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높은 자리보다 돌보는 손

누군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간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그 말이 진실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드리는 기도일까요? 성전에 바치는 예물일까요? 종교적 지식이나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경건한 태도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주장하느냐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서 드러납니다.

4절은 높은 자리를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32절은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합니다. 앞에서는 자신을 높이려고 뻗는 손을 경계하고, 뒤에서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내미는 손을 권합니다.

집회서 7장은 사람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를 묻기보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누구를 돌보아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모든 교훈을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묶습니다. 「무슨 말을 하든 네 최후를 기억해라.」

삶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일이 어째서 오늘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일까요?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127장 본문 읽기 →

불의의 밭고랑에서는 무엇이 자라는가

집회서 7:1–3 본문 →

집회서 7장은 매우 단호하게 시작합니다.

악한 일을 하지 마라. 그러면 악이 결코 너를 덮치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7:1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얼핏 단순한 인과응보의 원칙처럼 들립니다. 악을 행하지 않으면 나쁜 일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의롭게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행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욥기의 이야기는 의로운 사람이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을 겪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집회서는 인간의 모든 불행이 어떤 이유로 일어나는지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행동에는 그 행동을 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파괴적인 결과가 있다는 지혜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그리스어에서 첫 번째 ‘악한 일’과 두 번째 ‘악’은 같은 어근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는 사람이 행하는 악을, 두 번째는 그 사람에게 닥치는 악이나 해로움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3절은 이 원리를 농사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아들아, 불의의 밭고랑에 씨를 뿌리지 마라. 그러면 그 고랑에서 일곱 배로 거두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집회서 7:3 · 본디새김

밭고랑은 씨앗을 심기 위해 땅에 낸 긴 홈입니다. 농부는 그곳에 씨를 뿌리고 훗날 거둘 수확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본문이 말하는 농부는 곡식이 아니라 불의를 심습니다.

악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 하나가 또 다른 거짓말을 필요하게 만들고, 부당하게 얻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부정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결과를 「일곱 배」라는 표현으로 강조합니다. 씨앗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거두는 농사의 원리를 이용해, 불의의 결과가 처음 행동보다 훨씬 커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표현입니다.

사람이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듯, 불의도 자신의 선택을 통해 삶에 심어집니다.

잠언 22:8에서도 불의를 심는 사람은 재앙을 거둔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은 모두 현재의 행동과 미래의 결과를 농사의 언어로 연결합니다.

그런데 집회서는 불의가 자라는 밭을 곧바로 사회의 권력 구조 속에서 보여 줍니다.

높은 자리가 반드시 영광스러운 자리는 아니다

집회서 7:4–7 본문 →

주에게 다스릴 권한을 구하지 말고, 왕에게 영광스러운 자리를 구하지 마라.집회서 7: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지도자가 되거나 공적인 책임을 맡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일까요?

바로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재판장이 되려 하지 마라. 불의를 없앨 힘이 네게 없을까 두렵다. 권세 있는 이 앞에서 겁을 먹고 네 올곧음에 걸림돌을 놓게 될까 두렵다.집회서 7:6 · 본디새김

본문이 염려하는 것은 재판장이라는 직책 자체보다 그 자리가 요구하는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재판은 단순한 법률 문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재산과 가족, 상속과 채무,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권리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따라서 재판장이 불의한 판결을 내리면 그 결과를 실제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본문은 바로 그 순간을 상상합니다. 재판장은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지만, 권력자의 얼굴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결국 자신의 올곧음을 저버립니다.

걸림돌은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재판장이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판결을 내린다면, 그는 다른 사람을 해칠 뿐 아니라 스스로 걸어온 바른 길에도 장애물을 놓습니다.

그러므로 집회서의 질문은 ‘어떻게 재판장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재판장이 되었을 때 불의를 막아 낼 수 있는가’입니다.

높은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그 자리가 가져다줄 영광을 먼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자리가 요구하는 용기와 책임을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

주 앞에서 너 자신을 의롭다고 하지 말고, 왕 앞에서 지혜로운 체하지 마라.집회서 7:5 · 본디새김

두 행동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욕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평가받기보다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려 합니다. 왕 앞에서 지혜를 과시하는 사람은 실제로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는 일보다 지혜로운 사람으로 보이는 일에 관심을 둡니다.

본문은 이러한 자기 과시가 공적인 책임과 결합할 때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 줍니다.

도시의 백성에게 죄를 짓지 말고, 군중 속에서 너 자신을 무너뜨리지 마라.집회서 7:7 · 본디새김

도시의 백성과 군중은 개인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는 공적인 영역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죄는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와의 관계를 해칩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올곧음을 잃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많은 예물을 드리면 불의를 덮을 수 있는가

집회서 7:8–10 본문 →

이제 본문은 공적인 자리에서 종교적인 자리로 이동합니다.

죄를 두 번 지어 한데 묶지 마라. 단 하나만으로도 너는 죄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7:8 · 본디새김

죄를 두 번 지어 묶는다는 말은 죄가 반복되면서 쌓여 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 번의 잘못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데, 그것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집회서는 죄를 반복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위험한 생각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말하지 마라. 「내 예물이 많으니 그가 돌아볼 것이고, 내가 지극히 높은 하나님에게 바치면 그가 받아들일 것이다.」집회서 7:9 · 본디새김

문제는 많은 예물을 바쳤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꺼이 받아 주셔야 한다고 기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물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나 헌신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는 불의를 덮는 수단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사야 1:11–17에서는 하나님께서 많은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들에게 악한 행위를 그치고 정의를 찾으며 억눌린 사람을 도우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이웃을 향한 정의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집회서는 제사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29–31절에서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을 성실하게 바치라고 가르칩니다.

예물을 바치는 일은 마땅히 행해야 하지만, 예물을 바쳤다는 사실을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증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기도할 때 낙심하지 말고, 자선을 베푸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마라.집회서 7:10 · 본디새김

기도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행동입니다. 자선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푸는 행동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필요에는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는지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베푸는지도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비웃는 사람은 무엇을 잊었는가

집회서 7:11–14 본문 →

마음의 쓰라림을 겪는 사람을 비웃지 마라.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집회서 7:11 · 본디새김

여기서 「마음의 쓰라림」은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은 정도를 넘어 깊은 괴로움이나 비통함을 나타냅니다.

본문은 곧바로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는 분을 언급합니다. 이 표현은 사무엘상 2:7에서 여호와야훼께서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신다는 한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합니다. 집회서 7:11의 문장 자체는 그분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지만, 문맥상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말이 오늘 고통받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직접 벌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의 다른 본문들도 고난의 원인을 그렇게 단순화하지 않습니다.

지금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언제나 높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낮은 대우를 받아 마땅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조롱하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네 형제를 해치려고 거짓을 일구지 말고, 친구에게도 같은 일을 하지 마라.집회서 7:12 · 본디새김

3절에서 불의의 밭고랑에 씨를 뿌리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형제와 친구를 해치기 위해 거짓의 밭을 갈지 말라고 합니다.

거짓말은 언제나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말만은 아닙니다.

어떤 거짓은 미리 준비됩니다. 사실을 선택적으로 숨기고,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만들고, 상대방을 해칠 기회를 기다립니다.

집회서는 그러한 행동을 밭을 가는 농부의 노동에 빗댑니다. 그러나 농부가 곡식을 얻기 위해 땅을 갈듯, 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 거짓을 준비합니다. 그 결과가 선할 수 없다는 것이 13절의 경고입니다.

어른들이 모인 가운데서 수다를 떨지 말고, 기도할 때 말을 되풀이하지 마라.집회서 7:14 · 본디새김

어른들의 모임과 기도는 서로 다른 장소처럼 보이지만, 두 곳에는 공통된 위험이 있습니다. 말의 양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말을 들을 기회를 잃습니다. 기도할 때 말을 되풀이하는 사람도 많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경건함의 기준으로 삼을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기도하는 모든 행동을 금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말의 양이나 반복 자체가 아니라, 말을 대하는 경박한 태도입니다.

전도서 5:2 역시 하나님 앞에서 성급하게 입을 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집회서가 권하는 지혜는 말을 적게 하는 기술에 그치지 않습니다. 말을 해야 할 때와 들어야 할 때를 알고, 말이 진실을 섬기도록 하는 태도입니다.

불의의 밭을 갈지 말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을 일구어라

집회서 7:15–16 본문 →

앞에서 거짓의 밭을 갈지 말라고 했던 본문은 이제 실제 농사일을 말합니다.

고된 노동을 싫어하지 말고, 지극히 높은 이가 만든 농사일도 싫어하지 마라.집회서 7:15 · 본디새김

3절에서는 불의의 밭고랑에 씨를 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12절에서는 거짓을 일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 1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농사일을 싫어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욕망을 위해 악을 일구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생명을 위한 곡식을 길러 내기도 합니다.

본문은 특별히 농사일이 「지극히 높은 이가 만든」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2:15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신 장면과 연결됩니다.

노동에는 분명 고단함이 있습니다. 집회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동이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천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왕 앞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원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평범한 노동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너 자신을 죄인들의 무리에 끼워 넣지 마라. 네 마음을 아주 낮추어라. 분노가 지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기억해라. 경건하지 않은 이에게 돌아갈 벌은 불과 구더기라는 것을 기억해라.집회서 7:16 · 본디새김

죄에서 떨어져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남들보다 의롭다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불의를 거부하는 태도와 겸손한 마음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의 「불과 구더기」는 강렬한 심판의 이미지입니다. 구더기는 시체의 부패를 연상시키고, 불은 파괴와 심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두 이미지의 결합은 이사야 66:24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집회서 7:16의 짧은 표현만으로 사후 형벌의 시간이나 장소, 구체적인 형태가 어떠한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의 결말을 두려운 이미지로 제시함으로써 현재의 교만과 악행을 경고하는 기능이 중심입니다.

그리고 이제 지혜의 가르침은 가장 가까운 생활 공간으로 들어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재산인가, 돌보아야 할 이웃인가

집회서 7:18–22 본문 →

18절부터 본문은 친구와 아내, 종과 품꾼, 가축에 이르기까지 집안과 그 주변에 속한 관계들을 차례로 다룹니다.

고대 가정의 가장은 가족과 종, 재산과 가축에 대해 상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집회서는 바로 그런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하찮은 것 때문에 친구를 바꾸지 말고, 참된 형제를 오빌의 금과 맞바꾸지 마라.집회서 7:18 · 본디새김

오빌은 구약에서 귀한 금을 공급하는 곳으로 언급됩니다(열왕기상 9:28; 10:11). 정확한 지리적 위치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성경에서 오빌의 금은 값비싼 재물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이 구절은 친구와 형제를 재물로 환산하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지혜롭고 선한 아내를 놓치지 마라. 그 아내의 매력은 금보다 귀하기 때문이다.집회서 7:19 · 본디새김

본문은 먼저 「지혜롭고 선한 아내」라고 말한 뒤 그 사람의 매력이 금보다 귀하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 매력에는 지혜와 선한 성품에서 비롯되는 품격이 포함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물은 귀하지만, 참된 관계의 가치는 재물보다 큽니다.

그런데 20절에 이르면 그 관계는 가족과 친구를 넘어 종과 품꾼에게까지 확장됩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집안 종을 괴롭히지 말고, 제 마음을 쏟는 품꾼도 괴롭히지 마라.집회서 7:20 · 본디새김

집안 종과 품꾼은 같은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종은 주인의 가정에 속해 예속된 상태로 일할 수 있었고, 품꾼은 노동의 대가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자신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의존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성실하게 일하는 종과 마음을 쏟는 품꾼이 강조되는 것은 그들의 노동이 주인에게 유익하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부당하게 대하는 일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드러냅니다.

21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네 마음이 선한 집안 종을 사랑하게 해라. 그에게서 자유를 빼앗지 마라.집회서 7:21 · 본디새김

본문은 종이라는 예속된 신분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람에게 자유를 빼앗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출애굽기 21:2와 신명기 15:12–15에서는 히브리인 종의 해방에 관한 규정이 제시됩니다. 특히 신명기는 종을 내보낼 때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맥락에서 집회서 7:21은 종을 대하는 태도에 자비와 자유라는 가치를 도입합니다.

물론 이것을 현대적 의미의 노예제 폐지 선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 자체는 고대의 신분 질서를 전제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의 법적 지위가 같아야 한다는 명시적인 주장을 펼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 안에서도 종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대우를 제한하고 자유를 존중하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네게 가축이 있느냐? 그것들을 돌보아라. 네게 쓸모가 있으면 네 곁에 머물게 해라.집회서 7:22 · 본디새김

본문은 가축을 유용성의 관점에서도 바라봅니다. 그러나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다루어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돌보라고 명령합니다.

자신에게 속하거나 의존하는 존재가 많을수록, 그들을 마음대로 다룰 권리만이 아니라 돌보아야 할 책임도 커집니다.

자녀를 가르치는 권위와 부모를 기억하는 마음

집회서 7:23–28 본문 →

이제 본문은 자녀에게로 시선을 옮깁니다.

네게 자녀들이 있느냐? 그들을 가르쳐 바로잡아라. 어릴 때부터 그들의 목을 굽혀라.집회서 7:23 · 본디새김

목을 굽힌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꺾고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어린 자녀를 훈육하고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이 부모의 중요한 책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 표현을 오늘날 부모가 자녀의 인격을 억압하거나 폭력적으로 복종시켜도 된다는 허가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고대의 강한 가부장적 훈육 관념을 반영하며, 자녀의 독립적인 인격과 권리를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이 역사적 차이를 인정해야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네게 딸들이 있느냐? 그들의 몸을 잘 살펴라. 그들을 향해 네 얼굴에 웃음을 띠지 마라.집회서 7:24 · 본디새김
딸을 시집보내라. 그러면 큰일 하나를 마친 셈이 될 것이다. 깨달음이 있는 남자에게 그 딸을 주어라.집회서 7:25 · 본디새김

본문은 딸의 몸과 결혼을 아버지가 관리해야 할 중요한 책임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고대의 혼인 관습과 가문의 명예, 여성의 성적 행실을 엄격하게 관리하던 사회적 관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결혼은 개인의 선택만이 아니라 가족 사이의 관계와 재산, 사회적 지위를 연결하는 제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딸을 결혼시키는 일이 가정의 중요한 과업으로 묘사됩니다.

「그들을 향해 네 얼굴에 웃음을 띠지 마라」는 표현도 그런 엄격한 양육관을 보여 줍니다. 부모의 지나친 관대함을 경계하는 뜻으로 읽을 수 있지만, 이것이 딸에게 애정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인 윤리 원칙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 자체가 강조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의 삶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25절은 딸의 배우자를 선택할 때 그 사람의 분별력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현대의 적용에서는 자녀의 존엄성과 의사, 안전과 자율성을 함께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고대 본문의 명령을 단순히 반복하는 일이 아니라, 본문의 역사적 거리까지 고려하여 책임이라는 주제를 새롭게 숙고하는 일입니다.

26절은 부부 관계로 돌아옵니다.

네 마음에 맞는 아내가 있느냐? 그 아내를 내쫓지 마라.집회서 7:26 · 본디새김

앞의 19절에서 아내의 지혜와 선한 성품을 금보다 귀하게 여겼다면, 여기서는 그러한 관계를 가볍게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27–28절에서는 부모에 대한 태도가 등장합니다.

온 마음으로 네 아버지를 존중하고, 어머니가 해산할 때 겪은 고통을 잊지 마라.집회서 7:27 · 본디새김
그들을 통해 네가 태어났음을 기억해라. 그들이 네게 해 준 만큼 너는 무엇으로 그들에게 갚겠느냐?집회서 7:28 · 본디새김

앞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자녀가 부모에게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돌봄을 받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이 돌봄을 제공해야 하는 위치에 설 수 있습니다. 집회서는 바로 그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라고 합니다.

특히 어머니의 해산 고통을 언급하는 것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추상적인 감정으로 설명하지 않고, 한 사람의 생명이 태어나기까지 누군가 실제로 겪어야 했던 고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28절의 마지막 질문은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베푼 모든 것을 계산하여 똑같이 갚을 수는 없습니다.

이 질문은 부모에게 갚아야 할 정확한 액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이 자기 혼자 이룬 결과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수고와 돌봄을 통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합니다.

물론 이 구절이 부모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자녀에게 부당한 요구와 학대까지 감수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부모가 베푼 생명과 돌봄의 은혜를 기억하라고 가르치는 것이지, 부모의 모든 행동이 옳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가족 안에서 사람은 한편으로 다른 사람을 돌볼 책임을 지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받은 돌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본문은 이러한 관계의 책임을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연결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몫과 가난한 사람에게 내미는 손

집회서 7:29–32 본문 →

네 온 마음으로 주를 두려워하고, 그의 제사장들을 공경해라.집회서 7:29 · 본디새김
온 힘을 다해 너를 만든 이를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 일꾼들을 버리지 마라.집회서 7:30 · 본디새김

29–30절은 서로 평행을 이루는 문장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명령과 제사장을 공경하라는 명령이 함께 나오고, 창조주를 사랑하라는 명령과 그분을 섬기는 일꾼들을 버리지 말라는 명령이 함께 나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을 존중하는 일이 연결됩니다.

집회서가 기록된 시대의 유대교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중심 장소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정해진 예식과 제사를 맡았으며, 율법은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주를 경외하고 제사장을 존중해라. 처음부터 네게 명령된 대로 그에게 몫을 주어라. 허물을 위한 제물과 앞다리 예물, 거룩하게 하는 제물과 첫 열매를 주어라.집회서 7:31 · 본디새김

여기 등장하는 예물과 제사장의 몫은 레위기 7:28–36, 민수기 18:8–20, 신명기 18:1–5 등의 규정과 연결됩니다. 특히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앞다리 등의 몫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도록 마련된 제도와 관련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거룩하게 하는 제물」이 정확히 어느 한 제사의 종류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제사 이름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개인의 종교적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는 성전의 봉사와 제사를 유지하기 위한 실제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2절에서 갑자기 시선이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또 가난한 이에게 네 손을 뻗어 네 복이 온전해지게 해라.집회서 7:32 · 본디새김

여기에는 제사장에게 바칠 몫을 줄여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는 대체의 명령이 없습니다. 반대로 제사장에게 몫을 드렸으므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선택 사항이 된다는 말도 없습니다.

두 책임이 나란히 놓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동이 하나님의 복을 돈으로 사는 방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받은 복을 자신에게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삶의 온전함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집회서 3:30–4:10에서 가난한 사람을 향한 자선을 강조했던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특히 집회서 4:1은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빼앗지 말라고 가르치며, 4:8에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온유하게 대답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단순히 재물을 나누는 행동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와 고통을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손과 가난한 사람에게 내미는 손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두 손길이 하나의 경외심에서 나오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그 손길이 어디까지 뻗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죽은 사람에게도 호의를 거두지 말라는 뜻

집회서 7:33 본문 →

살아 있는 모든 이에게 선물로 호의를 베풀고, 죽은 이에게도 호의를 거두지 마라.집회서 7:33 · 본디새김

살아 있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라는 명령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정중하게 다루고, 장례를 치르며, 그를 기억하는 일이 중요한 책임이었습니다. 사무엘하 21:12–14에서는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거두어 조상들의 무덤에 장사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토빗기 1:17–18과 2:3–8에서는 버려진 시신을 거두어 장사하는 행동이 의로운 사람의 중요한 선행으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하면 집회서 7:33의 「죽은 이에게도 호의를 거두지 마라」는 말씀은 죽은 사람에게 합당한 장례와 애도를 베풀고, 그를 함부로 버려두지 말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은 구체적인 장례 절차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장례와 추모에 관한 여러 실천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구절을 죽은 사람의 사후 운명을 살아 있는 사람이 바꿀 수 있다는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해석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 자체는 그러한 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32절에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했습니다.

33절에서는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은 사람에게까지 호의를 거두지 말라고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면 감사 인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과 관계가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그 사람이 자신에게 도움을 되돌려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에는 그러한 보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을 정중하게 대하는 일은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넘어서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33절은 앞서 친구를 오빌의 금과 맞바꾸지 말라고 했던 18절의 가르침과도 이어집니다.

참된 호의는 상대방이 보답할 수 없게 된 자리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집회서는 이러한 호의를 더욱 일상적인 고통의 자리로 가져옵니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집회서 7:34–35 본문 →

우는 이들에게서 물러나 있지 말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해라.집회서 7:34 · 본디새김

슬픔을 빨리 끝내 주라고 하지 않습니다. 울지 않도록 설득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설명해 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슬퍼하라고 합니다.

누군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위로할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할 수 있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알지 못할 수도 있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회서가 먼저 요구하는 것은 그런 능력이 아닙니다.

물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설명하려 하기 전에, 그 고통을 겪는 사람 곁에 있어야 합니다.

35절은 같은 태도를 병든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병든 이를 찾아가 돌보는 일을 꺼리지 마라. 이런 일들로 너는 사랑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7:35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찾아가 돌보는 일」에는 실제로 병든 사람을 방문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병든 사람을 찾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병이 심한 사람은 스스로 일상적인 일을 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줄어들고, 돌봐 줄 사람에게 의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은 시간과 수고를 필요로 합니다.

건강하고 즐거운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반면 병들고 슬퍼하는 사람 곁에 머무는 일은 불편하고 힘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피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의 고통을 보면서 자신도 괴로워지기 때문에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회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돌봄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이런 일들로 너는 사랑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찾아가 돌보는 행동이 사람들 사이에 사랑과 신뢰를 형성한다는 지혜의 관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정의를 지키라고 요구하지만, 동시에 특별한 권력이 없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삶에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욥기의 친구들은 처음 욥을 찾아왔을 때 그의 고통이 너무 큰 것을 보고 함께 땅에 앉아 칠 일 밤낮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욥기 2:11–13). 그들이 이후에 욥의 고통을 잘못 해석하고 그를 비난하게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처음에 보여 준 그 행동 자체는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집회서 7:34의 권고도 그와 비슷한 자리에 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기억하라는 마지막 권고

집회서 7:36 본문 →

무슨 말을 하든 네 최후를 기억해라. 그러면 너는 영원히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7:36 · 본디새김

본문에는 앞서 두 차례 중요한 기억의 명령이 등장했습니다. 16절에서는 하나님의 분노와 악한 사람에게 돌아갈 결과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28절에서는 부모를 통해 자신이 태어났음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36절에서는 자신의 최후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죄의 결과를 기억하고, 자신의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기억하며, 그 생명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 권력이 언제까지나 자기 손에 있을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은 앞으로도 언제든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결코 낮아지지 않을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왕 앞에서 얻은 높은 자리도, 자기 소유의 재물도, 다른 사람에게 행사하던 권한도 언젠가는 끝납니다. 이 사실은 사람을 허무주의로 이끄는 대신 오늘의 선택을 더욱 진지하게 바라보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문장인 「그러면 너는 영원히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을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기만 하면 실제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절대적인 약속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집회서는 지혜문학 특유의 강한 표현으로, 삶의 끝을 기억하는 태도가 죄를 피하도록 이끈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삶의 끝을 기억할 때, 지금 당장 중요해 보이는 것과 끝까지 중요한 것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집회서 7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과 인간의 삶

집회서 7:1–36 본문 →

집회서 7장이 보여 주는 지혜는 높은 자리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기억하며 다른 사람에게 마땅히 베풀어야 할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성전에서의 경건과 일상에서의 정의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병들어 누워 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방문과 돌봄이 필요한 처지에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그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자신의 일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며,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집회서는 그 사람에게 높은 자리를 구하는 방법이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저 병든 사람을 찾아가는 일을 꺼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의 최후를 기억하라고 덧붙입니다.

언젠가는 자신도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자리와 소유가 더 이상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하는 날이 올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늘 병든 이의 문 앞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특별한 권한도, 많은 재물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 곁에 있어 주려는 마음과 작은 수고가 있을 뿐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