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41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죽음이 지울 수 없는 이름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집회서 41장은 조금 다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죽음이 두렵다는 사실보다, 죽음이 누구에게 얼마나 쓰라리게 느껴지는지가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에게 죽음은 삶을 빼앗아 가는 존재이지만, 삶의 무게를 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오히려 반가운 판결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죽음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죄인의 자녀와 가문의 치욕을 말하고, 이어서 좋은 이름의 가치를 가르칩니다. 마지막에는 거짓말과 도둑질뿐 아니라 식탁에서 팔꿈치를 괴는 일, 인사를 받지 않는 일, 선물을 주고 상대를 모욕하는 일까지 언급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 무엇이 남으며, 그 남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41장에는 세 종류의 기억이 등장합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일(1절), 자신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3절), 그리고 자신이 떠난 뒤에도 남게 될 이름(11–13절)입니다. 기억하기 싫은 죽음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기억할 만한 삶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641장 본문 읽기 →

같은 죽음이 누구에게는 쓰리고 누구에게는 반갑다

집회서 41:1–4 본문 →

죽음을 평가하기 전에 살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다

41장은 죽음을 인격처럼 부르는 두 번의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아, 죽음아, 자기 재산 속에서 평온히 사는 사람에게 너를 기억하는 일이 얼마나 쓰라린가. 걱정 없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아직 음식을 먹을 힘이 있는 사람에게.집회서 41:1 · 본디새김
아, 죽음아, 궁핍하고 힘이 쇠하는 사람에게 너의 판결은 좋다. 아주 늙어 모든 일로 시달리며, 순종하지 않고 인내를 잃은 사람에게.집회서 41:2 · 본디새김

죽음이라는 대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처지입니다.

저자는 그 사람이 거대한 권력을 가졌거나 비범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직 음식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살아가는 기쁨을 느낄 만큼 건강하고, 그 기쁨을 누릴 만큼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쓰라립니다. 죽음은 아직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끝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단순히 노인이 참을성이 없다고 비난하는 데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과 쇠약, 끊임없는 시달림 속에서 더는 견딜 힘마저 남지 않은 처지를 그립니다.

물론 2절의 「순종하지 않고」에는 완고함이나 반항적인 태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표현만을 근거로 노인의 모습을 순전히 동정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 묘사의 중심에 있는 것은 극심한 쇠약과 곤궁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선하다거나 고통받는 사람이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감정은 그가 감당하고 있는 삶의 무게와 분리될 수 없다는 관찰입니다.

죽음의 판결은 삶의 성적표가 아니다

이어서 저자는 개별적인 처지에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현실로 시선을 옮깁니다.

죽음의 판결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보다 앞선 이들과 네 뒤에 올 이들을 기억해라.집회서 41:3 · 본디새김

여기서 앞서 나온 두 종류의 사람은 더 이상 구별되지 않습니다. 평온한 사람도 쇠약한 사람도 자신보다 먼저 죽은 이들과 자신보다 나중에 죽을 이들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이 판결은 주에게서 나와 모든 육신에게 미친다. 그런데 너는 왜 지극히 높은 이의 뜻을 거부하느냐? 열 해를 살았든 백 해를 살았든 천 해를 살았든, 하데스에서는 수명을 두고 책망하는 일이 없다.집회서 41:4 · 본디새김

「모든 육신」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차이를 잠시 내려놓게 합니다. 왕과 가난한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은 삶의 조건에서는 크게 다르지만,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육체적 존재입니다.

이 말은 앞 장에서 인간의 삶 전체에 무거운 멍에가 놓여 있다고 한 40:1의 관찰과도 이어집니다. 다만 여기서 저자는 인간의 고통을 다시 길게 설명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에 집중합니다.

그 태도는 죽음을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거부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 한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수명을 두고 책망하는 일」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를 놓고 따지거나 문제 삼는 일을 뜻합니다. 열 해와 천 해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면 그 긴 차이도 수명을 비교하는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죽은 뒤에는 어떤 도덕적 판단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자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선악의 최종 심판이 아니라 인간이 누린 시간의 길이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성취가 아니라면, 한 사람이 살아간 삶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저자는 곧바로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먼저 한 사람의 잘못이 그가 죽은 뒤에도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하데스는 그리스어 하데스로, 이 문맥에서는 죽은 자들이 있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스올」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여기서 곧바로 후대의 형벌 장소에 관한 교리를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죽어도 그의 행위는 다음 세대에 남는다

집회서 41:5–10 본문 →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은 재산만이 아니다

3절은 자신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과 나중에 살아갈 사람들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5절부터 저자는 바로 그 세대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죄인들의 자녀는 역겨운 자녀가 되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거처에서 어울려 지낸다.집회서 41:5 · 본디새김
죄인들의 자녀가 물려받을 몫은 사라질 것이며, 그들의 후손에게는 치욕이 줄곧 따라붙을 것이다.집회서 41:6 · 본디새김

재산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삶이 안정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산은 그의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하며, 반드시 다음 세대에 온전히 남는 것도 아닙니다.

더 심각한 것은 가족에게 남겨지는 사회적 치욕입니다.

자녀들은 경건하지 않은 아버지 탓에 모욕을 받을 것이므로, 그 아버지를 나무랄 것이다.집회서 41:7 · 본디새김

사람들은 자녀를 모욕하지만, 그 자녀들은 아버지를 나무랍니다. 부끄러움을 당하는 사람과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다릅니다.

특히 7절은 부모에게 주어지는 경고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어떤 신뢰를 얻거나 잃었는지도 자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치욕이 따른다는 말은 자녀에게 죄가 있다는 뜻인가?

5절은 죄인의 자녀를 「역겨운 자녀」라고 부르며, 6절은 후손에게 치욕이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이 단순히 부모의 행위가 자녀의 평판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만 기술한다고 축소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의 표현 자체가 매우 엄격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자녀가 부모의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책을 진다는 보편적 선언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우선 이 단락의 구체적인 관심은 상속과 사회적 치욕입니다. 자녀가 아버지 때문에 모욕당하고, 그 아버지를 원망하는 관계가 묘사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신명기 24:16은 자녀를 부모의 죄 때문에 죽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며, 에스겔 18:20은 자녀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않는다고 명시합니다. 두 본문은 집회서 41장의 엄격한 세대적 경고와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이 긴장을 없애기보다는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집회서는 악행이 후손에게 남기는 파괴적인 영향을 강조하고, 신명기와 에스겔은 죄책과 심판에서 각 사람의 책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잘못으로 고통받는 자녀를 보면서 그 자녀 자신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 본문만으로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저주의 시작과 끝 (41:8–10)

8절에서 저자는 자녀들에 대한 묘사를 멈추고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직접 부릅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린 자들아.집회서 41:8 · 본디새김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단지 사회적으로 평판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삶의 질서를 버리는 것입니다.

9절은 태어날 때와 죽을 때를 나란히 놓으며 저주의 무게를 강조합니다.

땅에서 나온 모든 것은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처럼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저주에서 멸망으로 갈 것이다.집회서 41:10 · 본디새김

첫 문장은 창세기 3:19의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전도서 3:20에서도 모든 것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집회서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육체의 죽음과 경건하지 않은 자가 맞이하는 파멸을 구별합니다.

모든 사람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치욕을 남기는 삶까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떤 삶을 살아 어떤 흔적을 남길지는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문제입니다.

금보다 오래 남는 것

집회서 41:11–13 본문 →

몸을 위한 애도와 지워지는 이름

사람들의 몸을 두고는 애도가 있지만, 죄인들의 좋지 않은 이름은 지워질 것이다.집회서 41:11 · 본디새김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사람의 행실과 평판을 나타냅니다. 죽음으로 육체의 활동은 끝납니다. 그러나 사람이 남에게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 후에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름에 마음을 써라. 그 이름은 큰 금 보물 더미 천 개보다 더 오래 네게 남을 것이다.집회서 41:12 · 본디새김

여기서 1절의 재산이 다시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재산이 죽음을 쓰라리게 만드는 조건이었습니다. 이제 재산은 좋은 이름의 가치와 비교되는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금 보물 더미 천 개라는 과장된 수량은 좋은 이름의 가치를 극대화합니다. 금은 셀 수 있고 보관할 수 있으며 상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그 소유자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지는 않습니다.

잠언 22:1도 많은 재물보다 좋은 이름과 은총을 더 귀하게 여기며, 전도서 7:1은 좋은 이름과 좋은 기름을 대비합니다. 집회서는 이러한 지혜 전통 안에서 이름의 가치를 다시 강조합니다.

영원히 남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선한 삶은 날수로 헤아려지지만, 선한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집회서 41:13 · 본디새김

선하게 살아간 날들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할 시간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남긴 선함의 기억은 그의 생존 기간보다 더 멀리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원히」라는 말은 한 사람의 이름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무한한 기간 동안 기억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보장하는 표현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죽은 뒤 영혼이 누리는 영생을 직접 설명하는 구절도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강조하는 것은 삶의 유한한 길이와 그 삶이 남기는 이름의 지속성 사이의 대조입니다.

유명한 이름과 선한 이름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널리 알려졌지만 악한 행위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어도 가까운 이들에게 선한 기억을 남길 수 있습니다.

집회서가 앞에서 우려한 것은 바로 후손이 부모의 이름 때문에 치욕을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좋은 이름 역시 단순한 명성보다 그 이름에 연결된 삶의 성격에 가깝습니다.

이름에 마음을 쓰라는 말이 결국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지는 다음 단락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부끄러움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집회서 41:14–16 본문 →

왜 갑자기 숨겨진 지혜를 말하는가?

얘들아, 평화 가운데 교훈을 지켜라. 그러나 숨겨진 지혜와 드러나지 않는 보물, 이 둘에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집회서 41:14 · 본디새김

이 말은 집회서 20:30–31에서도 이미 사용된 가르침입니다. 저자는 앞서 제시했던 지혜와 숨겨진 보물의 비유를 여기서 다시 가져옵니다.

바로 앞에서 금 보물보다 좋은 이름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보물이 아무리 귀해도 감춰져 있어서 아무도 그 가치를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자기 어리석음을 감추는 사람이 자기 지혜를 감추는 사람보다 낫다.집회서 41:15 · 본디새김

어리석음을 감추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어리석음이 밖으로 드러나 해를 끼치는 것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를 감추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기회를 잃습니다.

모든 부끄러움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내 말에 따라 부끄러워할 줄 알아라. 모든 부끄러움을 다 간직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며,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참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집회서 41:16 · 본디새김

11–13절에서 저자는 좋은 이름을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데 지나치게 집착하면 어떻게 될까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만 생각하고,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는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지만, 모든 부끄러움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역시 언제나 올바름의 기준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잘못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부끄러워하거나, 옳은 일을 해야 할 때조차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태도입니다.

두 태도 모두 지혜롭지 않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저자는 16절에서 부끄러움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고, 17절부터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합니다.

좋은 이름을 지키는 일이 사람들의 모든 평가에 복종하는 일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제시하는 더 근본적인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 그리고 그 기준에 합당하게 사람을 대하는 삶입니다. 이 점에서 좋은 이름은 궁극적인 목표라기보다 그러한 삶이 남길 수 있는 선한 흔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아는 사람

집회서 41:17–22 본문 →

사람은 여러 관계 속에서 책임을 진다 (17–19절)

17절부터는 「부끄러워해라」라는 명령이 이어지는 항목들 전체에 적용됩니다.

부모 앞에서는 음행을, 지도자와 권력자 앞에서는 거짓말을, 재판장과 통치자 앞에서는 잘못을, 모임과 백성 앞에서는 불법을, 동료와 친구 앞에서는 불의를, 머물러 사는 곳에서는 도둑질을 부끄러워하라고 합니다.

부모는 한 사람의 삶이 자라난 가정과 연결됩니다. 지도자와 통치자는 공적인 책임의 영역에 있습니다. 동료와 친구는 협력과 신뢰를 나누는 관계입니다. 거주하는 공동체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소유와 안전을 존중해야 하는 곳입니다.

각각의 관계에서 특히 중요하게 드러나는 책임을 대표적으로 짝지은 것입니다. 잘못은 대부분 누군가와의 신뢰를 깨뜨리고 관계를 손상합니다.

따라서 부끄러움은 단지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 것인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을 했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언약 앞에서 (19절)

사람들과의 관계를 열거하던 저자는 갑자기 더 근본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네가 머물러 사는 곳에서 도둑질을 부끄러워해라. 또 하나님의 진리와 언약 앞에서 부끄러워해라. 빵 위에 팔꿈치를 괴는 것을, 받고 주는 일을 업신여기는 것을,집회서 41:19 · 본디새김

언약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인적 감정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삶을 규정하는 하나님의 요구와 그 요구에 대한 백성의 책임을 포함합니다.

신명기 10:12–19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길을 따르는 삶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고 나그네를 사랑하는 일과 함께 제시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웃에 대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회서 41장 역시 같은 방향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언약을 말한 바로 그 자리에서 일상의 행동을 계속 열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책임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거나, 거짓말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단지 사회적 체면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는 삶과 연결됩니다.

식탁에서 드러나는 사람의 마음 (19–20절)

이제 저자의 시선은 매우 일상적인 행동으로 이동합니다.

앞에서는 음행과 거짓말, 불법과 도둑질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식탁에서 팔꿈치를 괴는 일이 등장합니다.

빵 위에 팔꿈치를 괴는 모습은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와 관련된 식사 예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만으로 당시의 구체적인 식탁 관습이나 그 몸짓이 정확히 어떤 의미였는지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인사하는 사람들 앞에서 잠자코 있는 것을, 창녀를 바라보는 것을, 친척에게서 얼굴을 돌리는 것을, 몫과 선물을 빼앗는 것을, 남편 있는 여자를 눈여겨보는 것을,집회서 41:20–21 · 본디새김

누군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대답하지 않는 행동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법률로 처벌할 만한 범죄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무시하고 관계를 거절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또한 「받고 주는 일을 업신여기는 것」에는 사람들이 서로 무엇을 주고받을 때 마땅히 보여야 할 존중이 빠져 있습니다. 일상의 작은 행동에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장의 첫머리에 등장한 사람은 아직 음식을 먹을 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음식은 삶을 누리는 기쁨의 표시였습니다. 이제 본문 끝부분에서 음식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드러나는 장소가 됩니다.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과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욕망과 권력, 그리고 타인의 몫 (20–22절)

이어지는 항목들은 시선과 욕망, 친족 관계, 재산과 성적인 경계에 관한 것들입니다.

저자는 단지 성적인 행동 자체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시선도 문제 삼습니다. 여자를 눈여겨보는 행동이 언급되는 문맥을 보면 단순히 사람을 바라보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성적 관심과 욕망을 경계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집회서 9:8에서도 여자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선이 유혹과 연결되는 것을 경고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친척에게서 얼굴을 돌리는 일과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는 일이 놓여 있습니다.

이 배열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형태의 배신을 보여 줍니다. 도와야 할 사람을 외면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것을 빼앗을 수도 있으며, 타인의 관계를 침범할 수도 있습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얼굴을 돌리는 것」이라는 표현은 특히 구체적입니다. 친척을 만나고도 일부러 외면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친족이라면 어떤 요구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맥의 초점은 마땅히 돌보아야 할 관계를 외면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그의 여종에게 집적거리는 것을 부끄러워해라. 그 여종의 잠자리로 다가가지 마라. 친구들 앞에서 모욕하는 말을 부끄러워하고, 무엇을 주고 난 뒤에는 모욕하지 마라.집회서 41:22 · 본디새김

여기서 여종은 당시 사회에서 자유와 권한이 제한된 신분의 여성을 가리킵니다. 저자는 그녀에게 부적절한 관심을 보이거나 잠자리에 접근하는 행동을 금합니다.

본문은 현대적인 의미의 동의나 권력관계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시의 종속적인 신분 제도 자체를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구절에서는 다른 사람의 여종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행위에 분명한 제한을 둡니다. 금지는 남의 집안을 침범하지 말라는 맥락에 놓입니다.

선물을 준 뒤에 모욕하지 마라

41장은 「무엇을 주고 난 뒤에는 모욕하지 마라」라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그 사람을 낮추거나, 받은 것을 계속 들먹이며 부끄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집회서의 다른 가르침과도 이어집니다. 집회서 18:15–18에서는 선물을 주면서 상처를 주는 말이나 모욕을 덧붙이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좋은 행동에 나쁜 말이 따라붙을 때 그 선물의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베풀었다는 명분이 그 사람을 지배하거나 모욕할 권리를 주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그를 관대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가 남긴 모욕이 더 오래 기억될 수도 있습니다.

선한 이름은 선한 일을 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가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지혜와 삶을 책임지는 지혜

집회서 41:1–22 본문 →

오래 살 수 있는지, 언제 죽음을 맞이하는지는 인간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지,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는지,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선물을 주고도 상대를 모욕하는지는 도덕적 책임의 영역에 속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건넵니다.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만 보면 그는 관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선물을 건넨 뒤 상대에게 모욕적인 말을 덧붙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상대가 그 선물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도록 배려할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무언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기는 기억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집회서 41장은 죽음을 향한 두 번의 외침으로 시작했지만, 그 끝에서는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말 한마디를 살펴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지만, 그 순간까지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남길 수도, 선한 기억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이름은 그가 쌓아 둔 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했던 삶의 모습 속에 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