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서로의 아름다움
사랑하는 사람을 이끄는 여자
사람들이 한 여자를 부릅니다.
「돌아와라, 돌아와라, 술람미 여인아. 돌아와라, 돌아와라, 우리가 너를 바라보자.」 그들은 여자를 바라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곧바로 뜻밖의 질문이 들립니다. 「너희는 두 진영의 춤을 보듯 술람미 여인에게서 무엇을 보려느냐?」 누군가가 여자를 바라보려고 하고, 다른 목소리가 그 시선에 질문을 던집니다.
그 뒤에는 여자의 발끝에서 머리까지 이어지는 긴 찬사가 등장합니다. 발과 넓적다리, 배와 젖가슴, 목과 눈, 코와 머리카락이 차례로 묘사됩니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장인이 만든 장식품과 귀한 상아, 성읍의 연못과 높은 탑, 대추야자나무에까지 비유됩니다.
그런데 시의 후반부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자를 바라보며 찬탄하던 목소리가 잦아들고, 여자가 직접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오너라, 내 연인아. 들로 나가자. 마을들에서 밤을 보내자.」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포도밭으로 함께 가자고 제안합니다. 그곳에서 연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여자를 바라보려고 불렀습니다. 마지막에는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부릅니다.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단순히 그 갈망에 응답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들과 포도밭으로 가자고 청하며, 그곳에서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선과 사랑을 선택하는 목소리가 한 장 안에서 만납니다.
돌아와라, 술람미 여인아 — 누구의 시선을 위해 춤추는가?
「돌아와라, 돌아와라, 술람미 여인아. 돌아와라, 돌아와라, 우리가 너를 바라보자.」 「너희는 두 진영의 춤을 보듯 술람미 여인에게서 무엇을 보려느냐?」아가 7:1 · 본디새김
아가 7장은 네 번 반복되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돌아와라」는 여성 한 사람에게 돌아오거나 방향을 돌리라고 요구하는 말입니다. 반복은 누군가를 간절히 부르는 느낌을 줍니다. 여자가 떠나고 있는데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고, 몸을 돌려 자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여자를 부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너를 바라보자」(חָזָה)에서 동사는 단순히 우연히 본다는 뜻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바라보려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바로 앞 장의 흐름과도 어울립니다. 아가 6장에서는 여자의 아름다움이 여러 사람의 찬탄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병거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말이 등장했습니다. 7장은 마치 그 장면에 이어 여자가 사람들의 시선 가운데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시작합니다. 다만 실제로 그녀가 병거에서 내려 춤을 추었다거나, 행렬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장면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누구인가?
여기서 여자는 처음으로 「술람미 여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립니다. 이 이름의 정확한 의미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장에서 여자가 단순히 「나의 벗」이나 「나의 누이」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별도의 호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를 바라보려는 사람들이 그녀를 부릅니다. 그런데 곧바로 다른 목소리가 그들의 요청에 질문합니다.
두 진영의 춤은 어떤 춤인가?
「두 진영의 춤」은 해석이 쉽지 않은 표현입니다. 두 무리가 마주하며 추는 춤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마하나임이라는 장소와 관련된 춤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춤의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누가 이 질문을 던졌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자신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에게 직접 반문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남자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춤을 바라보는 이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여자가 남들의 시선을 거부하는 장면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질문의 어조에는 생각할 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바라보고 싶다고 말하는데, 다른 목소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보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단순히 보여 달라는 요청이 그대로 이어지지 않고,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에 등장하는 긴 신체 찬사를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여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어떤 존재로 나타납니까?
조금 더 깊이
「술람미 여인」을 술람 또는 수넴과 같은 지명에 연결하여 그 지역 출신의 여자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3에 등장하는 수넴 여자 아비삭과 연결해 생각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이 곧 아비삭이라고 주장할 본문상의 근거는 없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이 호칭이 솔로몬의 히브리어 이름 슐로모와 소리상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두 이름에는 평화를 뜻하는 샬롬과 관련된 어근이 들립니다. 따라서 솔로몬과 대응하는 여성적 명칭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가능한 언어적 연결이지, 술람미 여인의 정체를 확정하는 증거는 아닙니다. 「두 진영의 춤」에서 마하나임은 두 진영이나 두 무리를 가리키는 형태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구약에 등장하는 지명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32:2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 장소를 마하나임이라고 부릅니다.
발끝에서 시작되는 찬사 — 여자의 몸이 하나의 풍경이 되다
왜 이번에는 발에서 시작하는가?
「귀인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두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의 곡선들은 장인의 손이 만든 장식품들 같구나.」아가 7:2 · 본디새김
이것은 앞선 긴 신체 묘사와 다른 방향입니다. 아가 4장에서는 눈과 머리카락에서 시작하여 몸 아래쪽으로 내려갔다면, 이번에는 신을 신은 발에서 시작하여 넓적다리와 배, 젖가슴, 목과 머리로 올라갑니다.
시선이 움직이는 방향이 뒤바뀐 것입니다.
이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춤이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움직이는 발을 먼저 바라보는 구성은 자연스럽습니다. 여자의 발은 땅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신을 신고 있습니다. 이는 걸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으며, 춤을 출 수도 있는 발입니다.
「귀인의 딸」은 문자적으로 고귀한 사람의 딸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호칭이 여자의 실제 혈통이나 신분을 확인해 주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귀하고 품위 있는 존재로 높여 부르는 찬사일 수도 있습니다.
넓적다리의 곡선은 장인의 손이 만든 장식품에 비유됩니다. 여기서는 자연의 식물이나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 정교하게 만든 물건이 등장합니다. 장인은 재료를 다듬어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여자의 신체가 지닌 균형과 곡선의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신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히 감각적입니다. 그러나 몸을 단순한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정교한 장식품에 비유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시의 직접적인 목적은 여자의 몸을 평가하거나 가격을 매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을 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찬탄하는 데 있습니다.
포도주가 담긴 대접과 백합 사이의 밀 더미
「네 배꼽은 둥근 대접이구나. 거기에 섞은 포도주가 모자라지 않기를. 네 배는 백합들로 둘러싸인 밀 더미구나.」아가 7:3 · 본디새김
「모자라지 않기를」은 포도주가 실제로 늘 가득하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말이 아니라, 모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단순한 시각적 비유 이상의 풍요에 대한 바람이 담깁니다.
여자의 배꼽을 대접에 비유하는 이유는 둥근 형태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잔치와 기쁨, 친밀함의 의미까지 함께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배는 밀 더미에 비유됩니다. 밀 더미는 풍성한 수확을 떠올리게 합니다. 백합으로 둘러싸인 모습은 그 풍요를 아름답게 장식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실제로 수확한 밀 더미를 백합으로 둘러싸는 특별한 관습이 있었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것은 시적인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배꼽과 배가 성적인 친밀함을 암시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자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묘사하는 흐름과 포도주, 풍요로운 곡식의 이미지는 그런 읽기를 허용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특정한 신체 부위나 성적 행위를 암호처럼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여자의 몸이 아름다움과 풍요, 기쁨의 언어로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
새끼 가젤의 반복
「네 두 젖가슴은 두 마리 새끼 가젤, 암가젤의 쌍둥이 같구나.」아가 7:4 · 본디새김
이 비유는 아가 4:5에도 등장합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두 새끼 가젤은 두 젖가슴의 짝을 이루는 모양과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비유가 전혀 다른 배열 안에 들어 있습니다. 4장에서는 신체를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찬사의 끝부분에 있었지만, 7장에서는 발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시선의 중간에 등장합니다. 같은 비유라도 주변의 이미지가 달라지면 시 속에서 맡는 역할도 달라집니다.
그렇게 시선이 올라가면서 비유의 규모도 점점 커집니다. 정교한 장식품과 포도주 대접, 밀 더미와 어린 동물들을 지나 이제 도시의 연못과 높은 탑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섞은 포도주」는 물이나 다른 재료를 섞어 준비한 포도주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고대의 잔치와 음료 문화에서 포도주는 여러 방식으로 준비되었습니다.
상아 탑과 레바논의 탑 — 부드러운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네 목은 상아 탑 같구나. 네 두 눈은 헤스본의 연못들, 바트랍빔 성문 곁의 연못들이구나. 네 코는 다마스쿠스 쪽을 내다보는 레바논의 탑 같구나.」아가 7:5 · 본디새김
여자의 몸을 따라 올라가던 시선은 이제 목과 얼굴에 이릅니다. 그런데 비유가 한층 장엄해집니다.
상아는 귀하고 매끄러운 재료이고, 연못은 물을 담은 공간이며, 탑은 견고한 건축물입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처럼 보일 수 있지만, 모두 여자의 아름다움을 작고 연약한 것으로만 표현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상아로 만든 탑은 어떤 모습일까?
상아는 고대 세계에서 값진 장식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상아를 작은 장신구가 아니라 탑에 연결합니다. 탑은 높고 견고한 구조물입니다. 이 비유는 여자의 목이 지닌 곧고 우아한 형태와 밝고 매끄러운 아름다움을 표현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실제로 상아로 건축한 탑이 있었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는 상아의 귀함과 탑의 장엄함을 하나의 이미지로 결합합니다.
그 뒤에는 두 눈이 등장합니다. 연못에는 물이 고여 있고, 그 표면에는 빛이 비칠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의 깊이와 반짝임은 사람의 눈을 표현하는 데 어울립니다. 시는 여자의 눈을 단순히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의 도시 풍경처럼 펼쳐 놓습니다.
그다음 비유는 더욱 뜻밖입니다.
코를 탑에 비유한다는 말은 오늘날에는 어색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코의 크기가 아니라 탑이 가진 형태와 방향입니다. 탑은 높은 곳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구조물입니다. 이 비유는 여자의 얼굴이 가진 곧고 당당한 인상을 표현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녀의 몸은 귀한 상아처럼 아름답지만, 동시에 높은 탑처럼 위엄 있습니다.
남자의 찬사는 여자를 작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자를 하나의 장엄한 풍경처럼 크게 그립니다.
갈멜 같은 머리, 왕을 붙잡는 머리카락
「네 위에 있는 머리는 갈멜 같고, 네 머리채는 자주색 실 같구나. 왕이 그 머리타래에 묶여 있구나.」아가 7:6 · 본디새김
갈멜은 구약에서 아름다운 자연과 풍요를 떠올리게 하는 지명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머리를 갈멜에 비유하는 것은 그 모습의 높이와 아름다움, 풍성함을 함께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주색은 고대의 귀한 염색 직물과 관련된 색입니다. 이 비유는 머리카락이 실제로 자주색이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뜻하지 않습니다. 귀한 직물의 광택과 아름다움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남자가 여자의 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왕이 여자의 머리카락에 묶여 있습니다.
대체 누가 누구를 붙잡고 있습니까?
여기서 왕을 실제 솔로몬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남자를 왕에 비유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이 왕이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움직임은 분명합니다. 왕은 보통 다른 사람에게 명령하고, 사람들을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왕이 머리카락에 붙잡혀 있습니다. 이것은 앞 장에서 여자의 눈길이 남자를 압도했다는 말과도 잘 어울립니다.
물론 이것은 여자가 실제로 왕을 지배하거나 감금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의 상태를 표현하는 시적 역전입니다.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찬탄하지만, 동시에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상 10:18에는 솔로몬이 상아로 만든 큰 왕좌가 등장하고, 열왕기상 22:39에서는 아합의 상아궁이 언급됩니다. 헤스본은 요단강 동쪽 지역의 도시로, 민수기 21:26에서 아모리 왕 시혼의 성읍으로 등장합니다. 바트랍빔이라는 이름이 구체적으로 어느 성문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아가서 밖에서 그 성문의 위치를 분명하게 확인할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다마스쿠스 쪽을 향한다는 말은 그 탑이 특정한 방향을 향해 서 있음을 나타내지만, 아가서가 실제로 레바논에 있었던 어떤 탑의 정확한 위치를 기록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35:2에서는 갈멜의 영화가 회복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대추야자나무에 오르고 싶다 — 사랑이 몸의 갈망을 말할 때
아름답다는 말에서 사랑스럽다는 말로
「사랑아, 즐거움 속에서 너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아가 7:7 · 본디새김
지금까지 남자는 여자의 몸을 하나씩 묘사했습니다. 이제는 그녀 전체를 바라보며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합니다.
「사랑아」(אַהֲבָה)는 보통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로 사용되는 낱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사랑하는 여자를 직접 부르는 호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남자는 그 여자를 자신의 사랑 자체처럼 부르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추상적인 사랑을 향해 감탄하는 문장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신체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기쁨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제 남자는 여자의 몸 전체를 하나의 나무에 비유합니다.
키가 큰 나무와 풍성한 열매
「너의 이 키는 대추야자나무 같고, 네 두 젖가슴은 열매 송이들 같구나.」아가 7:8 · 본디새김
여자의 몸 전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나무가 됩니다.
발과 다리, 배와 젖가슴, 목과 머리를 따로 묘사하던 시선이 이제 몸 전체의 형태를 하나의 식물로 바라봅니다. 대추야자나무는 높이 자라는 동시에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높이와 풍요가 하나의 이미지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나무를 멀리서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나는 말했다. 『대추야자나무에 올라 그 열매 줄기들을 붙잡으리라.』 부디 네 두 젖가슴은 포도나무의 송이들 같고, 네 코의 향기는 사과들 같기를,」아가 7:9 · 본디새김
이 표현에는 분명한 육체적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여자의 몸이 대추야자나무에 비유되었으므로, 그 나무에 올라 열매를 붙잡겠다는 말은 사랑하는 여자와 더욱 가까이 접촉하고 싶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부분을 단순히 상대방의 아름다움을 감상한다는 말로만 이해하면 본문의 감각적인 성격이 약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구체적인 성적 행위를 하나씩 대응시켜 설명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시는 신체적 친밀함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지만, 실제로 어떤 행위가 일어났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아름답다고 말했고, 이제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곧바로 「부디」로 시작하는 소망으로 바뀌어 「그리고 네 입천장은 좋은 포도주 같기를」까지 이어집니다. 대추야자나무에서 시작된 비유가 포도송이와 사과, 포도주로 이어지고, 나무의 형태를 바라보던 시선은 열매의 맛과 향기를 기대하는 감각으로 바뀝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미 무언가를 얻었다는 보고가 아니라, 앞으로 누리고 싶은 친밀함을 표현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남자의 갈망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만으로 그 갈망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듭니다.
포도주가 흐르는 순간, 여자가 말을 이어받다
한 문장 가운데서 바뀌는 목소리
「그리고 네 입천장은 좋은 포도주 같기를.」 「내 연인에게 매끄럽게 흘러가며 잠든 이들의 입술을 부드럽게 스치는 포도주다.」아가 7:10 · 본디새김
앞에서는 남자가 여자의 입천장이 좋은 포도주 같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에는 「내 연인」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를 여자가 자신의 연인에게 흘러가는 좋은 포도주에 관해 응답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자연스럽습니다.
남자의 비유를 그대로 받아 자신의 사랑의 언어로 바꾸는 것입니다.
다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 지점에서 화자가 바뀌었다는 명시적인 표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남자의 발언이 계속된다고 읽는 길도 남아 있습니다.
좋은 포도주와 사랑하는 사람의 입이 연결됩니다. 포도주의 부드러운 흐름은 입맞춤의 감각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달콤한 말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자는 자신의 사랑을 아주 분명한 말로 고백합니다.
그의 갈망은 내게로 향한다
「나는 내 연인의 것이고, 그의 갈망은 내게로 향한다.」아가 7:11 · 본디새김
이전에도 여자는 자신과 연인이 서로에게 속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장의 뒷부분이 달라집니다. 여자는 자신이 남자를 사랑한다는 사실만 말하지 않습니다. 남자도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막연한 호의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갈망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여자는 남자를 향한 자신의 사랑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남자의 갈망까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갈망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순간 여자는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을 기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갈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자신이 먼저 그를 부릅니다.
조금 더 깊이
7:10의 「잠든 이들의 입술」에 해당하는 표현에는 본문 전승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전해지는 히브리어 본문은 잠자는 사람들의 입술을 움직이게 하거나 그 위로 포도주가 부드럽게 흐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입술과 이와 관련된 다른 표현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포도주가 누구의 입술을 어떻게 스치는지 정확하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차이가 시의 기본적인 감각을 완전히 바꾸지는 않습니다. 7:11의 「갈망」은 히브리어 테슈카로, 강한 욕구나 갈망을 나타냅니다. 구약에서 매우 드물게 등장하며, 창세기 3:16과 4:7에서도 사용됩니다. 창세기 3:16에서는 인간의 불순종 이후 여자의 갈망이 남편을 향한다고 말하며, 그가 여자를 다스릴 것이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아가 7:11에서는 남자의 갈망이 여자를 향하고, 여기에는 남자가 여자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가서가 창세기 3:16을 의도적으로 뒤집어 놓았다고 해석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 사이의 직접적인 인용이나 문학적 의존 관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 아가서가 창세기의 저주를 해소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성경 전체의 주제적 연결로 읽으면, 인간관계에 나타나는 갈망이 반드시 지배나 통제의 언어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너라, 내 연인아 — 여자가 함께할 장소를 선택하다
들로 나가자
「오너라, 내 연인아. 들로 나가자. 마을들에서 밤을 보내자.」아가 7:12 · 본디새김
아가 7장의 앞부분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자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여자는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대상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합니다. 그 장소는 들입니다. 왕실의 방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춤의 공간도 아닙니다.
「마을들」은 작은 마을들로 읽을 수도 있고, 헤나 꽃들 사이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여자의 초대는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내는 장면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만이 아니라 다음 날 아침까지 계획합니다.
포도밭의 꽃을 살피는 아침
「일찍 일어나 포도밭들로 가자. 포도나무가 싹을 틔웠는지, 포도꽃이 피었는지, 석류나무들이 꽃을 피웠는지 보자. 거기서 네게 내 사랑을 주리라.」아가 7:13 · 본디새김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포도밭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포도나무의 싹과 꽃, 석류나무의 꽃입니다. 아직 수확할 열매가 아니라 자라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아가 6:11에서도 포도나무가 싹을 틔웠는지, 석류나무가 꽃을 피웠는지 살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6장에서는 한 사람이 동산에 내려가 식물의 상태를 살펴보려고 했고, 7장에서는 여자가 연인에게 함께 가자고 말합니다.
혼자 바라보던 풍경이 두 사람이 함께 누릴 풍경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거기서 네게 내 사랑을 주리라」는 이 장에서 가장 직접적인 사랑의 약속입니다. 여기서 「내 사랑」(דּוֹד)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도다이는 애정과 사랑의 표현을 나타내는 복수형입니다. 문맥상 이 말에는 단순한 감정 이상의 친밀함, 특히 연인 사이의 육체적 애정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키는지는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 말을 하는가입니다.
여자가 말합니다.
그녀는 남자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찬탄하고 가까워지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도 그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 한쪽의 욕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이 장의 끝에서 여자는 누군가의 갈망을 채워 주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시간을 직접 제안하는 사람입니다.
포도밭은 식물이 자라나는 곳입니다. 싹이 나고 꽃이 피며 시간이 지나 열매를 맺습니다. 여자는 그 변화들을 연인과 함께 보고 싶어 합니다. 사랑은 그들에게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의 절정만이 아니라,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자라나는 것을 살펴보는 시간까지 포함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크파림은 문맥상 작은 마을들을 가리키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음 표기가 헤나를 나타내는 낱말과 가까워, 헤나가 자라는 곳이나 헤나 꽃들 사이에서 밤을 보내자는 뜻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아가서에서는 이미 헤나가 향기로운 식물로 등장했으므로 그 가능성도 문맥에 어울립니다. 포도나무와 석류나무, 만드레이크와 온갖 귀한 열매의 이미지들은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을 주제적으로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8–9에서는 하나님이 동산을 마련하시고,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나 아가서의 포도밭이 에덴동산을 직접 상징한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노래는 창조 세계의 식물과 열매들을 사용하여 인간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살아가는 배경일 뿐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만드레이크와 새것도 묵은 것도 — 사랑을 위해 간직한 것들
「만드레이크들이 향기를 풍겼고, 우리 문간들에는 온갖 귀한 것들, 새것도 묵은 것도 있구나. 내 연인아, 내가 너를 위해 간직해 두었다.」아가 7:14 · 본디새김
아가 7장은 향기와 열매가 있는 풍경으로 끝납니다.
만드레이크는 왜 사랑의 노래에 등장하는가?
본문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향기입니다. 만드레이크가 어떤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이 식물을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약물이나 특별한 효능이 있는 물질로 단정해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아가서의 문맥에서 만드레이크는 향기로운 식물이면서 사랑의 친밀함을 연상시키는 식물입니다.
우리 문간들에 있는 귀한 것들
앞에서는 포도밭과 들판으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다시 두 사람이 함께하는 공간의 문간으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여자는 자기 혼자만의 공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문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실제로 문간에 저장해 둔 과일이나 귀한 음식들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시라는 문맥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누릴 기쁨과 친밀함을 나타내는 풍요로운 이미지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새것은 최근에 얻은 것이고, 묵은 것은 오래 보관해 둔 것입니다. 둘 다 귀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여자는 새것과 묵은 것 모두를 간직해 두었습니다.
「간직해 두었다」는 숨겨 두거나 보관해 두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자는 이미 가지고 있던 귀한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남겨 두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때그때 생기는 감정만으로 설명되는 사랑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것을 오래된 사랑의 추억과 새롭게 발견한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직접 ‘추억’이나 ‘관계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가능한 시적 적용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확실한 것은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귀한 것들을 간직해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만드레이크는 두다임입니다. 이 낱말은 창세기 30:14–16에도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르우벤은 밀을 수확하는 시기에 들에서 만드레이크를 발견해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옵니다. 라헬은 그 만드레이크를 달라고 요청하고, 두 자매는 야곱과 함께 밤을 보내는 문제를 두고 거래합니다. 그 장면에서 만드레이크는 출산과 부부관계에 관한 갈망 및 경쟁 속에 놓여 있습니다. 고대에는 만드레이크를 사랑과 생식력에 관련된 식물로 여기는 관념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0장은 만드레이크가 실제로 임신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지 않습니다. 또한 만드레이크인 두다임과 바로 앞 절 사랑의 표현인 도다이는 히브리어에서 서로 비슷한 소리를 냅니다. 따라서 이 두 표현을 나란히 들으면 사랑과 향기로운 식물이 소리로도 연결됩니다. 이것을 반드시 의도적인 언어유희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히브리어 독자가 그 유사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새것도 묵은 것도, 너를 위해
아가 7장은 사람들이 한 여자를 돌아오라고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녀를 바라보고 싶어 했고, 여자의 몸은 장인의 장식품과 상아 탑, 성읍의 연못과 레바논의 탑, 대추야자나무와 포도송이에 비유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여자를 바라보는 장면이 중심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기쁨이 상대방의 목소리와 선택을 지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장이 모든 관계에서 남녀가 반드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가서가 인간의 몸과 사랑을 긍정적으로 노래한다고 해서 모든 욕망이 무조건 정당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신약에서 혼인과 사랑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지만(에베소서 5:25–32), 아가 7장 자체가 그 관계를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은 먼저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시로 읽어야 합니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부릅니다.
「오너라, 내 연인아. 들로 나가자.」 두 사람이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포도밭으로 가자고 말합니다. 아직 싹이 나고 꽃이 피는 나무들을 함께 살펴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사랑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바라보이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노래의 마지막에는 향기로운 만드레이크가 있고, 문간에는 새것과 묵은 것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 앞에서 여자는 연인에게 말합니다. 「내 연인아, 내가 너를 위해 간직해 두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