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9–11장 · 여러 민족의 앞날
목자가 지팡이를 꺾을 때
스가랴 11장에서 가장 두려운 장면은 백향목이 불타는 장면도, 사람들이 서로의 살을 먹는 장면도 아닙니다. 한 목자가 자기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꺾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이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목자가 처음부터 양들을 버리려고 등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죽임당할 양 떼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돌봄은 거부당하고, 결국 그 관계는 파국을 맞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시려고 목자를 보내셨는데, 왜 그 목자의 이야기는 보호의 상실과 공동체의 분열로 끝납니까?
바로 앞의 10장에서 여호와야훼는 흩어진 양 떼를 모으고 불쌍히 여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1장은 그 약속을 단순히 취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회복의 약속을 받은 백성에게 무엇이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이 쓰러지자 목자들이 울부짖는다
레바논아, 네 문들을 열어라. 그러면 불이 네 백향목들을 삼킬 것이다.스가랴 11:1 · 본디새김
스가랴 11장은 누군가의 기도나 하나님의 위로가 아니라, 레바논을 향한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레바논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아니라 산과 숲으로 알려진 지역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마치 레바논이 문을 가진 성읍인 것처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성문의 역할은 외부의 위협을 막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에서는 문이 열리는 것이 파괴의 시작입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그 크기와 견고함 때문에 고대 세계에서 귀한 건축 재료로 여겨졌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에도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용했습니다(열왕기상 5:6–10). 시편 92:12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자라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백향목이 불에 삼켜진다는 것은 단순히 나무 몇 그루가 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크고 견고하며 위엄 있는 것이 무너지는 장면입니다.
측백나무야, 울부짖어라. 백향목이 쓰러졌고, 위엄 있는 것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바산의 참나무들아, 울부짖어라. 접근하기 어려운 숲이 무너졌기 때문이다.스가랴 11:2 · 본디새김
여기서 나무들은 마치 서로의 운명을 알고 있는 존재들처럼 등장합니다. 백향목에서 시작된 파괴가 주변의 나무와 숲으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바산은 요단강 동쪽 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목초지와 참나무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사야 2:13에서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바산의 참나무가 함께 등장하며, 높고 위엄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낮아지는 맥락에 놓입니다.
스가랴 11장에서도 이 나무들이 자연환경의 파괴를 묘사하는 동시에 강하고 높아 보이는 존재들의 몰락을 상징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백향목과 참나무가 각각 특정한 왕이나 지도자를 가리킨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은 아직 그 대상들을 이름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3절에 이르면 숲의 파괴가 사람과 동물의 울부짖음으로 이어집니다.
목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다. 그들의 영화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사자들이 포효하는 소리다. 요단의 위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스가랴 11:3 · 본디새김
‘요단의 위엄’은 요단강 주변의 무성한 수풀과 같은 자연환경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49:19에서도 요단강의 무성한 지역과 사자가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사자들의 포효는 자신들이 머물던 서식지가 파괴된 데 따른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자들의 울부짖음도 자신들이 의지하던 목초지나 풍요로운 환경이 파괴되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의 다음 장면에서 목자들이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지도자들의 이미지로 등장하므로, 이 울부짖음을 지도자들의 몰락과 연결해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목자들은 양이 고통받기 때문에 울고 있다고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영화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울부짖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양들은 죽임당할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들을 책임진 사람들은 양의 고통보다 자기 이익에 관심을 보입니다. 따라서 1–3절은 단순한 재난의 서문만은 아닙니다. 파괴의 소리 속에서 누구의 상실이 드러나고, 정작 누구의 고통은 돌보아지지 않는지를 묻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그 양들을 위해 한 사람에게 명령하십니다.
양을 사고파는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가?
내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죽임당할 양 떼를 돌보아라.」스가랴 11:4 · 본디새김
4절부터 이야기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자연과 목자들의 울부짖음이 들렸지만, 이제는 예언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과 그에 따른 행동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서술은 예언자가 자신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상징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하고 토기 그릇을 깨뜨리는 행동을 통해 말씀을 전했습니다(예레미야 18:1–6; 19:1–13). 에스겔도 여러 행동을 통해 예루살렘의 운명을 보여 주었습니다(에스겔 4:1–8). 스가랴 11장에서도 목양과 지팡이를 꺾는 행동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눈에 보이게 합니다.
다만 본문이 기록하는 모든 행동이 실제 양들을 대상으로 수행된 역사적 사건인지, 예언적 장면 안에서 서술된 행동인지까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언자가 목자의 역할을 맡아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이 양들은 장차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죽임당할 대상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 양들을 사는 자들은 그것들을 죽여도 죄책을 지지 않는다. 그것들을 파는 자들은 『여호와야훼는 찬양받아 마땅하다. 내가 부자가 되었다.』 하고 말한다. 그것들의 목자들도 그것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스가랴 11:5 · 본디새김
이들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양 자체의 생명과 고통은 그들에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말과 자기의 경제적 성공을 자랑하는 말이 하나의 문장 안에 놓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자가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이 부를 얻는 방식이 바로 앞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임당할 양 떼를 팔아 이익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하나님의 복처럼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상품처럼 취급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면서도 그 성공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처지에는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양 떼는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비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경제 활동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지도자와 권력의 태도에 있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 하나님은 더욱 무거운 말씀을 하십니다.
「나도 이 땅에 사는 자들을 더는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 「보아라, 내가 사람들을 저마다 제 이웃의 손과 제 왕의 손에 넘기겠다. 그들이 이 땅을 짓부수어도 나는 그들의 손에서 건져 내지 않겠다.」스가랴 11:6 · 본디새김
이웃과 왕은 원래 삶을 함께 꾸리고 질서를 유지하는 관계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관계가 파괴의 통로가 됩니다. 백성은 외부의 적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과 자신들을 다스리는 통치자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파괴하는 자들의 행동을 선하다고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땅을 짓부수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들을 더 이상 그 파괴적인 권력의 손에서 구해 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보호의 철회를 통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더는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왜 바로 앞에서는 죽임당할 양 떼를 돌보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실마리는 이어지는 목양 이야기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의 돌봄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호의와 결속 — 목자의 두 지팡이가 지닌 의미
그래서 나는 죽임당할 양 떼, 곧 양 떼 가운데 고통받는 것들을 돌보았다. 나는 지팡이 두 개를 가져다가 하나는 호의라 이름하고 다른 하나는 결속이라 이름했다. 나는 그 양 떼를 돌보았다.스가랴 11:7 · 본디새김
목자의 지팡이는 양을 인도하고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데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이곳에서는 그 지팡이들에 이름이 붙으면서 하나님의 돌봄이 지닌 두 가지 의미를 드러내는 상징이 됩니다.
하나는 그들이 호의와 보호를 받는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서로 결속되어 하나의 양 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는 이름만으로 완전히 밝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팡이를 꺾는 장면에서 더욱 구체화됩니다.
앞에서는 양 떼 전체가 죽임당할 대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가운데 고통받는 양들이 특별히 언급됩니다. 본문은 모든 양이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반응했다고 단순화하지 않습니다. 고통받는 양들에게 특별한 시선을 남겨 둡니다.
그런데 목자의 돌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나는 한 달 사이에 그 세 목자를 멸절시켰다. 내 마음은 그들을 견디지 못했고, 그들의 마음도 나를 혐오했다.스가랴 11:8 · 본디새김
목양의 관계 자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나는 너희를 돌보지 않겠다. 죽어 가는 것은 죽기를, 멸절되는 것은 멸절되기를, 남은 것들은 저마다 제 동료의 살을 먹기를.」스가랴 11:9 · 본디새김
이 말은 4절의 명령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듯합니다. 처음에는 「죽임당할 양 떼를 돌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실망이나 사임의 표현이 아닙니다. 보호가 사라질 때 공동체에 어떤 파괴가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무서운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저마다 이웃과 왕의 손에 넘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양들은 서로의 살을 먹습니다.
이웃이 더 이상 함께 살아가는 상대가 아니라 서로를 파괴하는 상대가 된 것입니다.
돌봄이 사라진 공동체에서는 위험이 바깥에서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험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붕괴가 두 지팡이를 꺾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고통받는 것들」이 양 떼 전체와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문법상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고통받는 양들을 별도로 강조하는 표현인지, 죽임당할 양 떼의 처지를 다시 설명하는 표현인지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세 목자가 누구인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한 달 사이에 멸절되었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지도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세 사람을 특정한 왕이나 지도자로 이해할 수도 있고, 세 부류의 지도층을 상징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한 달이라는 기간을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급격한 심판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본문 자체가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바로 앞의 세 목자들을 가리키는지, 더 넓게 양 떼와의 갈등까지 포함하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이야기에서 목자의 돌봄이 거부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집니다. 특히 「저마다 제 동료의 살을 먹기를」이라는 표현은 극심한 굶주림 속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4:10에는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 부모가 자녀를 먹는 끔찍한 상황이 묘사됩니다. 스가랴 11:9에서도 실제 기근의 극한 상황을 암시할 수 있고,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는 공동체 내부의 파괴를 극단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특정한 사건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 지팡이가 부러질 때 — 하나님의 보호가 거두어진다
나는 내 지팡이 호의를 가져다가 잘라 버렸다. 내가 모든 민족과 맺은 내 언약을 깨뜨리려는 것이었다.스가랴 11:10 · 본디새김
표면적으로 지팡이를 꺾는 사람은 목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언약을 맺으신 분은 여호와야훼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동하는 목자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목소리가 겹쳐 나타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첫 번째 지팡이가 꺾일 때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던 어떤 호의와 보호의 질서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이 일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날 그 언약이 깨졌다. 나를 지켜보던 양 떼 가운데 고통받는 것들은 그것이 여호와야훼의 말이라는 것을 그렇게 알았다.스가랴 11:11 · 본디새김
그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했는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기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을 단순히 잘못된 지도자들에게 속한 무리로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파괴적인 질서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공동체 전체가 심판을 겪는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책임을 지고 있거나 똑같은 태도로 하나님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이 장은 양을 이용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과, 그 때문에 고통받는 양들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이 장을 읽으면서 고통받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돌봄을 거부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예언자는 목양을 마무리하는 듯한 행동을 합니다. 자기 품삯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모든 민족과 맺은 내 언약」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과 다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민족들의 행동을 제한하여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질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지팡이를 꺾는 일은 이스라엘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주던 보호가 거두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해석은 6절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다른 권세의 손에 넘기시고 더 이상 건져 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내용과 잘 연결됩니다. 다른 읽기는 창세기 9:8–17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후손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과 맺으신 언약처럼 더 넓은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하나님의 질서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가랴 11:10은 그 언약의 내용이나 체결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언약과 동일한 언약이라고 확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어느 해석을 택하든 본문이 밝히지 않은 세부 내용을 지나치게 채워 넣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은 서른 — 목자에게 매겨진 뜻밖의 값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눈에 좋다면 내 품삯을 주어라. 그렇지 않다면 그만두어라.」 그들은 내 품삯으로 은 서른을 달아 주었다.스가랴 11:12 · 본디새김
이 장면은 갑자기 현실적인 거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강요가 없습니다. 상대가 그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 선택하도록 맡깁니다. 따라서 뒤이어 나오는 은 서른은 단순한 급여 지급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목자의 돌봄을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는지를 보여 주는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그것을 토기장이에게 던져라. 그들이 내게 매긴 그 대단한 값을.」 나는 그 은 서른을 가져다가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졌다.스가랴 11:13 · 본디새김
표면적으로 품삯을 받은 사람은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금액을 자신에게 매겨진 값처럼 말씀하십니다. 앞서 언약을 깨뜨리는 행동에서 예언자와 하나님의 목소리가 겹쳐졌던 것처럼, 여기서도 목자를 대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예언자는 그 돈을 귀중한 보상처럼 받아 간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목자의 돌봄에 매겨진 값이 하나님의 집에서 거부되는 듯한 모습입니다.
은 서른이라는 액수, 목자의 품삯, 여호와야훼가 자신에게 매겨진 값이라고 말씀하시는 표현, 그리고 그 돈을 던지는 행동이 하나로 결합하여 거절과 모욕의 장면을 이룹니다.
5절과 연결하면 또 다른 대조가 나타납니다. 양을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자기 부를 자랑하고, 양을 돌본 사람은 자신의 수고를 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두 장면을 함께 놓으면 공동체의 가치 판단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지팡이만 부러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은 서른을 달아 주었다고 말하며, 무게 단위를 명시적으로 적지는 않습니다. 통상적인 이해에서는 은 삼십 세겔로 읽습니다. 출애굽기 21:32에는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아 죽였을 때 소의 주인이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지급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가랴 11장의 은 서른을 종의 죽음에 대한 배상금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규정이 모든 시대와 상황에서 종 한 사람의 일반적인 시장가격을 정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은 서른을 무조건 ‘종의 값’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대단한 값」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고려하면 비꼬는 말로 읽을 가능성이 큽니다. 히브리어에는 ‘값지다’ 또는 ‘귀하게 평가하다’라는 뜻과 관련된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리고 그 평가의 대상이 ‘나’라는 일인칭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은 그 토기장이가 누구인지, 성전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하요체르(יָצַר), 곧 ‘토기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칠십인역은 이 대목을 토기장이가 아니라 금속을 녹이고 다루는 장소와 관련된 표현으로 옮겼습니다. 은을 다루는 장면과 더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이는 히브리어 본문과 다른 읽기입니다. 따라서 토기장이를 성전의 특정 관리인으로 단정하거나, 이 돈이 반드시 어떤 공적인 금고에 들어갔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7:3–10에서는 은 서른과 성전, 토기장이와 관련된 이미지가 예수의 배신 사건에 연결됩니다. 특히 스가랴 11:12–13과의 언어적 유사성이 뚜렷합니다. 다만 마태복음은 이 인용을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소개하며, 토기장이의 밭이라는 요소도 포함합니다. 그 구체적인 인용 관계에는 해석상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신약은 그 이미지를 예수의 이야기와 연결해 읽지만, 그것이 스가랴 본문의 모든 세부 행동이 오직 한 인물의 생애를 암호처럼 예고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번째 지팡이가 부러질 때 — 형제 관계마저 끊어진다
나는 내 두 번째 지팡이 결속을 잘라 버렸다.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형제 관계를 깨뜨리려는 것이었다.스가랴 11:14 · 본디새김
첫 번째 지팡이는 공동체가 외부 세계와 맺고 있는 보호의 질서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두 번째 지팡이는 공동체 내부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밖으로는 보호가 무너지고, 안으로는 결속이 무너집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순히 같은 지역에 사는 두 집단이 아닙니다. 하나의 조상과 역사, 하나님과의 언약을 공유하는 백성입니다. 따라서 그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은 정치적인 동맹의 해체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본래 함께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서로 분리되는 것입니다.
6절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이웃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9절에서는 남은 양들이 서로의 살을 먹는 참혹한 상황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제 그 모든 관계의 붕괴가 ‘결속’이라는 지팡이 하나가 부러지는 행동으로 압축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다시 목자의 도구를 들라고 명령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형제 관계’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분열된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솔로몬 이후 왕국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었습니다(열왕기상 12:16–20). 이후 두 왕국은 여러 차례 충돌했고, 서로 다른 정치적 역사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 10:6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유다 집안을 강하게 하고 요셉 집안을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방향은 분열된 백성의 회복이었습니다. 반면 11:14에서는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형제 관계가 깨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모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이 장에서 예언자는 그 공동체가 참된 목자의 돌봄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관계의 파괴를 경험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11:14가 10:6의 약속을 영원히 폐기한다는 뜻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예언적 장면과 관점을 제시하며, 그 역사적 실현의 구체적인 순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양을 돌보지 않는 목자는 양을 먹는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어리석은 목자의 도구를 다시 가져라.」스가랴 11:15 · 본디새김
여기서 ‘어리석은’이라는 말은 단순히 지능이 낮거나 경험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지혜문학에서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거부하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잠언 1:7에서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고 말합니다. 스가랴에서도 이 목자가 왜 어리석은지는 그가 하는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보아라, 내가 이 땅에 목자 하나를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멸절되어 가는 것들을 돌보지 않고, 흩어진 것을 찾지 않고, 부러진 것을 고치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먹여 살리지 않을 것이다. 살진 것의 살을 먹고, 그것들의 발굽을 뜯어낼 것이다.」스가랴 11:16 · 본디새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그의 악함을 드러냅니다.
양은 목자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양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바로 목자입니다.
‘살진 것’은 목자가 먹을 만한 것으로 여기는 양입니다. 그는 그 양의 살을 먹습니다. 이것은 백성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착취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강렬하게 나타냅니다.
더욱 잔혹한 표현은 발굽을 뜯어낸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어떤 행위를 비유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지만, 양을 조금 이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끝까지 뜯어 먹고 파괴하는 모습입니다. 이 목자는 양을 살아 있게 하여 다시 먹이고 기르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양에게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빼앗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목자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우신다고 해서 그 목자의 악행이 선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은 그 목자를 향해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오히려 앞에서 참된 목자의 돌봄이 거부되고 지팡이가 꺾인 뒤, 파괴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는 일이 심판의 일부로 제시됩니다.
돌봄을 거부한 공동체가 돌봄 없는 권력 아래 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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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에스겔 34:4와 매우 가깝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약한 양을 강하게 하지 않고, 병든 양을 고치지 않으며, 상한 양을 싸매지 않고, 쫓긴 양을 돌아오게 하지 않으며, 잃어버린 양을 찾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양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직접 양들을 찾아 나서겠다고 선언하십니다(에스겔 34:11–16). 그리고 자기 종 다윗을 그들 위에 한 목자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에스겔 34:23–24). 스가랴 11장에서는 그와 다른 국면이 강조됩니다. 참된 목자가 등장하지만 그의 돌봄이 거부됩니다. 그리고 양을 먹어 치우는 목자가 나타납니다. 이 두 본문은 서로 같은 사건을 단순히 다른 말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목자의 책임, 백성의 고통, 하나님의 심판과 돌봄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공유합니다. 이러한 구약의 목자 전통은 신약에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요한복음 10:11–13에서 예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선한 목자와 위험이 닥치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는 삯꾼을 대조하십니다.
쓸모없는 목자의 팔과 오른눈
「아, 양 떼를 버리는 쓸모없는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그의 오른눈을 치기를. 그의 팔은 반드시 말라 버리고, 그의 오른눈은 반드시 어두워질 것이다.」스가랴 11:17 · 본디새김
목자의 이름과 지위는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양에게 필요한 일을 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자기 양을 해치는 사람이므로 목자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목자는 양에게 필요한 힘을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 힘 자체가 심판받습니다.
조금 더 깊이
팔은 힘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신체 부위입니다. 목자는 팔로 양을 붙잡고, 지팡이를 사용하며, 위험한 짐승으로부터 양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눈은 주변을 살피는 데 필요합니다. 목자는 양 떼가 어디에 있는지, 위험이 어디서 오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팔과 오른눈이 손상되는 것은 목자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이 두 부위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팔은 반드시 정치 권력을, 오른눈은 반드시 특정한 예언 능력을 상징한다고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부러진 양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의 팔이 말라 버립니다. 그는 흩어진 양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의 오른눈이 어두워집니다. 이것이 본문이 의도한 정확한 대응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돌보기를 거부한 목자가 마침내 스스로도 돌볼 능력을 잃게 되는 장면으로 읽으면 문학적인 힘이 드러납니다.
부러진 두 지팡이
본문은 먼저 하나님의 돌봄이 명령되고 실제로 시행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혐오와 거부 속에서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스가랴 11장은 그 관계의 파국을 두 지팡이의 파괴로 나타냅니다.
양을 지키던 지팡이가 부러진 뒤에야, 사람들은 그 지팡이가 무엇을 지키고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장의 마지막에는 아무도 그 지팡이를 다시 들지 않습니다.
대신 양을 버린 목자를 향해 칼이 선포됩니다. 그의 팔은 말라 버리고, 그의 오른눈은 어두워집니다. 한때 양들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했던 힘과 시야가, 양들을 버린 목자에게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스가랴 11장은 그 장면에서 멈춥니다.
부러진 지팡이 두 개와, 더 이상 양을 제대로 돌볼 수 없는 목자.
그 침묵 속에서 독자는 묻게 됩니다. 양 떼에게는 이제 어떤 목자가 필요합니까?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