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4–5장 · 하늘의 왕좌와 예배

사자를 기다렸는데 어린양이 서 계셨습니다

하늘의 보좌 앞에서 한 사람이 울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는 쉼 없는 찬양이 울려 퍼졌습니다. 스물네 장로가 관을 벗어 던지고, 네 생물이 창조주의 거룩함을 선포했습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한은 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 위에 두루마리 하나가 있는데, 그것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없습니다.

도대체 그 두루마리가 무엇이기에 요한은 그토록 슬피 우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수많은 천상적 존재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것을 열 수 없는 것일까요?

그때 장로 하나가 요한에게 말합니다. 「울지 마라. 보아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다윗의 뿌리께서 이기셔서 그 두루마리를 여시고 그 일곱 인장을 떼실 수 있게 되셨다.」

드디어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분이 나타났습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입니다.

다윗의 뿌리입니다.

승리하신 왕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실제로 보는 것은 사자가 아닙니다. 보좌와 생물 넷과 장로들의 한가운데에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 서 있습니다.

사자가 이기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서 계십니다.

이 한 장면은 요한계시록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정복자의 모습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죽임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서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십니다.

요한의 눈물로 시작된 장은 마침내 온 피조물의 찬양으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서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65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의 오른손 위에 놓인 두루마리

요한계시록 5:1–4 본문 →

왜 안쪽과 바깥쪽에 모두 글이 적혀 있을까

요한이 처음 보는 것은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 위에 있는 두루마리입니다.

그리고 나는 보좌에 앉은 이의 오른손 위에 있는 두루마리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안쪽과 바깥쪽에 글이 적혀 있었고, 인장 일곱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5:1 · 본디새김

고대의 두루마리는 일반적으로 파피루스나 가죽을 이어 만든 긴 문서였습니다. 말아 보관할 때는 보통 안쪽에 글을 적어 보호했지만, 바깥쪽에도 글을 적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요한이 본 두루마리에는 양쪽 모두 글이 적혀 있습니다.

이 장면은 에스겔 2:9–10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이 본 두루마리에도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고, 그 내용은 애가와 탄식과 재앙에 관한 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에스겔에게 그 두루마리를 먹고 이스라엘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에스겔 3:1–4). 그것을 받는 일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얻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명을 맡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두루마리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의 두루마리는 펼쳐져 있었고, 무엇이 적혀 있는지도 어느 정도 알려졌습니다. 요한이 보는 두루마리는 봉해져 있어 그 내용을 아직 볼 수 없습니다. 다니엘 12:4에서도 마지막 때까지 말씀을 봉해 두라는 명령이 등장하므로, 이 두루마리에는 에스겔의 예언 두루마리와 다니엘의 봉인된 말씀이라는 두 구약의 배경이 함께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루마리의 정확한 내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심판 계획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다음 장부터 인장들이 떼어질 때 전쟁과 굶주림, 죽음과 심판의 장면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포함하는 역사 전체의 목적, 곧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궁극적으로 어떻게 다루실 것인지를 나타내는 문서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두루마리를 땅의 소유권 문서나 유언장과 연결하는 해석도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 그렇게 부르지 않으며, 고대 문서 관습과의 유사성만으로 그 정체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뒤에서 인장들이 떼어질 때 실제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 나타나므로, 개인에게 전달되는 비밀 편지라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심판과 구원의 전개에 관계된 두루마리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5장은 그 내용을 상세하게 알려 주는 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루마리를 열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묻습니다.

힘센 천사는 왜 「누가 가장 강한가」라고 묻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힘센 천사 하나가 큰 소리로 선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열고 그 인장들을 떼기에 합당한가?」요한계시록 5:2 · 본디새김

하늘 전체에 울려 퍼질 만큼 큰 질문입니다. 천사는 누가 두루마리를 열 수 있을 만큼 강한지 묻지 않습니다. 누가 두루마리를 열기에 「합당한가」라고 묻습니다.

‘합당하다’는 말은 어떤 일이나 지위에 걸맞은 자격과 가치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힘이 있느냐보다, 그 일을 맡을 만한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질문을 선포하는 천사부터 「힘센 천사」라고 불리고, 요한은 이미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싼 놀라운 존재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아무도 두루마리를 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그 두루마리를 열거나 볼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요한계시록 5:3 · 본디새김

하늘, 땅 위, 땅 아래는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표현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낮은 곳까지 찾아보아도 합당한 존재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두루마리를 여는 일과 보는 일이 함께 언급됩니다. 내용을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살펴볼 자격조차 누구에게도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감추어 두셨는데 아무도 그 비밀번호를 알아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합당한 존재가 피조 세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피조물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앞으로 등장하실 어린양이 얼마나 특별한 분인지를 준비합니다.

요한은 왜 그렇게 많이 울었을까

그리고 나는 많이 울었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열기에도 그것을 보기에도 합당한 이가 아무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5:4 · 본디새김

그렇다면 왜 그것이 그토록 슬픈 일일까요? 요한은 두루마리의 정확한 내용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기대했던 특정한 미래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봐 울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환상이 놓인 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이제 그 뜻과 관계된 두루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보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고난과 세상의 악은 어떻게 다루어질까요? 본문이 요한의 내면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질문들은 가능한 함의를 살핀 것이며, 요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떠올리며 울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요한의 눈물이 이 장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는 만물의 창조주를 찬양하는 소리가 울렸는데, 지금은 창조주가 쥐고 계신 두루마리를 아무도 열 수 없습니다. 하늘에 보좌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요한은 바로 그 물음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사자가 이기셨다는 말을 듣고 어린양을 보다

요한계시록 5:5–6 본문 →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그때 장로 하나가 다가와 말합니다.

그러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울지 마라. 보아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다윗의 뿌리께서 이기셔서 그 두루마리를 여시고 그 일곱 인장을 떼실 수 있게 되셨다.」요한계시록 5:5 · 본디새김

이 문장에는 왕권을 나타내는 구약의 두 이미지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먼저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입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유다를 사자에 비유하고, 통치자의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창세기 49:9–10). 유다 지파와 왕권을 연결하는 본문입니다.

그다음 「다윗의 뿌리」가 나옵니다. 이사야 11:1에서는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한 싹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가지가 자라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하고, 11:10에서는 이새의 뿌리가 민족들을 위한 깃발로 서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질 위기에 놓였더라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통치자를 일으키시리라는 희망입니다. 그 통치자는 여호와야훼의 영으로 정의롭게 판단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의 권리를 바로잡는 왕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다윗 왕조의 희망을 예수님에게 적용합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와 다윗의 뿌리는 서로 다른 두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왕권을 지닌 한 분을 가리키는 두 표현입니다.

그런데 장로는 예수님께서 장차 이기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기셔서」라고 말합니다. 이미 승리가 이루어졌고, 그 승리 때문에 두루마리를 열 자격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와 싸워, 어떤 방식으로 승리하셨습니까? 5절은 아직 대답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사자의 강력한 모습이나 적들을 굴복시키는 장면을 기대할 만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들은 것은 사자, 본 것은 어린양

그리고 나는 보좌와 생물 넷의 한가운데, 그리고 장로들의 한가운데에 어린양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임을 당한 것 같았고, 뿔 일곱과 눈 일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눈들은 온 땅으로 보내지는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요한계시록 5:6 · 본디새김

구약에서 사자는 힘과 왕권을 나타낼 수 있는 동물입니다. 반면 어린양은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한쪽은 다른 존재를 제압할 수 있고, 다른 한쪽은 죽임당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사자와 어린양이라는 두 존재를 차례로 본 것이 아닙니다. 승리하신 사자가 누구인지 듣고, 그 승리자의 모습을 어린양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사자처럼 강하시면서 어린양처럼 온유하시다는 두 성품의 조합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본문의 전개는 사자의 승리가 어떤 승리인지 어린양의 모습으로 해석하게 만듭니다.

바로 그 모습이 승리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이 어린양은 죽임을 당한 것 같습니다. 그 표현은 죽임당한 일이 현재의 모습에도 새겨져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죽임당하신 어린양처럼 묘사합니다.

그런데 서 계십니다.

죽임당하신 흔적이 남아 있지만, 죽음에 붙잡혀 계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없었던 것처럼 나타나지 않으시고, 죽음의 흔적을 지워 버리신 승리자로 묘사되지도 않으십니다. 장로가 말한 승리는 죽임당하시는 일을 피하신 승리가 아니라, 죽임을 겪으셨지만 살아 계신 승리입니다.

나아가 요한계시록 5장은 죽음 자체를 단순한 패배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9절에 이르면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받기에 합당한 이유로 바로 그 죽임당하심이 제시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들이는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예수님의 승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서로 떼어 놓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자와 어린양, 그리고 구약의 두 이야기

어린양의 이미지는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어린양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나오기 전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고, 그 피는 심판의 밤에 보호를 받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구원의 이미지를 가져와 예수님의 죽음으로 새롭게 해석합니다.

또 하나의 배경은 이사야 53장입니다. 이사야 53:7에서 고난받는 종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입을 열지 않고 고난을 당하며, 이어지는 본문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는 종의 고난을 강조합니다. 신약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이사야 53장의 언어로 이해합니다(사도행전 8:32–35; 베드로전서 2:22–25).

요한계시록은 유다의 사자와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을 떠올리게 하는 어린양을 한 인물에게 겹쳐 놓습니다. 다윗의 왕권과 고난받는 종의 죽음이 예수님 안에서 만납니다. 요한은 왕권을 부정하지 않지만, 왕권이 무엇으로 드러나는지를 새롭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왕이시라는 사실은 다른 이들을 죽이실 수 있는 능력만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죽음으로 다른 이들을 하나님께 속하게 하신 왕입니다. 이것은 뒤에 등장할 짐승들의 권력과 예수님의 통치를 구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에게 뿔 일곱과 눈 일곱이 있다

실제 어린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면 기괴한 모습이겠지만, 이 환상은 동물의 해부학을 묘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뿔은 힘과 권세를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사무엘상 2:10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세우신 왕의 뿔을 높이신다고 말하고, 다니엘 7장에서도 뿔은 왕이나 권력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일곱 뿔은 완전하고 충만한 권세를 나타낸다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이신데 권세가 충만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의 권위가 사라진 사건이 아닙니다.

일곱 눈은 여호와야훼의 일곱 눈이 온 땅을 두루 살핀다는 스가랴 4:10을 떠올리게 합니다. 4장에서 보좌 앞의 일곱 횃불로 나타났던 하나님의 일곱 영이, 5장에서는 어린양의 일곱 눈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연결된 영들이 이제 예수님과 직접 연결되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따로 행동하시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권위와 영의 활동에 깊이 연결되어 계십니다.

본문이 직접 밝히는 것은 그것들이 「온 땅으로 보내지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보좌 주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수님의 활동은 온 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죽임당한’에 해당하는 원어는 도살되거나 죽임당한 상태를 나타내는 완료 수동 분사로, 단순히 옛날 어느 순간에 죽음이 발생했다는 정보만 주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의 유월절 어린양은 본래 구속의 전체 신학을 설명하기 위한 상징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며, 직접적인 문맥은 이집트에 내려진 마지막 재앙과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고난받는 종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연결하는 견해도 있고, 특정한 의로운 인물 또는 대표적 인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스가랴 4:10의 본래 문맥은 포로 생활 이후 성전 재건을 둘러싼 어려움과 연결되어 있으며, 작은 시작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눈이 온 땅을 살핀다는 사실이 선포됩니다. 다만 일곱 영을 성령의 충만함으로 읽을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천상적 영들로 읽을지는 여전히 해석상 논의할 여지가 있습니다.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는 순간

요한계시록 5:7–8 본문 →

그가 와서 보좌에 앉은 이의 오른손에서 그것을 받아 들었습니다.요한계시록 5:7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짧지만, 이 장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이 일어납니다.

처음에 힘센 천사는 누가 두루마리를 열기에 합당한지 물었습니다. 아무도 발견되지 않았고, 요한은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다가와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두루마리를 빼앗지 않으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에게서 받으십니다. 이것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하나님과 경쟁하는 장면이 아니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포기하시거나 보좌에서 물러나시는 것도 아닙니다. 이어서 하늘의 찬양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함께 높이게 됩니다.

이 장면은 다니엘 7:13–14와도 연결됩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옛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나아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습니다. 다니엘에서는 왕권이, 요한계시록에서는 두루마리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두 장면은 동일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온 한 인물이 특별한 권위를 받는다는 구조는 서로 닮아 있습니다.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은 무엇인가

그가 그 두루마리를 받았을 때, 생물 넷과 장로 스물넷이 어린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수금 하나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요한계시록 5:8 · 본디새김

수금은 찬양을 위한 악기로, 구약의 시편들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는 대표적인 악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이 무엇인지는 본문이 직접 설명합니다.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본문은 대접과 그 내용물을 하나의 상징으로 제시합니다.

여기에는 시편 141:2의 배경이 있습니다. 그 시편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향처럼 되기를 구합니다. 성전에서 향을 피워 올리는 일과 기도가 연결된 것이며, 요한계시록은 그 이미지를 천상의 예배에 사용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받으시는 이 순간에 성도들의 기도가 등장할까요? 하나님의 뜻이 펼쳐질 전환점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하늘의 예배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은, 땅 위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하늘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앞서 일곱 교회의 상황을 읽었던 독자라면 이 이미지가 더욱 깊게 다가올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가난했고, 어떤 교회는 죽음의 위협을 겪었으며, 어떤 교회는 내부의 타협과 거짓된 가르침 때문에 고통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어디로 갔을까요?

요한계시록은 그 기도를 금 대접에 담긴 향으로 보여 줍니다. 하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

이 장면을 모든 기도가 원하는 방식으로 즉시 응답받는다는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 기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도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중에 6:9–11에서는 죽임당한 사람들의 호소가 들리고, 8:3–4에서는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향이 하나님 앞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찬양과 간구, 특히 고난 속에서 드리는 호소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땅 위의 고통을 모르는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는 예수님의 보좌 앞에서 잊힌 것이 아닙니다.

새 노래 — 어린양은 무엇 때문에 합당한가

요한계시록 5:9–10 본문 →

하늘에서 처음 울려 퍼지는 어린양의 노래

그리고 그들은 새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 두루마리를 받아 그 인장들을 떼기에 합당합니다. 당신이 죽임을 당하셨고, 당신의 피로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지파와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사셨고,」요한계시록 5:9 · 본디새김

2절의 질문 「누가 그 두루마리를 열고 그 인장들을 떼기에 합당한가?」에 대한 대답이 이제 노래로 주어집니다. 노래는 어린양이 합당하신 이유까지 밝힙니다. 그분이 죽임을 당하셨고, 자기 피로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셨기 때문입니다.

4장에서 장로들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를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노래했습니다(4:11). 5장에서 그들은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유를 죽임당하셨고 자기 피로 사람들을 사셨기 때문이라고 노래합니다.

첫 번째 찬양은 창조를 말합니다.

두 번째 찬양은 구원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찬양은 하나의 하늘 보좌 환상 안에 놓여 있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창조 세계를 향한 뜻을 가지고 계시고,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그 뜻을 펼치실 자격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렇다면 왜 이 노래를 「새 노래」라고 부를까요? 시편 96:1은 온 땅을 향해 여호와야훼께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고 선포하고, 시편 98:1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승리를 이루셨기 때문에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이사야 42:10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종을 세우시고 세상에 정의를 이루시리라는 약속과 함께 새로운 노래가 등장합니다.

이 본문들에서 새 노래는 이전에 부르지 않았던 새로운 곡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행위를 기뻐하고 선포하는 찬양입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승리하셨고 이제 하나님의 두루마리를 받으셨기에, 새로운 노래가 시작됩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과거의 기억으로 남지 않고 하늘의 예배를 바꾸어 놓습니다.

어린양의 죽음이 새로운 찬양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사셨다」는 말의 깊이

「사셨고」(ἀγοράζω)로 옮긴 그리스어는 사거나 구입한다는 뜻으로,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행위에도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어린양은 사람들을, 자기 피로 사셨습니다. 고대의 노예 매매나 속량, 곧 누군가에게 대가를 치르고 그 사람의 신분을 바꾸는 일을 떠올리게 하는 언어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를 실제 거래의 세부 사항에까지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정확히 누구에게 지불되었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을 누구를 위해 사셨는지를 밝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입니다. 어린양의 죽음으로 사람들은 또 다른 폭력적인 주인에게 넘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며, 하나님을 위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다음 절이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출애굽 사건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여 시내산에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구원의 범위가 놀랍도록 넓어집니다. 한 민족이나 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여러 지파와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사들여졌습니다.

이 네 표현은 엄격하게 구별된 네 종류의 인간 집단을 분류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다양한 집단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다니엘 7:14의 반향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모든 백성과 민족과 언어의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됩니다. 다니엘에서 다양한 민족은 왕의 통치 아래 놓이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다양한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로 하나님을 위한 백성이 됩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민족들을 제거하여 하나의 민족만 남기는 승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께 속한 백성을 이루는 승리입니다.

「모든 지파와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라는 말은 각 집단 가운데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나온다는 뜻이 문면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범위가 특정한 민족이나 언어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와 「그들」 사이에서

9절에서는 「우리를 사셨고」라고 노래하는데, 10절에서는 「그들을 우리 하나님을 위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변화는 한국어 문장이 어색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 본문 안에서도 두 절의 대명사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9절의 「우리」와 10절의 「그들」을 각각 유지했으므로, 그 변화를 지우고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대명사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차이는 노래를 부르는 존재들이 누구인지 판단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9절의 「우리」를 중심으로 읽으면 노래하는 이들이 직접 어린양에게 구원받은 존재들이라고 이해하기 쉽고, 10절의 「그들」을 중심으로 읽으면 구원받은 사람들을 자신들과 구별하여 노래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스물네 장로를 구원받은 인간 공동체의 대표로 볼 것인지, 천상적 존재들로 볼 것인지 하는 논의와도 관련됩니다.

그러나 대명사 하나만으로 그들의 정체를 확정하기는 어렵고, 노래의 주체를 어느 한 집단에만 제한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느 본문 형태를 따르든 새 노래의 핵심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어린양이 자기 피로 여러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라와 제사장

「또 그들을 우리 하나님을 위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땅 위에서 다스릴 것입니다.」요한계시록 5:10 · 본디새김

출애굽기 19:6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제사장 나라의 소명이 여기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그 약속은 본래 이집트에서 구원받아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했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언약의 언어를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적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단순히 위험에서 건져 내는 데서 그치지 않으시고, 그들이 자신에게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제사장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연결됩니다.

「땅 위에서 다스릴 것입니다」라는 약속은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합니다. 첫째, 구원받은 사람들이 다스리는 일에 참여한다는 약속입니다. 다니엘 7:18과 7:27에서는 짐승들로 묘사된 제국들의 압제가 끝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이 나라를 받으며, 요한계시록은 그 약속을 어린양이 이루신 승리와 연결합니다.

둘째, 다스리는 자리가 「땅 위」라고 표현됩니다. 요한은 하늘의 보좌를 보고 있지만, 노래가 말하는 구원의 결과는 땅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순히 사람들이 땅을 떠나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다스림의 구체적인 방식과 시점은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으며, 요한계시록 20–22장까지 함께 살펴야 할 문제입니다. 또 이 본문은 다스림을 미래형으로 표현하지만, 다른 그리스어 사본 전통에는 현재형 읽기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약속이 어린양의 죽음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나라와 제사장이 되고 땅 위에서 다스리는 것은 처음부터 그런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양이 그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셨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통치는 스스로 쟁취한 권력이 아니라, 어린양의 승리에 참여하게 되는 선물입니다.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권력을 얻는 일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어린양은 자신이 희생되심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방식과 무관한 통치를 구원의 결과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어린양이 어떤 방식으로 승리하셨는지가 그분의 백성에게 약속된 통치를 이해하는 기준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에서 사들인 대상을 「우리」라고 명시하는 사본들이 있지만, 그 목적어가 없는 사본들도 있습니다. 10절에는 「그들」이라는 읽기가 폭넓게 전해지며, 일부 전통에서는 「우리」라는 읽기가 나타납니다. 또한 8절에서 생물 넷과 장로 스물넷이 함께 엎드린 다음 9절에서 「그들은 새 노래를 부르며」라고 이어지므로, 노래의 주체를 어느 한 집단에만 제한하기 어렵습니다. 대명사는 누가 그 구원에 관해 노래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지만, 구원 행위의 주체와 목적에 관한 선언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10절의 다스림은 현재형으로 읽으면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통치를, 미래형으로 읽으면 장차 이루어질 통치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으며, 두 읽기 모두 본문비평적으로 검토되어 왔습니다.

찬양이 보좌에서 온 우주로 퍼져 나가다

요한계시록 5:11–14 본문 →

처음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이제 요한은 다시 보고 듣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았고,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 둘레에 있는 많은 천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만의 수만, 수천의 수천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5:11 · 본디새김

처음에는 생물 넷과 장로 스물넷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새 노래를 불렀는데, 이제 수많은 천사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수만의 수만, 수천의 수천」은 정확한 천사의 수를 계산하라는 표현이 아니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존재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웅장하게 나타냅니다.

처음에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두루마리를 열기에 합당한 존재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 하늘에서 수많은 천사들이 목소리를 높입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두가 합당한 분이 누구인지 노래합니다.

일곱 가지 찬양을 받으시는 어린양

그들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다.」요한계시록 5:12 · 본디새김

일곱이라는 수는 요한계시록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이 장에서도 일곱 인장, 일곱 뿔, 일곱 눈이 나왔습니다. 어린양에게 돌아가는 찬양이 일곱 표현으로 이루어진 것은 완전하고 충만한 찬양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각 항목을 서로 완전히 구별된 일곱 종류의 하늘 보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모든 찬양이 돌아가는 분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입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힘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선포됩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힘으로만 능력을 보여 주신 분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분입니다. 세상에서 죽임당하는 것은 대체로 권력을 잃고 다른 사람에게 굴복당한 패배의 표시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그분이 죽임당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합당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이 자기 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 속하게 하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늘은 그분을 찬양합니다.

다만 이 구절을 고난당하는 일 자체가 언제나 승리를 보장한다는 일반 원칙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것은 모든 희생이 동일한 구원의 능력을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죽음이 무엇을 이루었는가에 관한 선언입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피조물이 노래한다

그리고 나는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바다 위에도 있는 모든 피조물이, 그리고 그곳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요한계시록 5:13 · 본디새김

3절에서는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존재가 없었습니다. 13절에서는 바로 그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바다 위에서도 모든 피조물이 찬양합니다. 바다까지 더해져 창조 세계 전체가 찬양의 무대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두루마리를 열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피조물이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그 가운데 어린양의 승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피조물이 찬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구원받는다는 뜻일까요? 이 구절만으로 그렇게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뒤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심판받는 존재들도 등장하므로, 5:13의 우주적 찬양을 곧바로 모든 개인의 최종 구원에 대한 선언으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장면은 우선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에게 돌려지는 찬양이 온 창조 세계로 확장되는 환상이며, 그것이 최종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는지는 책 전체의 전개를 통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승리가 한 공동체 안에서만 기념되는 작은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 찬양의 이유가 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함께 찬양받으시다

처음에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노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함께 찬양받으십니다.

유대교의 하나님 신앙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은 근본적인 의미를 가지며, 궁극적인 예배와 찬양은 창조주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그 찬양의 대상에 함께 놓이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매우 높은 신학적 선언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동일한 인물이시라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보좌에 앉으신 분과 두루마리를 받으시는 어린양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그러나 구별된 두 분이 동일한 우주적 찬양의 대상이 되시며, 요한계시록은 이것을 추상적인 신학 명제로만 설명하지 않고 하늘의 예배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창조와 구원이 하나의 예배 안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는 한마디

그리고 생물 넷은 「아멘」이라고 말했습니다. 장로들은 엎드려 절했습니다.요한계시록 5:14 · 본디새김

이 장의 마지막은 의외로 짧습니다. 그토록 많은 천사들의 찬양과 모든 피조물의 영광이 울려 퍼진 뒤, 마지막에 들리는 말은 단 하나입니다. 아멘은 새로운 정보를 더하지 않고, 앞에서 선포된 모든 찬양이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응답입니다.

처음에는 요한이 울었습니다. 합당한 분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는 장로들이 엎드립니다. 합당한 분이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천사 무리는 다니엘 7:10과 연결됩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는 수많은 존재들이 옛적부터 계신 이를 섬기고 그 앞에 서 있으며, 이어서 하늘의 법정이 열립니다. 요한계시록은 비슷한 규모의 천상적 무리를 묘사하지만, 그들이 어린양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13절은 시편 148편처럼 온 피조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부름받는 구약의 찬양 전통과도 연결됩니다. 그 시편에서는 하늘의 천사들과 해와 달과 별들, 땅의 짐승들과 바다의 생물들, 왕들과 모든 백성이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도록 초대받으며, 요한계시록은 그 이미지에 어린양을 함께 등장시킵니다.

어린양의 승리가 바꾸어 놓은 것

요한계시록 5:1–14 본문 →

승리하셨다고 선포된 분은 죽임당하신 어린양입니다. 그분이 두루마리를 여시기에 합당하신 이유는 더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다른 존재들을 정복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죽임당하셨고 자기 피로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장을 힘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언제나 이긴다는 도덕적 교훈으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어린양은 뿔 일곱과 눈 일곱을 가지신 분이며, 그리스도의 승리는 권세의 부정이 아니라 권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새롭게 드러내는 승리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짐승들과 왕들과 충돌하는 나라들을 보여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장면을 읽기 전에 이미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아직 두루마리의 내용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기 전에 요한은 먼저 그 뜻을 이루실 분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사건의 순서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미래를 여실 어린양이 누구신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장은 그 발견을 설명하는 문장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하늘의 광경으로 끝냅니다.

어린양은 보좌 한가운데 서 계십니다. 죽임당하신 모습이지만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드셨습니다.

그 주위에서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엎드리고, 수만의 수만에 이르는 천사들이 찬양합니다. 그 소리는 하늘과 땅과 땅 아래와 바다로 퍼져 나가고, 모든 피조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립니다.

마지막으로 네 생물이 말합니다. 「아멘」

그리고 장로들이 엎드려 절합니다.

아직 일곱 인장 가운데 하나도 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루마리는 이제 죽임당하신 어린양의 손에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