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함께 걷는 이가 당신을 만듭니다
친구는 많을수록 좋을까요?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보다 많은 친구를 사귀는 사람일까요?
집회서 6장은 뜻밖의 대답을 내놓습니다.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일은 권하지만, 깊은 의논을 나눌 사람은 천 명 가운데 한 명이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 본문은 갑자기 지혜를 배우는 일로 넘어갑니다. 지혜를 얻으려면 발에 차꼬를 채우고 목에 목줄을 걸라는 놀라운 권고까지 등장합니다.
믿음직한 친구는 어려움을 통과해야 발견되고, 참된 지혜도 어려움을 견뎌야 얻어집니다. 둘 다 처음의 인상만으로 판단할 수 없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진정한 가치가 드러납니다.
14절은 믿음직한 친구를 「든든한 피난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29절에서는 처음에 사람을 얽매던 지혜의 차꼬가 마침내 「든든한 피난처」가 된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관계도 잃는다
본문은 인간관계에 관한 짧지만 날카로운 경고로 시작합니다.
친구였다가 원수가 되지 마라. 나쁜 이름은 수치이고, 그런 사람은 치욕을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말하는 죄인이 바로 그러하다.집회서 6:1 · 본디새김
마지막 문장의 「두말하는 죄인」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서로 다른 사람에게 다른 말을 하거나, 앞에서 한 말을 뒤에서 뒤집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친구 관계는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말을 해 주느냐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도 같은 진실을 말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두말하는 사람은 당장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말을 바꾸지만, 바로 그 행동 때문에 결국 관계를 잃습니다.
이어서 2–4절은 관계를 무너뜨리는 문제의 뿌리를 사람의 내면으로 가져갑니다.
네 마음의 생각으로 너 자신을 높이지 마라. 네 마음이 황소처럼 찢겨 나가지 않도록 해라.집회서 6:2 · 본디새김
황소는 강력한 힘을 가진 동물입니다. 그런데 그 힘이 통제되지 않으면 자신이나 주변을 해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사람의 마음에도 이와 비슷한 위험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자기 생각을 지나치게 높이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충고가 도움으로 들리지 않고 공격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본문이 직접 그런 심리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2절의 경고와 뒤따르는 파괴의 이미지는 그런 방향의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너는 네 잎들을 먹어 치우고 네 열매들을 잃을 것이며, 너 자신을 마른 나무처럼 버려둘 것이다.집회서 6:3 · 본디새김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오히려 자신의 삶을 고갈시키는 것입니다.
잎과 열매가 구체적으로 명예나 재산, 인간관계 가운데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유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행동이 결국 자신에게 있는 좋은 것들을 소모합니다.
악한 마음은 그 마음을 품은 사람을 망하게 하고, 그를 원수들의 비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다.집회서 6:4 · 본디새김
자신을 지키려는 교만이 자신을 무너뜨리고, 다른 사람 위에 서려던 사람이 결국 다른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집회서는 인간관계를 잘 맺으려면 먼저 사람을 다루는 기술을 익히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살피라고 합니다.
평화롭게 지낼 사람은 많아도, 깊이 신뢰할 사람은 드물다
4절까지의 경고를 읽으면 사람을 경계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5절은 예상과 달리 따뜻한 말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달콤한 목소리는 제 친구들을 늘리고, 말씨 고운 혀는 상냥한 말을 늘린다.집회서 6:5 · 본디새김
여기서 1절과 5절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두말하는 혀는 친구를 원수로 만들지만, 말씨 고운 혀는 친구를 늘립니다. 같은 말이라도 신뢰를 무너뜨릴 수도 있고 관계를 열어 줄 수도 있습니다.
너와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은 많게 하되, 네 의논 상대는 천 명 가운데 한 명으로 해라.집회서 6: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천 명 가운데 정확히 한 사람만 믿으라는 통계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인간관계의 폭과 깊이가 같을 수 없다는 지혜문학 특유의 강조법입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할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자기 삶의 중요한 결정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구별하는 것은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과 의논 상대입니다. 후자는 단순히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판단이 어려울 때 생각을 나누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친구를 얻으려면 시험을 거쳐 그를 얻고, 성급히 그를 믿지 마라.집회서 6:7 · 본디새김
상대방에게 일부러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 충성심을 시험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이 어떤 시험을 말하는지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평안할 때와 고난을 당할 때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우정의 깊이는 처음 만났을 때 느끼는 친밀감보다, 상황이 달라졌을 때도 관계를 지키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밥상을 함께하던 친구가 사라지는 날
이제 본문은 겉으로는 친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8절에는 「자기에게 좋은 때만 친구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에게 우정은 지속적인 약속이라기보다 자신에게 유익한 상황에서 유지되는 관계입니다.
또 원수로 돌아서는 친구가 있으니, 너를 욕되게 할 다툼을 드러낼 것이다.집회서 6:9 · 본디새김
친밀한 관계에는 특별한 위험도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때문입니다. 신뢰할 수 없는 친구는 바로 그 친밀함을 해치는 수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어서 10절에서 등장하는 「밥상을 함께하는 친구」는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면 더욱 생생해집니다. 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음식을 먹는 일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식탁은 친교와 환대의 자리였고, 누가 누구의 집에 드나들며 음식을 나누는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집회서는 함께 밥을 먹는다는 사실만으로는 우정의 깊이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네가 잘될 때에는 너와 동등하게 굴고, 네 집안 종들에게 거리낌 없이 말할 것이다.집회서 6:11 · 본디새김
이 묘사에는 종이 있는 가정을 전제한 당시의 사회적 위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친밀하고 당당하게 행동하는지입니다. 그는 외부 손님이라기보다 집안의 일원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12절에서 상황이 바뀝니다.
네가 낮은 처지에 놓이면 그는 너를 대적하고, 네 앞에서 몸을 숨길 것이다.집회서 6:12 · 본디새김
잘될 때에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던 사람이 어려워지자 자신을 감춥니다. 이 두 장면의 대조가 관계의 실상을 폭로합니다. 그는 상대방의 지위와 형편이 좋을 때에는 친밀함을 누리다가, 그 조건이 사라지면 관계 자체를 부정합니다.
그래서 8절과 10절에는 똑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실상 자기에게 좋은 때만 친구인 사람이 있다. 그는 네가 환난을 겪는 날에는 결코 곁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6:8 · 본디새김
집회서가 우정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얼마나 자주 함께 있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날에도 함께 남아 있는가입니다.
네 원수들에게서 떨어져 있어라. 네 친구들도 조심해라.집회서 6:13 · 본디새김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을 의심하라는 권고로 읽으면 앞의 5–6절과 충돌합니다. 본문은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라고 이미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불신이 아니라 분별입니다.
보물보다 귀한 사람, 생명을 살리는 친구
믿음직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다. 그런 친구를 찾은 사람은 보물을 찾았다.집회서 6:14 · 본디새김
앞부분에서는 친구를 조심하라는 경고가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집회서는 참된 친구를 얻는 일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를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14–16절에서는 「믿음직한 친구」라는 표현이 세 번 반복되며, 그 가치가 서로 다른 이미지로 펼쳐집니다. 피난처는 평안할 때보다 위험할 때 가치가 드러납니다. 어려운 날에 사라지는 사람은 겉으로는 친구처럼 보여도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직한 친구와 맞바꿀 것은 없고, 그 아름다움을 무게로 잴 수도 없다.집회서 6:15 · 본디새김
이 표현에는 물건의 무게를 재어 가치를 판단하는 거래의 이미지가 들어 있습니다. 금이나 은은 무게를 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직한 친구의 가치는 그런 방식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믿음직한 친구는 생명의 약이며, 주를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찾을 것이다.집회서 6:16 · 본디새김
여기서 ‘약’은 생명을 보호하거나 회복시키는 것을 비유적으로 가리킵니다. 친구는 단지 즐거움을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낙심하거나 판단을 잃어버릴 때, 다시 살아갈 힘을 얻도록 돕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은 이러한 우정의 근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기 우정을 곧게 이끌 것이다. 그 자신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의 이웃도 그러하기 때문이다.집회서 6:17 · 본디새김
여기서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이끄는 태도입니다.
흔히 어떤 사람이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될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집회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묻습니다.
17절의 마지막 문장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성품이 그와 가까운 이들의 성품에 영향을 준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된다는 이해도 가능합니다.
다만 어느 쪽이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반드시 생긴다고 기계적으로 약속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핵심은 우정이 자신의 성품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외부의 행운만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자신의 우정을 형성합니다.
잠언 17:17은 어려움 속에서도 지속되는 사랑을 친구의 중요한 특징으로 말하고, 잠언 27:6은 친구의 아픈 충고와 원수의 입맞춤을 대조합니다. 집회서 6장은 이 주제를 한층 구체적으로 펼쳐 보입니다.
지혜는 열매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자란다
얘야, 젊을 때부터 교훈을 택해라. 그러면 백발이 될 때에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집회서 6:1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친구를 선택하는 문제가 중요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삶을 형성할 가르침을 선택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집회서가 권하는 지혜는 지식을 많이 아는 능력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배우고 교정받으면서 삶의 태도가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18절은 젊은 시절과 백발이 된 노년을 연결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마치 시간이 훨씬 짧게 걸리는 것처럼 말합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사람처럼 지혜에 다가가고, 그 좋은 열매들을 기다려라. 지혜를 위해 일하며 잠깐 수고하고, 곧 그 소출을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6:19 · 본디새김
농부의 삶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땅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그런 다음에는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리 조급해도 씨앗을 심은 바로 그날 수확할 수는 없습니다.
두 표현을 정확한 수확 시기에 관한 약속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19절의 상대적으로 짧은 수고는 그 수고가 맺는 풍성한 결실과 대비됩니다. 지혜를 배우는 일은 오래 걸립니다. 그러나 그 결실을 생각하면 그 과정이 헛된 노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높이던 사람은 자기 잎을 먹어 치우고 열매를 잃어버렸습니다. 반면 지혜를 찾는 사람은 땅을 갈고 씨를 뿌려 열매를 얻습니다. 하나는 지금 가진 것을 소비하며 자신을 고갈시키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결실을 위해 오늘 수고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러한 수고를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지혜는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얼마나 몹시 빠른가. 분별없는 이는 지혜 안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6:20 · 본디새김
본디새김이 따르는 그리스어 읽기에는 타케이아, 곧 ‘빠른’이라는 낱말이 나타납니다. 반면 다른 그리스어 판본에는 트라케이아(τραχύς), 곧 ‘거친’, ‘험한’이라는 낱말이 나타납니다.
‘거친’으로 읽으면 지혜의 훈련이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몹시 힘들고 거칠게 느껴진다는 뜻이 됩니다. 뒤이어 무거운 시험의 돌을 말하는 21절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빠른’으로 읽으면 뜻이 덜 분명합니다. 지혜가 배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따라가기에는 너무 빠르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은 문맥을 통한 해석이지 원문 자체가 명확하게 설명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어느 독법이 원래의 표현인지 여기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읽기 모두 이어지는 문장의 핵심과 연결됩니다. 분별없는 사람은 지혜 안에 계속 머무르지 못합니다.
지혜는 그에게 시험에 쓰는 무거운 돌과 같을 것이고, 그는 지혜를 내던지는 일을 오래 미루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6:21 · 본디새김
지혜가 자신을 바꾸기 위해 요구하는 것을 견디기보다, 지혜 자체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친구에 관한 앞부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떠나는 친구처럼, 지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지혜를 버립니다.
지혜는 그 이름 그대로이며, 많은 이에게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집회서 6:22 · 본디새김
본문은 사람들이 지혜를 얻지 못하는 이유를 단지 지적인 능력의 부족에서 찾지 않습니다. 배우는 데 따르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너무 일찍 내던지는 태도를 문제 삼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문장만으로는 ‘이름 그대로’라는 표현의 정확한 의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해석은 히브리어의 말놀이를 배경으로 읽는 것입니다. ‘훈육’을 뜻하는 히브리어 무사르와 소리가 같은 ‘떨어져 있음’이라는 의미의 표현을 연결하여, 지혜가 많은 사람에게 멀리 있거나 감추어져 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다만 이것이 해당 문장의 원래 의도였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지혜의 차꼬에 스스로 발을 넣으라는 역설
24절은 집회서 6장 전체에서 가장 뜻밖의 권고 가운데 하나입니다.
네 발을 지혜의 차꼬에 넣고, 네 목을 지혜의 목줄에 넣어라.집회서 6:24 · 본디새김
차꼬와 목줄은 일반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물건입니다.
그런데 집회서는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에게 바로 그 속박을 스스로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네 어깨를 밑에 대어 지혜를 짊어지고, 그 사슬을 못마땅해하지 마라.집회서 6:25 · 본디새김
여기에는 포로나 종, 혹은 무거운 짐을 지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겹쳐 있습니다. 지혜의 훈련이 처음에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왜 지혜를 얻는 일이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속박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표현될까요?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2–4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자기 마음을 높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파괴했습니다. 자기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유처럼 보였지만, 결국 열매를 잃고 마른 나무가 되었습니다.
반면 여기서는 자신에게 제한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본문은 인간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자기 욕망을 따를 때 가장 자유롭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는 충동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을 바르게 이끌어 줄 가르침에 기꺼이 자신을 맡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을 현실의 모든 권위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스스로 받아들이라고 권하는 것은 지혜의 가르침이며, 마지막 절에서 그 내용은 주의 명령과 계명으로 구체화됩니다.
온 마음으로 지혜에 다가가고, 온 힘을 다해 그 길을 지켜라.집회서 6:26 · 본디새김
마음과 힘을 다하는 태도는 신명기 6:5에서 여호와야훼를 사랑하도록 요구하는 전인격적인 헌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집회서는 이러한 헌신의 언어를 지혜의 훈련에도 사용합니다. 지혜를 자기 삶의 일부에만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이끌 원리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27절은 수동적인 복종의 이미지에서 능동적인 탐색의 이미지로 이동합니다.
자취를 더듬고 찾아라. 그러면 지혜가 네게 알려질 것이다. 지혜를 붙잡거든 놓지 마라.집회서 6:27 · 본디새김
앞에서는 지혜가 사람을 사슬로 묶는 것처럼 묘사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지혜를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지혜의 가르침이 자신에게 부과된 무거운 요구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알아 가면서 점차 자신이 기꺼이 붙잡고 싶은 것이 됩니다.
마침내 네가 지혜의 쉼을 찾을 것이고, 지혜는 네게 기쁨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6:28 · 본디새김
처음에는 억지로 견디던 것을 나중에는 기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무겁기만 했던 가르침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집회서 4:17–19에도 지혜가 사람을 어려운 길로 인도하고 시험한 뒤,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흐름이 나옵니다. 6장은 그 과정을 차꼬와 사슬이라는 더욱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부분에서 그 사슬 자체가 놀라운 변화를 겪습니다.
사슬이 장신구로 바뀌는 순간
그 차꼬는 네게 든든한 피난처가 되고, 지혜의 가지들은 영광의 옷이 될 것이다.집회서 6:29 · 본디새김
24절에서 발을 묶던 차꼬가 29절에서는 사람을 보호하는 피난처가 됩니다.
지혜 위에는 금 장식이 있고, 그 사슬은 푸른 실이기 때문이다.집회서 6:30 · 본디새김
앞에서는 쇠사슬처럼 느껴지던 것이 이제 아름답게 엮은 장식처럼 나타납니다. 따라서 본문은 평범한 끈이 아니라 귀한 색실로 만든 장식을 연상시킵니다.
너는 지혜를 영광의 옷으로 입고, 스스로 환희의 관을 쓸 것이다.집회서 6:31 · 본디새김
처음에는 지혜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이제는 지혜를 입습니다.
처음에는 목을 굽혀야 했습니다. 이제는 머리에 관을 씁니다.
처음에 자신을 낮추어 배우던 사람이 마침내 영광을 얻습니다.
이는 2절에서 자신을 높이려다가 무너진 사람과도 대조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는 사람은 수치를 얻지만, 지혜를 위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영광의 옷을 입습니다.
지혜의 아름다움은 처음부터 편안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견디며 배우는 사람에게 차츰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디새김이 따르는 그리스어 본문에는 클라도이, 곧 ‘가지들’이라는 읽기가 나타납니다. 반면 다른 그리스어 본문에는 클로이오이, 곧 ‘목고리들’이라는 읽기가 나타납니다. ‘목고리들’로 읽으면 앞서 등장한 목줄이 영광의 옷으로 바뀐다는 대조가 선명해집니다. ‘가지들’로 읽으면 지혜를 나무에 빗댄 이미지가 다시 살아납니다. 3절에서는 자기 잎과 열매를 잃어버린 사람이 등장했고, 19절에서는 지혜의 좋은 열매를 기다리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본문의 핵심은 처음의 고통과 마지막의 영광 사이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여기에는 잠언 3:13–18에서 지혜의 가치를 은과 금보다 높이 평가하고 지혜를 생명나무에 비유하는 흐름도 떠오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문 앞 계단을 닳게 하라
지혜의 영광을 노래한 뒤, 집회서는 다시 일상적인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얘야, 네가 원하면 가르침을 받을 것이고, 네 마음을 쏟으면 영리해질 것이다.집회서 6:32 · 본디새김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에게는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듣기를 좋아하면 깨우칠 것이고, 네 귀를 기울이면 지혜로워질 것이다.집회서 6:33 · 본디새김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단순히 ‘듣는다’가 아니라 「듣기를 좋아하면」입니다. 배움은 마지못해 남의 말을 견디는 태도와 다릅니다.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서 배울 것을 찾으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자기 마음의 생각을 높이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말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반면 지혜를 구하는 사람은 귀를 기울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대신, 자신에게 아직 없는 것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모인 가운데 서 있어라. 누가 지혜로우냐? 그에게 가까이 붙어라.집회서 6:34 · 본디새김
고대의 지혜 교육은 책을 읽고 지식을 얻는 일에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경험과 가르침을 지닌 사람 가까이에서 그의 말을 듣고, 질문하며, 삶의 태도를 배우는 방식도 중요했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과 지혜롭다는 사실은 서로 같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모인 가운데 서 있어라」라는 표현이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공동체의 자리를 보여 준다면, 「누가 지혜로우냐?」라는 질문은 그 가운데서도 실제로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분별을 요구합니다.
신성한 이야기는 무엇이든 들으려 하고, 깨달음의 속담들이 네게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라.집회서 6:35 · 본디새김
여기에는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과 삶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로운 말이 함께 등장합니다. 집회서에서 지혜를 배우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요령을 익히는 일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간의 삶을 함께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깨달음이 있는 사람을 보면 새벽부터 그에게 찾아가고, 네 발로 그의 문 앞 계단을 닳게 해라.집회서 6:36 · 본디새김
새벽부터 찾아가라는 말에는 배우려는 사람의 열심이 담겨 있습니다. 문 앞 계단을 닳게 하라는 말에는 반복해서 찾아가는 꾸준함이 담겨 있습니다.
계단은 한 번 밟는다고 닳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수없이 오르내려야 닳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다시 묻고, 배운 것을 살아 보다가 실패하면 다시 찾아가야 합니다.
6절에서는 의논 상대를 천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제 34–36절에서는 그 지혜로운 사람을 찾았다면 가까이 붙어서 그의 문 앞 계단이 닳도록 찾아가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알아보는 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배우려는 발걸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집회서는 독자를 지혜로운 사람의 문 앞에 그대로 세워 두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은 그 지혜의 더 깊은 근원을 보여 줍니다.
마음을 굳게 세우시는 분
주의 명령들을 깊이 생각하고, 그의 계명들을 늘 힘써 익혀라. 그가 네 마음을 굳게 세울 것이고, 네가 지혜를 두고 바라던 것이 네게 주어질 것이다.집회서 6:37 · 본디새김
이 마지막 절은 앞서 말한 모든 배움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여기서 집회서가 말하는 지혜는 단순히 삶의 경험에서 얻는 통찰이나 사회적 성공을 위한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이끌어 가는 능력입니다.
이는 신명기 6:6–9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일상의 여러 자리에서 되새기도록 권하는 전통과 연결됩니다. 시편 1:2도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밤낮으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지금까지 본문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문장의 주어가 달라집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굳게 세우시고, 지혜를 향한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혜가 인간의 노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훈련하지만, 그 마음을 참으로 굳게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절에서는 자기 마음의 생각으로 자신을 높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파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7절에서는 주의 명령을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굳게 세우십니다.
지혜를 원하는 사람은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지혜를 자신의 힘으로 정복하거나 소유했다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지혜는 인간의 수고와 하나님의 돌보심이 만나는 자리에서 자라납니다.
집회서 6장이 보여 주는 지혜로운 삶
믿음직한 친구를 얻으려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어려움을 통과하는 관계를 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혜를 얻으려면 처음에 무겁게 느껴지는 가르침을 너무 빨리 내던지지 않아야 합니다. 친구를 알아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고, 지혜를 익히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독자는 지혜로운 사람의 집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스승을 찾아갑니다. 어제 들었던 말을 다시 생각하고,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배우려고 문 앞 계단을 오릅니다.
처음에는 그 길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는 일도,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찾아옵니다. 그리고 또 찾아옵니다.
그가 여러 날 오르내린 계단은 조금씩 닳아 갑니다.
그 발걸음이 쌓이는 동안 그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차꼬처럼 무거웠던 지혜가 어느새 자신을 지켜 주는 힘이 되고, 기꺼이 입고 싶은 영광의 옷이 됩니다.
집회서 6장이 그리는 지혜로운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날마다 배우기를 선택하고, 마침내 그 배움 속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굳게 세움 받는 사람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