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7–8장 · 금식에 관한 질문

금식을 묻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신 오래된 말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지켜 온 금식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 질문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된 뒤 백성은 해마다 그날을 기억하며 울고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면, 과거의 재앙을 슬퍼하는 의식도 끝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금식을 계속하라거나 그만두라고 즉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금식을 얼마나 오래 계속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누구를 위해 금식했는지 물으십니다.

금식의 날짜를 묻는 질문에 하나님은 참된 판결을 내리고, 인애와 연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금식에 관한 질문이 사회적 정의에 관한 명령으로 이어질까요?

스가랴 7장은 하나님께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장입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87장 본문 읽기 →

“다섯째 달에 울며 몸을 삼가야 합니까?” — 회복이 시작된 뒤에도 슬퍼해야 하는가

스가랴 7:1–3 본문 →

성전 재건이 진행되는 시기에 찾아온 질문

스가랴 7장은 정확한 날짜로 시작합니다.

다리오 왕 제4년, 아홉째 달 곧 기슬레우월 나흗날에 여호와야훼의 말이 스가랴에게 왔다.스가랴 7:1 · 본디새김

앞선 환상들은 다리오 제2년에 주어졌습니다(스가랴 1:1, 7). 이번에는 제4년입니다. 성전 재건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에스라 6:15에 따르면 성전은 다리오 제6년에 완공됩니다.

오랫동안 파괴된 성전을 바라보며 슬퍼했던 사람들이 이제 그 성전이 다시 세워지는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파괴를 기억하는 금식은 여전히 필요한 것일까요?

왜 다섯째 달에 울었는가

다섯째 달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달입니다.

열왕기하 25:8–10과 예레미야 52:12–14는 바벨론 군대가 다섯째 달에 예루살렘에 들어와 성전과 왕궁을 불태우고 성벽을 허문 일을 기록합니다. 두 본문은 사건과 관련된 날짜를 조금 다르게 기록하지만, 성전 파괴가 다섯째 달에 일어났다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대답하실 때 다섯째 달뿐 아니라 일곱째 달도 언급하십니다.

일곱째 달은 바벨론이 유다에 세운 총독 그달리야가 암살당한 달입니다(열왕기하 25:25; 예레미야 41:1–3). 그달리야의 죽음은 예루살렘 파괴 이후 그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삶을 다시 혼란에 빠뜨린 사건이었습니다. 열왕기하 25:26에서는 사람들이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떠나는 모습까지 기록합니다.

이 금식들은 단순한 개인적 경건 훈련이라기보다 공동체의 역사적 상처를 기억하는 행위였습니다.

벧엘에서 온 사람들

2절은 벧엘에서 사람들이 왔다고 말합니다.

벧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 장소를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창세기 28:19). 그러나 북왕국 시대에는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운 종교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열왕기상 12:28–33).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호의를 구하려고」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은혜와 응답을 구하는 행동입니다. 그들의 질문 역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묻지 않은 더 깊은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십니다.

“정말 나를 위해 금식했느냐?” — 행위보다 먼저 물으시는 그 목적

스가랴 7:4–6 본문 →

대답은 질문의 방향을 바꿉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물었습니다.

“앞으로도 다섯째 달에 울며 몸을 삼가야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를 물으십니다.

「이 땅의 모든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가 이 일흔 해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며 애곡했을 때, 정말 나를 위해, 바로 나를 위해 금식했느냐?』」스가랴 7:5 · 본디새김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나를 위해」의 반복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 거듭 강조됩니다. 금식했는지 여부보다 그 금식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사람은 종교적인 행위를 수행하면서도 그 행위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놓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슬픔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식을 수행함으로써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행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일흔 해 동안 금식했던 모든 사람이 단 한 번도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고 확정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질문의 형식으로 그들의 동기와 방향을 검토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먹는 것도 자신을 위해, 금식하는 것도 자신을 위해

「『너희가 먹을 때와 마실 때, 먹는 이도 너희 자신이고 마시는 이도 너희 자신이 아니냐?』」스가랴 7:6 · 본디새김

음식을 먹지 않는 것과 먹는 것은 겉으로는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행동의 방향은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행동이 모두 자기 자신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금식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레위기 16:29–31에서는 속죄일에 스스로를 낮추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요엘 2:12–13에서도 하나님은 백성에게 금식하며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성경이 비판하는 것은 금식이라는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는 응답하지 않는 종교생활입니다.

“예루살렘이 평온하던 때의 말들이 아니냐?” — 금식하기 전에 들었어야 할 말씀

스가랴 7:7 본문 →

「『예루살렘과 그 둘레의 성읍들에 사람들이 평온하게 살고, 네게브와 낮은 지대에도 사람들이 살던 때에, 여호와야훼가 이전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한 말들이 아니냐?』」스가랴 7:7 · 본디새김

하나님은 백성의 기억을 더 먼 과거로 돌리십니다.

그들이 금식하기 시작했던 때보다 이전입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기 전입니다. 성전이 불타기 전이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기 전입니다.

재앙이 오기 전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게브는 유다 남쪽의 건조한 지역을 가리키며, 낮은 지대는 일반적으로 유다 산지 서쪽의 평야성 구릉 지대인 셰펠라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한 도시만을 떠올리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 살며 삶을 이어가던 시절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라가 아직 유지되고, 도시가 번성하며,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살아가던 때에도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재앙이 닥치기 전에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왜 과거의 번영을 떠올리게 하시는가

사람들은 성전이 무너진 뒤 일흔 해 동안 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 자신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백성은 성전이 불탔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불타기까지 자신들이 어떤 말씀을 거부했는지도 기억해야 했습니다.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는 일과, 그 비극을 낳은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전 예언자들이 전했던 말씀의 핵심을 다시 들려주십니다.

“참된 판결을 내려라” —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어떤 삶이었는가

스가랴 7:8–10 본문 →

금식에 대한 답변이 재판에서 시작됩니다

8절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다시 스가랴에게 임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참된 판결을 내려라. 각자 자기 형제에게 인애와 연민을 베풀어라.」스가랴 7:9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재판은 단순히 법을 해석하는 기술적인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재산을 둘러싼 분쟁, 약자의 생존, 공동체의 질서가 재판의 판단에 달려 있었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판결을 왜곡하면, 힘없는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여기서 「참된」이라는 말은 단순히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뜻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거짓과 왜곡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자신을 예배하는 방식뿐 아니라, 서로의 권리를 어떻게 다루는지도 살피십니다.

이것은 신명기 16:18–20에서 재판장들에게 공의로운 재판을 요구하고,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령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스가랴가 선포하는 내용은 새로운 윤리 체계가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신 삶입니다.

인애와 연민은 단순한 친절인가

하나님은 이어서 인애와 연민을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애」라는 이 단어는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신실한 사랑과 호의, 충실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법적으로 옳은 판결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인애와 연민이 있어야 합니다.

공정함과 긍휼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의를 강조하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는 연민을 강조하면서 실제로 일어나는 불의를 바로잡는 일에는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스가랴의 말씀에서는 둘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는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는 차가운 판단이 아니며, 그분이 요구하시는 긍휼도 불의를 그대로 두는 막연한 감정이 아닙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 나그네와 가난한 이를 억압하지 마라. 각자 자기 형제를 해칠 일을 너희 마음속으로 꾸미지 마라.」스가랴 7:10 · 본디새김

이들은 고대 사회에서 경제적·사회적 보호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 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과부는 남편을 잃은 뒤 생계와 권리 보호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습니다. 고아는 자신을 보호하고 대변할 부모가 없는 처지였습니다.

나그네는 공동체 안에 살면서도 토지나 친족 관계를 통해 얻는 보호 기반이 약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 자원이 부족하여 불리한 거래나 착취에 노출되기 쉬웠습니다.

특히 신명기 10:18–19에서는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약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7:5–7에서는 서로 참으로 정의를 행하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는 일이 그 땅에서 계속 살아가는 삶과 연결됩니다.

마음속에서 꾸미는 악까지

「각자 자기 형제를 해칠 일을 너희 마음속으로 꾸미지 마라.」 이 명령은 실제로 벌어진 행동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다른 사람을 해칠 일을 계획하는 마음을 다룹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금지하는 말씀으로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문제 삼는 것은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한 의도적인 계획입니다.

부당한 판결이 실제로 내려지기 전에 누군가는 이미 그 판결을 왜곡할 생각을 품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재산을 빼앗기 전에 그 일을 계획했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기 전에 그의 약한 처지를 이용하려고 마음먹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계획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부터 잘못된 방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은 공적인 판결과 사적인 관계와 마음의 의도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금식에 관한 질문에 이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고 말하는 사람이 실제 삶에서는 다른 사람을 짓누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싶다고 하면서도 이웃의 고통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8:3–7에서도 백성은 자신들이 금식하는데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으신다고 불평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이 금식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억압한다고 지적하시고, 불의한 결박을 풀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이 실제 삶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깨를 돌리고 귀를 막고 마음을 굳히다 — 말씀을 거부한 사람들의 모습

스가랴 7:11–12 본문 →

이제 하나님은 조상들이 그 말씀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귀 기울이기를 거부했고, 고집스럽게 어깨를 돌렸으며, 듣지 않으려고 자기들의 귀를 둔하게 했다.」스가랴 7:11 · 본디새김

고집스럽게 어깨를 돌리다

누군가 말을 걸 때 그 사람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은 듣고 응답하려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반대로 어깨를 돌린다는 것은 그 말을 거부하는 몸짓입니다.

말씀이 부족했던 것이 아닙니다.

듣지 않으려는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부싯돌이 된 마음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부싯돌로 만들어, 가르침과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자기 영으로 이전 예언자들을 통해 보낸 말들을 듣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야훼에게서 큰 분노가 일어났다.」스가랴 7:12 · 본디새김

말씀이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굳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으로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바로 앞 장들에서 스가랴는 하나님의 영으로 성전 재건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4:6).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영으로 주어진 예언자들의 말씀을 조상들이 거부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시며, 잘못된 삶을 바로잡도록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으로 일한다고 말하면서 그 영으로 주어진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어깨를 돌렸다」는 히브리어 표현에는 완강하고 반항적인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 모습은 멍에를 지기를 거부하는 동물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느헤미야 9:29에서도 이스라엘이 완강하게 어깨를 돌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부싯돌」은 매우 단단한 물질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되지만, 정확히 어떤 광물이나 물질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마음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심하는 인간의 내면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마음을 부싯돌처럼 만든다는 표현은 감정이 메말랐다는 말보다 더 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완강한 결심을 가리킵니다. 특히 여기서는 「가르침」과 「이전 예언자들을 통해 보낸 말들」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가르침」은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주신 규범적인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불러도 나는 듣지 않을 것이다” — 듣지 않은 사람들의 기도가 남긴 역설

스가랴 7:13 본문 →

13절은 이 장에서 가장 날카로운 대조를 보여 줍니다.

「그가 불렀지만 그들이 듣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나는 듣지 않을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스가랴 7:13 · 본디새김

듣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 듣기를 원합니다

조상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았던 말씀은 특별히 정의와 인애와 연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귀를 닫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생겼을 때는 하나님이 귀를 열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감정적으로 보복하신다는 뜻으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응답 거부를 언약을 거듭 거부한 백성에게 임하는 심판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사실이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둘을 분리된 관계로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인간이 충분히 순종해야만 하나님께 말할 자격을 얻는다는 단순한 거래 원리가 아닙니다. 본문이 다루는 것은 특정한 역사 속에서 반복된 언약의 거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와 긍휼을 요구하셨지만 백성이 계속해서 거부했습니다. 그러한 거부가 쌓인 끝에 심판이 임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오늘날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를 곧바로 그 사람의 죄에서 찾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본문의 역사적 맥락을 넘어서는 적용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야 할 책임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그 탐스러운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다” — 아름다웠던 땅이 무너진 이유

스가랴 7:14 본문 →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은 조상들이 겪은 심판을 설명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던 모든 민족 사이로 폭풍으로 몰아 흩뜨렸다. 그들이 떠난 뒤 그 땅은 황폐해져, 지나가는 사람도 돌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그 탐스러운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다.」스가랴 7:14 · 본디새김

누가 그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는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을 파괴한 것은 바벨론 군대였습니다.

열왕기하 25장은 바벨론이 성전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문 일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스가랴 7장은 하나님의 심판과 유다 백성의 불순종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바벨론의 침략은 실제 역사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사건에 대한 예언서의 신학적 설명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해 온 유다 공동체의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외부의 침략자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선 스가랴 1:15에서 하나님은 재앙을 일으키는 데 힘을 보탠 민족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동시에 유다 백성의 책임도 외부의 침략 때문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탐스러운 땅이라는 표현

이 땅은 단순히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영토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7절에서는 예루살렘과 주변 성읍들, 네게브와 낮은 지대에 사람들이 평온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14절에서는 사람들이 떠난 뒤 그 땅이 황폐해졌습니다. 두 장면 사이에 놓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거부한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그들이 예전의 땅을 회복했다고 해서 과거의 잘못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성전을 다시 짓는다고 해서 조상들이 거부했던 말씀을 이미 따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공동체는 같은 말씀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3:19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려 하신 땅은 아름답고 귀한 유산으로 묘사됩니다.

마지막 장면 — 평온하던 땅이 황무지가 되기까지

스가랴 7:1–14 본문 →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은 백성이 슬픔을 표현하는 의식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들려주신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슬픔의 의식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슬픔이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스가랴 7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한때 예루살렘과 주변 성읍들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네게브와 낮은 지대에도 마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 그 땅은 황폐해져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도 돌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제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그 땅에 다시 살고 있습니다. 성전은 재건되고 있고, 그들은 과거의 파괴를 기억하며 금식을 계속해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래전 조상들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들이 울기 시작하기 전, 아직 땅이 황폐해지기 전,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성전이 무너진 날을 기억했습니다. 이제는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한때 평온하던 땅이 황무지가 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그들에게 참된 판결을 내리고 인애와 연민을 베풀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