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서언

이 장의 자리 · 0장 · 손자가 붙인 머리말

다른 언어로 이어지는 지혜

한 사람이 할아버지가 남긴 책을 다른 언어로 옮겼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 번역에 매달렸고, 많은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책을 독자들에게 내놓으면서 뜻밖의 부탁을 합니다. 아무리 애써 번역했더라도 원래의 히브리어가 지닌 힘을 온전히 살리지는 못했으니, 부족한 부분을 너그럽게 보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번역이 원문의 힘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면, 왜 그토록 힘들게 번역해야 했을까요? 더구나 그는 자신의 책만이 아니라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까지 다른 언어로 옮겨지면 적지 않은 차이가 생긴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번역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집회서 서언은 지혜의 내용을 설명하기보다 지혜가 어떻게 전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조상들의 글을 읽은 사람이 새로운 책을 쓰고, 그 책을 읽은 후손이 다른 언어로 옮기며, 타향에 사는 사람들은 그 책을 통해 자기 삶을 다듬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혜는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라 다음 사람에게 건네지는 유산이 됩니다.

이 서언은 집회서의 저자가 아니라 그의 손자가 쓴 머리말입니다. 따라서 집회서 본문을 읽기에 앞서, 그 책이 어떻게 탄생하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까지 전달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특별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읽는 시간 12분소단락 4서언 본문 읽기 →

조상에게 받은 지혜를 다음 사람에게 건네다

집회서 0:1–3 본문 →

서언의 첫 문장은 개인의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과 그 뒤를 이은 다른 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많고 큰 것들이 주어졌습니다. 그 교훈과 지혜 때문에 이스라엘을 칭송해야 합니다.집회서 0:1 · 본디새김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다른 글들은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배우고 간직해 온 지혜의 보고입니다. 이 구분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조상들의 문헌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후대에 확립된 히브리 성경의 세 부분, 곧 율법서·예언서·성문서가 이미 동일한 범위로 완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서언은 세 번째 부류를 정식 명칭으로 부르지 않고, 0:3에서는 「조상들에게서 전해 온 다른 책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책들이 거기에 포함되었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칭송하는 이유도 주목할 만합니다. 군사적 승리나 정치적 영광 때문이 아니라 「교훈과 지혜」 때문입니다. 백성의 가치가 무엇을 정복했느냐보다 무엇을 배우고 전해 왔느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배운 지식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또 읽는 이들 자신이 지식을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배우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말과 글로 바깥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집회서 0:2 · 본디새김

여기서 「바깥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바로 앞에서 말한 읽는 사람들, 배우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유대 공동체 밖의 사람들까지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지만, 이 한 문장만으로 구체적인 대상이 누구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의 유익이 이미 배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번역자는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 「말과 글」을 함께 제시합니다. 지혜는 대화를 통해서도, 기록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습니다. 읽고 배우는 사람은 다시 가르치고 기록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의 목적을 밝힌 다음에야 그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런 까닭에 나의 할아버지 예수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과 조상들에게서 전해 온 다른 책들을 읽는 데 많은 힘을 쏟고 그 내용을 충분히 익힌 뒤, 자신도 교훈과 지혜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이 글들에도 마음을 쏟아 율법에 따른 삶을 통해 훨씬 더 나아가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집회서 0:3 · 본디새김

여기서 예수는 집회서의 저자, 곧 시라의 아들 예수입니다(집회서 50:27). 신약의 예수와는 다른 인물이며, 그리스어에서는 두 이름 모두 같은 이름으로 표기됩니다.

지혜로운 저술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전해진 가르침을 깊이 익히는 일이 새로운 가르침을 낳았습니다.

이 모습은 집회서 39:1–11에서 묘사하는 지혜로운 율법 연구자의 모습과도 통합니다. 그는 조상들의 지혜를 살피고 예언들을 연구하며, 기도로 분별력을 구하고, 마침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말을 내놓습니다.

「율법에 따른 삶을 통해 훨씬 더 나아가도록 하려는 것」이라는 말에서 저술의 최종 목적이 드러납니다.

번역자는 할아버지의 책이 독자들에게 율법을 대신할 새로운 기준을 제공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상들의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다고 말합니다.

집회서가 추구하는 지혜의 성취는 더 많은 것을 아는 데서 끝나지 않고, 배운 것을 따라 더 바르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에서 이미 강조된 가르침의 목적과도 이어집니다. 신명기 4:5–8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모습을 통해 다른 민족들이 그들의 지혜와 분별력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6:6–9에서는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자녀에게 가르치며 일상에서 반복해 말하도록 명합니다.

두 본문에서 가르침은 단순히 보존되어야 할 정보가 아닙니다. 백성의 삶을 형성하고 다음 세대에 전해져야 할 유산입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바로 이 오래된 과제를 자신의 책을 통해 이어 가려 했던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서언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거나 행동하시는 장면이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명시하여 자신의 번역을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가르침을 귀중한 유산으로 여기고, 그 가르침에 따른 삶을 지혜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집회서 본문은 이 지혜의 근원을 더욱 분명히 밝힙니다. 집회서 1:1은 모든 지혜가 주에게서 나온다고 선언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서언에서 강조하는 조상들의 가르침은 단지 옛사람들의 훌륭한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응답하며 살아가도록 백성을 이끄는 유산입니다.

번역할 수 있기에 번역하지만, 온전히 같을 수는 없다

집회서 0:4–6 본문 →

할아버지의 저술 목적을 설명한 번역자는 갑자기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넵니다.

그러므로 좋은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여 읽어 주시고, 애써 번역한 대목들 가운데 몇몇 표현에서 우리가 부족해 보이더라도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집회서 0:4 · 본디새김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번역된 글이 전하려는 내용을 놓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표현의 부족함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면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가 안고 있는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본래의 히브리 말로 표현될 때와 다른 언어로 옮겨질 때 지니는 힘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집회서 0:5 · 본디새김

번역자는 원문의 의미를 전혀 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내용을 말하더라도 언어가 달라지면 그 표현이 발휘하는 힘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말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 공유해 온 이야기와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떤 표현은 익숙한 문장 구조나 반복되는 어휘를 통해 특별한 울림을 만듭니다. 다른 언어에서도 그 뜻을 설명할 수 있지만, 원래 표현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연상과 울림을 정확히 재현하기는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율법과 지혜의 가르침도 이러한 언어적 특징을 지닙니다. 그 말씀을 다른 언어로 옮길 때에는 단어의 의미뿐 아니라 표현이 독자에게 전달하는 효과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이 글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율법 자체와 예언들과 나머지 책들도 본래의 말로 표현된 내용과 번역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습니다.집회서 0:6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자신의 책을 무리하게 권위 있는 문헌과 동등하게 만들려는 선언이라기보다, 번역이라는 일에 공통적으로 따르는 어려움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존중받는 문헌이라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표현의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작업을 완벽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노력과 한계를 동시에 밝히며 독자에게 책을 건넵니다. 독자는 그 고백을 통해 번역된 문장 뒤에 또 하나의 언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고백은 오늘날 번역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번역문을 통해 충분히 말씀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지만, 어떤 문장이 낯설거나 이해하기 어려울 때 원래의 표현과 문맥을 살펴보는 일은 여전히 가치가 있습니다. 그 필요는 번역문에 대한 불신에서가 아니라, 전달되는 가르침을 더 충실히 이해하려는 관심에서 생깁니다.

타향에서 다시 시작된 지혜의 여정

집회서 0:7–9 본문 →

번역의 어려움을 설명한 뒤, 서언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로 이동합니다.

사실 나는 에우에르게테스 왕의 통치 삼십팔 년째에 이집트에 와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적지 않은 교훈에 견줄 만한 것을 발견했습니다.집회서 0:7 · 본디새김

서언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집트에 머문 경험을 계기로 할아버지의 책을 번역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몸소 이 책을 번역하는 데 열의를 쏟고 수고를 들이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집회서 0:8 · 본디새김

누군가가 명령했다거나 특정한 권력자가 번역을 의뢰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 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토록 필요했을까요?

실제로 나는 그동안 많은 밤을 지새우며 지식을 힘껏 활용했습니다. 이 책을 완성하여 타향에 살면서 즐겨 배우려 하고, 율법에 따라 살아가도록 품행을 미리 다듬는 이들에게도 내놓으려는 것이었습니다.집회서 0:9 · 본디새김

당시 이집트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공동체들이 있었습니다. 번역자의 정확한 거주지나 작업 장소를 서언만으로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이집트에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번역했다고 이해할 역사적 배경은 충분합니다. 이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물려받았지만,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조상들의 문헌이 기록된 히브리어와 달랐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히브리어로 쓰인 지혜의 책을 그리스어로 옮긴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언어로 된 책 한 권을 더 만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상들이 배우고 가르쳐 온 내용을 새로운 언어 환경 속에서도 읽고 익힐 수 있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 번역자는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깥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0:2). 마지막에는 자기 번역이 「타향에 살면서 즐겨 배우려」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밝힙니다(0:9).

두 표현이 반드시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는 배운 지혜가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해야 한다는 폭넓은 원칙을 말하고, 뒤에서는 자신의 번역이 특별히 섬기려는 독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두 문장은 같은 방향을 향합니다. 지혜를 얻은 사람은 그 지혜에 접근하기 어려운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독자들이 「율법에 따라 살아가도록 품행을 미리 다듬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이 히브리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 자체가 마지막 목표는 아닙니다. 책을 읽고 배움으로써 자신의 성품과 행동을 형성하며, 율법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준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말은 집회서의 지혜가 특정한 지리적 장소에서만 실천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도, 언어와 생활환경이 달라져도, 조상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에 따라 살아가려는 과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번역이 필요했던 것은 그 과제가 여전히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신명기 30:11–14의 말씀과도 통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이 너무 어려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 가까이에 있으며, 그것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신명기는 번역의 필요성을 논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르침이 실제 삶에서 실천되도록 백성에게 가까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집회서 서언이 품은 관심과 만납니다.

조금 더 깊이

「에우에르게테스」(εὐεργέτης)는 그리스어로 은인이라는 뜻을 가진 왕의 칭호입니다. 이 이름을 사용한 프톨레마이오스 왕들 가운데, 재위 삼십팔 년째라는 조건에 들어맞는 인물은 일반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 2세로 이해됩니다. 그의 재위 기간을 기원전 170년경부터 계산하면 삼십팔 년째는 기원전 132년경이 됩니다. 이것은 번역자가 이집트에 도착한 시기를 가리키며, 번역이 정확히 그해에 완성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적지 않은 교훈에 견줄 만한 것」이라는 표현의 원문에는 아포모이온이라는 낱말이 사용됩니다. 닮은 것, 본뜬 것, 상응하는 것이라는 의미와 연결되는 표현이지만, 문장 전체에서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집트에서 접한 교육이나 지적 환경이 번역 작업을 자극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낱말만으로 그가 어떤 특정한 책을 발견했다거나 어떤 학교에서 공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맺음말: 타향의 독자들을 위해 지새운 밤

집회서 0:1–9 본문 →

번역자는 원래의 말이 지닌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번역의 한계를 인정했고, 그 가르침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번역을 완성했습니다. 조상들의 책을 깊이 읽었던 할아버지의 수고가 손자의 번역으로 이어지고, 이제 그 책은 다른 언어로 살아가는 독자들의 손에 놓이게 됩니다.

집회서 서언은 거창한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책을 완성하기 위해 밤을 지새웠다는 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그는 자신이 번역한 문장이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독자들이 좋은 마음으로 주의 깊게 읽어 주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들이 더 많이 배우고, 율법에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한 사람이 밤을 지새운 까닭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혜를, 멀리 있는 다른 사람도 배우고 살아 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