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1–6장 · 밤에 본 환상들

왕관을 쓴 제사장과 평화의 왕좌

스가랴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은과 금으로 왕관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왕관을 한 사람의 머리에 씌웁니다.

그 사람은 왕이 아닙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왕과 제사장은 서로 다른 직무를 맡았습니다. 왕은 백성을 다스리고,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여 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대제사장에게 왕관을 씌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왕이 아닌 사람에게 왕관을 씌우게 하셨을까요? 그리고 실제로 누군가 쓰고 다스리도록 하지 않을 왕관을 왜 만드셨을까요?

이 장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먼저 네 대의 병거가 온 땅의 주 앞에서 나와 세상으로 향합니다. 이어서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가져온 은과 금으로 왕관을 만드는 일이 벌어집니다.

두 장면을 연결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질서를 회복하시려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분은 세상의 권세를 다스리시는 분이며, 자기 백성 가운데서는 왕의 통치와 제사장의 섬김이 평화를 이루는 미래를 약속하십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86장 본문 읽기 →

청동 산 사이에서 나오는 네 병거 — 세상은 누구의 통치 아래 있는가

스가랴 6:1–5 본문 →

말들이 아니라 병거들이 나타나다

스가랴가 다시 눈을 들자 네 대의 병거가 나타납니다.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보니, 병거 네 대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 산들은 청동으로 된 산들이었다.스가랴 6:1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스가랴가 처음 보았던 말들의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1장에서도 서로 다른 털빛을 가진 말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땅을 두루 다니며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말들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병거가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병거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말이 끄는 전차는 전쟁에서 중요한 군사적 수단이었습니다. 따라서 네 대의 병거가 나타나는 장면은 단순한 정찰보다 강력한 권세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본문은 이 병거들이 어떤 전투를 벌이는지 보여 주지 않습니다. 이들은 싸우는 모습이 아니라, 온 땅의 주 앞에서 나와 세상으로 향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왜 청동으로 된 두 산인가

산은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지형입니다. 청동은 단단하고 오래 견디는 금속입니다. 따라서 청동 산이라는 이미지는 견고함과 쉽게 무너지지 않는 힘을 느끼게 합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늘의 출입구 또는 천상적 공간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병거들이 온 땅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온다는 다음 설명이 이러한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성전과 관련된 이미지입니다. 솔로몬 성전 앞에는 청동으로 만든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열왕기상 7:15–22). 따라서 청동으로 된 두 산을 성전의 두 기둥과 연관 지어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산들을 성전 기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또한 두 산의 지리적 위치나 정확한 상징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늘의 네 바람

천사가 내게 대답했다. 「이것들은 온 땅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오는 하늘의 네 바람이다.」스가랴 6:5 · 본디새김

여기서 「바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호트(⁨רוּחַ⁩)입니다. ‘바람들’이라는 뜻이지만, 문맥에 따라 ‘영들’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바람과 영은 같은 단어 계열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바람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온 땅으로 퍼져 나가는 힘이 강조됩니다. 영적 존재들로 읽으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가 임무를 수행하러 나오는 천상적 수행자들의 모습이 강조됩니다. 본문은 네 바람의 정체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온 땅의 주」에게 속해 있습니다.

유다 공동체는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다윗 왕조의 왕이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정치 권력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의 환상에서는 페르시아 왕이 세상의 가장 높은 권세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온 땅의 주가 계십니다.

그분 앞에 하늘의 네 바람이 서 있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눈에 보이는 정치적 권력의 크기와 세상을 실제로 다스리는 최종적인 권위는 같지 않습니다.

북쪽 땅에서 쉬게 된 하나님의 영 — 세계의 소란은 어떻게 끝나는가

스가랴 6:6–8 본문 →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병거들

천사는 말들이 나아가는 방향을 설명합니다.

검은 말들은 북쪽으로 향합니다. 흰 말들은 그 뒤를 따라 나갑니다. 얼룩무늬 말들은 남쪽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붉은 말들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7절에서는 「힘센 말들」이 땅을 두루 다니기를 청합니다. 이 힘센 말들이 앞서 등장한 얼룩무늬 말들의 강한 특성을 다시 언급하는 것인지, 아직 행선지가 밝혀지지 않은 다른 무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지막에 땅을 두루 다닌 주체가 말들인지 병거들인지도 히브리어의 문법만으로 완전히 명확해지지 않습니다. 본문은 네 병거를 등장시키지만, 실제로 명시적으로 이름 붙인 방향은 북쪽과 남쪽입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강조되는 곳은 북쪽입니다.

왜 북쪽 땅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북쪽은 단순한 방위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침략군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서쪽과 북쪽을 거쳐 유다로 접근했습니다. 따라서 예언서에서는 북쪽이 침략과 심판의 방향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1:14에서 하나님은 북쪽에서 재앙이 터져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6:22에서는 북쪽 땅에서 큰 민족이 일어나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스가랴 시대의 유다 공동체에게도 바벨론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들의 조상들이 포로로 끌려갔던 곳입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왕조가 무너진 기억과 연결된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번 환상에서는 움직임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북쪽에서 세력이 내려와 예루살렘을 무너뜨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병거들이 북쪽 땅으로 향합니다.

“내 영을 쉬게 했다”

그가 나를 큰 소리로 불러 내게 말했다. 「보아라. 북쪽 땅으로 나간 것들이 북쪽 땅에서 내 영을 쉬게 했다.」스가랴 6:8 · 본디새김

북쪽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는 세력의 출발지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곳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이 도달하는 장소가 됩니다.

스가랴 1:11에서는 땅을 두루 다닌 이들이 온 땅이 평온하고 고요하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루살렘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6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병거들이 땅을 두루 다니고, 북쪽 땅에서 하나님의 영이 쉬게 되었다는 보고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살아갈 미래는 주변 제국들의 힘에만 맡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세계를 향한 환상에서 예루살렘 안의 한 집으로 시선을 돌리십니다.

조금 더 깊이

「쉬게 했다」는 표현에는 멈추게 하거나 안식하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쉬게 되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북쪽 땅에서 하나님의 분노가 가라앉았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5:13에서는 하나님이 심판을 이루신 뒤 자신의 분노가 그치고 풀린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따라서 북쪽으로 나간 병거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여 그분의 분노가 가라앉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읽기는 하나님의 영이 북쪽 땅에 머물거나 안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 특정한 심판의 완수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영이 안식을 얻었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본문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 하나님의 영이 쉬게 되었는지 자세히 보여 주지 않으므로, 바벨론에서 특정한 전쟁이 벌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벨론에서 온 사람들의 은과 금 — 회복은 누구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스가랴 6:9–11 본문 →

거대한 병거에서 평범한 집으로

9절부터 장면이 완전히 바뀝니다.

하늘의 병거도, 청동 산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고, 구체적인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바벨론에서 온 유배민들인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에게서 받아라. 그날 네가 직접 가서 스바냐의 아들 요시야의 집으로 들어가라.」스가랴 6:10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늘의 병거들이 온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제는 바벨론에서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일과 흩어진 백성이 돌아오는 일이 같은 장 안에서 만납니다.

특히 바벨론이라는 장소는 앞 장의 마지막에 등장한 시날 땅과도 연결됩니다. 5장에서는 악이 시날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6장에서는 바벨론에서 온 사람들의 은과 금이 하나님의 성전과 관련된 일에 사용됩니다.

은과 금으로 왕관을 만들다

「은과 금을 받아 왕관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여호사닥의 아들인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워라.」스가랴 6:11 · 본디새김

왕권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을 제사장의 머리에 씌웁니다.

대제사장은 왕이 되어야 하는가

이스라엘에서 대제사장의 머리에는 거룩한 직무를 나타내는 관이 있었습니다(출애굽기 28:36–39). 본문은 여호수아가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가 정치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오히려 14절에서는 왕관들이 성전의 기념물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여호수아를 실제 왕으로 즉위시키는 일반적인 대관식이라기보다, 앞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눈에 보이도록 나타내는 상징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언서에는 이처럼 예언자가 특정한 행동을 수행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멍에를 만들어 목에 걸고 열국이 바벨론 왕의 지배를 받게 될 일을 보여 주었습니다(예레미야 27:2–7). 에스겔도 여러 상징적인 행동으로 예루살렘에 닥칠 일을 드러냈습니다(에스겔 4장).

그러나 여기서 상징의 방향은 심판이 아니라 미래의 회복을 향합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게 하심으로써, 왕권과 제사장 직무가 하나님의 미래에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묻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곧이어 「싹」이라는 이름과 함께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왕관들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왕관을 쓸 사람은 대제사장 여호수아 한 사람입니다. 이를 여러 왕관이 하나의 복합된 왕관을 이루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실제로 여러 개의 왕관이 사용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각각의 왕관이 누구의 머리에 씌워졌는지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스룹바벨에게도 별도의 왕관이 씌워졌다고 보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름이 싹인 사람이 있다” — 무너진 왕조에서 무엇이 자라나는가

스가랴 6:12 본문 →

「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이름이 싹인 사람이 있다. 그는 제자리에서 싹틀 것이며,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지을 것이다.』」스가랴 6:12 · 본디새김

스가랴 3:8에서 하나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에게 「내 종 싹」을 데려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이름이 다시 등장하며,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싹이 싹튼다는 표현

「싹틀 것이다」(⁨צָמַח⁩)에 해당하는 동사는 「싹」과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어에서는 ‘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싹틀 것이다’라는 말의 반복이 더 선명하게 들립니다.

싹은 완성된 나무가 아닙니다. 아직 자라나야 할 생명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앞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3:5에서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의로운 싹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인물은 왕으로서 지혜롭게 다스리며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33:15에서도 다윗에게서 의로운 싹이 돋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본문을 함께 고려하면, 스가랴의 싹 역시 다윗 왕조의 회복과 연결하여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는 이 인물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싹은 스룹바벨인가, 장차 올 다른 인물인가

스가랴 4:9에서 하나님은 스룹바벨의 손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고 그의 손이 완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6:12에서는 싹이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두 인물을 연결하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스룹바벨은 다윗 왕가의 후손이었고(역대상 3:17–19), 성전 재건을 이끌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 싹에 관한 약속이 당시의 스룹바벨과 관련되어 있다고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6:13에서는 싹이 왕좌에 앉아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스룹바벨이 실제로 독립적인 다윗 왕국의 왕좌에 올랐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싹을 스룹바벨 개인으로 완전히 한정하기보다, 그의 성전 재건과 지도력을 통해 드러나는 다윗 왕조의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읽기는 싹을 당시의 지도자와 구별되는 장래의 이상적인 왕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은 더 큰 회복을 미리 보여 주는 역사적 사건이 됩니다.

본문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결론을 내려 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시작된 성전 재건이라는 일을 통해,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통치와 회복의 미래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제자리에서 싹틀 것이며”

「제자리에서 싹틀 것이다」(⁨תַּחַת⁩)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그의 아래에서’라는 공간적 표현을 포함합니다. 자기 자리에서 자라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곧바로 특정한 지역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지리적 예언으로 확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이 싹틀 장소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왕조의 회복을 말하면서 하나님은 완성된 거대한 나무를 갑자기 등장시키지 않으십니다.

싹이 자라는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회복이 단지 과거의 영광을 복제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자라나게 하시는 미래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왕좌와 제사장 — “그 둘 사이에는 평화를 위한 의논이 있을 것이다”

스가랴 6:13 본문 →

「『바로 그가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지을 것이며, 바로 그가 위엄을 지닐 것이다. 그는 자기 왕좌에 앉아 다스릴 것이며, 그의 왕좌에 제사장이 있을 것이다. 그 둘 사이에는 평화를 위한 의논이 있을 것이다.』」스가랴 6:13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미래는 건축의 완성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통치의 모습까지 포함됩니다.

성전을 짓는 사람에게 왕의 위엄이 주어진다

「바로 그가」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가 성전을 짓고, 그가 위엄을 지닙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권과 성전 건축은 특별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기 원했지만, 실제로 성전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열왕기상 6장).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에서도 왕조의 지속과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이 연결되었습니다(사무엘하 7:12–16).

따라서 싹이 성전을 건축하고 왕좌에 앉아 다스릴 것이라는 말씀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다윗 왕조에 주어진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13절 후반부에 제사장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핵심은 평화입니다.

한 사람이 왕과 제사장을 겸하는가

이 문장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왕좌에 앉은 사람이 제사장이기도 하다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는 왕좌에 앉은 통치자와 그 곁에 있는 제사장을 서로 구별하는 해석입니다.

왕의 통치와 제사장의 직무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관계 안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의논

왕의 직무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섬김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두 직무가 각각 자기 권한을 앞세우며 서로 경쟁한다면, 공동체의 평화는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미래에는 그 둘 사이에 평화를 위한 의논이 있습니다.

본문이 두 직무의 구체적인 권한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회복된 공동체에서 통치와 제사장 직무가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는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이상적인 통치의 중심에는 권세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기 위한 의논이 있습니다.

왜 여호수아에게 왕관을 씌웠는가

왕관은 제사장의 머리에 놓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싹에 관한 약속이 선포됩니다. 현재의 대제사장이 장차 이루어질 왕권과 제사장 직무의 관계를 보여 주는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3장에서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이 앞으로 올 일을 가리키는 징표라고 불렸던 장면과도 이어집니다(3:8).

여호수아는 그 미래를 자기 능력으로 완성할 인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미래를 가리키는 행동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어지는 왕과 제사장의 희망

또한 시편 110:4에서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통치자에게 제사장 직무와 연결되는 독특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스가랴 6장이 직접 이 모든 본문을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왕권과 제사장 직무, 하나님의 통치라는 주제가 서로 연결되어 발전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히브리서 7장은 시편 110편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무를 설명합니다. 또한 신약 전체에서는 예수의 다윗 계열 왕권과 제사장적 역할이 함께 이해됩니다. 이것은 스가랴 6장의 왕과 제사장 이미지와 연결되는 후대의 정경적 읽기이지만, 본문의 싹이 어떤 인물인지 그 시대의 역사적 문맥을 건너뛰어 곧바로 확정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그의 왕좌에」라는 표현이 반복되기 때문에 한 인물이 두 직무를 겸한다고 읽을 여지도 남아 있습니다. 통치자와 제사장을 서로 구별하는 해석은 「그 둘 사이」라는 표현과 잘 어울립니다. 또한 칠십인역 스가랴 6:13에서는 제사장이 왕좌에 앉은 이의 오른편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두 인물을 구분하는 읽기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성전에 남겨지는 왕관 — 미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는 물건

스가랴 6:14 본문 →

왕관을 씌우는 행동이 끝나면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그 왕관들은 여호와야훼의 성전에서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위한 기념물이 될 것이다.」스가랴 6:14 · 본디새김

이름이 조금 달라진 사람들

10절과 14절을 비교하면 두 이름이 달라집니다. 10절에는 헬대가 나오지만, 14절에는 헬렘이 나옵니다. 10절에는 스바냐의 아들 요시야가 나오지만, 14절에는 스바냐의 아들 헨이 나옵니다.

헬대와 헬렘이 동일한 사람의 다른 이름인지, 본문 전승 과정에서 생긴 차이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헨」(⁨חֵן⁩)은 히브리어로 은총이나 호의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스바냐의 아들 요시야의 다른 이름 또는 그를 가리키는 표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왕관은 누구를 기념하는가

기념물과 연결되는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온 이들과 그들을 맞아들인 집의 주인으로 이해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회복에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고, 그 일이 이루어지는 자리를 제공한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기념물과 연결하십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회복이 특별한 지도자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입니다. 스룹바벨은 성전 재건을 이끄는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들의 은과 금도 그 회복의 약속을 드러내는 데 사용됩니다.

이들의 참여는 왕관이라는 눈에 보이는 물건 속에 남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그 왕관을 볼 때, 그들은 이미 완성된 왕국의 영광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직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통치와 평화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왕관은 과거의 기념물인 동시에 미래를 향한 표지입니다.

“먼 곳에 있는 이들이 와서” — 회복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범위

스가랴 6:15 본문 →

마지막 절은 성전 건축의 미래를 더욱 넓힙니다.

「먼 곳에 있는 이들이 와서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짓는 데 참여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목소리를 참으로 듣고 따른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스가랴 6:15 · 본디새김

이 약속의 첫 번째 배경은 포로 귀환입니다. 많은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에 끌려갔고, 귀환이 시작된 뒤에도 모두가 한꺼번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먼 곳에 있는 이들」은 우선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유다 사람들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스가랴 2:15에서는 많은 민족이 여호와야훼에게 합류하여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이사야 56:6–7에서는 이방인들이 여호와야훼를 섬기며 그분의 거룩한 산에서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연결을 고려하면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의 참여가 장차 여러 민족에게까지 넓어지는 전망으로 읽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6:15만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민족적 구성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성전 재건이 예루살렘 안에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참으로 듣고 따른다면”

그런데 이 장은 단순히 모든 약속이 아무 조건 없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끝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조건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끝나며, 그 결과를 명시하는 별도의 문장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될 것이다」는 앞의 약속과 연결하기 위해 번역에서 보충된 표현입니다. 이 조건을 바로 앞의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참여에 연결할 수도 있고, 앞서 선포된 회복의 약속 전체와 관련된 요구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듣고 따른다면」(⁨שָׁמַע⁩)은 같은 동사 어근을 반복하여 듣는 행동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단순히 소리를 귀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응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듣는다는 것은 자주 순종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6:4–5의 「이스라엘아, 들으라」라는 부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요청과 이어집니다.

스가랴서의 앞부분에서도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제 일련의 환상들이 끝나는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사람의 순종이 하나님의 능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다는 사실이 순종의 필요를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회복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은 백성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할 이유가 됩니다.

마지막 장면 — 성전에 남겨진 왕관

스가랴 6:1–15 본문 →

하나님의 회복은 온 땅을 움직이는 권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먼 곳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가져온 은과 금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왕관은 제사장의 머리에 놓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싹에 관한 약속이 선포됩니다. 그 왕좌에서 정의로운 통치가 이루어지고, 제사장의 섬김과 함께 평화를 이루며, 먼 곳의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미래입니다.

인간이 가진 권력은 궁극적인 권력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직무도 그 자체로 절대적인 권위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권세는 그것이 누구에게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왕관을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왕관을 누구의 권력을 자랑하는 물건으로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성전 안에 두어 앞으로 이루실 일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아직 왕좌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자리에서, 왕관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를 기다리는 기념물로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