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왕좌보다 높은 것, 교만보다 깊은 것

어떤 사람은 왕좌에 앉아 수많은 사람을 다스립니다. 어떤 사람은 종의 신분으로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큰 재산을 가졌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지만 지혜롭습니다.

이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일까요?

집회서 10장은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먼저 지도자의 지혜가 도시 전체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왕좌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온유한 사람을 앉히신다고 선언합니다. 이어서 자유인들이 지혜로운 종을 섬기는 뜻밖의 장면까지 보여 줍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자신을 높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교만을 버리라는 가르침과 자신을 존중하라는 명령이 같은 장에 등장할 수 있을까요?

교만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에게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치가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올바르게 아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참된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요?

이 장은 왕의 다스림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죽음과 하나님의 창조, 민족들의 흥망과 사회적 신분을 차례로 살펴본 뒤,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긴 논의를 관통하는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주를 경외하는가요.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1010장 본문 읽기 →

왕의 지혜는 어떻게 도시의 운명이 되는가

집회서 10:1–3 본문 →

지혜로운 재판장은 자기 백성을 가르쳐 바로잡을 것이고, 깨달음 있는 이의 다스림에는 질서가 잡혀 있을 것이다.집회서 10:1 · 본디새김

집회서는 교만을 직접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좋은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줍니다. 훈육하고 교육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재판장의 임무를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지혜로운 지도자가 있는 공동체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규칙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고, 공동체의 일들이 혼란스럽게 흩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지도자 개인의 뛰어난 능력으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르게 정돈하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백성의 재판장이 어떠하면 그를 섬기는 일꾼들도 그러하고, 도시를 이끄는 이가 어떠하면 그 안에 사는 모든 이들도 그러하다.집회서 10:2 · 본디새김

지도자의 성품과 행동이 그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잘못이 곧바로 모든 백성의 잘못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공동체 구성원 각자에게도 책임과 선택이 있습니다.

재판장이 공정한 판단을 중요하게 여기면 그의 지시를 수행하는 관리들도 그 기준에 따라 일하도록 요구받습니다. 반대로 재판장이 불의를 묵인하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 아래의 사람들도 그런 행동을 허용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3절은 이 원리를 도시 전체의 생존 문제로 발전시킵니다.

배우지 못한 왕은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할 것이고, 권세 있는 이들의 깨달음으로 도시에 사람들이 살게 될 것이다.집회서 10:3 · 본디새김

여기서 「배우지 못한 왕」은 단순히 글을 읽지 못하거나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왕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왕의 어리석음이 그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은 자신을 따르는 백성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열왕기상 12:1–19의 르호보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르호보암은 백성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백성을 더욱 강하게 다스리라는 젊은 측근들의 조언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북쪽 지파들이 그의 통치에서 이탈했습니다.

물론 집회서 10:3이 르호보암을 직접 가리킨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역사 이야기는 지도자의 어리석음이 공동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좋은 지도자의 지혜는 그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지가 아니라, 그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왕이 도시의 운명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친다면, 왕은 자기 권력의 궁극적인 주인일까요?

왕의 손보다 더 큰 손

집회서 10:4–5 본문 →

땅을 다스릴 권한은 주의 손에 있고, 주는 제때에 알맞은 이를 일으켜 그 땅 위에 세울 것이다.집회서 10:4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왕의 권력을 상대화합니다.

왕이 사람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역시 다스림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의 권력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본문은 지도자의 자격을 단지 강력한 군사력이나 높은 신분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그 일을 감당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을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통치자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승인하셨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뒤에서 하나님께서 통치자의 왕좌를 무너뜨리시고 교만한 민족들을 심판하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권력의 최종적인 주권이 있다는 사실과 어떤 통치자의 모든 행동이 의롭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사람이 잘되는 것은 주의 손에 있고, 주는 서기관의 얼굴에 자기 영광을 얹을 것이다.집회서 10:5 · 본디새김

4절과 5절은 모두 「주의 손에 있고」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통치의 권한뿐 아니라 개인의 성공과 명예도 다스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그런데 왜 하필 서기관의 얼굴에 영광을 얹으신다고 할까요?

서기관은 단순히 글을 베껴 쓰는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서와 율법, 지식과 교육을 다루는 역할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집회서 38:24–39:11에서도 서기관은 율법을 연구하고 옛사람들의 지혜를 탐구하며, 통치자들 앞에서 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영광은 왕좌에 앉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영광을 주실 수 있습니다.

교만은 개인의 성격 문제를 넘어 나라를 무너뜨린다

집회서 10:6–8 본문 →

어떤 잘못 때문에라도 이웃에게 앙심을 품지 말고, 어떤 일도 오만하게 행하지 마라.집회서 10:6 · 본디새김

본문은 왕과 국가에 관한 이야기에서 갑자기 이웃과의 관계로 시선을 옮깁니다.

교만은 왕좌에 앉은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도 누군가 자신에게 잘못했을 때 앙심을 품고, 그 사람을 향해 오만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경계하는 것은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잘못을 이유로 앙심을 품고 오만하게 행동하는 태도입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었을 때 정당한 해결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이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모욕하거나 해칠 권리를 주지는 않습니다.

교만은 주와 사람들 앞에서 미움을 받고, 불의한 짓은 그 둘 모두에게 잘못이 될 것이다.집회서 10:7 · 본디새김

교만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는 내면의 생각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낮추고, 그들의 권리를 무시하며,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가져오려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만은 불의와 연결됩니다.

7절의 두 번째 문장은 문법적으로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불의한 행위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잘못으로 여겨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교만한 사람이 양쪽 모두에게 잘못을 저지른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은 교만과 불의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불의와 오만한 행위와 재물 때문에 한 민족에게서 다른 민족에게로 넘어간다.집회서 10:8 · 본디새김

앞에서 지도자의 지혜가 도시를 살린다고 했다면, 이제는 불의와 오만이 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재물이 불의와 오만한 행위에 결합하는 상황입니다.

돈은 사람들의 판단을 왜곡할 수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법과 제도를 이용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쌓이면 나라의 질서 자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지금 어떤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고 해서 그 다스림이 영원히 자기 민족의 소유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신들의 왕조와 성읍이 계속 유지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차례로 멸망했습니다(열왕기하 17장; 25장).

본문은 국가의 모든 흥망을 설명하는 역사 법칙을 제시하기보다, 불의와 오만과 재물의 남용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도덕적 원리를 강조합니다.

교만은 자신을 실제보다 크게 생각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지만, 권력과 결합하면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집회서는 여기서 교만한 왕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설명하는 일을 잠시 멈춥니다. 대신 왕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은 왕이지만 내일은 죽는 사람

집회서 10:9–11 본문 →

흙과 재가 어찌 교만한가? 그가 살아 있을 때 내가 그의 창자를 내던졌기 때문이다.집회서 10:9 · 본디새김

흙과 재는 인간의 유한함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2:7에서는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창세기 3:19에서는 사람이 흙에서 나왔으며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도 창세기 18:27에서 자신을 먼지와 재에 비유합니다.

따라서 집회서가 사람을 흙과 재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에게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자기 힘으로 존재하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표현입니다.

의사는 오랜 병을 비웃고, 오늘 왕인 이도 내일은 죽을 것이다.집회서 10:10 · 본디새김

왕권이 죽음을 막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자신의 생명을 무한히 연장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 기는 것들과 들짐승과 구더기들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10:11 · 본디새김

상속은 보통 누군가가 남긴 재산을 물려받는 일을 뜻합니다. 재산을 물려받는 언어가 죽음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 것입니다.

왕이 평생 수많은 재산과 영토를 차지했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그가 가진 소유가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못합니다. 결국 그의 육체도 다른 사람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부패합니다.

전도서 3:19–20 역시 사람과 짐승 모두 죽으며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시편 49:16–20도 부자가 죽을 때 자신의 영광과 재산을 가져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이 마치 영원히 다스릴 수 있는 존재처럼 행동하는 것, 그것이 교만의 어리석음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런데 9절의 두 번째 문장은 어렵습니다. 현존 그리스어 본문에는 실제로 1인칭 동사 에립사, 곧 ‘내가 던졌다’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그 말을 하는 화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이라고 확정하거나, 어떤 특정한 인물이 다른 사람의 창자를 내던졌다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 표현은 인간 신체의 부패나 내장의 불결함을 강조하는 문맥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난해한 구절을 문맥에 따라 해석한 것이지 그리스어 문장 자체가 분명하게 말해 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불확실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10절에서도 첫 문장의 정확한 뜻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이 따르는 그리스어에서는 의사가 오랜 병을 비웃는 형태로 읽힙니다. 그러나 병이 오히려 의사를 조롱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여지도 제기되는 구절입니다. 후자로 읽으면 의사의 능력을 넘어서는 질병의 위력이 강조됩니다. 전자로 읽으면 의사가 오랜 병을 가볍게 여기는 장면이 되지만, 그것이 뒤의 왕의 죽음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를 의사의 태도에 관한 특별한 교훈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날 때 시작된다

집회서 10:12–13 본문 →

사람의 교만은 주에게서 떠나는 데서 시작된다. 그의 마음은 자기를 만든 이에게서 떠났다.집회서 10:12 · 본디새김

교만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행동 이전에, 자신을 창조하신 분과의 관계가 어긋나는 일로 설명됩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지혜를 배우고, 재산을 모으고, 사람들을 이끌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능력을 갖춘 자신이 누구에게 생명을 받았는지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때 자신의 능력은 하나님께 받은 삶 안에서 사용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본래 우월하다는 증거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왕권이 있으면 자신이 본래 높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재물이 많으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가 자신을 만든 분에게서 마음을 돌리는 것, 그것이 교만의 시작입니다.

죄가 교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붙드는 자는 가증한 것을 비처럼 쏟아 낼 것이다. 이 때문에 주는 놀랄 만한 재앙들을 내렸고, 그들을 완전히 무너뜨렸다.집회서 10:13 · 본디새김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나는 행위가 죄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렇게 형성된 교만이 다시 여러 악한 행동을 낳는다는 흐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13절의 「그것」이 문법적으로 죄와 교만 가운데 무엇을 가리키는지 완전히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개념이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릴 때 하늘에서 물방울이 계속 쏟아지듯, 교만을 붙든 사람에게서 악한 행동들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만은 더 이상 마음속에 숨어 있는 생각이 아닙니다. 밖으로 드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행동이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들의 행동을 영원히 방치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오만과 불의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난이 그 피해자들의 교만 때문에 발생했다는 설명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신학적 원리를 선언하는 것이지, 각각의 재난에 대한 원인을 판정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닙니다.

왕좌를 무너뜨리고 낮은 사람을 심으시는 하나님

집회서 10:14–18 본문 →

주는 통치자들의 왕좌를 무너뜨렸고, 그들 대신 온유한 이들을 앉혔다.집회서 10:14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권력자를 단지 다른 강력한 권력자로 교체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은 다른 사람을 억압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유함이 통치자의 중요한 자질로 제시됩니다.

그런데 15절에서는 비유가 달라집니다.

주는 민족들의 뿌리를 뽑았고, 그들 대신 낮은 이들을 심었다.집회서 10:15 · 본디새김

왕좌는 사람이 올라가 앉는 자리입니다. 왕이 바뀌면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는 나무가 땅에 깊이 박혀 있는 부분입니다.

뿌리가 튼튼하면 나무는 쉽게 쓰러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뿌리가 뽑히면 나무는 살아갈 기반을 잃습니다. 오랫동안 견고해 보였던 국가와 민족의 기반 자체를 뒤흔드시는 것입니다.

교만한 민족들은 이미 땅에 뿌리내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낮은 사람들은 그런 기반을 갖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견고해 보이는 뿌리를 뽑으시고, 낮은 사람들을 새롭게 심으십니다.

그러나 16–17절에서는 심판의 이미지가 더욱 강해집니다.

주는 민족들의 땅을 뒤엎었고, 땅의 기초에 이르기까지 그 땅들을 파괴했다.집회서 10:16 · 본디새김
그 땅에서 그들을 말려 버리고 그들을 멸망시켰으며, 땅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을 끊었다.집회서 10:17 · 본디새김

한때 강력했던 민족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영원히 존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더라도, 그들의 땅과 권력과 명성이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살아 있는 동안 높은 자리를 누리는 것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업적이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회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억까지 끊으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영원한 영광을 확보할 수 없다는 가장 강한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만은 사람들을 위해 창조되지 않았고, 격한 분노도 여자들에게서 태어난 이들을 위해 창조되지 않았다.집회서 10:18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앞의 심판 이야기를 창조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교만은 인간에게 본래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자들에게서 태어난 이들」은 특별히 여성의 자녀만을 구별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인간의 출생을 통해 모든 사람의 유한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욥기 14:1에서도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날이 짧고 괴로움이 많다고 묘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땅을 다스릴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집회서 10장은 그 다스림이 교만과 불의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을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수단으로 바꾸는 것은 창조주께서 맡기신 역할과 어긋납니다.

하나님께서 교만을 심판하시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와 책임을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사무엘상 2:7–8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와 깊이 연결됩니다. 한나는 여호와야훼께서 사람을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시며, 가난한 사람을 먼지에서 일으켜 귀족들과 함께 앉히신다고 노래합니다. 집회서 10:14는 이러한 역전의 이미지를 왕좌에 적용합니다. 예레미야 1:10에는 뽑고 무너뜨리고 멸망시키는 일과 세우고 심는 일이 함께 등장합니다. 예언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선포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집회서 10:15도 그와 비슷한 두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다니엘 4:28–37에서도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이룬 위대한 바벨론을 자랑하다가 낮아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 이야기는 하늘의 권세가 인간 왕의 권세보다 높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누가복음 1:51–53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내리시며, 낮은 사람들을 높이신다고 노래합니다. 이는 집회서 10:14–15와 매우 가까운 주제적 연결입니다. 다만 마리아가 이 구절을 직접 인용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본문은 한나의 노래와 같은 구약의 역전 신학을 공유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5–11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 역시 집회서 10장을 직접 해설하는 구절은 아니지만, 참된 높아짐이 자기 과시와 지배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주제를 더욱 깊이 있게 보여 줍니다.

누가 귀한 사람이고, 누가 천한 사람인가

집회서 10:19–25 본문 →

어떤 후손이 귀한가? 사람의 후손이다. 어떤 후손이 귀한가? 주를 경외하는 이들이다. 어떤 후손이 천한가? 사람의 후손이다. 어떤 후손이 천한가? 계명을 어기는 이들이다.집회서 10:19 · 본디새김

인간의 출신 자체가 존귀함과 비천함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같은 인간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과 계명을 어기는 삶이 구별됩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의 모든 사회적 권리의 평등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구절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귀함을 혈통이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와 연결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형제들 가운데서는 그들을 이끄는 이가 귀하게 여겨지고, 주의 눈에는 주를 경외하는 이들이 귀하게 여겨진다.집회서 10:20 · 본디새김

본문은 인간 사회의 지도자를 존중하는 일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회적인 명예와 하나님 앞에서의 존귀함이 구별됩니다.

부유한 이나 이름난 이나 가난한 이나, 그들의 자랑은 주를 경외하는 것이다.집회서 10:22 · 본디새김

부유한 사람은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하나님 앞에서 더 높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 앞에서 더 낮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부자를 낮추시고 모든 가난한 사람을 높이신다는 기계적인 법칙이 본문의 핵심은 아닙니다. 본문은 주를 경외하는 부유한 사람도 존중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부유함이나 가난함 자체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가입니다.

깨달음 있는 가난한 이를 욕보이는 것은 옳지 않고, 죄인을 높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집회서 10:23 · 본디새김

이것은 단순한 동정의 권고가 아닙니다. 평가 기준을 바로잡으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재산과 지위가 눈에 잘 띄기 때문에 그것을 그 사람의 가치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혜와 올바른 삶은 외적인 형편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대신과 재판장과 권세 있는 이는 높임을 받을 것이지만, 그들 가운데 아무도 주를 경외하는 이보다 크지 않다.집회서 10:24 · 본디새김

집회서는 공적인 직책에 합당한 존중을 인정합니다. 대신과 재판장과 권세 있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므로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25절에서 이 원리는 당시의 사회적 위계를 뒤집는 장면으로 나타납니다.

자유인들이 지혜로운 집안 종을 섬길 것이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투덜거리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10:25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자유인과 종은 법적·사회적 지위가 같지 않았습니다. 자유인은 다른 사람에게 예속되지 않은 사람이었고, 종은 주인의 가정에 속하여 섬기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혜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자유인도 지혜로운 종에게 배울 수 있고, 그를 섬길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사회적 신분보다 그가 가진 지혜의 가치를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집회서 10:25를 모든 종의 법적 해방을 요구하는 명령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여전히 고대의 신분제도를 전제합니다. 그러나 그 제도 안에서 매우 중요한 역전을 보여 줍니다. 낮은 신분에 있는 사람도 지혜로 인해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높다고 여기는 자리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귀한 자리는 언제나 일치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은 잠언 17:2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슬기로운 종이 부끄러운 일을 하는 아들을 다스리고 형제들 가운데서 유산을 나눠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 모두 신분의 차이가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자신을 높이지 말라는 가르침이 자신을 존중하라는 명령으로 바뀌다

집회서 10:26–29 본문 →

네 일을 하면서 지혜로운 체하지 말고, 막다른 처지에 놓였을 때 스스로를 높이지 마라.집회서 10:26 · 본디새김

본문은 다시 일상의 노동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 실제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과 지혜로운 사람처럼 보이려고 행동하는 것은 다릅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결과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더 많은 관심을 둘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지 않고 허세를 부릴 수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집회서는 그러한 자기 과시를 경계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이나 자기를 높이면서도 빵이 모자라는 사람보다 낫다.집회서 10:27 · 본디새김

본문은 모든 가난한 사람이 게으르거나 허영심 때문에 가난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제적인 노동보다 자신의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를 문제 삼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뜻밖의 말을 합니다.

얘야, 온유하게 너 자신을 높이고, 네 값어치에 걸맞게 자신을 존중해라.집회서 10:28 · 본디새김

따라서 본문은 자신을 실제보다 크게 평가하지도 말고, 실제보다 하찮게 평가하지도 말라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실제보다 높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도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겸손은 자신에게 아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가치를 지닌 존재인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정확하게 아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갖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죄짓는 자를 누가 의롭게 하겠느냐? 자기 생명을 욕보이는 자를 누가 높이겠느냐?집회서 10:29 · 본디새김

집회서는 교만 때문에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는 행동을 경계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하찮게 만드는 행동 역시 문제 삼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이 자신의 존재 전체를 무가치하게 만든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하찮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종은 낮은 사회적 신분에 있다는 이유로 자신이 지혜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실제적인 가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과장하지도 멸시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사람의 가치도 높아지는가

집회서 10:30–31 본문 →

가난한 이는 자기 지식 때문에 높임을 받고, 부유한 이는 자기 재산 때문에 높임을 받는다.집회서 10:3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인간 사회의 현실을 매우 간결하게 묘사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근거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사회가 실제로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과 집회서가 강조하는 올바른 평가 기준 사이의 긴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산만으로 그 사람이 지혜롭거나 의롭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가난할 때 높임을 받는 이는 부유할 때 얼마나 더 높임을 받겠느냐? 부유할 때도 높임을 받지 못하는 이는 가난할 때 얼마나 더 그러하겠느냐?집회서 10:31 · 본디새김

가난한데도 존중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재산이 없다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존중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부유해졌을 때에는 사회적으로 더욱 큰 존중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재산이 많은데도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재산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도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재산마저 없다면 더욱 낮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본문은 재산이 사람의 평가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재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가치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앞선 문맥을 따라 읽으면 지혜와 깨달음, 주를 경외하는 태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부유한 사람도 가질 수 있고 가난한 사람도 가질 수 있습니다. 반면 재산은 있을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결론 — 지혜로운 종 앞에 서 있는 자유인들

집회서 10:1–31 본문 →

집회서 10장은 왕좌에서 시작했지만, 독자의 시선을 마침내 지혜로운 종에게로 옮겨 놓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왕도 교만하면 무너질 수 있고, 낮은 자리에 있는 종도 지혜로우면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임을 알기에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자신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임을 알기에 스스로를 멸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25절의 짧은 장면 속에 남습니다.

자유인들이 지혜로운 종을 섬깁니다.

아무도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의 신분을 모르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지혜를 알아보기 때문에 섬깁니다.

집회서 10장이 보여 주는 참된 영광은 남들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사람의 가치를 드러내고, 그 지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기꺼이 서로를 존중하는 데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