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6–11장 · 봉인과 나팔의 심판

누가 설 수 있는가

온 세상이 흔들렸습니다.

해가 검어지고 달은 피처럼 변했습니다. 별들이 떨어지고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 왕들과 권력자들, 부자들과 힘센 사람들, 노예와 자유인까지 모두 동굴과 바위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누가 설 수 있겠는가?」 (6:17)

그런데 요한계시록 7장을 펼치면 뜻밖의 광경이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아무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왕들이 두려워하며 외치던 그 보좌 앞에,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7:9).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그들이 왕들보다 강해서일까요?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만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요한계시록 7장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장이 찍힙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어린양의 피에 빨아 희게 한 사람들이라고 밝혀집니다.

이 장에는 두 장면이 나옵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 요한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노예들이 재앙에 앞서 인장을 받습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 요한은 아무도 셀 수 없는 무리를 봅니다. 그들은 흰 겉옷을 입고 어린양 앞에 서서 구원을 노래합니다.

한쪽에서는 수를 셉니다. 다른 쪽에서는 셀 수 없습니다.

한쪽에서는 아직 땅과 바다를 해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모든 환상의 중심에 계셨던 어린양이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소개되십니다.

목자입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께서 사람들을 생명의 물로 이끄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읽는 시간 28분소단락 77장 본문 읽기 →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바람을 붙잡다

요한계시록 7:1–3 본문 →

왜 네 천사는 바람을 멈추고 있는가

이 뒤에 나는 천사 넷이 땅의 네 모퉁이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바람이 땅에도 바다에도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도록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7:1 · 본디새김

앞에서는 어린양께서 인장을 차례로 떼셨습니다. 여섯째 인장이 떼어지자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인장이 열리기 전에 환상이 멈춥니다.

이 장면은 재앙이 가해지기 전의 상황을 보여 줍니다. 천사들이 아직 바람을 붙잡고 있고, 땅과 바다를 해치는 일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제지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재앙의 진행을 계속 보여 주는 대신, 그 재앙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천사 넷이 서 있는 곳은 「땅의 네 모퉁이」입니다. 네 모퉁이는 세상의 모든 방향을 가리키는 관용적·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1:12에서는 흩어진 이스라엘과 유다를 땅의 네 모퉁이에서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의 회복이 선포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네 방향이 세상 전체에 미칠 수 있는 재앙의 범위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왜 하필 바람일까요? 스가랴 6:1–5에서 네 병거와 말들은 온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던 하늘의 영들 또는 바람들과 연결됩니다. 다니엘 7:2에서는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를 뒤흔들고, 그 뒤에 제국을 상징하는 짐승들이 바다에서 올라옵니다. 따라서 네 바람은 단순한 기상 현상만이 아니라 세상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 장에서 바람이 무엇을 일으키는지 자세하게 설명되지는 않으므로, 네 바람을 특정한 네 국가나 네 군대에 각각 대응시킬 근거는 없습니다.

세상을 뒤흔들 힘이 있지만, 그 힘은 아직 행사되지 않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보다 먼저 주어지는 표지

그리고 나는 다른 천사가 해 뜨는 데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인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치는 것이 허락된 그 천사 넷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요한계시록 7:2 · 본디새김

에스겔 43:2에서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해 뜨는 방향에서 오는 이 천사도 하나님의 영광과 회복을 떠올리게 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방향이 반드시 에스겔의 환상을 직접 재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대의 인장은 문서나 물건의 진위를 확인하거나 소유와 권한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미 어린양께서 받으신 두루마리가 일곱 인장으로 봉해져 있었고, 그곳에서 인장은 두루마리를 봉하고 그 내용을 열 수 있는 권한과 연결되었습니다. 이제 같은 어근의 낱말이 사람에게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은 두루마리에서 사용되었던 인장의 이미지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로 옮겨 왔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노예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들도 해치지 마라.」요한계시록 7:3 · 본디새김

「때까지」입니다. 땅과 바다와 나무들을 해치는 일이 무조건 취소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먼저 인장을 찍기 위해 잠시 멈추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재앙과 아무 관계없는 외부인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들도 재앙이 일어나는 세상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 먼저 확인됩니다.

에스겔에서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들

에스겔 8–9장에서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심각한 우상 숭배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봅니다. 그런데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한 사람이 도시 가운데로 다니면서 그곳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일들 때문에 탄식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에스겔 9:4). 표를 받은 사람들은 이어지는 살육의 심판에서 보호받도록 구별됩니다.

심판이 예고되고,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표가 주어지며, 그 표가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이 구조와 매우 비슷합니다. 에스겔에서 표를 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불의를 보고 탄식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이미지를 가져오지만, 인장을 받는 사람들의 정체를 「우리 하나님의 노예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마는 사람의 정체를 드러내는 눈에 띄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이마의 인장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를 나타내는 표지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요한계시록 14:1에서는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 책 자체가 하나님의 인장을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 곧 그분들에게 속한 정체성과 연결하고 있으므로, 이 인장을 현대의 특정한 기술이나 신체 표식으로 성급하게 연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장을 받은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고난도 겪지 않을까요? 이 장을 끝까지 읽으면 그렇게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뒤에서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9:4에서는 하나님의 인장을 받지 않은 사람들만 해치라는 제한이 명시되지만, 그러한 특정 재앙에서의 보호가 모든 형태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면제를 뜻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요한은 인장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 전에 먼저 수를 듣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뒤에 나는 … 보았습니다」는 우선 요한이 환상을 보는 순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여섯째 인장의 재앙이 끝난 다음에 벌어진 사건으로 반드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환상 안에 묘사된 사건들이 역사적으로 모두 그 순서에 따라 발생한다는 뜻까지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또 「땅의 네 모퉁이」라는 표현을 고대 사람들이 지구가 실제로 네 모서리를 가진 평평한 판이라고 믿었다는 증거로 곧바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십사만 사천 — 하나님이 세신 사람들

요한계시록 7:4–8 본문 →

왜 정확히 십사만 사천인가

그리고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를 들었습니다. 그 수는 십사만 사천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인장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7:4 · 본디새김

요한이 사람들을 직접 세어서 숫자를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수가 선포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열두 지파에서 각각 만 이천 명, 곧 열둘 × 열둘 × 천입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하고, 천은 큰 무리 또는 충만한 규모를 나타내는 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수를 읽는 방식은 셋으로 갈립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온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로 읽는 견해, 각 지파에서 실제로 만 이천 명씩 인장을 받는다는 문자적인 인원으로 읽는 견해, 열두 지파의 군대처럼 조직된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낸다는 견해입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이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수가 알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 장에서는 전쟁과 굶주림과 죽음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인장을 받고 그 수가 선포됩니다. 그들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 지파가 먼저인가

이스라엘의 맏아들은 르우벤입니다(창세기 29:32). 출생 순서를 따른다면 르우벤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만 이천이 인장을 받았고, 르우벤 지파에서 만 이천, 갓 지파에서 만 이천,요한계시록 7:5 · 본디새김

요한계시록 5:5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로 소개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셨다는 사실 때문에 유다를 첫 번째로 세웠다는 해석에는 상당한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스라엘 지파의 목록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배열된 것입니다. 다만 본문이 그 이유를 직접 밝히지는 않으며, 유다의 왕권 전통 자체도 목록의 순서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단 지파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므낫세가 등장하고, 레위 지파가 포함되어 있으며, 요셉과 므낫세가 각각 따로 나타납니다.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이므로 한 집안의 이름이 서로 다른 두 항목으로 나타나는 셈입니다. 에브라임의 이름은 따로 나오지 않아, 요셉이 에브라임을 대표하는 것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단 지파가 빠진 정확한 이유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특히 단 지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후대의 전통을 이 구절의 확정된 의미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그런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48장에서 회복된 땅이 지파들에게 분배되는 환상에는 단 지파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단이라는 이름이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단 지파의 후손들을 영원히 구원에서 제외하셨다고 결론 내릴 근거는 없습니다.

요한은 지금 십사만 사천이라는 정확한 수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을 때 나타나는 것은 뜻밖에도 셀 수 없는 무리입니다.

조금 더 깊이

군대로 읽는 견해는 민수기 1–2장을 배경으로 봅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지파별로 계수되고, 특히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이 집계되며, 지파들은 진을 이루어 이동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서도 각 지파에서 동일한 수가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영적 전쟁을 위해 계수되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전쟁에 나가라는 명령이나 무기, 전투 대형이 묘사되지 않고 인장을 받는 일이 중심이므로, 군대의 인구 조사라는 배경은 가능한 문학적 반향이지만 이 장의 직접적인 목적을 군사적 동원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단 지파가 빠진 이유로는, 단 지파가 우상 숭배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사기 18장에서 단 지파 사람들은 우상을 세우고 섬기며, 열왕기상 12:28–30에서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운 장소 가운데 하나가 단입니다. 반면 전해 내려오던 지파 목록의 변형이나 문헌 전승, 필사 과정 등의 가능성도 검토되며, 이 목록을 신약 시대 유대 문헌의 지파 목록들과 비교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수를 들었는데 셀 수 없는 무리를 보다

요한계시록 7:9–12 본문 →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무리는 같은 사람들일까

이 뒤에 나는 보았습니다. 보십시오,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모든 민족과 지파와 백성과 언어에서 나와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흰 겉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7:9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이 장의 가장 큰 전환점입니다.

조금 전까지 요한은 숫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눈으로 보니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앞에서 인장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과 같은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무리일까요?

두 무리를 서로 다른 집단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 무리는 이스라엘 자손의 열두 지파에서, 두 번째 무리는 모든 민족과 지파와 백성과 언어에서 나옵니다. 또 첫 번째 장면에서는 땅이 해를 입기 전에 인장을 받는 사람들이, 두 번째 장면에서는 큰 환난에서 나와 보좌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반면 두 무리를 같은 공동체에 대한 서로 다른 환상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요한은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기셨다는 말을 들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죽임당하신 어린양이었습니다. 들은 것과 본 것은 서로 다른 승리자가 아니라, 같은 예수님의 정체를 서로 다른 이미지로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7장에서도 요한이 들은 것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이고, 본 것은 셀 수 없는 무리입니다. 5:9에서 어린양께서 자기 피로 모든 지파와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셨다고 노래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다만 같은 무리로 읽는다고 해서, 본문에 명시된 「이스라엘 자손」이 민족적 이스라엘과 아무 관계가 없는 표현이라고 결론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7:9의 큰 무리가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다시 모인 무리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해석에 대한 대안이며 학계에서 확정된 결론은 아닙니다. 따라서 두 무리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대조는 분명합니다. 그가 들은 수는 정확했지만, 그가 본 무리는 셀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설 수 없을 것 같던 자리

앞 장에서 왕들과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얼굴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해 숨으면서 「누가 설 수 있겠는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요한이 보는 무리는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6장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7장의 가장 직접적인 응답입니다.

그들은 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 앞에서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도 다른 분이 아니십니다.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과 그분의 관계가 다릅니다.

흰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

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에서 이기는 사람에게 흰 옷을 약속하셨고(3:5), 다섯째 인장에서는 죽임당한 증인들에게 흰 겉옷이 주어졌습니다(6:11). 이제 셀 수 없는 무리 전체가 흰 겉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옷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정결함과 승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구약에서 종려나무 가지는 초막절과 연결됩니다. 레위기 23:40에서 이스라엘은 초막절 첫날 아름다운 나무의 열매와 종려나무 가지 등을 가지고 여호와야훼 앞에서 기뻐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초막절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셨던 일을 기억하는 절기로, 추수의 기쁨과 광야의 기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12:13에서도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며 환호합니다.

이 장에서는 초막절과의 연결이 특히 눈에 띕니다. 뒤에서 장로가 하나님께서 이 무리 위에 장막을 치실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든 사람들과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는 하나님, 이 두 이미지가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했던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구원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리고 그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말했습니다. 「구원은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다.」요한계시록 7:10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이루었는지, 자기들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은 자기 힘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5장에서 어린양께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함께 온 피조물의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무리는 하나님과 어린양을 함께 구원의 근원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어린양의 구원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 외침에 보좌와 장로들과 생물 넷 둘레에 서 있던 모든 천사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에게 절합니다(7:11).

그들은 말했습니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에게 영원무궁하기를. 아멘.」요한계시록 7:12 · 본디새김

5:12에서 천사들은 죽임당하신 어린양에게 일곱 가지 찬양을 돌렸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일곱 가지 찬양을 돌립니다. 두 찬양의 표현과 순서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온전한 찬양을 나타내는 일곱 항목의 구조는 서로 닮아 있습니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이 천상적 예배의 한가운데 울려 퍼지고, 천사들은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수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것은 몇 명인가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노래하는가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좌 앞에 서 있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요? 장로 하나가 먼저 질문합니다.

「이들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느냐?」

요한계시록 7:13–14 본문 →

요한이 대답하지 못한 질문

그리고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흰 겉옷을 입은 이들, 이들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느냐?」요한계시록 7:13 · 본디새김

요한은 이미 그들이 모든 민족과 지파와 백성과 언어에서 나왔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도 장로가 다시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 것은 출신 지역이 아니라, 그들이 보좌 앞에 서 있게 되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당신이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겉옷을 어린양의 피에 빨아 희게 했다.」요한계시록 7:14 · 본디새김

요한은 보좌를 보았고, 어린양께서 두루마리를 받으시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서 있는 무리가 누구인지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본 것이 있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묵시 환상을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태도입니다. 본문이 직접 풀이하는 부분은 그 설명을 따라야 하고, 풀이하지 않은 부분은 다른 성경 본문과 문맥을 살피면서도 해석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이다

드디어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밝혀집니다.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옵니다.

「큰 환난」은 크게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하나는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특별한 환난의 시기를 가리킨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겪는 환난 전체를 하나의 큰 환난으로 묘사한다는 견해입니다. 두 해석 모두 검토할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난의 정확한 기간을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그 무리가 환난을 겪었고 그 환난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보좌 앞에 서 있는 모습만 보았다면, 처음부터 아무 고난도 겪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을 겪었고, 환난을 통과했고, 지금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인장을 받은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인장은 모든 고난을 피할 수 있는 특별한 통행증처럼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장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보증이지, 그들이 세상에서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으리라는 약속으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하나님의 백성을 궁극적으로 그분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인장을 받은 십사만 사천과 보좌 앞의 큰 무리 사이에 시간적·개인적 대응 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난과 구원이 함께 놓인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환난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환난이 그들의 마지막 정체성을 결정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피에 빨았는데 희어졌다

옷을 피에 빨면 붉어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피에 옷을 빨아서 희게 만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일부러 피와 흰 옷, 죽음과 정결함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를 결합합니다.

그 피는 「어린양의 피」입니다. 앞서 어린양께서는 죽임당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그 피로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셨다고 선언되었습니다(5:9). 이제 그 피가 흰 겉옷의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들을 정결하게 하는 근거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의 희생과 순교가 그들을 깨끗하게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은 분명하게 「어린양의 피」를 말합니다. 그들의 고난과 어린양의 죽음은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겪은 환난이 구원의 대가가 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가 그들의 정결함을 이루는 근거입니다.

동시에 본문은 그들이 「자기 겉옷을 … 빨아 희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이루어지는 구원에 참여한 사람들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사람의 행위로 대체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삶과 무관하게 묘사되지도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나오는」은 그리스어 현재 분사(에르코메노이(ἔρχομαι)), 곧 「나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한순간에 완료된 사건만을 가리키기보다 그 무리를 특징짓는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분사라는 문법적 형태만으로 환난이 요한이 글을 쓰던 시점에 정확히 어떤 기간 동안 진행되고 있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환상 안에서 그 무리를 어떻게 제시하는지와 현실의 역사적 시점을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큰 환난」을 마지막 때의 시기로 보는 읽기는 다니엘 12:1이나 마태복음 24:21의 극심한 환난과 연결하며, 「큰 환난」이라는 특별한 표현 자체를 근거로 듭니다. 역사 속 환난 전체로 보는 읽기는 요한 자신이 환난에 함께 참여하는 형제라고 말한 것(1:9)과 서머나 교회가 환난을 겪고 있었던 것(2:9–10)을 근거로 듭니다. 환난을 오직 아주 먼 미래의 한 시기에만 일어날 일로 제한하면 이 책의 첫 독자들이 실제로 겪고 있던 환난과의 연결을 놓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다

요한계시록 7:15–16 본문 →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낮에도 밤에도 그분의 성전에서 그분을 예배한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실 것이다.」요한계시록 7:15 · 본디새김

「그러므로」는 앞의 설명을 받습니다.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이며, 자기 겉옷을 어린양의 피에 빨아 희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우연히 하늘 보좌 가까이에 서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구원으로 그곳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예배입니다. 여기서 예배를 뜻하는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섬김, 특히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적 섬김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을 위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선언한 사실과도 잘 어울립니다.

앞 장에서는 죽임당한 사람들의 넋이 제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이제 흰 겉옷을 입은 큰 무리가 보좌 앞에서 구원을 찬양합니다. 두 무리를 정확히 같은 사람들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고난 가운데 드리는 호소와 구원을 찬양하는 소리가 같은 하늘의 환상 안에 등장합니다. 그들의 고난은 하나님에게서 잊힌 사건이 아니며, 그들의 정체성은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성전 안에 있는데 왜 장막이 필요한가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성전에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는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40:34–38에서는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자기 백성과 함께한다는 사실이 장막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위에 장막을 치십니다.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덮어 보호하시는 모습입니다.

이사야 4:5–6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시온 위에 구름과 불의 광채를 만드시고, 그 영광 위에 덮개가 있게 하시며, 더위와 폭풍우를 피하는 장막을 마련하십니다. 이사야에서 장막은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함께 나타냅니다. 장막이 왜 중요한지는 다음 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해도 그들에게 결코 내리쬐지 않고 어떤 뜨거운 열기도 그들을 덮치지 않을 것이다.」요한계시록 7:16 · 본디새김

이것은 추상적인 영적 행복만을 말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부족한 고통, 마실 물이 없는 고통, 피할 그늘 없이 뜨거운 햇볕 아래에 놓인 고통, 인간의 몸이 겪는 고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셋째 인장에서는 사람들이 하루 품삯으로 하루 먹을 양식을 겨우 살 수 있었습니다. 넷째 인장에서는 굶주림과 죽음이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앞에서 나타났던 고통이 여기에서는 사라질 것으로 선언됩니다. 다만 무리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굶주림이나 폭염을 겪었다고 본문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약속은 인간이 겪는 여러 고통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이사야의 포로 귀환 약속이 다시 들리다

이사야 49:10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끄실 것이며,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뜨거운 바람과 해의 열기에 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나옵니다. 그 본래 문맥은 흩어지고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과 귀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들에게 나오라고 하시고, 그들을 먹이시며 물이 솟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이사야 49:8–12). 옛 출애굽 때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시 이끄십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이 약속의 언어를 거의 그대로 가져옵니다. 다음 절에서는 생명의 물로 이끄는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흩어지고 고통받던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모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회복의 이야기가 이 환상에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포로가 된 이스라엘의 회복이 직접적인 문맥이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피로 정결하게 된 무리가 보좌 앞에서 이 약속을 듣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회복 약속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민족의 공동체로 확장되었다고 읽을 수도 있고, 앞의 십사만 사천과 연결하여 흩어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주제가 계속되고 있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겪은 고통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더 이상 그러한 고통이 지배하지 않는 자리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 일을 누가 이루실까요? 이 장의 마지막 절이 대답합니다.

어린양이 목자가 되시다

요한계시록 7:17 본문 →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양께서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시고 생명의 물이 솟는 샘들로 그들을 이끄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7:17 · 본디새김

어린양께서 목자가 되시고, 생명의 물이 솟는 샘들로 이끄시며, 하나님께서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세 장면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그 중심에 목자가 있습니다.

어린양이 목자가 되신다는 이상한 말

어린양은 본래 목자에게 돌봄을 받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 자신이 목자가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임당하신 어린양으로 소개되셨습니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시고 죽임당하신 것처럼 보이셨던 그 어린양께서 이제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이끄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죽임당하셨기에 목자가 될 자격을 얻으셨다고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이 책은 같은 그리스도를 죽임당하신 어린양이자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 목자로 보여 줍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멀리서 명령만 하시는 왕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 죽으신 분이며, 이제 그들을 이끄시는 분입니다.

에스겔이 기다렸던 목자

에스겔 34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 자신만 먹였습니다. 약한 양을 강하게 하지 않았고, 병든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압적으로 양 떼를 다스렸고, 양들은 흩어졌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이 직접 양들을 찾아 나서겠다고 말씀하시고(에스겔 34:11–16), 한 목자 「내 종 다윗」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34:23). 다윗은 에스겔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살았던 왕이므로, 이 약속은 다윗 왕조의 회복과 하나님께서 세우실 참된 통치자를 향한 희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희망이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다윗의 뿌리로 소개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됩니다.

에스겔의 나쁜 목자들은 양들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돌봅니다. 어린양의 통치는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거나 자신을 위해 소모시키는 통치가 아니라, 그들이 생명을 얻도록 이끄는 통치입니다. 전쟁과 굶주림과 죽음이 생명을 빼앗았던 앞의 재앙들과 달리, 어린양께서는 생명의 샘으로 이끄십니다.

생명의 물이 솟는 샘들로 이끄시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물은 생존에 필수적인 문제였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백성은 마실 물이 없어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십니다. 시편 23편에서도 여호와야훼는 목자로서 양들을 푸른 풀밭에 눕히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샘들’은 한 번 마시고 끝나는 물이 아니라 물이 계속 솟아나는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지금 당장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그들을 지속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린양께서는 그 샘을 가리키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직접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생명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신다

이것은 이 장의 마지막 문장이며, 앞에 나온 어떤 약속보다 더 개인적인 장면입니다. 앞에서는 모든 민족과 지파와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숫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숫자도, 민족도, 지파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과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25:8과 직접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모든 민족을 위해 풍성한 잔치를 베푸시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시며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장에는 바람을 붙잡는 천사들, 인장을 가지고 온 천사, 보좌 앞에서 찬양하는 수많은 천사가 등장했습니다. 어린양께서는 목자가 되어 사람들을 생명의 물로 이끄십니다. 그런데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눈물을 씻어 준다는 것은 멀리서 명령을 내리는 행동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행동입니다. 4장에서 요한이 보았던 하나님은 보석 같은 영광 가운데 보좌에 앉아 계셨고, 그 보좌에서는 번개와 천둥이 나왔습니다.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이제 사람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말은 그 눈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들이 울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이 마지막까지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2:13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을 생수의 근원으로 말씀하시고, 요한복음 4:14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나는 샘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본문을 요한계시록 7장의 직접적인 인용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이 참된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성경의 큰 주제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인장을 받은 사람들과 눈물을 씻김받는 사람들

요한계시록 7:1–17 본문 →

처음에는 천사들이 바람을 붙잡고, 하나님의 노예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소유를 나타내는 인장이 찍힙니다. 마지막에는 그들의 눈에서 고통의 흔적이 씻겨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누구인지 아시고 그들을 자신의 것으로 구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고통도 아시고 그들의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어린양에게 속한다는 사실은 고난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환난은 실제로 아프고, 눈물도 실제로 흐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마지막 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누가 설 수 있겠는가?」 자기 능력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에 겉옷을 빨아 희게 한 사람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 사람들이 설 수 있습니다.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흰 겉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께서 그들을 생명의 물이 솟는 샘들로 이끄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앞 장에서 사람들은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을 피해 산과 바위 속에 숨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숨지 않습니다.

그들을 덮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치시는 장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심판을 피해 숨으려는 사람들의 외침이 아니라, 눈물을 씻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