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6–11장 · 봉인과 나팔의 심판
누가 설 수 있는가
온 세상이 흔들렸습니다.
해가 검어지고 달은 피처럼 변했습니다. 별들이 떨어지고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 왕들과 권력자들, 부자들과 힘센 사람들, 노예와 자유인까지 모두 동굴과 바위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누가 설 수 있겠는가?」 (6:17)
그런데 요한계시록 7장을 펼치면 뜻밖의 광경이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아무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왕들이 두려워하며 외치던 그 왕좌 앞에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7:9). 앞 장에서 누구도 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자리에, 이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그들이 왕들보다 강해서일까요?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만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요한계시록 7장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힙니다. 그리고 왕좌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어린양의 피에 빨아 희게 한 사람들이라고 밝혀집니다.
그들이 설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장에는 두 장면이 나옵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 요한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재앙에 앞서 도장을 받습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 요한은 아무도 셀 수 없는 무리를 봅니다. 그들은 흰 겉옷을 입고 어린양 앞에 서서 구원을 노래합니다.
한쪽에서는 수를 셉니다. 다른 쪽에서는 셀 수 없습니다.
한쪽에서는 아직 땅과 바다를 해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큰 고난을 겪고 나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모든 환상의 중심에 계셨던 어린양이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소개되십니다.
목자입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께서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사람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물이 솟는 샘들로 이끄십니다.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바람을 붙잡다
왜 네 천사는 바람을 멈추고 있는가
그 뒤에 나는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땅에도 바다에도 어떤 나무에도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7:1 · 두루새김
앞에서는 어린양께서 봉인한 도장을 차례로 떼셨습니다. 여섯째 도장이 떼어지자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도장이 떼어지기 전에 환상이 멈춥니다.
이 장면은 재앙이 닥치기 전의 상황을 보여 줍니다. 천사들이 아직 바람을 붙잡고 있고, 땅과 바다를 해치는 일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재앙의 진행을 계속 보여 주는 대신, 그 재앙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천사 넷이 서 있는 곳은 「땅의 네 모퉁이」입니다. 네 모퉁이는 세상의 모든 방향을 가리키는 익숙한 상징적 표현으로, 여기서는 세상 전체에 미칠 수 있는 재앙의 범위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왜 하필 바람일까요? 스가랴와 다니엘의 환상에서 네 바람은 하나님 앞에서 나아오는 하늘의 존재들, 그리고 큰 바다를 뒤흔드는 힘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네 바람은 단순한 날씨 현상만이 아니라 세상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심판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세상을 뒤흔들 힘이 있지만, 그 힘은 아직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람을 붙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 장면에서 밝혀집니다.
심판보다 먼저 주어지는 표지
또 나는 다른 천사가 해 뜨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요한계시록 7:2 · 두루새김
해 뜨는 방향은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환상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에스겔 43:2에서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이 천사 역시 해 뜨는 방향에서 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회복을 떠올리게 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고대의 도장은 문서나 물건이 진짜인지 확인하거나 누구의 소유인지, 누구에게 권한이 있는지 표시하는 데 쓰였습니다. 도장이 찍혔다는 것은 누군가의 권위 아래 놓여 있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미 도장이 등장했습니다.
어린양께서 받으신 두루마리는 일곱 도장으로 봉해져 있었고, 그곳에서 도장은 두루마리를 봉하고 그 내용을 열 수 있는 권한과 연결되었습니다. 원문에서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낱말이 이제 사람에게,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은 두루마리에 사용되었던 도장의 이미지가, 이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로 옮겨 왔습니다.
그 도장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천사가 외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들도 해치지 마라.」요한계시록 7:3 · 두루새김
「때까지」라는 말에서 보듯, 땅과 바다와 나무들을 해치는 일이 무조건 취소된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을 잠시 멈추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먼저 도장을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재앙과 아무 관계없는 외부인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들도 재앙이 일어나는 세상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심판이 진행되기 전에 그들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 먼저 확인됩니다.
에스겔에서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들
이 장면에는 에스겔 9장의 뚜렷한 배경이 있습니다. 에스겔 8–9장에서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심각한 우상 숭배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봅니다. 그런데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도시 가운데로 다니면서 그곳에서 행해지는 몹시 악한 일들 때문에 탄식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에스겔 9:4). 표를 받은 사람들은 이어지는 심판에서 보호받도록 구별됩니다.
심판이 예고됩니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표가 주어집니다.
그 표가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합니다.
에스겔에서 표를 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불의를 보고 탄식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이미지를 가져오면서, 도장을 받는 사람들을 「우리 하나님의 종들」, 곧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마는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눈에 띄는 자리입니다. 뒤의 요한계시록 14:1에서는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자체가 하나님의 도장을 그분들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과 연결하고 있으므로, 이 도장을 현대의 특정한 기술이나 몸에 남기는 표시로 성급하게 연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장을 받은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고난도 겪지 않을까요? 이 장을 끝까지 읽으면 그렇게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뒤에서는 큰 고난을 겪고 나오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겪은 고통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도장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보증이지, 그들이 세상에서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으리라는 약속으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요한은 그들의 모습을 보기 전에 먼저 수를 듣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 뒤에 나는 … 보았습니다」는 우선 요한이 환상을 보는 순서를 나타낼 뿐, 환상 안의 사건들이 역사적으로 모두 그 순서에 따라 일어난다는 뜻까지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여섯째 도장의 재앙이 끝난 다음의 사건으로 반드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땅의 네 모퉁이」도 고대 사람들이 지구를 네 모서리를 가진 평평한 판으로 믿었다는 증거로 곧바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야 11:12에서는 흩어진 이스라엘과 유다를 땅의 네 모퉁이에서 모으시는 하나님의 회복이 선포됩니다. 바람의 배경으로는 스가랴 6:1–5에서 네 병거와 말들이 온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던 하늘의 영들 또는 바람들과 연결되고, 다니엘 7:2에서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를 뒤흔든 뒤 제국을 상징하는 짐승들이 올라옵니다. 다만 이 장은 바람이 실제로 무엇을 일으키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네 바람을 특정한 네 국가나 네 군대에 각각 연결할 근거는 없습니다. 해 뜨는 방향도 반드시 에스겔의 환상을 직접 되살려 보여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9:4에서는 하나님의 도장을 받지 않은 사람들만 해치라는 제한이 나오지만, 그러한 특정 재앙에서의 보호가 모든 형태의 고난과 죽음을 면하게 해 준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십사만 사천 — 하나님이 세신 사람들
왜 정확히 십사만 사천인가
나는 도장을 받은 사람들의 수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도장을 받은 사람이 십사만 사천 명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7:4 · 두루새김
요한이 사람들을 직접 세어서 숫자를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수가 선포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수는 열두 지파에서 각각 만 이천 명, 곧 열둘 × 열둘 × 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하고, 천은 큰 무리 또는 가득 찬 규모를 나타내는 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수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온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로, 각 지파에서 실제로 만 이천 명씩 도장을 받는다는 실제 인원으로, 또는 열두 지파의 군대처럼 조직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읽힙니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이 장면이 하나님의 백성을 어떤 모습으로 그리는지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본문이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수가 알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무리가 아닙니다. 앞 장에서 전쟁과 굶주림과 죽음이 이어졌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도장을 받고 그 수가 선포되는 이 장면은 그들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 지파가 먼저인가
이어서 요한은 열두 지파의 이름을 듣습니다. 그런데 목록이 조금 이상합니다. 이스라엘의 맏아들은 르우벤입니다(창세기 29:32). 태어난 순서를 따른다면 르우벤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만 이천 명, 르우벤 지파에서 만 이천 명, 갓 지파에서 만 이천 명,요한계시록 7:5 · 두루새김
왜 유다일까요? 요한계시록 5:5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로 소개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셨다는 사실 때문에 유다를 첫 번째로 세웠다는 해석에는 앞뒤 문맥에서 찾을 수 있는 상당한 근거가 있고, 이렇게 읽으면 지파 목록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배열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그 이유를 직접 밝히지는 않습니다. 유다에서 왕들이 나왔던 전통 자체도 목록의 순서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단 지파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므낫세가 등장하고, 레위 지파가 포함되어 있으며, 요셉과 그 아들 므낫세가 각각 따로 나타납니다. 에브라임의 이름은 따로 나오지 않아서, 요셉이 에브라임을 대표하는 것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왜 단이 빠졌을까요? 단 지파가 우상 숭배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요한이 의도적으로 제외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사사기 18장과 열왕기상 12:28–30이 그 근거입니다. 반면 전해 내려오던 지파 목록의 변형이나 손으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생긴 차이일 가능성도 검토됩니다. 그러나 단 지파가 빠진 정확한 이유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특히 단 지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후대의 전통을 이 구절의 확정된 의미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그런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48장에서 회복된 땅을 지파들에게 나누어 주는 환상에는 단 지파도 등장하므로, 단이라는 이름이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단 지파의 후손들을 영원히 구원에서 제외하셨다고 결론 내릴 근거도 없습니다.
요한은 지금 십사만 사천이라는 정확한 수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을 때 나타나는 것은 뜻밖에도 셀 수 없는 무리입니다.
조금 더 깊이
군대로 읽는 견해는 민수기 1–2장을 배경으로 봅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은 지파별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의 수를 세고, 지파들은 진을 이루어 이동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서도 각 지파에서 같은 수가 나오기 때문에, 이 장면을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영적 전쟁을 위해 수를 세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전쟁에 나가라는 명령도, 무기나 전투를 위한 배치도 그려지지 않고 도장을 받는 일이 중심입니다. 그래서 군대의 인구 조사라는 배경이 울려 있다고 볼 수는 있어도, 이 장의 직접적인 목적을 군대를 모으는 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단 지파 문제에서는, 이 목록의 특이한 배열을 신약 시대 유대 문헌의 지파 목록들과 비교하거나, 우상 숭배와 구약의 지파 이야기, 요한계시록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의도적 생략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수를 들었는데 셀 수 없는 무리를 보다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무리는 같은 사람들일까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지파와 백성에서 나와 온갖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흰 겉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7:9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이 장의 가장 큰 전환점입니다.
조금 전까지 요한은 열두 지파에서 각각 만 이천 명, 모두 십사만 사천 명이라는 숫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눈으로 보니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앞에서 도장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과 같은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무리일까요?
두 무리를 서로 다른 집단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 무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두 번째 무리는 모든 민족과 지파와 백성에서 나왔다고 소개되고, 첫 장면은 땅이 해를 입기 전, 둘째 장면은 큰 고난을 겪고 난 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 무리를 같은 공동체에 대한 서로 다른 환상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요한은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기셨다는 말을 들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죽임당하신 어린양이었습니다. 들은 것과 본 것이 달랐지만 같은 예수님을 서로 다른 이미지로 드러낸 것처럼, 7장에서도 들은 수와 본 무리가 같은 백성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5:9에서 어린양께서 자기 피로 모든 지파와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셨다는 노래가 이 해석을 뒷받침하며, 이 해석에는 글의 구성을 통해 뒷받침되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무리로 읽는다고 해서, 본문에 분명히 적힌 「이스라엘 자손」이 실제 이스라엘 민족과 아무 관계가 없는 표현이라고 결론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을 존중하려면 두 무리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다른 무리로 읽든 같은 무리로 읽든, 요한이 보여 주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그가 들은 수는 정확했지만, 그가 본 무리는 셀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의 무게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가만이 아니라, 그들이 어디에 서 있는가에 있습니다.
아무도 설 수 없을 것 같던 자리
앞 장에서 왕들과 권력자들, 부자들과 힘센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해 숨으면서 「누가 설 수 있겠는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 무리는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6장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7장의 가장 직접적인 응답입니다.
그들은 숨지 않습니다.
6장에서는 사람들이 동굴과 바위 속으로 몸을 숨기며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7장의 무리는 하나님께서 계신 자리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 앞에서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왕좌가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도 다른 분이 아니십니다.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과 그분의 관계가 다릅니다.
흰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
흰 겉옷은 이미 익숙한 이미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에서 이기는 사람에게 흰 옷을 약속하셨고(3:5), 다섯째 도장에서는 죽임당한 증인들에게 흰 겉옷이 주어졌습니다(6:11). 이제 셀 수 없는 무리 전체가 흰 겉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옷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깨끗함과 승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구약에서 초막절과 연결됩니다. 레위기 23:40에서 이스라엘은 초막절 첫날 아름다운 나무의 열매와 종려나무 가지 등을 가지고 여호와야훼 앞에서 기뻐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초막절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셨던 일을 기억하는 절기로, 추수의 기쁨과 광야의 기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12:13에서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이했듯 승리와 환영의 의미도 함께 고려할 수 있지만, 이 장에서는 초막절과의 연결이 특별히 살아납니다. 뒤에서 장로가 하나님께서 이 무리 위에 천막을 치실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든 사람들과 그들 위에 천막을 치시는 하나님, 이 두 이미지가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했던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구원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구원은 왕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습니다.」요한계시록 7:10 · 두루새김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이루었는지, 자기들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왕좌 앞에 서 있는 것은 자기 힘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이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기 때문입니다.
5장에서 어린양께서는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함께 온 피조물의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무리는 하나님과 어린양을 함께 구원이 오는 근원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어린양의 구원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이루어진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시는 구원의 한가운데 놓입니다.
그런데 이 찬양에 다른 존재들이 응답합니다. 왕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 둘레에 서 있던 모든 천사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천사들은 말했습니다. 「아멘. 찬양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경과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요한계시록 7:12 · 두루새김
앞서 5:12에서는 천사들이 죽임당하신 어린양에게 일곱 가지 찬양을 돌렸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일곱 가지 찬양을 돌립니다. 두 찬양의 표현과 순서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온전한 찬양을 나타내는 일곱 항목의 구조는 서로 닮아 있습니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이 하늘의 예배 한가운데 울려 퍼지고, 천사들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수가 선포되었지만, 이제 중요한 것은 몇 명인가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노래하는가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왕좌 앞에 서 있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요? 요한 자신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장로 하나가 먼저 질문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 무리에 대해서는, 7:9의 큰 무리가 여러 민족에서 새로 구성된 집단이라기보다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다시 모인 무리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읽기는 구약의 흩어진 이스라엘 회복 약속들과 7장 후반의 표현을 연결합니다. 여러 민족에서 구성된 공동체로 보는 일반적인 해석에 대한 다른 견해이며, 학계에서 확정된 결론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냐?」
요한이 대답하지 못한 질문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내게 물었습니다. 「흰 겉옷을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냐?」요한계시록 7:13 · 두루새김
요한은 이미 그들이 모든 민족과 지파와 백성에서 나와 온갖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도 장로가 다시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 것은, 단순히 출신 지역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 왕좌 앞에 서 있게 된 이유, 그곳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어르신, 어르신께서 아십니다.」 그러자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이들은 큰 고난을 겪고 나오는 사람들이다. 자기 겉옷을 어린양의 피에 빨아 희게 했다.」요한계시록 7:14 · 두루새김
요한은 왕좌를 보았고, 어린양께서 두루마리를 받으시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수많은 천사들의 찬양을 들었고, 도장이 떼어질 때 나타나는 재앙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서 있는 무리가 누구인지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본 것이 있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묵시 환상을 읽는 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징을 보았다고 해서 그 뜻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풀이하는 부분은 그 설명을 따라야 하고, 풀이하지 않은 부분은 다른 성경 본문과 문맥을 살피면서도 해석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은 큰 고난을 겪고 나오는 사람들이다
드디어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밝혀집니다. 「나오는 사람들」은 이미 한순간에 끝난 사건만이 아니라 그 무리를 특징짓는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큰 고난」은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특별한 고난의 시기로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겪는 고난 전체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고난의 정확한 기간을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그 무리가 고난을 겪었고 그 고난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왕좌 앞에 서 있는 모습만 보았다면, 처음부터 아무 고난도 겪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로는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려 줍니다.
그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고난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왕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고난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이 그들이 누구인지를 마지막까지 결정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피에 빨았는데 희어졌다
장로는 한 가지를 더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겉옷을 어린양의 피에 빨아 희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옷을 피에 빨면 붉어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피에 옷을 빨아서 희게 만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일부러 피와 흰 옷, 죽음과 깨끗함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를 결합합니다.
그 피는 「어린양의 피」입니다. 앞서 죽임당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어린양께서는 그 피로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셨다고 선언되었습니다(5:9). 이제 그 피가 흰 겉옷의 근거가 됩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들을 깨끗하게 하는 근거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의 겉옷이 희어진 것은 그들이 겪은 고난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희생과 순교가 그들을 깨끗하게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은 분명하게 「어린양의 피」를 말합니다. 그들이 겪은 고난이 구원의 대가가 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들이 「자기 겉옷을」 빨아 희게 했다고도 말합니다. 그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 이루어지는 구원에 참여한 사람들로 표현됩니다. 그들의 깨끗함은 어린양에게서 오지만, 그들은 그 어린양에게 속한 사람들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사람의 행위로 대신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삶과 무관하게 묘사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장로의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나오는」은 그리스어 현재 분사 에르코메노이(ἔρχομαι)로, 「나오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문법적 형태만으로 고난이 요한이 글을 쓰던 시점에 정확히 어떤 기간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환상 안에서 그 무리를 어떻게 보여 주는지와 현실의 역사적 시점을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큰 고난」을 마지막 때로 보는 견해는 다니엘 12:1이나 마태복음 24:21의 극심한 고난과 연결하며, 「큰 고난」이라는 특별한 표현이 그 근거입니다. 역사 속 고난 전체로 보는 견해는 요한 자신이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형제라고 말하고(1:9) 서머나 교회가 고난을 겪고 있었다는 점(2:9–10)을 근거로, 고난을 아주 먼 미래의 한 시기로만 제한하면 첫 독자들이 실제로 겪던 고난과의 연결을 놓치기 쉽다고 봅니다. 두 해석 모두 살펴볼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도장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과 왕좌 앞의 큰 무리가 시간상 어떻게 이어지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장면만으로 도장을 받은 모든 사람의 마지막 운명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위에 천막을 치시다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왕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긴다. 왕좌에 앉으신 분이 이들 위에 천막을 치실 것이다.」요한계시록 7:15 · 두루새김
「그러므로」는 바로 앞의 이유, 곧 그들이 큰 고난을 겪고 나오며 자기 겉옷을 어린양의 피에 빨아 희게 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우연히 하늘 왕좌 가까이에 서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구원으로 그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예배입니다. 「섬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섬김을 나타내는 말로, 특히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의 섬김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선언한 사실과도 잘 어울립니다.
앞 장에서는 죽임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이제 흰 겉옷을 입은 큰 무리가 왕좌 앞에서 구원을 찬양합니다. 두 무리를 정확히 같은 사람들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고난 가운데 드리는 호소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을 찬양하는 소리가 같은 하늘의 환상 안에 등장합니다.
그들의 고난은 하나님에게서 잊힌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는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데 왜 천막이 필요한가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성전에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는 「왕좌에 앉으신 분이 이들 위에 천막을 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성전 안에 있는데 또 천막이 필요한 것일까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머무시기 위해 성막을 세우게 하십니다. 출애굽기 40:34–38에서는 구름이 회막을 덮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천막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위에 천막을 치십니다. 원문의 동사는 천막을 치거나 천막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덮어 보호하시는 모습입니다.
이사야 4:5–6에서도 하나님께서 시온 위에 구름과 불의 광채를 만드시고, 그 영광 위에 덮개가 있게 하시며, 더위와 폭풍우를 피하는 천막을 마련하십니다. 거기서 천막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과 보호를 함께 나타냅니다. 왜 천막이 중요한지는 다음 절에서 드러납니다.
「이들은 다시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 햇볕도 어떤 뜨거운 열기도 이들을 덮치지 않을 것이다.」요한계시록 7:16 · 두루새김
이것은 막연한 영적 행복만을 말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부족한 고통, 마실 물이 없는 고통, 피할 그늘 없이 뜨거운 햇볕 아래에 놓인 고통, 사람의 몸이 겪는 고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앞 장을 읽었던 독자는 이 약속의 무게를 압니다. 셋째 도장에서는 사람들이 하루 품삯으로 하루 먹을 양식을 겨우 살 수 있었고, 넷째 도장에서는 굶주림과 죽음이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왕좌 앞에 선 사람들에게는 다시는 배고프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됩니다.
이사야의 포로 귀환 약속이 다시 들리다
이사야 49:10에는 이와 매우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끄실 것이며, 그들이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고 뜨거운 바람과 해의 열기에 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 본래 문맥은 흩어지고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과 귀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들에게 나오라고 하시고, 그들을 먹이시며 물이 솟는 곳으로 이끄십니다(이사야 49:8–12).
옛 출애굽 때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시 이끄십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이 약속의 말을 거의 그대로 가져오고, 다음 절에서는 생명의 물로 이끄는 장면까지 이어 갑니다. 흩어지고 고통받던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모아 보호하고 이끄시는 회복의 이야기가 이 환상에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포로가 된 이스라엘의 회복이 직접적인 문맥이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피로 깨끗하게 된 무리가 왕좌 앞에서 이 약속을 듣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회복 약속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민족의 공동체로 넓어졌다고 읽을 수도 있고, 앞의 십사만 사천 명과 연결하여 흩어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주제가 계속되고 있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본문의 중심은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겪은 고통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단순히 위험에서 꺼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이상 그러한 고통이 지배하지 않는 자리로 이끄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이루실까요? 이 장의 마지막 절이 대답합니다.
어린양이 목자가 되시다
「왕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이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물이 솟는 샘들로 이끄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요한계시록 7:17 · 두루새김
돌보심과 이끄심과 눈물을 닦으심, 이 세 장면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룹니다. 큰 고난을 겪고 나온 하나님의 백성을 이제 어린양께서 이끄시고, 더 이상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도록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이 모든 장면을 하나로 연결하는 핵심은 목자입니다.
어린양이 목자가 되신다는 이상한 말
어린양은 본래 목자에게 돌봄을 받는 동물입니다. 양은 목자가 이끄는 곳으로 가고, 목자가 먹을 것을 구해 주며, 목자가 위험에서 지켜 줍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 자신이 목자의 일을 하십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이들을 돌보시고」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바로 앞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죽임당하신 어린양으로 소개되셨습니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시고 죽임당하신 것처럼 보이셨던 그 어린양께서 이제 목자처럼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이끄십니다. 그분이 죽임당하셨기에 목자가 될 자격을 얻으셨다고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이 책은 같은 그리스도를 죽임당하신 어린양이자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 목자로 보여 줍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멀리서 명령만 하시는 왕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 죽으신 분이며, 이제 그들을 이끄시는 분입니다.
에스겔이 기다렸던 목자
에스겔 3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 자신만 먹였습니다. 약한 양을 강하게 하지 않았고, 병든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으로 억누르며 다스렸고, 그 결과 양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양들을 찾아 나서겠다고 말씀하시고(에스겔 34:11–16), 이어서 한 목자, 「내 종 다윗」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34:23). 다윗은 에스겔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살았던 왕이므로, 이 약속은 다윗 왕조의 회복과 하나님께서 세우실 참된 통치자를 향한 희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희망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다윗의 뿌리로 이미 소개되셨고, 이제 목자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십니다. 에스겔의 나쁜 목자들은 양들을 이용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돌봅니다.
전쟁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죽였습니다. 굶주림 속에서는 사람들이 먹을 것을 얻기 어려웠습니다. 죽음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어린양께서는 생명의 샘으로 이끄십니다. 그분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생명의 물이 솟는 샘들로 이끄시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물은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문제였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백성은 마실 물이 없어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십니다. 시편 23편에서도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들을 푸른 풀밭에 눕히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이끄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께서 직접 사람들을 생명의 물이 솟는 「샘들」로 이끄십니다. 한 번 마시고 끝나는 물이 아니라 물이 계속 솟아나는 근원입니다. 지금 당장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그들을 계속 생명이 솟아나는 근원으로 이끄신다는 뜻입니다.
어린양께서는 그 샘을 가리키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직접 이끄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명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목자이신 어린양께서 그들을 이끄십니다. 그리고 그 이끄심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신다
이 장의 마지막 문장 「하나님께서 이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는 앞에 나온 어떤 약속보다 더 개인적인 장면입니다.
앞에서는 모든 민족과 지파와 백성에서 나와 온갖 언어를 쓰는, 숫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숫자도, 민족도, 지파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이 장에는 네 바람을 붙잡는 천사들, 하나님의 도장을 가지고 온 천사, 왕좌 앞에서 찬양하는 수많은 천사가 등장했고, 어린양께서는 목자처럼 사람들을 생명의 물로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눈물을 닦아 준다는 것은 멀리서 명령을 내리는 행동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행동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요한이 보았던 하나님은 보석 같은 영광 가운데 왕좌에 앉아 계셨고, 그 왕좌에서는 번개와 천둥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시지만, 고통받은 사람들의 눈물을 무관심하게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말은 그 눈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바탕에 둡니다. 그들이 울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이 마지막까지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들이 고통을 겪지 않았던 것처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고통이 더 이상 그들의 마지막 현실이 되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생명의 물은 예레미야 2:13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아 있는 물의 근원으로 말씀하신 장면, 요한복음 4:14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나는 샘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장면과 같은 주제로 이어집니다. 이 두 본문을 요한계시록 7장의 직접적인 인용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이 참된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성경의 큰 주제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눈물을 닦으신다는 표현은 이사야 25:8과 직접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시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그 문맥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위해 베푸시는 풍성한 잔치와, 죽음의 힘을 끝내고 자기 백성의 수치를 없애시는 구원이 있습니다.
도장을 받은 사람들과 눈물을 닦아 주시는 돌봄을 받는 사람들
요한계시록 7장은 처음에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소유를 나타내는 도장을 찍고, 마지막에 그들의 눈에서 고통의 흔적을 닦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누구인지 아시고 그들을 자신의 것으로 구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고통도 아시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앞 장의 마지막 질문 「누가 설 수 있겠는가?」에 이 장은 이렇게 답합니다. 사람의 숫자나 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에 겉옷을 빨아 희게 한 사람들, 그리스도의 구원에 속한 사람들이 설 수 있습니다. 그들도 큰 고난을 겪고 나왔습니다. 고난은 실제로 아프고, 죽음은 실제로 두렵고, 눈물도 실제로 흐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마지막 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바라봅시다.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왕좌 앞에 서 있습니다. 흰 겉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 고난을 겪고 나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천막을 치십니다. 더 이상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햇볕도 그들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왕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양께서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그들을 돌보십니다.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께서 사람들을 생명의 물이 솟는 샘들로 이끄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앞 장에서 사람들은 왕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을 피해 산과 바위 속에 숨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숨지 않습니다.
왕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을 덮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치시는 천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심판을 피해 숨으려는 사람들의 외침이 아니라,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