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마음을 빼앗는 것과 함께 앉을 사람

집회서 9장은 자신의 아내를 질투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집회서는 그 질투가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어서 아름다운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 새로 사귄 친구 때문에 오랜 친구를 버리는 사람, 악한 사람의 영광을 부러워하는 사람, 사람을 죽일 권한을 가진 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처음에는 서로 다른 문제처럼 보입니다. 질투와 성적 욕망은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이고, 친구와의 관계는 신뢰의 문제이며, 권력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사회적인 판단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장은 그 모든 상황에서 비슷한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며, 그 마음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나요?

그런데 이 장의 후반부에 이르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의논하고, 깨달음 있는 사람과 생각을 나누며, 의로운 사람들을 식사 벗으로 삼으라는 권고가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는 가까이해야 할 사람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99장 본문 읽기 →

사랑하는 아내를 질투하는 사람이 오히려 관계를 해친다

집회서 9:1–2 본문 →

네 품의 아내를 질투하지 마라. 네게 해가 될 나쁜 가르침을 주지 마라.집회서 9:1 · 본디새김

집회서는 결혼 생활에 대한 경고를 아내의 잘못이 아니라 남편의 질투에서 시작합니다.

본문은 아내가 실제로 부정한 행동을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아내를 질투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네 품의 아내」라는 표현은 부부의 가까운 관계를 나타냅니다. 낯선 사람이나 멀리 떨어진 여자가 아니라, 자신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아내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바로 그 친밀한 관계 안에서 질투에 사로잡힙니다.

질투는 때때로 사랑의 증거처럼 여겨집니다.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잃을까 두렵고, 그래서 상대방의 행동을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회서는 그 질투가 관계를 해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문맥상 남편이 질투로 인해 아내에게 자신을 해치는 행동 방식을 가르치게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계속 감시하거나 시험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는 태도가 관계 전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처음에 지키려 했던 친밀함 자체가 손상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심리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질투가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르칠 수 있다는 표현은 이와 같은 읽기를 가능하게 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불신과 질투도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방향이 바뀝니다.

여자에게 네 마음을 주어, 그가 네 힘 위에 올라서게 하지 마라.집회서 9:2 · 본디새김

1절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통제하려는 질투가 문제였습니다. 2절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힘을 지배하게 되는 상황을 경계합니다.

두 구절을 함께 읽으면 긴장이 생깁니다.

한편으로는 상대방을 질투하여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과 힘을 무방비로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집회서는 남성 독자를 전제하고 있으며, 2절에는 여성이 남성의 힘을 지배하는 일을 위험으로 보는 고대의 가부장적 관점이 분명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의 역사적 특징이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거나 여성의 영향력을 본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해야 한다는 보편적 명령의 근거는 아닙니다.

그리스어에서 「네 힘 위에 올라서게」(ἐπιβαίνω)라는 표현은 상대방 위에 발을 올려놓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지배와 종속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경계하는 관계의 모습은 친밀함이 한 사람의 판단과 삶을 압도하는 상황입니다.

상대방을 잃을까 두려워 그를 통제하려 하는 것도, 상대방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신의 판단을 잃는 것도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올무는 발을 붙잡기 전에 시선을 붙잡는다

집회서 9:3–6 본문 →

몸을 파는 여자와 만나지 마라. 그의 올무에 빠질까 두렵다.집회서 9:3 · 본디새김

올무는 짐승을 붙잡기 위해 설치하는 덫입니다. 덫에 걸리는 짐승은 처음부터 자신이 붙잡히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먹이나 지나갈 길에 주의를 기울이다가 덫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 비유는 어떤 관계가 처음에는 매력적이거나 별다른 위험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나중에는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3절에는 몸을 파는 여자가, 4절에는 노래하는 여자가, 5절에는 처녀가, 6절에는 창녀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동일한 집단이 아닙니다.

노래하는 여자와 오래 어울리지 마라. 그의 꾀에 붙잡힐까 두렵다.집회서 9:4 · 본디새김

특히 4절의 「노래하는 여자」를 곧바로 성매매 여성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음악과 노래는 잔치와 연회, 사적인 모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습니다. 여성 공연자가 그러한 자리에서 노래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래하는 여성이 반드시 성매매에 종사했다고 볼 근거는 이 구절에 없습니다.

여기서 경계하는 것은 노래 자체가 아닙니다. 상대방의 매력에 사로잡히면서 자신의 판단을 잃을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노래하는 여성을 유혹하는 자로 묘사하는 당시의 남성 중심적 시각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독자가 이 구절을 여성 공연자 일반에 대한 불신으로 확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처녀를 유심히 살펴보지 마라. 그로 인한 벌에 걸려 넘어질까 두렵다.집회서 9:5 · 본디새김

「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에피티미온(ἐπιτίμιον)은 형벌이나 벌금, 부과된 금전적 책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처녀를 눈여겨보는 행동이 부적절한 관계로 이어져 법적 처벌을 받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혼인과 관련된 금전적 책임을 지게 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22:16–17과 신명기 22:28–29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남자에게 일정한 책임을 부과하는 규정이 나옵니다. 이러한 법적 배경은 5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집회서 9:5는 정확히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어떤 처벌이 부과되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어느 한 상황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관심이나 욕망을 사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면 다른 사람의 삶과 사회적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6절은 그 결과를 경제적인 차원으로 확대합니다.

네가 물려받은 재산을 잃지 않도록 창녀들에게 네 마음을 주지 마라.집회서 9:6 · 본디새김

상속 재산은 단순히 지금 자신의 손에 있는 돈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전 세대에서 물려받은 것이며, 다음 세대의 생계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잠언 5:8–10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부적절한 성적 관계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재산과 수고의 결실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경고가 등장합니다.

다만 집회서의 경고는 여성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이 직접 명령을 내리는 대상은 남성 독자입니다. 그의 선택과 절제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마음은 자신이 오래 바라보는 것을 따라갈 수 있다

집회서 9:7–9 본문 →

도시의 골목길에서 두리번거리지 말고, 그 도시의 인적 없는 곳을 헤매지 마라.집회서 9:7 · 본디새김

앞에서는 사람을 직접 만나는 일을 경계했는데, 이제는 도시 안에서 어디를 바라보고 어디로 가는지에 주목합니다. 사람은 어떤 잘못된 관계에 갑자기 뛰어드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특정한 만남을 기대하며 장소를 찾고, 시선을 돌리며, 기회를 탐색합니다.

본문은 특정한 거리의 이름이나 장소의 성격을 밝히지 않습니다. 앞뒤 문맥에서 욕망과 관련된 위험한 만남을 찾아다니는 행동을 경계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8절에서는 시선의 문제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아름다운 여자에게서 눈을 돌리고, 남의 아름다움을 유심히 살펴보지 마라. 여자의 아름다움 때문에 많은 이들이 길을 잃었고, 거기서 사랑이 불처럼 타오른다.집회서 9:8 · 본디새김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은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일과 그것을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 집착하는 일입니다. 본문은 아름다움 자체를 악이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사로잡혀 자신이 지켜야 할 관계와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특히 「남의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은 다른 사람에게 속한 관계의 경계를 암시합니다. 이 표현에는 고대 사회의 여성과 혼인 관계를 바라보던 소유적 관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드러나는 실제적인 경고는 다른 사람과 맺어진 관계를 침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은 처음에는 작게 시작되지만, 조건이 갖추어지면 빠르게 번질 수 있습니다. 집회서는 시선이 단순한 관찰에 머물지 않고 마음의 욕망을 자극할 수 있다고 봅니다.

9절은 그러한 욕망이 자라나는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합니다.

남편 있는 여자와는 아예 함께 앉지 말고, 그와 함께 포도주를 마시며 술판을 벌이지 마라. 네 마음이 그 여자에게 기울고, 네 영이 미끄러져 네가 멸망에 빠질까 두렵다.집회서 9:9 · 본디새김

이 말씀도 결혼한 여성과 같은 식탁에 앉는 모든 상황이 죄라는 보편적 명령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남성 독자가 부적절한 성적 관계로 이어질 수 있는 사적인 친밀함을 추구하는 상황을 경계합니다.

그중 중요한 표현은 「네 마음이 그 여자에게 기울고」라는 말입니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본래의 자리에서 방향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의 결혼 관계를 무너뜨리거나 삶을 파괴하려는 의도로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선택들이 쌓이면서 마음의 방향이 바뀔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네 영이 미끄러져」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미끄러진다는 것은 발을 딛고 있던 자리에서 균형을 잃는 것입니다.

이 흐름을 보면 집회서는 잘못된 행동이 일어나는 마지막 순간에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 행동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과정에도 주목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불처럼 타오르는 욕망의 이야기를 마친 뒤 갑자기 새로운 비유를 제시합니다.

앞에서는 포도주를 마시던 술자리가 위험한 관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오래 묵은 포도주가 좋은 우정을 설명하는 이미지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7:6–23에서도 비슷한 전개가 나타납니다. 한 젊은이가 거리와 골목을 지나고, 유혹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며, 마침내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알지 못한 채 따라갑니다. 집회서 9장은 그러한 이야기를 짧은 명령들로 압축해 놓은 것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5:27–28이 성적 잘못을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만 한정하지 않고, 욕망을 품고 바라보는 마음의 문제까지 다룹니다. 이는 집회서 9:7–9와 주제적으로 연결되지만, 예수님께서 집회서의 해당 구절을 직접 인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새 포도주보다 오래 묵은 포도주가 좋은 이유

집회서 9:10 본문 →

오랜 친구를 버리지 마라. 새로 사귄 친구는 그와 맞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 친구는 새 포도주다. 오래 묵으면 너는 기쁘게 그것을 마실 것이다.집회서 9:1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의 경고들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1–9절은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새 포도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성숙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새로 만난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서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친밀함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오랫동안 이어 온 관계의 가치를 쉽게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앞의 9절에서는 포도주를 함께 마시는 일이 위험한 친밀함의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시간이 지나 성숙한 포도주가 깊은 우정의 즐거움을 상징합니다.

집회서는 인간관계를 즉각적인 감정의 강도로만 평가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과 처음 만났을 때 강하게 끌릴 수 있습니다. 그 사람과 대화하는 일이 즐겁고,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밀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만으로 깊은 신뢰가 형성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랜 친구와의 관계에는 시간이 남긴 것이 있습니다.

서로의 성품을 알게 된 경험, 어려운 때에 보인 태도, 반복해서 확인된 신뢰가 쌓여 있습니다. 새로운 친구에게는 아직 그런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8절에서는 아름다움에서 시작된 애정이 불처럼 타오릅니다. 10절에서는 오랜 우정이 포도주처럼 성숙합니다.

불은 빠르게 타오릅니다.

포도주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불처럼 강렬한 감정이 반드시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특별하지 않아 보였던 우정이 오랜 시간에 걸쳐 깊은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관계의 가치는 처음 얼마나 강하게 끌렸는지가 아니라, 시간이 흐른 뒤에도 얼마나 깊고 기쁘게 함께할 수 있는지에서 드러납니다.

다만 이 말씀을 오랫동안 이어진 관계라면 아무리 해롭더라도 유지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신뢰할 수 있는 오랜 친구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지, 폭력이나 착취가 있는 관계를 무조건 지속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빛나는 영광만 보고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라

집회서 9:11–12 본문 →

죄인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마라. 그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네가 모르기 때문이다.집회서 9:11 · 본디새김

앞에서는 아름다움을 유심히 살펴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악한 사람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가진 부와 권력, 명예를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은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불의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누리는 것처럼 보일 때 그런 마음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집회서는 그 사람이 누리는 영광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이 언제 어떻게 몰락할지 예언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인이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가 그 사람의 마지막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지금 보이는 성공은 그 삶 전체가 아닙니다.

시편 73편은 이 문제를 더욱 깊이 다룹니다. 시편의 화자는 악한 사람들이 평안하고 형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혼란에 빠집니다. 그들의 현재 모습만 바라볼 때에는 악한 삶이 더 유리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73:17에서는 그들의 마지막을 깨닫는 일이 시각을 바꾸는 전환점으로 나타납니다.

12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기쁨을 기뻐하지 마라. 그들이 하데스에 이르기까지 결코 의롭게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기억해라.집회서 9:12 · 본디새김

11절에서 죄인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여기서는 경건하지 않은 삶이 누리는 즐거움에 동참하며 그것을 바람직한 삶으로 여기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들의 즐거움이 자신의 욕망과 판단을 지배하도록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어 문장에는 「하데스에 이르기까지」라는 시간적 표현과 강한 부정 표현이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벌을 면한 채 삶을 마칠 수는 없다는 심판의 경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서로 관련되지만 초점이 다릅니다. 하나는 의로움에 대한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죄에 따르는 책임과 심판입니다. 이 짧은 구절만으로 죽음 이후의 심판 방식이나 세부적인 교리를 확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순간적인 끌림만 봅니다.

죄인의 영광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현재의 성공만 봅니다.

두 사람 모두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삶 전체를 판단하려는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어떤 삶을 부러워하기 전에, 그 삶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데스는 그리스어 하데스로, 죽은 자들이 이르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어 구약에서는 히브리어의 스올을 옮길 때에도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데스를 곧바로 후대 기독교의 영원한 형벌 장소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가퀴 위를 걷는 사람은 발밑을 보아야 한다

집회서 9:13 본문 →

사람을 죽일 권한이 있는 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라. 그러면 죽음의 공포에 마음 졸일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그에게 다가가더라도 그가 네 목숨을 빼앗지 않도록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네가 올무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도시들의 성가퀴 위를 걷고 있음을 알아라.집회서 9:13 · 본디새김

여기서 위험은 실제적인 권력입니다.

「사람을 죽일 권한이 있는 자」는 단순히 성질이 사납거나 폭력적인 사람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치적 권력자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인물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통치자나 권력자의 가까운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은 기회를 얻는 일이기도 했지만,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베푸는 호의를 얻을 수도 있지만, 그의 분노를 사거나 권력 다툼에 휘말릴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불의한 권력자의 요구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권력자가 가진 위험한 힘을 현실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그가 행할 수 있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위험한 권력자에게 가까이하지 말라는 13절도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모든 행동을 금지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올무와 성가퀴라는 두 이미지가 함께 사용됩니다. 올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위험을 나타냅니다. 성가퀴 위를 걷는 모습은 발을 잘못 디디면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는 불안정한 위치를 나타냅니다.

3절에서는 성적인 유혹과 관련된 올무였습니다. 13절에서는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과 관련된 올무입니다. 이는 욕망과 권력이 모두 인간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공통점을 보여 줍니다.

권력자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자신도 그와 같은 권력을 가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권력에 가장 쉽게 노출되는 위치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위험한 자리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과 그 위험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조금 더 깊이

성가퀴는 성벽 위에 설치된 방어 시설의 일부로, 적을 향해 몸을 숨기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조물입니다. 그 위를 걷는다는 것은 높은 성벽의 위험한 자리에 올라가 있다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약 전체에는 권력 앞에서 정의를 요구하고 약한 사람을 보호하라는 명령도 함께 존재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삶을 단순히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을 피하는 삶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의논하고,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이야기하라

집회서 9:14–16 본문 →

힘닿는 대로 이웃을 잘 헤아리고, 지혜로운 이들과 의논해라.집회서 9:1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위험한 사람에게 가까이하지 말라는 명령이 계속되었습니다.

사람을 신중하게 판단한다는 것이 반드시 사람을 멀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잘 알아 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웃을 대할 때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가능한 한 그를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라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혼자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의 말에 지나치게 끌리고 있을 때, 그 관계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의논한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15절은 의논의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또 깨달음 있는 이들과 생각을 나누고, 네 모든 이야기는 지극히 높은 이의 율법 안에서 해라.집회서 9:15 · 본디새김

이 구절을 일상적인 모든 대화에서 반드시 성경 구절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집회서는 앞에서 인간관계와 재산, 여행과 권력에 관한 다양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삶의 모든 대화를 하나님의 가르침과 무관하게 하지 말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떤 생각을 나누든, 그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혜로워 보이면서도 불의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으면서도 그 능력을 이용해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16절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이 하나의 생활 장면으로 나타납니다.

의로운 사람들을 식사 벗으로 삼고, 주를 경외하는 것을 네 자랑으로 삼아라.집회서 9:16 · 본디새김

9절에서는 남편 있는 여자와 술자리에 앉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관계가 잘못된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섭취하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 앉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생각을 듣는 시간입니다. 그러한 자리가 반복되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가치관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받게 됩니다.

따라서 누구와 식사하는지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어떤 행동이 칭찬받으며, 어떤 삶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지가 그 자리에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는 죄인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6절에서는 주를 경외하는 것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의 영광을 부러워하는 태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 태도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자랑하는지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재산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은 재산을 더 얻기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권력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이 올바른지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식탁은 음식을 나누는 자리일 뿐 아니라, 삶의 방향을 함께 배우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13:20은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는 사람이 지혜로워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집회서 9:14–16에서 누구와 의논하고 식사할 것인지 선택하라는 가르침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잠언 4:23은 모든 지킬 만한 것 가운데 마음을 지키라고 가르칩니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9장은 그 가르침을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 펼쳐 놓습니다.

장인의 손과 지도자의 말은 무엇으로 평가받는가

집회서 9:17–18 본문 →

작품은 장인들의 손길로 칭찬받을 것이고, 백성을 이끄는 이는 지혜롭게 말한다.집회서 9:17 · 본디새김

지금까지는 아내와 친구, 권력자와 이웃의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물건을 만드는 장인의 손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7절은 이 장이 강조해 온 판단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고 자랑하더라도 실제로 만든 물건이 부실하다면 좋은 장인으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반대로 잘 만들어진 작품은 그 장인의 기술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이 원리를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에게 적용합니다.

여기서 지도자의 말은 단순히 말을 유창하게 하거나 청중을 감동시키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말로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중요한 문제를 판단하며, 공동체를 이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에는 지혜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장인의 손이 작품의 질을 결정하듯, 지도자의 말은 그가 공동체를 얼마나 지혜롭게 이끄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18절은 이러한 말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말 많은 남자는 제 도시에서 두려움의 대상이고, 말을 경솔하게 하는 자는 미움을 받을 것이다.집회서 9:18 · 본디새김

여기서 「말 많은 남자」는 그저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내뱉는 말의 결과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들기도 하지만, 파괴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의 말은 그 사람 혼자만의 생각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해치거나,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거나, 사람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자의 말을 평가할 때에는 그가 얼마나 많이 말하는지보다 그 말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살펴야 합니다.

앞에서는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 때문에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분별하는 지혜는 결국 자신을 분별하는 지혜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결론 — 오래 묵은 포도주를 함께 마시는 사람들

집회서 9:1–18 본문 →

순간의 즐거움만을 위해 가까이하는 관계가 있고, 오랜 시간 신뢰가 쌓이면서 깊은 기쁨을 주는 관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부추기는 만남이 있고, 하나님의 가르침 안에서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만남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집회서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고, 누구에게 마음을 주고, 어떤 관계를 선택하며, 어떤 말을 나누는지가 결국 그 사람의 삶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래된 친구들이 함께 앉은 식탁을 떠올려 봅니다.

그들은 서로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든 모습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지나온 시간은 남아 있습니다. 그동안 서로의 약함을 보았고, 생각이 달라 다투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함께 앉아 오래 묵은 포도주를 마십니다.

그 즐거움은 새롭고 강렬한 자극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계가 비로소 드러내는 깊은 맛에서 나옵니다.

집회서 9장은 그런 기쁨을 소중히 여기라고 가르칩니다.

순간적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것과 오랜 시간 마음을 지켜 주는 것은 다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차이를 알아보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귀해지는 것을 선택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