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5장 · 하늘의 왕좌와 예배

하늘에 놓인 왕좌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요한은 그 안으로 초대받습니다. 이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 안에서 가장 먼저 무엇을 볼까요? 무너지는 제국이나 마지막 심판의 광경일까요?

요한이 보는 것은 왕좌 하나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하늘에 올라왔는데, 요한은 먼저 이미 그곳에 있는 왕좌를 봅니다. 미래를 보기 전에 지금 그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분을 보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누가 세상을 다스리는지 끊임없이 다투고 있습니다. 제국이 일어서고 무너지며,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해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보는 하늘에는 누군가 앉기를 기다리는 빈 왕좌가 없습니다.

이미 왕좌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앉은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4장은 왕좌를 둘러싼 존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장로 스물넷이 자신들의 관을 벗어 왕좌 앞에 던집니다.

이 장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누가 왕인가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으며, 그렇다면 모든 영광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합니까?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84장 본문 읽기 →

열린 문 너머에서 처음 본 것

요한계시록 4:1–2 본문 →

그 뒤에 나는 하늘에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 들었던 나팔 소리 같은 그 목소리가 내게 말했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너라. 이 뒤에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너에게 보여 주겠다.」요한계시록 4:1 · 두루새김

요한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미 열려 있는 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팔 소리 같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옵니다. 1:10–11에서 요한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했던 그 목소리입니다. 그때는 땅 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라고 했지만, 이제는 하늘로 올라와 보라고 합니다.

「그 뒤에」와 「이 뒤에」는 원문에서 같은 표현인데, 두루새김은 두 자리를 나누어 옮겼습니다. 첫 번째는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을 들은 뒤 새 환상을 보았다는 환상의 순서이고, 두 번째는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요한이 일곱 교회에 관한 말씀 뒤에 왕좌를 보았다고 해서, 하늘 왕좌의 다스림이 일곱 교회의 시대가 끝난 뒤에야 시작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리로 올라오너라」를 모든 신자가 장차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사건의 직접적인 묘사로 읽을 근거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올라오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요한이며, 그는 계시를 보기 위해 초대받습니다.

나는 곧바로 성령에 사로잡혔습니다. 보니, 하늘에 왕좌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4:2 · 두루새김

「성령에 사로잡혔습니다」는 원문의 ‘영 안에 있게 되었다’를 풀어 옮긴 말로, 요한이 성령에 이끌려 특별한 환상 경험 속에 들어섰음을 나타냅니다. 실제로 몸이 이동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지만, 요한이 이제 평소의 감각으로는 알 수 없었던 현실을 보게 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가 처음 본 것은 하나님의 얼굴도, 천사들의 숫자도 아닙니다.

왕좌입니다. 그리고 그 왕좌에 앉아 계신 분입니다.

이 장 전체에서 「왕좌」라는 말이 거듭 등장합니다. 왕좌 둘레에 또 다른 왕좌들이 있고, 왕좌에서 번개와 천둥이 나오며, 생물들과 장로들이 왕좌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하늘은 왕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진 세계입니다.

누가 왕좌에 앉아 계시는지를 알아야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좌에 앉은 분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4:3 본문 →

왕좌에 앉은 이의 모습은 벽옥과 홍옥 같았습니다. 왕좌 둘레에는 에메랄드처럼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4:3 · 두루새김

요한은 왕좌에 앉은 분을 보고 있지만, 머리나 눈, 손과 발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보석과 빛깔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몸 생김새보다 빛과 빛깔이 주는 인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벽옥은 보석의 빛남과 찬란함을 떠올리게 하고, 홍옥은 붉은빛을 지닌 보석입니다. 그러나 벽옥은 순결, 홍옥은 진노, 에메랄드는 자비를 뜻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이 구절에 없습니다.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은 왕좌에 앉은 분을 둘러싼 눈부신 영광입니다.

이 모습은 에스겔의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 1:26–28에서 예언자는 왕좌 같은 형상 위에 사람 같은 모습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 둘레의 빛은 구름 속 무지개에 비유됩니다. 에스겔은 그 광경을 「여호와야훼의 영광」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엎드립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빛과 무지개의 이미지를 가져오면서도, 왕좌에 앉은 분의 모습을 더 직접적으로 그려 내지 않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보고 있지만, 하나님을 하나의 사물처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았다고 확정하기보다 무엇과 같았는지를 말합니다.

환상의 언어는 보이는 것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설명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가장 찬란한 것들을 빌려 그 영광의 모습을 전할 뿐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의 보석 이름이 오늘날의 광물 분류와 항상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지개는 창세기 9:12–17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주신 언약의 표, 곧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명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를 하나님이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분임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지만, 요한이 이 무지개를 노아 언약의 직접적인 표라고 풀이하지는 않으므로 구약의 장면이 울려 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관을 쓴 스물네 장로는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4:4 본문 →

이제 시선이 왕좌를 둘러싼 자리로 옮겨갑니다.

그 왕좌 둘레에는 왕좌 스물네 개가 있었고, 그 위에 장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4:4 · 두루새김

여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장로들이 아니라 왕좌들입니다. 중앙에 하나의 왕좌가 있고, 그 둘레에 스물네 개의 왕좌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 7:9의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은 왕좌들이 놓이고 옛적부터 계신 이가 앉으시는 모습을 보는데, 그것은 짐승들로 묘사된 제국들을 심판하는 하늘 법정의 장면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4장은 아직 판결을 묘사하지 않고, 왕좌에 앉은 장로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이 장로들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대표, 하늘의 예배를 맡은 제사장 같은 대표, 하늘의 회의에 참여하는 하늘의 존재라는 견해로 갈립니다. 세 해석 모두 검토할 만한 근거가 있지만, 본문은 장로들의 정체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상당 부분 알 수 있습니다. 왕좌에 앉아 있고, 흰 옷을 입고, 금관을 쓴 높고 귀한 존재들입니다. 흰 옷과 관은 앞서 교회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데에는 흰 옷이, 서머나에는 생명의 관이, 라오디게아에는 예수님의 왕좌에 함께 앉으리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장로들이 곧 그 약속을 받은 교회 구성원들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이미지들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마지막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관을 벗어 왕좌 앞에 던집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은 아직 그들의 행동보다 왕좌 가까이에 있는 광경을 더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백성 전체의 대표로 보는 쪽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예수님의 열두 사도를 합하면 스물넷이 된다는 점, 그리고 21:12–14에서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에 지파들의 이름이, 열두 기초석에 사도들의 이름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제사장 같은 대표로 보는 쪽은 역대상 24장에서 다윗 시대에 제사장들이 스물네 조로 나뉘었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번개와 횃불, 수정 같은 바다

요한계시록 4:5 본문 →

왕좌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여러 소리와 천둥소리가 났습니다. 왕좌 앞에는 횃불 일곱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횃불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요한계시록 4:5 · 두루새김

출애굽기 19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내려오실 때 천둥과 번개가 있고, 짙은 구름이 덮이며, 나팔 소리가 크게 울립니다(출애굽기 19:16–19). 백성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노예 생활에서 구해 주신 하나님은 백성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번개와 천둥도 하나님이 계신 곳의 거룩함과 위엄을 드러내는 이미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차이도 있습니다. 시내산에서는 백성이 산 가까이 다가가는 일에도 제한이 있었지만, 요한은 하늘에 올라와 왕좌 앞의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광경을 요한에게 보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왕좌 앞의 횃불 일곱은 본문이 직접 풀이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이미 1:4에 나왔는데, 여기에서 그것이 왕좌 앞의 일곱 횃불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일곱 영을 성령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보는 견해와 왕좌 앞에서 섬기는 일곱 하늘의 존재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절은 전자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어느 하나를 직접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왕좌 앞에는 수정처럼 맑은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4:6).

방금 전에는 불붙은 횃불이었고, 이제는 수정처럼 맑은 바다입니다. 보통 바다는 파도가 일고, 때로는 사람을 삼킬 만큼 무섭게 변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본 것은 「유리 바다 같은 것」, 거대한 바다가 유리처럼 빛나고 있는 듯한 광경입니다.

이 이미지는 출애굽기 24:10에서 하나님의 발아래 청옥을 깔아 놓은 듯 하늘처럼 맑던 것, 에스겔 1:22–26에서 생물들의 머리 위에 수정처럼 빛나던 하늘 덮개와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바다의 뜻은 갈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하늘의 바닥, 성전 앞의 청동 수조를 떠올리게 하는 하늘 성전의 이미지, 혼란과 위협의 바다가 왕좌 앞에서 잠잠해진 모습으로 읽는 견해들이 있으며, 어느 하나를 이 절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번개와 천둥의 소란스러움, 불붙은 횃불의 강렬함, 수정 같은 바다의 맑음이 하나의 장면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왕좌에는 압도적인 위엄과 눈부신 아름다움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번개와 천둥, 불과 보석, 유리와 수정,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이미지를 빌려 그 영광을 묘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성전 앞에 놓였던 큰 물통은 「바다」라 불린 청동 수조였습니다(열왕기상 7:23–26). 요한계시록 안에서도 바다는 장면마다 뜻이 다릅니다. 13:1에서는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오고, 15:2에서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나타나며, 21:1에서는 바다가 더 이상 없다고 선언됩니다. 그래서 바다를 한결같은 하나의 상징으로 단순화하기 어렵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수를 독립된 일곱 가지 능력이나 영적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네 생물 — 에스겔과 이사야의 환상이 만나다

요한계시록 4:6–8 본문 →

이제 요한의 시선이 왕좌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옮겨갑니다.

왕좌 앞에는 수정처럼 맑은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왕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생물 넷이 있었고, 그들의 앞뒤에는 눈이 가득했습니다.요한계시록 4:6 · 두루새김

어떻게 「한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둘레에」 있을 수 있을까요? 왕좌의 네 면을 중심으로 생물들이 둘러서 있었다고 읽을 수도 있고, 왕좌를 둘러싸면서도 왕좌와 매우 밀접하게 이어진 자리에 있었다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의 생물들이 하나님의 왕좌를 떠받치는 듯한 모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도 가능합니다. 다만 이 문장은 건축 도면이 아니니, 생물들이 왕좌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편이 좋습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았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았습니다. 셋째 생물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요한계시록 4:7 · 두루새김

에스겔 1장의 네 생물은 각각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네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에스겔 1:10). 요한계시록에서는 네 생물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요한은 에스겔의 환상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고 그 이미지들을 새롭게 배열합니다.

전통적으로 사자는 야생 짐승을, 송아지는 가축을, 사람은 인류를, 독수리는 새들을 대표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네 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살아 있는 존재들을 대표하며, 곧이어 나오는 창조주 찬양과 잘 어울립니다. 다만 이것은 앞뒤 흐름에 근거한 해석이지, 본문이 직접 풀이한 상징은 아닙니다.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가 여섯 개였고, 바깥쪽과 안쪽에 눈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말했습니다.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십니다. 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 오실 분이십니다.」요한계시록 4:8 · 두루새김

여기에서 또 다른 구약의 환상이 겹칩니다. 이사야 6장에서 높이 들린 왕좌 곁에 선 스랍들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이사야 6:2). 에스겔의 생물들은 날개가 넷이었으니, 요한계시록은 에스겔의 네 얼굴과 이사야의 여섯 날개를 하나의 환상 안에 합친 것입니다.

눈이 가득한 모습도 에스겔 1:18과 10:12에서 바퀴와 생물들의 몸에 눈이 가득한 이미지와 이어지는데,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네 생물 자체에 모읍니다. 이 이미지는 모든 방향을 향한 주의 깊음과 깨어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그들에게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아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수많은 눈을 가진 그들이 하는 일은 정보를 모으거나 미래를 관찰하는 일이 아닙니다. 왕좌에 앉으신 분의 거룩함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십니다」

이 찬양은 이사야 6:3에서 스랍들이 서로를 향해 여호와야훼의 거룩함을 세 번 선언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경에서 반복은 강조의 방식이며, 세 번 이어지는 선언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흔히 이 세 번의 반복을 삼위일체에 대한 직접적인 암시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6장의 흐름에서 세 번의 거룩함이 성부, 성자, 성령 각각을 가리킨다고 설명할 근거는 없고, 요한계시록 4장도 그렇게 풀이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그리스도교 예배와 신학에서 삼위일체적 찬양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본문의 직접적인 풀이와는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죄가 없으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어떤 피조물과도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으며, 모든 존재를 뛰어넘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과 무관하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지는 호칭이 그분을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 오실 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은 오래전 세상을 창조하신 뒤 역사의 밖에서 관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역사 속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생물들은 이 하나님을 「밤낮 쉬지 않고」 찬양합니다. 하늘의 예배는 특정한 시간에만 열리는 행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생물들의 찬양에 다른 존재들이 응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는 네 생물을 네 복음서와 연결하기도 했지만, 어느 생물을 어느 복음서에 연결하는지는 전통마다 달랐고 4장의 직접적인 의미로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호칭도 원문에서 1:4와 1:8은 지금 계심, 전에 계심, 오심의 순서였는데 여기서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 오실 분」의 순서입니다. 이 차이만으로 특별한 시간표를 만들 수는 없지만, 두 표현 모두 하나님을 오시는 분으로 소개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관을 벗어 던지는 왕들

요한계시록 4:9–10 본문 →

네 생물이 왕좌에 앉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신 분께 영광과 존경과 감사를 드릴 때마다, 스물네 장로는 왕좌에 앉으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히 살아 계신 분께 예배하고, 자기들의 관을 왕좌 앞에 던지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4:9–10 · 두루새김

장로들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흰 옷을 입고 금관을 쓰고, 자신들의 왕좌까지 가진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왕좌에서 내려와 엎드리고, 자기들의 관을 벗어 던집니다.

고대 세계에서 관은 승리와 명예,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였습니다. 그런데 장로들은 그 관을 붙잡고 있지 않고 하나님의 왕좌 앞에 내려놓습니다. 자기들의 영광을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영광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여기서 하늘의 다스림이 어떤 질서 위에 놓여 있는지 드러납니다. 스물네 장로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그들의 권위는 중앙의 왕좌에 앉으신 분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땅 위의 권력과도 대조를 이룹니다. 로마 제국에서 황제에게 주어지는 칭호와 영광은 정치적 충성의 표현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은 이 환상을 들으며 땅 위의 어떤 통치자보다 높은 권위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인정하는 이들은 하늘에서 이미 왕좌와 관을 가진 장로들입니다. 그들은 지위가 높을수록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예배는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고백이다

네 생물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원하심을 선포하고, 장로들은 그 찬양에 응답하여 엎드리고 관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하나님이 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지 그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 사실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관을 내려놓는지는 그들의 찬양을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4:11의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분」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사용한 칭호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으로만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표현은 구약과 유대교의 하나님 호칭에서도 배경을 찾을 수 있으므로, 이를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반박으로 확정하거나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를 결정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늘의 왕좌와 땅의 통치 권력이 대비된다는 큰 주제는 분명합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4:11 본문 →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분, 주님은 영광과 존경과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으로 존재했고 지어졌습니다.」요한계시록 4:11 · 두루새김

요한계시록 4장의 모든 장면이 이 찬양으로 모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관한 책이고, 앞서 일곱 교회는 고난과 박해, 유혹과 심판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첫 찬양은 구원이나 마지막 심판이 아니라 창조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분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의 중심 낱말은 「합당하십니다」(ἄξιος), 곧 받을 만한 자격이나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까닭은 단순히 가장 강한 존재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이 세상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말하듯, 요한계시록 4장은 이 사실을 하늘의 예배에서 다시 선포합니다.

장로들이 머리에 쓰고 있던 금관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속한 물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관이 나타내는 권위 역시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장로들은 그 관을 왕좌 앞에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존재했고 지어졌다는 이상한 순서

우리는 보통 ‘지어졌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본문은 「존재했고 지어졌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원문도 이 순서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문장의 중심은 시간 순서가 아니라 「주님의 뜻으로」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 궁극적인 근거가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장로들은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는 지식을 뽐내려고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누구에게 존재를 빚지고 있는지 인정하고 있습니다.

왜 어린양은 아직 등장하지 않는가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계시인데, 왜 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등장하지 않으실까요?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게 말씀하셨지만, 이제 왕좌의 환상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중심에 놓입니다.

4장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선포합니다. 5장에서는 누가 두루마리를 펼치기에 합당한지 묻는 장면이 펼쳐지고, 죽임당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하나의 왕좌 환상 안에서 이어집니다.

그렇다고 4장을 5장을 위한 배경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지금 왕좌에 앉아 계시며 모든 존재의 영광과 권위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완결된 선언이 4장 자체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존재했고 지어졌습니다」라는 낯선 순서 때문에 고대 사본들 가운데는 동사의 형태가 바뀌거나 일부 표현이 빠진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관이 내려놓이는 자리

요한계시록 4:1–11 본문 →

요한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겠다는 약속을 받고 하늘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 본 것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왕좌였습니다. 그가 하늘의 문을 지나 처음 배우는 것은 미래를 계산하는 방법이 아니라, 미래의 어떤 사건도 하나님의 왕좌보다 더 근본적인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늘에 왕좌가 있으니 땅의 고난이나 불의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땅의 권력이 자신을 절대적인 것처럼 내세울 때, 하나님의 왕좌는 그 권력이 결코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어떤 나라가 아무리 강력해도 창조주는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덧붙여 드리는 일이 아니라, 그 영광이 본래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인정하는 일이며, 그 앎은 우리가 가진 힘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절대적인 권리가 아님을 알게 합니다.

왕좌 앞에서 네 생물이 쉼 없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선포합니다. 스물네 장로는 자신의 왕좌에서 일어나 엎드립니다. 머리에 쓰고 있던 금관들이 하나씩 벗겨져 중앙의 왕좌 앞에 놓입니다.

한때 장로들의 머리에서 빛나던 금관들이 이제 모두 한 분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그 관을 다시 집어 들기 위해 서두르지 않습니다. 다만 왕좌에 앉으신 분을 향해 말합니다. 「주님은 영광과 존경과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