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2–3장 · 일곱 교회에 보내는 말
살아 있다는 이름과 문 앞에 서 계신 예수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어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반대로 힘이 거의 없지만 그 누구도 닫을 수 없는 문을 약속받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시는 교회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등장하는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의 이야기입니다.
세 교회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각 교회가 처한 현실과 예수님께서 보시는 현실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각 교회가 깨닫지 못한 현실을 드러내시면서, 그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가야 하는지도 말씀하십니다.
사데에는 아직 굳게 세워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빌라델비아에는 이미 열린 문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에는 아직 열어야 할 문이 있습니다.
특히 이 장의 마지막은 뜻밖입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심각한 책망을 받는 라오디게아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친밀한 초대를 하십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는 초대입니다. 이 초대에 이르기까지, 세 교회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데 — 살아 있다는 이름을 가진 죽은 교회
죽어 있는데도 살아 있다고 불리는 이유
사데 교회에 보내는 말씀은 일곱 편지 가운데서도 유난히 날카롭게 시작합니다.
다른 교회들에게는 수고나 견딤, 믿음과 사랑을 칭찬하는 말씀이 먼저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데에는 그런 칭찬이 없습니다.
「사데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별 일곱을 가진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네가 살아 있다고 하지만, 너는 죽어 있다.」요한계시록 3:1 · 두루새김
사데에는 한 일이 있습니다.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과 실제 상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가 활발하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을 수도 있고, 구성원들 스스로 자기 상태를 좋게 평가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교회에 대한 평판과 예수님께서 보시는 상태가 서로 어긋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데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일곱 영과 별 일곱을 가진 이」로 소개하십니다. 일곱 영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관해서는 해석이 갈리지만, 이 책은 일곱 영을 하나님의 왕좌와 연결합니다(1:4; 4:5). 별 일곱은 앞서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라고 풀이되었습니다.
이 소개와 책망을 나란히 놓으면, 교회의 참된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교회가 자신의 이름과 명성만으로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아야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교회에 남아 있는 것
그런데 이어지는 명령은 조금 이상합니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굳게 세워라. 내가 보기에 네가 한 일들은 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3:2 · 두루새김
방금 전까지 교회가 죽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2절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공동체의 영적 상태를 죽음에 빗대어 판단하시지만, 여전히 깨어나고 회개할 가능성을 열어 두십니다.
「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활동의 양이 부족하다는 말과 다릅니다. 어떤 일을 많이 하고 있어도 그 일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목적에 이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사데 교회가 한 일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온전하지 않았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른 교회의 문제를 가져와 사데의 죄로 삼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요한은 이 교회의 실패를 살아 있다는 평판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은 일들의 대조로 드러냅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사데에게 기억하고, 지키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말씀을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 기억하여라. 그 말씀을 지키고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찾아가겠다.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너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요한계시록 3:3 · 두루새김
기억해야 할 대상은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감정이 아니라 말씀을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입니다. 사데가 다시 살아나는 길은 새로운 비밀 지식이나 특별한 체험에 있지 않고, 자신들이 들었던 말씀으로 돌아가 그것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경고가 나옵니다. 교회가 자기 상태를 잘못 판단하고 방심할 때, 예수님의 방문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올 수 있습니다. 「도둑처럼」이라는 비유는 날짜를 계산하도록 주어진 표현이 아니라, 어느 때에 오실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경고는 깨어 있지 않은 사데 교회를 심판하러 오시는 예수님의 방문이라는 의미가 직접적이지만, 마지막 때의 오심과 연결하여 읽을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오실지를 알아맞히는 일이 아니라, 지금 깨어 있는 것입니다.
사데의 문제가 살아 있다는 평판을 믿으며 자기 상태를 살피지 않는 데 있었다면, 그 해결은 자신에 대한 확신을 더 강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다시 깨어나는 것입니다.
몇 이름이 남아 있다
이제 4절에서 장면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 몇 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을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3:4 · 두루새김
두루새김은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 몇 있다」라고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이 사람들을 「몇 이름」(ὄνομα)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 교회는 「살아 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두루새김의 「사람들은 네가 살아 있다고 하지만」). 이제 그 교회 안에 몇 「이름」이 남아 있다고 하시고, 곧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생명의 두루마리에서 지우지 않고 아버지 앞에서 밝히겠다고 하십니다.
처음의 이름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평판입니다. 중간의 이름은 예수님께서 아시는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의 이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실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름에서, 예수님께서 알아주시는 이름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여기서 옷은 실제 옷감의 청결보다 신앙과 삶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그것을 특정한 한 종류의 죄에만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이기는 사람은 이처럼 흰 옷을 입을 것이다. 나는 생명의 두루마리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결코 지우지 않겠다. 또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밝히며 내 사람으로 인정하겠다.」요한계시록 3:5 · 두루새김
흰 옷은 요한계시록에서 뒤에도 반복됩니다. 7:14에서는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에 자기 겉옷을 빨아 희게 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연결을 고려하면 흰 옷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깨끗함과 승리의 표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두루마리는 출애굽기 32:32–33과 다니엘 12:1에 나오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과 그들의 운명에 관한 기록의 이미지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다만 「결코 지우지 않겠다」라는 약속만으로 이미 기록된 이름이 실제로 지워질 수 있다는 결론을 확정할 수는 없고, 이 구절 하나로 구원을 잃을 가능성에 관한 논쟁이 해결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이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확실한 약속에 있습니다.
마지막 표현인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밝히며 내 사람으로 인정하겠다」는 마태복음 10:32의 말씀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사데 교회는 사람들이 살아 있다고 하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시선에서 드러나지 않은 몇 사람을 기억하시고 친히 그 이름을 밝히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데의 편지는 이렇게 질문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가 어떤 평판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조금 더 깊이
사데는 한때 리디아 왕국의 수도로서 부와 권세를 누렸지만, 강력한 요새가 있었음에도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습니다. 고대 역사가는 『역사』 1권 84절에서 페르시아 병사가 다가갈 수 없다고 여겨졌던 절벽 쪽으로 성채에 접근했으며, 지형이 너무 험해 그곳에는 경비병이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사건을 알던 독자라면 「깨어 있어라」에서 도시의 실패를 떠올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3장은 그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므로, 사데의 함락이 이 말씀의 의도된 배경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빌라델비아 — 힘이 적은 교회 앞에 열린 문
문을 열고 닫을 권세는 누구에게 있는가
빌라델비아에 보내는 말씀에는 책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그들이 지켜 온 신실함을 인정하시고, 계속 붙잡으라고 격려하십니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라. 거룩하고 참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가 말한다. 그가 열면 아무도 닫지 못하고, 그가 닫으면 아무도 열지 못한다.」요한계시록 3:7 · 두루새김
「다윗의 열쇠」는 이사야 22:15–22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유다 왕실의 관리 셉나가 물러나고 엘리아김이 그 자리를 맡으며 「다윗 집의 열쇠」를 받습니다. 그가 열면 아무도 닫지 못하고, 닫으면 아무도 열지 못합니다. 누가 왕의 집에 들어올 수 있는지, 그 집의 재산과 권한을 누가 이용할 수 있는지를 관리하는 권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표현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한 관리의 권한을 넘겨받는 수준이 아니라, 다윗의 왕권과 연결되는 권위, 열고 닫는 최종적인 권세가 예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보아라, 내가 네 앞에 문을 열어 두었고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수 없다. 너는 힘이 적은데도 내 말을 지켰고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3:8 · 두루새김
한쪽에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작은 힘이, 다른 쪽에는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이 있습니다. 「힘이 적은데도」는 구성원이 적다는 뜻일 수도 있고, 사회적 영향력이나 경제적 자원이 부족하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적은 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예수님의 말을 지켰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열린 문은 선교의 기회인가, 하나님 나라의 입구인가
신약성경에서 열린 문은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고린도전서 16:9; 고린도후서 2:12). 그래서 빌라델비아의 열린 문을 작은 교회 앞에 열린 선교와 복음 전파의 기회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 예수님께 속한 공동체에 주어진 들어갈 권리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는 이 해석의 근거가 뚜렷합니다. 열린 문이 왕의 집에 누가 들어올지 결정하는 「다윗의 열쇠」와 연결되어 있고, 다음 절에는 종교적 갈등이, 마지막 약속에는 하나님의 성전과 새 예루살렘에 속하는 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흐름을 따라 읽으면, 빌라델비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집단에서 거부당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권리는 빼앗길 수 없다는 뜻이 드러납니다. 선교의 기회라는 읽기도 가능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예수님의 왕권과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힘을 모아 그 문을 열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네 앞에 문을 열어 두었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시는 문은 그 교회가 가진 힘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거부당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인정
9절에서는 빌라델비아가 겪었던 갈등이 드러납니다.
「보아라, 사탄의 회당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을 너에게 주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유대 사람이 아니라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내가 그들을 네 발 앞에 와서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요한계시록 3:9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앞서 서머나에서도 등장했습니다. 여기에서도 특정한 갈등 집단을 가리키는 예언적 책망을 모든 유대 사람에 대한 평가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빌라델비아에서 실제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자신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장과 관련된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어지는 약속에는 이사야 49:23과 60:14의 배경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포로 생활과 황폐함을 겪은 시온이 회복되고, 민족들과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자들이 와서 그 앞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자신들이 유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와서 절하게 됩니다.
민족들이 회복된 시온을 인정하는 장면이, 여기에서는 예수님께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장면으로 새롭게 쓰입니다. 본문이 직접 밝히는 목적은 복수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입니다. 절한다는 표현도 그 공동체를 하나님처럼 예배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공동체라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인정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다만 이것이 반대자들이 믿음을 갖게 된다는 뜻인지, 원하지 않더라도 결국 진실을 인정하게 되는 심판의 장면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난다는 약속은 명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누구인지 부정당했을 수 있는 그들에게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 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그들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알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작은 힘을 가진 교회에 주어진 약속입니다.
시험의 때로부터 지킨다는 뜻
이어서 10절에서는 앞으로 닥칠 시험에 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네가 참고 견디라는 내 말을 지켰으므로, 나도 시험의 때로부터 너를 지켜 주겠다. 그때는 땅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온 세상에 닥칠 것이다.」요한계시록 3:10 · 두루새김
「시험의 때로부터 너를 지켜 주겠다」를 두고 견해가 갈립니다. 첫째는 그 시험의 때에 들어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는 해석이고, 둘째는 시험의 때가 오더라도 그 가운데서 믿음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신다는 해석입니다.
그리스어 표현은 테레오 에크, 곧 「~로부터 지키다」입니다. 같은 표현이 쓰인 요한복음 17:15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고 악한 자로부터 지켜 달라고 기도하시므로, 보호가 반드시 몸을 옮겨 벗어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면 3:10에서는 보호의 대상이 「시험의 때」이므로, 시험의 기간 자체를 겪지 않는 것으로 읽는 견해도 문법적으로 검토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특정한 휴거 시점이나 마지막 환난의 세부 시간표를 확정하는 것은 본문이 제공하는 정보보다 훨씬 더 나아가는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의 신실함을 알고 계시며, 앞으로 닥칠 시험 속에서도 그들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참고 견디라는 내 말」은 두루새김이 예수님께서 견디라고 하신 말씀으로 풀어 옮긴 것이고, 원문에서는 예수님 자신의 견딤을 증언하는 말씀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빌라델비아 교회는 큰 능력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칭찬받습니다.
「나는 곧 간다. 아무도 네 관을 빼앗지 못하도록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들어라.」요한계시록 3:11 · 두루새김
이미 신실한 교회에도 견딤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중심은 관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것을 끝까지 지키라는 격려에 있습니다.
흔들리는 도시에 약속된 기둥
빌라델비아에 대한 마지막 약속은 도시의 역사와 함께 읽을 때 더욱 생생해집니다.
「이기는 사람을 나는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으로 삼겠다. 그는 다시는 그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또 그 사람 위에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인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쓰겠다. 새 예루살렘은 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시다.」요한계시록 3:12 · 두루새김
빌라델비아는 지진이 잦았던 도시였습니다. 고대 지리학자는 『지리학』 12권 8장 18절에서 이 도시의 건물 벽이 자주 흔들리고 갈라졌다고 기록하고, 13권 4장 10절에서는 계속되는 지진 때문에 많은 주민이 도시 바깥에서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흔들리는 벽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무너지지 않을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이미지는 강력합니다. 도시 밖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다시는 그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라는 약속은 안정된 거처를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성전의 기둥은 그 자체로도 굳건함과 영원히 속해 있음을 표현하는 상징이므로, 요한이 이 이미지를 오직 지진 때문에 골랐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힘이 적은 교회에 주어지는 약속은 더 강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안정된 자리를 보장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속한 곳에서 영원한 자리를 약속받습니다.
세 개의 이름을 받다
그런데 약속은 기둥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그리고 자신의 새 이름을 쓰겠다고 하십니다. 이름을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행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시는 도시에 속하며, 예수님과 맺은 관계 안에서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신들의 힘이 적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친히 밝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데는 사람들이 살아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죽어 있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힘이 적지만 하나님과 도시와 예수님의 이름을 약속받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름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름이 대비됩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교회에 이르면, 사람의 자기평가와 예수님의 평가 사이의 간격은 더욱 커집니다.
조금 더 깊이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사람이 건축물의 일부로 바뀐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영원하고 명예로운 자리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요한계시록 21:22는 새 예루살렘에 별도의 성전이 없고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도시의 성전이시라고 말하므로, 약속의 중심은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는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새 이름」이 무엇인지는 이 구절에서 밝혀지지 않습니다. 19:12의 아무도 모르는 이름, 22:4의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지만, 이 셋을 같은 이름이라고 확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는 사람들
참된 증인이 거짓된 자기평가를 드러내다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인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말씀은 독특한 자기소개로 시작합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라. 아멘인 이, 믿을 만하고 참된 증인,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인 이가 말한다.」요한계시록 3:14 · 두루새김
아멘은 기도를 끝내는 말만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확실함과 믿음직함을 나타내는 말뿌리와 연결되어, 어떤 말이 참되다고 인정하는 뜻을 지닙니다. 이사야 65:16에는 문자 그대로 ‘아멘의 하나님’이라 할 수 있는 표현이 있고, 보통 ‘진리의 하나님’으로 옮겨집니다.
「아멘인 이」이자 「믿을 만하고 참된 증인」이신 예수님의 증언은 믿을 수 있습니다. 곧이어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할 것이기 때문에, 이 편지의 시작은 누구의 증언이 참된가 하는 질문을 준비합니다. 교회 자신의 평가일까요, 참된 증인이신 예수님의 평가일까요?
그다음 호칭은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인 이」입니다. ‘시작’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르케(ἀρχή)는 시간상 시작을 뜻할 수도 있고, 근원이나 다스림과 권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맨 처음 창조되신 존재라는 뜻으로 읽히기도 하고(시간상 시작이라는 뜻에 근거), 창조의 근원이자 창조를 다스리는 분이라는 뜻으로 읽히기도 합니다(이 낱말이 기원과 권위에 쓰일 수 있고, 요한복음 1:1–3과 골로새서 1:15–18이 예수님을 창조와 연결한다는 데 근거). 낱말 하나만으로 이 논쟁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서는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하나님의 호칭을 쓰시고(1:17; 22:13)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다스리시므로, 두 번째 해석이 이 책 전체의 예수님 모습과 잘 어울립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기준으로 자기 상태를 판단하는 라오디게아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그 교회가 가진 것들에 감탄하시는 분이 아니라 무엇이 참된 생명과 부유함인지를 판단하실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상태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거나 뜨거웠으면 좋겠다.」요한계시록 3:15 · 두루새김
흔히 뜨거움은 열심한 믿음, 차가움은 믿지 않음, 미지근함은 어중간한 태도로 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왜 차가워도 좋겠다고 하시는지, 신앙을 버리는 것이 어중간한 믿음보다 낫다는 뜻인지 질문이 생깁니다.
다른 해석은 세 온도를 모두 물이나 음료의 온도로 읽습니다. 뜨거운 물도 찬물도 각각 쓸모가 있지만, 미지근한 물은 마시기에 불쾌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차가움과 뜨거움은 반대되는 신앙 상태가 아니라 각각 좋은 쓰임이 있는 두 온도이고, 문제는 그 어느 쪽도 아닌 미지근함입니다.
「이처럼 네가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므로, 나는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려고 한다.」요한계시록 3:16 · 두루새김
미지근함은 열정이 조금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토해 내려고 한다고 하실 만큼 심각한 상태입니다. 그 미지근함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바로 다음 절과 연결해 읽습니다.
「나는 부자다」 — 가장 위험한 말
「너는 『나는 부자다. 부유해졌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네가 비참하고 가엾으며,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모른다.」요한계시록 3:17 · 두루새김
이것이 라오디게아 편지의 핵심입니다.
그들이 미지근한 것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난하고 눈멀었다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사데는 사람들이 살아 있다고 하는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에서는 교회가 직접 말합니다. 부자라는 현재의 상태, 부유해졌다는 성취,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이어집니다.
이 도시는 실제로 경제적 능력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는 『연대기』 14권 27절에서 기원후 60년경 라오디게아가 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로마의 지원 없이 자체 자원으로 회복했다고 기록합니다. 도시가 부유했다고 해서 교회 안의 사람들도 모두 부유했다고 보아서는 안 되지만, 이런 분위기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선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평가를 완전히 뒤집으십니다. 부유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가난하다고, 자기 상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눈멀었다고,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벌거벗었다고 하십니다.
본문은 부 자체보다 부유함 때문에 자신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겨냥합니다. 라오디게아의 문제는 자신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확신이고, 그 확신 때문에 자기 상태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서머나는 가난하지만 부유하다고 인정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부유하다고 말하지만 가난하다고 꾸중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유함이 무엇인지를 묻는 두 개의 상반된 장면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사야 할 것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에 달구어 깨끗하게 만든 금을 사서 부유해져라.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부끄러움이 드러나지 않게 하여라. 또 볼 수 있도록 눈에 바를 약도 사서 발라라.」요한계시록 3:18 · 두루새김
가난, 벌거벗음, 눈멂에 각각 금, 흰 옷, 눈에 바를 약이 응답합니다. 스스로 부유해졌다고 말한 교회에게 예수님께서는 「나에게서」 참된 부유함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돈을 내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사야 55:1에서 하나님께서 돈 없는 사람들도 와서 사 먹으라고 부르시듯,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물건을 사고파는 방식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재산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님에게서 얻으라는 뜻입니다.
세 선물 가운데 본문의 흐름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일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부유함을 더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참된 상태를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움만 안겨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을 위해 필요한 진실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눈멀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다시 볼 수 있는 길의 시작입니다.
가장 심한 책망 뒤에 나오는 사랑
여기까지 읽으면 라오디게아는 거의 버림받은 교회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토해 내려고 한다고 하셨고, 그들의 자기평가를 완전히 부정하셨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 뜻밖의 이유가 밝혀집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꾸짖고 바로잡는다.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여라.」요한계시록 3:19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를 바로잡듯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바로잡으신다는 잠언 3:11–12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은 무관심이나 미움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상태를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나옵니다.
물론 꾸짖음의 심각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토해 내려고 한다는 위협을 단순히 사랑을 나타내는 비유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것과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며, 사랑하시기 때문에 꾸짖으시고 회개를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에 아직 말씀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문을 여는 사람과 문 앞에 서 계신 분
이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보아라, 나는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그와 함께 식사하고 그도 나와 함께 식사할 것이다.」요한계시록 3:20 · 두루새김
이 말씀은 흔히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열라는 초대로 쓰입니다. 그런 적용은 가능하지만, 본래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교회로 존재하는 라오디게아 공동체에 주어졌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데, 왜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실까요? 본문은 예수님께서 교회에서 완전히 떠나셨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누군가 들어와 무엇인가를 주겠다는 말을 반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두드림은 스스로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여기는 라오디게아의 태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하러 들어가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식사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식탁에 함께 앉는 것은 관계와 사귐, 손님을 반갑게 맞아들이는 일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을 때 비판을 받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마가복음 2:15–17). 「그와 함께 식사하고 그도 나와 함께 식사할 것이다」는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주고 떠나시는 모습이 아니라 서로 함께하는 관계를 보여 줍니다.
라오디게아는 스스로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회복은 무엇인가를 더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 다시 사귀는 일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에 관해 알고, 예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빌라델비아에는 예수님께서 열어 두신,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에는 예수님께서 두드리시는 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문을 여실 권세가 있지만, 라오디게아를 향해서는 식탁에서 함께하는 가까운 사귐을 제안하십니다.
가장 가난한 교회에 가장 높은 왕좌가 약속되다
그런데 마지막 약속은 지금까지의 어떤 약속보다 놀랍습니다.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 왕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나도 이기고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왕좌에 앉은 것처럼 말이다.」요한계시록 3:21 · 두루새김
꾸중이 가장 심한 교회, 어떤 일도 칭찬받지 못한 교회에 주어지는 마지막 약속이 예수님의 왕좌에 함께 앉는 일입니다. 이것은 현재 상태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회개하고 이기는 사람에게 열려 있는 미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승리를 근거로 제시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미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고 말했고, 5장에서는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승리자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다른 사람들을 힘으로 굴복시킨 결과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지키시고 하나님께서 높이셨다는 복음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왕좌에 함께 앉는다는 약속을 다른 사람 위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보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승리와 예수님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약속입니다.
라오디게아에서 이긴다는 것은 자신이 가난하고 눈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에게서 참된 부유함과 옷과 볼 수 있는 눈을 얻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며,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여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왕좌의 약속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미지근한 물 비유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널리 알려진 설명이 있습니다. 근처 히에라폴리스에는 뜨거운 온천이, 골로새에는 차가운 물이 있었고, 라오디게아는 수로로 미지근하고 맛없는 물을 공급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로와 물 공급에 관한 고고학 자료에 비추어 이 설명은 뒷받침하기 어렵다는 해석도 있고, 당시 일반적인 음료와 식사 문화나 로마 목욕 문화의 뜨거운 공간과 차가운 공간을 배경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따라서 라오디게아 시민들이 매일 역겨운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확정된 사실처럼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18절의 세 선물도 금은 도시의 금융을, 흰 옷은 지역의 검은 양털 직물을, 눈에 바를 약은 의술과 눈 치료의 명성을 떠올리게 한다는 설명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이미지들이 라오디게아의 특정 산업을 직접 겨냥했다는 것은 확정되지 않았고 더 넓은 지역에서도 익숙한 물품이었습니다.
일곱 교회에서 왕좌로 향하는 시선
요한계시록 3장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말씀의 마지막 장입니다. 사데에는 깨어 있으라고, 빌라델비아에는 계속 붙들라고, 라오디게아에는 회개하고 문을 열라고 하십니다. 세 권고는 서로 다르지만, 교회의 참된 상태를 아시는 분도, 교회의 생명과 미래를 주시는 분도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그 밑바탕에 있습니다. 교회는 활동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살아 있다고 확신할 수 없고, 힘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희망이 없다고 결론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편지의 마지막 약속에서 새로운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왕좌입니다.
4장에서 요한은 하늘에 놓인 왕좌를 보게 됩니다. 교회들의 현실을 살피던 시선이 이제 왕좌를 향합니다. 교회가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교회를 판단하시고 바로잡으시고 지키시며 자신의 승리에 참여하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좌를 홀로 차지하지 않으시고 이기는 사람들을 자신과 함께 앉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위대한 약속 앞에서 라오디게아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놀랍도록 작습니다.
문을 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꾸짖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두드리고 계십니다. 닫힌 문 너머에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문밖에는 그들이 참으로 필요로 하는 분이 서 계십니다.
세상을 창조의 시작부터 아시고, 모든 것을 참되게 증언하시며, 자기 왕좌에 사람들을 함께 앉히실 권위를 지니신 분이 지금 한 사람의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그와 함께 식사하고 그도 나와 함께 식사할 것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