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5장 · 하늘의 왕좌와 예배

하늘에 놓인 보좌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요한은 그 안으로 초대받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비밀이 드러나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 안에서 가장 먼저 무엇을 볼까요? 무너지는 제국이나 마지막 심판의 광경일까요?

요한이 보는 것은 보좌 하나입니다.

「하늘에 보좌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보좌에 앉은 이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하늘에 올라왔는데, 요한은 먼저 이미 그곳에 있는 보좌를 봅니다. 미래를 보기 전에 지금 그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분을 보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누가 세상을 다스리는지 끊임없이 다투고 있습니다. 제국이 흥망하고, 권력이 바뀌며,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해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보는 하늘에는 누군가 앉기를 기다리는 빈 보좌가 없습니다.

이미 보좌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앉은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4장은 그 보좌의 주인이 누구신지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보좌를 둘러싼 존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장로 스물넷이 자신들의 관을 벗어 보좌 앞에 던집니다.

이 장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누가 왕인가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으며, 그렇다면 모든 영광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합니까?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84장 본문 읽기 →

열린 문 너머에서 처음 본 것

요한계시록 4:1–2 본문 →

이 뒤에 나는 보았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에 문 하나가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 들었던 그 소리, 곧 나팔 소리처럼 나에게 말하던 그 소리가 말했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너라. 이 뒤에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너에게 보이겠다.」요한계시록 4:1 · 본디새김

요한은 열린 문을 발견합니다.

요한이 문을 연 것이 아닙니다. 이미 열려 있는 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음성은 1:10–11에서 요한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했던 음성과 연결됩니다. 그때는 땅 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라는 명령이 주어졌지만, 이제는 하늘로 올라와 보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곧바로 나는 영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에 보좌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보좌에 앉은 이가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4:2 · 본디새김

「영 안에」라는 표현은 요한이 특별한 환상적 경험 속에 들어섰음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실제로 몸이 이동했는지, 환상 가운데 하늘의 광경을 보았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이 이제 평소의 감각으로는 알 수 없었던 현실을 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처음 본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얼굴이 아닙니다. 하늘에 모인 천사들의 숫자도 아닙니다.

보좌입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입니다.

이 장 전체에서 ‘보좌’라는 말이 거듭 등장합니다. 보좌 둘레에 또 다른 보좌들이 있고, 보좌에서 번개와 천둥이 나오며, 보좌 앞에 횃불과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생물들과 장로들이 보좌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하늘은 단순히 아름다운 존재들이 모여 있는 신비로운 장소가 아니라, 보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진 세계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겠다는 약속의 첫 장면은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건을 이해하게 하는 중심입니다.

누가 보좌에 앉아 계시는지를 알아야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4:1에는 「이 뒤에」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요한의 환상이 진행되는 순서, 곧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을 들은 뒤에 새로운 환상을 보았다는 뜻이고, 두 번째는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가리킵니다. 요한이 일곱 교회에 관한 말씀을 들은 뒤 하늘의 보좌를 보았다는 사실이, 하늘 보좌의 존재나 활동이 일곱 교회의 시대가 끝난 뒤에야 시작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환상이 요한에게 나타나는 순서와 환상 속 사건들이 역사에서 발생하는 순서를 무조건 같게 놓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리로 올라오너라」라는 명령을 모든 신자가 장차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사건의 직접적인 묘사로 읽을 근거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올라오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요한이며, 그는 계시를 보기 위해 초대받습니다.

보좌에 앉은 분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4:3 본문 →

앉은 이는 보기에 벽옥과 홍옥 같았고, 보좌 둘레에는 보기에 에메랄드 같은 무지개가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4:3 · 본디새김

요한은 보좌에 앉은 분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모습을 사람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머리나 눈, 손과 발을 설명하지 않고, 그 대신 보석과 빛깔을 이야기합니다.

벽옥은 보석의 빛남과 찬란함을 떠올리게 하고, 홍옥은 붉은빛을 지닌 보석입니다. 무지개는 보좌 둘레에 펼쳐져 있으며 에메랄드에 비유됩니다.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것은 보좌에 앉은 분을 둘러싼 눈부신 영광입니다.

이 모습은 에스겔의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 1:26–28에서 예언자는 보좌 같은 형상 위에 사람 같은 모습이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그 모습의 위와 아래에서는 불 같은 광채가 나타나고, 그 둘레의 빛은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나타나는 무지개에 비유됩니다. 에스겔은 그 광경을 「여호와야훼의 영광」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엎드립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환상의 언어를 이어받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재현하지는 않습니다. 에스겔에게서 나타났던 빛과 무지개의 이미지를 가져오면서, 보좌에 앉은 분의 모습을 더욱 직접적으로 형상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보고 있지만, 하나님을 하나의 사물처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았다고 확정적인 형태를 제시하기보다 무엇과 같았는지를 말합니다. 환상의 언어는 보이는 것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설명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에게 익숙한 것으로 바꾸어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 알고 있는 가장 찬란한 것들을 빌려 그 영광의 모습을 전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보석들의 색을 하나하나 특정한 신학적 속성에 대응시키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가령 벽옥은 순결, 홍옥은 진노, 에메랄드는 자비를 뜻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이 구절에 없습니다. 고대의 보석 명칭이 오늘날의 광물 분류와 항상 정확히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 무지개는 창세기 9:12–17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주신 언약의 표징, 곧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명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이 무지개를 노아 언약의 직접적인 표징이라고 풀이하지는 않으므로, 이 연결은 구약의 반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관을 쓴 스물네 장로는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4:4 본문 →

이제 시선이 보좌를 둘러싼 자리로 옮겨갑니다.

보좌 둘레에는 보좌 스물넷이 있었고, 그 보좌들 위에 장로 스물넷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4:4 · 본디새김

여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장로들이 아니라 보좌들입니다. 중앙에 하나의 보좌가 있고, 그 둘레에 스물네 개의 보좌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 7:9의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은 보좌들이 놓이고 옛적부터 계신 이가 앉으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 환상은 짐승들로 묘사된 제국들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하늘 법정의 장면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4장은 아직 법정의 판결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 보좌들에 앉은 장로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이 장로들은 누구일까요? 여기에는 오래전부터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예수님의 열두 사도를 합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대표로 보는 견해, 스물네 제사장 반열과 연결하여 하늘의 예배를 담당하는 제사장적 대표로 보는 견해, 하늘의 회의에 참여하는 천상적 존재들로 보는 견해입니다. 세 해석 모두 검토할 만한 근거가 있지만, 본문은 스물네 장로의 정체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의 합이라고 확정하거나, 구원받은 인간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정체가 불분명하더라도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상당 부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보좌에 앉아 있고, 흰 옷을 입고 있으며, 금관을 쓰고 있습니다. 존귀한 지위를 지닌 존재들로 나타납니다.

흰 옷과 관은 앞서 교회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데에는 흰 옷을 입으리라는 약속이, 서머나에는 생명의 관이, 라오디게아에는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으리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스물네 장로가 곧 그 약속을 받은 교회 구성원들이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 이미지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장로들은 이미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마지막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관을 벗어 보좌 앞에 던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 대답을 이해하려면 잠시 기다려야 합니다. 요한은 아직 그들의 행동보다 보좌 가까이에 있는 광경을 더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견해는 요한계시록 21:12–14에서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에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이 있고 열두 기초석에 예수님의 열두 사도 이름이 있다는 점을 상징적 해석의 근거로 듭니다. 둘째 견해는 역대상 24장에 기록된 대로 다윗 시대에 제사장들이 스물네 반열로 조직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합니다.

번개와 횃불, 수정 같은 바다

요한계시록 4:5 본문 →

보좌에서는 번개와 소리와 천둥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는 불붙은 횃불 일곱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요한계시록 4:5 · 본디새김

이것은 단순히 웅장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장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와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산에 강림하십니다. 그때 천둥과 번개가 있고, 산에는 짙은 구름이 덮이며, 나팔 소리가 크게 울립니다(출애굽기 19:16–19). 백성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노예 생활에서 구해 주신 하나님은 백성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하늘 보좌에서 나오는 번개와 소리와 천둥도 하나님의 임재가 지닌 거룩함과 위엄을 드러내는 이미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내산에서는 백성이 산 가까이 접근하는 일에도 제한이 있었지만, 요한은 하늘에 올라와 보좌 앞의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약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임재의 광경을 요한에게 보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보좌 앞의 횃불 일곱이 등장하고, 본문은 이것들이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직접 풀이합니다. 이 표현은 이미 1:4에서 등장했지만, 그때에는 일곱 영의 정체가 직접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일곱 영을 성령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보좌 앞에서 섬기는 일곱 천상적 존재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절은 전자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두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직접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는 완전히 다른 물질처럼 보이는 것이 나타납니다. 「수정을 닮은 유리 바다 같은 것」입니다.

방금 전에는 불붙은 횃불이었고, 이제는 수정처럼 맑은 유리 바다입니다. 보통 바다는 파도가 일고, 바람에 흔들리고, 때로는 사람을 삼킬 만큼 무섭게 변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본 바다는 마치 거대한 바다가 유리처럼 빛나고 있는 듯한 광경입니다.

이 이미지는 구약의 환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4:10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 그분의 발아래에는 청옥을 깔아 놓은 듯하고 하늘처럼 맑은 것이 있었습니다. 에스겔 1:22–26에서도 생물들의 머리 위에 수정처럼 빛나는 궁창 같은 것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보좌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바다의 의미에 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하늘의 바닥, 하늘 성전의 물두멍, 보좌 앞에서 잠잠해진 혼돈의 바다로 읽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이 절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요한이 보좌 앞에서 맑고 빛나는 광대한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번개와 천둥의 소란스러움, 불붙은 횃불의 강렬함, 수정 같은 바다의 투명함이 하나의 장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는 압도적인 위엄과 눈부신 아름다움이 함께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어떤 모습으로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번개와 천둥, 불과 보석, 유리와 수정,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이미지를 빌려 그 영광을 묘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일곱이라는 수를 각각 독립된 일곱 가지 능력이나 영적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리 바다에 관해서는, 둘째 견해가 고대 성전 앞에 놓였던 큰 물두멍, 곧 「바다」라 불린 청동 수조(열왕기상 7:23–26)와 연결하고, 셋째 견해는 성경의 여러 장면에서 바다가 혼돈과 위협의 상징으로 등장한다는 점에 근거합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장면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13:1에서는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오고, 15:2에서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나타나며, 21:1에서는 바다가 더 이상 없다고 선언됩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바다를 일관된 하나의 상징으로 단순화하기 어렵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네 생물 — 에스겔과 이사야의 환상이 만나다

요한계시록 4:6–8 본문 →

이제 요한의 시선이 보좌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옮겨갑니다.

보좌 앞에는 수정을 닮은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좌 한가운데와 보좌 둘레에 생물 넷이 있었는데, 앞뒤로 눈이 가득했습니다.요한계시록 4:6 · 본디새김

어떻게 「보좌 한가운데와 보좌 둘레에」 동시에 있을 수 있을까요? 보좌의 네 면을 중심으로 생물들이 둘러서 있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보좌를 둘러싸면서도 보좌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 위치에 있었다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생물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떠받치는 듯한 모습을 나타낸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의 해석도 가능합니다. 다만 요한의 묘사는 정확한 건축 도면을 그리도록 만들어진 문장이 아니므로, 이 생물들이 보좌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붙드는 편이 좋습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았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았고, 셋째 생물은 사람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요한계시록 4:7 · 본디새김

여기에는 에스겔 1장이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네 생물은 각각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네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에스겔 1:10).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네 생물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요한은 에스겔의 환상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고 그 이미지들을 새롭게 배열합니다.

전통적으로 사자는 야생 짐승을, 송아지는 가축을, 사람은 인류를, 독수리는 새들을 대표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네 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살아 있는 존재들을 대표하며, 그 모든 존재가 창조주 앞에서 예배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 해석은 곧이어 등장하는 만물의 창조주를 찬양하는 노래와 잘 어울립니다. 다만 본문이 직접 풀이한 상징은 아니고, 문맥과 이미지에 근거한 해석입니다.

생물 넷은 저마다 날개 여섯을 가지고 있었고, 둘레에도 안쪽에도 눈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낮에도 밤에도 쉼 없이 말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전능한 이, 전에 있었고 지금 있고 오는 이.」요한계시록 4:8 · 본디새김

여기에서 또 다른 구약의 환상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6장입니다.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봅니다. 그분 곁에 선 스랍들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지고,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리며, 두 날개로 날아다닙니다(이사야 6:2). 에스겔의 생물들이 네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요한계시록은 에스겔의 생물과 이사야의 스랍이 지닌 특징을 하나의 환상 안에 결합한 것입니다.

에스겔의 네 얼굴과 이사야의 여섯 날개가 겹쳐집니다.

눈이 가득한 이미지도 에스겔 1:18과 10:12에서 바퀴와 생물들의 신체에 나타나는데, 요한계시록은 그 이미지를 네 생물 자체에 집중시킵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수많은 눈을 가진 괴물이라는 뜻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눈이 가득하다는 이미지는 모든 방향을 향한 주의 깊음과 깨어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그들에게 하나님과 같은 전지성이 주어졌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수많은 눈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하는 일은 정보를 모으거나 미래를 관찰하는 일이 아닙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의 거룩함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 찬양은 이사야 6:3을 직접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의 스랍들은 서로를 향해 여호와야훼의 거룩함을 세 번 선언합니다. 성경에서 반복은 어떤 표현을 강조하는 중요한 방식이며, 세 번 이어지는 거룩함의 선언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흔히 이 세 번의 반복을 삼위일체에 대한 직접적인 암시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6장의 본래 문맥에서 세 번의 거룩함이 성부, 성자, 성령 각각을 가리킨다고 설명할 근거는 없고, 요한계시록 4장도 그렇게 풀이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그리스도교 예배와 신학에서 삼위일체적 찬양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본문의 직접적인 상징 풀이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단순히 죄가 없으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구별되는 분입니다. 어떤 피조물과도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으며, 모든 존재를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 초월성은 하나님이 세상과 무관하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찬양은 이어서 그분을 「전에 있었고 지금 있고 오는 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실 뿐 아니라, 역사 속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은 오래전 세상을 창조하신 뒤 역사의 밖에서 관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생물들은 이 하나님을 「낮에도 밤에도 쉼 없이」 찬양합니다. 요한은 천상의 예배가 특정한 시간에만 열리는 행사라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이 찬양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물들의 찬양에 다른 존재들이 응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네 생물을 네 복음서와 연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생물을 어느 복음서에 대응시키는지는 전통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요한계시록 4장의 직접적인 의미로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또 하나님의 호칭은 1:4와 1:8에서 「지금 있고 전에 있었으며 오는 이」라는 순서였는데, 여기에서는 「전에 있었고 지금 있고 오는 이」입니다. 이 차이만으로 특별한 시간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두 표현 모두 하나님을 과거와 현재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오시는 분으로 소개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관을 벗어 던지는 왕들

요한계시록 4:9–10 본문 →

생물들이 보좌에 앉은 이,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릴 때마다, 장로 스물넷은 보좌에 앉은 이 앞에 엎드리고,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는 이에게 절하고, 자기들의 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말합니다.요한계시록 4:9–10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요한계시록 4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움직임입니다.

장로들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이미 존귀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흰 옷을 입고 금관을 쓰고 있었고, 자신들의 보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관은 승리와 명예, 왕권과 관련된 중요한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관을 붙잡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내려놓습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영광을 부정하는 행위라기보다, 그들이 가진 영광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장로들은 관을 쓸 만큼 존귀하지만, 그 관을 자기 힘으로 얻은 절대적인 권리처럼 주장하지 않습니다. 스물네 장로가 아무리 존귀한 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그들의 권위는 중앙의 보좌에 앉으신 분 앞에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 장면은 당시 지상의 권력 구조와도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룹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와 통치자들의 권위가 공적인 의례를 통해 드러났고, 황제에게 부여되는 칭호와 영광은 정치적 충성의 표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이 환상을 들을 때, 땅 위의 어떤 통치자보다 높은 권위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인정하는 사람들은 하늘에서 이미 보좌와 관을 가진 장로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예배는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고백이다

네 생물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원성을 선포합니다. 장로들은 그 찬양에 응답하여 엎드리고 관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하나님이 왜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한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 사실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관을 내려놓는지는 그들의 찬양을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4:11의 「우리 주이며 우리 하나님이신 분」이라는 표현을 반드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사용한 칭호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 표현은 구약과 유대교의 하나님 호칭에서도 배경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칭호를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으로 확정하거나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결정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늘의 보좌와 땅의 통치 권력이 대비된다는 큰 주제는 분명합니다.

「당신이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4:11 본문 →

「우리 주이며 우리 하나님이신 분, 당신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당신이 만물을 지으셨고, 당신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이 존재했고 지어졌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4:11 · 본디새김

요한계시록 4장의 모든 장면이 이 찬양으로 모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관한 책이고, 앞서 일곱 교회는 환난과 박해, 유혹과 심판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첫 찬양은 구속이나 마지막 심판이 아니라 창조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분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의 중심 단어는 「합당합니다」입니다. 어떤 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나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장로들이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선포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가장 강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이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과 직접적인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십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세상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장로들이 머리에 쓰고 있던 금관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속한 물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금관이 나타내는 권위와 영광 역시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장로들은 그 관을 보좌 앞에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자기 존재와 권위의 근원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존재했고 지어졌다는 이상한 순서

우리는 보통 ‘지어졌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존재했고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문장의 중심은 존재와 창조의 시간적 순서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당신의 뜻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만물이 존재하게 된 이유, 만물이 지어질 수 있었던 궁극적인 근거가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장로들은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는 지식을 과시하려고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누구에게 존재를 빚지고 있는지 인정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역시 「존재했다」가 먼저 나오고 「지어졌다」가 뒤따르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순서 때문에 고대 사본들에서도 표현을 다르게 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본에서는 동사의 형태가 바뀌거나 일부 표현이 생략되어 있어, 본문의 순서는 본문비평적으로도 검토되는 읽기입니다. 또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계시인데 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4장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선포하고, 5장에서는 누가 두루마리를 펼치기에 합당한지 묻는 장면이 펼쳐지며 죽임당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시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하나의 보좌 환상 안에서 이어집니다. 그러나 4장을 단순히 5장을 위한 배경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지금 보좌에 앉아 계시며 모든 존재의 영광과 권위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완결된 선언이 4장 자체에 있습니다.

모든 관이 내려놓이는 자리

요한계시록 4:1–11 본문 →

요한은 하늘에 올라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 본 것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보좌였습니다. 요한이 하늘의 문을 통과하여 처음으로 배우는 것은 미래를 계산하는 방법이 아니라, 미래의 어떤 사건도 하나님의 보좌보다 더 근본적인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뜻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영광은 그분께 돌아갑니다.

이것은 하늘에 보좌가 있으니 땅에서 일어나는 고난이나 불의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땅에서 어떤 권력이 자신을 절대적인 것처럼 내세울 때, 하나님의 보좌는 그 권력이 결코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어떤 나라가 아무리 강력해도 창조주는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이미 가지고 계신 영광에 무엇인가를 덧붙여 드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 영광이 본래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인정하는 일입니다. 스물네 장로의 존귀함은 부정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관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인간의 성취를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 성취가 제자리를 찾도록 합니다.

보좌 앞에서 네 생물이 쉼 없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선포합니다. 스물네 장로는 자신의 보좌에서 일어나 엎드립니다. 머리에 쓰고 있던 금관들이 하나씩 벗겨져 중앙의 보좌 앞에 놓입니다.

한때 장로들의 머리에서 빛나던 금관들이 이제 모두 한 분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그 관을 다시 집어 들기 위해 서두르지 않습니다. 다만 보좌에 앉으신 분을 향해 말합니다. 「당신이 만물을 지으셨고, 당신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이 존재했고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