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서로의 아름다움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문밖에 서 있습니다. 밤이 깊었고, 그의 머리카락은 이슬에 젖었습니다. 그는 여자를 부르며 문을 열어 달라고 청합니다.
여자는 그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이미 옷을 벗고 발을 씻었습니다. 다시 일어나 문을 여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집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남자가 문틈으로 손을 뻗습니다.
그제야 여자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급히 일어나 문을 열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떠난 뒤입니다.
여자는 그를 찾아 밤거리로 나갑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뿐 아니라, 도시의 파수꾼들에게 맞고 상처까지 입습니다.
아가 4장의 마지막에서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동산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5장은 남자가 그 초대에 응답하여 동산에 들어왔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랑의 기쁨이 이루어진 듯한 순간, 시는 갑자기 문이 닫힌 밤으로 옮겨 갑니다.
아가 5장은 사랑하는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을 언제나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같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장은 사랑의 상실이나 후회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인이 얼마나 특별한지 질문받습니다. 그러자 그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씩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찾지 못하고 상처 입었던 여자가, 이제 누구보다 생생하게 그를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은 눈앞에 없지만, 여자의 말 속에서는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내 동산으로 왔다 — 충만한 기쁨에서 갑자기 바뀌는 장면
「내 동산으로 왔다, 나의 누이, 신부야. 내 몰약을 내 향료와 함께 거두었다. 내 벌집을 내 꿀과 함께 먹었다. 내 포도주를 내 젖과 함께 마셨다. 먹어라, 벗들아. 마시고 취하여라, 사랑하는 이들아.」아가 5:1 · 본디새김
아가 5장은 사랑하는 남자의 응답으로 시작합니다.
여자가 자신의 동산에 와서 좋은 열매를 먹기를 바란다고 말하자, 남자는 자신이 그 동산에 왔다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여자가 동산 안에 있는 향료와 열매를 연인과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이제는 남자가 그곳의 풍요를 실제로 누렸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반복되는 「내」라는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기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여자의 몸이나 존재에 대한 일방적인 소유권 주장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앞 장에서 여자는 스스로 동산에 연인을 초대했고, 여기서는 남자가 그 초대에 응답하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육체적 친밀함의 성취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동산의 열매를 먹고 향료를 거두는 행위는 연인 사이의 친밀한 만남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만 본문은 구체적인 성적 행위를 직접 묘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행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자가 충만함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무엇인가를 아직 얻지 못해서 갈망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거두고, 먹고, 마셨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 기쁨을 더 넓은 곳으로 펼칩니다. 「먹어라, 벗들아. 마시고 취하여라, 사랑하는 이들아」에서 복수형 명령이 등장합니다. 앞부분은 남자가 신부에게 하는 말이지만, 이제는 여러 사람을 향해 먹고 마시라고 초대합니다.
이 마지막 말을 별도의 합창이나 주변 사람들의 축하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히브리어 본문에는 화자가 바뀌었다는 명시적인 표시가 없으므로, 남자의 발언이 그대로 이어진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사랑의 기쁨이 축하와 풍요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집니다.
동산의 열매와 향료가 가득했던 장면은 사라지고, 잠든 여자와 닫힌 문이 등장합니다. 이 두 장면이 시간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같은 밤의 연속된 사건인지, 서로 다른 경험을 노래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가서의 시적 구성에서는 이러한 급격한 장면 전환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5:1을 사랑의 완성으로 보고, 뒤따르는 모든 일을 그 완성 이후에 실제로 발생한 관계의 파탄으로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열린 동산의 기쁨이 지나가자, 이제는 닫힌 문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입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2:24–25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결합하고 부끄러움 없이 함께 있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아가 5:1의 동산과 열매, 먹고 마시는 기쁨은 인간의 육체적 친밀함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창조 신앙과 주제적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배경으로 생각하면, 아가서의 사랑은 인간이 서로 가까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름답게 노래하면서도 그 가까움이 언제나 자동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신학적 연결은 본문의 직접적인 진술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창조 신앙 안에서 얻는 이해입니다.
잠들어 있었으나 마음은 깨어 있었다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상태에 있다
「나는 잠들어 있었으나 내 마음은 깨어 있었다. 내 연인이 두드리는 소리다. 『내게 문을 열어 주어라, 나의 누이, 나의 벗, 나의 비둘기, 나의 온전한 이여. 내 머리는 이슬로 가득하고, 내 머리카락은 밤의 물방울로 가득하기 때문이다.』」아가 5:2 · 본디새김
어떻게 잠들어 있으면서 마음은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히브리어는 두 상태를 직접 대조합니다. 여기서 마음은 단순히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의식, 의지의 중심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여자는 몸은 잠들어 있지만 자신의 내면은 여전히 깨어 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꿈속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잠든 사람은 현실에서는 움직이지 않지만 꿈속에서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가 3장의 밤중 탐색 장면과 유사한 전개를 고려하면 꿈의 노래로 이해할 가능성은 상당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여자가 꿈꾸고 있었다거나 나중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밤의 경험으로 읽을 길도 남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자가 완전히 무의식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내 연인이 두드리는 소리다」라는 이 짧은 문장에 친밀함이 담겨 있습니다. 문밖의 사람이 누구인지 보기 전에 목소리로 알아봅니다.
네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
남자는 여자를 네 가지 호칭으로 부릅니다. 이 표현들은 서로 다른 관계의 언어를 한 사람에게 모읍니다. 누이는 가족처럼 가까운 친밀함을, 벗은 사랑하는 동반자라는 관계를, 비둘기는 사랑의 노래 안에서 여자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의 「나의 온전한 이」는 온전함이나 완전함을 나타내는 말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여자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라는 선언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특별한 찬사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여러 이름으로 부르면서 자신과 그녀 사이의 친밀함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정작 그 남자는 문밖에 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이슬이 맺혀 있고, 머리카락에는 밤의 물방울이 가득합니다. 이것은 밤의 야외 환경을 매우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그는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남자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어느 곳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문을 열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있다고 해서, 닫힌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자의 대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작은 번거로움이 만들어 내는 망설임
「내 옷을 벗었는데 어찌 그것을 입겠는가? 내 발을 씻었는데 어찌 다시 더럽히겠는가?」아가 5:3 · 본디새김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들었지만 곧바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미 잠자리에 들 준비를 끝냈습니다.
이 대답에는 거창한 이유가 없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남자에게 화가 났다거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녀가 제시하는 이유는 일상적인 불편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왔는데도 여자는 잠시 망설입니다. 사랑이 없어서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곧이어 그녀는 남자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마음이 술렁이고, 결국 일어나 문을 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여자의 망설임을 반드시 죄나 도덕적 실패로 평가할 근거도 없습니다. 본문은 그녀의 행동을 보고하지만, 그녀를 비난하는 해설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독자가 발견하는 것은 사랑의 감정과 순간의 행동이 언제나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아가 5장에는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시지 않습니다. 동산에 들어온 남자를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고, 문밖에서 두드리는 사람을 여호와야훼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아가 5:2의 문을 두드리는 모습은 요한계시록 3:20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시며, 자신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사람과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아가 5:2를 직접 인용한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두 본문의 직접적인 상황은 다릅니다. 아가 5장은 남녀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권고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두 본문 사이에 주제적인 연관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아가 5장의 남자가 원래부터 그리스도를 직접 상징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여자가 문을 늦게 열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죄로 바꾸고, 남자가 떠난 일을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신 사건으로 설명하며, 파수꾼들의 폭력을 영적 징계로 해석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인과관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문틈의 손과 빗장 위의 몰약 — 닿을 듯하다가 사라지는 사람
작은 움직임 하나가 마음을 흔들다
「내 연인이 구멍으로 손을 뻗었다. 내 속이 그 때문에 술렁였다.」아가 5:4 · 본디새김
본문의 표면적 장면에서는 남자가 닫힌 문 너머에서 손을 뻗고, 여자가 그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러자 여자의 몸속에서 반응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속」은 내장이나 몸의 깊은 안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대 히브리어에서는 강렬한 감정이 가슴이나 마음뿐 아니라 내장과 배 속(מֵעֶה)의 움직임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여자가 단순히 머리로 생각을 바꾸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움직임 하나가 몸 깊은 곳까지 흔들어 놓는 경험입니다.
손끝에 남은 향기
「나는 내 연인에게 문을 열어 주려고 일어났다. 내 두 손에서는 몰약이, 내 손가락들에서는 흐르는 몰약이 빗장의 손잡이들 위로 떨어졌다.」아가 5:5 · 본디새김
그런데 이 몰약은 어디서 왔을까요? 남자가 문에 남겨 놓은 것일까요? 여자가 자신의 몸에 바른 향료일까요? 본문은 그 출처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문을 여는 손끝과 빗장이 향기로운 몰약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향기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를 떠올리게 합니다. 몰약은 몸에 지니는 향료이면서 두 사람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몰약이 특별한 위치에 놓입니다. 닫혀 있던 문을 여는 바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이제 사랑하는 사람이 곧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높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 기대가 무너집니다.
문은 열렸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내 연인에게 문을 열었으나, 내 연인은 물러나 떠난 뒤였다. 그가 말할 때 내 넋이 나갔다. 그를 찾아보았으나 만나지 못했다. 그를 불렀으나 그는 내게 대답하지 않았다.」아가 5:6 · 본디새김
문을 열기 전에는 그가 밖에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나니 그가 없습니다.
여자가 기다리던 만남을 위해 행동했을 때, 정작 만날 사람은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가 말할 때 내 넋이 나갔다」는 말은 여자가 넋을 잃거나 기력이 빠지는 듯한 충격을 경험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2절에서 남자가 문을 열어 달라고 했던 말을 가리키는지, 그가 떠나면서 한 말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리지만, 어느 쪽으로 읽든 이어지는 말은 분명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부재가 겹쳐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재와,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부재입니다. 앞에서는 문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자가 부르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아가 3장의 밤과 무엇이 다른가?
아가 3장에서도 여자는 밤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파수꾼들을 지나친 뒤 얼마 되지 않아 연인을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두 장면에 모두 밤의 도시와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여자가 등장하지만, 결말은 같지 않습니다. 아가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간절히 찾으면 반드시 곧바로 만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도시에서 더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구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호르(חוֹר)입니다. 벽이나 문에 난 구멍을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문에 설치된 빗장이나 잠금장치에 접근할 수 있는 구멍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문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 남자가 어떤 방식으로 손을 넣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시라는 문맥에서 손과 구멍을 성적인 이중 의미로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이 유일하거나 확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31:20에서도 깊은 애정과 연민이 몸 안쪽의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6절의 히브리어는 나프시 야츠아 베답베로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그가 말할 때 내 네페쉬가 나갔다’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네페쉬는 반드시 몸을 떠나는 비물질적인 영혼을 뜻하지 않습니다. 생명이나 자기 자신, 깊은 감정과 의식의 중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할 때」는 앞서 2절에서 남자가 문을 열어 달라고 했던 말을 회상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때 그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이미 깊이 흔들렸다는 뜻입니다. 반면 그가 떠나면서 어떤 말을 했고, 여자가 그 말 때문에 넋을 잃었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런 추가적인 발언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남자가 떠나면서 여자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다고 상상할 근거는 없습니다.
파수꾼들은 왜 여자를 때렸는가?
「성안을 돌아다니는 파수꾼들이 나를 발견했다. 그들은 나를 때리고 상처를 입혔다. 성벽을 지키는 자들이 내 몸에서 겉옷을 벗겨 가져갔다.」아가 5:7 · 본디새김
이번에는 단순히 마주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폭력을 시적인 표현이라는 이유로 약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실제로 때리고 상처를 입혔다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겉옷을 벗겨 가져간 행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이 꿈이나 상징적 환상에 속한다고 이해하더라도, 시 안에서 여자가 경험하는 폭력과 모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지키는 자들이 상처를 입히다
파수꾼은 원래 도시를 지키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들은 성안의 질서를 유지하고 위험에 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그들이 오히려 여자에게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이것은 아가 3장의 파수꾼과 더욱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3장에서 여자는 파수꾼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답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때는 여자를 때렸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특히 겉옷을 벗겨 가져간 행동은 심각합니다. 겉옷은 몸을 가리는 의복입니다. 그 옷을 강제로 빼앗는 것은 단순한 재산의 손실을 넘어 노출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특정한 형태의 성폭행이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성적 행위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자를 폭행하고 옷을 빼앗았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명백한 가해 행위가 드러납니다.
여자는 왜 이런 일을 당했을까요? 밤에 홀로 돌아다니는 여자를 수상하게 여겼기 때문일까요? 어떤 규범을 어겼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요?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자가 밤중에 돌아다녔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의 망설임이나 늦은 행동 때문에 파수꾼들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파수꾼들이 여자를 때리고 옷을 빼앗은 일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다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과, 그 상처를 받을 만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아가서는 그 두 가지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사랑의 노래 안에 폭력이 침입하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그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다른 사람들의 폭력을 당합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일과 도시의 파수꾼들이 행사하는 힘 사이에는 아무런 조화도 없습니다.
바로 이 불편함을 남겨 두는 것이 본문을 정직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시는 여기서 여자를 침묵시키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의 예언서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남녀의 사랑이나 혼인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호세아 2장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아가 5장의 폭력과 부재를 그대로 하나님의 행동에 대응시키는 것은 위험합니다. 아가서는 그들이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말할 뿐, 그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으로 앓고 있다고 전하여라
사랑으로 앓는다는 말이 달라졌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맹세로 당부한다. 내 연인을 만나면, 그에게 무엇을 전하겠느냐? 내가 사랑으로 앓고 있다는 것을.」아가 5:8 · 본디새김
여기서 「사랑으로 앓고」라는 표현은 아가 2:5에도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두 구절의 분위기는 전혀 다릅니다.
2장에서 여자는 사랑의 기쁨이 너무 커서 기운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건포도 과자와 사과로 자신을 받쳐 달라고 요청했고, 이어 연인의 팔에 안기는 모습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5장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여자는 그를 찾지 못했으며, 파수꾼들에게 폭력까지 당했습니다.
앞에서는 사랑의 충만함 때문에 앓았다면, 이번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속에서 앓습니다.
이는 아가서가 사랑을 단순한 행복의 감정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랑은 가까이 있을 때 기쁨을 줄 수 있지만, 떨어져 있을 때는 간절한 그리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사랑의 아픔과 폭력으로 인한 상처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여자가 사랑으로 앓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파수꾼들에게 당한 폭력이 사소한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두 경험을 모두 기록합니다.
왜 예루살렘의 딸들은 질문하는가?
「네 연인이 다른 연인보다 무엇이 더 나으냐, 여인들 가운데 아름다운 이여? 네 연인이 다른 연인보다 무엇이 더 낫기에, 네가 우리에게 이토록 맹세로 당부하느냐?」아가 5:9 · 본디새김
이 질문을 조롱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찾느냐고 의심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반드시 조롱이라고 판단할 만한 명시적인 단서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여자를 「여인들 가운데 아름다운 이여」라고 부릅니다.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면서,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얼마나 특별한지 묻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질문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은 여자가 자신의 연인을 왜 이토록 간절하게 찾는지 설명하도록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시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꿉니다.
지금까지 여자는 남자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위치를 찾는 질문이 존재를 묘사하는 말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한 여자가, 이제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가장 생생하게 말하는 사람이 됩니다.
만 명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 — 여자가 바라보는 남자의 아름다움
눈부시고 붉은 연인
「내 연인은 눈부시고 붉으며, 만 명 가운데 눈에 띄는 이다.」아가 5:10 · 본디새김
여자는 연인의 전체적인 인상부터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밝게 빛나는 모습과 붉은 기운을 함께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말이 현대적인 피부색 분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얼굴이나 피부의 빛과 생기를 묘사하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눈에 띄는」(דָּגַל)으로 옮긴 말은 깃발이나 표지와 관련된 어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특별히 두드러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는 시적 표현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딸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입니다. 여자에게 그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사람입니다.
순금 같은 머리와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카락
「그의 머리는 순금이다. 그의 머리카락은 곱슬곱슬하고 까마귀처럼 검다.」아가 5:11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흥미로운 대조가 있습니다. 머리는 순금이라고 하고, 머리카락은 까마귀처럼 검다고 합니다. 따라서 머리가 순금이라는 표현을 단순히 금발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순금은 값지고 빛나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자는 연인의 머리를 귀한 금에 비유하면서 그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반면 머리카락은 검은색으로 구체화되고, 까마귀처럼 검다는 비유는 짙은 색깔을 강조합니다.
여자의 목적은 연인의 외모를 사진처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를 모아 오는 것입니다.
물가의 비둘기 같은 눈
「그의 두 눈은 물길 곁에서 젖으로 몸을 씻고 테두리에 자리 잡고 있는 비둘기들 같다.」아가 5:12 · 본디새김
남자가 여자의 눈을 비둘기라고 불렀던 것처럼, 여자도 남자의 눈을 같은 새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주변 풍경은 더욱 자세합니다.
이것을 눈의 흰 부분과 검은 부분, 눈의 윤기와 균형을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젖의 밝은 색과 비둘기의 모습을 함께 상상하면 눈의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눈을 하나의 평화로운 풍경으로 묘사합니다. 맑은 물길과 비둘기가 어우러진 모습입니다. 여자는 연인의 눈을 단순한 신체 기관이 아니라 아름다운 장면처럼 바라봅니다.
향료밭 같은 뺨과 몰약을 떨어뜨리는 입술
「그의 두 뺨은 향료밭 같고, 향료의 탑들이다. 그의 입술은 흐르는 몰약을 떨어뜨리는 백합들이다.」아가 5:13 · 본디새김
뺨은 향료밭과 향료의 탑에 비유됩니다. 여기서 「향료의 탑들」(מִגְדָּל)로 옮긴 표현은 식물이 자라는 높은 곳이나 향료와 관련된 구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정확한 형태는 불확실하지만, 향기가 풍성하게 모여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가 5장 앞부분에서도 몰약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여자가 문을 열려고 일어났을 때 손가락에서 몰약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남자의 입술에서 몰약이 떨어진다고 묘사합니다.
몰약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친밀함을 떠올리게 하는 향기로 반복됩니다. 여자는 연인의 얼굴을 기억할 뿐 아니라, 그와 가까이 있을 때 경험했을 향기와 감각까지 노래합니다. 이것을 입맞춤의 감각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이 특정한 입맞춤 장면을 직접 기록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설명하는 말은 점점 더 감각적으로 풍성해집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을, 마치 눈앞에서 바라보고 향기를 맡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리움 속에서 그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금과 보석과 상아로 이루어진 몸
「그의 두 손은 타르시시 보석이 박힌 금 원통들이다. 그의 배는 사피르 보석들로 덮인 상아 판이다.」아가 5:14 · 본디새김
「그의 두 다리는 순금 받침들 위에 세운 설화석 기둥들이다. 그의 모습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들처럼 빼어나다.」아가 5:15 · 본디새김
여기서 비유의 세계가 크게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동물과 꽃, 물길과 향료밭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자의 연인은 금과 보석, 상아와 돌기둥으로 묘사됩니다. 사람의 몸이 정교하게 만든 예술품이나 웅장한 건축물처럼 그려집니다.
금과 상아, 보석은 희귀하고 값진 재료입니다. 여자는 연인의 몸을 그런 재료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구조물처럼 묘사합니다. 머리와 눈, 뺨과 입술을 묘사하던 시선이 손과 배, 다리를 지나 마침내 그의 전체적인 모습에 이릅니다.
그 전체적인 모습은 레바논과 백향목에 비유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구약에서 높이와 아름다움, 장엄함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여자는 연인의 모습을 레바논의 산림처럼 장엄하게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를 실제로 돌처럼 딱딱하거나 금속처럼 차가운 몸을 가진 사람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료의 귀함과 견고함, 색과 광채, 비례와 위엄을 사용하여 남자의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이 비유들은 단순히 남자가 부유하거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앞 장에서 남자는 여자의 몸을 자연의 풍경으로 묘사했습니다. 이번에는 여자가 남자의 몸을 정교한 건축물과 귀한 재료, 향기로운 식물로 묘사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던 시선이 이제 여자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아가 5장에서 여자는 사랑받는 대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말하는 주체가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앞에서 여자가 폭력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파수꾼들은 그녀를 때리고 옷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까지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찬사가 앞서 당한 폭력의 상처를 치유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녀의 상처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폭력의 장면 뒤에 여자의 길고 풍성한 목소리가 이어진다는 문학적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찬사는 마지막에 예상하지 못한 단어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테두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지는 불확실합니다. 눈동자의 자리나 눈을 둘러싼 모양과 연결할 수 있지만, 특정한 해부학적 구조를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14절의 타르시시와 사피르는 현대 광물학에서 어떤 보석을 정확히 가리키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각각 귀하게 여겨지는 보석을 나타낸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시편 92:12에서도 백향목은 곧게 자라고 번성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는 나의 연인이며 나의 벗이다
「그의 입천장은 달콤하고, 그는 온통 탐스럽다. 이 사람이 내 연인, 이 사람이 나의 벗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아가 5:16 · 본디새김
입천장은 입 안의 윗부분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입의 생김새만을 묘사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달콤함이라는 표현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입맞춤을 통해 느끼는 감각으로 읽을 수도 있고,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콤하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한쪽으로 의미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을 달콤한 것으로 경험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탐스럽다」(מַחְמָד)에 해당하는 표현은 바람직하고 사랑스러우며 갈망할 만한 것을 나타냅니다. 남자의 몸을 하나씩 묘사하던 여자가 이제 그 전체를 말합니다. 여자에게 그의 모든 모습이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마지막 말은 「탐스럽다」가 아닙니다.
「이 사람이 내 연인, 이 사람이 나의 벗이다」라는 고백이 아가 5장의 결론입니다.
왜 마지막에 벗이라고 부르는가?
여자는 이미 여러 차례 남자를 「내 연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나의 벗」이라는 표현을 더합니다. 이 표현이 반드시 현대적인 의미의 우정을 따로 구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가까운 동반자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자가 그를 단순히 욕망의 대상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는 향기롭고 달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또한 그녀의 벗입니다.
여자가 찾고 있는 사람은 추상적인 이상형이 아닙니다. 눈부신 외모와 귀한 재료에 대한 설명만으로 이루어진 대상도 아닙니다. 그는 여자가 자신의 연인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벗이라고 부르는 구체적인 사람입니다.
여자는 예루살렘의 딸들이 던진 질문, 「네 연인이 다른 연인보다 무엇이 더 나으냐」에 대해 자신의 연인이 객관적으로 모든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한 우열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자신이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특별함은 그가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객관적인 순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바로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라는 관계 속에서도 생겨납니다.
그를 찾지 못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안다
아가 5장은 사랑의 충만함으로 시작했지만, 이 장의 흐름은 단순히 행복에서 불행으로, 다시 행복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여자가 실제로 남자를 다시 만났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의 마지막을 두 사람이 화해하고 재회했다는 결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의 부재가 언제나 좋은 것이거나, 상처가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고통 자체를 찬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듯한 불안과 파수꾼들의 폭력을 아름다운 성장 과정으로 정당화할 근거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는 그 사람을 향한 여자의 말을 멈추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여자는 그를 더욱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여자는 여전히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를 다시 만났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아름다운 사람이 아닙니다. 여자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자신의 벗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아가 5장의 마지막에는 열린 문도, 다시 만난 연인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 한 여자의 목소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내 연인, 이 사람이 나의 벗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