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서로의 아름다움

두려움을 일으키는 아름다움

사랑하는 여자를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여자가 두렵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가 6장에는 「깃발을 세운 대열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구나」라는 낯선 찬사가 등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꽃이나 향기로운 동산에 비유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벽을 가진 도시와 깃발을 세운 군대에 비유하는 것은 다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자가 여자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이 압도당하니 눈길을 돌려 달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장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여자가 잃어버린 연인의 행방을 이야기합니다. 중간에서는 수많은 왕비와 후궁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특별하다는 찬사가 나옵니다. 마지막에는 호두나무 동산으로 내려갔던 사람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병거들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향기로운 동산에서 시작된 노래가 왕실과 군대의 장엄한 이미지로 커졌다가, 다시 작은 새순과 꽃을 살피는 동산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가 6장은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그를 얼마나 특별한 존재로 보게 하는지, 그리고 그 특별함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 자신도 얼마나 깊이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장에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과 두려움의 결합입니다. 여자는 사랑스러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상대방을 압도할 만큼 강렬한 존재입니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이지만, 사랑하는 이에게는 그 누구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모든 화려한 찬사를 뒤로하고, 아직 꽃이 피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동산이 남습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76장 본문 읽기 →

어디로 갔느냐 — 찾는 사람에서 함께 찾는 사람들로

아가 6:1–3 본문 →

예루살렘의 딸들이 달라진다

「네 연인은 어디로 갔느냐, 여인들 가운데 아름다운 이여? 네 연인은 어디로 향했느냐? 우리가 너와 함께 그를 찾으리라.」아가 6:1 · 본디새김

아가 5장의 끝에서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길게 묘사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루살렘의 딸들이 이제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앞에서는 그 남자가 다른 연인들보다 무엇이 더 특별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행방을 묻습니다.

질문의 중심이 바뀌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묻던 이들이, 이제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이들은 단순히 정보를 얻으려는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여자와 함께 연인을 찾겠다고 말합니다.

여자가 혼자 품고 있던 갈망에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겠다고 나섭니다.

아가서에서 그들은 때때로 여자의 사랑을 듣고 질문하거나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6장에서는 이제 함께 찾아 주겠다는 말까지 합니다.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그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그 경험에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여자의 연인에 관한 긴 찬사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움직인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대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그는 자기 동산으로 내려갔다

「내 연인은 동산들에서 풀을 뜯으려고, 백합들을 따려고 자기 동산으로, 향료밭들로 내려갔다.」아가 6:2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합니다.

그 장소는 동산입니다. 더 정확히는 「자기 동산」이며, 그 안에는 향료밭과 백합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장소가 아닙니다. 아가서에서 동산은 이미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과 친밀함을 표현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4장에서 여자는 향료와 열매가 가득한 동산으로 묘사되었고, 5장 첫머리에서는 남자가 그 동산에 들어왔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6:2의 「자기 동산」을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여자는 어떻게 남자의 행방을 알게 되었을까요?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실제로 동산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장소를 떠올리며 그가 거기에 있다고 말하는 시적 응답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아가서의 여러 노래가 반드시 끊김 없는 시간 순서로 배열되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앞 장의 탐색과 이 장의 대답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이미 재회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여자의 말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익숙한 세계에 자리합니다.

「풀을 뜯는다」라는 표현은 목자가 양 떼를 먹이는 행동을 나타낼 수도 있고, 연인을 자연 속의 동물처럼 묘사하는 비유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백합들을 따려고」라는 말과 함께 읽으면, 사랑의 동산에서 친밀함을 누리는 이미지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성적 행위를 직접 묘사한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곧바로 자신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고백합니다.

나는 그의 것이고 그는 나의 것이다

「나는 내 연인의 것이고 내 연인은 나의 것이다. 그는 백합들 사이에서 풀을 뜯는다.」아가 6:3 · 본디새김

이 말은 아가서의 앞선 고백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가 2:16에서는 여자가 「내 연인은 나의 것이고 나는 그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6장에서는 순서가 바뀝니다.

앞에서는 연인이 자신에게 속한다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연인에게 속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변화가 여자의 마음이 어떤 단계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노래의 강조점을 새롭게 들려줍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격이나 자유를 포기한다는 법적인 선언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속한다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여자는 앞 장에서 연인을 찾아 헤맸고, 그의 행방을 알지 못해 괴로워했습니다. 이제는 그가 동산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과 그의 관계를 다시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는지와, 그 사람을 자신이 사랑한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다만 이것을 상대방이 어디에 있든 어떤 행동을 하든 관계가 반드시 안전하다는 보증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문제를 논하지 않습니다.

그 고백이 끝나자 새로운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제는 남자가 여자를 찬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사용하는 비유는 이전보다 훨씬 장엄하고 강렬합니다.

디르사와 예루살렘 — 한 사람의 아름다움이 도시의 위엄을 갖다

아가 6:4–7 본문 →

사랑하는 여자를 두 도시와 군대에 비유하다

「너는 디르사처럼 아름답구나, 나의 벗이여. 예루살렘처럼 곱고, 깃발을 세운 대열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구나.」아가 6:4 · 본디새김

아가 6장에서 가장 뜻밖의 비유입니다.

디르사는 고대 이스라엘의 도시입니다. 열왕기상 14:17에서는 여로보암의 아내가 디르사로 돌아오는 장면이 나오고, 열왕기상 16:23–24에서는 오므리가 디르사에서 다스리다가 사마리아를 세운 일이 기록됩니다. 따라서 디르사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실 역사와 관계된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다 왕국의 수도이자 성전이 있던 도시로, 왕권과 종교적 중심성을 함께 지녔습니다.

두 도시는 단순히 자연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의미만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둘 다 왕실과 도시의 위엄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한 송이 꽃이나 작은 장식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도시 전체에 비유합니다. 도시에는 성벽과 건물, 길과 광장, 많은 사람의 삶이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그 규모와 위엄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남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깃발을 세운 대열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구나」라는 표현은 단순한 아름다움의 찬사가 아닙니다. 「두려움을 자아내는」(⁨אָיֹם⁩)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두려움을 일으키거나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깃발을 세운 대열」은 깃발을 세운 무리나 대열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말을 단순히 ‘매우 아름답다’라고 바꾸면 원문의 강렬함이 사라집니다.

깃발을 세운 군대가 다가오는 장면을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그 광경에서 질서와 위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압도감이나 두려움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바로 그런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녀는 사랑스럽지만,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을 압도할 만큼 강렬합니다. 그렇다고 여자가 실제로 무서운 성격이거나 남자를 위협하는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감에 대한 시적 표현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언어에 중요한 변화가 생깁니다. 상대방의 아름다움이 단순히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압도하는 힘으로 경험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은 이 비유가 추상적인 말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네 눈을 돌려라, 내가 압도당한다

「네 두 눈을 내게서 돌려라. 그 눈들이 나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네 머리카락은 길르앗에서 내려온 암염소 떼 같구나.」아가 6:5 · 본디새김

이 말은 당혹스럽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눈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대신, 자신을 바라보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눈길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지금까지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자가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는 남자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남자가 여자의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위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눈길 하나가 남자에게 견디기 어려운 감정을 일으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4절의 군대 비유가 5절에서 구체화됩니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멀리서 바라보는 도시처럼 장엄할 뿐 아니라, 가까이에서 마주치는 눈길만으로도 남자를 압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은 동시에 그 사람의 시선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남자는 곧바로 더 익숙한 비유로 돌아갑니다.

이미 본 아름다움을 왜 다시 노래하는가?

「네 이는 씻는 곳에서 올라온 암양 떼 같구나. 모두 쌍둥이를 낳으며, 그 가운데 새끼를 잃은 것은 하나도 없구나.」아가 6:6 · 본디새김
「너울 뒤 네 관자놀이는 석류 한 조각 같구나.」아가 6:7 · 본디새김

이 비유들은 아가 4:1–3의 찬사를 거의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아가서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은 한 번 설명하고 끝나는 대상이 아닙니다. 같은 사람을 다시 바라보면서 익숙한 표현을 새롭게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노래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4장에서는 눈과 머리카락, 이, 입술과 관자놀이, 목과 젖가슴을 묘사하며 신체의 아름다움을 길게 펼쳐 보였습니다. 6장에서는 눈길에 압도된다는 말이 먼저 나오고, 머리카락과 이, 관자놀이만 간결하게 이어집니다.

여기서 중심은 여자의 몸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감정입니다. 특히 눈길 앞에서 자신이 압도당한다는 고백이 가장 앞에 놓입니다.

남자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아름다움이 자신의 마음에 어떤 일을 일으키는지를 더욱 강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 찬사는 곧 놀라운 숫자들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두 도시의 이름을 근거로 아가서의 정확한 저작 연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가 역사적으로 알려진 도시들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시가 어느 시대에 처음 작성되었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4절의 「두려움을 자아내는」은 히브리어 아유마, 「깃발을 세운 대열」은 칸니드갈로트입니다. 5절에서 「압도하기 때문이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 히르히부니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는 표현으로, 문맥상 마음을 뒤흔들거나 압도하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감정의 뉘앙스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순 명의 왕비와 단 한 사람 — 비교를 넘어 특별함을 말하다

아가 6:8–9 본문 →

「왕비는 예순 명이고, 후궁은 여든 명이며, 젊은 여인들은 셀 수 없이 많다.」아가 6:8 · 본디새김

시가 갑자기 왕실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왕비와 후궁은 왕실의 서로 다른 지위를 가진 여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어느 왕의 실제 궁정 명부를 기록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예순 명과 여든 명이라는 숫자를 솔로몬이 실제로 거느린 왕비와 후궁의 정확한 수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상 11:3에는 솔로몬의 아내와 후궁에 관해 다른 숫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가 6장의 숫자들은 왕실의 많은 여성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배열에도 특징이 있습니다.

왕비는 예순 명입니다.

후궁은 여든 명입니다.

젊은 여자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숫자로 셀 수 있는 집단에서 시작하여 셀 수 없는 집단으로 넓어집니다. 이렇게 많은 여자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 구절의 첫 문장이 그 대답을 들려줍니다.

「나의 비둘기, 나의 온전한 이는 하나뿐이다.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하나뿐이며, 그를 낳은 이에게 티 없는 이다. 딸들이 그를 보고 복되다고 했고,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를 칭찬했다.」아가 6:9 · 본디새김

여러 명의 왕비와 후궁, 셀 수 없이 많은 젊은 여자들이 등장한 뒤에 「하나뿐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대비가 이 부분의 중심입니다.

많다는 것과 하나뿐이라는 것

「하나뿐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אֶחָד⁩)는 여성형 수사 ‘하나’입니다. 여기서는 유일함이나 특별함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왕비는 많고, 후궁도 많고, 젊은 여자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남자에게 그의 비둘기, 그의 온전한 이는 하나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녀가 다른 여자들보다 조금 더 아름답다는 말과 다릅니다. 많은 사람 사이에서 그녀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해석할 때 주의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 구절을 한 남자가 수많은 아내와 후궁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그중 한 여자를 가장 사랑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왕실의 여러 여성과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의 대조가 그런 읽기를 가능하게 합니다.

반면 이 숫자들을 왕실의 화려한 세계를 나타내는 비교 대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읽기에서는 실제로 그 남자가 예순 명의 왕비와 여든 명의 후궁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토록 많은 아름다운 여자가 있어도 자신에게는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뜻이 됩니다.

본문은 둘 가운데 어느 관계를 전제하는지 확정해 주지 않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고대 왕실의 여러 여성들이 지닌 불평등한 사회적 지위까지 이상적인 사랑의 모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 노래가 강조하는 것은 왕의 권력이나 여성의 숫자 자체가 아닙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유일하다고 부르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특별함은 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른 누구도 그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관계의 고유함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서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에게도 하나뿐인 사람

이어서 남자는 여자의 어머니를 언급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특별하다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를 낳은 어머니에게도 특별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머니에게 하나뿐」이라는 말은 실제로 다른 형제자매가 없는 외동딸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받는 자녀가 어머니에게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티 없는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라(⁨בַּר⁩)는 맑거나 순수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지만, 선택되거나 특별히 귀하게 여겨지는 존재라는 의미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낱말을 선택된 사람이라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따라서 어머니의 눈에 결점이 없다는 말로 읽을 수도 있고, 어머니가 특별히 귀하게 여기는 딸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한 여자의 가치가 여러 관계를 통해 표현됩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유일한 사람입니다. 동시에 어머니에게도 소중한 딸입니다.

남자의 사랑만이 그녀를 특별하게 만드는 유일한 근거로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남자가 사랑하기 전부터 이어져 온 가족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문장, 「딸들이 그를 보고 복되다고 했고,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를 칭찬했다」에서는 더 넓은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봅니다. 왕비와 후궁들은 처음에 많은 사람의 수를 보여 주는 비교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여자를 칭찬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경쟁의 장면이 아닙니다. 적어도 시 안에서는 다른 여성들도 그 여자의 아름다움과 특별함을 인정합니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주변의 찬탄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고백을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서 떼어 놓거나, 자신에게만 속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여자는 연인에게 특별한 사람이면서 어머니에게도 소중한 딸이고, 다른 여자들의 칭찬을 받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과 맺는 사랑의 관계가 그 사람이 지닌 다른 관계와 존재의 의미를 모두 지워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여자의 아름다움이 도시나 왕실의 규모보다 더욱 큰 대상으로 비유됩니다. 하늘의 빛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7:17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내들을 많이 두어 자신의 마음이 돌아서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열왕기상 11:1–8에서는 솔로몬이 많은 여자를 사랑하고 그들의 영향으로 다른 신들을 따르게 되는 일이 기록됩니다. 구약은 왕이 수많은 아내를 거느리는 일을 단순한 부와 영광의 표시로만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가 6장을 구약의 더 넓은 문맥에서 읽을 때에는 왕실의 수많은 여성들에 관한 표현과 「하나뿐이다」라는 고백 사이의 긴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가 6장 자체가 신명기 17장의 율법을 직접 인용하거나, 솔로몬의 많은 아내를 비판하는 의도로 작성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창세기 1:26–27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아가서의 이 고백과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직접 동일한 내용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가치는 오직 누군가가 그를 사랑해 주기 때문에 처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균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 존재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일이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한 사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깊이 발견하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새벽처럼 나타나는 여자 — 아름다움과 두려움의 절정

아가 6:10 본문 →

「새벽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달처럼 아름답고, 해처럼 맑고, 깃발을 세운 대열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아가 6:10 · 본디새김

아가 6장의 찬사는 이 구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지금까지 여자는 아름다운 도시와 군대에 비유되었습니다. 왕비와 후궁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새벽과 달과 해가 등장합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도시나 왕실의 장식이 아니라, 누구나 하늘에서 볼 수 있는 크고 밝은 존재들입니다. 이 비유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더욱 넓은 세계로 옮깁니다.

새벽은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가?

첫 번째 비유는 새벽입니다. 새벽은 어둠과 빛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밤이 끝나고 아침이 시작될 때, 빛은 서서히 하늘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본문은 단순히 여자가 새벽처럼 밝다고 하지 않습니다. 원문의 동사는 밖을 내다보거나 모습을 드러내는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자가 어둠 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나거나, 높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구절은 실제로 여자가 어떤 장소에서 나타났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놀라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다음에는 달과 해가 등장합니다. 달과 해는 모두 하늘을 밝히지만, 그 빛의 성격은 다릅니다. 달은 밤하늘에서 빛나고, 해는 낮의 강렬한 빛을 나타냅니다. 여자는 그 두 빛에 모두 비유됩니다.

이것을 달의 부드러운 아름다움과 해의 강렬한 광채를 함께 지닌 존재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새벽이 나타나고, 달이 빛나고, 해가 밝습니다. 여자의 아름다움을 말하기 위해 하늘 전체가 동원되는 듯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다시 군대가 등장합니다.

왜 찬사의 끝에 다시 두려움이 남는가?

「깃발을 세운 대열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이라는 표현은 4절의 말을 되풀이합니다. 4절에서는 디르사와 예루살렘에 비유하면서 깃발을 세운 대열처럼 두렵다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새벽과 달과 해에 비유하면서 다시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 반복은 우연한 장식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 장의 찬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여자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단순히 감상하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너무 강렬해서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고, 그 앞에서 자신이 작아지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남자가 눈길을 돌려 달라고 했던 말과 연결됩니다. 10절에서는 그러한 인상이 하늘의 빛과 군대의 위엄으로 더욱 확대됩니다.

시가 드러내는 것은 강렬한 존재감입니다.

그녀는 아름답기 때문에 약한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아름다움으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이 질문을 누가 하는가?

10절에는 화자에 관한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앞의 4–9절은 여자를 향한 남자의 찬사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9절 마지막에서 딸들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여자를 칭찬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10절의 질문을 그들이 여자를 보고 외치는 찬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남자의 찬사가 계속되면서 수사적인 질문으로 표현되었다고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 지점에서 화자가 반드시 바뀌었다는 명시적인 표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쪽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느 쪽으로 읽든 시의 효과는 비슷합니다. 여자는 더 이상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처럼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이 여인은 누구인가?」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일상적인 질문이라기보다 놀라움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찬사가 절정에 이른 다음, 시는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이동합니다.

화려한 도시도, 왕실의 많은 여성도, 새벽과 해도 사라집니다. 대신 조용한 호두나무 동산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해처럼 맑고」의 「맑다」는 히브리어 바라로, 9절에서 「티 없는 이」로 옮긴 말과 같은 형태입니다. 9절에서는 여자의 특별함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고, 10절에서는 해의 밝고 맑은 모습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도덕적인 순결만을 뜻한다고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밝고 깨끗하며 빼어난 모습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호두나무 동산으로 내려가다 — 아름다움은 아직 자라고 있다

아가 6:11 본문 →

「나는 골짜기의 푸른 새순들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싹을 틔웠는지, 석류나무들이 꽃을 피웠는지 보려고 호두나무 동산으로 내려갔다.」아가 6:11 · 본디새김

아가 6장의 마지막 부분은 앞선 찬사와 아주 다른 분위기입니다.

지금까지의 비유들은 크고 화려했습니다. 도시와 군대, 왕비와 후궁들, 새벽과 달과 해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 사람이 호두나무 동산으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하려는 일은 소박합니다. 새순을 살펴보고, 포도나무가 싹을 틔웠는지 확인하고, 석류나무에 꽃이 피었는지 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엄한 아름다움에서 작고 섬세한 생명의 움직임으로 시선을 돌리는 장면입니다.

왜 완성된 열매가 아니라 새순을 보는가?

호두나무 동산에 내려간 사람은 열매를 수확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성장의 초기 단계에 속합니다. 새순은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고, 싹은 앞으로 꽃과 열매를 맺을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석류꽃도 아직 완성된 열매는 아닙니다.

앞에서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이미 완성된 듯한 장엄한 대상으로 찬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직 자라고 있는 식물들을 살펴봅니다. 사랑의 노래 안에서 이 장면을 읽으면, 아름다움과 친밀함이 한 번 완성되면 더 이상 달라질 것이 없는 고정된 상태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11절의 새순과 꽃이 반드시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사랑의 회복을 직접 선언하지 않습니다. 새순을 확인하러 동산으로 내려가는 행동을 묘사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앞뒤 문맥에서 동산과 꽃, 포도나무가 사랑의 이미지로 반복되었다는 사실은 이 장면을 단순한 원예 활동 이상의 시적 장면으로 읽게 합니다. 여기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살펴보려는 기대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는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누가 동산에 내려갔는가?

이 구절에서도 화자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일인칭 동사 형태는 그 자체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말하는 사람이 여자일 수도 있고, 남자일 수도 있습니다.

여자가 말한다고 읽으면, 연인의 행방을 이야기하던 여자가 이제 자신도 동산으로 내려가 식물들을 살피는 장면이 됩니다. 남자가 말한다고 읽으면, 앞에서 여자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던 남자가 자신이 동산으로 내려간 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2절에서 연인이 동산으로 내려갔다는 말과도 연결됩니다.

두 읽기 모두 가능한 문맥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본문만으로 화자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움직임입니다. 시의 앞부분에서 연인은 동산으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누군가가 동산으로 내려갑니다.

동산은 이 장의 시작과 끝을 연결합니다.

왕실의 화려한 이미지가 한참 동안 펼쳐진 뒤에도, 시는 다시 꽃과 향료와 생명이 자라는 장소를 향합니다.

그런데 조용히 새순을 살펴보는 이 장면은 마지막 구절에서 갑자기 흔들립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11–12는 하나님이 땅에서 식물이 자라게 하시고 각기 종류에 따라 씨와 열매를 맺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아가서의 동산 역시 식물이 자라고 꽃이 피는 장소입니다. 다만 창세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시작을 설명하고, 아가서는 그 세계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인간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아가 6장의 새순을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직접적인 표징으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아가 6장에는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시지 않으며, 이 장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본문에 없는 사건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자연의 생명력과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를 갖습니다.

내 마음이 나를 병거들 사이에 놓았다 — 설명되지 않은 마지막 움직임

아가 6:12 본문 →

「나는 알지 못했다. 내 마음이 나를 내 고귀한 백성의 병거들 사이에 놓았다.」아가 6:12 · 본디새김

아가 6장의 마지막 구절은 이 책에서 의미를 확정하기 가장 어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첫 문장은 「나는 알지 못했다」입니다. 무엇을 알지 못했다는 것일까요? 동산에서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는 뜻일까요?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겪었다는 뜻일까요?

본문은 목적어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 문장을 자신의 마음이나 갈망이 자신을 어떤 장소로 이끌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를 나타내는 표현이 문제입니다.

고귀한 백성의 병거인가, 아미나딥의 병거인가?

병거들 뒤의 말을 「내 고귀한 백성」이라는 표현으로 읽으면, 자신의 백성 가운데 고귀한 사람들과 관련된 병거들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하나의 고유명사인 ‘아미나딥’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특정한 인물과 관계된 병거들을 가리키는지, 고귀한 백성의 병거들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이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은 갑작스러운 전환입니다.

방금 전까지 화자는 호두나무 동산에서 새순과 꽃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자신을 병거들 사이에 놓았다고 말합니다.

조용한 동산과 빠르게 움직이는 병거가 강렬하게 대비됩니다. 동산은 식물이 자라나는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는 곳입니다. 병거는 속도와 힘, 큰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예상하지 못한 감정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시적인 표현으로 읽을 여지는 있습니다. 마음은 조용히 새순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자기 자신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움직임 속에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한 해석이지, 확정된 결론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마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네페쉬입니다. 문맥에 따라 자신, 생명, 욕구나 갈망을 지닌 존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원문의 마지막에는 마르케보트 암미 나디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마르케보트는 병거들을 가리키고, 문제는 그 뒤의 암미 나디브입니다. 칠십인역은 마지막 부분을 ‘아미나답의 병거들’이라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또한 히브리어 문장은 마음이 자신을 병거들 사이에 놓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지만, 병거들이 갑작스러운 움직임이나 압도적인 감정의 비유로 사용되었다고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불확실성을 고려하면 이 구절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여자가 왕의 가마에 실려 궁전으로 끌려갔다거나, 남자가 자신도 모르게 여자를 만나러 달려갔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실제 전쟁이나 전차 행렬을 목격했다고 단정할 근거도 부족합니다.

맺음말 — 새순을 보러 내려갔을 뿐인데

아가 6:1–12 본문 →

아가 6장에는 유난히 큰 이미지들이 등장합니다. 디르사와 예루살렘이 있고, 깃발을 세운 대열이 있습니다. 왕비와 후궁들이 등장하며, 한 여자는 새벽과 달과 해에 비유됩니다.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찬탄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자의 시선 앞에서 자신이 압도된다고 고백합니다. 상대방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지만, 내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서 사랑의 아름다움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의 취약함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노래의 마지막은 그런 장엄한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호두나무 동산으로 내려갑니다. 그가 살펴보려는 것은 작은 새순들입니다. 포도나무가 싹을 틔웠는지, 석류나무들이 꽃을 피웠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알지 못했다」라는 뜻밖의 말을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동산에서 어떻게 병거들 사이로 옮겨졌는지, 그 병거가 어디로 향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조용히 새순을 살펴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움직임 속에 놓입니다.

아가 6장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강렬하게 말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의 모든 움직임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장면이 있습니다.

푸른 새순이 돋아나는 골짜기와 꽃을 피우려는 석류나무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병거들입니다. 그 풍경 속에서 화자는 자신의 마음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왔는지 뒤늦게 깨닫는 듯 말합니다. 「나는 알지 못했다. 내 마음이 나를 내 고귀한 백성의 병거들 사이에 놓았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