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2–14장 · 예루살렘의 마지막 날

승리한 사람들은 왜 우는가?

스가랴 12장은 거대한 승리의 이야기처럼 시작합니다.

땅의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비틀거리게 하시고, 그들의 군마를 눈멀게 하십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불붙은 횃불처럼 적들을 삼키고, 예루살렘에서 가장 약한 사람조차 다윗처럼 강해집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예상과 전혀 다르게 끝납니다.

승리한 예루살렘 사람들이 울기 시작합니다.

다윗 집안이 울고, 레위 집안이 울고, 온 땅의 씨족들이 저마다 따로 모여 애곡합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외아들이나 맏아들을 잃은 부모의 슬픔에 비유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원수들을 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는 기쁨의 노래가 울려 퍼져야 하지 않을까요?

스가랴 12장의 가장 놀라운 반전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구원하신 다음에도 그들에게 이루셔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912장 본문 읽기 →

사람의 영을 빚으시는 하나님이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스가랴 12:1 본문 →

신탁이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하늘을 펼치고 땅의 기초를 놓으며 사람의 영을 그 사람 속에 빚는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스가랴 12:1 · 본디새김

12장은 새로운 신탁의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같은 형태의 제목이 9:1에도 등장했으므로, 여기서 예언의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선언은 구약에서 낯설지 않습니다. 이사야 42:5에서도 하나님은 하늘을 창조하시고 땅을 펼치시며 땅 위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늘과 땅을 말씀하신 다음 곧바로 사람의 내면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여기서 ‘사람의 영’은 히브리어 루아흐(⁨רוּחַ⁩) 아담입니다. 루아흐는 바람, 숨, 영을 가리킬 수 있으며, 문맥에 따라 사람의 생명과 내적인 존재를 나타냅니다. 사람의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왜 예루살렘의 전쟁에 관한 신탁이 이런 창조 선언으로 시작할까요?

하나님은 나라들의 군마를 혼란에 빠뜨리실 뿐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에도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호의와 간구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1절의 ‘영’과 10절의 ‘영’이 같은 히브리어 낱말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물론 1절에서는 하나님이 빚으시는 인간의 영을, 10절에서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호의와 간구의 영을 말하므로 그 의미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지으신 분이며, 그 내면을 새롭게 움직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제 그 창조주께서 포위당한 예루살렘을 어떻게 다루실지 말씀하십니다.

공격하는 자를 취하게 하는 잔, 짊어지는 자를 다치게 하는 돌

스가랴 12:2–3 본문 →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주변 모든 민족을 비틀거리게 하는 잔으로 만들겠다. 예루살렘이 포위될 때에는 유다에도 그것이 미칠 것이다.」스가랴 12:2 · 본디새김

이 이미지는 구약의 심판 언어와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25:15–17에서 여호와야훼는 진노의 포도주 잔을 예레미야에게 주시며 여러 나라가 그것을 마시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사야 51:17에서도 예루살렘은 여호와야훼의 진노의 잔을 마셔 비틀거렸던 도시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가랴 12장에서는 상황이 뒤집힙니다.

예루살렘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자체가 주변 민족들을 비틀거리게 하는 잔이 됩니다. 민족들은 예루살렘을 자기들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도시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 다가온 결과는 자기들의 혼란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문장인 「예루살렘이 포위될 때에는 유다에도 그것이 미칠 것이다」는 해석상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원문의 문장 관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유다도 포위와 전쟁의 영향권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예루살렘을 둘러싼 충돌에 유다 역시 연루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예루살렘의 위기가 도시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3절에서는 두 번째 비유가 나옵니다.

「그날에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짐이 되는 돌로 만들겠다. 그것을 짊어지는 자들은 모두 심하게 찢기는 상처를 입을 것이다. 땅의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일 것이다.」스가랴 12:3 · 본디새김

어떤 돌은 무거워서 쉽게 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억지로 짊어지려다가 몸을 다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적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치게 되는 이유는 예루살렘을 다루려는 자신들의 행동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가 그 도시를 그런 돌로 만드십니다.

2절에서도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잔으로 만드셨고, 3절에서도 하나님이 돌로 만드십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안전은 도시 자체의 크기나 군사력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도시를 어떻게 다루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공격의 대상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그 도시를 공격하는 자들이 자기 힘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소로 만드십니다.

여기서 ‘모든 나라’는 12장의 예언적 전망을 보여 주는 포괄적인 표현입니다. 예언은 세상 전체가 예루살렘을 향해 몰려오는 듯한 장면을 그립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하나님은 그 거대한 군대가 의지하는 힘을 무너뜨리십니다.

적들의 눈은 멀고, 하나님의 눈은 열린다

스가랴 12:4–6 본문 →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 「그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혼란에 빠뜨리고, 그 말을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겠다. 내 눈을 떠서 유다 집안을 살피고, 민족들의 모든 말을 쳐서 눈멀게 하겠다.」스가랴 12:4 · 본디새김

말과 기병은 고대 전쟁에서 중요한 군사적 자산이었습니다. 특히 기병과 전차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군대는 보병을 상대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강점이 무력해집니다.

전쟁에서 말과 기수가 능력을 발휘하려면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 어떤 경로로 움직여야 하는지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그들은 모두 그 능력을 잃습니다.

민족들의 말은 눈이 멀지만,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눈을 뜨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다를 주목하시고 돌보시는 행동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24:6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유배된 백성을 선하게 바라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돌봄과 구원의 의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변화 속에서 유다의 지도자들이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유다의 우두머리들이 마음속으로 말할 것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이들은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야훼 안에서 내게 힘이 된다.』」스가랴 12:5 · 본디새김

예루살렘이 단순히 강력한 군사 요새이기 때문에 유다의 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여호와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힘이 됩니다.

유다의 우두머리들은 복수로 등장하지만, 그들의 말 안에서는 「내게」라는 단수형이 사용됩니다. 이는 각 지도자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같은 사실을 깨닫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문장 구조를 다르게 이해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의 힘이 여호와야훼에게 있다는 뜻으로 읽는 번역도 가능합니다. 두 읽기의 강조점은 조금 다르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의 힘이 여호와야훼에게서 나온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6절에서는 그 힘이 또 다른 비유로 표현됩니다.

「그날에 내가 유다의 우두머리들을 장작 사이의 불 담긴 화로처럼, 베어 놓은 곡식 사이의 불붙은 횃불처럼 만들겠다. 그들은 오른쪽과 왼쪽으로 주변의 모든 민족을 삼킬 것이다. 예루살렘은 다시 제자리에, 예루살렘에 자리 잡을 것이다.」스가랴 12:6 · 본디새김

앞에서는 예루살렘이 잔과 돌이었습니다. 이제 유다의 지도자들은 불이 됩니다. 장작 사이의 화로와 베어 놓은 곡식 사이의 횃불은 주변의 물질을 빠르게 태울 수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예언의 초점은 적을 삼키는 행동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6절의 마지막 문장은 같은 도시의 이름을 되풀이합니다. 위협받던 예루살렘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계속 존재하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9장에서는 주변 민족들의 공격 앞에서 여호와야훼가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해 진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9:8). 여기서는 하나님이 직접 적들의 힘을 무너뜨리시고, 예루살렘이 자기 자리에 남아 있게 하십니다.

구원의 결과는 단지 원수의 패배가 아닙니다. 삶의 자리를 빼앗길 뻔했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구원을 누구에게 먼저 베풀어야 하는지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예루살렘보다 유다의 천막을 먼저 구원하시는가?

스가랴 12:7–9 본문 →

여호와야훼가 유다의 천막들을 먼저 구할 것이다. 다윗 집안의 영화와 예루살렘에 사는 이의 영화가 유다의 영화보다 커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스가랴 12:7 · 본디새김

예루살렘은 성벽을 갖춘 도시이며 다윗 왕조의 중심이었습니다. 반면 유다의 천막들은 성 밖의 거주지,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약한 사람들의 생활공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루살렘과 다윗 집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의 영광을 독점하여 유다의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는 유다의 천막들을 먼저 구원하심으로써, 구원이 예루살렘의 위세나 왕실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공동체를 외부의 위협에서 건져 낼 뿐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우월감이 생기는 것까지 경계합니다.

다음 절에서는 오히려 예루살렘 주민들과 다윗 집안에게 놀라운 힘이 약속됩니다.

그날에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에 사는 이를 지킬 것이다. 그날에는 그들 가운데 비틀거리는 이가 다윗처럼 되고, 다윗 집안은 하나님처럼, 그들 앞에 있는 여호와야훼의 천사처럼 될 것이다.스가랴 12:8 · 본디새김

‘비틀거리는 이’는 넘어지거나 흔들리는 약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군사적 용맹과 왕권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가장 약한 사람조차 다윗처럼 된다는 것은 공동체 전체에 놀라운 힘이 주어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 엘로힘(⁨אֱלֹהִים⁩)은 문맥에 따라 하나님 또는 신적인 존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바로 뒤에 「여호와야훼의 천사처럼」이라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다윗 집안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존재처럼 강하게 된다는 비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출애굽기 23:20–23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 앞에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가랴에서도 다윗 집안은 백성 앞에 있는 여호와야훼의 천사에 비유됩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을 나타내는 역할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윗 집안의 통치자들이 모두 신성한 존재가 되어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해도 된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바로 앞의 7절에서 하나님은 다윗 집안의 영화가 유다의 영화보다 커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 집안을 강하게 하시지만, 그 힘을 이유로 다른 백성 위에 교만하게 서는 것은 경계하십니다.

그리고 9절에서 하나님은 앞선 전쟁의 선언을 마무리하십니다.

「그날에 나는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모든 나라를 멸절시키려 하겠다.」스가랴 12:9 · 본디새김

여기서 원문은 하나님이 적들을 멸절시키려고 나서실 것이라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그 전쟁의 구체적인 과정이나 역사적 날짜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 구절이 이후 어느 시대의 모든 국제전쟁을 해석하는 도식이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은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을 위협하는 세력 앞에서 방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까지라면 이 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승리의 이야기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가장 중요한 전환을 아직 남겨 두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호의와 간구의 영

스가랴 12:10 본문 →

이 구절부터 예언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적들을 치시는 대신 자기 백성에게 무언가를 부어 주십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호의와 간구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은혜를 베푸는 일과 은혜를 간청하는 일이 한 표현 안에서 만납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호의와 간구의 영을 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부어 주십니다.

백성이 자기 힘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습을 먼저 보여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로운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자들로부터 구원하실 뿐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서도록 이끄십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바라보며 애곡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영’을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 일으키시는 새로운 마음의 성향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두 의미를 완전히 분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내면적 변화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레미야 31:31–34에서는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으시고 자신의 가르침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 36:25–27에서는 정결하게 하시는 행동과 새로운 마음과 영을 주시는 행동이 함께 등장합니다. 요엘 2:28–29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본문들은 구체적인 표현과 문맥은 다르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실 때 그들의 외적인 처지만이 아니라 내적인 삶에도 새롭게 역사하신다는 공통된 주제를 지닙니다.

「자기들이 찌른 나」 — 그들은 누구를 바라보는가?

스가랴 12:10 본문 →

「내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이에게 호의와 간구의 영을 쏟아붓겠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볼 것이다. 외아들을 두고 애곡하듯 그를 두고 애곡하고, 맏아들을 두고 비통해하듯 그를 두고 비통해할 것이다.」스가랴 12:10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이 가한 폭력과 관련된 대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첫 번째는 이 표현을 있는 그대로 읽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찔렀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어떤 인물을 찔렀으며, 하나님이 그 인물에게 가해진 폭력을 자신에 대한 행동으로 받아들이신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문장의 ‘나’와 ‘그’의 관계를 구별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찌른 인물을 두고 애곡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인칭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문장을 자연스럽게 읽기 어렵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찌른 대상이 누구인지 이해하는 문제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12장은 찔림을 당한 이의 이름이나 신분, 그가 찔린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서 ‘그들’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직접 무기를 들고 찔렀다는 뜻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집단적인 책임을 표현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슬퍼하는 사건과 공동체 자신의 행동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앞에서는 예루살렘을 공격한 다른 민족들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신들이 찌른 이를 바라봅니다.

문제의 방향이 바깥에서 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외부의 공격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 백성의 행동이 남긴 상처를 그들 앞에 드러내십니다. 이 대목을 단순히 승리 이후의 감사나 희생자에 대한 일반적인 추모로만 읽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로 하여금 외면하던 것을 보게 합니다.

이 슬픔이 어디까지 죄의 자각과 회개를 포함하는지는 구절 하나만으로 모두 설명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고백이나 회개의 말을 직접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호의와 간구의 영이 이러한 애곡을 일으킨다는 문맥은, 그 슬픔이 단순한 감정적 반응 이상의 신앙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엘라이 에트 아셰르 다카루(⁨דָּקַר⁩)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엘라이는 ‘나를 향하여’ 또는 ‘내게’라는 뜻이고, 다카루는 ‘그들이 찔렀다’는 뜻입니다. ‘찌르다’라는 동사는 날카로운 무기로 관통하거나 찌르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본디새김은 이 문장 관계를 「자기들이 찌른 나를」로 옮겼습니다. 첫 번째 읽기의 경우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거부와 공격을 찔림이라는 강렬한 언어로 표현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자나 대표자에게 행한 일이 하나님 자신에게 행한 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 두 번째 읽기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인칭의 전환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이 해석들은 서로 다른 장점을 갖습니다. 또한 일부 고대 본문 전통에는 ‘나를 향하여’ 대신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방식으로 읽을 여지가 있는 형태가 전해집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이 따르는 히브리어 본문의 표현과 인칭 전환을 없애지 않고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9:37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군인이 그의 옆구리를 찌른 사건과 관련하여 스가랴 12:10을 인용합니다. 요한복음은 이 본문을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과 연결해 읽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주제적 유사성이 아니라, 신약 본문이 스가랴의 말씀을 직접 가져와 해석한 경우입니다. 요한계시록 1:7에서도 찔린 이를 바라보고 땅의 여러 민족이 애곡하는 이미지가 다시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스가랴 12장의 언어가 예수의 나타나심과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그러나 스가랴 12장 자체에서는 찔린 이의 신분이나 사건의 경위가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약의 해석은 스가랴의 이미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서 읽는 후대의 정경적 연결입니다. 그 연결이 중요하다고 해서 구약 본문이 가진 역사적·문학적 질문을 모두 생략할 필요는 없습니다.

외아들과 맏아들을 잃은 슬픔

스가랴 12:11 본문 →

본문은 애곡의 강도를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합니다.

10절의 「외아들을 두고 애곡하듯」이라는 표현은 대체할 수 없는 존재를 잃었다는 상실의 깊이를 강조합니다. 이 비유는 찔린 인물이 실제로 누군가의 외아들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이 외아들을 잃은 부모의 슬픔만큼 깊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맏아들의 비유도 비슷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맏아들은 가문의 계승과 책임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맏아들의 죽음은 사랑하는 자녀를 잃는 슬픔과 함께 가족의 미래가 흔들리는 상실로 경험될 수 있었습니다.

외아들과 맏아들의 죽음은 개인과 가족의 가장 깊은 슬픔을 나타냅니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을 묘사하던 예언이 이제 한 가정이 감당해야 하는 상실의 언어로 바뀝니다. 전쟁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그 죽음은 때로 숫자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자녀의 죽음은 숫자가 아닙니다.

대체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상실입니다.

스가랴는 공동체 전체가 애곡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바로 그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찔린 이를 얼마나 깊이 바라보게 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어서 11절에서는 슬픔이 예루살렘 전체로 확대됩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의 애곡이 므깃돈 골짜기의 하닷림몬의 애곡처럼 커질 것이다.」스가랴 12:11 · 본디새김

예루살렘의 애곡은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엄청난 애곡처럼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12절부터 예언은 그 큰 애곡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하닷림몬을 므깃돈 근처의 지명으로 이해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과거 그 지역에서 일어난 큰 애곡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하 23:29에 따르면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이집트 왕 느고와 맞닥뜨렸을 때 죽었습니다. 역대하 35:22–25는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전투하다가 부상을 입고 죽었으며, 예레미야와 노래하는 사람들이 그를 위해 애가를 불렀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하닷림몬의 애곡을 요시야의 죽음과 관련된 애곡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요시야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읽기는 하닷림몬을 고대 근동의 신 이름과 관련된 표현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닷과 림몬은 폭풍이나 비와 연관된 신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열왕기하 5:18에서도 림몬이라는 신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경우에는 특정한 신에 대한 제의적 애곡과 연결해 이해하려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가랴 12:11만으로 하닷림몬이 지명인지 신의 이름인지, 또는 정확히 어떤 애곡 의식을 가리키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온 땅이 울지만, 사람들은 따로 운다

스가랴 12:12–14 본문 →

「그 땅이 씨족마다 따로따로 애곡할 것이다. 다윗 집안의 씨족은 따로, 그들의 아내들은 따로, 나단 집안의 씨족은 따로, 그들의 아내들은 따로,」스가랴 12:12 · 본디새김

그런데 이제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처럼 각 가문을 하나씩 보여 줍니다.

「레위 집안의 씨족은 따로, 그들의 아내들은 따로, 시므이 씨족은 따로, 그들의 아내들은 따로,」스가랴 12:13 · 본디새김

다윗 집안은 왕권과 관련되어 있고, 레위 집안은 성전과 예배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들은 공동체의 중요한 지도적·종교적 가문들까지 애곡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8절에서는 다윗 집안이 「하나님처럼, 그들 앞에 있는 여호와야훼의 천사처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놀라운 힘과 지위가 약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다윗 집안이 애곡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그들이 이제 슬픔과 간구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들의 특별한 지위가 슬픔과 간구에서 예외가 될 이유는 없습니다.

다윗 집안의 씨족은 따로, 아내들은 따로.

나단 집안의 씨족은 따로, 아내들은 따로.

레위 집안과 시므이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큰 의식을 치르는 장면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각 가문이 저마다 애곡합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같은 슬픔을 경험하더라도, 그 슬픔이 하나의 집단적인 감정으로만 처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문학적으로 분명한 효과는 여성들의 애곡이 남성 가문들의 애곡 속에 묻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슬픔도 따로 언급됩니다. 공동체 전체가 애곡하지만, 그 안의 각 가문과 구성원들이 저마다 그 슬픔에 참여합니다.

전쟁의 규모는 온 세상이었지만, 애곡의 장면은 각 가정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남은 모든 씨족도 씨족마다 따로따로, 그들의 아내들도 따로 애곡할 것이다.」스가랴 12:14 · 본디새김

여기서는 더 이상 특정한 가문의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모든 씨족까지 포함됩니다. 이제 예언은 그 슬픔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으로 넓혀 갑니다.

온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 앞에 서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의 슬픔과 간구만으로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윗의 아들 가운데 나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사무엘하 5:14). 따라서 다윗 집안과 나단 집안의 병렬을 왕실 전체와 그 안의 특정 가계에 대한 언급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레위의 후손 가운데에도 시므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민수기 3:17–18에는 레위의 아들 게르손과 그 후손 계보 속에 시므이가 나옵니다. 따라서 레위 집안과 시므이 집안을 제사장 및 레위 계통의 집안들과 관련지어 이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본문은 큰 가문과 그 안의 특정 가계를 나란히 언급하는 방식으로 애곡의 범위를 드러냅니다. 다만 12장 자체가 두 사람의 정확한 계보를 밝히지는 않습니다. 나단을 반드시 다윗의 아들 나단으로, 시므이를 반드시 게르손의 후손 시므이로 확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이 실제 애곡 의식에서 반드시 남자들과 공간적으로 격리되어 있었다는 문화적 규칙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당시의 애곡 관습과 연결해 생각할 수는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구체적인 의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소리

스가랴 12:1–14 본문 →

본문은 하나님이 외적인 적을 물리치셨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애곡하는 장면을 반드시 지나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백성을 구원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영은 백성의 시선을 바꾸는 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슬픔 자체를 신앙의 목표로 삼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 슬픔을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라고 해석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스가랴 12장은 특별히 사람들이 자신들이 찌른 이와 관련하여 애곡하는 장면을 말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채우는 것은 승리의 함성이 아닙니다.

애곡입니다.

다윗 집안이 울고, 나단 집안이 웁니다.

레위 집안이 울고, 시므이 집안이 웁니다.

그리고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다른 모든 씨족도 웁니다.

그들의 아내들 역시 저마다 따로 애곡합니다.

이 장은 그 눈물을 급하게 닦아 주지 않습니다. 슬픔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호의와 간구의 영을 부어 주셨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그 눈물은 단순히 패배한 사람들의 절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그분의 은혜 안에서 자신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흘리는 눈물입니다.

스가랴는 그 장면을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한 가문에서 다른 가문으로, 또 다른 가문으로 시선을 옮겨 갑니다. 이름이 알려진 집안도,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집안도 빠지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반복되는 말은 「따로따로」입니다.

큰 전쟁의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이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울고 있습니다.

스가랴 12장은 그 눈물의 장면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