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6–11장 · 봉인과 나팔의 심판
어린양이 봉인을 떼자 드러난 세상의 상처
어린양께서 첫 번째 봉인을 떼어 내십니다.
그러자 흰 말이 나타납니다. 그 말에 탄 사람은 활을 가지고 있고, 관을 받았으며, 이기면서 또 이기기 위해 나아갑니다.
두 번째 봉인을 떼어 내시자 붉은 말이 나옵니다. 이번에는 땅에서 평화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서로 죽이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 봉인을 떼어 내시자 검은 말이 나타납니다. 사람의 하루 품삯으로 한 사람이 하루 먹을 밀을 겨우 살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네 번째 봉인을 떼어 내시자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수가 나옵니다. 하데스가 그 뒤를 따라갑니다.
이 장면들은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합니다.
정복하려는 사람들, 서로를 죽이는 전쟁, 먹고살기 어려워지는 경제적 고통, 그리고 죽음. 시대와 장소는 달라도 인간의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현실들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이 장면들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방식으로 보여 주지 않습니다.
요한은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어린양께서 봉인을 떼어 내시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늘의 왕좌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환상입니다.
그런데 재앙이 이어지는 도중에 장면이 갑자기 바뀝니다.
다섯 번째 봉인을 떼어 내시자 더 큰 전쟁이나 굶주림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 제단 아래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언제까지 땅에 사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흘린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외칩니다. 본문은 땅의 고통을 보여 주다가, 이제 그 고통 속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질문을 듣게 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봉인을 떼어 내시자 온 세상이 흔들립니다. 왕들과 권세 있는 사람들, 부자들과 종들까지 산속에 몸을 숨기며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하고 외칩니다.
앞에서는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언제까지」라고 물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이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라고 묻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은 재앙을 나열하는 장이 아니라, 세상의 폭력과 고난을 드러내고 그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묻게 하는 장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시작하시는 분은 죽임을 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입니다.
첫 번째 봉인 — 이기면서 또 이기기 위해 나아가는 사람
네 마리의 말은 왜 차례로 등장하는가
나는 어린양께서 일곱 봉인 가운데 하나를 떼어 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천둥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너라.」요한계시록 6:1 · 두루새김
어린양께서 드디어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어 내기 시작하십니다.
앞 장에서 아무도 열 수 없었던 두루마리를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서 받으셨고, 이제 직접 봉인을 떼어 내십니다. 그런데 봉인을 하나 떼어 내셨을 때 두루마리에 적힌 글이 읽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환상이 펼쳐집니다.
첫 번째 생물이 「오너라」라고 말하자 말과 기수가 등장합니다. 이어지는 세 봉인에서도 봉인을 떼어 내시고, 생물이 부르고, 말과 기수가 나타나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이 반복은 첫 네 봉인이 하나의 묶음을 이루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이 말들은 구약의 스가랴서에서 왔습니다. 스가랴 1:8–11에서 예언자는 땅을 두루 돌아다닌 붉은 말과 여러 색의 말들을 보고, 6:1–8에서는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얼룩진 말들이 끄는 네 병거가 온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다가 땅으로 나갑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환상에서 네 말이 등장하고, 하늘과 땅이 연결되며, 각 무리가 세상으로 나간다는 구조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색과 순서와 역할이 달라 색깔별로 정확하게 짝지을 수는 없습니다. 스가랴의 말들이 세상을 살피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면, 요한계시록의 말들은 정복과 전쟁, 굶주림과 죽음을 가져옵니다. 요한은 익숙한 예언의 이미지를 가져와 새로운 환상을 구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물들이 외치는 「오너라」는 누구를 향한 말일까요? 가장 자연스러운 읽기는 뒤이어 등장하는 말 탄 사람들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앞으로 나와 보라고 하는 말로 이해하거나, 요한계시록 마지막의 「오소서」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요청하는 말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본문은 명령의 대상을 직접 밝히지 않으므로 문법만으로 확정되지는 않지만, 네 차례 반복되는 장면의 구조는 말 탄 이들을 부른다는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기 마음대로 등장하는 독립적인 존재들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양께서 봉인을 떼어 내시고, 생물들이 부를 때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행하는 모든 폭력이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어떤 악이 허용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 악을 선하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나타나는 재앙들을 읽을 때 이 차이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흰 말의 기수는 누구인가
내가 보니 흰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탄 이는 활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게 관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이기면서 또 이기기 위해 나아갔습니다.요한계시록 6:2 · 두루새김
이 기수의 정체는 요한계시록 6장에서 가장 많이 논쟁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읽기는 셋으로 갈립니다. 흰 말과 승리의 말이 19장의 예수님을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 뒤따르는 세 기수와 한 묶음인 정복 전쟁의 상징이라는 해석, 참된 승리를 흉내 내는 거짓된 정복자라는 해석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6장이 어린양의 승리로 시작하는지, 세상의 폭력으로 시작하는지가 달라집니다. 이런 견해들은 각각 근거가 있지만, 6장 자체는 첫째 기수의 정체를 직접 풀이하지 않으므로 하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견해를 택하든 「그에게 관이 주어졌습니다」라는 표현이 남습니다.
기수가 스스로 관을 만들어 쓰거나 빼앗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관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기면서 또 이기기 위해」 나아갑니다. 이미 이기고 있으면서도 더 이기기 위해 나아갑니다. 이 기수를 정복자로 읽는다면, 여기에는 멈출 줄 모르는 정복 욕망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정복에 성공했다고 정복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끝없는 승리 추구가 세상에 무엇을 가져오는지는 이어지는 말들이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예수님으로 읽는 근거: 요한계시록 19:11에서도 신실하고 참되다고 불리시며 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이 흰 말을 타고 등장하십니다. 또 「이기면서 또 이기기 위해」는 5장에서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겨서 두루마리를 여실 수 있게 되셨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하며, 원문에서는 두 자리에 같은 「이긴다」 동사가 쓰입니다. 정복 전쟁으로 읽는 근거: 둘째는 평화를 빼앗고, 셋째는 심각한 식량 부족을, 넷째는 죽음을 나타내므로 한 묶음인 첫째 기수도 정복과 폭력의 한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기와 관도 다릅니다. 여기의 기수는 활을 가졌지만 19장에서는 예수님의 입에서 날카로운 큰 칼이 나오고, 여기의 관은 승리의 화관을 뜻할 수 있는 낱말인 반면 19:12에는 여러 왕관을 뜻하는 다른 낱말이 쓰입니다. 이 차이만으로 두 기수가 다른 존재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두 장면을 단순히 동일한 모습이라고 보기도 어렵게 합니다. 거짓된 정복자로 읽는 견해는, 흰색과 관과 승리라는 표현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뒤이어 나타나는 폭력과 재앙에 속한 존재라고 봅니다.
두 번째 봉인 — 평화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서로 죽이다
둘째 생물이 부르자 붉은 말이 나타납니다.
그러자 다른 말이 나왔습니다. 불처럼 붉은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탄 이에게는 땅에서 평화를 빼앗아 사람들이 서로 죽이게 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또 그에게 큰 칼이 주어졌습니다.요한계시록 6:4 · 두루새김
본문은 단순히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빼앗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평화를 인간 사회의 자연스럽고 영원히 이어지는 상태로 여기지 않게 만듭니다.
그 평화가 무너지자 「사람들이 서로 죽이게」 됩니다. 기수가 사람들을 직접 죽이는 모습이 중심에 있지 않습니다. 폭력은 초월적 존재가 밖에서 일방적으로 가하는 것으로만 묘사되지 않고,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전쟁은 국가의 경계와 권세 있는 사람들의 명령에 관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서로의 생명을 빼앗는 사건입니다. 이 짧은 문장은 전쟁이 가져오는 비극을 군사적 승패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여기에서 기수에게 두 가지가 주어집니다. 평화를 빼앗는 일이 허락되고, 큰 칼이 주어집니다. 첫째 기수에게 관이 주어진 것과 비슷한 표현입니다. 본문은 누가 주었는지 밝히지 않지만, 어린양께서 봉인을 떼어 내시는 문맥 속에서 그 권한은 제한되고 허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인간의 폭력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붉은 말의 등장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세상에는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옵니다. 다음 기수는 칼 대신 저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큰 칼」과, 앞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칼(두루새김은 둘 다 큰 칼로 옮겼습니다)은 원문에서 다른 낱말입니다. 두 낱말의 뜻이 일부 겹치므로 무기의 종류를 엄격하게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차이는 칼이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여기서는 기수에게 주어진 칼이 사람들 사이의 살육과 연결되고, 예수님의 칼은 입에서 나와 말씀과 심판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요한계시록은 둘을 구별하여 묘사합니다.
세 번째 봉인 — 하루 일해서 하루 먹을 것을 사다
검은 말과 저울
어린양께서 셋째 봉인을 떼어 내시자, 나는 셋째 생물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너라.」 내가 보니 검은 말이 있었고, 그 말을 탄 이는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6:5 · 두루새김
첫째 기수는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 기수는 큰 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셋째 기수는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저울은 칼처럼 직접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저울이 등장하자마자 또 다른 종류의 고통이 드러납니다.
나는 네 생물 한가운데서 목소리 같은 것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밀 한 코이닉스에 한 데나리온, 보리 세 코이닉스에 한 데나리온이다.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는 해치지 마라.」요한계시록 6:6 · 두루새김
「코이닉스」는 대략 한 사람이 하루 먹는 곡식의 양과 연결되는 부피 단위이고,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으로 알려진 로마의 은화입니다. 하루 일해서 받은 돈으로 밀을 사면, 한 사람이 하루 먹을 정도밖에 살 수 없습니다.
보리는 같은 돈으로 세 코이닉스를 살 수 있지만, 이것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다면, 하루 종일 일해도 가족 전체가 충분히 먹을 양식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칼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식량 부족은 사람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폭력의 결과는 전장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곡물 가격에서, 하루의 품삯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나타납니다.
저울은 정확하게 나누고 측정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식량이 부족할 때 저울은 오히려 부족함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한 코이닉스를 정확히 재어 주어도, 그것이 한 가족에게 충분한 양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장이 열리고 가격이 매겨지며 거래가 이루어져도, 사람들이 먹고살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이미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고 할까
곡물은 심각하게 비싸졌는데,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읽기가 있습니다.
첫째, 재앙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해석입니다. 7:3과 9:4에서도 해치지 말라는 제한이 주어지며, 원문에서는 이 자리들에 6:6과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표현으로 재앙이 미치는 범위를 제한하곤 합니다.
둘째, 경제적 불평등을 드러내는 해석입니다.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소비와 연결될 수 있으므로, 그런 물품은 남아 있는데 기본 식량인 곡물 가격이 치솟는다면 위기의 고통이 불평등하게 나뉘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다만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이 둘은 일상적인 식생활에도 쓰였으므로, 반드시 부자들의 사치품이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두 해석 모두 가능성이 있지만, 어느 하나만이 본문의 뜻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둘은 서로 배타적이지도 않습니다. 재앙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제한된 재앙이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정도의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다.
검은 말의 환상은 식량 부족을 추상적인 통계로 말하지 않습니다. 노동하는 사람의 하루와 식탁에 올라갈 곡식의 양으로 보여 줍니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일했지만, 그날 가족이 먹을 양식을 충분히 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 말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20:2에서는 포도원 일꾼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시대와 직업의 실제 임금이 언제나 정확히 한 데나리온이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당시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하루 노동의 대가를 보여 줍니다. 고대의 일반적인 곡물 가격과 비교해도 이 가격은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평소의 몇 배인지는 시대와 지역, 비교 기준에 따라 달라지므로 하나의 숫자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해치지 마라」로 옮긴 동사는 본래 부당하게 대하거나 해를 끼친다는 뜻을 지닌 낱말입니다.
네 번째 봉인 —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수
내가 보니 창백한 초록빛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탄 이의 이름은 죽음이었고, 하데스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둘에게는 땅의 사분의 일에서 칼과 굶주림과 죽음과 땅의 들짐승들로 사람들을 죽일 권한이 주어졌습니다.요한계시록 6:8 · 두루새김
앞의 세 기수에게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넷째 기수는 이름이 밝혀집니다. 「죽음」입니다.
말의 색을 가리키는 원문의 낱말은 식물의 푸른빛에도 쓰이지만 창백하거나 누르스름한 녹색 계열을 가리킬 수도 있어, 여기서는 생기가 사라진 피부의 창백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창백한 초록빛」으로 옮겨 초록빛과 창백함을 함께 드러냈습니다.
앞의 기수들이 정복과 전쟁, 식량 부족을 보여 주었다면, 이 기수는 그 모든 고통이 향할 수 있는 마지막 결과를 직접 나타냅니다. 그 뒤를 죽은 사람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하데스가 사람처럼 따라갑니다. 죽음이 생명을 빼앗고 하데스가 뒤따르는 모습은 죽음과 죽은 사람들의 영역을 하나로 이어지는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왜 죽음의 방법을 네 가지로 말할까
8절 끝에는 칼, 굶주림, 죽음, 그리고 땅의 들짐승들이 나옵니다. 이 조합은 에스겔 14:21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예루살렘에 내리실 네 가지 심판, 곧 칼과 굶주림과 사나운 짐승과 역병과 연결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심판의 이미지를 가져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의 생명이 위협받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권한에는 범위가 있습니다. 「땅의 사분의 일」입니다.
죽음과 하데스에게 권한이 주어졌지만, 땅 전체를 다스리는 절대적인 권한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지구 인구의 정확히 25퍼센트가 특정 시점에 죽는다는 통계적 예언으로 바꿀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은 지리적 면적인지 사람의 수인지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 탄 이들에게 관이나 권한이 「주어졌습니다」라는 표현이 반복되었고, 여기서도 다시 「권한이 주어졌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죽음이 스스로 끝없는 권한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죽음의 현실을 조금도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주인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수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살아 서 계신 어린양께서 봉인을 떼어 내시는 장면 안에서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죽음이 없는 척하지 않습니다. 그 두려운 모습을 정면으로 보여 주면서도, 독자가 죽음을 최종적인 권위로 착각하지 않도록 장면 전체를 어린양의 행동 속에 놓습니다.
네 마리의 말이 보여 준 세계
네 장면은 서로 다른 재앙의 나열만이 아니라, 정복과 폭력, 생존의 위기와 죽음이라는 서로 연결된 인간 현실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첫째 재앙이 끝나야 둘째가 시작된다고 설명하지 않으므로, 언제나 이 순서대로 일어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기수들을 특정 시대의 네 통치자나 네 국가에 짝짓는 이름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나머지 세 기수의 의미가 비교적 분명한 것도 그들이 가져오는 결과가 직접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보게 하려는 것은 재앙의 비밀스러운 명칭보다, 그 재앙이 인간의 삶에 어떤 일을 일으키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말이 지나간 뒤, 환상의 방향이 바뀝니다.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고, 천둥 같은 목소리의 「오너라」도 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제단 아래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의 네 가지와 요한계시록의 네 가지는 순서와 일부 표현이 다릅니다. 「죽음」이라고 옮긴 표현은 그리스어 성경의 배경에서 역병을 가리키는 용법과도 연결되지만, 요한계시록의 문면이 직접 「죽음」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지우고 특정 전염병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섯 번째 봉인 — 죽임당한 사람들이 묻다
왜 그들은 제단 아래에 있는가
어린양께서 다섯째 봉인을 떼어 내시자, 나는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들이 지켜 온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6:9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앞의 네 봉인과 구조가 다릅니다.
말도, 말을 탄 이도, 새로운 재앙을 일으키는 존재도 없습니다. 그 대신 세상에 닥친 고통의 한복판에서 죽임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보입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희생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들이 지켜 온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제단 아래에 있는 데에는 구약의 제사 제도가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제단 아래는 제물의 피, 곧 제물의 생명과 연결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그들의 죽음을 제사의 이미지로 보여 준다고 읽을 수 있지만, 어떤 제단인지, 제사의 의미가 얼마나 직접 적용되는지에 관해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죽임을 당한」(σφάζω)이라는 말은 원문에서 바로 앞 장 5:6에서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한 것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실 때 쓰인 낱말과 같습니다. 죽임당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제 예수님을 증언하다 죽임당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물론 두 죽음이 똑같은 구원의 힘을 가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들이는 구원의 피로 선언되었고, 성도들의 죽음은 그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지키다가 겪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들도 환상 속에서 잊힌 존재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처음으로 하는 말은 찬양이 아닙니다.
질문입니다.
「언제까지」 — 하늘에서 들리는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주인님, 언제까지 땅에 사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흘린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요한계시록 6:10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불편합니다. 이들은 복수를 원하는 것일까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들은 직접 무기를 들고 일어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하심에 기대어 자신들이 당한 불의가 언제까지 해결되지 않을 것인지 묻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탄식 시편들과 이어집니다. 시편 79:5와 79:10은 하나님께 언제까지 진노하실 것인지 묻고 종들의 피에 대한 보복이 드러나기를 구하며, 시편 94:1–3은 악인들이 언제까지 기뻐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이러한 탄식은 개인적 분풀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면 불의가 왜 계속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성경은 그 안의 고통과 분노를 없는 것처럼 취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 그것을 하나님께 가져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창세기 4:10에서 아벨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그의 피는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죽임당한 사람들의 죽음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어야 할 정의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다섯째 봉인은 앞의 네 봉인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합니다. 정복과 전쟁, 굶주림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저지른 폭력과 불의가 있고, 그 희생자들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본문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믿음이 부족한 불평으로 처리되지 않고, 하늘의 환상 속에 담겨 있습니다.
흰 겉옷은 주어지지만 심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 각 사람에게 흰 겉옷이 주어졌습니다. 또 그들은 조금 더 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자매들도 할 일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6:11 · 두루새김
흰 겉옷은 사데 교회에 주신 약속, 이기는 사람이 흰 옷을 입을 것이라는 말씀(3:5)을 떠올리게 합니다. 죽임당한 증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사람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을 죽인 사람들은 그들의 증언을 끝내려고 했을 수 있지만, 그 증언은 하나님 앞에서 가치 없는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흰 옷을 받았다고 해서 질문에 대한 응답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정의를 요구한 사람들에게 조금 더 쉬라고 하시고, 아직 다른 사람들도 죽임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왜 지금 바로 심판하지 않으시는지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고, 그래서 기다림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할 일을 다 마칠 때까지」는 원문에서 무엇을 완수하는지 직접 밝히지 않는 표현입니다. 정해진 수의 순교자가 채워지는 것으로 읽는 해석도 있고, 증언과 고난의 과정이 마무리되는 것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특정한 수의 사람들이 죽어야만 만족하신다는 뜻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앞으로도 죽임당할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죽음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겪은 고통을 잊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흰 겉옷을 주시고, 조금 더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억울함은 부정되지 않지만, 그들이 원하는 시점에 모든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정의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기셨지만, 예수님의 백성은 여전히 고난을 겪습니다. 다섯째 봉인은 이 긴장을 설명으로 없애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들리는 질문으로 남겨 둡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여섯째 봉인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세상의 왕들과 권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반대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여섯 번째 봉인 — 세상이 흔들리자 사람들이 숨다
해와 달과 별이 흔들리는 이유
나는 어린양께서 여섯째 봉인을 떼어 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해는 털로 짠 거친 천처럼 검어졌고, 달은 온통 피처럼 되었습니다.요한계시록 6:12 · 두루새김
여섯째 봉인의 장면은 앞의 봉인들과 규모가 다릅니다.
처음에는 말과 말을 탄 이들이 땅을 달렸지만, 이제 땅 자체가 흔들립니다.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처럼 변하며, 이어지는 절에서는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말리듯 물러나 사라집니다.
이 이미지들은 예언서에서 왔습니다. 요엘 2:31은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날 전에 해가 어둠으로, 달이 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13:10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에서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는 장면을, 이사야 34:4는 에돔을 포함한 민족들을 향한 심판에서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고 별들이 잎이나 열매처럼 떨어지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구약의 예언서에서 이런 이미지는 늘 천문학적인 사건을 예측하는 데 쓰이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같은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는 일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의 질서가 뒤집히는 것처럼 경험될 수 있었고, 예언서들은 그런 역사적 심판을 우주적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해와 달을 특정한 현대의 일식이나 월식에 맞추고 별이 떨어지는 장면을 특정한 천문 현상으로 확정하는 것은 본문의 문학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읽기입니다. 반대로 모든 이미지를 단순한 정치적 비유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 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창조 세계 전체에 미치는 규모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 이미지들은 당연하게 여겼던 세상의 질서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흔들린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다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 물러나 사라졌고, 모든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요한계시록 6:14 · 두루새김
앞서 요한은 하나님의 오른손 위에 놓인, 봉인으로 닫힌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늘 자체가 두루마리처럼 말리듯 물러나 사라집니다. 본문이 두 두루마리 이미지의 상징 관계를 설명하지는 않지만, 같은 물건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 짧은 간격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두루마리는 열리기 시작합니다.
반면 인간에게 단단해 보이던 하늘은 말리듯 물러나 사라집니다.
그리고 안정과 단단함을 떠올리게 하는 산도, 바다 가운데 자기 자리를 차지하던 섬도 움직입니다. 「모든」 산과 섬입니다. 일부 지역의 작은 변화가 아니라, 세상이 가지고 있던 고정된 질서 자체가 흔들리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환상의 절정은 해와 달이 변하는 모습도, 산과 섬이 움직이는 모습도 아닙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왕에서 종까지 — 모두가 같은 곳으로 달려가다
세상의 높은 자리들이 무너지다
땅의 왕들과 권세 있는 사람들, 군대 지휘관들과 부자들과 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종과 자유인이 동굴과 산의 바위틈에 몸을 숨겼습니다.요한계시록 6:15 · 두루새김
세상에서는 이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매우 컸습니다. 왕은 나라를 다스렸고, 군대 지휘관은 군사적 권한을, 부자들은 재산을, 힘 있는 사람들은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반면 종들은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조차 제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두가 동굴과 산의 바위틈에 몸을 숨깁니다. 그들의 신분이 실제로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 신분이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심판을 피해 갈 길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앞에서 첫째 말을 탄 이는 관을, 둘째 말을 탄 이는 칼을 받았습니다. 이제 관도, 칼도, 재산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동굴과 바위뿐입니다. 그러나 그 바위조차 안전한 피난처가 아닙니다. 방금 전 모든 산이 제자리에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산과 바위에게 숨겨 달라고 말하다
그들은 산과 바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 왕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게 우리를 숨겨 다오.」요한계시록 6:16 · 두루새김
이 장면은 호세아 10:8과 직접 이어집니다. 호세아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심판하실 때, 사람들은 산에게 자신들을 덮으라고, 언덕에게 무너져 내리라고 외칩니다. 누가복음 23:30에서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따라 울던 여자들에게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십니다.
이사야 2:19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을 피해 바위 동굴과 땅굴 속으로 들어가고, 높아진 인간의 교만이 낮아집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두 장면을 하나로 모으고, 새로운 표현 하나를 더합니다.
「어린양의 진노」
죽임당하신 예수님께서 진노하신다
어린양은 힘없는 제물을 떠올리게 하고, 바로 앞 장에서도 죽임당하신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어린양께 진노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죽임당하신 어린양을 묘사할 때 온유함과 자기희생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 자기희생을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들이셨는데, 6장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굶주리고, 증언하던 사람들이 죽임당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사랑과 진노를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같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불의를 향한 심판에도 관계하십니다. 폭력의 희생자가 되신 분이시기에, 죽임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노를 인간의 분노와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화가 난다고 해서 그 감정이 예수님의 진노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한 집단이나 정치적 상대방을 하나님의 심판 대상으로 지목하며 자신의 미움을 정당화하는 것도 이 구절의 의미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진노는 인간이 자기 분노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근거가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교만이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다는 선언입니다.
다섯째 봉인과 이 장면을 이어 보면 심판의 성격이 더 분명해집니다. 심판을 앞두고 먼저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호소가 들렸습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다음, 폭력과 불의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너지는 광경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물론 숨는 모든 사람이 구체적으로 다섯째 봉인의 사람들을 죽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 각자의 죄목을 나열하지 않습니다.
한쪽에서는 불의를 당한 사람들이 정의를 구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정의를 마주한 사람들이 숨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왜 왕좌에 앉은 분의 얼굴을 피할까
사람들은 단지 천둥과 지진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을 피하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그분께서 함께하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구한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시편 27:8). 반면 그 얼굴 앞에서 숨는 것은 그분의 영광과 심판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고, 여기에서는 이 뜻이 두드러집니다.
죽임당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세상의 권세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마주하는 일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이 차이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는 사람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6장은 그들이 실제로 숨는 데 성공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외침은 질문 하나로 끝납니다.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분께서 진노하시는 큰 날이 왔으니,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요한계시록 6:17 · 두루새김
이것이 요한계시록 6장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5장에서는 힘센 천사가 누가 두루마리를 열고 봉인들을 떼기에 합당한지 물었고, 아무도 발견되지 않자 죽임당하신 어린양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다섯째 봉인에서는 죽임당한 사람들이 「언제까지」라고 물었습니다. 이제 여섯째 봉인에서 땅의 사람들이 묻습니다.
이것은 무너지는 건물 사이에서 누가 살아남느냐는 질문이 아니라, 왕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의 진노 앞에서 누가 견딜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말라기 3:2와 나훔 1:6도 하나님의 날과 진노 앞에서 누가 설 수 있는지 물으며, 인간이 가진 힘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드러냅니다.
17절의 「그분께서 진노하시는」은 진노가 한 분에게 속한 것으로 표현된 원문을 따른 번역입니다. 다른 중요한 사본에는 「그들」의 진노로 되어 있지만, 어느 쪽이든 바로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얼굴과 어린양의 진노가 함께 언급되어 있으므로 본문에 없는 이름을 넣어 「그분」을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질문은 6장 안에서 직접적인 답을 얻지 못합니다.
7장에서는 하나님의 왕좌와 어린양 앞에 서 있는 무리가 등장하므로(7:9), 이 질문은 다음 환상을 준비하는 역할도 합니다. 그러나 6장은 질문을 남기는 방식으로 끝납니다. 그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던 희생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위와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시는 세상, 예수님 앞에 드러나는 인간
요한계시록 6장은 읽기 편한 장이 아닙니다.
정복과 전쟁, 굶주림과 죽음이 등장하고,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외침이 있으며, 마지막에는 하늘과 땅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봉인을 떼어 내시는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린양이십니다. 제단 아래의 목소리가 들리는 다섯째 봉인도, 온 세상이 흔들리는 여섯째 봉인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장은 누구에게 권력이 있는지뿐 아니라, 그 권력이 어떤 분의 손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죽임당한 사람들은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언제까지」라고 부르짖고, 권세 있는 사람들은 산의 바위틈에서 하나님을 피해 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이 지금 당장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들의 고통이 잊힌 사건이라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장을 특정한 전쟁이나 재난을 알아맞히는 도구로만 읽으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여섯째 봉인의 환상에서 왕들은 자기 권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군대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지휘하지 않고, 부자들은 재산으로 안전한 곳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모두 바위틈에 숨어, 이미 제자리에서 옮겨진 산을 향해 자신들 위로 무너져 내려 달라고 외칩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흔들리는 산이나 검어진 해가 아닙니다. 왕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과 어린양의 진노입니다.
요한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어린양께서는 아직 일곱째 봉인을 떼어 내지 않으셨습니다.
흔들리는 산과 바위 사이에서 사람들은 숨고 있습니다. 그들이 붙잡았던 권세는 더 이상 그들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외침만이 남습니다.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