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6–11장 · 봉인과 나팔의 심판

어린양이 인장을 떼자 드러난 세상의 상처

어린양이 첫 번째 인장을 떼십니다.

그러자 흰 말이 나타납니다. 그 말에 탄 사람은 활을 가지고 있고, 관을 받았으며, 이기고 또 이기기 위해 달려 나갑니다.

두 번째 인장을 떼시자 붉은 말이 나옵니다. 이번에는 땅에서 평화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서로 죽이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 인장을 떼시자 검은 말이 나타납니다. 사람의 하루 품삯으로 한 사람이 하루 먹을 밀을 겨우 살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네 번째 인장을 떼시자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수가 나옵니다. 하데스가 그 뒤를 따라갑니다.

이 장면들은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합니다.

정복하려는 사람들, 서로를 죽이는 전쟁, 먹고살기 어려워지는 경제적 고통, 그리고 죽음. 시대와 장소는 달라도 인간의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현실들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이 장면들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방식으로 보여 주지 않습니다.

요한은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어린양이 인장을 떼시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늘의 보좌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환상입니다.

그리고 재앙이 이어지는 도중에 장면이 갑자기 바뀝니다. 다섯 번째 인장을 떼시자 더 큰 전쟁이나 기근이 나타나지 않고, 제단 아래에서 죽임당한 사람들이 「언제까지 심판하지 않으시고 땅에 사는 이들에게 우리의 피값을 묻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땅의 고통을 보여 주던 환상이 이제 그 고통 속에서 죽임당한 사람들의 질문을 듣게 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인장을 떼시자 온 세상이 흔들립니다. 왕들과 권력자들, 부자들과 노예들까지 산속에 몸을 숨기며 「그의 진노의 큰 날이 왔기 때문이다. 누가 설 수 있겠는가?」 하고 외칩니다.

앞에서는 죽임당한 사람들이 「언제까지」라고 물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이 「누가 설 수 있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은 재앙을 나열하는 장이 아니라, 세상의 폭력과 고난을 드러내고 그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묻게 하는 장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시작하시는 분은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입니다.

읽는 시간 31분소단락 96장 본문 읽기 →

첫 번째 인장 — 이기며 또 이기려고 나가는 사람

요한계시록 6:1–2 본문 →

네 마리의 말은 왜 차례로 등장하는가

그리고 어린양이 인장 일곱 가운데 하나를 뗄 때에 나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물 넷 가운데 하나가 천둥 소리 같은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너라.」요한계시록 6:1 · 본디새김

어린양이 드디어 두루마리의 인장을 떼기 시작하십니다.

앞 장에서 아무도 열 수 없었던 두루마리를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받으셨고, 이제 예수님께서 직접 인장을 떼십니다. 그런데 인장을 하나 떼셨을 때 두루마리에 적힌 글이 낭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환상이 펼쳐집니다.

첫 번째 생물이 「오너라」라고 말하자 말과 기수가 등장합니다. 이어지는 세 인장에서도 인장을 떼시고, 생물이 부르고, 말과 기수가 나타나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이러한 반복은 첫 네 인장이 하나의 묶음을 이루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이 말들은 스가랴서의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가랴 1:8–11에서 예언자는 땅을 두루 돌아다닌 붉은 말과 여러 색의 말들을 보고, 6:1–8에서는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얼룩진 말들이 끄는 네 병거가 하늘의 주님 앞에 서 있다가 땅으로 나갑니다. 요한계시록은 네 말이 등장하고, 하늘과 땅이 연결되며, 각 무리가 세상으로 나간다는 구조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색과 순서, 각 말의 역할이 달라서 두 환상의 말들을 색깔별로 정확하게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스가랴의 말들은 세상을 두루 살피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정복과 전쟁, 굶주림과 죽음을 가져옵니다. 요한은 익숙한 예언적 이미지를 가져와 새로운 환상을 구성한 것입니다.

생물들이 외치는 「오너라」가 누구를 향한 말인지는 본문이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생물이 부를 때마다 말과 기수가 등장하므로 말 탄 사람들을 부른다는 읽기가 가장 자연스럽지만, 요한에게 앞으로 나와 보라는 말로 이해하거나 요한계시록 마지막의 「오소서」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요청하는 말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도 문법만으로 확정되지는 않지만, 네 차례 반복되는 장면의 구조는 말 탄 이들을 부른다는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기 마음대로 등장하는 독립적인 존재들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양이 인장을 떼시고, 생물들이 부를 때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행하는 모든 폭력이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어떤 악이 허용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 악을 선하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나타나는 재앙들을 읽을 때 이 차이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흰 말의 기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보십시오, 흰 말이 있었고 그 위에 앉은 이가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관이 주어졌고, 그는 이기며 또 이기려고 나갔습니다.요한계시록 6:2 · 본디새김

이 기수의 정체는 요한계시록 6장에서 가장 많이 논쟁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읽기는 셋으로 갈립니다. 흰 말과 승리의 언어를 근거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읽기, 뒤따르는 세 기수와 한 묶음으로 보아 정복 전쟁을 상징한다고 보는 읽기, 흰색과 관과 승리를 가졌지만 실제로는 뒤이은 폭력과 재앙에 속한 거짓 정복자로 보는 읽기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네 기수의 행렬이 무엇으로 시작되는지가 달라집니다. 이런 견해들은 각각 근거가 있지만, 6장 자체는 첫째 기수의 정체를 직접 풀이하지 않으므로 하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견해를 택하든 「그에게 관이 주어졌고」라는 표현이 남습니다. 기수가 스스로 관을 만들어 쓰거나 빼앗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관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기며 또 이기려고」 나갑니다. 이미 이기고 있으면서도 더 이기기 위해 나아갑니다. 이 기수를 정복자로 읽는다면, 여기에는 하나의 승리가 끝이 되지 않고 더 많은 승리를 추구하는, 멈출 줄 모르는 정복 욕망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정복의 성공이 정복의 종결을 가져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끝없는 승리 추구가 세상에 무엇을 가져오는지는 이어지는 말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예수님으로 읽는 근거는 요한계시록 19:11입니다. 거기서도 흰 말을 탄 이가 등장하며, 신실하고 참되다고 불리시고 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으로 문맥상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또 「이기며 또 이기려고」는 앞 장에서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기셔서」 두루마리를 여실 수 있게 되셨다는 말씀과 같은 그리스어 동사 니카오(νικάω)를 씁니다. 정복 전쟁으로 읽는 근거는 바로 뒤의 기수들입니다. 둘째는 평화를 거두고, 셋째는 심각한 식량 부족을, 넷째는 죽음을 나타내므로, 첫째도 세계를 뒤흔드는 정복과 폭력의 한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기와 관의 차이도 있습니다. 여기의 기수는 활을 가졌지만 19장에서는 예수님의 입에서 날카로운 큰 칼이 나오고, 여기의 관은 승리의 화관을 뜻할 수 있는 스테파노스인 반면 19:12에는 여러 왕관을 뜻하는 디아데마타가 나옵니다. 이 차이만으로 두 기수가 다른 존재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두 장면을 단순히 동일한 모습이라고 보기도 어렵게 만듭니다.

두 번째 인장 — 평화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서로 죽이다

요한계시록 6:3–4 본문 →

둘째 생물이 부르자 붉은 말이 나타납니다.

그러자 다른 말이 나왔습니다. 붉은 말이었습니다. 그 위에 앉은 이에게는 땅에서 평화를 거두어 사람들이 서로 죽이게 하는 일이 허락되었고, 그에게 커다란 칼이 주어졌습니다.요한계시록 6:4 · 본디새김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칼이 아닙니다.

「땅에서 평화를 거두어」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지 않고, 평화가 거두어진다고 말합니다. 평화를 인간 사회의 자연스럽고 영구적인 상태로 여기지 않게 만드는 표현입니다.

그 평화가 무너질 때 「사람들이 서로 죽이게」 됩니다. 기수가 사람들을 직접 죽이는 모습이 중심에 있지 않습니다. 폭력은 초월적 존재가 밖에서 일방적으로 가하는 것으로만 묘사되지 않고,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여기에서 전쟁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전쟁은 국가의 경계와 권력자들의 명령에 관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서로의 생명을 빼앗는 사건입니다. 이 짧은 문장은 전쟁의 비극을 군사적 승패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기수에게는 평화를 거두는 일이 허락되고, 커다란 칼이 주어집니다. 첫째 기수에게 관이 주어진 것과 비슷한 표현입니다. 본문은 그 권세를 누가 주었는지 명시하지 않지만, 어린양이 인장을 떼시면서 환상이 전개된다는 문맥 속에서 그 권세는 제한되고 허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행동이 인간의 폭력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칼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칼과 구별됩니다. 여기에서는 기수에게 주어진 칼이 평화가 사라진 세상의 살육과 연결되고, 예수님의 칼은 입에서 나와 예수님의 말씀과 심판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붉은 말의 등장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세상에서는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옵니다. 다음 기수는 칼 대신 저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커다란 칼」은 그리스어 마카이라 메갈레로, 앞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큰 칼」에 사용된 롬파이아와 다른 낱말입니다. 두 낱말의 의미 범위가 일부 겹치므로 엄격한 무기 분류를 만들 필요는 없지만, 요한이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인장 — 하루 일해서 하루 먹을 것을 사다

요한계시록 6:5–6 본문 →

검은 말과 저울

그리고 어린양이 셋째 인장을 뗄 때에 나는 셋째 생물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너라.」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보십시오, 검은 말이 있었고 그 위에 앉은 이가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6:5 · 본디새김

첫째 기수는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 기수는 커다란 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셋째 기수는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저울은 칼처럼 직접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저울이 등장하자마자 또 다른 종류의 고통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나는 생물 넷 한가운데서 소리 같은 것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밀 한 코이닉스가 한 데나리온, 보리 세 코이닉스가 한 데나리온이다. 그리고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는 해치지 마라.」요한계시록 6:6 · 본디새김

코이닉스는 대략 한 사람이 하루 동안 먹는 곡식의 양과 연결되는 그리스 세계의 부피 단위이고,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로 마태복음 20:2에서는 포도원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하루 일해서 받은 돈으로 밀을 사면 한 사람이 하루 먹을 정도밖에 살 수 없습니다. 보리는 세 코이닉스를 살 수 있지만 이것도 넉넉하지 않고,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칼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식량 부족은 사람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폭력의 결과는 전장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곡물 가격에서, 하루의 품삯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나타납니다.

기수가 들고 있는 저울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정확한 저울이 오히려 부족함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한 코이닉스를 한 코이닉스라고 정확히 재어 주어도, 그것이 한 가족에게 충분한 양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장이 열리고 가격이 매겨지며 거래가 이루어져도, 사람들이 먹고살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이미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고 할까

곡물은 심각하게 비싸졌는데, 6절 끝에서는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는 해치지 마라」라는 명령이 덧붙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읽기가 있습니다.

첫째, 재앙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해석입니다. 곡물이 피해를 입지만 모든 농산물이 파괴되지는 않습니다. 7:3에서 땅과 바다와 나무들을 해치지 말라는 명령이, 9:4에서 어떤 식물들은 해치지 말라는 제한이 같은 동사로 주어지듯, 요한계시록은 이 표현으로 재앙이 미치는 범위를 제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둘째, 경제적 불평등을 드러내는 해석입니다. 기름과 포도주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소비와 연결될 수 있으므로, 그런 물품은 남아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먹어야 할 곡물의 가격이 치솟는다면 위기의 고통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만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는 일상적인 식생활에서도 사용되었으므로, 이것만으로 부자들의 사치품은 보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만 피해를 입는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두 해석 모두 가능성이 있지만, 어느 하나만이 본문의 뜻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재앙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제한된 재앙이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정도의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다.

검은 말의 환상은 식량 부족을 추상적인 통계로 말하지 않습니다. 노동하는 사람의 하루와 식탁에 올라갈 곡식의 양으로 보여 줍니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일했지만, 그날 가족이 먹을 양식을 충분히 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 말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20:2의 비유가 모든 시대와 직업의 실제 임금이 언제나 정확히 한 데나리온이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당시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하루 노동의 대가를 보여 줍니다. 고대의 일반적인 곡물 가격과 비교해도 이 가격은 심각한 식량 부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정확히 평소의 몇 배인지는 시대와 지역, 비교 기준에 따라 달라지므로 하나의 숫자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해치다」로 옮긴 그리스어 동사 아디케오(ἀδικέω)는 본래 부당하게 대하거나 해를 끼친다는 의미를 지닌 낱말로, 7:3과 9:4에서도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네 번째 인장 —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수

요한계시록 6:7–8 본문 →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보십시오, 푸르스름한 말이 있었고 그 위에 앉은 이의 이름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데스가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땅의 사분의 일에 미치는 권위, 곧 큰 칼과 굶주림과 죽음으로 죽이고 또 땅의 짐승들을 통해 죽이는 권위가 주어졌습니다.요한계시록 6:8 · 본디새김

앞의 세 기수에게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넷째 기수는 이름이 밝혀집니다. 「죽음」입니다. 그가 탄 푸르스름한 말은 생기가 사라진 피부의 창백함을 떠올리게 하여, ‘창백한 말’이라고도 옮길 수 있습니다.

앞의 기수들이 각각 정복과 전쟁, 식량 부족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 기수는 그 모든 고통이 향할 수 있는 마지막 결과를 직접 나타냅니다. 그 뒤를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하데스가 의인화되어 따라갑니다. 죽음이 생명을 빼앗고 하데스가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은 죽음과 죽은 자들의 영역을 하나의 연속된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네 번째 기수가 그 모든 결과를 한 이름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왜 죽음의 방법을 네 가지로 말할까

죽음과 하데스에게 주어진 권위에는 큰 칼, 굶주림, 죽음, 그리고 땅의 짐승들, 네 가지가 나옵니다. 이 조합은 에스겔 14:21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예루살렘에 내리실 네 가지 심판, 곧 칼과 굶주림과 사나운 짐승과 역병과 연결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본래 문맥의 이미지를 가져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의 생명이 위협받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권세의 범위입니다.

「땅의 사분의 일」입니다. 죽음과 하데스에게 권위가 주어졌지만, 땅 전체를 다스리는 절대적인 권세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지구 인구의 정확히 25퍼센트가 특정 시점에 죽는다는 통계적 예언으로 바꿀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은 지리적 면적인지 인명의 범위인지까지 구분하지 않고, 권세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그 이유를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 탄 이들에게 권세가 「주어졌다」는 표현이 반복되었고, 여기서도 다시 「권위가 주어졌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죽음이 스스로 무한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죽음의 현실을 조금도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죽음은 실제로 인간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주인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수가 등장하는 것은 앞 장에서 죽임당하셨지만 살아 서 계셨던 그 어린양이 인장을 떼시는 장면 안에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죽음의 두려운 모습을 정면으로 보여 주지만, 독자가 죽음을 최종적인 권위로 착각하지 않도록 그 장면 전체를 어린양의 행동 속에 놓습니다.

네 마리의 말이 보여 준 세계

여기까지 네 마리의 말이 모두 등장했습니다. 이 네 장면은 서로 다른 네 재앙의 나열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인간 현실을 보여 줍니다.

정복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평화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서로 죽입니다.

사람들이 먹어야 할 곡식의 가격이 치솟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나타납니다.

본문은 이 사건들이 언제나 이 순서대로 일어난다거나 첫째 재앙이 끝나야 둘째가 시작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 이 네 기수를 특정 시대의 네 통치자나 네 국가에 대응시킬 이름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첫째를 제외한 세 기수의 의미가 비교적 분명한 것도 역사적 인물을 가리키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져오는 결과가 직접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보게 하려는 것은 재앙의 비밀스러운 명칭보다, 그 재앙이 인간의 삶에 어떤 일을 일으키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말이 지나간 뒤, 갑자기 환상의 방향이 바뀝니다.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고, 천둥소리 같은 「오너라」라는 명령도 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제단 아래에서 죽임당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조금 더 깊이

‘푸르스름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클로로스(χλωρός)는 식물의 푸른빛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지만, 창백하거나 누르스름한 녹색 계열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의 네 가지와 요한계시록의 네 가지는 순서와 일부 표현이 다릅니다. 특히 「죽음」이라고 옮긴 표현은 그리스어 성경의 배경에서 역병을 가리키는 용법과도 연결되지만, 요한계시록의 문면이 직접 「죽음」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지우고 무조건 특정 전염병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섯 번째 인장 — 죽임당한 사람들이 묻다

요한계시록 6:9–11 본문 →

왜 그들은 제단 아래에 있는가

그리고 어린양이 다섯째 인장을 뗄 때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지녔던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이들의 넋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요한계시록 6:9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앞의 네 인장과 구조가 다릅니다.

말도 기수도 없고, 새로운 재앙을 일으키는 존재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앞의 네 인장이 세상에 닥치는 고통을 보여 주었다면, 다섯째 인장은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죽임당한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그들은 익명의 희생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지녔던 증언 때문에」 죽임당했습니다. 전쟁과 굶주림과 죽음 가운데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증언 때문에 죽임당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제단 아래에 있는 데에는 구약의 제사 제도가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레위기 4:7에서는 죄를 위한 제사 때 제물의 피를 제단 밑에 쏟고, 레위기 17:11은 생명이 피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제단 아래는 제물의 생명과 연결되는 자리였으므로, 이 장면은 그들의 죽음을 제사의 이미지로 보여 준다는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다만 어떤 제단을 가리키는지, 제사의 의미가 얼마나 직접적으로 적용되는지에 관해서는 견해가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σφάζω)이라는 말은 바로 앞 장 5:6에서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한 것 같았고」라고 묘사되실 때 쓰인 낱말과 같습니다. 죽임당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제 예수님을 증언하다 죽임당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물론 두 죽음이 똑같은 구원의 효력을 가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들이는 구원의 피로 선언되었고, 성도들의 죽음은 그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지키다가 겪은 죽음입니다. 구별되지만, 그들의 운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처음으로 하는 말은 찬양이 아닙니다.

질문입니다.

「언제까지」 — 하늘에서 들리는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

그리고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주인님, 언제까지 심판하지 않으시고 땅에 사는 이들에게 우리의 피값을 묻지 않으시렵니까?」요한계시록 6:10 · 본디새김

이 질문은 불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데, 피값을 물어 달라는 이 기도는 그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그들은 직접 무기를 들고 일어나겠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하심에 기대어, 자신들이 부당하게 죽임당한 불의가 언제까지 해결되지 않을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탄식 시편들과 깊이 연결됩니다. 시편 79:5는 여호와야훼께 언제까지 진노하실 것인지 묻고, 79:10은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 종들의 피에 대한 보복이 드러나기를 구합니다. 시편 94:1–3도 악인들이 언제까지 기뻐하겠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면 불의가 왜 계속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 안에는 고통과 분노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 분노를 없는 것처럼 취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 그 고통을 하나님께 가져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창세기 4:10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아벨의 피가 땅에서 자신에게 부르짖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그의 피는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죽임당한 사람들이 직접 자기들의 피값을 물어 달라고 외칩니다. 그들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어야 할 정의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앞의 네 인장도 달리 보입니다. 정복과 전쟁, 굶주림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그 안에 인간이 저지른 폭력과 불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의의 희생자들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언제까지」

본문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믿음이 부족해서 나오는 불평이 아니라, 하늘의 환상 속에 담겨 있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질문에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흰 겉옷은 주어지지만 심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각 사람에게 흰 겉옷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게 될 그들의 동료 노예들과 그들의 형제들도 할 일을 다 마칠 때까지 조금 더 쉬라는 말이 그들에게 전해졌습니다.요한계시록 6:11 · 본디새김

먼저 흰 겉옷이 주어집니다.

사데 교회에 이기는 사람이 흰 옷을 입을 것이라고 하신 약속(3:5)과 연결하면, 죽임당한 증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사람들로 나타난다는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죽인 사람들은 그들의 증언을 끝내려고 했을 수 있지만, 그 증언은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흰 옷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정의를 요구한 그들에게 조금 더 쉬라고 하시고, 아직 다른 사람들도 죽임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모두 설명하지 않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어 기다림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할 일을 다 마칠 때까지」는 사본에 따라 동료들이 무엇인가를 마친다는 뜻으로도, 그들의 수가 채워진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특정한 수의 사람들이 죽어야만 만족하신다는 뜻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앞으로도 죽임당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만, 그 죽음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잊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흰 겉옷을 주시고 조금 더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억울함은 부정되지 않지만, 그들이 원하는 시점에 모든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고난에 대해 제시하는 쉬운 답이 아니라 어려운 긴장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지만 그 정의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이기셨지만 예수님의 백성은 여전히 고난을 겪습니다. 다섯째 인장은 그 긴장을 설명으로 없애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들리는 질문으로 남겨 둡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여섯째 인장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제는 죽임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의 왕들과 권력자들이고, 그들은 정반대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번역이 따른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동료 노예들과 형제들이 무엇인가를 완수하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무엇을 완수하는지는 직접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본 전통에서는 그들이 ‘채워진다’는 수동형 표현이 나타납니다. 이 차이 때문에 정해진 수의 순교자가 채워지는 것을 강조하는 해석도 있고, 그들이 겪어야 할 증언과 고난의 과정이 마무리되는 것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여섯 번째 인장 — 세상이 흔들리자 사람들이 숨다

요한계시록 6:12–14 본문 →

해와 달과 별이 흔들리는 이유

그리고 어린양이 여섯째 인장을 뗄 때에 나는 보았습니다. 그러자 큰 지진이 일어났고, 해가 털로 짠 자루옷처럼 검어졌고, 달 전체가 피처럼 되었습니다.요한계시록 6:12 · 본디새김

여섯째 인장의 장면은 앞의 인장들과 규모가 다릅니다.

처음에는 말과 기수들이 땅을 달렸지만, 이제 땅 자체가 흔들립니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갈라져 물러갑니다.

이 이미지들은 예언서들의 언어를 강하게 반영합니다. 요엘 2:31은 크고 두려운 여호와야훼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어둠으로, 달이 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13:10의 빛을 잃는 해와 달과 별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고, 이사야 34:4의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하늘과 떨어지는 별들은 에돔을 포함한 민족들을 향한 심판의 문맥에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에서 이런 이미지는 항상 천문학적인 사건을 예측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 같은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는 사건은 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의 질서가 뒤집히는 것처럼 경험될 수 있고, 예언서들은 그런 역사적 심판을 우주적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해와 달을 특정한 현대의 일식이나 월식에, 별이 떨어지는 장면을 특정한 천문 현상에 대응시키는 것은 본문의 문학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읽기입니다. 반대로 모든 이미지를 단순한 정치적 은유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 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창조 세계 전체에 미치는 규모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세상의 질서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다

그리고 하늘이 두루마리가 말리듯 갈라져 물러갔고, 모든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요한계시록 6:14 · 본디새김

앞서 요한은 하나님의 오른손 위에 놓인, 인장으로 봉해진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늘 자체가 두루마리처럼 말려 물러갑니다. 본문이 두 두루마리 이미지의 상징 관계를 설명하지는 않지만, 같은 물건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 짧은 간격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두루마리는 열리기 시작합니다.

반면 인간에게 견고해 보이던 하늘은 말려 물러갑니다.

그리고 안정과 견고함을 떠올리게 하는 산과, 바다 가운데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섬이 「모든」 산과 섬으로 제자리에서 옮겨집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던 고정된 질서 자체가 흔들리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환상의 절정은 해와 달이 변하는 모습도, 산과 섬이 움직이는 모습도 아닙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왕에서 노예까지 — 모두가 같은 곳으로 달려가다

요한계시록 6:15–16 본문 →

세상의 높은 자리들이 무너지다

그리고 땅의 왕들과 높은 이들과 천부장들과 부자들과 힘센 이들과 모든 노예와 자유인이 동굴과 산의 바위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요한계시록 6:15 · 본디새김

세상에서는 이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매우 컸습니다. 왕은 나라를 다스렸고, 천부장은 군사적 권한을, 부유한 사람들은 자원을, 힘센 사람들은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반면 노예들은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조차 제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두가 동굴과 산의 바위 속으로 숨습니다. 사회적 신분이 실제로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 신분이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왕이라고 해서 더 안전하지 않습니다.

군사 지휘관이라고 해서 더 강하게 저항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유하다고 해서 심판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첫째 기수는 관을 받았고, 둘째 기수는 칼을 받았으며, 셋째 기수의 환상에서는 곡물 가격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관도, 칼도, 재산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동굴과 바위뿐입니다.

그러나 방금 전 모든 산이 제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 자신들을 지켜 줄 수 있다고 믿었던 마지막 공간조차 이미 흔들리고 있습니다.

산과 바위에게 숨겨 달라고 말하다

그리고 그들이 산과 바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라. 그리고 보좌에 앉은 이의 얼굴을 피해, 또 어린양의 진노를 피해 우리를 숨겨 다오.」요한계시록 6:16 · 본디새김

이 장면은 호세아 10:8과 직접적인 언어적 연결을 가집니다. 호세아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심판하실 때, 사람들은 산에게 자신들을 덮으라 하고 언덕에게 무너져 내리라고 외칩니다. 누가복음 23:30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라 울던 여자들에게 같은 예언적 이미지를 사용하십니다.

이사야 2:19에서도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위엄과 영광을 피해 바위 동굴과 땅굴 속으로 들어가며, 높아진 인간의 교만이 낮아지고 오직 여호와야훼만 높임을 받으실 것이라는 선언이 중심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두 장면을 하나로 모으고, 새로운 표현을 더합니다.

「어린양의 진노」

죽임당하신 예수님께서 진노하신다

어린양은 힘없는 제물을 떠올리게 하는 동물이고, 바로 앞 장에서는 죽임당하신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예수님께 진노가 있다고 말합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은 예수님의 온유함과 자기희생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들이신 분이고, 6장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굶주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던 사람들이 죽임당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사랑과 진노를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같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불의를 향한 심판에도 관계하십니다. 폭력의 희생자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죽임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노를 인간의 분노와 단순히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화가 난다고 해서 그 감정이 곧 예수님의 진노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한 집단이나 정치적 상대방을 하나님의 심판 대상으로 지목하면서 자신의 적개심을 정당화하는 것도 이 구절의 의미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진노는 인간이 자신의 분노를 절대화하는 근거가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교만이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다는 선언입니다.

다섯째 인장에서 죽임당한 사람들은 「언제까지」라고 물었고, 여섯째 인장에서는 세상의 권력자들이 예수님의 진노를 피해 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 이유 없이 세상을 파괴하는 임의적인 분노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먼저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호소가 들렸고, 그다음 폭력과 불의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너지는 광경이 이어집니다.

물론 여섯째 인장에서 숨는 모든 사람이 구체적으로 다섯째 인장의 사람들을 죽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 각자의 죄목을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장면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공통된 주제로 이어집니다.

한쪽에서는 불의를 당한 사람들이 정의를 구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정의를 마주한 사람들이 숨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왜 보좌에 앉은 분의 얼굴을 피할까

사람들은 단지 천둥과 지진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좌에 앉은 이의 얼굴」을 피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와 은총을 구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지만(시편 27:8), 그 얼굴 앞에서 숨는다는 것은 그분의 영광과 심판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죽임당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하나님과 마주하는 일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이 차이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는 사람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6장은 그들이 실제로 숨는 데 성공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려주고, 그 외침은 질문 하나로 끝납니다.

「누가 설 수 있겠는가?」

요한계시록 6:17 본문 →

「그의 진노의 큰 날이 왔기 때문이다. 누가 설 수 있겠는가?」요한계시록 6:17 · 본디새김

이것이 요한계시록 6장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5장에서는 힘센 천사가 「누가 그 두루마리를 열고 그 인장들을 떼기에 합당한가?」라고 물었습니다. 아무도 발견되지 않자 죽임당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고, 인장을 떼기 시작하셨습니다.

다섯째 인장에서는 죽임당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가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 「언제까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섯째 인장에서 땅의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너지는 건물 사이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예수님의 진노 앞에서 누가 견딜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말라기 3:2는 주님이 나타나실 때 누가 설 수 있겠느냐고 묻고, 나훔 1:6도 여호와야훼의 진노 앞에 누가 설 수 있는지 묻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심판 앞에서 인간이 가진 힘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드러내는 질문들입니다.

왕들도, 군사 지휘관들도, 부자들과 힘센 사람들조차 숨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그 자리에 설 수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6장 안에서 직접적인 답을 얻지 못합니다. 7장에서는 하나님의 보좌와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무리가 등장하므로(7:9), 이 마지막 질문은 다음 환상을 준비하는 역할도 합니다. 그러나 6장은 질문을 남기는 방식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던 희생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위와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숨으려는 산마저 이미 제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그의 진노」는 단수 소유 표현을 따른 읽기이고, 다른 중요한 그리스어 본문에는 복수인 「그들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복수로 읽으면 바로 앞에 등장한 보좌에 앉은 분과 예수님께서 함께 떠오르십니다. 단수로 읽으면 진노가 어느 한 분에게 속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바로 앞의 문장에서는 하나님의 얼굴과 예수님의 진노가 함께 언급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문맥에 근거하여 단수를 복수로 바꾸거나, 단수의 대명사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본문에 없는 이름을 넣어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시는 세상, 예수님 앞에 드러나는 인간

요한계시록 6:1–17 본문 →

요한계시록 6장은 읽기 편한 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장이 보여 주는 것은 앞으로 세상에 얼마나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요한은 이미 인간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고통을 보여 주고, 그 고통 속에서 죽임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늘의 환상 한가운데에 놓으며,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세상의 권력이 숨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죽임당한 사람들은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살아 있는 권력자들은 산의 바위 아래에서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 합니다.

둘 다 어떤 장소 아래에 있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심판은 세상을 파괴하는 사건이기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의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첫째부터 넷째 인장도, 제단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다섯째 인장도, 온 세상이 흔들리는 여섯째 인장도 예수님께서 떼십니다. 이 반복은 이 장을 특정한 전쟁이나 재난을 알아맞히는 도구로만 읽지 않게 합니다. 요한은 누구에게 권력이 있는지뿐 아니라, 그 권력이 자기 피로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신 분의 손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예수님의 진노는 서로 다른 두 인물의 행동이 아닙니다.

같은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일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는 일은 무엇이 다를까요?

여섯째 인장의 환상에서 왕들은 자기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군사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지휘하지 않으며, 부자들은 자기 재산으로 안전한 곳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모두 바위 속에 숨어, 조금 전 제자리에서 옮겨진 그 산을 향해 자신들 위로 무너져 내려 달라고 외칩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흔들리는 산이나 검어진 해가 아닙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과 예수님의 진노입니다.

요한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일곱째 인장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흔들리는 산과 바위 사이에서 사람들은 숨고 있습니다. 그들이 붙잡았던 권세는 더 이상 그들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외침만이 남습니다.

「누가 설 수 있겠는가?」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