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2–14장 · 예루살렘의 마지막 날

승리한 사람들은 왜 우는가?

스가랴 12장은 거대한 승리의 이야기처럼 시작합니다.

온 땅의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비틀거리게 하시고, 그들의 말을 눈멀게 하십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타오르는 횃불처럼 적들을 삼키고, 예루살렘에서 가장 약한 사람조차 다윗처럼 강해집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예상과 전혀 다르게 끝납니다.

승리한 예루살렘 사람들이 울기 시작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원수들을 없애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는 기쁨의 노래가 울려 퍼져야 하지 않을까요?

스가랴 12장의 가장 놀라운 반전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구원하신 다음에도 그들에게 이루셔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적들의 힘을 무너뜨리십니다. 뒷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912장 본문 읽기 →

사람의 영을 빚으시는 하나님이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스가랴 12:1 본문 →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 곧 여호와야훼의 말씀입니다. 하늘을 펼치고 땅의 기초를 놓으며 사람 안에 그 사람의 영을 빚는 여호와야훼의 선언입니다.스가랴 12:1 · 두루새김

12장은 새로운 예언의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같은 형태의 제목이 9:1에도 등장했으므로, 여기서 예언의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創造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선언은 구약에서 낯설지 않습니다. 이사야 42:5에서도 하나님은 하늘을 창조하시고 땅을 펼치시며 땅 위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늘과 땅을 말씀하신 다음 곧바로 사람의 내면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왜 예루살렘의 전쟁에 관한 예언이 이런 창조 선언으로 시작할까요?

하나님은 나라들의 말을 혼란에 빠뜨리실 뿐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에도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은혜와 간절한 기도의 영」을 쏟아부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1절의 「영」(⁨רוּחַ⁩)과 10절의 「영」이 같은 히브리어 낱말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물론 1절에서는 하나님이 빚으시는 사람의 영을, 10절에서는 하나님이 쏟아부으시는 은혜와 간절한 기도의 영을 말하므로 그 의미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지으신 분이며, 그 내면을 새롭게 움직이실 수 있는 분입니다.

공격하는 자를 취하게 하는 잔, 들어 올리는 자를 다치게 하는 돌

스가랴 12:2–3 본문 →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주변의 모든 민족을 비틀거리게 하는 잔으로 만들겠다. 예루살렘을 에워싼 공격은 유다에도 미칠 것이다.」스가랴 12:2 · 두루새김

이 이미지는 구약의 심판 언어와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25:15–17에서 여호와야훼는 진노의 포도주 잔을 예레미야에게 주시며 여러 나라가 그것을 마시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사야 51:17에서도 예루살렘은 여호와야훼의 진노의 잔을 마셔 비틀거렸던 도시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가랴 12장에서는 상황이 뒤집힙니다.

예루살렘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자체가 주변 민족들을 비틀거리게 하는 잔이 됩니다.

민족들은 예루살렘을 자기들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도시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 다가온 결과는 자기들의 혼란입니다.

3절에서는 두 번째 비유가 나옵니다.

「그날에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로 만들겠다. 그 돌을 들어 올리는 자는 누구나 심한 상처를 입을 것이다. 온 땅의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일 것이다.」스가랴 12:3 · 두루새김

어떤 돌은 무거워서 쉽게 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억지로 들어 올리려다가 몸을 다칠 수 있습니다.

2절에서도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잔으로 만드셨고, 3절에서도 하나님이 돌로 만드십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안전은 도시 자체의 크기나 군사력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도시를 어떻게 다루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공격의 대상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그 도시를 공격하는 자들이 자기 힘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소로 만드십니다.

여기서 「모든 나라」는 12장의 예언이 바라보는 범위를 보여 주는 넓은 표현입니다. 예언은 세상 전체가 예루살렘을 향해 몰려오는 듯한 장면을 그립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마지막 문장인 「예루살렘을 에워싼 공격은 유다에도 미칠 것이다」는 원문에서 해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원문에서는 유다에도 미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문장 관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유다도 포위와 전쟁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예루살렘을 둘러싼 충돌에 유다 역시 얽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예루살렘의 위기가 도시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적들의 눈은 멀고, 하나님의 눈은 열린다

스가랴 12:4–6 본문 →

여호와야훼의 선언입니다. 「그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혼란에 빠뜨리고, 그 말을 탄 자들은 제정신을 잃게 하겠다. 나는 눈을 뜨고 유다 백성을 살피겠다. 민족들의 말은 모두 쳐서 눈멀게 하겠다.」스가랴 12:4 · 두루새김

말과 기병은 고대 전쟁에서 중요한 군사적 자산이었습니다. 특히 기병과 전차를 효과적으로 움직이는 군대는 보병을 상대로 상당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강점이 힘을 잃습니다.

전쟁에서 말과 말을 탄 자들이 능력을 발휘하려면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 어떤 길로 움직여야 하는지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적을 더 강한 기병대로 물리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적들의 기병이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민족들의 말은 눈이 멀지만,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눈을 뜨십니다.

예레미야 24:6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유배된 백성을 선하게 바라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돌봄과 구원의 뜻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공격하는 자들은 길을 잃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주목하십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저마다 마음속으로 말할 것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야훼 안에서 내게 힘이 된다.』」스가랴 12:5 · 두루새김

예루살렘이 단순히 강력한 군사 요새이기 때문에 유다의 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여호와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힘이 됩니다.

6절에서는 그 힘이 또 다른 비유로 표현됩니다.

「그날에 내가 유다의 지도자들을 장작 사이에 놓인 불 담긴 화로처럼, 베어 놓은 곡식 사이의 타오르는 횃불처럼 만들겠다. 그들은 오른쪽과 왼쪽으로 주변의 모든 민족을 삼킬 것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다시 제자리인 예루살렘에서 살 것이다.」스가랴 12:6 · 두루새김

앞에서는 예루살렘이 잔과 돌이었습니다. 이제 유다의 지도자들은 불이 됩니다.

장작 사이에 놓인 불 담긴 화로와 베어 놓은 곡식 사이의 타오르는 횃불은 주변의 물질을 빠르게 태울 수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비유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주변의 적대 세력을 압도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언의 초점은 적을 삼키는 행동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제자리인 예루살렘」에서 다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위협받던 예루살렘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계속 존재하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9장에서는 주변 민족들의 공격 앞에서 여호와야훼가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해 진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9:8). 여기서는 하나님이 직접 적들의 힘을 무너뜨리시고, 예루살렘이 자기 자리에 남아 있게 하십니다.

구원의 결과는 단지 원수의 패배가 아닙니다. 삶의 자리를 빼앗길 뻔했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유다의 지도자들은 복수로 등장하지만, 그들의 말 안에서는 「내게」라는 단수형이 사용됩니다. 이는 각 지도자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같은 사실을 깨닫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문장 구조를 다르게 이해하여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의 힘이 여호와야훼에게 있다는 뜻으로 읽는 번역도 가능합니다. 두 읽기의 강조점은 조금 다르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의 힘이 여호와야훼에게서 나온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하나님은 왜 예루살렘보다 유다의 천막을 먼저 구원하시는가?

스가랴 12:7–9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유다의 천막들을 먼저 구하실 것입니다.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영광이 유다의 영광보다 커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스가랴 12:7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성벽을 갖춘 도시이며 다윗 왕조의 중심이었습니다. 반면 유다의 천막들은 성 밖의 거주지,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약한 사람들의 생활공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루살렘과 다윗 집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의 영광을 독차지하여 유다의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는 유다의 천막들을 먼저 구하심으로써, 구원이 예루살렘의 위세나 왕실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공동체를 바깥의 위협에서 건져 낼 뿐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우월감이 생기는 것까지 경계합니다.

그날에 여호와야훼께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비틀거리는 사람도 그날에는 다윗처럼 될 것입니다. 다윗 집안은 하나님처럼, 그들 앞에 선 여호와야훼의 천사처럼 될 것입니다.스가랴 12:8 · 두루새김

「비틀거리는 사람」은 넘어지거나 흔들리는 약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쟁의 용맹함과 왕의 권위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사무엘상 17장에서 그는 골리앗과 맞서 승리했고, 이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지도자만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는 넘어질 만큼 약했던 사람도 새롭게 강해집니다.

스가랴에서도 다윗 집안은 백성 앞에 선 여호와야훼의 천사에 비유됩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을 나타내는 역할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윗 집안의 통치자들이 모두 신성한 존재가 되어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해도 된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바로 앞의 7절에서 하나님은 다윗 집안의 영광이 유다의 영광보다 커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받을 수 있지만, 그 힘의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나는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모든 나라를 없애 버리려고 나서겠다.」스가랴 12:9 · 두루새김

그 전쟁의 구체적인 과정이나 역사적 날짜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 구절이 이후 어느 시대의 모든 국제전쟁을 해석하는 틀이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여기까지라면 이 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승리의 이야기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가장 중요한 전환을 아직 남겨 두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엘로힘은 문맥에 따라 하나님 또는 신적인 존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바로 뒤에 「여호와야훼의 천사처럼」이라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다윗 집안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존재처럼 강하게 된다는 비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출애굽기 23:20–23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 앞에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쏟아부어지는 은혜와 간절한 기도의 영

스가랴 12:10 본문 →

「내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간절한 기도의 영을 쏟아붓겠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볼 것이다. 외아들을 잃고 울며 슬퍼하듯 그를 두고 울며 슬퍼하고, 맏아들을 잃고 몹시 괴로워하듯 그를 두고 몹시 괴로워할 것이다.」스가랴 12:10 · 두루새김

이 구절부터 예언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먼저 쏟아부으십니다.

백성이 자기 힘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습을 먼저 보여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로운 영을 쏟아부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영」을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 일으키시는 새로운 마음의 성향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두 의미를 완전히 분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내면의 변화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에만 하나님께 가까워질 수 있다는 단순한 조건으로 이 장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먼저 은혜와 간절한 기도의 영을 쏟아부어 주십니다. 그 은혜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와 간절한 기도의 영을 쏟아부으신 다음 일어나는 행동은 예상 밖입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바라보며 울고 슬퍼합니다.

「자기들이 찌른 나」 — 그들은 누구를 바라보는가?

스가랴 12:10 본문 →

하나님은 「내가」 은혜와 간절한 기도의 영을 쏟아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본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는 그 대상을 「그」라고 부르십니다.

「나」에서 「그」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인칭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문장을 자연스럽게 읽기 어렵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찌른 대상이 누구인지 이해하는 문제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12장은 찔림을 당한 이의 이름이나 신분, 그가 찔린 사건의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특정한 사건에 곧바로 대응시키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울며 슬퍼하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찌른」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들」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직접 무기를 들고 찔렀다는 뜻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집단적인 책임을 표현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슬퍼하는 사건과 공동체 자신의 행동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문제의 방향이 바깥에서 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외부의 공격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 백성의 행동이 남긴 상처를 그들 앞에 드러내십니다.

사람이 자기 잘못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피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로 하여금 외면하던 것을 보게 합니다.

이 슬픔이 어디까지 죄를 깨닫는 일과 회개를 포함하는지는 구절 하나만으로 모두 설명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고백이나 회개의 말을 직접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쏟아부어 주시는 은혜와 간절한 기도의 영이 이러한 슬픔을 일으킨다는 문맥은, 그 슬픔이 단순한 감정적 반응 이상의 신앙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 36:26–27에서 하나님은 백성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새로운 영을 그들 안에 두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레미야 31:9에서는 백성이 울며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스가랴 12장에서도 하나님이 먼저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자신들이 행한 일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첫 번째는 이 표현을 있는 그대로 읽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찔렀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거부와 공격을 찔림이라는 강렬한 말로 표현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어떤 인물을 찔렀으며, 하나님이 그 인물에게 가해진 폭력을 자신에 대한 행동으로 받아들이신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자나 대표자에게 행한 일이 하나님 자신에게 행한 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 이러한 읽기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문장의 「나」와 「그」의 관계를 구별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찌른 인물을 두고 울며 슬퍼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인칭의 전환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이 해석들은 서로 다른 장점을 갖습니다. 요한복음 19:37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사건과 관련하여 스가랴 12:10을 인용합니다. 요한계시록 1:7에서도 찔린 이를 바라보고 땅의 여러 민족이 울며 슬퍼하는 모습이 다시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스가랴 12장의 말이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일과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신약의 해석은 스가랴가 보여 준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서 읽는, 후대 성경의 연결입니다. 그 연결이 중요하다고 해서 구약 본문이 가진 역사적 질문이나 글의 흐름에서 생기는 질문을 모두 생략할 필요는 없습니다.

외아들과 맏아들을 잃은 슬픔

스가랴 12:10–11 본문 →

본문은 슬픔의 깊이를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합니다.

외아들이라는 표현은 대신할 수 없는 존재를 잃었다는 상실의 깊이를 강조합니다. 이 비유는 찔린 인물이 실제로 누군가의 외아들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이 외아들을 잃은 부모의 슬픔만큼 깊다는 뜻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맏아들은 집안을 이어 가는 일과 책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맏아들의 죽음은 사랑하는 자녀를 잃는 슬픔과 함께 가족의 미래가 흔들리는 상실로 경험될 수 있었습니다.

외아들과 맏아들의 죽음은 개인과 가족의 가장 깊은 슬픔을 나타냅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전쟁을 묘사하던 예언이 이제 한 가정이 감당해야 하는 상실의 말로 바뀝니다.

전쟁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그 죽음은 때로 숫자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자녀의 죽음은 숫자가 아닙니다.

대신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상실입니다.

스가랴는 공동체 전체가 울며 슬퍼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바로 그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찔린 이를 얼마나 깊이 바라보게 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날 예루살렘에서는 므깃도 골짜기의 하닷림몬에서처럼 크게 울며 슬퍼할 것이다.」스가랴 12:11 · 두루새김

예루살렘의 슬픔은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엄청난 슬픔처럼 커질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하닷림몬을 므깃도 근처의 지명으로 이해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역대하 35:22–25는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전투하다가 부상을 입고 죽었으며, 예레미야와 노래하는 사람들이 그를 위해 슬픔의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하닷림몬에서 울며 슬퍼하는 일을 요시야의 죽음과 관련된 슬픔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읽기는 하닷림몬을 고대 근동의 신 이름과 관련된 표현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닷과 림몬은 폭풍이나 비와 연관된 신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열왕기하 5:18에서도 림몬이라는 신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경우에는 특정한 신을 위한 의식에서 울며 슬퍼하는 일과 연결해 이해하려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가랴 12:11만으로 하닷림몬이 지명인지 신의 이름인지, 또는 정확히 어떤 슬픔의 의식을 가리키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온 땅이 울지만, 사람들은 따로 운다

스가랴 12:12–14 본문 →

「그 땅의 사람들은 집안마다 따로 울며 슬퍼할 것이다. 다윗 집안은 따로, 그들의 아내들은 따로, 나단 집안은 따로, 그들의 아내들은 따로,」스가랴 12:12 · 두루새김

지금까지 슬픔은 예루살렘 전체의 슬픔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처럼 각 집안을 하나씩 보여 줍니다.

「레위 집안은 따로, 그들의 아내들은 따로, 시므이 집안은 따로, 그들의 아내들은 따로,」스가랴 12:13 · 두루새김

다윗 집안은 왕권과 관련되어 있고, 레위 집안은 성전과 예배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들은 공동체를 이끌고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집안들까지 슬픔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8절에서는 다윗 집안이 「하나님처럼, 그들 앞에 선 여호와야훼의 천사처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놀라운 힘과 지위가 약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다윗 집안이 울며 슬퍼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그들이 이제 슬픔과 간절한 기도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다윗 집안은 따로, 그들의 아내들은 따로.

나단 집안은 따로, 그들의 아내들은 따로.

레위 집안과 시므이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큰 의식을 치르는 장면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각 집안이 저마다 울며 슬퍼합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같은 슬픔을 경험하더라도, 그 슬픔이 하나의 집단적인 감정으로만 처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글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효과는 여성들의 슬픔이 남성 중심으로 언급된 집안들의 슬픔 속에 묻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슬픔도 따로 언급됩니다.

전쟁의 규모는 온 세상이었지만, 슬픔의 장면은 각 가정 안으로 들어옵니다.

「나머지 모든 집안도 집안마다 따로, 그들의 아내들도 따로 울며 슬퍼할 것이다.」스가랴 12:14 · 두루새김

여기서는 더 이상 특정한 집안의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모든 집안까지 포함됩니다.

온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 앞에 서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의 슬픔과 간절한 기도만으로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윗의 아들 가운데 나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사무엘하 5:14). 따라서 다윗 집안과 나단 집안을 나란히 놓은 것을 왕실 전체와 그 안의 특정 집안에 대한 언급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민수기 3:17–18에는 레위의 아들 게르손과 그 후손 계보 속에 시므이가 나옵니다. 따라서 레위 집안과 시므이 집안을 제사장 및 레위 계통의 집안들과 관련지어 이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12장 자체가 두 사람의 정확한 계보를 밝히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실제 슬픔의 의식에서 반드시 남자들과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어야 했다는 문화적 규칙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당시의 슬픔을 표현하는 관습과 연결해 생각할 수는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구체적인 의식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소리

스가랴 12:1–14 본문 →

그러나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채우는 것은 승리의 함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그분의 은혜 안에서 자신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흘리는 눈물입니다.

이것은 슬픔 자체를 신앙의 목표로 삼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 슬픔을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라고 해석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스가랴 12장은 특별히 사람들이 자신들이 찌른 이와 관련하여 울며 슬퍼하는 장면을 말합니다.

다윗 집안이 울고, 나단 집안이 웁니다.

레위 집안이 울고, 시므이 집안이 웁니다.

그리고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다른 모든 집안도 웁니다.

그들의 아내들 역시 저마다 따로 울며 슬퍼합니다.

이 장은 그 눈물을 급하게 닦아 주지 않습니다. 슬픔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스가랴는 그 장면을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한 집안에서 다른 집안으로, 또 다른 집안으로 시선을 옮겨 갑니다. 이름이 알려진 집안도,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집안도 빠지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반복되는 말은 「따로」입니다.

큰 전쟁의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이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울고 있습니다.

스가랴 12장은 그 눈물의 장면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