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7–8장 · 금식에 관한 질문
다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
스가랴 7장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질문을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며 지켜 온 금식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성전 재건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이제 과거의 재앙을 애도하는 관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의 대답은 예상과 다르게 전개됩니다. 7장에서는 금식 자체보다 그들의 정의와 자비를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8장에 이르러서는 아직 금식에 관한 최종 대답을 주지 않으신 채, 전혀 다른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지팡이를 짚고 광장에 앉아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곁에서 마음껏 뛰어놉니다.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맺히고, 사람들은 이웃에게 진실을 말합니다. 마침내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유다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함께 가자고 청합니다.
이 모든 장면은 금식에 관한 질문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금식했던 이유를 생각하면 그 관계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한 도시의 파괴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이 불탔고, 주민들이 죽거나 끌려갔으며,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삶의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금식은 그 상실의 기억을 간직하는 행위였습니다.
여호와야훼가 돌아오시면 도시의 이름이 바뀐다
여호와야훼의 첫 말씀은 뜻밖에도 격렬한 감정으로 시작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온을 두고 큰 질투를 품었다. 큰 분노로 그를 두고 질투했다.」스가랴 8:2 · 본디새김
성경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때때로 우상숭배를 향한 심판의 이유가 됩니다. 출애굽기 34:14에서 여호와야훼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하시며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알리십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무관심하게 지켜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스가랴 8장에서는 같은 질투가 회복을 향합니다. 시온이 황폐해진 상태도, 그곳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좌절된 듯 보이는 현실도 그대로 두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1장 14–17절에서도 시온을 향한 여호와야훼의 질투는 예루살렘에 자비를 베풀고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약속과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분노가 정확히 누구를 향하는지는 8:2만으로 명시되지 않습니다. 앞선 심판을 불러온 죄에 대한 분노와 시온의 황폐를 향한 열정이 함께 떠오르지만, 어느 한 대상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곧이어 그 행동이 선언됩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온으로 돌아왔다.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겠다. 예루살렘은 진실의 성읍이라 불리고,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 불릴 것이다.」스가랴 8:3 · 본디새김
성전의 벽을 세우고 제단을 마련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이 의미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실’은 단지 거짓말이 없는 상태보다 넓은 의미를 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의 성읍’이라는 이름은 그곳이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도시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담습니다.
이 이름은 뒤에 나오는 명령과도 연결됩니다. 16절에서 백성은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고 성문에서 진실과 평화의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19절에서는 진실과 평화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다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도시의 이름을 바꾸고,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이 주민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돌아왔다」는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선언되고, 「살겠다」는 앞으로 펼쳐질 일을 가리킵니다. 예언에서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확정된 현실처럼 표현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 말만으로 하나님의 귀환이 역사적으로 완결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표현은 적어도 하나님의 돌아오심을 단순한 가능성으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그분이 시온을 다시 자신의 거처로 삼으시겠다는 선언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회복된 예루살렘의 가장 놀라운 풍경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겠다고 선언하신 뒤, 독자가 보게 되는 장면은 웅장한 성전도, 강대한 군대도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든 남자들과 여자들이 예루살렘의 광장들에 다시 앉을 것이다. 저마다 나이가 많아 손에 지팡이를 들 것이다.」스가랴 8:4 · 본디새김
「그 성읍의 광장들은 거기서 노는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로 가득 찰 것이다.」스가랴 8:5 · 본디새김
전쟁으로 무너진 도시에서 가장 쉽게 잃어버리는 것 가운데 하나는 평범한 일상입니다. 노인이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다는 보장도, 아이가 거리에서 마음 놓고 놀 수 있다는 믿음도 사라집니다.
스가랴는 바로 그 일상을 회복의 증거로 제시합니다.
지팡이는 늙어서 몸을 의지해야 하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약함이나 비참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가 많아질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게 하는 물건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아이들이 노동하거나 훈련받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놀고 있습니다. 이는 아이들이 특별히 뛰어난 무엇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아이로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회복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두 세대는 도시의 시간을 함께 보여 줍니다.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과 앞으로 오랫동안 살아갈 사람들이 같은 광장을 차지합니다. 한 세대만 겨우 살아남은 도시가 아니라, 세대를 이어 삶이 계속되는 도시입니다.
노인들이 오래 사는 것과 아이들이 안전하게 노는 것은 각 가정의 사적인 행복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간에서 그런 일이 가능해야 합니다. 도시 전체가 다시 살아갈 만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은 스가랴 3:10의 약속과도 통합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하는 평화로운 삶이 그려졌습니다. 미가 4:4에서도 두려움 없이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스가랴 8장은 그 평화를 도시의 광장으로 가져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그날들에 이 백성의 남은 자들 눈에 너무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내 눈에도 너무 어려운 일이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스가랴 8:6 · 본디새김
본문은 백성의 눈과 하나님의 눈을 나란히 놓습니다. 같은 미래를 바라보지만, 한쪽은 폐허와 부족한 힘을 알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 미래를 이루실 분입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미래는 백성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크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곧 9절부터는 손을 굳세게 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명령이 주어지기 전에 먼저 약속이 있습니다. 백성이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흩어진 백성이 돌아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흩어졌던 백성을 그곳으로 데려오겠다고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내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원하겠다.」스가랴 8:7 · 본디새김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은 동쪽과 서쪽을 가리킵니다. 바벨론 유배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동쪽은 특별히 중요하지만, 본문은 백성을 바벨론에서만 데려오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두 방향을 제시하여 흩어짐의 넓이를 드러냅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43:5–6에서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백성을 모으겠다는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한 지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사정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고향을 잃고 흩어진 사람들까지 시야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8절에서 약속은 단순한 귀향을 넘어섭니다.
「내가 그들을 데려오면 그들은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실과 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스가랴 8:8 · 본디새김
3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겠다고 하셨습니다. 8절에서는 돌아온 백성이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 백성도 거합니다. 단순히 같은 공간을 차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백성이 다시 함께 살아가는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실과 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는 선언은 출애굽기 6:7, 예레미야 31:33, 에스겔 36:28 등에서 반복되는 언약의 언어와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땅을 잃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림으로써 심판을 경험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회복은 땅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세워져야 합니다.
3절에서 예루살렘은 진실의 성읍이 된다고 선언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진실과 의는 먼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실 관계의 성격으로 제시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시며 의롭게 행하시는 분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백성의 회복은 그분의 신실함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를 약속받은 사람들은 아직 성전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놓여 있습니다.
평화의 약속은 무너진 현실 속에서 손을 움직이게 한다
9절에서 예언의 시선이 미래의 광장에서 현재의 건축 현장으로 돌아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집 곧 성전을 세우려고 기초를 놓던 날에 있었던 예언자들의 입에서, 이날들에 이 말들을 듣는 너희는 너희 손을 굳세게 하여라.」스가랴 8:9 · 본디새김
「너희 손을 굳세게 하여라」라는 명령은 13절에서도 반복됩니다. 두 구절이 이 단락의 시작과 끝을 감쌉니다. 지금 듣는 예언의 말씀을 붙잡고 중단되거나 위축되었던 일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그날들 전에는 사람에게 품삯이 없었고, 짐승에게도 품삯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가는 사람과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대적 때문에 평화가 없었다. 내가 모든 사람을 내몰아 저마다 자기 이웃을 대적하게 했다.」스가랴 8:10 · 본디새김
일해도 보수를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노동에 동원되는 짐승에게도 품삯이 없었다는 표현은 생산 활동 전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을 강조합니다. 밖으로 나가거나 안으로 들어오는 일조차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적대적인 환경 때문에 이동과 교역, 일상적인 활동이 위협받았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공동체 내부의 관계였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대적했습니다. 외부의 위험뿐 아니라 이웃 사이의 적대감까지 삶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이 상황을 자신이 허용하시거나 내리신 심판의 결과로 말씀하십니다. 10절 후반의 주어는 분명히 하나님입니다. 이는 공동체의 혼란을 단순히 불운이나 외부 환경의 문제로만 보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곧이어 결정적인 전환이 선언됩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 백성의 남은 자들을 이전 날들처럼 대하지 않는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스가랴 8:11 · 본디새김
앞으로 상황이 달라지는 이유는 백성에게 갑자기 엄청난 자원이나 힘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이제 그들을 이전과 다르게 대하시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평화의 씨앗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포도나무는 제 열매를 내고, 땅은 제 소출을 내며, 하늘은 제 이슬을 내릴 것이다. 내가 이 백성의 남은 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유산으로 주겠다.」스가랴 8:12 · 본디새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연의 질서가 다시 제 역할을 합니다. 10절에서 사람은 일하고도 품삯을 얻지 못했습니다. 12절에서는 포도나무와 땅이 각각 제 열매와 소출을 냅니다. 10절에서는 평화가 없었지만, 12절에서는 평화가 씨앗과 연결됩니다.
평화는 단지 전쟁이 멈추는 상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 일을 하고, 그 결과를 누리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입니다.
「유다 집과 이스라엘 집아, 너희가 민족들 사이에서 저주가 되었던 것처럼,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는 복이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손을 굳세게 하여라.」스가랴 8:13 · 본디새김
여기서는 유다 집뿐 아니라 이스라엘 집도 함께 불립니다. 왕국이 나뉘고 백성이 흩어진 역사를 넘어, 하나님이 자기 백성 전체를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전망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너희는 복이 될 것이다」라는 말은 창세기 12:2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복을 받는 사람일 뿐 아니라 복이 되는 사람으로 부름받았습니다. 민족들 사이에서 저주의 표지가 되었던 그들이 이제 복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현재의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일을 계속할 이유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라 3:10은 귀환한 백성이 성전 기초를 놓았던 일을 기록합니다. 이후 공사가 중단되거나 지연되었고,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 활동을 통해 재건이 다시 추진되었습니다(에스라 4:24–5:2). 학개 2:18–19에서도 성전 기초를 놓은 날을 돌아보게 하면서, 이전에는 열매가 없었지만 이제 복을 주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다만 9절의 ‘기초를 놓던 날’이 최초의 기초 공사를 가리키는지, 예언자들의 활동 속에서 새롭게 진행된 재건의 시점을 강조하는지는 정확히 한 날짜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제라 하샬롬은 ‘씨앗’과 ‘평화’가 결합한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동사가 없기 때문에 문장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집니다. ‘평화의 씨앗이 있을 것이다’처럼 평화를 낳는 씨앗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씨 뿌림이 평안할 것이다’라고 읽으면 농사가 방해받지 않고 이루어지는 상태를 강조하게 됩니다. 뒤따르는 포도나무의 결실과 더 밀접하게 연결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고대 팔레스타인의 농경 환경에서 이슬은 건기 동안 식물에 수분을 공급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이슬까지 언급하는 것은 추상적인 풍요보다 실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가깝습니다.
진실의 성읍은 성문에서 만들어진다
여기서부터는 예루살렘의 회복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가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희 조상들이 나를 분노하게 했을 때, 내가 너희에게 해를 입히기로 뜻을 정하고 마음을 돌리지 않았던 것처럼,」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스가랴 8:14 · 본디새김
「그렇게 이날들에 나는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집에 잘해 주기로 뜻을 정했다. 두려워하지 마라.」스가랴 8:15 · 본디새김
본문은 이전의 심판이 실수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심판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마지막 말도 아닙니다.
여기서 ‘뜻을 정했다’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합니다. 과거의 심판과 현재의 회복이 모두 하나님의 의도적인 행동으로 제시됩니다. 다만 이것을 이후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다시는 심판이 없으리라는 무조건적인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지금 예루살렘과 유다를 향해 하나님이 선을 베풀기로 하셨다는 약속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해야 할 일들은 이러하다. 저마다 자기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여라. 너희 성문들에서 진실과 평화의 판결을 내려라.」스가랴 8:16 · 본디새김
앞서 회복될 도시의 이름은 ‘진실의 성읍’이었습니다. 이제 그 이름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화됩니다. 서로를 속이고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공동체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개인의 말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로이면서 공동체의 공적인 문제를 처리하고 재판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룻기 4:1–11에서는 보아스가 성문에서 장로들과 함께 법적 문제를 처리합니다. 따라서 진실의 성읍이 되려면 개인들이 정직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동체의 분쟁을 처리하고 판결하는 공적인 질서도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과 평화의 판결’이라는 표현을 진실한 판결과 평화를 위한 판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은 진실과 평화의 관계를 더 자세하게 풀어 주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기보다는 두 가치가 함께 판결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진실을 외면하면서 갈등만 덮는 것은 이 구절이 말하는 평화가 아닙니다. 반대로 사실을 밝힌다는 명분으로 이웃 사이의 적대감을 끝없이 키우는 것 역시 평화로운 공동체의 모습과 거리가 있습니다.
본문은 진실과 평화를 경쟁시키지 않고 함께 요구합니다.
「저마다 자기 이웃을 해칠 일을 너희 마음속으로 꾸미지 마라. 거짓 맹세를 사랑하지 마라. 이 모든 것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스가랴 8:17 · 본디새김
16절이 말과 공적인 판결을 다루었다면, 17절은 마음속의 계획까지 다룹니다. 특히 「이웃을 해칠 일을 너희 마음속으로 꾸미지 마라」는 명령은 7:10과 직접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여호와야훼는 마음속으로 서로 해칠 일을 꾸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전이 무너지기 전 예언자들이 외쳤던 말씀과 성전을 다시 세우는 시대에 필요한 말씀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성전 재건은 과거의 실패를 단순히 지워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무엇이 그 실패를 불러왔는지 기억하고, 같은 악을 되풀이하지 않는 삶을 요구합니다.
심판 가운데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이웃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회복의 약속을 받은 이들에게는 「저마다 자기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여라」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같은 이웃이 다시 등장하지만 관계의 방향은 반대입니다.
그들은 성전 파괴를 슬퍼하며 금식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가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과거의 파괴를 애도하는 것뿐 아니라, 그 파괴 이전에 공동체를 병들게 했던 불의와 거짓을 버리는 일입니다. 성전이 다시 세워져도 이웃을 해치는 삶이 그대로라면, 그들은 과거의 잘못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슬픔을 기억하던 날이 기쁨의 절기가 된다
이제 마침내 7장에서 제기된 금식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은 유다 집에 환희와 기쁨과 즐거운 절기들이 될 것이다. 진실과 평화를 사랑하여라.」스가랴 8:19 · 본디새김
7장에서 사람들은 다섯째 달에 울며 금식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여기서 다섯째 달뿐 아니라 네 차례의 금식을 함께 언급하십니다. 이 금식들은 예루살렘 멸망을 전후하여 일어난 재앙과 연결됩니다.
금식을 지키던 이유가 파괴와 상실이었다면, 이제 기뻐할 이유는 회복과 구원입니다.
여기에는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의 변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졌다는 사실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회복이 이루어질 때, 그 과거는 더 이상 끝없는 상실의 기억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역사를 돌아보면서도 그 역사 속에서 백성을 다시 일으키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은 어떤 날에 금식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에게 어떤 삶을 사랑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금식하는 날이냐 기뻐하는 날이냐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의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진실과 평화는 단지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 아닙니다. 백성이 좋아하고 추구하며 소중히 여겨야 할 삶의 가치입니다. 금식의 날짜가 바뀌어도 거짓과 불의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라면, 예언자가 요구했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열째 달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한 달이었습니다(열왕기하 25:1). 넷째 달에는 성벽이 뚫렸습니다(예레미야 39:2). 다섯째 달에는 성전이 불탔습니다(열왕기하 25:8–9). 일곱째 달에는 바벨론이 세운 유다 총독 그달리야가 살해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다시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열왕기하 25:25–26). 물론 이 약속이 스가랴 시대에 네 금식이 곧바로 모두 폐지되었다는 기록은 아닙니다. 본문은 앞으로 그것들이 기쁜 절기가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역사적으로 그 약속이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 실현되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옷자락을 붙잡는 열 사람
스가랴 8장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야기의 범위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앞에서는 예루살렘의 주민들과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러 민족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등장합니다.
「한 성읍의 주민들이 다른 성읍으로 가서 말할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호의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야훼를 찾으러 꼭 갑시다. 나도 가겠습니다.』」스가랴 8:21 · 본디새김
하나님을 향해 가려는 마음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는 모습을 짧은 대화로 보여 줍니다.
「많은 민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에서 만군의 여호와야훼를 찾고 여호와야훼의 호의를 구하러 올 것이다.」스가랴 8:22 · 본디새김
8장 앞부분에서는 유다의 남은 자들 눈에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어려워 보이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강대한 나라들까지 예루살렘으로 와서 여호와야훼를 찾습니다. 이 장면에서 예루살렘의 중요성은 군사력이나 경제적 우위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오는 목적은 분명히 여호와야훼를 찾고 그분의 호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 표현은 7장에서 금식에 관해 질문하러 온 사람들의 행동과 연결됩니다. 7:2에서 사람들은 여호와야훼의 호의를 구하려고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많은 민족이 직접 여호와야훼의 호의를 구하러 찾아옵니다.
그러나 스가랴는 이 거대한 미래를 마지막에 매우 작은 행동 하나로 압축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그날들에는 민족들의 온갖 언어를 쓰는 남자 열 명이 붙잡을 것이다. 한 유다인 남자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과 함께 갑시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말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스가랴 8:23 · 본디새김
옷을 붙잡는 행동은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함께 가려는 의지를 눈에 보이게 합니다.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있지만,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 전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백성과 함께하시는 일이 다른 민족들까지 하나님을 찾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의 「나도 가겠습니다」는 권하던 사람이 자신도 반드시 가겠다고 덧붙이는 말일 수 있고, 그 권유를 들은 사람이 동참하겠다고 대답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원문은 여기서 화자가 바뀌었다는 표시를 명확히 남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쪽인지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열이라는 수를 반드시 특정한 열 나라나 열 집단에 대응시킬 근거는 본문에 없습니다. 여기서는 여러 민족이 유다인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선명하게 그리는 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도 ‘여러분과’는 복수형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2:3에서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여러 족속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약속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스가랴 8장 13절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이 복이 될 것이라는 선언이 마지막 장면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얻는 것입니다. 스가랴 2:11에서도 많은 민족이 여호와야훼에게 속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신약에서는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 참여하는 일이 이러한 약속들과 연결되어 이해됩니다(에베소서 2:11–22). 그러나 스가랴 8:23은 특정한 신약 인물을 직접 예고한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우선 이 구절은 하나님이 회복하신 백성을 통해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를 찾게 되는 미래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돌아오신다는 것은 무엇을 바꾸는가?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그들에게 파괴된 성전만이 아니라 회복될 도시 전체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금식을 끝내는 진정한 이유는 슬픔을 잊어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슬픔을 낳았던 현실을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노인의 손에는 지팡이가 있고, 낯선 사람들의 손에는 유다인의 옷자락이 있습니다.
한쪽은 그곳에서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다른 한쪽은 그곳으로 함께 가고 싶다는 표시입니다.
그 사이에는 하나님이 돌아오신 도시가 있습니다.
한때 사람들이 떠나야 했던 도시가 이제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어 하는 도시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위대한 도시가 되었다는 소문 때문이 아닙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모습도, 그곳에서 무엇을 하게 되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가자고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마지막에 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