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2–14장 · 예루살렘의 마지막 날

열린 샘과 깨어난 칼

스가랴 13장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세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예루살렘에 샘이 열립니다.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의 죄와 부정함을 씻기 위한 샘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의 이름을 없애시고, 그 땅에서 거짓된 예언이 사라지게 하십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한 사람이 자기 몸의 상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언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몸에는 의심스러운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그 상처가 어디서 생겼는지 묻자,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에서 맞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장면에서 갑자기 하나님의 명령이 들립니다.

「목자를 쳐라. 그러면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칼이 목자를 치고 양 떼는 흩어집니다. 땅의 삼분의 이가 사라지고, 살아남은 삼분의 일은 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죄를 씻는 샘에서 시작된 예언이 칼과 불을 거쳐 끝나는 것입니다.

왜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가혹한 심판을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불 속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스가랴 13장의 중심에는 파괴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어떻게 새로워지는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의 회복은 이 장에서 결코 쉽거나 평온한 과정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1–6절에서는 죄와 부정함을 씻는 샘이 열리고 우상숭배와 거짓 예언이 사라집니다. 7–9절에서는 하나님의 목자가 칼에 맞아 양들이 흩어지고, 남은 사람들이 불 속에서 깨끗하게 됩니다. 두 부분은 하나의 사건을 순서대로 설명하는 이야기라기보다, 깨끗하게 하심과 심판을 서로 다른 장면으로 보여 주는 예언입니다. 이 장면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모두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913장 본문 읽기 →

애곡하던 사람들에게 샘이 열린다

스가랴 13:1 본문 →

「그날에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죄와 부정함을 씻어 줄 샘이 열려 있을 것이다.」스가랴 13:1 · 두루새김

이 장은 「그날에」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12장에서 반복되었던 그날입니다. 예루살렘이 공격받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며,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슬피 울던 날과 이어지는 예언적 시간입니다.

12:10에서 하나님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간절히 기도하게 하는 영을 부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깊이 슬퍼했습니다.

이제 같은 두 집단을 위해 샘이 열립니다.

슬피 울던 사람들이 바로 씻음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슬픔을 보여 주신 다음, 그 죄와 부정함을 처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샘은 물이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본문은 사람들이 먼저 물을 길어 오거나 깨끗하게 될 방법을 찾아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위해 「샘이 열려 있을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샘이 열리는 일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씻는다는 동사가 따로 나오지 않습니다. 원문은 샘이 죄와 부정함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루새김은 그 관계를 「죄와 부정함을 씻어 줄 샘」이라고 풀어, 샘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밝혔습니다.

민수기 19:9에서는 부정함을 씻는 물과 죄를 처리하는 제사에 관한 말이 함께 등장합니다. 깨끗하게 하는 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스가랴 13:1과 중요한 배경을 공유합니다.

죄와 부정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설 수 없는 상태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와 부정함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부정한 상태가 되는 일이 언제나 도덕적인 죄를 지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체와 접촉하여 종교 의식의 기준에서 부정하게 되는 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는 이 두 개념을 함께 사용하여 깨끗하게 될 필요가 있는 상태를 넓게 표현합니다.

다윗 집안은 왕권과 관련된 집안입니다. 앞 장에서는 특별한 힘과 영광을 약속받았습니다(12:8). 그러나 그 지위가 죄와 부정함으로부터 그들을 면제하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일반 주민들도, 다윗 집안도 똑같이 씻음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본문은 슬피 우는 행위 자체가 죄를 저절로 없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따로 씻음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자기 잘못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과 그 잘못에서 깨끗하게 되는 것은 구별되지만, 하나님의 회복 안에서 서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땅에서도 부정한 것들을 없애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 36:25–27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맑은 물을 뿌려 모든 부정함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스가랴 13:1 역시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정결의 길을 보여 줍니다. 물을 통해 죄와 부정함이 씻긴다는 점에서 두 예언은 공통된 주제를 가집니다. 다만 에스겔은 물을 뿌리는 행동과 새 마음을 주시는 약속을 함께 설명하고, 스가랴는 열린 샘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우상의 이름과 더러운 영이 사라진다

스가랴 13:2 본문 →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선언입니다. 「그날에 내가 그 땅에서 우상들의 이름을 없애 버리겠다. 아무도 다시는 그 이름들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또 예언자들과 더러운 영을 그 땅에서 없애겠다.」스가랴 13:2 · 두루새김

구약에서 이름은 단순한 발음이나 표시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일은 그 존재를 인정하고 기억하며, 특히 신의 이름인 경우에는 그 신을 찾거나 섬기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23:13에서는 다른 신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호세아 2:17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바알들의 이름을 백성의 입에서 없애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상들이 더 이상 그 땅에서 숭배와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공동체의 예배와 삶을 지배하던 자리에서 사라집니다.

왜 예언자들까지 없애겠다고 하십니까?

구약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스가랴 자신도 예언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하나님이 앞으로 모든 참된 예언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신다는 뜻으로 읽으면 모순이 생깁니다.

3절에서 문제가 되는 예언자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심판받습니다. 4절에서는 예언자들이 사람들을 속이려고 털로 만든 겉옷을 입는 일이 언급됩니다. 따라서 2절의 예언자들은 문맥상 거짓된 예언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거짓말을 하는 행위를 없애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러운 영」도 함께 등장합니다. 이 표현을 사람을 속이는 예언 활동의 배후에 있는 더러운 영적 영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거짓된 종교 활동과 우상숭배를 특징짓는 부정한 성향이나 힘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영의 구체적인 정체나 활동 방식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복잡한 영적 존재들의 체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영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바라보고 간절히 기도하게 합니다. 반면 사라져야 할 더러운 영은 거짓 예언과 우상숭배의 문맥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를 씻으실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 거짓에 끌려가지 않도록 공동체 안의 거짓된 권위도 없애십니다.

깨끗하게 된 공동체는 단지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무엇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지 가려내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3절부터는 거짓 예언을 없애는 일이 얼마나 철저하게 그려지는지 드러납니다.

그 철저함은 오히려 독자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자기 아들을 찌르는 부모 — 진실에 대한 충성이 가족의 관계보다 앞서는가?

스가랴 13:3 본문 →

「누군가 여전히 예언한다면, 그를 낳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에게 말할 것이다. 『너는 살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예언할 때 그를 낳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찌를 것이다.」스가랴 13:3 · 두루새김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등장하고, 그들이 「그를 낳은」 부모라는 사실이 반복됩니다. 자녀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를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거짓 예언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만큼 거짓 예언이 사라지는 미래를 극단적인 모습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이해하려면 신명기 13:1–11의 율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꿈꾸는 사람이나 예언자가 놀라운 징조를 보이더라도 다른 신을 따르라고 유혹하면 그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 또한 가까운 가족이 다른 신을 섬기자고 몰래 유혹하는 경우에도 그 관계를 이유로 우상숭배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언약에 따른 법 안에서 거짓 예언과 우상숭배는 개인의 취향 문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여호와야훼와 맺은 관계를 해치는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스가랴 13:3은 이러한 언약에 따른 법의 엄격함을 배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날에 일어날 일을 예언적 장면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부모가 자녀의 종교적 주장이나 신앙의 차이를 이유로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또한 이 장면을 현대의 신앙 공동체가 종교적 거짓을 처벌하는 방법을 직접 규정하는 법률로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정결과 심판을 사람이 자기 판단으로 마음대로 집행할 권한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가랴가 보여 주려는 것은 거짓 예언이 더 이상 보호받거나 환영받지 못하는 세계입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관계마저 거짓을 감추는 방패가 되지 못합니다.

다음 장면은 그들이 진실을 말하며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 정체를 숨기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12장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슬피 울었습니다. 13장에서는 거짓 예언자를 찌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같은 동사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사용되면서, 이 장들이 얼마나 심각한 생명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드러냅니다. 같은 단어가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찔린 인물들의 정체가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자의 옷을 벗고 농부라고 말하는 사람

스가랴 13:4–5 본문 →

「그날에 예언자들은 저마다 예언하면서 자기가 본 환상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사람들을 속이려고 털로 만든 겉옷을 입는 일도 더는 없을 것이다.」스가랴 13:4 · 두루새김

스가랴 13:4의 털로 만든 겉옷은 예언자 특유의 모습을 나타내는 옷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예언자의 권위를 가졌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짓된 예언이 더 이상 존경받는 일이 아니게 되자, 그 권위를 흉내 내던 사람들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를 꺼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그들의 진정한 회개를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예언자가 아니에요. 땅을 일구는 사람이에요. 내가 어릴 때 어떤 사람이 나를 종으로 삼았기 때문이에요.』」스가랴 13:5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이 예언 활동과 관계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예언자들이 자기가 본 환상을 부끄러워하고 옷을 바꾸어 사람들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고 했으므로, 이 대답도 자신의 과거를 감추려는 말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이 예언자의 옷을 벗고 자신은 예언자가 아니라고 말하면, 과거의 거짓까지 사라집니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다음 절에서 드러납니다.

그의 몸에는 아직 상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1:8에서 엘리야는 털이 있는 사람, 또는 털옷을 입은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그가 털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엘리야의 겉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5절의 히브리어의 동사 형태는 그 사람이 어릴 때부터 어떤 사람에게 매여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을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배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번역도 있습니다. 이는 문맥상 농부라는 자기소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읽는 방식입니다. 이 설명이 실제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5절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에서 생긴 상처

스가랴 13:6 본문 →

「누군가 그에게 『두 팔 사이에 있는 이 상처들은 무엇인가요?』 하고 물으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에서 맞아 생긴 상처예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스가랴 13:6 · 두루새김

예언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몸에 왜 상처가 있습니까?

이 대답을 진실한 설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었다고 인정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의 상처가 부정한 예언 활동과 관계없다는 인상을 주려는 변명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쪽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자기 정체를 부인할 수 있지만, 몸에 남은 흔적은 그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다시 묻게 합니다.

깨끗하게 되는 것과 깨끗하게 보이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깨끗하게 하심은 겉모습을 바꾸어 과거를 숨기는 일이 아닙니다. 거짓이 더 이상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또한 13:6의 상처를 곧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와 같은 것으로 보는 해석에도 신중해야 합니다. 그 구절은 문맥상 자신의 예언 활동을 부인하는 사람과 그의 의심스러운 상처에 관한 대화입니다. 반면 신약이 직접 인용하는 것은 13:7의 목자가 맞고 양 떼가 흩어지는 말씀입니다.

7절에서는 갑자기 전혀 다른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부르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목자를 향해 칼을 깨우십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손을 가리키는 말은 문맥에 따라 팔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13:6이 상처의 정확한 위치를 몸의 어느 부분이라고 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근동의 일부 종교 의식에서는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가 나타났습니다. 열왕기상 18:28에서 바알의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게 합니다. 따라서 스가랴 13:6의 상처를 거짓 예언이나 우상숭배와 관련된 의식의 흔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상처가 어떤 의식에서 생겼는지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앞선 3절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거짓 예언을 한 사람을 부모가 찌르는 장면이 있었으므로, 그가 가족에게 상처를 입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해석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3절은 죽음의 선고와 찌르는 행동을 그리지만, 6절의 상처가 그 행동의 결과라고 직접 설명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의 목자를 치라고 명령하시는가?

스가랴 13:7 본문 →

「칼아, 내 목자, 곧 내 동료인 사람을 치러 깨어나라!」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선언입니다. 「목자를 쳐라. 그러면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작은 이들에게도 내가 손을 들어 치겠다.」스가랴 13:7 · 두루새김

11장에서는 양 떼를 버리는 쓸모없는 목자가 심판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그를 「내 목자」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단순히 고용된 일꾼이나 이름 없는 통치자로 소개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목자이며 자신의 동료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이 표현만으로 그 목자가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존재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그를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목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는 이 구절을 앞선 악한 목자들에 대한 심판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목자의 이름도,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정체를 어느 한 역사적 인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목자는 양 떼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목자가 칼에 맞는 사건은 양 떼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양 떼는 단순히 여러 마리의 양이 우연히 모여 있는 무리가 아닙니다.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통해 함께 움직이고 살아가는 집단입니다.

목자가 사라지면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던 중심도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 자신이 칼에게 그 목자를 치라고 명령하십니까?

이 구절은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를 치시는 사건을 심판의 일부로 사용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 목자가 어떤 죄에 대한 벌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목자의 죽음이 모든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이루어지는 속죄라고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결과는 속죄의 절차가 아니라 양 떼의 흩어짐입니다.

「작은 이들」은 목자와 양 떼의 문맥에서는 양 떼 가운데 작고 연약한 존재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말을 「작은 이들에게도 내가 손을 들어 치겠다」로 옮겨, 그들에게까지 심판이 미친다는 뜻을 드러냅니다. 원문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손을 그들에게로 돌리신다고 표현합니다.

목자가 칼에 맞고 양 떼가 흩어진 뒤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시야에서 놓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손이 작은 이들에게 향합니다.

목자가 쓰러지는 일이 양 떼의 흩어짐을 가져오지만, 그 흩어짐이 하나님과 양 떼의 이야기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일은 쉽게 위로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아미티(⁨עָמִית⁩)는 ‘나의 동료’, ‘나와 가까운 사람’,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동료」라는 말이 특별한 관계와 지위를 나타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관계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본문에서 설명되지 않습니다. 「내 동료인 사람」이라는 특별한 표현은 이 목자를 앞서 등장한 악한 목자와 쉽게 같은 인물로 보기 어렵게 합니다. 앞의 11장에서 거짓되고 쓸모없는 목자들에 대한 심판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은 두 번째 읽기에 근거를 제공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손을 돌린다’는 표현은 문맥에 따라 적대적인 행동이나 새롭게 개입하는 행동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칼과 흩어짐이 등장하므로 작은 이들에게까지 심판이 미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원문의 표현을 하나님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 작은 이들(⁨צָעַר⁩)에게 다시 관심을 돌리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뒤의 8–9절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지만 삼분의 일이 남아 불로 깨끗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손의 행동을 둘러싼 원문의 해석을 심판과 남은 사람들을 향한 돌봄 가운데 어느 하나로만 단순하게 제한하기는 어렵습니다. 에스겔 34장에서는 악한 목자들이 양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양들을 찾아 나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자기 종 다윗을 한 목자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에스겔 34:23). 두 본문은 같은 사건을 같은 방식으로 서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에게 일어나는 일이 양 떼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체포를 앞두고 스가랴 13:7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십니다(마태복음 26:31; 마가복음 14:27). 복음서는 목자가 맞고 양들이 흩어진다는 예언을 예수님의 체포와 제자들의 흩어짐에 연결합니다. 그러나 스가랴 본문 자체에서는 그 목자가 누구이며 어떤 역사적 상황에 놓여 있는지 분명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삼분의 이는 죽고, 삼분의 일은 남는다

스가랴 13:8 본문 →

여호와야훼의 선언입니다. 「그 땅 전체에서 사람들의 삼분의 이는 목숨을 잃고 사라질 것이다. 삼분의 일은 그 땅에 남을 것이다.」스가랴 13:8 · 두루새김

여기서 남는 삼분의 일이 등장한다는 사실만 강조하면 본문이 가진 심판의 무게가 약해집니다. 반대로 삼분의 이가 죽는다는 사실만 강조하면 뒤이어 나오는 남은 사람들의 회복을 놓치게 됩니다.

본문은 그 죽음이 어떤 전쟁이나 재앙으로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의 어떤 집단을 가리키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특정한 역사적 재난에 직접 대응시키거나,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서 전체 인구의 정확히 66.7%가 죽으리라는 통계적인 예고로 사용할 근거는 없습니다. 삼분의 이와 삼분의 일이라는 구분은 예언적 심판의 규모를 강하게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구약 예언서에서 반복되는 ‘남은 자’의 주제가 나타납니다. 이사야 10:20–22에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선포됩니다. 이사야 6:11–13에서는 땅이 황폐해지고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루터기 같은 남은 것이 언급됩니다. 아모스 5:15에서는 하나님이 요셉의 남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가능성이 제시됩니다.

이 본문들에서 남은 사람들은 단순히 재난을 피한 행운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심판을 거친 뒤에도 하나님과 백성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죽은 삼분의 이는 가치가 없고, 살아남은 삼분의 일만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각 사람이 왜 죽거나 살아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가 더 선했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누가 더 악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평가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숫자를 개인이 도덕적으로 더 낫거나 못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남았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일이 끝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음 절에서 그들은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불 속에 남은 사람들 — 금속을 제련하듯

스가랴 13:9 본문 →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속으로 데려가겠다. 은을 불로 깨끗하게 하듯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금을 시험하듯 그들을 시험하겠다.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르고, 나는 그들에게 응답하겠다. 나는 『그들은 내 백성이다』 하고 말하고, 그들은 『여호와야훼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하고 말할 것이다.」스가랴 13:9 · 두루새김

은과 금은 귀한 금속입니다. 그러나 광석에서 얻은 금속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제련 과정에서는 열을 사용하여 금속과 불순물을 분리하고, 금속을 더 순수하게 만듭니다. 금속을 시험하는 일도 그것이 어떤 성질을 지녔는지 확인하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불은 금속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고 시험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샘은 죄와 부정함을 씻는 길을 보여 줍니다. 불은 남은 사람들이 깨끗하게 되고 시험받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제거되어야 할 죄와 부정함이 강조되었다면, 마지막에는 남은 사람들이 어떤 관계와 삶으로 세워지는지가 강조됩니다.

하나님이 불 속에서 삼분의 일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분명히 본문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고통은 유익하니 고통받는 사람이 그 의미를 기뻐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재난과 고통이 반드시 사람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보내신 것이라고 일반화할 근거도 없습니다. 스가랴가 묘사하는 것은 특정한 예언적 심판의 과정입니다.

본문은 곧바로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로 넘어갑니다.

스가랴 13:9는 이 언약의 언어를 직접적인 대화의 형식으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백성이라고 인정하십니다.

제련의 결과를 보여 주는 마지막 장면은 대화입니다.

하나님이 남은 사람들에게 이루시려는 일의 끝에는,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시는 관계가 놓여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말라기 3:2–3에서도 하나님이 오시는 날이 금속을 제련하는 사람의 불과 같다고 묘사됩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레위 자손을 은과 금처럼 깨끗하게 하여 의로운 제물을 드리게 하십니다. 출애굽기 6:7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1:33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으실 새 언약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자신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호세아 2:23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이 아니라고 불리던 사람들을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스가랴 10:6에서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돌아오게 하시면서 그들에게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서로를 부르는 두 목소리

스가랴 13:1–9 본문 →

처음에는 죄와 부정함 때문에 씻음이 필요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은 그들을 알아보십니다. 죄가 제거되고, 거짓이 끝나며, 공동체가 심판을 통과하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장면을 지나 하나님과 백성이 다시 서로를 부릅니다.

그 응답은 그들의 고통이 왜 일어났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앞으로 어떤 역사적 영광을 누릴 것인지 알려 주는 긴 약속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다」. 「여호와야훼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스가랴 13장은 열린 샘에서 시작하여, 불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은 이 대화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