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9–11장 · 여러 민족의 앞날

평화를 말하는 왕과 싸우시는 하나님

스가랴 9장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두 장면이 등장합니다.

한 장면에서는 왕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가난하며, 그의 통치 아래에서는 병거와 군마와 전쟁의 활이 사라집니다. 그가 민족들에게 전하는 말은 평화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유다를 활처럼 당기시고 에브라임을 그 활에 메우십니다. 하나님의 화살은 번개처럼 날아가고, 그분은 뿔나팔을 불며 폭풍 속에서 진군하십니다.

한쪽에서는 전쟁의 무기를 없애시고, 다른 쪽에서는 자기 백성을 무기로 삼으십니다.

어떻게 이 두 장면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할 수 있을까요?

앞선 8장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그렸습니다. 9장에서는 시선이 예루살렘 밖으로 확장됩니다. 북쪽의 다마스쿠스에서 시작된 예언은 해안의 두로와 블레셋 도시들을 지나 시온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뜻밖의 왕이 등장합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79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의 말씀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온다

스가랴 9:1–4 본문 →

9장은 이전 장들과 다른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하드락 땅에 관한 여호와야훼의 말, 신탁이다. 다마스쿠스는 그 말이 머무는 곳이다. 사람의 눈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야훼를 향하기 때문이다.스가랴 9:1 · 본디새김

‘신탁’은 ‘짐’이라는 뜻을 지니며, 예언서에서는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이사야 13:1; 나훔 1:1). 9장부터는 앞부분에서 반복되던 환상과 연대 표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신탁의 제목이 등장하고, 말씀의 대상도 여러 나라로 확대됩니다. 같은 형식의 제목은 스가랴 12:1에서도 다시 나타납니다.

하드락은 성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는 지명입니다. 고대 아시리아 기록에 나타나는 하타리카와 연결되며 일반적으로 시리아 북부의 지역으로 이해되지만, 정확한 위치에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와 하맛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도시들입니다. 이어지는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의 페니키아 도시들이며, 5절부터 등장하는 블레셋 도시들은 더 남쪽에 있습니다. 따라서 예언에 등장하는 지명들은 대체로 북쪽에서 시작하여 해안 지역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흐름을 이룹니다.

이 지리적 순서는 8절의 선언을 준비합니다.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이 선포된 뒤, 여호와야훼는 마침내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 진을 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눈(⁨עַיִן⁩)’이라는 명사와 여호와야훼를 가리키는 표현 사이의 관계를 명확한 동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본디새김처럼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눈이 여호와야훼를 바라본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변 민족들의 운명이 흔들리자 모든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여호와야훼의 눈이 모든 사람과 이스라엘을 살핀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통치와 감찰이 강조됩니다. 두 읽기는 문법과 문맥에서 각각 근거를 얻지만, 원문의 압축된 표현만으로 어느 쪽을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의 읽기를 따르면 이 장의 시작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주변 민족들의 시선도 여호와야훼에게 향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국경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곧이어 예언은 두로를 향합니다.

두로는 자기를 위해 요새를 쌓고, 은을 흙먼지처럼, 금을 거리의 진흙처럼 쌓아 두었다.스가랴 9:3 · 본디새김

두로는 지중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항구도시였습니다. 특히 섬에 위치한 중심부는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에스겔 27장은 두로가 여러 나라와 교역하며 번영하던 모습을 길게 묘사합니다.

은과 금은 귀한 재물이지만, 흙먼지와 진흙은 흔하고 발에 밟히는 것들입니다. 이 비유는 두로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는지를 과장된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동시에 두로의 힘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도 드러냅니다. 도시의 방어와 번영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4절에서는 그 모든 준비가 무력해집니다.

보아라, 주가 두로의 소유를 빼앗고, 바다에서 두로의 세력을 칠 것이다. 두로는 불에 삼켜질 것이다.스가랴 9:4 · 본디새김

3절의 ‘쌓아 두었다’와 4절의 ‘빼앗고’가 대조됩니다.

두로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던 바다도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이사야 23장과 에스겔 26–28장에서도 두로의 부와 교만, 그에 대한 심판이 중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특히 에스겔 28:2에서는 두로의 통치자가 자신을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교만해지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이것을 재산을 모으거나 위험에 대비하는 모든 행동이 잘못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두로에 대한 예언의 핵심은 인간의 부와 방어력이 하나님 앞에서도 절대적인 힘을 지닐 수 있다고 믿는 교만에 있습니다.

그리고 두로의 몰락은 그 도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소식이 남쪽의 다른 도시들에까지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예언을 알렉산드로스의 두로 정복과 연결하는 역사적 읽기가 가능합니다. 실제로 두로는 기원전 332년 그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다만 스가랴 9장은 정복자의 이름이나 연대를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본문이 가리키는 유일하고 확정적인 성취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심판받은 민족도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남을 수 있는가?

스가랴 9:5–8 본문 →

두로에 대한 심판을 선포한 뒤, 예언의 시선은 블레셋 도시들로 옮겨 갑니다.

아스글론은 보고 두려워하고, 가자는 몹시 몸부림칠 것이다. 에그론도 그러할 것이다. 그가 기대하던 것이 그를 수치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가자에서 왕이 사라지고, 아스글론에는 사람이 살지 않을 것이다.스가랴 9:5 · 본디새김

특히 에그론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두로와 같은 강력한 도시나 방어 체계에 희망을 걸었다가 그것이 무너지자 낙담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정치적 동맹을 가리키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스돗에는 사생아가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6절의 ‘사생아’는 히브리어 맘제르(⁨מַמְזֵר⁩)를 옮긴 것입니다. 신명기 23:2에서는 공동체의 정식 구성원 자격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문자적으로 사생아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기존 주민의 정체성과 지배 질서가 무너지고 다른 출신의 주민들이 섞여 살게 되는 상태를 가리키는지 해석이 갈립니다. 두 번째 읽기를 따르면 이 구절은 블레셋 도시의 기존 사회질서가 해체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본문이 그 구체적인 인구 구성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여호와야훼의 심판은 이방 도시의 멸망으로 끝나는 듯합니다.

그런데 7절에서 예상하지 못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내가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이 사이에서 그의 역겨운 것들을 제거하겠다.」 그도 우리 하나님께 속한 자로 남고, 유다의 우두머리처럼 될 것이다.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처럼 될 것이다.스가랴 9:7 · 본디새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 남은 자가 이제 하나님께 속하게 됩니다.

‘유다의 우두머리’는 유다 안에서 인정받는 지도적 구성원의 지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남은 자들이 단지 목숨을 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된다는 의미를 담습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전부터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입니다(여호수아 15:63; 사무엘하 5:6–9). 다윗 시대에도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가 등장합니다(사무엘하 24:18–25). 따라서 에그론이 여부스 사람처럼 된다는 말은 과거에 이스라엘과 구별되었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공동체 안에 거주하거나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방을 향한 심판과 이방의 회복은 반드시 서로 반대되는 두 주제만은 아닙니다. 어떤 본문에서는 악한 질서가 무너지는 일이 새로운 관계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이사야 19:18–25에서도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이스라엘과 함께 여호와야훼의 복에 참여하는 놀라운 전망이 등장합니다.

이제 8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시선을 자기 집으로 돌리십니다.

「내가 내 집을 지키며 진을 쳐서 지나가는 자와 돌아오는 자를 막겠다. 억압하는 자가 더는 그들 위로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스가랴 9:8 · 본디새김

앞에서는 도시들이 스스로 요새를 쌓아 안전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이 진을 치시고 지키십니다. ‘내 집’은 문맥상 성전과 그 성전이 자리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보호하시는 이유로 제시되는 마지막 말은 「이제 내가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입니다. 무엇을 보셨는지 목적어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앞의 「억압하는 자」와 연결해 읽으면 자기 백성이 겪어 온 억압과 위험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자연스럽습니다. 출애굽기 3:7에서 여호와야훼가 이집트에 있는 자기 백성의 고통을 보았다고 하신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주변의 위협이 다루어지고 하나님이 자기 집을 지키겠다고 선언하신 다음, 예루살렘을 향해 한 왕이 다가옵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입과 이 사이에 있는 피와 역겨운 것들은 먹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7:10–14에서 피를 먹는 행위는 금지됩니다. 또한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 우상숭배와 관련된 제의 행위들은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블레셋 사람들이 행하던 부정한 식생활이나 제의적 관습, 특히 피와 우상숭배에 관련된 관습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어떤 제물이나 의식이 정확히 지목되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나귀를 탄 왕 — 힘이 없어서인가, 다른 통치를 가져오기 때문인가?

스가랴 9:9–10 본문 →

9절은 이 장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이지만, 앞의 내용과 이어 읽을 때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딸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소리 높여 외쳐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 온다. 그는 의롭고 구원받은 자다. 가난하며 나귀, 곧 암나귀의 새끼인 어린 수나귀를 타고 온다.스가랴 9:9 · 본디새김

시온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싸우거나 방어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시편 72:1–4에서도 이상적인 왕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억압하는 자를 꺾는 통치자로 묘사됩니다. 왕의 위대함은 단지 군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정의를 실현하는가에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이 말을 ‘승리한 자’로 이해합니다. 또 문맥상 구원을 가져오는 왕으로 풀이하는 해석도 있으며, 칠십인역은 구원을 베푸는 행동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옮겼습니다. 다만 히브리어의 형태를 존중한다면, 이 왕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승리를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עָנִי⁩)라 구원을 받은 존재로 그려져 있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가난하며」라는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왕을 부와 위세의 이미지로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엄청난 부와 요새를 가진 도시는 무너지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는 왕에게는 넓은 통치가 약속됩니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말을 끊어 버리겠다. 전쟁의 활도 끊어질 것이다. 그는 민족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를 것이다.」스가랴 9:10 · 본디새김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예루살렘은 남유다의 중심입니다. 이는 적국의 군사력만 없애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자신이 의지하던 전쟁의 수단도 제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의 통치는 전쟁의 수단을 계속 확대하여 유지되는 통치가 아니라, 전쟁의 질서 자체를 끝내는 방향을 향합니다.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라는 표현은 시편 72:8과 매우 가깝습니다. 시편 72편에서도 정의로운 왕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릅니다. ‘강’은 이스라엘의 지리적 언어에서 흔히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땅끝까지’라는 표현이 이어지므로, 이 구절의 강조점은 구체적인 국경선을 계산하는 데 있기보다 왕의 통치가 매우 넓게 확장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사야 11:1–9에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묘사되는 통치자가 의로 판단하고, 약한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며, 마침내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평화가 그려집니다. 스가랴 9장은 그러한 왕의 모습을 나귀를 타고 오는 장면 안에 압축합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21:4–5와 요한복음 12:14–15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스가랴 9:9와 직접 연결합니다. 복음서들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의 모습에서 이 왕의 약속을 읽습니다. 다만 스가랴 9장 자체의 문맥에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시온에 주어진 왕권의 약속과 그 왕이 가져올 평화의 성격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노샤는 ‘구원하다’라는 동사의 수동적 형태로, 기본적으로 구원을 받거나 구출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본디새김은 이 왕을 「구원받은 자」라고 옮겼습니다. ‘승리한 자’는 하나님께 구출받았기에 승리를 얻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왕이 승리한 왕일 수 있으며, 하나님이 구원하신 왕을 통해 백성에게 구원이 이를 수도 있습니다. 「가난하며」에 사용된 아니는 가난한 사람, 고통받거나 낮은 처지에 놓인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문맥에 따라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의 태도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왕의 성품을 강조하여 ‘겸손하다’고 읽을 수도 있고, 실제로 낮고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의미를 살려 ‘가난하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귀는 단지 가난한 사람의 짐승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사기 5:10에서는 귀한 나귀를 타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열왕기상 1:33–40에서는 솔로몬이 다윗의 노새를 타고 왕으로 선포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나귀를 탄 모습 자체가 왕권의 부정은 아닙니다.

물 없는 구덩이에서 희망의 포로로

스가랴 9:11–12 본문 →

왕의 통치가 땅끝까지 이른다는 말씀 다음에는 시온을 향한 매우 개인적인 약속이 이어집니다.

「또 너로 말하면, 나는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네 포로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풀어 주었다.」스가랴 9:11 · 본디새김

여기서 ‘너’는 여성 단수로 표현되어 있으며, 앞서 불린 딸 시온 또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4:8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피를 뿌리며 하나님이 그들과 맺으신 언약의 피라고 선언합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규정하는 약속이며, 피는 그 언약을 확증하는 의식과 연결됩니다.

스가랴 9:11의 「네 언약의 피」는 이러한 출애굽기의 언약 의식을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 구절이 출애굽기 24장의 특정 의식만을 직접 가리키는지, 아니면 그 의식으로 대표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 전체를 가리키는지는 본문만으로 좁혀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들과 맺으신 관계가 구원의 근거로 제시됩니다.

창세기 37:24에서 요셉은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그곳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38:6에서는 예레미야가 웅덩이에 던져지는데, 그곳에는 물 대신 진흙이 있어 그가 빠져듭니다.

이러한 구덩이는 자유롭게 빠져나오기 어려운 감금과 위기의 장소입니다. 물이 없다는 사실은 상황의 황량함을 더욱 강조합니다. 포로 생활의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읽을 수 있지만, 11절이 정확히 어느 감옥이나 특정 포로 집단을 가리키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구덩이라는 이미지는 그들의 무력한 처지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그런데 12절은 이 사람들을 전혀 새로운 이름으로 부릅니다.

「희망의 포로들아, 요새로 돌아와라. 오늘도 내가 네게 두 배를 돌려주겠다고 알린다.」스가랴 9:12 · 본디새김

「희망의 포로들」이라는 표현은 역설적입니다.

포로는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돌아갈 길을 결정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권세 아래 놓여 있습니다. 오히려 돌아오라는 명령이 주어진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아직 회복되어야 할 현실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더 이상 절망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풀어 주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들은 희망을 가진 포로로 불립니다. 앞에서 두로의 요새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요새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두로의 요새는 그 도시가 스스로를 위해 쌓은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반면 12절의 요새는 하나님이 구출하신 사람들이 돌아올 안전한 곳으로 제시됩니다. 이 요새가 예루살렘이나 시온을 구체적으로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본문은 지명을 다시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피난처로서의 의미를 먼저 살피는 편이 적절합니다.

「두 배를 돌려주겠다」는 표현은 상실한 모든 물건을 정확히 두 배의 수량으로 계산하여 보상하겠다는 구체적인 경제적 약속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야 61:7에서도 수치와 부끄러움을 겪은 백성에게 두 배의 몫과 기쁨이 약속됩니다. 이런 문맥에서 두 배는 풍성한 회복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갇힌 곳에서 꺼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돌아가서 다시 살아갈 미래를 주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전쟁의 활을 없애신 하나님이 왜 유다를 활로 삼으시는가?

스가랴 9:13–15 본문 →

이제 처음에 제기했던 긴장이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10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병거와 말을 없애고 전쟁의 활이 끊어지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해 유다를 활처럼 당기고, 그 활에 에브라임을 메겼기 때문이다. 시온아, 내가 네 아들들을 일으켜 야완의 아들들에게 맞서게 하고, 너를 용사의 칼처럼 만들겠다.」스가랴 9:13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진을 치셨습니다. 이제는 백성 자체가 하나님의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로 묘사됩니다.

9–10절에서는 왕의 통치가 지향하는 평화와 그 통치의 성격이 중심입니다. 반면 13–15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는 적대 세력에 맞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장면이 중심입니다. 따라서 앞의 약속은 평화의 통치를 묘사하고, 뒤의 장면은 그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과의 충돌을 묘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 두 장면 사이의 정확한 시간 간격이나 사건의 순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떤 특정한 전쟁이 끝난 직후에 곧바로 영원한 평화가 시작되는 상세한 연대표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뒤에 나오는 전쟁의 이미지를 모두 비유적인 영적 싸움으로 바꾸어 버릴 근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실제 민족들의 대립을 가리키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평화를 약속하시지만, 그 약속을 적대와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선포하지 않으십니다.

유다와 에브라임은 과거에 나뉘었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의 전쟁 이미지 안에 묶으십니다. 서로 나뉘었던 백성이 하나님의 행동 안에서 함께 사용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들 위에 나타나고, 그의 화살이 번개처럼 나아갈 것이다. 주 여호와야훼가 뿔나팔을 불고, 남쪽의 폭풍 속에서 나아갈 것이다.스가랴 9:14 · 본디새김

번개, 뿔나팔, 폭풍은 모두 압도적인 하나님의 현현과 연결될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출애굽기 19:16에서는 시내산에 천둥과 번개와 뿔나팔 소리가 나타납니다. 사사기 5:4–5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진군하실 때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비를 내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박국 3:3–15에서도 하나님의 등장과 전쟁의 행동이 자연의 거대한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백성은 그 전투에 참여하지만, 장면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보호할 것이다. 그들은 먹어 치우고 물맷돌을 짓밟을 것이다. 그들은 마시고 포도주를 마신 듯 요란하게 소리칠 것이다. 그들은 대접처럼, 제단의 모퉁이들처럼 가득 찰 것이다.스가랴 9:15 · 본디새김

한 가지 읽기는 승리한 사람들이 적을 완전히 제압하고 승리를 기뻐하는 전쟁의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읽기에서는 포도주와 대접의 이미지를 승리의 잔치나 제의적 장면과 연결합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흘린 피를 제단에 바쳐지는 피에 비유한 매우 격렬한 묘사로 읽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해석들은 각각 본문의 일부 이미지를 설명하지만, 무엇이 대접과 제단의 모퉁이를 채우는지까지 원문이 분명히 말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하나로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장면은 폭력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그것을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이미지를 현대의 모든 전쟁이나 종교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원칙으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특정한 장면을 군사적 언어로 표현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야완은 그리스 세계, 특히 이오니아 계통의 그리스인들과 연결되는 이름입니다. 창세기 10:2에서도 야완은 여러 민족의 계보 가운데 등장합니다. 스가랴 1–8장의 배경은 페르시아 시대의 성전 재건기입니다. 그런데 9:13은 그리스 세계와의 대립을 말합니다. 하나는 예언이 장차 등장할 그리스 세력과의 충돌을 미리 내다본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9장 이후의 신탁이 책 앞부분과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형성되거나 편집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세력과의 갈등을 헬레니즘 시대 유대인의 역사와 연결하여 읽을 수도 있지만, 13절은 특정한 전쟁이나 왕의 이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어느 한 역사적 사건의 정확한 묘사라고 확정하는 것은 본문 자체가 제공하는 정보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15절의 ‘먹어 치우고’, ‘짓밟고’, ‘마시고’, ‘가득 찬다’는 표현들이 이어지지만, 무엇을 먹거나 마시는지 원문이 모두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먹어 치우는 모습은 적을 압도하는 강한 승리의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단의 모퉁이들처럼」이라는 말은 단순한 잔치로만 읽기 어렵게 만듭니다. 제단의 모퉁이와 제의용 대접은 제물의 피를 다루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레위기 1:5, 11).

전쟁의 끝에서 백성은 양 떼와 보석이 된다

스가랴 9:16–17 본문 →

13–15절에는 활과 칼, 번개 같은 화살과 전쟁의 나팔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그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인 그들을 양 떼처럼 구원할 것이다. 그들은 그의 땅 위에 높이 드러난 왕관의 보석들이기 때문이다.스가랴 9:16 · 본디새김

양 떼는 보호와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목자가 없으면 위험에 쉽게 노출되는 존재입니다. 반면 왕관의 보석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나타냅니다. 보호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귀하게 여겨지는 존재입니다.

조금 전까지 백성은 활과 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양 떼이자 왕관의 보석으로 묘사됩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결국 전쟁에서 얼마나 강한 무기가 될 수 있는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분이 돌보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존재입니다.

시편 23편에서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목자입니다. 이사야 40:11에서는 목자처럼 양 떼를 먹이시고 어린 양들을 품에 안으십니다. 에스겔 34장에서는 양 떼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지도자들이 책망받고, 하나님 자신이 양을 찾아 돌보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두로는 은과 금을 흙먼지와 진흙처럼 쌓아 두었습니다. 그 재물은 도시의 풍요와 힘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귀한 보석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을 나타냅니다.

처음의 재물은 인간이 모아 놓은 것이었고, 마지막의 보석은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17절에서 예언은 마지막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참으로 그는 얼마나 훌륭하며, 얼마나 아름다운가. 곡식은 젊은 남자들을, 새 포도주는 처녀들을 번성하게 할 것이다.스가랴 9:17 · 본디새김

마지막 절을 하나님의 훌륭하심에 대한 찬양으로 읽는 길과 회복된 땅의 풍요로움에 대한 감탄으로 읽는 길이 함께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뒤에 이어지는 장면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곡식은 사람들이 날마다 먹고 살아가는 양식입니다. 새 포도주는 풍요와 기쁨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젊은 남자들과 처녀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다음 세대가 살아갈 힘과 활력을 얻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7:13과 11:14에서도 곡식과 포도주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합니다. 요엘 2:19에서도 하나님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보내어 백성을 만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전쟁의 언어는 풍요의 언어로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에서 ‘높이 드러난(⁨נָסַס⁩)’ 것으로 옮겨진 히브리어 표현은 정확한 뜻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보석들이 빛나거나 높이 나타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원어만으로 그 구체적인 상태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7절의 「그는 얼마나 훌륭하며,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표현에서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의 소유 형태는 남성 단수입니다. 바로 앞에서 백성을 구원하시는 여호와야훼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감탄이 됩니다. 반면 이어지는 곡식과 새 포도주의 묘사를 고려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나 그 땅에 주어진 선함과 풍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투브(⁨טוּב⁩)는 선함이나 좋은 상태를 뜻하며, 문맥에 따라 좋은 소산과 풍요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평화를 말하는 왕과 싸우시는 하나님

스가랴 9:1–17 본문 →

스가랴 9장은 평화를 현실과 분리된 아름다운 이상으로만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인간이 쌓아 올린 교만한 힘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이 억압받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그분은 포로들을 풀어 주시고, 적대적인 세력에 맞서 싸우십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의 끝에 놓인 모습은 무한한 전쟁이나 정복의 확대가 아닙니다.

스가랴 9장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오는 왕을 보여 준 뒤, 번개 같은 화살과 폭풍 속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지나, 이렇게 마지막 장면에 도달합니다.

전쟁터가 아니라 곡식이 익어 가는 땅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구덩이에 갇힌 포로로만 불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아가는 양 떼이며, 그분이 귀하게 여기시는 보석들입니다. 그 땅에서 젊은 남자들은 곡식으로 힘을 얻고, 젊은 여자들은 새 포도주의 풍요 가운데 살아갑니다.

평화를 말하는 왕이 오는 이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이유가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다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