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40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무거운 멍에 아래서 끝까지 남는 것

왕은 화려한 옷을 입고 왕좌에 앉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거친 옷을 걸치고 먼지와 재 가운데 앉아 있습니다. 두 사람의 처지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둘 다 잠자리에 눕고, 둘 다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집회서 40장은 이렇게 인간을 하나의 자리에 모으면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장의 중반부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지혜자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누리는 좋은 것들을 하나씩 꺼내 놓습니다. 일하고 얻는 소득, 자녀, 좋은 배우자, 음악, 아름다운 풍경, 친구, 금과 은, 힘과 재산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무엇이 더 좋은지를 묻습니다.

모든 사람이 무거운 멍에를 지고 살아간다면, 좋은 삶은 그 멍에를 완전히 벗어 버리는 데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멍에를 지고도 무너지지 않게 하는 무엇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일까요?

반드시 사라질 것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가?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840장 본문 읽기 →

어머니의 배에서 나와 만물의 어머니에게 돌아가기까지

집회서 40:1–2 본문 →

큰 고역이 모든 사람을 위해 창조되었고, 무거운 멍에가 아담의 아들들 위에 놓였다. 그들이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날부터 만물의 어머니 안에 묻히는 날까지다.집회서 40:1 · 본디새김

앞 장의 마지막에서 지혜자는 주의 일들이 모두 좋다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큰 고역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는 앞 장의 내용을 취소한다기보다, 창조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제 처지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전환입니다.

“아담의 아들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 전체를 가리킵니다.

멍에는 본래 짐승의 목에 얹어 일을 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이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지혜자는 인간의 삶을 무거운 짐을 지고 나아가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처음의 어머니는 자신을 낳은 어머니입니다. 마지막의 “만물의 어머니”는 땅을 가리킵니다. 출생과 매장을 하나의 문장 안에 배치하면서 인간이 땅에서 나온 존재이며 결국 땅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2:7에서 인간은 땅의 흙으로 빚어집니다. 창세기 3:19에서는 인간이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집회서는 그 장면을 하나의 거대한 삶의 여정으로 바꿉니다.

인간에게 고통은 특별히 불행한 몇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예외가 아닙니다. 누구나 유한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무거운 짐을 동반합니다.

멍에의 가장 무거운 부분은 마음속에 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의 두려움, 앞일에 대한 생각, 죽음의 날.집회서 40:2 · 본디새김

사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염려합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동물도 위험을 느끼고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미래를 생각하는 능력은 삶을 준비하게 하지만, 동시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고통까지 현재로 끌어올 수 있습니다.

죽음은 생애 마지막에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때문에 집회서의 “무거운 멍에”는 단순히 고된 노동만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제한되어 있는지를 아는 인간의 내면까지 포함합니다.

왕도 잠자리에서는 두려움을 피하지 못한다

집회서 40:3–7 본문 →

영광 가운데 왕좌에 앉은 이부터 땅과 재 가운데 낮아진 이까지, 푸른 자줏빛 옷을 입고 관을 쓴 이부터 생베옷을 걸친 이까지,집회서 40:3–4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자줏빛 옷과 관은 높은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지였습니다. 반면 거친 옷과 재는 낮은 처지나 애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혜자는 인간 사회의 모든 계층을 포괄하기 위해 극단적인 대조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두 사람의 차이는 사라집니다.

격분과 시기, 불안과 동요, 죽음의 두려움과 노여움과 다툼이 있다. 잠자리에서 쉬는 때에도 밤의 잠은 그의 의식을 바꾸어 놓는다.집회서 40:5 · 본디새김

왕이라고 해서 시기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불안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어떤 지위도 이런 감정에서 사람을 완전히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몸은 쉬는데 마음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쉬는 시간은 거의 없다시피 짧고, 그 뒤에는 잠을 자면서도 낮에 망을 보는 듯하다. 그는 마음속에 나타난 광경에 놀라 어쩔 줄 모르며, 전쟁터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과 같다.집회서 40:6 · 본디새김

이 비유가 생생한 이유는 몸의 위치와 마음의 경험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몸은 안전한 침상에 누워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전쟁터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는 구출되는 순간에 잠에서 깨어났고,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집회서 40:7 · 본디새김

이것은 인간의 두려움이 실제 위험뿐 아니라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광경에도 반응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모든 두려움이 근거 없는 환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실제 위험에서 벗어나더라도 두려움 자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왕좌와 왕관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지위를 바꿀 수 있지만, 밤에 홀로 누운 사람의 마음까지 마음대로 다스리지는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전도서 2:22–23은 인간이 수고와 염려 속에서 살아가며, 밤에도 마음이 쉬지 못하는 현실을 묘사합니다. 집회서 40장의 잠자리 장면은 이러한 전도서의 관찰과 특히 가깝습니다.

모두가 고통을 겪지만, 불의는 고통을 더한다

집회서 40:8–11 본문 →

이런 일은 사람부터 가축까지 모든 육신에게 닥치며, 죄인들에게는 이보다 일곱 배나 더하다.집회서 40:8 · 본디새김

지혜자는 인간의 고통을 이야기하다가 모든 육신으로 시야를 넓힙니다.

살아 있는 존재들은 고통과 죽음이라는 한계를 공유합니다. 여기서 일곱 배를 정확한 고통의 배수로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고통의 크기와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지혜자는 모든 사람이 고통을 겪는다고 하면서도, 무법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심판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9–10절은 죽음과 피, 다툼과 칼을 열거한 뒤 이것들이 무법한 자들을 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무법한 자들을 치려고 창조되었고, 그들 때문에 홍수가 일어났다.집회서 40:10 · 본디새김

여기서 홍수는 창세기 6–9장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6:11–13에서는 땅이 폭력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집회서는 그 사건을 통해 인간의 불의가 단순히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문제라고 말합니다.

앞부분에서 지혜자는 모든 인간이 고통을 겪는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고통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특별한 죄인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8–10절은 구약의 심판 전통에 따라 무법이 파괴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모든 개별적인 질병과 재난의 원인을 특정한 죄로 판정하는 규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욥기가 보여 주듯이 의로운 사람도 깊은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욥기 1–2장).

그런데 집회서는 이 심판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자연의 질서로 시선을 옮깁니다.

땅에서 나온 모든 것은 땅으로 돌아가고, 물에서 나온 것은 바다로 되돌아간다.집회서 40:1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1절과 짝을 이룹니다. 1절에서는 인간이 어머니의 몸에서 나와 땅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애가 자연 세계의 큰 순환 안에 놓입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사실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더 중요한 차이를 제시합니다.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의 차이입니다.

강물처럼 사라지는 재물과 영원히 남는 신실함

집회서 40:12–17 본문 →

모든 뇌물과 불의는 지워질 것이며, 믿음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집회서 40:1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40장의 흐름을 바꾸는 중심점입니다.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같은 방식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pístis(πίστις)는 문맥상 신실함, 성실함, 신뢰할 만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바로 앞에 뇌물과 불의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인간관계와 사회적 행동에서 드러나는 신실함이 특히 중요합니다.

또한 “뇌물”에 해당하는 dōron(δῶρον)은 일반적으로 선물이라는 뜻도 지니지만, 불의와 나란히 놓인 이 문맥에서는 부정한 이익을 위한 선물, 곧 뇌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불의로 쌓은 재물과 신실하게 살아온 삶은 같은 가치를 지니지 않습니다.

큰 소리를 내지만 금방 사라지는 강물

불의한 자들의 재물은 강처럼 말라 버릴 것이며, 비 내릴 때의 큰 천둥처럼 울려 퍼질 것이다.집회서 40:13 · 본디새김

폭우가 내리면 평소에는 물이 거의 없던 물길에도 거센 물이 흐를 수 있습니다. 큰 소리를 내고 주변을 휩쓸지만, 비가 그친 뒤에는 다시 마를 수 있습니다. 지혜자는 불의한 재물을 그런 강물에 비유합니다.

천둥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울릴 때는 세상을 뒤흔들 듯하지만, 곧 사라집니다.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은 불의한 재물이 가진 외형적 크기와 실제 지속성 사이의 차이입니다.

그는 손을 펼 때 기뻐할 것이다. 그처럼 법을 어기는 자들은 끝내 사라질 것이다.집회서 40:14 · 본디새김

여기서 손을 펴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을 가리킨다면, 그의 기쁨은 끝내 사라질 불법한 사람의 운명과 대조됩니다. 하나님을 가리킨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펴서 일을 이루시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만으로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손을 펴는 행동의 구체적인 의미보다, 뒤따르는 “법을 어기는 자들은 끝내 사라질 것이다”라는 선언이 이 단락의 중심을 이룬다고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물가에 있어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풀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자손은 가지를 많이 뻗지 않을 것이며, 더러운 뿌리는 깎아지른 바위 위에 있다.집회서 40:15 · 본디새김

여기서 지혜자는 강물의 이미지에서 식물의 이미지로 이동합니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바위 위에 놓인 뿌리는 깊이 자리 잡지 못합니다. 겉으로 가지가 자라더라도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16절에서는 물가와 강가에 있는 갈대풀도 먼저 뽑힐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식물의 안정성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편 1편의 나무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묘사됩니다. 반면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습니다(시편 1:3–4). 집회서도 비슷한 대비를 사용하지만, 특별히 불의한 번영의 불안정성을 강조합니다.

불의한 자는 가진 것이 많아 보일 수 있습니다. 후손을 많이 남기거나 세력을 넓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 번영이 곧 튼튼한 뿌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불의한 사람의 모든 자녀가 실제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예언이라기보다, 악을 토대로 세운 번영이 지속적인 안정성을 갖지 못한다는 지혜문학적 경고입니다.

뽑히는 갈대풀과 복이 가득한 동산

호의는 복이 가득한 동산과 같으며, 자선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집회서 40:17 · 본디새김

불의는 큰 강물처럼 넘쳐흐르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호의는 생명이 자라는 동산과 같습니다. 불의한 사람은 자기 몫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하지만, 지혜자가 오래 남는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호의와 자선입니다.

호의는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과 태도를, 자선은 그 마음이 구체적인 도움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강조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움켜쥔 재물은 사라질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베푼 자비는 그 재물보다 오래 남는 가치를 지닙니다.

이제 지혜자는 본격적으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좋은 것을 비교합니다.

무엇이 더 좋은가? — 삶의 보물들을 비교하다

집회서 40:18–25 본문 →

18절부터 26절까지는 독특한 문학적 구조를 지닙니다.

거의 모든 절에서 두 가지 좋은 것을 제시한 뒤, 그 둘보다 나은 것을 말합니다. 이 반복은 독자가 자연스럽게 비교하도록 만듭니다.

다만 여기서 각 절을 절대적인 서열표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절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노동보다 낫다고 했다고 해서 정직한 노동보다 우연한 재산 획득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혜자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좋은 것들을 비교하면서, 마지막에 가장 근본적인 가치를 향해 독자를 이끌고 있습니다.

자족하는 삶보다 좋은 보물 (18절)

자족하는 이의 삶과 일꾼의 삶은 달콤해질 것이며, 보물을 발견하는 이는 그 둘보다 낫다.집회서 40:18 · 본디새김

스스로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은 달콤합니다. 성실하게 일하여 자기 생활을 유지하는 삶 역시 좋은 것입니다. 여기서는 보물 발견의 기쁨과 경제적인 여유가 강조됩니다.

지혜자는 재물이 주는 실제적인 유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 있고, 생활이 안정되며, 필요한 것을 마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재물은 최종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이름을 남기는 일보다 귀한 관계 (19절)

자녀들과 도시를 세우는 일은 이름을 굳게 세우며, 흠 없는 아내는 그 둘보다 높이 평가받는다.집회서 40:19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자녀를 남기는 일과 도시를 건설하는 일은 자신의 이름을 오래 기억되게 하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자녀를 통해 가문이 이어지고, 도시를 세운 사람은 공동체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습니다.

“흠 없는”이라는 표현은 배우자의 성품과 신실함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고대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 중심적인 시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남편의 관점에서 좋은 아내의 가치를 말하지만, 이것을 여성의 가치를 결혼 여부나 남편에게 주는 유익으로만 평가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명제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의 중요한 통찰은 오래 남을 이름을 세우는 것보다 가까운 관계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귀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밖에서 인정받는 명성과 집 안에서 나누는 신뢰는 서로 다릅니다.

지혜자는 후자를 높이 평가합니다.

포도주와 음악보다 깊은 기쁨 (20–21절)

포도주와 음악은 마음을 기쁘게 하며,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그 둘보다 낫다.집회서 40:20 · 본디새김

포도주와 음악은 고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대표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시편 104:15에서도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집회서는 이런 즐거움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리스어 본문의 표현은 agápēsis(ἀγάπησις) sophías(σοφία), 곧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흥미롭게도 전해지는 히브리어 본문에는 친구나 연인 사이의 사랑으로 읽을 수 있는 표현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리스어 전승에서는 지혜 사랑을, 다른 전승에서는 인간관계의 사랑을 강조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의 그리스어 본문을 따르면 지혜자는 일시적인 감각의 즐거움보다 지혜 자체를 사랑하는 삶이 더 깊은 가치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피리와 비파는 가락을 감미롭게 하며, 달콤한 혀는 그 둘보다 낫다.집회서 40:21 · 본디새김

악기는 귀를 즐겁게 합니다. 그러나 부드럽고 친절한 말은 사람의 마음에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

“달콤한 혀”는 단순히 말을 듣기 좋게 꾸미는 능력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집회서 전체에서 혀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해치기도 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는 온화한 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보다 푸른 싹 (22절)

네 눈은 고운 자태와 아름다움을 바랄 것이며, 그 둘보다 뿌린 씨에서 돋아난 푸른 싹을 더 바랄 것이다.집회서 40:22 · 본디새김

농경 사회에서 씨를 뿌린 뒤 싹이 돋아난다는 것은 단순히 보기 좋은 풍경이 아닙니다.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아직 수확한 것은 아니지만, 씨앗이 죽지 않고 살아 자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5–16절에서는 악인의 뿌리가 바위에 놓여 있고, 강가의 갈대풀조차 뽑힌다고 했습니다. 반면 22절에서는 씨를 뿌린 땅에서 푸른 싹이 돋아납니다. 한쪽에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번영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장차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움도 좋지만, 생명을 지속시키는 아름다움에는 또 다른 깊이가 있습니다.

어려운 때에 나타나는 친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 (23–24절)

친구와 벗은 제때에 찾아오며, 남편과 함께 있는 아내는 그 둘보다 낫다.집회서 40:23 · 본디새김

특별한 순간에 찾아오는 친구와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배우자가 대비됩니다. 친구의 방문은 귀합니다. 그러나 삶을 나누는 관계에는 기쁨뿐 아니라 반복되는 평범한 날들과 어려운 시간들이 포함됩니다. 지혜자는 그 지속적인 동행의 가치를 높이 평가합니다.

다만 이 구절을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참된 동행이나 안정이 없다는 주장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고대의 가정생활을 배경으로 결혼 관계의 유익을 말하는 지혜 격언입니다.

24절에서는 관계의 범위가 더 넓어집니다.

형제들과 도움은 환난의 때를 위한 것이며, 자선은 그 둘보다 더 잘 건져 낼 것이다.집회서 40:24 · 본디새김

형제와 도움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도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자선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지혜자는 도움을 받는 관계에서 도움을 베푸는 관계로 시야를 넓힙니다.

자선이 사람을 건진다는 말은 선행을 일정량 쌓으면 모든 재난을 피할 수 있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집회서는 자비로운 행동이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 중요한 보호와 회복의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서로 돌보고 돕는 관계를 세우는 공동체에도 삶을 지탱하는 힘이 있습니다.

금과 은보다 더 의지할 만한 것 (25절)

금과 은은 발을 굳게 세워 줄 것이며, 아내는 그 둘보다 더 칭찬받는다.집회서 40:25 · 본디새김

금과 은은 경제적인 안정의 상징입니다. 재산이 있으면 필요한 물건을 마련하고 어려움에 대비하기 쉽습니다.

본디새김이 따르는 그리스어 전승에서는 “아내”로 읽지만, 다른 주요 그리스어 본문에는 boulḗ, 곧 “의논”이나 “좋은 판단”이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아내”로 읽으면 19절과 23절에서 반복된 배우자에 관한 가르침이 다시 강조됩니다. 재산보다 믿을 만한 동반자가 귀하다는 뜻입니다.

“좋은 의논”으로 읽으면 금과 은보다 올바른 판단이 더 유익하다는 지혜의 교훈이 됩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릅니다. 본디새김 본문의 흐름에서는 재산이 주는 안정과 신실한 배우자가 주는 안정이 대비됩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비교를 마무리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등장합니다.

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무엇을 의지하는가?

집회서 40:26–27 본문 →

재물과 힘은 마음을 드높일 것이며, 주를 경외함은 그 둘보다 낫다. 주를 경외함에는 부족함이 없으며, 그 안에서는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집회서 40:26 · 본디새김

이 절은 비교 목록의 절정입니다.

재물은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해 줍니다. 힘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줍니다. 둘 다 인간에게 안정감을 주는 중요한 자원입니다.

이 구절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경제적 부족이나 질병, 어려움이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의 처음에서 지혜자는 모든 인간에게 무거운 멍에가 놓였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인간이 의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대상에 초점이 있습니다. 재물은 사라질 수 있고, 힘은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경외하는 삶은 그런 자원이 자신의 궁극적인 안전을 보장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정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그런 사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실제로 필요로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모든 인간적 도움을 거절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앞에서 친구와 형제의 도움을 좋은 것으로 인정한 가르침과 충돌합니다. 본문은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재물과 힘이 줄 수 없는 근본적인 만족과 의지의 근거를 제공한다고 찬양합니다.

처음의 메마른 뿌리가 마지막에는 동산으로 바뀌다

주를 경외함은 복의 동산과 같으며, 그들은 어떤 영광보다도 더 그를 감싸 주었다.집회서 40:27 · 본디새김

17절에서 호의는 복이 가득한 동산 같았습니다. 두 곳 모두 무엇이 오래 지속되는 가치를 지니는지 이야기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인간관계의 신실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서로 무관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를 경외하는 태도는 실제 삶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보다 주를 경외하는 삶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여기서 장을 끝내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설명한 다음, 아주 불편한 이야기를 마지막에 덧붙입니다. 남에게 빌어먹는 삶에 관한 경고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27절의 마지막 문장은 문법적으로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이 “그들은 어떤 영광보다도 더 그를 감싸 주었다”라고 옮긴 그리스어 동사는 복수 형태이지만, 바로 앞의 “주를 경외함”은 단수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무엇이 누구를 감싸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복이나 동산의 열매 같은 복수의 대상을 보충하여 이해할 수도 있고, 다른 본문 전승을 따라 단수 동사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불확실성을 무시하고 어떤 영적 보호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구체적인 약속으로 확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남의 밥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

집회서 40:28–30 본문 →

얘야, 구걸하는 삶을 살지 마라. 구걸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집회서 40:2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오늘날 읽기에 매우 거칩니다.

특히 가난과 장애, 질병, 사회적 불평등 때문에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모든 시대의 모든 가난한 사람에게 적용해야 하는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신의 생계를 다른 사람의 호의에 지속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처지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 살펴야 했고, 도움을 주는 사람의 판단과 기분에 크게 좌우될 수 있었습니다. 지혜자는 그런 생활이 사람의 자율성과 존엄을 크게 훼손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걸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말은 지혜문학 특유의 극단적인 비교 표현입니다. 이를 가난하거나 도움을 받는 사람이 실제로 죽는 편이 낫다는 판단으로 받아들일 근거는 없습니다. 이 구절에는 당시의 사회적 명예와 수치에 관한 가치관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독자는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서도, 그 표현을 어려운 사람의 생명 가치를 낮추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밥상을 바라보는 삶

남의 밥상을 바라보는 사람, 그의 삶은 삶으로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는 남의 음식으로 자기 자신을 더럽힐 것이지만, 지식이 있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를 지킬 것이다.집회서 40:29 · 본디새김

그러나 실제 문제는 음식 그 자체만이 아닙니다. 그 음식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입니다. 지혜자는 그렇게 의존하는 삶을 몹시 고통스러운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남의 음식으로 자기 자신을 더럽힐 것”이라는 표현 역시 음식이 본질적으로 부정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사람에게 수치와 상처를 가져올 수 있다는 당시의 인식을 드러냅니다.

이런 생각은 집회서 29:22–28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곳에서 지혜자는 자기 집에서 살아가는 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남의 집에 의존하는 사람이 겪는 모욕을 묘사합니다.

바로 이 장의 17절과 24절에서 지혜자는 호의와 자선이 오래 남으며, 자선이 사람을 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28–30절의 경고를 가난한 사람을 돕지 말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방향입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는 자선을 베풀라고 하면서,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의 자의적인 처분에 종속되지 않는 삶을 추구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라고 요구한다면, 앞서 말한 자선의 가르침이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집회서의 구걸에 대한 경계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책임은 함께 읽어야 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위해 밭의 일부를 남겨 두도록 명령하며(레위기 19:9–10), 궁핍한 형제에게 손을 펴라고 가르칩니다(신명기 15:7–11). 그 전통 안에서 보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의 잘못이나 수치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공동체는 어려운 사람의 삶이 굴욕적인 의존으로 변하지 않도록 돌볼 책임이 있습니다.

입에는 달지만 배에서는 타오르는 불

구걸은 뻔뻔한 자의 입에서 달콤해질 것이며, 그의 배 속에서는 불이 타오를 것이다.집회서 40:30 · 본디새김

계속 다른 사람에게 얻어먹는 생활에 익숙해지면, 당장은 스스로 일하거나 책임을 지는 것보다 쉽게 느껴질 수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달콤해 보여도 내면에는 고통과 수치, 불안이 남는다는 이미지입니다. 처음의 즐거움과 마지막의 결과가 서로 다릅니다.

물론 이 구절이 가난한 사람 전체를 뻔뻔하다고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특별히 남의 도움에 의존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것을 생활 방식으로 삼는 사람을 경계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 표현 자체에는 고대의 엄격한 명예 관념이 담겨 있으므로, 오늘날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맺음말 — 입에는 달지만 배에서는 타오르는 것

집회서 40:1–30 본문 →

지혜자는 인생의 무거운 멍에를 없애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멍에 아래에서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분별하게 합니다. 무거운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위험을 통제할 힘이 아니라, 자신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가는지 아는 지혜입니다.

왕좌와 왕관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한 사람의 밥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이제 마지막에 남는 장면은 뜻밖에도 한 사람의 입과 배입니다. 입에서는 달콤하다고 느끼는 것이 배 속에서는 불처럼 타오릅니다. 겉으로는 편리하고 좋아 보여도, 그것이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지금 내게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 정말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인가요?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