡고 있던 죽은 사람들을 내주고, 마침내 죽음과 하데스 자신이 불못에 던져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사탄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마지막에는 죽음 자체가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처음에는 열쇠로 구덩이를 닫았습니다. 마지막에는 두루마리들을 펼쳤습니다.
거짓된 권력은 제한되고, 감추어졌던 삶은 하나님의 판단 앞에 드러납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마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마지막 권한을 잃습니다.
죽음은 많은 사람의 마지막을 가져왔지만, 자신의 마지막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왕좌 앞에는 펼쳐진 두루마리들이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